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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노사이드' 히로히토를 전범 재판에"...미국이 외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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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노사이드' 히로히토를 전범 재판에"...미국이 외면했다

[팩션] 실록소설 '행군-어느 민족주의자를 위한 변명' <17>

해방 후 왜곡된 역사 속에서, 지금까지의 한일 관계는 효용을 다했다. 그러나 예고된 갈등이었다. 일본은 구한말과 일제강점기 35년, 8.15 광복과 분단체제, 그 이후 70년의 강고한 구 체제 시스템 속에서 우리 내부 깊숙이 침투해 들어와 알게 모르게 생활의 일부가 되었다. 그 안에 우리 내부의 모순과 고뇌가 응축되어 있다. 이 모순과 고뇌를 탐구하려면 어떤 방법이 있을까.

한 개인사를 통해 시대와 사회를 비추는 거울 역할을 하는 것이 문학의 영역일 것이다. 그동안 우리는 외세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생존이 우선이었던 관계로 자기 자신을 앞세우지 못했다. 우리는 너무 쉽게 잊어버렸고 안일했다. 그러다보니 역사는 박물관에 소장된 문화재인 양 화석화되고, 현대의 역사는 더군다나 묻혔다.

기자 출신 이계홍 작가의 실록소설 '행군-어느 민족주의자를 위한 변명'은 그런 배경에서 나왔다. 이 소설은 2016년 10월호부터 2019년 6월호까지 문예월간 '월간문학'에 연재되었던 소설이다. 월간문학 연재를 마친 뒤 많은 부분을 수정 보완해 프레시안에 재수록한다.

이 연재물은 이른바 '팩션(Faction)'이다. 팩트와 픽션의 사이 어디에서 역사적 사실에 상상력을 덧붙인 '논픽션' 형식의 소설이다. 필자는 취재의 일환으로 일제강점기 말 일본 육사 출신 젊은 생도들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어지러운 시대, 그 안에서 제국주의 광풍에 휘말린 젊은이들의 시각을 잡아내려 했다. 이계홍은 "일본의 극우 정권이 일제강점기의 역사적 사실들까지도 왜곡하는 역사 모독에 대해 하나의 담론시장을 형성하자는 데 목적이 있다"고 했다. '행군-어느 민족주의자를 위한 변명'은 총 33회로 나뉘어 연재될 예정이다.(편집자)


제 17장, 대구 6연대 “병사의 끝판 왕”

일요일 오후, 곽차순 상사는 이쑤시개를 입에 물고 질겅질겅 씹으며 뭔가 걸려들 것이 없나 주위를 살피며 병영을 서성거렸다. 경계 근무중인 초병을 잡아 조질까. 아니면 무기고 초병, 내무반 병사, 취사병의 용의 검사를 하며 트집잡을 게 없나, 오늘따라 주먹이 꼴리는데 얼른 걸려드는 게 없었다. 대구 6연대로 전출된 지 얼마 되지 않은 그가 하는 임무는 대체로 이런 것들이었다.
곽차순은 일본군 사병의 끝판왕이라는 상사 출신이었다. 상사라고 하면 최소한 일본군생활 7,8년을 한 직업 군인인데, 일선에서 산전수전 겪다 보니 벌써 능구렁이가 다 되어 있었다. 하사관은 대체로 일본 군대에서 좋은 것보다 나쁜 습관을 익힌 군인들이었다. 그것은 곤조였다. 게다가 상사는 병사들에게 곤조 부리기 좋은 계급장이었다. 그래서 국방경비대에 들어와서도 병사들을 괴롭히는 따위 이런저런 미련이 남아서 상사 계급장을 원해 달았다. 부대에서 악명이 높은 후지모도 군조라는 김춘택 중사보다 경쟁적으로 병영을 누비며 으스댔지만, 이날만은 걸려든 게 없어서 따분하고 심심한 것이었다. 그의 뒤에는 어마어마한 사람이 돌봐주고 있다는 풍문이 돌았다. 그것은 그 스스로 자가발전시킨 측면이 없지 않았으나 결코 틀린 말도 아닌 것 같았다.
곽차순은 계속 이쑤시개를 질겅질겅 씹으며 조선말로 일본 군가를 흥얼거리며 병사동을 서성거렸다.

앵두나무가 내 옷깃 색이구나
요시노 산에 꽃이 가득하구나
야마토에서 태어난 남자라면
전장에서 꽃잎처럼 지겠구나

‘야마토에서 태어난 남자라면 전장에서 꽃잎처럼 지겠구나’라는 구절이 마음에 들어 그는 그것만 계속 흥얼거리는데 그것도 시들해졌다. 그는 뭔가 애절하고도 장중한 군가를 바꿔서 흥얼거렸다.

