해방 후 왜곡된 역사 속에서, 지금까지의 한일 관계는 효용을 다했다. 그러나 예고된 갈등이었다. 일본은 구한말과 일제강점기 35년, 8.15 광복과 분단체제, 그 이후 70년의 강고한 구 체제 시스템 속에서 우리 내부 깊숙이 침투해 들어와 알게 모르게 생활의 일부가 되었다. 그 안에 우리 내부의 모순과 고뇌가 응축되어 있다. 이 모순과 고뇌를 탐구하려면 어떤 방법이 있을까.
한 개인사를 통해 시대와 사회를 비추는 거울 역할을 하는 것이 문학의 영역일 것이다. 그동안 우리는 외세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생존이 우선이었던 관계로 자기 자신을 앞세우지 못했다. 우리는 너무 쉽게 잊어버렸고 안일했다. 그러다보니 역사는 박물관에 소장된 문화재인 양 화석화되고, 현대의 역사는 더군다나 묻혔다.
기자 출신 이계홍 작가의 실록소설 '행군-어느 민족주의자를 위한 변명'은 그런 배경에서 나왔다. 이 소설은 2016년 10월호부터 2019년 6월호까지 문예월간 '월간문학'에 연재되었던 소설이다. 월간문학 연재를 마친 뒤 많은 부분을 수정 보완해 프레시안에 재수록한다.
이 연재물은 이른바 '팩션(Faction)'이다. 팩트와 픽션의 사이 어디에서 역사적 사실에 상상력을 덧붙인 '논픽션' 형식의 소설이다. 필자는 취재의 일환으로 일제강점기 말 일본 육사 출신 젊은 생도들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어지러운 시대, 그 안에서 제국주의 광풍에 휘말린 젊은이들의 시각을 잡아내려 했다. 이계홍은 "일본의 극우 정권이 일제강점기의 역사적 사실들까지도 왜곡하는 역사 모독에 대해 하나의 담론시장을 형성하자는 데 목적이 있다"고 했다. '행군-어느 민족주의자를 위한 변명'은 총 33회로 나뉘어 연재될 예정이다.(편집자)
제22장 어디가 숲인지 어디가 늪인지
“길자, 있수과?”
이른 새벽인데 누군가 밖에서 고길자를 찾고 있었다. 아직 잠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은 고길자가 밖의 인기척을 듣고 자리에서 일어나 봉창문의 작은 구멍을 통해 밖을 내다보았다. 일찍부터 체회돤 방어본능이었다. 봉당 앞에 허리 굽은 마을 어른이 불안한 모습으로 서있었다.
“아즈방, 호꼼만 이십서게(아저씨, 잠깐만 계세요).”
고길자가 그를 알아보고 옷을 주섬주섬 꿰입고 밖으로 나갔다. 그녀를 본 어르신이 우두망찰 서있었다.
“안녕하우꽈? 헌데 이른 새벽에 무슨 일로...”
어르신은 겁에 질려있었다.
“호꼼만 이십서게.”
그녀가 부엌에 들어가 물을 한 사발 떠와 어르신에게 내밀었다. 그가 사발을 받아 벌컥벌컥 마시더니 떠듬떠듬 말했다.
“참말로 기막히다. 지실(감자)밭에 나갔다가 중치(준치) 말린 것 좀 보러 우뭇개 쪽으로 갔는디, 갑작스리 내 귀 눈이 왁왁하우다(캄캄했다). 바닷가에 웬 개들허구 고냉이(고양이)들이 몰려들어서 모래밭을 헤집는데, 송애기(송아지)나 몽생이(망아지) 강생이(강아지) 죽은 것으로 알았지. 그런디 사람으 시체가 나오는 것이야. 어허, 이게 무슨 일이꽈? 산이영 바당이영 몬딱 사람의 시체다.”
“어떵하우꽈?(어떻다구요?). 설마 잘못 보았겠지요.”
“게메, 양 겅하믄 얼마나 좋겠수광(그러게, 그냥 그러면 얼마나 좋겠나). 시방 갑서양(가보라). 눈이 왁왁해서 더 이상 못봤는디 아무래도 동상만 같으다. 우뭇개 쪽으로 쭉 가당 물골 솔밭 쪽으로 가믄 되마씸.”
그는 이 말을 남기고 황망히 대문 밖으로 사라졌다. 자욱한 안개가 마당으로 스며들어오고 있었다. 적선의 진군처럼 스멀스멀 밀려오는 안개는 어느새 그녀 발목까지 찼다. 고길자는 옷을 갖춰 입는 둥 마는 둥 하고 밖으로 나갔다. 누가 일부러 심지도 않았는데 밭 끝머리에 갯무꽃이 무더기로 피어 있었다. 그것들이 안개에 젖어 하늘거리는데 웬지 처연해보였다.
“뭐가 있다고 이른 새벽에 마실나섰나. 부지런도 하시지.”
공연한 걱정이라며 속으로 중얼거리는데 그러나 마음 한켠으로는 불안했다. 꿈자리도 뒤숭숭하고, 실제로 요근래 하루가 편할 날이 없었다. 마을이 불타고 사람들은 쫓기고 끌려가고, 그런 과정에서 맞고, 이에 핏발 선 눈으로 다시 보복하는 일이 일상화되었다. 현호진과의 연락도 두절되기 일쑤여서 무엇 하나 되는 것이 없었다. 그만큼 경찰의 방어벽은 주도면밀했다. 갈수록 비집고 들어갈 수 없고, 이쪽의 청년ᐧ해녀 활동의 전략자산만 노출되었다. 산에서 내려와 간만에 집에도 들렀다. 그런데 아무도 없다. 모든 것이 헝클어지고 어수선한 기분이다.
생각이 깊어질수록 그녀는 웬지 두렵고 무서웠다. 망아지 새끼일 거야. 산짐승일 거야. 뜬금없이 상준이는 무슨.... 고길자는 박재동을 불러세워 바닷가로 나갔다. 바다는 장판처럼 잔잔하고 해무가 끼어서 더욱 평화로웠다. 물골을 타고 바닷물이 들어오는 모래밭 끝머리에 과연 개 몇마리가 무언가를 헤집고 있었다.
박재동이 앞서 나가 손짓과 발짓으로 개들을 물리치고 물체 가까이 다가가자 고길자도 뒤를 따랐는데, 그녀는 그만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나쁜 일은 불길한 예감을 적중시킨다. 사실은 마을 어르신도 시체의 주인공을 확인했지만, 차마 그렇게 말해주지 못했던 것인데, 그녀는 그럴 리가 없을 것이라고 믿었을 뿐이었다. 고상준과 임순심의 처참한 몰골이 모래밭에 드러나 있었다. 고길자가 모래를 움켜쥐며 절규했다.
“청년단 놈들이야. 그놈들이야. 죽일 놈들, 죽일 놈들.” 그러더니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결연히 소리쳤다. “죽여버릴 거야.”
“누나, 누나, 고정해.”
“난 살고 싶지 않아. 어떻게 키운 앤데. 어머니 아버지 가시고, 저것 하나 남았는데, 이제 뭘 바라고 사니. 물설고 낯설고 험한 일본 땅 벗어나서 내 고향 찾아온 꿈이 부모 잃고 동생 잃고, 고작 이것이냐? 못된 놈들, 못된 놈들....”
그녀는 어제 삼경쯤 야음을 틈타 강태실의 집을 다녀왔다. 집은 비워져 있었고, 사람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이상한 일이다, 여기며 돌아오는데, 우익 청년단원들이 샅샅이 마을을 쓸고 다니고 있었다. 긴급 첩보사항으로 마을 청년을 시켜 각 마을 청년회에 전통을 넣고 몰래 집으로 숨어들었다.
“가자. 그놈들이 시방 신양 고성 종달리를 훑고 있다.”
그녀가 앞장서 걸었다. 걷는다기보다 숨가쁘게 뛰는 발걸음이었다. 어느 빈 마을의 초입, 매캐하게 불탄 냄새가 퍼져오는 가운데 한 집에서 청년들이 술에 취해 곯아 떨어져 자고 있었다. 간밤에 작업을 마치고 전복, 문어, 소라 따위로 안주삼아 됫박 소주를 질탕하게 마신 끝에 퍼져서 자고 있는 것이었다. 고길자가 헛간에서 곡괭이를 찾아 움켜쥐고 방안으로 들이닥치더니 잠든 청년들을 향해 마구 내리찍었다. 그중 한 청년 두상이 쪼개지고, 다른 청년은 옆구리에서 창자를 쏟아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인지라 그들은 고스란히 당했다.
그러나 옆방의 청년들이 습격에 놀라 몸을 피하더니 그중 몇이 뒷방을 거쳐 달려들어서 그녀를 휘어잡았다. 동시에 곁의 청년이 곡괭이를 빼앗아 그녀를 쳤다. 이상한 소리를 내며 그녀가 고꾸라졌다. 청년들이 달려들어 각목과 총신으로 그녀를 누더기가 되도록 난타했다. 피와 살점이 벽에 튀겼다. 그래도 분이 안풀리는지 한 청년이 카빈총에 착검한 총신으로 그녀 가슴을 마구 찔렀다. 뛰어 들어오는 박재동을 쓰러뜨려 총개머리판으로 그의 옆구리를 강타했다.
“죽이지 마라. 생포해라.”
누군가가 외쳤다. 그들이 박재동을 꽁꽁 묶었다. 방안에는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이름은?”
“박재동입니다.”
“기밀 문서상에는 금융조합에 다니다 야산대가 되었군. 아주 악성인데? 사실인가?”
취조경찰의 어깨에 부착된 견장에 무궁화 두 개가 붙어 있었다. 경감 계급이 직접 취조에 참여하는 것은 보기드문 일이었다. 아마도 체포되어온 사람의 비중에 따라 직접 나섰거나 수사인력이 부족해서 나서는지도 몰랐다.
“나는 서울에서 파견된 박 경감이다. 신사적으로 나오는 혐의자에겐 그만큼 인격적으로 대한다. 너와 말씨름하고 싶지 않으니 순순히 대답하라. 이건 신사협정이다. 알았나?”
각오했다는 듯 박재동이 네, 하고 대답했다. 바로 옆방에서 날카로운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무엇에 찔리고 뼈마디가 꺾이는지 외마디 소리에 숨이 꺽꺽 넘어가는 소리가 났다. 사이사이 절규하듯 아아악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건너쪽 취조실에서는 남자가 엉엉 울면서 살려달라고 애걸하고 있었고, 다른 쪽 방에서는 혐의자가 개새끼야, 죽여라! 하고 발악하듯 소리지르고 있었다. 박재동은 겁나지 않았다. 체념했다기보다 모든 게 시시해보였다. 길자 누나의 죽음을 보고, 고상준 임순심의 주검을 본 뒤 이제는 모든 것이 하찮게 보였다. 무서울 것이 없었다.
“그래 넌 마르크스주의자군. 그래서 특별히 나에게 배정된 거야. 그래, 박재동이, 마르크스주의가 뭔지나 아니?”
박재동은 침묵을 지켰다.
“네가 대답하지 않으면 내가 말해주지. 소비에트를 비롯한 사회주의 국가는 혁명을 통해 평등세상을 만든다는 거지. 모든 사유재산을 몰수해 생산수단을 국유화하고, 국가가 운용하면서 중앙집권 경제체제를 유지한다는 것이지. 이것을 제주도에 접목시킨다 이거야. 공동생산하고 공동 이익을 취하고, 그게 공산주의 기본 이론 바탕이지. 사유재산과 자본주의를 부정하는 이념... 안그래?”
“난 그런 것 모릅니다.”
“그래? 하지만 내가 알고 있다. 너희들 내장부터 빨갛잖아. 무산자계급 운운하며 무장혁명, 무정부주의 어쩌고 공산세력을 확장시키려고 준동한 것, 모를 줄 알았나? 그래, 마르크스레닌주의가 지향하는 가치가 뭐냐.”
“잘 알지 못하지만,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중앙집권 경제체제는 인간의 자발적인 경제활동을 억압하기 때문에 실패할 것입니다. 그래서 지지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근원적인 욕망을 무시한 사회주의 경제 실험은 실패합니다.”
“너에게서 그런 말이 다 나오다니, 놀랍군.”
“그 이념은 생산성 저하로 이어지니까 내 사고와는 맞지 않습니다. 생산성 저하는 인간의 욕망을 잠재우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실패합니다. 그래서 지지하지 않습니다.”
“보통이 아닌데? 빨갱이들은 이론 무장이 잘 돼있다던데, 과연 그렇군. 체포되니 이제 벗어나보자고 공산주의를 비방하는 것 아니가?”
“평소 소신입니다.”“헌데 왜 그렇게 불만이 많나?”
“세상에 불만이 많은 것과 공산주의와는 상관이 없습니다. 더군다나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닙니다. 모순에 대해서 말할 뿐입니다. 정당하게, 정상적으로 살자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폭력적인 공권력이 평화로운 마을을 유린하지 말라는 것 뿐입니다.”
“유린?”
“그렇습니다. 제 친구가 청년단에 의해 살해되었습니다. 고길자 누나의 단 하나뿐인 남동생입니다. 고상준이란 그 친구가 여자 친구와 함께 바닷가를 산책하다 둘 다 비참하게 죽었습니다.”
“고상준은 낭만파더군. 일본군 위안부 출신 처녀와 열애중이었다며? 그 여자에게서 군표가 삼백 장이나 나왔다. 소용도 없는 걸 가지고 있더군. 그런 중에 그자가 마을을 순찰중인 우리 청년단원을 찔렀다. 그러면서 연애질이나 해? 갈보와 섹스하러 모래 사장으로 갔다는 놈이?”
“모욕하지 마십시오.”
“그게 모욕이라고? 정당한 수사 결과다.”“그녀는 갈보가 아닙니다. 잘못된 세상의 피해자입니다. 그리고 고상준은 정당방위입니다.”
“공권력에 대항하는 것이 정당방위?”
“권력을 나쁘게 사용하면 저항해야죠. 야만에 침묵하는 것은 비겁한 행동입니다. 지금 법은 약자들을 쪄누르는 흉기가 되고 있습니다.”
그는 할 말을 하겠다는 태도였다.
“그래서?”
“삼팔선을 나누는 남북 분단을 영구화하고, 미국에게 사대 의존하는 자들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그들은 안보 장사로 빨갱이 타령을 하며 양심세력을 잡아가두는데 우리는 결코 빨갱이가 아닙니다.”
“그러면 뭔가?”
“민족 아들일 뿐입니다.”
“니기 주장한다고 해서 민족의 아들이 되니? 니가 공산주의를 감추려는 것을 보니 역시 넌 레닌과 스탈린을 추앙하는 빨갱이야. 지금은 그저 살아보겠다고 마르크스레닌을 욕보이는 기회주의자고.”
“기회주의자는 아니지만 레닌과 스탈린을 환영하는 건 맞습니다.”
“그래, 이제 제대로 실토하는군. 그래서?”
“히로시마에 원폭이 투하됐다는 소식을 듣고, 스탈린이 일본에 대한 공격을 명령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우리는 고무되었습니다. 일본을 타격하는 자는 어떤 누구도 우리의 영웅이니까요.”
“그놈들이 만주 진격에 그치지 않고 함경도 경흥과 함흥으로 밀고 내려오고, 평양을 접수하고, 삼팔선에 이르렀다. 침략군이 아닌가?”
“미군과 합의한 것입니다. 미군도 그렇게 오라고 독려했습니다. 소련군에 비해 한달이나 늦게 들어와서 소련더러 일본을 몰아내라 했던 것이죠. 그들이 늦게 들어오면서 꼬이게 만들었습니다.”
“미군이 늦게 들어와서 꼬이게 했다?”
“그렇습니다. 더 일찍 들어오거나, 아예 들어오지 말거나. 들어왔다면 사사건건 흩트려놓지 말거나.”
“그건 무슨 논리냐.”
“소련과 야합해 경계선을 그어놓았으니 빨리 들어오건 늦게 들어오건 중요한 것은 아닐지 몰라도 우리에겐 엄청난 비극을 안겨주었습니다.”
“그 반대의 상황도 괜찮다고? 그러니 니들은 천상 빨갱이다. 소련군이 부산까지 진격해도 좋다?”
“저는 처음에 미소 양군이 우리나라를 해방시켜주는 군대로 알았습니다.”
“이 자식아, 전쟁의 열매는 힘으로 따지 않으면 맛볼 수 없어. 남에게 의존해서 해방을 구걸하는 민족주의자도 있나?”
박 경감의 말은 맞았다. 따지고 보면 그는 미국의 앞잡이었지만 말은 정확했다.
“현실을 직시해라. 우리편에 서면 넌 확실하게 미래가 보장된다. 그 좋은 머리로 입신 출세할수 있는데, 뭐가 부족해서 세포가 되었나. 단도직입적으로 묻겠다. 지금 전향서를 쓰겠나?”
박재동은 대답하지 않았다.
“조국은 너를 부른다. 여기에 자술서를 쓰고, 전향서에 서명하라. 그렇지 않으면 넌 청년단을 살해한 핵심 세포라는 혐의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골로 가게 되어있어. 죽지 않으려면 전향해서 너의 두뇌를 조국건설에 사용하기 바란다. 내가 상부에 보고해서 보석 조치하겠다. 이건 내 재량이다. 너를 보호하는 마지막 카드다.”