海行かば
우미유카바
바다에 가면

水漬く屍
미즈쿠카바네
바다에 잠긴 시체

山行かば
야마유카바
산에 가면

草生す屍
쿠사무스 카바네
풀 속의 시체

大君の辺にこそ死なめ
오오키미노 헤니코소시나메
천황을 위해 죽어도

かへりみはせじ
카에리 미와세지
돌아보는 일은 없으리

전쟁을 미화하고 죽는 게 소원이라는 일본 군대. 생각할수록 멋지고 장부답다. 비겁하게 사느니 용감하게 산화하라는 것이 아닌가. 그때 마침 병사들이 하나둘 씩 귀대하고 있었다. 곽 상사는 마침 잘됐다 싶어서 들어오는 병사들을 위병소 헌병들을 제치고 초소 옆에 그들을 세운 뒤 하나씩 차례로 닦아나가기 시작했다.
“김도배 일병, 어디 다녀왔지?”
그기 병사의 명찰을 보고 물었다. 외출 내용을 묻는 것은 월권이었다. 그들에게도 사생활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정도는 가볍게 무시되었다. 그가 하면 하는 것이다.
“일등병 김도배 신고합니다. 영화구경 하고 왔습니다.”
“좋아. 그럼 너는?”
그는 곁의 병사에게 물었다.
“네, 저는 시위대 뒤를 따라다니다 왔습니다.”
“시위대에 가담했다고? 그럼 너는?”
“넷, 저도 시청 앞 광장에서 시위하는 걸 구경했습니다.”
“앞으로 나와 새끼들아! 니까짓 것들이 뭘 안다고 나서? 정치 집회장이 니들 놀이터야?”
그가 버럭 화를 내고 그들을 한쪽에 세웠다. 그의 입장에선 아주 잘 걸렸다. 눈치를 알고 다음 병사가 대답했다.
“넷, 저는 친척집에 다녀왔습니다.”
“내 너를 알지. 피안도 출신이 대구에 친척이 있을 리 없지. 친척 사는 곳이 어느 동네야?”
병사가 얼버무렸다. 그는 병사의 머리꼭지에 올라앉아 있었다. 곽차순은 거짓말을 몹시 못견뎌 했다. 가령 위세등등한 대대장 빽일지라도 거짓말하는 병사는 사실을 실토할 때까지 팼다.
“나는 거짓말하는 놈을 가장 싫어한다. 일본 군대는 그런 놈을 비겁한 놈이라고 한다. 헛소리 말고 너도 저놈들 곁에 가 서!”
시위대를 따라다녔다는 자는 십여 명이 되었고, 나머지 열댓 명은 별 볼일없이 외출한 일반 병사들로 구분되었다.
“일반 병사들은 돌멩이를 주워서 영점오초 안에 제 자리로 돌아오라.”
병사들이 곽 상사가 시키는대로 연병장과 모래밭, 병영 뒤로 흐르는 개울에서 돌멩이를 주워왔다. 어떤 병사는 그것도 실적이랍시고 굵은 참외만한 돌멩이를 군복 상의에 가득 담아 낑낑거리며 들고 왔다.
“가져온 돌멩이로 저 빨갱이 새끼들에게 던져라!”
갑작스런 명령에 병사들이 주춤하자 곽차순 상사가 그중 한 병사의 정강이를 군화발로 디립다 깠다. 에구구구, 무릎을 싸안고 넘어진 그를 향해 각목으로 내려쳤다. 누군가 하나는 이렇게 시범적으로 당해야 병사들은 말을 잘 듣게 돼있다. 일반 병사들이 시위대 참여자로 구분된 자들에게 돌을 던지자 처음에는 그들이 주춤하다가 어느 순간 던진 돌멩이를 주워 일반병사들에게 맞받아 던지기 시작했다. 삽시간에 양 진영은 피터지는 투석전이 전개되었다. 본의 아니게 그들은 적이 되었다.
따분하게 영내 생활을 하다 보면 지겹고, 그래서 군기를 잡는다는 명목으로 병사들을 이런 식으로 몰아세우는 것이지만, 그것은 분명 가학성 린치였다. 그러나 묵인되었다. 그는 간섭받지 않는 부대의 고문관이었다.
초급장교들은 경험많은 하사관들을 함부로 대하지 못하고, 영관급도 명령이라기보다는 부탁하는 처지인지라 그들을 제압하지 못했다. 그들은 초급장교들을 보면 “일본군이 연전연승한 것은 교범 때문이 아니라 고참들 때문이다!”라고 닦아세웠다. 그러면 갓 임관한 초급장교들은 기가 죽어 그들 눈치부터 살폈다.
장교의 길을 가도록 연대장이 그들에게 사관학교 입교 추천장을 써주어도 찢어버리는 것이 예사였다. 사관학교를 나와 장교가 된다 한들 전속을 자주 가니 현재의 기득권을 놓칠 수 있고, 또 더 좋은 일이 있어 보이지 않아서 응하지 않았다. 어느 면에서 장교들보다 우위에 있고, 실제로 권한을 더 행사하니 지금 하사관 생활을 즐기는 것이다. 군대가 꿀렁거리는 데는 이런 하사관들의 행패와 구타도 한 몫 했다. 쌍방이 피투성이가 되어서야 곽차순이 소리쳤다.
“동작 그만!”
그리고 그는 일장 훈시를 했다.
“나는 일정 때부터 좌익이나 빨갱이를 용납하지 않았다. 좀 배웠다는 새끼들이 붉은 사상에 물들어서 나라를 개좆같이 바라보고, 지금 해방이 되어서도 군대 물을 흐리고, 병사들끼리 이간질하며 싸우고 있다. 이 새끼들은 일정 때부터 대일본제국을 갉아먹는 기생충이자 악마들이야. 그것들이 개판쳐서 나라가 이 모양이 된 거야! 알간? 이런 자들이 조선국방경비대 내에 엄연히 존재한단 말이다. 이것들을 때려잡기 위해 나는 북만주를 거쳐 38선을 넘어 천신만고 끝에 고향에 돌아왔다. 나는 미군정이 이런 놈들을 받아들인 것을 지금도 분개하고 있다. 그래서 내가 용납하지 않는단 말이다! 알간?”
빨갱이에게 된통 당한 사람처럼 그는 그들에게 적의를 품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그들을 족쳤으면 족쳤지 그들에게 당한 적은 한번도 없는 사람이었다. 일제에 세뇌된 결과로 볼 수밖에 없었다. 모든 것을 일제의 눈으로 그는 보는 것이다.
폭동 이후 한동안 침묵 속에 빠져있던 대구는 어느 순간부터 다시 폭발성을 내연하고 있었다. 검거 선풍이 일고, 밤에는 야산대가 보복하러 산에서 내려오고, 그래서 쫓고 쫓기는 일이 하루 일과처럼 벌어지면서 언제 다시 폭발할지 모르는 화약고가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이는 곽차순이 관록을 과시하기 좋은 환경이었다.
“지금 국경(국방경비대)이 조선 군대야? 일본 군대야?” 중학을 졸업했다는 병사가 곁의 병사에게 투덜댔다. “이런 군대에 있을 필요가 있나? 난 도망쳐버릴 거야.”
“왜 그래. 조금만 견뎌. 좋은 군복도 지급된대잖어.”
곁의 병사가 위로하자 곽 상사가 그들 곁으로 다가왔다.
“무슨 밀담이가?”
“네, 네, 시내에 나가서 영화 본 얘기를 했습니다.”
당황하던 병사가 동료병사를 돕느라 이렇게 서둘러 변명했다.
“영화 제목이 뭐야?”
병사가 우물쭈물하자 즉각 주먹뺨이 날라왔다.
“이런 씨발놈! 니가 영화를 봤다고? 나를 쪼다로 아나? 일본 군대에서는 거짓말하는 병사를 가장 경멸한다. 비겁하고 혐오스럽게 본다. 그게 모두 쪼잔한 조선놈들이란 말이다. 두 발 벌리고 이 앙당 물엇!”