그때 경위 계급장을 단 경찰관이 불쑥 사무실로 들어왔다. 그는 무슨 시시껄렁한 농담 따먹기 하느냐는 투로 취조실을 어슬렁거렸다. 가슴에 부착된 명찰에는 최동칠이라고 이름이 박혀 있었다. 글자가 마모되어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이름을 식별하기가 어려웠다.
“지금 뭐하십네까.”
“전향서를 받는 중이야!”
“그러니까니 인테리 경찰은 중앙에서 근무해야 한대니까. 저놈들은 우리 청년단원을 죽인 놈들이야요. 그러고도 박 경감님을 갖고 놀고 있소. 그냥 쏴죽여도 시비걸지 못하게 되어있는 놈들이야요. 고런데 전향서란 말입네까. 갈아먹어도 시원찮을 놈을 전향시킨다고요? 감정노동으로 고민하지 마시라우요. 내가 알아서 하갔소.”
“전향시켜도 될 놈이오.”
“고따구 사치스런 이론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소. 퇴근하시오. 내가 알아서 처리하갔수다.”
얼굴이 흰 서울의 인테리 경찰은 전투 현장에선 쓸모짝이 없는 인간들이다. 제주 현실을 몰라도 너무 모른다. 그래서 그는 벌써 왕따를 당하고 있었다.
“잘들 해보시오!”
박 경감이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면서 문을 박차고 밖으로 나갔다.
“개새끼, 진창 속의 연꽃처럼 혼자 고고하려고 해! 전문학교 출신이면 출신이지, 지 혼자 고상한 척하면 떡이 나오네 밥이 나오네? 창백한 인텔리라는 것들 노는 꼬락서니란 게 개좆도 아니야.”
그래서 더욱 화가 치민다는 투로 박재동을 스치며 디립다 귓방망이를 휘둘렀다. 그리고 멱살을 쥐어잡더니 복도 끝 어둑한 방으로 끌고 갔다. 비릿한 피냄새가 역겨워서 박재동은 순간 구토증을 느꼈다. 씨멘트 바닥에는 물이 흥건히 젖어있었다. 실내 중앙에 고정된 철제의자가 놓여 있고, 그 옆에 기계장치가 갖춰져 있었다. 그가 말없이 박재동의 옷을 벗기더니 의자에 앉힌 다음 발을 묶고, 손을 뒤로 젖혀 의자에 묶었다. 철제 의자는 기계장치와 연결되어 있었다. 그가 박재동을 끝방으로 끌고 온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 방은 고문 설비가 갖춰져 있었다.
“니네들이 내 사랑하는 단원들을 죽였단 말이다. 내가 가장 신뢰하던 놈들이다. 그 아이들을 죽인 맛이 어떠하다는 것을 똑똑히 보여주마.”
그가 박재동의 얼굴을 뒤로 젖혀서 수건을 씌운 뒤 옆의 바케쓰 물을 얼굴에 쏟아부었다. 물이 따갑고 매워서 숨을 들이킬 수가 없었다. 그것은 고춧가루를 푼 하수도 물이었다. 숨이 막히자 물을 마시고 마는데, 견딜 수가 없었다. 아아아, 온 몸을 떨면서 고개를 흔들지만 그럴수록 매운 물은 코로 입으로 스며들었다.
“테러분자들을 찾아내야 하지 않가서? 어디에 숨갔나.”
그러나 대답을 들으려고 한 말은 아니었다. 그냥 말해본 것 뿐이었다. 그는 계속 고춧물을 퍼부었고, 박재동이 푸푸 물을 뱉어내며 몸을 뒤틀다가 밑으로 굴러 떨어졌다. 그가 박재동을 세우더니 도르래 장치가 되어있는 셔터를 누르자 철제 의자가 에스컬레이터처럼 마루장 밑으로 내려갔다. 마루장 밑에는 물웅덩이가 있었다. 시금내가 진하게 풍기는 것으로 보아 하수가 흐르는 개천인 모양이었다. 기계장치가 거듭 작동되자 박재동의 의자가 물속으로 잠겨들어갔다. 얼굴이 잠기고 머리끝까지 수면 밑으로 잠겼다. 그는 첨벙거리며 발악했지만 그럴수록 물만 들이켰다. 물 속에서 몸부림을 하며 허우적거리면 의자가 슬며시 수면위로 올라왔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다시 물속에 잠기고, 그는 발버둥을 치면서 닥치는대로 물을 들이켰다. 삼십여분 그렇게 잠겼다 떠오르자 그는 늘어졌고, 배는 동산만큼 불러왔다. 이윽고 의자가 마루장 위로 올라와 멎자 최동칠 경위가 물었다.
“쥐도새도 모르게 가게 돼있디. 한번더 뺑뺑이 돌려주간? 이번엔 통닭구이야. 맛나게 구워지는 통닭구이디. 전기선 넣어서 돌려주지.”
“살려주십시오.”
“고렇디. 진작에 고렇게 말해야디. 하지만 나두 받는 거이 이서야 살려주지. 어서 말해봐.”
그러나 정작 뭘 말하라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머뭇거리자 주먹뺨이 올라왔다.
“간나새끼, 너희 야학반 놈들 야밤에 종횡무진 누빈 상황을 내 모를 줄 알았네? 현호진이란 자, 김달삼과 김익창 연대장하구 접선하는 거하구, 부산 5연대에서 파견돼온 오민균 대대장이란 자하구 접선하는 거이 우리가 모르는 것 같네? 고걸 니 입으로 말해보란 말이다.”
금시초문이었다. 어떤 것도 그는 알지 못했다.
“모릅니다.”
“고렇디. 니네는 모른다는 기 답이디. 하지만 보자. 정말 모른다는 게 답이네?”
그러나 그는 힘차게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모릅니다.”
“모르면 죽어야디. 모르는 놈이 기밀을 알았댔으니까니 저승밥이 돼야디. 하지만 네놈이 모를 리가 없어. 비밀정보는 주모자끼리 공유하는 거 아니간?”
“모릅니다.”
“니네들은 언제나 그렇게 말하디. 정직하고 진실한 척 하디. 하지만 까놓고 보면 말짱 거딧말이디.”
그러면서 그가 어두운 구석을 향해 소리쳤다.
“이 새끼 소시쩍 감자 훔쳐먹은 것까지 깡그리 토설하도록 조지라우.”
그제서야 어둠 속에 쥐죽은 듯이 의자에 앉아있던 경찰 보조 둘이 나타났다. 박재동은 그들이 구석진 자리에 있는지조차 몰랐다. 그들이 박재동 곁으로 다가와 박재동의 양다리에 각목을 끼우더니 힘껏 옆으로 제꼈다. 우두둑 뼈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아아악! 그는 비명을 지른 뒤 정신을 잃었다. 고통 속에 까마득한 동굴 속으로 빠져드는 것 같은데, 어느 순간 정신이 들었다. 그들 중 하나가 바케스의 물을 그의 얼굴에 뒤집어 씌우자 그새 정신이 돌아온 것이었다. 그들은 뭐라고 묻는 법이 없었다. 고문만을 위해 존재하는 기계처럼 보였다. 그들이 그의 손목을 잡더니 손톱에 대침을 찌르기 시작했다. 아아악 아아악... 궁둥이를 들썩거리며 숨넘어가는 소리를 지르지만 소용이 없었고, 두 경찰 보조는 무표정했다. 그의 손끝에서 핏물이 떨어져 바닥을 적셨다.
“자식이 생각보다 대가 약하군.”
최동칠이 손수건만한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햇살이 비치는 의자에 비스듬히 앉아 담배를 맛있게 빨면서 자신의 손톱을 줄톱으로 다듬으며 남의 말처럼 투덜거렸다. 한참 후 그가 손목시계를 들여다 보더니 밖으로 나가면서 말했다.
“마무리하라우. 난 저녁 파티가 있다.”
최동칠이 밖으로 사라졌다. 그런데도 젊은 경찰들은 알겠다는 것인지 모르겠다는 것인지, 여전히 묵묵히 하던 일을 계속했다. 의자에 묶어놓고 고무 호스를 그의 입에 쑤셔넣더니 배가 터질 때까지 물을 먹였다. 뒤이어 천장 들보에 줄을 잡아당겨 몸을 매달아놓고 쇠좆매로 그의 얼굴과 몸뚱이를 가격했다. 쇠좆매가 떨어질 때마다 그의 얼굴과 등짝이 죽죽 줄기를 긋고 자국이 시뻘겋게 돋아났다. 쇠좆매는 소의 성기를 말린 것이었다.
거꾸로 매달린 그의 입에서 끊임없이 물이 쏟아져 나왔다. 물이 거의 쏟아져나왔을 때쯤 그는 숨이 멎었다. 두 경찰이 들보에서 그를 끌어내려 구석에 쳐박았다. 정해진 절차처럼 시신 처리는 다른 경찰보조원이 들어와 처리했다. 그들은 여전히 말이 없었고, 늘 해오던 것처럼 익숙하게 일을 처리했다.
공포의 트라우마
며칠 후에도 김익창이 오민균을 불러내 한라산을 올랐다.
“내가 그 자를 만나려는 이유가 무엇인 줄 알겠나?”
김익창이 폭도대장과의 접선 이유를 물었다. 오민균이 생각하더니 대답했다.
“국가에 대한 충정 때문입니다.
“국가에 대한 충정? 그렇게 거창한 건 아닐세. 산으로 들어간 사람들, 모두가 다정한 내 이웃들 아닌가. 동포들이란 말일세. 단순히 무 자르듯 양민, 폭도, 빨갱이, 구분할 수가 없어. 마구잡이로 몰아붙이니 도망가 숨고, 그러다 보니 폭도가 돼버린 거야. 상호 경계가 모호해. 그러니 희생이 크지. 김달삼을 만나려고 한 것도 그 때문이야. 그 길이 옳다고 믿지 않나?”
“그 자야 각하를 만나고 싶어하겠죠. 궁지에 몰리고 있으니까요.
“궁지에 몰리고 안 몰리고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안전하게 마을 사람들을 돌아오게 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나?”
순간 오민균 자신도 폭압구조의 틀 속에 갇히지 않았나 생각했다. 폭력을 당연한 듯이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너무 멀리 와버렸어. 대대장 생각은 어때?”
“바위 틈에서 나오게 해야 합니다.”
“그렇지. 그들은 산 짐승이 아니니까.”
“원한을 극복하려면 수십년, 수백년, 아니 영원히 회복 못할지도 모릅니다. 전쟁은 단순하지 않죠. 인간의 교만과 편견과 광기가 수많은 생명을 밟는데, 죽는 자나 죽이는 자의 희생은 물론이고, 그 가족 모두 트라우마 속에 나머지 생을 살게 될 것입니다. 단지 그 자리에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죽고 죽인다는 건, 천번만번 생각해도 씻을 수 없는 치욕이자, 고통이자, 비극이죠.”
“그렇지. 근본에 대한 성찰이 없는 만행.... 불행히도 우리에겐 양심이 배아되지 못했어. 개인행위의 최후의 심판자인 양심이 성장하지 못하도록 구조가 만들어져버렸어. 폭압의 식민지 권력이 그렇게 만들고, 거기 가담한 자들이 그렇게 몰아갔어. 실상은 허상인 허깨비 장난을 하는 동안 교만이 양심을 압도해버렸어. 일제가 가르치고, 거대 기득권층이 형성되었지. 인간의 품위, 자존, 명예, 공동선을 무참히 밟는 세상이 되어버렸어.”
“인간 양심으로 사는 세상이 아니라는 뜻이군요.”
“다 그렇다는 것은 아니지만 힘 가진 자들이 힘을 잘못 사용하고 있어. 나도 승리를 목표로 한 전사지만, 지금 적과 싸우는 것이 아닐세. 그래서 수치스럽네. 무지한 백성을 상대로 이기는 전쟁이 무슨 의미가 있나. 그들이 우리가 격멸할 적인가. 싸울 가치가 있는가. 한겹 돌이켜보면 무망한 짓이지 않나? 그렇게 안해도 권력을 얻지 못하나? 긴 호흡으로 보면 우주의 운행이라는 것이 한 치의 오차 없이 돌아가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지. 역사의 진행도 마찬가지야. 흐트러짐없이 운행하고 있네. 그러면 추후 무엇으로 이 비극을 변명하고 감당하려고 하지? 세상을 흔든 네로 황제도, 히틀러도 결국 망하잖아. 오명만 남기고 멸망하고 말잖나.”
오민균이 산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여름으로 접어든 산이 녹음으로 풍성해보였지만, 그런 것들조차 웬지 슬퍼보였다.
“내 뜻이 이러하니 전달하게. 군말없이 협상에 임하라고. 조건없이 받아들이라고. 그렇지 않으면 처참한 결말이 온다고. 현호진이가 김달삼 브레인 맞는가?”
“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분명히 할 게 있습니다. 군정관이 이 문제를 승인했습니까.”
“미군정 책임자로서 명령한 것일세. 맨스필드는 믿을만해.”
“하지만 정상 라인을 타고 내려온 지침인지를 살펴야 합니다.”
그는 연대장이 쉽게 낙관하고 있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공명심에 불타 과욕을 부리는 것이 아닌가 우려되었다.
“내가 처음 9연대 부임해올 때, 나는 부연대장이었지. 어느날 맨스필드를 방문해서 도내 상황을 브리핑했네. 그때부터 친교가 이루어졌어. 그는 내 정보가 신뢰할만하다고 평가해주었어. 그리고 날 연대장으로 진급시켜 주었지. 유약한 것 같지만 힘을 쓸 때는 쓰네. 나와는 좋은 관계야.”
그러면서 맨스필드 군정관을 만나 논의한 도내 상황을 설명해주었다.
미군정은 조선 민족의 역사와 일제의 억압 통치의 구조를 검토하지 않고 경찰조직을 치안유지의 중심에 세운 게 문제다. 4.3사건 발생의 원인은 단순하다. 경찰이 비행을 저지르는 서북청년단을 비호함으로써 긴장이 격화되었다. 청년단은 금품 갈취와 폭력, 부녀자 강간을 일삼았다. 주민들이 경찰에 고발하고 항의하면 은폐되거나, 도리어 고발자를 억압했다. 중소형 상선들이 일본 등지에서 사들인 물품을 밀수품이라고 압수하고, 선주와 상인을 잡아가두었다. 상부상조하며 평화롭게 사는 고을에 탄압과 착취가 자행되니 주민들이 반발했다. 따라서 9연대의 작전계획은 ①제9연대가 진압의 책임을 지고 ②폭도들은 국방경비대 군인을 적으로 삼지 않으니 경비대가 경찰과 주민의 중간에서 쌍방을 격리시키고 ③일정한 냉각기를 가진 후 범법자를 색출하여 처벌대상은 처벌하고, 민심을 안정시킨다.... <김익렬의 ‘실록 유고’ 중 일부 발췌>
이렇게 보고하자 맨스필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연대장 각하의 분석에 동의하오. 합리적이오. 이 전쟁은 승리하더라도 어떤 누구로부터도 환영받지 못하는 전쟁이오. 외교 교서의 기본 지침 중 하나가 ‘자국민을 비방하고 조롱하는 외교관은 절대로 상대하지 말라’고 했소. 그 사람은 언제든지 조국은 물론 우방국도 배신할 사람이라고 보기 때문이오. 자국민을 탄압하는 자는 더 말할 나위가 없소. 어느 누구로부터도 환영받지 못할 거요. 그래서 공존의 길을 찾아야 해요. 폭도사령관과 연락을 취하시오.”
김익창은 그 지시를 이행하고자 오민균을 산으로 불러낸 것이다.
“경무부가 문젤세. 우리 계획을 비틀어버릴 수가 있네. 그들은 강경 기조야. 하나부터 열까지 소탕작전이야. 동족이 동족을 살해하는 비극을 꾸미지.”
이런 가운데 협상파는 밀리고 있다. 지역 유지들이 나서지만 위험한 도박을 하거나 기회주의자로 낙인찍힌다. 미온적으로 대응하니 적에게 시간만 벌어주고, 국면을 어렵게 만든다는 비판만이 돌아온다.
“그렇다고 가만 있으면 되겠는가. 맨스필드 같은 사람이라도 곁에 있으니 활로를 찾아보자는 거지. 결단력이 부족하긴 하지만, 그런 사람이 곁에 있다는 것도 우리에겐 행운이야.”
“경찰이 강경하다는 게 이해할 수 없습니다.”
“굴복시켜야 하고. 쓸어버려야 한다는 복수심, 청소 전략.... 뒤로 물러서 있어야 할 사람들이 전면에 나서니 역사의 역설이야.”
그가 한숨을 쉬고 난 뒤 다시 말을 이었다.
“맨스필드는 경찰 정보가 민심과 동떨어진 것이어서 짜증난다고 했네. 우리 판단이 일치했으므로 작전계획을 수립하기가 수월하다면서 내 방침대로 책임을 지고 양민과 폭도를 하산시킨 뒤, 범법자를 색출하여 처벌하고, 민심을 안정켜야 한다는 지침을 준 것이야.”
“잘 알겠습니다. 다녀오겠습니다. 필요하다면 군정장관도 만나고 오겠습니다.”
“맨스필드는 일정이 잡힌 뒤 만나도 늦지 않아. 다만 기밀이 누설되지 않도록.”
“알겠습니다.”