병사가 동작을 취하자 예외없이 그의 턱에 주먹이 날아갔다. 그가 고꾸라지자 그는 더욱 날뛰었는데, 그것은 마치 일부러 분노를 끓어올리는 것 같았다. 그는 조선국방경비대 하사관인지 일본군 하사관인지 구분하기 어려웠다.
“시위꾼들은 두 사람씩 서로 마주 보라.”
그들이 마주 서자 그가 다시 명령했다.
“멈추라고 지시할 때까지 서로 뺨을 갈긴다! 실시!”
시위 참여 병사들이 처음에는 눈치를 보아가며 살살 때리는데, 그때마다 곽차순이 달려가 그 병사를 여지없이 팼다. 결국 서로 세게 뺨을 갈기는데, 이윽고 적대감이 생기고, 어느새 마주선 병사들 뺨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쎄게 쳤다느니, 니가 더 쎄게 쳤다느니 옥신각신하며 싸움으로 번졌다. 서로 치고 박는 과정에서 적의감이 생기고 편이 갈렸다. 분대끼리, 군 출신별로 나뉘어서 싸움이 벌어졌다.
“동작 그만!”
곽 상사는 시위 참여 병사들을 모두 영창에 집어넣었다. 몇 놈만 더 채워서 상부로 보고하면 과표가 올라간다. 포상을 받을 수 있고, 과거 일본군 헌병대 시절처럼 진급도 가능하다. 불평분자를 빨갱이로 몰아 잡아넣으면 혜택은 눈앞의 과일처럼 톡 떨어지는 것이다. 그는 경찰과 헌병대 정보팀과도 선이 닿아 있었는데, 1연대 정보장교 김창동과는 같은 뿌리였다.
곽차순은 시위 참가자 두세 놈만 더 채우면 된다고 보고 시내로 나갔다. 그 사이 영창에 갇힌 자들 중 셋이 탈주해버렸다. 갇힌 자와 같은 마을에 사는 초병이 저지른 일이었다. 초병은 갇힌 자들이 어디론가 끌려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모포와 헌 양말, 건빵 따위 비상식을 넣어주는 것으로는 그들의 뒷 일을 담보할 수 없었다. 그래서 한 밤중 같은 마을 출신 병사를 풀어주었는데, 그때 다른 병사 두 놈이 초병을 겁주며 뒤따라 탈출한 것이었다.
“너도 공범이다!”
곽 상사는 초병을 반주검이 되도록 패고 영창에 가두었다. 조서를 꾸미고 강제로 손도장을 찍도록 하자 그는 꼼짝없이 빨갱이가 되었다.
이런 보고를 받고 최남근 대대장이 영창으로 달려갔다. 곽차순이 대대장을 보더니 차렷 자세를 취하며 보고했다.
“시위 주동자들입니다. 빨갱이들입니다. 본 하사관이 적발해냈습니다. 그런데 잡아가둔 놈 중 세 놈이 벌써 튀었습니다.”
그러자 영창에 갇힌 병사가 억울한 표정으로 앞으로 나와 쇠창살을 붙잡고 하소연했다.
“아닙니다. 저희는 외출 나갔다가 돌아왔을 뿐입니다. 억울합니다. 저희는 빨갱이가 아닙니다.”
“네놈들이 전평 놈들과 함께 하지 않았나? 투석전을 벌이다가 얼굴에 상처가 났잖아.”
그러나 병사도 각오한 듯이 맞섰다. 밀리면 끝장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는 그나마 중학 출신이었다.
“곽 상사님이 우릴 엮어 넣으려고 싸움을 붙였습니다. 우린 전평이 누군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엽전들은 두둘겨 패야 한다니까. 게으르고 거짓말하고 훔쳐먹고, 한마디로 구더기같은 놈들입니다. 일본군에서 싹을 싹 잘라버렸어야 했는데 이거 빨리 패전이 되어서....”
그의 군의 모든 기준은 일본군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뼛속까지 일본군이었다.
“우리가 한 일이라면 부상자를 병원에 데려다 준 것 뿐입니다. 피 흘리는 사람을 방치할 수 없지 않습니까.”
“저놈들이 이제 실토하는군.”
“병사들에게서 의심 가는 부분이 있나?”
최남근이 곽 상사에게 물었다.
“금방 실토하지 않았습니꺼.“
“야비한 놈은 너야!”
최남근은 두말없이 곽차순을 영창에 집어넣었다. 며칠 후 이재복이 찾아왔다.
“한 가지 부탁드리러 왔소이다.”
“부탁이라니요?”
“곽차순 상사가 내 조카요. 먼 집안의 아들이올시다. 육순 누님이 찾아와서 빼달라고 하소연했습니다. 억울하다는군요. 영창에 갇혔다니 대단히 유감입니다.”
그런 자의 인척이라니, 그는 이재복이 완전히 딴판으로 보였다. 인민의 벗이라는 사람이 이런 위선자라니... 최남근은 어렴풋이 곽차순이 대단한 빽을 갖고 있다는 풍문을 들었는데, 이재복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닌가 생각했다. 가방 끈이 짧은 그로서는 먼 집안에 외국 유학을 다녀온 인텔리가 있다는 것을 사상의 여부를 떠나 자랑하고 떠벌이고 다니면서 자기 과시를 했으리라. 최남근이 단호하게 말했다.
“저런 군인은 필요 없습니다. 격리시켜야 합니다. 군대를 모욕하고 있습니다.”
그는 가둔 이유를 설명했다. 그의 말을 다 듣고 난 이재복이 그의 손을 꼬옥 잡았다.
“내 과오를 용서하시오. 먼 집안 사정을 잘 알지 못했소. 감상적 혈연주의가 얼마나 인간을 타락시키는 것인가를 귀관이 가르쳐주었소. 항쟁을 통해 민심의 소재가 어디에 있고, 모순이 어디에 있는가를 알고 있는 내가 주위를 살피지 못하고 실수를 했습니다. 어줍잖은 사적 인연이 이렇게 눈을 멀게 하는군요. 그러니 다시 부탁하겠소. 그자는 묶어두되, 억울하게 갇힌 자들을 풀어주시오. 심려를 끼쳐드려서 미안합니다. 혁명은 사사로운 것에 연연하지 말라는 뜻을 이제야 깨달았습니다.”
최남근은 침묵을 지켰으나 그의 뜻을 헤아렸다. 쉽게 승복하는 그의 태도가 좋았다.
“내 천박한 양심이 수치스럽소.”
이재복은 거급 최남근의 손을 잡고 용서를 빌었다. 최남근은 갇힌 병사들을 풀어주고 대신 곽차순은 영창에 남겨두었다. 그것이 상부에 보고가 되었다. 성실히 임무를 수행하는 하사관을 영창에 집어넣고, 좌익 혐의자를 풀어주는 차별적 행태를 묵과할 수 없다는 것이 보고 내용이었다. 곧바로 사령부의 전속 명령이 통보되었다.
그는 험지라고 일컬어진 춘천 8연대로 전출되었다. 연대장 보직이었지만 8연대의 예하 중대는 춘천, 강릉, 원주 세 곳으로 분산되어 있었다. 각 중대가 연대장 통제를 받는다기보다 사실상 독립부대로 활동하고 있었다. 실병을 확보하고 있는 중대장들이 실권을 장악했으므로 그의 위상은 위축되었다. 연대장 보직이라고 해도 그는 실권이 없는 자리에 앉아있었다.