“우리가 기로에 섰다는 점 명심하게. 난 역도도 애국자도 되고 싶지 않네. 다만 인간이 되고 싶을 뿐이야.”
산 아래 펼쳐진 바다가 햇빛을 받아 빛나고 있었다. 산 능선의 숲들이 싱싱하게 하늘거렸다. 그새 잡은 연대장의 옆구리에 꿰찬 수꿩의 색깔이 찬란해보였다.
상품과 밀수품의 차이
“왜 이렇게 예고도 없이 찾아왔어요?”
현호영이 마당으로 달려나오며 반갑게 오민균을 맞았다. 풍금소리가 울려퍼지는 가운데 아이들의 노랫소리와 재잘거림이 흘러나왔다. 현호영은 전에 보던 때보다 밝고 살이 더 오른 듯했다. 그래서 그런지 고아원도 생동감이 있어보였다.
“아버님께 인사 드리려구요.”
“네? 왜 갑자기? 아버님은 지금 불편하셔요. 올케 언니가 행방불명이 된 지가 꽤 됐어요.”
하지만 그녀는 모처럼만에 설레는 눈치였다. 오민균을 보면 그녀는 가슴이 부풀었다.
“마무리하고 나올 게요.”
그를 마당에 세워놓고 현호영이 교실로 들어가더니 잠시 후 외출복으로 갈아입고 나왔다. 연한 연두빛 바탕에 물방울 무늬가 진 원피스 차림이었다. 푸른 수의(囚衣)같은 제복을 입은 것과는 아주 대조적이어서 그는 한동안 그녀를 눈부신 듯이 바라보았다. 어떻게 저런 여자에게 슬픔과 고통이 존재할까. 길을 걷자 그녀가 그에게 팔짱을 걸었다. 그러다가 팔짱을 풀고 하늘거리듯 깡총 걸음을 걸으며 룰루랄라를 외쳤다. 그런 모습이 그의 가슴을 저며왔다. 그는 고향에 약혼녀를 두고 왔다. 만약에 이런 사실을 호영에게 고백한다면? 생각만 해도 아찔했다. 그래서 그냥 이대로 가기로 한다.
현호영의 집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아담한 돌담을 끼고 작은 물이 흐르는 개천을 건너자 그녀 집이었다. 정원엔 활엽수와 관엽수들이 울창하고, 꽃들이 화사하게 피어있었다. 구실잣밤나무를 위시하여 녹나무과 등의 난대림식물이 알맞게 자라서 집은 숲속에 묻혀있는 듯이 보였다. 육지와 다른 특수한 지형 조건과 기후 때문인지 아열대성 식물분포를 보여주고 있어서 이국적 풍치를 더해주었다. 오민균은 정원을 통해 이 집의 정서를 엿볼 수 있었다. 현호영이 현관으로 들어서자 응접실에서 남자들의 두런거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손님이 왔나 봐요.”
그녀가 속삭이고 오민균의 팔을 잡고 안채의 복도를 지나 끝 방으로 갔다. 그녀 어머니가 천장을 바라보며 침대에 누워있었다. 손에는 묵주가 들려있었다.
“엄마, 오 소님령님 왔어요.”
그러자 김혜자 여사가 반쯤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어서 와요.”
오민균은 김여사를 향해 깍듯이 거수경례를 붙이고 그 자리에 섰다.
“거기 소파에 앉아요. 아이에게서 얘기 들었어요. 아이가 너무 좋아해서 탈이에요. 여자가 먼저 나대면 빈충맞는데....부모님은 고향에 계시고?”
오민균이 소파에 앉으며 대답했다.
“네. 충청북도 청원 고향에 살고 계십니다. 여덟 동생들 뒷바라지에, 농사일에 바쁘시죠.”
“그래, 그 많은 식구에 힘드시겠군. 좋은 세상이 와야 하는데... 내 몸이 성치 못하니 도움이 못되고, 애아버지가 너무 수고가 많아요.”
그녀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엄마, 응접실에 누가 왔어요?”
“누가 왔단다. 오빠 일 땜에 청년단 사람들을 만나는 모양이다.”
청년단 사람? 순간 오민균의 뇌리에 뭔가 스쳐지나가는 것이 있었다. 현호진 때문인가? 읍내의 청년단 사람이라면 혹시 사진봉?
“그 사람들이 또 아버지를 괴롭히는 거예요?”
“그런 소리마라. 오빠를 어떡하든 구해야 할 것 아니냐. 올케도 찾아야 하고.”
김여사가 울상을 지었다. 울상은 이미 그녀의 인상이 되어있는 듯했다. 자신의 신병과 자식의 문제로 늘 슬픔과 우울을 달고 있는 나날이니 얼굴 표정이 그늘이 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응접실에서 사람들이 나가는 소리가 났다. 손님들이 나간 뒤 그녀 아버지가 헛기침을 했다. 들어와도 좋다는 신호였다. 응접실로 들어서자 탁자에 다기들이 놓여있고, 잿털이에 담배꽁초가 수북했다.
“아버지, 오 소령님이 인사드리러 왔어요.”
현문선 사장이 현호영 곁에 서있는 오민균을 이윽히 바라보았다. 오민균이 부동자세를 취하고 거수경례를 올렸다.
“얘기 들었소.”
그는 엷게 웃었다. 그는 일찍이 일본으로 건너가 대학을 나오고 고향에 돌아와서 상선을 운영하는 사업가로 변신해 부를 일구었다. 수삼년래엔 더 많은 경제적 특수를 누렸다.
“아버지, 오 소령님 어때요?”
그러자 현문선 사장은 빙그레 웃기만 했다. 오민균이 현호영의 집을 찾은 이유를 설명했다.
“현호진 선생님 거처지를 알고 계십니까? 야산대 지휘부에 소속해 있다는데...”
현문선 사장이 얼굴을 찌푸리는 듯했다. 그리고 굳게 입을 다물었다. 피해의식이 몸에 밴 듯한 모습이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도우러 왔습니다.”
놀라는 아버지를 바라보는 현호영도 놀라고 있었다. 그녀를 찾아온 것으로 알았는데, 그는 오빠의 행선지를 알려고 찾아온 것이었다. 오빠 행적은 그녀 자신도 알려고 하지 않았고, 알 필요도 없었다. 만에 하나 잡혀가 심문을 받으면 고문을 못이긴 나머지 도리없이 불어야 한다. 그런 것에 대비하기 위해서도 애당초 알려고 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 사람이 오빠 행방을 묻는다. 입도 뻥긋하지 않다가 아버지를 만나 다짜고짜 묻다니. 순간 그녀는 어떤 배신감을 느끼고 오민균을 곁눈으로 흘겨보았다.
“어르신, 제 말씀 잘 들으셔야 합니다. 현호진 선생님을 만나야 일이 풀릴 수 있습니다.”
현문선 사장이 현호영을 건너다 보더니 눈짓을 했다.
“그래요. 호영씨, 잠깐만 나가 있어요. 있다가 시내 나가서 맛있는 것 사줄 게요.”
그녀가 못미더운 표정을 짓다가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내가 금방 청년단 사람들을 만난 건, 아무래도 그들이 아들을 잡아서 요절낼 거라고 보았기 때문이오. 그래서 손을 써보는 거요. 며느리 행방도 그들이 알 것이고...”
현문선 사장이 담배를 찾아 입에 물었다. 그의 입술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오민균이 탁자에 놓인 라이터를 집어들어 불을 켜서 그의 담배에 갖다 댔다.
“남들이 아이를 의인이라고 하지만, 부모 가슴을 새카맣게 타게 만드는 처사는 죄인이오. 대세는 기울었고, 피해를 막아야 하니 달리 방법이 없소.”
“어르신, 말씀 놓으십시오. 제가 거북합니다.”
그제서야 현 사장이 자세를 고쳐 앉더니 가느다랗게 웃었다.
“그럼 말 놓겠네. 내 아이를 좋아하는가.”
“좋아합니다.”
그가 거리낌없이 대답했다.
“좋아하는 것에도 증명이 필요하지. 목적없이 좋아한다는 건 불확실한 시대일수록 위험하니까.”
현문선 사장도 어떤 확신을 갖지 못하고 있었다. 사는 것이 절망적이어서 그렇게 물었을 뿐이었다. 이런 난세에 그 어떤 것도 확실한 것이 없다. 자기 말이 사사롭다고 여겼던지 그가 말을 바꾸었다.
“어떻게 내 아들이 야산대 지휘부에 있다는 것을 알았나.”
“제주도내에서 폭도대사령관과 동창 관계를 유지하는 사람은 현호진 선생 외에 없습니다.“
“폭도대란 말은 적절치 않네.”