다시 춘천 8연대, 최남근 박정희 이재복 오민균

“고생 많지요? 위로 차 왔습니다.”
의례적인 인사였지만 좌천성 인사가 안됐다 싶어서 이재복이 최남근을 찾아 위로의 말을 건넸다. 그는 춘천에 볼 일도 있었던 참이었는데, 그중 이런 저런 정보를 제공할 생각이었다. 군에는 정보팀이 설치돼 사찰활동이 강화되고 있었다.
김창동은 대구와 춘천을 차례로 다녀갔다. 그는 미소공동위원회에서 첩보활동을 하던 스파이를 체포한 공로로 벌써 대위로 진급했다. 그런 그가 자신이 심어놓은 정보원이 영창에 갇혔다는 연락을 받고 대구로 내려갔다. 그리고 6연대 내부에 어마어마한 좌익 세포들이 대구 민간인 좌익들과 연계돼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들은 야산대와 지역 게릴라들과 합세해 제2의 폭동을 준비하고 있었다. 김창동이 전과를 올리기 좋은 분위기로 무르익어가고 있었다.
곽차순 사건은 단순했지만 대구의 내막을 알아내는 좋은 기회였다. 곽의 인척이 관여해 도리어 빨갱이 혐의자는 풀어주고, 조카를 구금하도록 조치했다는 것은 공산주의자의 비정성을 그대로 말해주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공산당은 피도 눈물도 없는 괴물이다 라는 것을 그는 거듭 확인했다.
“인척의 콧김이 약한 팔촌 누부의 자식이라도 그렇게 비정하게 돌아설 수 있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찾았을텐데 역으로 엮어버려? 개새끼...”
김창동이 이재복을 노리는데, 그는 이래저래 무거운 공기를 느끼고 대구를 떠나 춘천으로 갔다.
“최 소령이 오해를 산 것이 곽차순 사건 때문인데, 집안 조카로 인해 인사 불이익을 당했다는 것이 미안합니다.”
“그 얘긴 없는 것으로 하지요. 지휘관이 책임질 일 있으면 지는 것 아닙니까, 괘념치 마십시오.”두 사람이 춘천의 닭갈비 집으로 들어서자 강릉 부대에 배속돼있던 박정희가 먼저 와 기다리고 있었다. 산비탈의 외딴 닭갈비집은 은밀한 대화를 나누는 데 최적의 장소였다.
“8연대는 내가 고참이지요?”
박정희가 웃으며 최남근을 맞이했다.
“하지만 대대가 분산되어 있으니 자주 보지를 못하는군. 강릉 대대도 복잡했지요? 잘 처리되어서 다행입니다만...”
송요찬 대대장 구타사건을 두고 한 말이었다. 최남근은 대구 6연대에서 이 소식을 들은 바 있다. 강릉 대대에서 벌어진 하극상 사건은 군 내부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대구나 춘천이나 이런 사건이 자주 터져나와서 군부는 어디서부터 손을 써야 할지 골치를 앓고 있었다. 뿅망치처럼 여기를 때리면 저기서 튀어나오고, 저기 타격하면 다른 엉뚱한 데서 사고가 터졌다. 박정희는 그런 것에 신경쓰고 싶지 않았다. 그런 것들을 가까이 하는 자체가 생리적으로 싫었다.
오늘은 기분좋게 술 한잔 하고 싶었다. 북만주에서 함께 한 시절을 보냈던 최남근을 만나자 옛 추억이 떠올랐다. 생각할수록 그리운 시간들이었다. 영하 삼사십 도를 오르내리는 살을 에는 듯한 강추위와 휘몰아치는 광풍, 흩날리는 눈보라 속에서도 절도있게 근무하던 나날들이었다. 그중 부대 매점에서 사다가 안주도 없이 마신 옥수수로 빚은 오십도가 넘는 빼갈과 달콤한 고구마 막걸리, 혹한 속에서 그것을 마시며 우정을 꽃피웠던 것들이 새삼스러웠다.
“술통을 곁에 두니 부자가 된 기분입니까?”
최남근이 박정희 곁에 커다란 막걸리동이가 놓여있는 것을 보며 웃었다.
“천황폐하가 부럽지 않습니다.”
막걸리 한 섬은 지고 가지 못해도 뱃속에 담고는 간다는 것이 박정희고 보니, 그런만큼 그는 지금 술동이를 끼고 있으니 마음이 풍요로워진 기분이었다. 술만이 복잡한 삶을 위로하는 것 같았고, 실제로 몇 잔 마시면 만잡사가 잊혔다. 숙부로 여기는 이재복을 만나니 더욱 듬직한 기분이 들었다.
“일본군 하사관 출신이 우리를 뭉치게 하는군요.”
박정희는 곽차순을 영창 보낸 사건으로 최남근이 춘천 연대로 밀려난 것을 빗대어 말했다. 최남근이 이재복의 눈치를 살피며 받았다.
“그 얘긴 없는 것으로 하지요. 이렇게 서로 만난 것으로 족하지 않소? 관동군 시절 생각 안나오?”
“그렇지요. 군속으로 들어온 자들이 전시 상황을 이용해서 하사관으로 현지 임관된 경우가 많은데, 그자들 출세했다고 완장차고 으스댔지요.”
박정희는 여전히 하사관 문제에서 빠져나오지 않았다. 이재복이 묵묵히 앉아있었고, 최남근이 웃으며 받았다.
“그 얘긴 그만 하자니까. 재미있는 일이 많았잖습니까. 내가 복무했던 군대에서는 외래자용 목욕탕과 직원용 목욕탕이 각각 1개소씩 있었는데, 어느날 상부에서 목욕탕 옆에 방을 몇 개 달아붙이라고 하더군. 알고 보니 위안부들을 수용하는 방이었소. 본래는 부대 밖 별도의 위안소가 설치되어 있었지만 우리 부대는 거리가 멀어서 비공식적으로 이 애들을 부대 안으로 들였던 거지요. 조선인 하사관이 인솔자가 되어서 군병들을 데려와 순번을 정해서 방에 들여보내는데 와이로를 쓰는 놈한텐 좀 예쁘고 어린 위안부를 붙여주고, 그렇지 않은 경우는 더러운 만주족이나 몽골족, 또는 늙은 위안부 방에 넣어주는 거였소. 그러면서 이 방 저 방 판자벽에 구멍을 뚫어서 성교하는 것을 보며 히히덕거리는 거요.”
“그것 염치없는 짓이 아닌가요?”
박정희가 그렇게 말하면서 흥미를 보였다.
“그러게 말이오. 내가 그자를 단속하면서 물었더니 그렇게라도 세월 보내는 것이라고 하더군. 그래서 덮어두었지요. 말로는 그 시간에 영어 단자 하나라도 외워 이놈아 했는데, 그게 머리에 들어가겠소? 그자 말을 들으니 그럴 거라고 공감이 가더라고. 그런 환경에서 공부는 무슨 말라빠진 개뼈다귀겠소. 내일이 없는 삶, 말짱 도루묵이지. 그런데 사고가 터졌어요. 조선인 위안부가 어떤 조선인 병사의 탈영을 도와준 것입니다. 탈영을 적발한 일본인 상사가 쫓아오더니 위안부 담당 하사를 반 죽여놓고, 어린 위안부를 얼굴이 으깨지도록 밟아버리더군. 둘이 짜고 조선인 병사 탈영을 돕고, 삥땅한 군표를 나눠가졌다는 것이었소. 위안부도 엄연히 일본 군속 대우를 받는데, 그렇게 가혹하게 다룬 것을 보고 내가 피가 솟구쳐 오르더군. 인종 차별이 분명했으니까. 매일 이삼십 명씩 받느라 몸이 늘어진 어린 소녀를 그렇게 얼굴을 으깨버린 것은 단 조선인이란 이유 하나 때문이었소.”
“하긴 조선인만 보면 멸시하는 인종차별주의자들이 많았지요. 하사관들은 조선인 장교조차도 눈 아래로 내리깔고 보면서 건방지게 굴었고요. 그래서요?”
“내가 울분이 생겨서 참을 수가 없더군. 그래서 며칠 후 늦은 밤 그자를 흠을 잡아서 기합을 준다는 명분으로 갈대 숲이 있는 강으로 불러냈지. 니 총으로 얼음을 깨라고 명령하고 다 깨자 그놈 대갈박에 총을 한방 멕이고 강물 속에 집어넣어버렸소.”
“두렵지 않았습니까?”
“전쟁 말기라 그런 죽음은 흔했으니까요. 호수가 꽁꽁 얼어붙어서 집어넣으면 당분간 시체를 찾지 못하지요. 만주에서 해동이 되려면 여섯달은 가야 하니까, 하하하.”
“나도 못된 놈을 보았지요. 그자는 니뽄도로 중국군 포로병 두 명 목을 쳐서 피흘리는 사진을 찍어서 자랑하고 다니더군. 칼이 얼마나 잘 드는지 시험하려고 그 짓을 했다는 것인데, 내가 그걸 중국군 장교에게 귀띔해주어서 그자는 다음날 시체로 발견되었습니다.”
“어느날 신병 몇 명이 보충돼 왔더랬지요. 그자들은 시시껄렁한 패거리들 행색인데 이상하게 장교들도 꼼짝 못하더군. 알고 보니까 동경제대생들이요. 그들은 본래 학병 장교로 나가는 것인데 반전 사상을 가져서 일반병으로 강제 징집돼온 자들이었습니다. 패망 직전이라 장교단도 패닉상태에 빠졌고, 그들의 당당한 위세와 좋은 집안과 좋은 학벌 때문에 병사, 장교 할 것없이 어느새 그들에게 복종하고, 그들 말에 세뇌되더니 따르더군. 히로히토의 항복 방송이 있던 날은 ‘동양의 인권과 평화’라는 글씨를 써붙이고 교양강좌를 했으니까요. 일본도 그런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보고 참으로 놀랐습니다. 충격이었지요.”
“일본놈들이라고 없겠나. 양심을 지키는 사람은 어디나 있는 거요. 우리보다 더 많을지 모르오. 그 점에 있어선 우리와 수준이 다르지.”
이재복의 말이었다.
“전쟁 말기가 되니까 탈영병들이 많았습니다. 대부분 기차를 타고 이송 중 탈영을 하는데 방치 수준이었지요. 아마도 그들도 패망을 감지했던 것 같애. 어느새 패배주의에 젖어 있었으니까. 그런데 탈영병들은 십중팔구는 국부군이나 팔로군에 잡히지요. 고향으로 가겠다고 하면 보내주는데, 헌병분견소에서 파견 나온 헌병들한테 걸리면 골로 가지요. 언어상 발음을 들으면 조선사람인지 일본인인지 알 수 있으니 조선인은 쉽게 붙들리게 됩니다. 그런데 조선인 출신 헌병들이 더 곤조가 나빴지. 봐주는 게 없었다는 거요. 그런 중에도 잡힌 자들 중에서 조선독립에 대해 이야기해주는 자가 있었는데, 그때서야 민족의식이 생기더군. 사회주의 사상은 무엇인지 몰랐습니다.”
“산동분견대에서 전멸당한 부대에서 살아나온 병사들 얘기 들어보면 팔로군 자신들은 강냉이죽을 먹으면서도 포로들에게는 멧돼지 국물에 따뜻한 조밥을 먹이더라는 거요. 그때 함께 패주한 악질 하사관들이 포로들에게 많이 당했습니다. 효수된 하사관들 두상이 감나무에 열매처럼 맺혀있었으니까요. 역시 사람은 선한 일을 하고 봐야겠습디다. 극한 상황에선 더욱 그래요. 벌써 그 시절이 두렵고도 추억이 되어 되살아나는군요.”
취흥이 돌자 박정희가 젓가락 장단으로 박자를 맞추며 일본 군가를 부르기 시작했다. 소학교 교사 출신답게 음정과 박자가 틀리지 않고 정확했다.

유키노 신군 코오리오 훈데(눈의 진군, 얼음을 밟으며)
도레가 카와야라 미치사에 시레즈(어디가 강이고, 어디가 길인지도 모르겠네)
우마와 타오레루 스떼떼모오께즈(말은 쓰러지는데 버리지도 못하고)
코코와 이즈꾸조 미나 테키노쿠니(여기는 어딘지 온 천지가 적국이구나)
마마요 다이딴 입뿌꾸야레바(어쩔 수 없이 멈춰서 담배 한 개비 피니)
타모니스꾸나야 타바꼬가 니호응(애석하게도 남은 담배는 두 개비뿐)
-유키노 신군(눈보라의 진군

노래를 마치자 노래의 비정함 때문인지 박정희가 쓸쓸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이 군가를 부르면 국경의 차가운 밤이 떠오르면서 고국 산천이 그리웠지요. 돌아가봤자 별 볼 일 없는 고향인데 왜 그토록 고국 생각에 목이 메었을까요. 어디가 강이고 어디가 늪이고, 어디가 길인지도 모르고, 내가 여기에 왜 서있는지를 모른 채 자신을 돌아보면서 눈물지었지요. 결국은 충성스런 황군이 되는 것만이 성공의 지름길이다 라고 마음 속으로 다졌습니다만... 알고 보면 쓸데없는 짓이었지요. 수치스런 일이었지요. 내 청춘의 초상이 고작 그것이었나, 되돌아보니 왜 이렇게 빈약한 영혼, 좁은 세계관을 가졌나 하고 자책을 해요...”
“나는 ‘라바울 고우타’를 부르면 저절로 가슴이 미어집니다. 사연이 있습니다.”
최남근도 추억에 잠긴 듯 말하며 낮은 목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사라바 라바우루요 마타쿠루마데와(잘 있거라, 라바울아 다시 올 때까지)
시바시 와카레노 나미다니지무(잠시 이별인데 눈물이 번진다)
코이시나쓰카시 아노시마 미레바(사랑스럽고 그리운 저 섬을 보면)
야시노 하카게니 쥬-지세-(야자잎 그늘에 十字星)
후네와 데테유쿠 미나토노 오키에(배는 떠나간다 항구밖 외항으로)
아이시 아노코노 우치부루 항카치(사랑하는 그 처녀가 흔들던 행커치프)
코에오 시논데 코코로데 나이테(소리 죽이고 마음속으로 우는데)
료-테 아세테 아리가토-(두손 합장하며 고마워)
-ラバウル小唄(라바울 고우타)

노래가 끝나고 최남근이 쓸쓸한 표정이 되자 박정희가 물었다.
“사연이 있다고 했지요?”
“그렇지요. 내가 라바울 전선에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남태평양전쟁이 치열해지자 관동군 병력 수송 장교로 몇 달 그곳을 다녀온 적이 있지요. 그때 한 소녀를 만났습니다.”
라바울은 세계 2차대전 때, 일본군이 점령해 남태평양 전진기지로 사용하던 일본 육군과 해군의 전략기지였다. 파푸아 뉴기니아 옆의 뉴브리톤 섬에 있는 조그만 항구도시였다.
“그곳 위안소에서 하루코(春子)라는 이름의 전남 해남 출신 소녀를 만났지요.”
그녀는 가족의 생계를 위해 목포로 배를 타고 나가 근로정신대 모집에 응했다. 군수공장과 간호부, 세탁부 부대를 선택하라는 이야기를 듣고 심부름이나 부엌 일, 빨래를 하는 일 정도로 알고 세탁부를 지망했다. 그러나 몸을 내주는 직업이라는 것을 안 것은 배가 떠난 한참 뒤였다.
라바울로 끌려간 조선 처녀는 육군에 300명, 해군에 200명이 배치되었다. 호주의 역사학자는 추후 조선인과 일본인 위안부가 반반씩 모두 3,000명이 있었다고 밝혔다.
최남근이 라바울을 떠나오기 전 함께 밤을 보낸 하루코가 눈물을 흘리더니 말했다.
“이곳을 도망가고 싶어요. 저기 푸른 수평선 너머로 가고 싶어요. 그 섬에선 야자열매, 바나나, 파인애플, 바닷가 조개만 주워 먹고도 살아갈 수 있다고 해요. 그곳으로 가서 한 세상 편하게 살고 싶어요. 몸이 너무너무 고단해요.”
그 말을 듣고 최남근은 소녀를 데리고 떠날까, 부질없는 생각까지 했다. 그녀는 너무나 순진하고 예뻤다. 헛된 망상이 아니라 함께 꿈꿀 수 있고, 용기만 있으면 결행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미군이 진격해오고, 그들이 일본 본토를 접수하면 일본은 패망하고, 곧 조국이 독립한다는 소문이 공공연하게 유포되었다. 그러면 해방이 될 것이고, 그때 조국에 돌아가 멋진 군인이 되리라, 그는 그렇게 마음 먹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에게 말했다.
“하루코도 고국으로 돌아가야지.”
그러나 춘자는 고개를 저었다.
“이 몸으로 어떻게 돌아갈 수 있나요?”
그러면서 그녀는 울었다. 그녀를 품에 안고 최남근도 마음 속으로 울었다.
다음날 만주 부대로 귀대하기 위해 라바울 부두로 나오자 하루코도 부두로 따라나왔다. 그녀는 하얀 손수건을 흔들었다.
“배의 이별이 어떤 이별보다 슬프고 아프다는 말이 실감나더군. 그 얼굴, 그 애절한 하루코의 표정이 가물가물할 때까지 머릿속에 남는데, 지금도 가슴에서,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습니다. 가슴이 아픕니다.”
“헤어지는 것이 군대의 숙명이니까요.”
“그러나 찾아보았지요. 백방으로 알아보았는데, 해방 후 거기서 살아 돌아온 여자들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 소녀가 꼭 살아서 수평선 너머 야자수 숲이 우거진 섬에 가서 살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거기서 순박한 현지 청년을 만나 아이를 낳고 행복하게 살기를 기원합니다.”
그러나 귀환선의 수뢰 폭발로 300명이 수장되었다고 했다. 폭탄이 비오듯할 때 그녀들은 방공호에도 숨지 못했다고 했다. 모든 것을 포기한 어느 위안부는 “오늘은 제발 폭탄을 맞게 해주세요” 하고 기도했다고 한다.
위안부들은 전사하면 종군간호부로서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된다고 세뇌됐는데, 뒤늦게 그게 거짓이고 위선이며 사기당한 것이라는 것을 알고 이파리처럼 절벽에서 몸을 던졌다고 했다. 장교들의 옥쇄(玉碎) 작전에 멋모르고 뛰어든 소녀들도 많았다고 했다.
여태까지 듣고만 있던 이재복이 말했다.
“정말 나쁜 놈들이네. 나는 목사지만 그런 면에서 천국은 없다고 생각하네. 그런 놈들에게 벼락이 떨어지지 않은 것을 보니 신의 존재를 의심하게 돼. 인간의 야수성이 어디까지인지를 헤아리게 된 것은 다행이지만, 그런 죄악을 저지르고도 징벌을 받지 않은 것을 보면 신의 존재를 의심하게 돼. 좌우간 그놈들의 전쟁범죄는 천추에 길이 기록되어야 할 것이야. 추억은 아프지만 그들을 잊지 마시오. 나는 복음주의자요. 그리고 인본주의자요. 본래 사회주의 사상을 가지고 있지 않았고, 있었다면 민족의식이 가득차 있을 뿐이네. 이런 민족의식이라는 것도 일본놈들이 가르쳐준 것이지. 우리나라를 강점하니 응당 갖는 것이야. 그런데 우리는 불행히도 지금도 식민지 연장이네. 라바울 하늘에서 떠도는 그 소녀의 혼과 우리의 처지가 무엇이 다르겠나. 착실히 앞날을 도모해야 할 거야.”
박정희가 알 듯 말 듯하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대구 항쟁에서 보듯이 시민은 우리 편이네. 왜 그러는지 아시오? 우익은 대부분 일본의 앞잡이로 군림하면서 딴 층위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지. 미국놈들 팔소매 붙들고 아양부리며 영달을 취하고 있네. 그걸 묵과할 수 없지. 지금껏 우리는 우리 스스로 자구책을 강구했지만, 북과도 선을 연결해 그들의 지원도 끌어낼 수 있네. 북은 체제 준비기간이라 외부에 신경 쏟을 여력이 없지만, 여건이 무르익으면 그들도 우리의 동무가 될 수 있지.”
“나는 북의 체제를 탐탁치 않게 여기고 있습니다.”
최남근이 분명한 어조로 말했다. 그는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에게 붙잡혀 곤욕을 치르다 탈출했으므로 북한 동향에 대해서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만주에서 정보장교로 활동한 백선진과 함께 북한을 탈출했다. 그리고 그와 주욱 함께 행동했다. 그러나 그는 먼 후일 결정적일 때 최남근을 돕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세를 만들어 가야 하고, 대세가 만들어지면 놓치지 말아야 하오. 무엇보다 인맥관리를 잘해야 하오. 사사로운 정이 사태를 그르칠 수 있거든. 먼 집안 조카의 민원을 해결하겠다고 나선 것이 얼마나 오류를 범할 위험에 빠지게 되었나.”
이재복이 곽차순 상사를 염두에 두고 한 말이었다. 박정희가 나섰다.
“저는 지금껏 억눌린 사람들 편에 서본 적이 없습니다. 그게 대세가 된 적이 없으니 참여하고 싶은 생각도 없었지요. 이해는 했지만 참여하진 않았습니다.”
“그래도 대세의 힘을 믿어야지. 힘을 믿고 나서면 중심에 설 수 있지. 어떻게든 핵심부에 들어가야지. 운동의 확장력은 그런 패배주의를 극복하는 가운데 찾아지는 거야. 사회주의에 대한 국민 지지와 현재의 군의 조직력이라면 뜻을 관철할 수 있네. 장교 30% 이상을 장악했잖나. 동조자까지 포함하면 반이 될 거야. 혁명은 무르익어가고 있네. 대세의 힘을 믿게. 중심 역할을 해야 하네. 최 소령도 마찬가지고.”
조직의 심부에 들어가라는 말은 가열차게 행동하라는 뜻이다. 이재복은 이상하게 사람을 끄는 마력같은 것이 있었다.
이재복은 경북 안동 출신으로 평양신학교를 나와 일본 교토의 도시샤대학을 졸업한 엘리트였다. 그는 평양신학교 시절 신사 참배를 거부한 교역자들과 함께 기복 위주의 목회보다 항일 참여의 행동파적 목회자의 길을 걸었다. 그런 그를 두고 일부에선 위험시 했고, 다른 일부에선 애국자라고 추켜세웠다.
그가 좌편향이되 따르던 여운형의 노선보다 박헌영 쪽으로 경도된 것은, 대구항쟁을 보고난 뒤 순한 행동으로는 세상을 바꿀 수 없다는 자기확신 때문이었다. 이재복은 박헌영 노선을 따르면서 군사부 총책을 맡았다. 그는 투쟁하다 희생된 친구의 동생인 박정희를 특별히 아껴 국방경비대 군책 임무를 부여했다. 대세의 힘을 믿고 나서면 조직의 심부에 들어갈 수 있다는 이재복의 특별한 배려 때문이었다.