그는 분명했고, 오민균은 속으로 아차, 했다. 연대본부에서 항용 쓰던 용어를 기계적으로 사용했을 뿐이었는데, 현문선 사장은 용어 하나에도 신경을 쓰고 있었다. 제주도 사람들의 심중을 헤아릴 수 있었다. 자식에 대한 신뢰가 그만큼 크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저는 밀사 역으로 현호진 선생님을 만나야 합니다.”
“밀사? 그게 뭔가.”
“이유는 아드님께 직접 말하겠습니다.”
“나한테 말하지 않고 만나게 해달라는 것은 나를 믿지 못하겠다는 뜻 아닌가. 그런 사람에게 아들의 행선지를 어떻게 말해줄 수 있는가.”
그제서야 오민균은 목소리를 낮추어서 또박또박 말했다.
“말씀드리지 못한 것을 이해해 주십시오. 아시게 되면 더 혼란스러워질 수 있습니다. 어떤 선입견을 가지시면 어르신께서도 고민하시게 됩니다.”
“누구를 위한 일인가.”
“모두를 위한 일입니다.”
“그러나 나는 알지 못하네.”
현문선 사장과 오민균 간에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그는 오민균이 구체적 계획을 말하기 전까진 대답하지 않겠다는 태도로 무겁게 자리에 앉아있었다. 도리없이 오민균이 입을 열었다.
“미군정이 우호적일 때 사태를 종식시켜야 합니다. 저희 군은 엄정중립인데, 그런 우리 군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세력이 있습니다. 상세히 말씀드리지 못한 점 이해해 주십시오.”
“토끼몰이로 무장자위대 몰아붙여서 토벌하고, 그 공명심으로 입신 출세하려고 하는 자들... 군이 회담을 성사시키더라도 그 세력들이 틀어버릴 텐데... 군을 장난질하는 무리들로 몰아붙이면 군이 더욱 설 자리가 없을 텐데....”
그는 사태를 꿰뚫고 걱정하고 있었다.
“그걸 알고 저희도 속전속결로 성사시키려고 합니다.”
“그것이 덫에 걸릴 수 있네. 나이브한 생각일 수 있어. 힘있는 자들은 어떤 미션을 걸어도 성공하는 거야. 그러나 힘이 약한 자는 어떤 정당한 행동을 해도 상대의 의도대로 가고 마네. 그러니 상대방은 언제나 이기고, 약자는 언제나 밟히지. 정의와는 상관이 없어. 그게 현실이야.”
“그래도 나서야 합니다. 이건 미군정과 협의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오민균에게 다가오더니 그의 손을 굳게 잡았다.
“이젠 다 듣지 않아도 됐네. 자네 같은 사람이 조국의 군인이라는 것이 자랑스럽네. 지금 도민들이 외롭네. 사실 나는 내 아들의 행방을 모르네. 알려고 하지도 않았네. 알면 피차 어려워지니까. 대신 자네가 찾아주면 얼마나 좋겠나.”
그의 눈에 눈물이 글썽였다.
“어르신,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저녁 먹고 가게.”
오민균의 가슴으로 뜨거운 것이 차오르고 있었다. 모처럼 먹어보는 집 밥. 그를 식구로 받아들이겠다는 뜻이란 것을 그는 알았다. 하지만 지금 그럴 시간이 되지 못했다.
“고맙습니다만, 갈 곳이 있습니다.”
“어디로 가려고?”
“청년단입니다.”
“청년단은 왜?”
“그것까지 말씀드려야 합니까?”
“그래 신중해서 좋네. 나에게 비밀을 말해주는 것도 사내답지 못하지. 더 이상 묻지 않겠네. 다만 성공해야 하네.”
“유월 이내 타결해야 합니다. 녹음이 우거지면 상호 시간이 없습니다.”
“게릴라전으로 들어가면 더 힘들어진다? 그래서 유월 이내에? 과연 시간이 없군. 어서 가보게. 일하다 보면 용처가 있을 거야. 용돈 좀 줄까.”
그가 서랍을 열었다. 오민균은 거절했다.
“그걸 쓰고 다니면 더 오해를 받습니다.”
현 사장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따뜻한 시선으로 오민균을 바라보았다. 신뢰가 가는 청년이었다.
“읍내를 관할한 사 단장이란 자가 다녀갔네. 아들도 그렇지만 며느리가 불안하이. 내가 그를 불렀지만 그 역시 섭외부장이라는 자가 행방불명이 됐다면서 염탐하러 왔네. 그자들이 아들 잡을 속셈으로 계속 뒤를 캐고 있었던 모양이야. 우리 애 현상금이 김달삼, 조몽구 급이래나 어쩐다나...”
그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얼굴에 깊은 슬픔이 어렸다.
“그자들이 먹고 살겠다고 해서 모금도 해주고, 사재도 털어주었는데 한 녀석이 다녀가면 다른 자가 와서 협박을 하는 걸세. 당연히 받아가야 할 것처럼 권리가 되어버렸네. 밀무역을 한다고 협박해서, 그런 말 들으니 더 이상 지원해줄 수가 없었네. 그런 오해를 받고 지원해주면 부당한 행위를 보아달라고 인정하는 셈이니까. 그랬더니 배를 가져갔네. 그걸 아들이 용납할 수 없었네. 그런 과정에 가르치는 학생이 삐라를 뿌리다 경찰서에 잡혀서 죽어 나왔네. 온 몸이 피멍투성이가 되고 머리가 깨지고, 다리가 부러진 몸을 받아오니 현호진 선생이 가만 있을 수 없었다네.”
그는 아들을 현호진 선생이라고 불렀다. 아들을 깊은 신뢰와 함께 자부심으로 받아들인다는 뜻으로 그는 받아들였다.
해방이 되자 제주 선주들이 재일 귀환동포의 인력수송과 재산 운송으로 호황을 누렸다. 귀국선 우키시마호가 의문의 폭발사고로 수장된 이후 귀환자들은 경험많은 제주 선박들을 주로 이용했다. 그런데 서북청년단이 제주의 선박들을 단속하기 시작했다. 들여오는 물품을 압수하고, 항의하는 선주를 경찰서로 끌고가 구타했다. 각 항은 자유항 비슷하게 선박들이 자유롭게 운항하면서 상품들을 거래했는데, 이것들을 세관 아닌 경찰과 서북청년단이 압수하고는 매도하여 돈을 버는 것이다. 일종의 약탈행위였다.
거래선이 부산‧여수‧목포 항으로 변경되고, 제주도에서는 무역이 지하로 잠복하기 시작했다. 경찰은 청년단을 앞세워 읍내는 물론 산간마을까지 단속에 나섰는데, 어느 시점부터 그것이 일상 업무가 되었다. 압수의 강도는 날로 더했고, 집에서 사용하는 쓸만한 그릇 따위도 밀수품이라고 매겨 압수하거나 벌금을 부과했다. 주민들은 일제 치하보다 더한 식민지생활을 살고 있다고 울분을 토로했다.<김익렬의 ‘실록유고’중 일부 발췌>
“오 소령의 어깨가 무겁겠군.”
대문 밖으로 사라진 오민균을 향해 현문선 사장이 나직히 뇌었다.
“賣國 單選單政을 결사 반대!”
제주도 미군정관 사무실에 미군측 주요 간부들과 한국측 간부들이 모였다. 회의는 미24군단 작전참모인 슈미트 중령이 주재했다. 참석자는 맨스필드 제주군정장관과 군사고문관 부케넌 중령, 제주도 파견 병력을 책임지고 있는 제라미 소령, 제주 CIC책임자 카터 소령이었다. 한국측에서는 새로 부임한 문치성 지사, 이윤배 경찰서장, 사진봉 서청 단장이었다. 슈미트중령은 주한미군사령관의 지시 사항을 직접 가져왔다.
“모든 종류의 시민 무질서는 종식되어야 한다는 것이 사령관의 뜻이오. 게릴라 활동을 약화시키기 위해 국방경비대와 경찰 사이에 확실한 협력이 이뤄지도록 해야 합니다. 경찰과 청년단의 활동은 고무적인데, 군은 별개로 움직이니 유감입니다. 분발이 요구됩니다. 그러나 미군은 여기에 개입하지 않도록 합니다.”
시민 무질서는 종식되어야 한다는 것과 게릴라 활동을 신속히 약화시켜야 한다는 것은 토벌해야 한다는 다른 표현이었다. 슈미트 중령이 제주 CIC책임자 카터 소령을 향해 물었다.
“그동안의 정보 보고가 신뢰할만 하오?”
카터 소령이 각반에 철해진 서류를 펴더니 설명했다.