너는 나의 분신

박정희가 경비대사관학교 교관으로 전출된 것은 1947년 9월이었다. 오민균 후임으로 전출되고, 대신 오민균은 소령으로 진급해 광주 4연대로 배속되었다. 박정희는 대위 계급이었지만 그의 경력으로 보나 연치로 보나 소령 진급은 시간문제였다.
두 사람은 임무 교대 겸 회포도 풀 겸 모처럼 술자리를 함께 했다. 대포집의 구석진 방에 자리잡자 박정희가 빈대떡과 뚝배기를 시켰다. 박정희는 새카만 후배에게 고맙다는 말은 하고 싶지 않았다. 그를 경비대사관학교 교관으로 추천한 것이 고마웠지만, 그렇다고 성격상 그런 인사치레를 하는 데는 서툴렀다. 자존심도 있었다. 오민균으로서도 그런 그의 남자다운 기백이 마음에 들어서 교관으로 모셔야 한다고 상부에 건의했다. 박정희가 그의 잔에 가득 막걸리를 따랐다.
“마시자구.”
그들은 단숨에 잔을 비웠다. 박정희는 조카나 막내동생뻘 쯤 되는 오민균이 듬직했다. 정의롭고 남아다운 기개가 있어서 어쩔 때는 자신의 분신처럼 여겨질 때도 있었다.
“몽양 선생을 따랐다지?”
“그렇습니다.”
“결국 그분도 가셨군. 누구 짓 같애?”
“빤한 일 아닙니까.”
그는 직답을 피했다.
“빤한 일이라니?”
“몽양 선생을 제거함으로써 이익을 추구하려는 자들 소행이죠.”
“서투른 신념을 애국으로 포장하는 직업적인 테러리스트들이 있어. 경찰과 그 하수인들이야. 내 고향 대구에서 일어난 10월 항쟁도 시민들은 경찰과 군을 구분해서 보지. 경찰은 일본과 미국의 앞잡이이고, 군은 민족 집단으로 본다구. 경찰은 일제 때와 마찬가지로 양심 세력을 빨갱이로 몰아 체포하고 있지. 잘못된 일이야. 나 역시도 일본군 장교로 중국 팔로군을 격퇴하는 데 앞장섰지만, 해방되어서는 조국에서 떳떳한 내 나라를 만드는 데 일조하고 싶었어. 나이가 젊어서는 분별력이 없으니 일본이 내 나라려니 여기고 충성하는 것으로 알았고, 그건 다른 특별한 뜻이 있었던 것이 아니야. 지금 돌이켜보니 부끄럽네. 헌데 미군정과 경찰놈들이 하는 짓을 보니 영 틀렸다는 생각을 하네. 이게 뭔가?”
그는 형 박상희의 죽음의 근원도 배지만 바꿔 단 경찰국가 구조 때문이라고 보았다.
“선배님들 중엔 일본군을 탈출해 독립운동에 참여했던 분도 계시다는 것을 알고, 나 역시도 부끄러웠습니다. 왜 탈출할 생각을 못했는지, 왜 일본군으로서 전공을 세울 꿈만 꾸었는지... 참으로 부끄러웠습니다. 나는 모범생으로만 살아선지 모든 질서에 순응했던 편이었지요. 그래서 해방된 조국에 돌아온 뒤 조국과 함께, 민족과 함께 살겠다고 다짐한 사람들을 따르기로 했습니다. 몽양 선생을 찾았던 것도 그런 제 인생관의 지향점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세상 돌아가는 게 이게 아니군요. 답답합니다.”
“이런 세상을 보니 꼭 임진왜란 생각이 나는구먼. 반만년 우리 역사상 가장 불행했던 시기가 임진왜란과 구한말에서 오늘까지의 50년 체제 아니겠어?. 이 50년 체제는 보아하니 앞으로 50년, 아니 더 지속될 것 같아. 절망적이네. 자그마치 한 세기야. 이대로 굳어버린다면 이백년도 더 갈지도 몰라. 외세의존 세력이 권력을 잡고 있는 한 한민족이란 씨가 말라버릴지도 몰라.”
“임진왜란과 현재의 50년 체제....”
오민균이 그의 말을 받아 입안에서 굴리듯이 되뇌었다.
“그렇지. 임진왜란 무렵의 1590년대 전후에 태어난 사람들이 가장 불행했어. 10대에 천 명 이상의 지식인들이 희생된 기축옥사를 겪고, 20대에 임진왜란, 30대에 인조반정, 40대에 정묘호란, 50대에 병자호란을 겪었어. 한 시대를 불행으로 산 사람들이야. 당시의 참상은 차마 입에 담을 수가 없었네. 유성룡의 징비록을 보면 ‘기아가 만연하고 역병이 겹쳐서 살아남은 자가 100명에 한 명 꼴이었다’고 기록돼있어. 부모가 자식을 삶아먹는 경우도 있고, 모든 사람들이 앙상한 나뭇가지처럼 메말라 있었으며, 후금의 군대가 철수하면서 백성을 어육으로 만들어 싣고 갔다는 기록도 있어. 수십 만명을 노예로 잡아가고, 또 팔기도 했다는 거는 이미 알려진 일이고... 그 다음 살기가 어려웠던 시기가 바로 지금이야. 나라를 빼앗긴 19세기 말부터 20세기 현재까지 온통 우리의 흑역사야. 이런 수난사에는 공통점이 있지.”
“무엇입니까.”
“생각해보지 않았나?”
“선진 문물을 누가 먼저 받아들이느냐의 여부가 나라 운명을 갈라놓았다고 봅니다. 일본의 예에서 보듯이 대 항로가 열렸던 16세기에 선진 문물을 받아들여서 공격선을 만들고 조총을 만들어 제국주의 시대를 열었습니다. 개혁이 발전을 추동했습니다. 물론 추한 추동력이었습니다만, 그때 우리는 지도자들이 원리주의적 당쟁, 공리공담에만 빠져있었죠. 나라를 리셋팅하자는 개혁적인 인사를 되려 반역으로 몰아 처단하고, 어떤 누구도 가만있으라 하고, 대신 국모상을 당해서 갓끈을 오른쪽으로 돌리매느냐, 왼쪽으로 돌리매느냐 따위로 되도 않는 명분 싸움으로 피터지게 싸우며 경쟁자를 제거했습니다. 왼쪽으로 돌리면 어떻고, 오른쪽으로 돌리면 어떻습니까. 싸워도 좀 이치에 맞게 싸워야지, 그런 빈약한 명분, 어리석은 영혼으로 싸우니 나라의 장래가 뭐가 되겠습니까.”
“그러니까 나라를 빼앗겼지. 임진왜란 때 왜군이 부산포에 들어왔을 때 조정에서는 왜나라가 부모국에 조공을 바치러 온 줄 알았다고 했다는 것 아닌가. 할 말 다했지. 선물이 대포인 줄도 모르고 말이야. 후금이 겨울철 압록강을 건너서 우리 강토에 쳐내려오자 수호병들이 다급하게 재난 봉화를 올렸는데, 명색이 장수라는 자는 군사들이 추워서 모닥불을 피운 줄 알았대잖아. 그러니 일주일만에 서울이 함락되고 말았지. 하지만 지금 그때 일 가지고 탓할 수만 없어. 지금이 더 엉터리니까. 그 많은 정치 단체들, 군사 단체들이 난립해서 뭐하자는 것인지.... 생산적인 것은 없고, 오직 싸움질이야. 한반도 운명이 또다시 외세에 휘둘려 난도질당하고 있는데 지도자란 자들의 행위가 꼭 전등불에 엉기는 불나방들같이 서로 빈 총질만 하며 난리란 말이야. 양심적인 지도자는 하나 둘 제거되고 있고 말이야. 나라라고 할 수 있겠나?”
박정희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오민균이 가볍게 한숨을 쉬자 그가 다시 말했다.
“돌아가신 형님의 길이 옳다고 보네. 그 길은 외롭지만 우리가 걸어가야 할 길이야. 미국놈들을 몰아내야 해. 그 길이 어렵다면 군정의 하수인인 경찰놈들부터 정리해야지. 형님이 관리했던 건준 치안대도 있고, 민전 보안대도 힘이 약하지만 명맥은 유지되고 있네. 이들을 외면하고 일제 경찰에게 치안권을 넘기니 질서가 무너져버린 것이야. 첫 단추가 잘못 끼워진 거야. 국방경비대도 마찬가지지. 경찰 예비대로 본 것부터가 잘못이고, 군인을 감시 대상으로 보는 것도 잘못이야.”
“정탐의 대상이라구요?”
“그래. 오 소령도 지금 감시 대상이란 것을 알아두기 바래. 김창동이란 자, 벌써 나와 오 소령이 접촉한 것도 캐치했을 거야. 미행하고 있어. 나는 형님의 과거 행적 때문에 혐의를 받고 있다고 해도, 오 소령은 뚱딴지 같지 않나? 혹, 김창동이란 자와 사적 감정이 있나?”
“사적 감동이랄 것은 없습니다. 그가 2기 생도 입학시험 때 제가 면접에서 탈락시켰습니다. 과거 행적을 보니 도저히 입학시킬 수 없었습니다. 그후 3기 응시해 졸업한 뒤 1연대 정보장교로서 사관학교를 방문했을 때, 쫓아버렸습니다. 생도들 신상파악을 하는 음험한 자였습니다.”
“정보장교에겐 영역의 경계가 없긴 하지. 나는 그자를 무서워서 피하는 게 아니라 추해서 피한다고 보면 돼. 조심하도록. 나는 형님이 숨진 뒤 계속 감시당하고 있어. 리스트에 올라있는 것 같아.”
“선배님에게 위해가 가해진다면 내가 가만 있지 않겠습니다.”
“그래, 우리가 원하는 세상을 만들어야지. 언젠가 지시가 내려갈 거야. 대신 경고망동하지 말라구. 착실히 다지고 내면을 세우는 거야.”
그들은 한 말의 막걸리를 다 마시고 헤어졌다.

경비대 사관학교에서 모처럼 체육대회가 열렸다. 미 24군단장이자 미군사령관 하지 중장이 사관학교에 불쑥 나타났다. 그는 전방을 방문하는 길에 연병장에서 유쾌한 축구 경기가 열린 것을 보고 예고없이 사관학교를 찾은 것이다.
“두 시간 후에 오도록.”
그는 전용차를 보내고, 젊은 생도들이 제식훈련 경연을 벌이고, 축구시합을 하는 곳으로 갔다. 그는 이런 즉흥적인 여유도 갖고 있었다. 안내를 받아 축구 경기를 구경하던 중 누군가로부터 무전 연락을 받더니 학교측에 급히 차를 내달라고 요구했다. 운전자로는 오민균이 차출되었다. 책임있는 장교가 운전하도록 했는데 오민균이 선택된 것이다. 그는 운전과 영어회화가 수준급이었다. 그러나 그는 난감했다. 체육대회에 어린 동생을 데려왔던 것이다. 고향에 갈 때마다 유독 따르는 셋째 동생이었다. 오민균이 하지 장군 앞에서 말했다.
“저는 지금 동생을 데리고 있습니다. 축제를 구경시켜주겠다고 약속하고 고향에서 데려온 것입니다. 아이를 놓아두고 갈 수가 없는데 난감하군요.”
하지 장군이 이 말을 듣고 껄껄 웃으며 받았다.
“젊은 친구야, 뭐가 그게 어렵나. 함께 태우고 가면 되지. 나는 어린이를 좋아한다네.”
그래서 오민균이 동생 오능균을 태우고 경비대사관학교 교정을 출발했다. 이때 능균의 나이 다섯 살이었다. 오능균 어린이는 뒷자리에 앉은 하지 장군의 무릎에 앉아서 재잘거렸다. 하지는 두려워하지 않고 재잘거리는 어린이의 말에 귀를 기울이며 유쾌하게 웃었다.
“영 맨, 아주 잘 생겼군. 낯가림도 없이 천진난만해.”
그러던 하지가 정색을 하며 오민균에게 물었다.
“귀관은 미국의 대 한반도 정책을 어떻게 평가하는가.”
“제 견해를 말씀해 달라는 것입니까.”
“그렇지. 본인의 견해도 좋고, 시중의 여론도 좋네.”
“한국의 윗사람들 습관 중의 하나가 속엣말을 하라고 했다가 진실로 속엣말을 꺼내면 나중에 괘씸하다고 목을 잘라버린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진실을 말하지 못하죠. 그런 것 때문에 내면을 감추는 이중적 태도를 보입니다. 그것이 사는 방식이 되었습니다.”
“흥미있는 말이군. 나 들으라고 한 말인 것 같은데, 나는 옹졸한 지휘관이 아니네.”
무슨 뜻인 줄 알고 하지는 여유있게 반응했다.
“그럼 말씀드리겠습니다. 안타깝게도 미국은 준비없이 한반도를 점령했습니다.””그런가. 헌데 나한테 그런 말을 해준 사람은 아직까지 아무도 없네. 솔직하게 말하는 건 귀관이 유일하네. 비굴할 정도로 아첨만 하지. 그렇다면 왜 그런가.“
“각하께서는 용맹하고 투철한 군인정신을 갖고 계십니다만, 복잡하게 얽힌 한반도 정치 상황을 풀어가는 데는 한계가 있는 것 같습니다. 한반도의 역사와 인식을 무시하셨으니까요,”
하지 장군이 불쾌해 하는 것 같더니 오민균이 좀전에 한 말을 되새기는지 담담히 응했다.
“그런데 말일세, 나도 솔직히 말하자면, 내가 한반도를 접수할 임무를 부여받은 것은 전문성이 있어서가 아니라, 내 용맹성 때문이야. 내가 태평양사령부 중 가장 먼저 오키나와를 점령했고, 한반도에 가장 가까운 위치에 있었으니까 국방성은 나더러 가능한 빨리 한반도를 접수하라고 명령했네. 그래서 내가 여기 온 것이야. 다른 장군이 먼저 오키나와에 상륙했으면 그가 먼저 조선 반도에 상륙했겠지. 내가 잘 모르듯이 그도 조선 반도에 무지했을 거야. 2차대전 발발시 미군 장교와 병사 중에 일본어를 완전하게 말하는 자는 오만 명이 넘고, 한국어를 습득한 자는 한두 명에 불과했어. 선교사 아들로 입대한 자가 있는 정도야. 구하려면 그 이외에도 있었겠지만 우리가 조선에 관심이 없으니 구할 필요가 없었던 거지. 미국의 욕망을 채우기엔 조선 반도는 매력있는 땅이 못되었어. 사실 나는 한반도 점령군사령관으로 온 것을 달가와하지 않네. 흥미 없는 곳이야. 가난하고 더러운 나라에 무슨 매력이 있겠나.”
하지는 2차대전 중 17차례나 전쟁을 치른 용장이었다. 군인으로서 전공을 쌓는 데 자부심을 갖고 있었으나 정치적 식견은 없었다.
“행정 편의를 위해서라지만 일제 강점기의 경찰 조직과 공무원 조직을 그대로 인수받은 것이 큰 실책입니다.”
“기왕 존재했던 행정 체계를 인수받았다면 주민 입장에서도 편리했을 것이 아닌가. 한국 관리들이나 내가 접촉한 대부분의 인사들도 그 점에 동의했지.”
“그것이 잘못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시각은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일본과는 수백 년의 적입니다. 각하는 한국의 역사와 국민 여론을 중시하지 않은 것입니다.”
“나를 돕는 일본인이나 총독부의 조선인 관리들은 모두 나에게 충성스럽고, 성실한 사람들이야.”
“충성한다고 해서 다 옳은 것은 아닙니다. 일본은 패망 직후 국내에 결성된 건국준비위원회에 치안권을 넘겨주고 무사 귀환을 요구하며 조용히 물러가려고 했죠. 그런데 미군사령부와 교신한 이후 태도를 180도 확 바꾸었습니다. 비극의 씨앗은 거기서 잉태되었습니다.”
“비극의 씨앗? 그래, 패전국 인수 인계 과정에서 파트너가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파트너는 조선총독부가 대표성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게 비극의 씨앗?”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조선은 조선인이 주인이고, 협상의 주체가 되어야지요.”
그런데 자료에서 밝혀진 내용을 보면, 한반도 주둔 일본군 제17방면군과 오키나와에 주둔중인 미 제24군단이 나눈 통신에서 보듯이 일본군은 패전국이 아니라 전승국 미국과 동등한 자격을 가지고 활동하고 있었다. 미군사령부는 ‘일본은 미군이 그 권한을 인수받을 때까지 북위 38도선 이남에서 조선의 치안을 유지하고 행정기관을 운영하라’고 지시했다. 조선인 지도자는 철저히 배제되었다.
“혼란을 방지하는 것은 점령국 정책의 기본 스탠스 아닌가.”
“그것이 잘못됐습니다. 패전국 일본이 여전히 조선을 책임지다니요. 조선은 조선 사람이 주인이죠. 그리고 조선은 전쟁국가가 아니라 피해국입니다. 해방되자 조선에는 남북 지역 모두에 건국준비위원회 치안대라는 조직이 생겼습니다. 남북 모두 하나된 치안 조직입니다. 조선총독부도 8.15 당일 여운형 선생에게 정권 이양 절차를 밟았습니다. 이렇게 준비하고 있는데 전승국 미국이 들어서서 가로막았습니다. 미국은 점령국의 자격으로 임정도 건준도 인민위원회도 인공도 모두 부정했습니다. 대신 조선총독부를 인정했습니다.”
일본군 제17방면군 사령관과 미 제24군 사령관이 교신한 통신문을 보면, 미군사령부는 전후 처리 과정에서 일본에 모든 권한을 위임했다.