“제주 동남방 산간마을에 경찰 병력과 청년단을 투입했습니다. 바다로 향한 모든 출구와 도로를 봉쇄하고 마을로 통하는 출구도 봉쇄하고 가옥을 수색하여 숨겨진 무기, 전선 절단기 등을 찾아내고, 또 용의자, 단체조직가, 공산주의자를 색출했습니다. 이중 특이한 사항은 마을에 젊은이는 없으며, 밖에서도 눈에 띄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첩보원이 마을 여인들에게 젊은이들이 어디 있는지 물었을 때, 그들은 세 종류의 대답을 했습니다. 첫째 나의 남편은 죽었다, 둘째 나의 남편은 본토에 있다, 셋째 나의 남편은 일본으로 갔다... 남편이 없다고 대답한 사람은 거의 없었으며, 이러한 진술은 대개 거짓이었습니다. 모두 산으로 간 것입니다. 그래서 강압적으로 질문을 하면 한결같이 모른다고 답변을 바꿨습니다.”
“일반적인 현상이오?”
“그렇습니다. 이들은 산으로 숨어들어간 자들과 연계된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대부분 혈연으로 맺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입산한 자들과의 관계가 불가피한 것이며, 그들은 반도(叛徒)의 산간마을을 소각한다는 계획이 알려지면서 자발적으로 입산해 반도들과 합세했습니다. 보복전이 나오는 이유입니다.”
“반도와 산간 주민간의 연합이라.... 교전하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그들은 수백 명이며, 재래식 무기로 무장하고 있습니다. 화력은 신통치 않습니다. 하지만 신속히 토벌하지 않으면 섬 전체가 적색지대가 되고 말 것입니다.”
이윤배 경찰서장이 끼어들었다.
“지금 정보관이 말한 것과 같이 현재 제주엔 반도와 주민의 구분이 없습니다. 양민이 언제든지 반도로 돌변할 수 있는 것이 제주도의 특수한 사정입니다. 제주 사투리에 ‘괸당’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한 다리, 두 다리 건너면 모두 친인척이란 뜻입니다. 그래서 폭도를 잡기가 힘듭니다. 서로 끈끈하게 연결되어 있으니까요. 그러나 나는 내가 잡고자 하는 자들을 끝내 잡아냈습니다.”
그러더니 그가 자기 경험담을 소개했다. 그는 무장대 활동 근거지에 순경 여러 명과 함께 잠복했다. 제주도는 봄철 주로 초가지붕을 이어 올린다. 육지는 볏짚으로 지붕을 잇지만 제주도는 새(띠)를 사용한다. 새는 한라산 기슭 초원지대와 습지대에서 자생하는 억새의 일종이다. 이것을 베어와 마당에 말려서 쌓아두고 봄철이면 지붕을 엮어 올리는 것이다. 이 새 더미가 바로 쫓기는 자의 은신처다. 산사나이들은 밤이면 산에서 내려와 집에 머물고 새벽이면 올라간다. 집에 오더라도 새 더미 속에서 지낸다. 새 더미는 건조하고 따뜻하고 포근하다. 습기찬 동굴과는 완연히 다르다. 그래서 모처럼 단잠을 잘 수가 있다.
“새 더미에서 자다가 위기가 오면 이 자들은 밑에 판 구덩이 속으로 들어갑니다. 구덩이를 파놓고 판자를 올린다음 새 더미를 쌓아두지요. 새 더미 밑 구덩이에서 굼벵이처럼 웅크리고 지낼 수 있소. 우리가 아무리 새 더미를 죽창으로 찔러봤자 잡을 수 없는 건 바로 이 때문이오. 그러면 어떻게 잡느냐.”
그가 참석자를 휘 둘러본 다음 자랑스럽게 말을 이었다.
“새 더미에 불을 질러버리면 간단히 해결되지요, 하하하. 새는 불이 잘 붙고, 화력이 대단해서 더미 속에 있는 놈은 물론이고, 더미 밑 구덩이 속에 갇힌 놈들도 불에 타죽거나 훈제가 되지. 연기에 질식해 죽는 거요. 새 더미를 옮긴 곳은 반드시 폭도가 잠입해 들어가 있다는 것을 명심하시오.”
슈미트가 경찰서장을 바라보더니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그의 용맹성은 인정하지만 주민을 바라보는 시선이 꼭 저래야 하는가 하는 복잡한 표정이었다.
“무장 반도, 즉 인민해방군이 주장하는 타도 목표는 경찰과 청년단이고, 국방경비대는 아니다, 그 자들은 이간질을 하고 있소. 군인들에게는 대단히 우호적입니다. 말하자면 분리 작전이오. 이간 책동이오.”
“9연대장과 무장 반도 책임자가 같은 일본군 학병 출신이라는 것 아십니까? 그래서 서로 싸울 의사가 없다는 묵계가 되어있는 것같소. 군인들은 반도와 조우해도 접전을 회피합니다. 토벌을 계획해도 미리 기밀이 누설돼 허탕을 칩니다. 국방경비대 놈들이 방해하고 있습니다. 수사가 필요합니다.”
“연대장과 무장 반도 대장이 같은 일본군 학병 출신이라고?”
슈미트 중령이 묻다가 수긍이 간다는 듯 스스로 고개를 끄덕였다. 맨스필드가 말했다.
“그러면 대화가 가능할 테니 그들을 협상 테이블로 끌어들이는 방법을 고려해봅시다.”
“안됩니다.”
이윤배 서장이 단칼에 잘랐다. 경무부 방침은 그와는 정반대인 것이다.
“왜 그러시오?”
맨스필드가 물었다.
“그자들로 인해 엄청난 경찰 병력의 손실이 있었습니다. 열두 개 지서가 습격을 당했습니다. 경찰 가족이 죽었습니다. 4.3을 기억하지 못합니까. 공권력을 조롱하고 단독선거를 반대하고 있습니다. 이건 엄연히 국가에 대한 반란입니다. 모두가 사상이 불온한 자들입니다. 제주도지구 남로당 총 책임자 김달삼, 이덕구, 김민성, 김성규, 김용관 등은 소위 제주인민해방군이라는 군사 조직을 편성해 5.10선거를 보이콧하고, 주민을 선동해 경찰서를 습격했습니다. 이 자들은 가난하고 무지한 마을 청년들을 선동해 무장대를 결성했는데, 각 읍면에 반도(叛徒) 중대를 편성하고 일본군이 매몰하고 간 무기와 탄약을 찾아내 전원 무장했습니다. 제주도는 12개 읍면으로 되어있으니 폭도들 역시 12개 중대를 편성하고 있소이다. 그 규모는 9연대 병력과 화력을 능가합니다. 그 세력은 적게는 사백 명, 많게는 천수 백 명을 헤아립니다. 지휘는 일본군 출신과 중국 팔로군 출신들이 맡고 있습니다. 이러니 경찰 병력으로 당해낼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9연대 놈들은 방관하고 있소이다. 그자들도 반란군 놈들과 다를 바 없습니다.”
“그 숫자가 맞소?”
“폭도대 숫자는 더 많을 수 있습니다. 제주도민 전체가 가담하고 있다고 보니까요. 나는 오직 그들에 대한 복수의 일념으로 회의에 참석했습니다.”
“복수하기 위해서 싸우는 거요?”
“물론 나라를 위해서입니다.”
“왜 주민들이 폭도 편에 서게 됐소? 그 반대도 마찬가지고....”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문 지사가 나섰다.
“토벌은 매우 희생이 큽니다. 개과천선시켜야 합니다.”
“아닙니다. 해결방식이 틀렸습니다. 관용을 베풀면 기어오릅니다. 그들이 옳다고 더 당당할 것입니다. 불씨를 안고 갈 뿐이오. 지금 폭도들은 엄청난 화력으로 무장하고 있습니다. 세력이 불어나기 전에 쓸어야 합니다.”
“그들이 엄청난 무기를 소지하고 있다는 근거는 무엇이오?”
카터 소령이 물었다. 경찰서장이 답했다.
“대정 앞 바다에는 총알과 포탄이 몇백 톤 버려져 있습니다. 전쟁 말기 일본군 제58군의 군단병력이 버리고 간 무기들입니다.”
그것은 일본군을 무장해제시킨 뒤 미군이 버린 것들이었다. 미군이 무기를 해체하고 폭파했지만 수습하지 못한 무기도 꽤 되었다. 일본군 제58군은 한라산을 복곽 진지로 구축해 요새화했다.
1945년 초 제주에는 일본군 포병연대, 박격포대대, 공병대대, 로켓트대대, 보병사단, 병참지원부대, 군병원, 공군기지, 해군기지 등 육해공군이 총망라돼 배치되어 있었다. 이들은 한라산과 해안지대에 주요 땅굴을 파 방어진지를 구축했다. 그중에는 천연 땅굴도 있었지만 대부분 노무자를 징발해 깊숙이 파들어갔다.
일본 패망 후 제주에 상륙한 미군은 미처 버리지 못하고 방치한 일본군 무기와 폭탄을 바다에 버리고, 비행기·탱크 등을 폭파하는 등 무기들을 해체했다. 그 시설과 총기와 폭탄의 상당 량이 방치되었는데, 그중 상당량이 무장폭도에게 넘어갔다는 것이다.
슈미트 중령은 점령군의 일원으로 먼저 제주에 들어왔기 때문에 이런저런 상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어느날 ‘복시환’ 사건과 함께 모리배 사건이 터졌다. 일본에서 화물을 싣고 서귀포항으로 귀항하던 30톤 규모의 복시환이 밀수선으로 나포되었다. 배에는 서귀포 출신 재일동포 단체인 건친회가 고향에 보내는 전기 가설 자재, 학생들에게 나눠줄 학용품, 책들이 실려 있었다. 이 화물에 서북청년단, 경찰, 군정 관리까지 개입해 압수하면서 파문을 몰고 왔다. 도민들이 비난하자 경찰은 주민들을 체포했다. 부케넌 고문관이 물었다.
“인텔리겐자들이 무장폭도 리더가 된 것은 어떤 연유입니까.”
그러자 경찰서장이 대답했다.
“그자들이 무슨 인텔리입니까. 본래 빨갱이들이지요. 주민을 선동하는 폭력집단이오. 이걸 보시오. 미군을 ‘미제 식인종’이라 부르고, 우리 경찰을 그들의 ‘개’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경찰서장이 서류 봉투에서 구겨진 인쇄물을 꺼내 내밀었다.
동포들이여!
경애하는 부모 형제들이여!
4.3 오늘은 당신님의 아들 딸 동생이 무기를 들고 일어섰습니다.
매국 단선 단정을 결사적으로 반대하고 조국의 통일독립과 완전한 민족해방을 위하여!
당신들의 고난과 불행을 강요하는 미제 식인종과 주구들의 학살 만행을 제거하기 위하여!
오늘 당신님들의 뼈에 사무친 원한을 풀기 위하여!
우리들은 무기를 들고 궐기하였습니다.
당신님들은 종국의 승리를 위하여 싸우는 우리들을 보위하고,
우리와 함께 조국과 인민의 부르는 길에 궐기하여야 하겠습니다.
“이 내용을 통역해주시오.”
맨스필드 군정관이 통역관에게 인쇄물을 건넸다. 통역관이 꼼꼼하게 통역하자 맨스필드 군정관이 물었다.
“이건 그들의 상투적인 레토릭 아니오?”
“중국에서 활동하던 공산 무장대들도 참여하고 있소이다. 팔로군, 조선의용군이오.”
“그들은 항일무장대 아니오? 그렇다면 일본에 대항했던 우리의 우군이 아닌가.”
“당신들이 경계하는 빨갱이입니다.”
도무지 혼란스러웠다. 맨스필드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 좁은 섬에 공산정권을 세운다고? 설사 혁명조건이 무르익었다고 해도 정부군과 세계 최강군인 미 주둔군과 맞서 싸워 이긴다고? 무모하거나 어리석거나, 둘 중 하나다. 같은 동포가 더 살육을 부른다? 죽여야만 한다고 증오하고 저주한다? 무슨 이익 때문인가. 맨스필드가 다시 물었다.
“그들은 북한 공산정권을 지지하는가?”
“당연히 그렇지요.”
“그런 정황은 없소.”
맨스필드 군정관이 경찰서장의 의견을 묵살했다. 그러자 서장이 지지 않고 반박했다.
“그 자들의 접선을 우리가 모르고 있을 뿐이오이다. 간단한 문제가 아니올시다.”
“복잡하다는 견해엔 동의하오. 하지만 좀 더 지켜봐야 할 일이오. 복잡하니까 더욱...”
“맨스필드 군정장관의 뜻을 헤아리겠습니다.”
이번엔 문치성 지사가 나섰다. 사진봉은 그 분야에 있어선 지식이 부족했기 때문에 조용히 앉아서 계속 지켜보기만 했다. 시키는 일이라면 물불 안가리고 행동으로 옮기지만, 저간의 사정은 그가 알 바도 아니고,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타격목표가 설정되고, 미행 감시 대상이 결정되면 행동으로 옮기면 되는 것이다.
“무장 폭도들이 북한과 연결돼있다는 인과 관계는 없습니다. 궁지에 몰리면 그런 선택지를 선택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지금 이 시점에선 북한도 외부에 에너지를 쏟을만큼 내부 정비가 돼있지 않습니다. 제주도까지 신경쓸 여력이 없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미군정의 정책 미흡과 경찰의 과격성, 식량난에 대한 해결책 미흡, 그러면서 주민에 대한 박해 등이 겹쳐서 자생적으로 저항세력이 나타난 것이지, 이들이 북과 연결된 공산당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주민들을 의식화하고 조직화한 자들이 유학생 출신들인 것은 부인할 수 없지만, 국가 전복을 꿈꾸거나 북과 연계해 공산혁명을 꿈꾸는 자들이 아닙니다. 굳이 말한다면 이상주의를 꿈꾸는 리버럴리스트이자 민족주의자들입니다. 그러나 상황이 악화되면 어떤 누구와도 손을 잡겠지요. 궁지로 몰리면 지푸라기라도 잡는 거니까요. 그러니 앞으로가 문제입니다. 그들이 외부에 손을 뻗치기 전에 사태를 정리해야 합니다. 경찰의 강경 진압은 복수심만 불태울 뿐, 해결책이 아니올시다. 대화로 진정시킬 수 있소.”
문지성이 역설하자 맨스필드가 고개를 끄덕였으나 경찰서장이 화를 내 소리쳤다.
“문 지사님, 경찰을 모략하는 겁니까? 그들은 분명 공산당과 손잡고 있소. 육지 본토 빨갱이들과 손잡고 있소!”
CIC 카터 소령이 나섰다.
“조사한 바에 따르면, 이 자들이 본토의 반란 세력과 접선된 증거는 없습니다.”
카터는 제주의 반란이 독특하다고 보고 있었다. 타 지역 반도와 연계되지 않고 단독으로 일어난 사건이라는 것이 독특했다. 그 자체가 폭약을 안고 진지에 뛰어드는 자폭집단이나 다름없는 것 아닌가. 독안에 든 쥐처럼 섬 안에 갇혀 자멸할 것이 빤한데 그들은 왜 굳굳하게 나서는가. 백전백패가 분명한데 왜 항전하는가.
“그들의 저항의 강도를 모르고 하는 한가한 소리 듣자고 내가 여기 온 사람이 아니오!”
경찰서장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제주 지사가 지지 않고 냉정하게 말했다.
“그들 입장에서는 억울하다고 할 것입니다. 과격하고 부당하게 몰아붙이니 포악해진 것이요. 궁지에 몰리면 쥐도 늑대에게 대듭니다. 극도로 몰리니 도민을 인질삼아 저항한 것도 사실이오. 문제가 어디 있건 여하간에 지금은 그들이 자기 살려고 협상을 기대하고 있소.”
“틀렸소. 우리쪽에서 틈을 보여선 안됩니다. 벌써 그런 협상 틈새를 노리고 이간질하고 있습니다. 협상파가 문제 올시다.”
“협상파?”
맨스필드가 놀라서 되물었다. 그동안의 기밀이 샜나? 그러나 그는 쉽게 결론을 내리기 어렵다고 보고 오늘 회의를 마무리삼아 삼아 단정적으로 말했다.
“대화에 응하지 않으면 가차없이 격멸할 것이오.”
경찰서장이 무슨 뜻인지 알고 소파 옆 옷걸이에서 제모를 집어서 머리에 푹 눌러쓰고 팔을 거칠게 내저으며 밖으로 나갔다. 사진봉도 뒤따랐다. 밖으로 나오자 햇빛이 눈부시게 쏟아지고 있었다. 삼거리 쪽으로 나오니 거리의 담벼락에 벽보가 어지럽게 나붙어있었다. 벽보에는 ‘국방경비대는 도민의 동무’ ‘친일경찰 몰아내고 민족군대 지켜내자’ 따위의 문구가 적혀있었다.
“개새끼들.” 그러면서 서장이 사진봉을 향해 물었다. “누구 짓 같은가?”
“그야 폭도들이겠지요. 국방경비대가 경찰에 가세하는 것을 막겠다는 심리 전술입니다.”
“미군정이 폭도들과 협상하려고 한다. 사 단장, 구좌면, 남원면, 서귀면, 조천면, 애월면 쪽으로 모두 나가라. 사건을 만들 필요가 있다. 마구 부숴버려야 협상이고 나발이고 뒷말 안나온다. 내 말 뜻 알아듣겠나? 이건 중앙의 지시다. 알았나? 삐라도 마구 뿌려라.”
“알겠습니다.”
제주사태는 각자 보는 관점과 겪은 경험에 따라 해석이 달랐다. 그러니 해결 방법 또한 각기 달랐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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