△(1945)9월1일 일본 제17방면군 사령관으로부터 미 제24군 사령관 앞
“조선인 중에는 공산주의 혹은 독립운동자가 있는데, 이 기회에 치안을 어지럽히려고 계획하는 자가 있다. 경찰력은 군대의 지원으로 비로소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상태다.”
△9월1일 미 제24군 사령관으로부터 일 제17방면군 사령관 앞
“일본군은 미군이 그 책임을 인계받을 때까지 북위 38도 이남에서 조선의 치안을 유지함과 동시에 행정기관을 그대로 유지하기 바란다. 이를 위해 오늘 미군기가 조선인에 대해서 치안을 유지하는 포고(전단)를 투하했다.”
△9월2일 미 제24군 사령관으로부터 일 제17방면군 사령관 앞
“어제 남조선에 투하한 전단(선전삐라)에 대해 조선인의 반향을 보고할 것”
△9월2일 일 제17방면군 사령관으로부터 미 제24군 사령관 앞
1. 1일에 투하된 전단에 대한 半島民의 반향은 상당히 크며, 치안 유지에 좋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공산계 적색분자의 책동을 분쇄하는 데에도 상당히 유효하다.
2. 장래 이러한 종류의 전단 투하를 계속 희망한다. 미군의 진주까지 치안 유지의 책임은 일본군 사령관에게 있으며 약탈, 폭력, 소요, 파괴 등을 행하는 자는 군율에 의해 처단된다는 점을 일반 민중에게 통고(전단 투하)하길 바란다.
<김종민의 ‘해방정국 친일파 상대한 미군정, 치안 맡은 일본군...비극의 씨앗’ 인용>

미군사령부는 조선총독부가 요청한대로 포고문을 연일 남한 상공에 삐라로 만들어 뿌렸다. 일본군은 그들이 적대시했던 공산주의와, 미래에 있을 소련 공산주의의 확장을 우려하며 미국을 자극, 이용함으로써 자신들이 조선의 치안권과 행정 기관을 해방 이후에도 장악하는 권한을 확보했던 것이다.
한반도 점령을 앞두고 있는 미24군단은 치안과 행정 공백이라는 혼란보다는 현재의 질서를 원했으므로 일본군의 의사를 편의적으로 받아들였다. 그 결과 조선총독부는 해방되자마자 건국준비위원회에 맡겼던 치안권을 재빨리 회수하고, 치안 유지와 행정 기관 유지 권한을 종래와 다름없이 행사했던 것이다.
전후 일본은 소련에게 혹독하게 보복을 당하고 북한에서 쫓겨난 반면, 미국으로부터는 보복을 피하고 일제강점기의 인적 자원을 그대로 남한 사회에 남겨둠으로써 한반도 상황을 그들의 진의대로 관리하고, 운영했다. 그 결과 한반도 미래청사진이 크게 왜곡되었다. 본래 일본은 공산주의를 군국주의의 대적 개념으로 여기고 체제 유지의 수단으로 대대적으로 소탕했고, 패전 후 소련의 보복이 가혹해지자 더욱 증오심을 갖게 되었고, 그것을 한반도 정책에 이용했다.
“조선도 일본의 속국이니 우리가 그렇게 관리할 수밖에 없지. 패배한 일본군이 연합국의 카운터 파트가 되어 전후 관리의 당사자로 참여한 건 당연한 일 아닌가.”
“그 지점이 우리와 다릅니다. 우린 피해자입니다. 전범국가가 아닙니다. 전쟁이 끝났으니 조선은 독립국가입니다. 그런데 같은 전범국가로 몰아가고, 대신 역설적으로 전범국가인 일본에겐 관대하고 피해국인 우리에겐 가혹한 이중성을 보였습니다.”
“귀국의 지도자들은 통일된 의사를 갖지 못했어. 내부에서 토론을 거쳐서 합의점을 찾아 우리와 협상을 요구했어야지 중구난방이니 누구 말을 믿으란 건가. 내 경험칙상 싸우면 싸우는 데 집중하다 보니 실리를 못챙기지. 결국 작은 것에 목숨 걸게 돼. 명분없는 싸움도 많고 말일세. 단순히 자존심 싸움으로 사태를 그르치지. 조선의 지도자들은 미래의 세계관이 빈약해. 분열적 행태는 누가 봐도 혼란스럽지. 그래도 미국 탓인가?”
“한반도의 역사성과 항일 투쟁의 역사를 보아주십시오.”
“난 한국 문제엔 지쳤어. 그래서 정치 담당 참모에게 전적으로 임무를 부여했네.”
그는 정치문제에 관한 한 복잡하게 따지는 것을 싫어하는지 곧 그의 무릎에서 꼼지락거리며 놀고 있는 어린이를 상대했다. 오능균은 하지의 군복 상의에 붙어있는 금빛 견장을 매만지며 신기해했다. 어깨의 계급장을 만지작거리면서 뭐라고 묻는데, 하지 장군이 오민균에게 물었다.
“이 ‘젊은이’가 뭐라고 말하고 있나?”
“저와 장군 각하 중에서 누가 계급이 높나고 묻고 있군요.”
그러자 하지가 하하하, 큰소리로 웃었다.
“그렇다면 나보다 귀관이 높다고 하지. 탐구심이 많은 ‘철없는 동생’을 즐겁게 해야 하지 않겠나?”
오민균은 능균에게 하지 장군이 말한대로 형이 계급이 높다고 말했다. 어린 능균이 탄성을 지르며 좋아라 하며 이것저것 따져물었다.
“이 아이가 또 뭐라고 하는가?”
“그렇다면 각하가 제 부하냐고 묻습니다.”
“그렇게 해도 무방하이. 하하하.”
차는 후암동 일본인 주택가를 가로질러서 목적지에 도착했다. 스기나무가 우거진 육중한 사저 앞인데, 대문 앞에 아리따운 젊은 여인이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이 아이 때문에 나는 귀관을 오래도록 기억하겠네. 행운을 비네.”
그가 차에서 훌쩍 내리더니 여인을 따라 대문 안으로 사라졌다. 그는 일과를 버릴만큼 사생활을 즐기는 여유도 갖고 있었다. 먼 훗날 오능균은 이를 또렷이 기억했다.
미국의 대 한반도 전후 처리에 대해 좀더 살펴볼 필요가 있다.
미국과 일본은 1945년 5월 스위스에서 일본의 항복과 전후 처리에 관한 비밀 협상을 가졌다. 회의 당사자는 스위스 주재 일본 무관 후지무라 중령과 미국 국무성의 아렌 달레스였다. 이 비밀회의에서 미국은 일본측으로부터 항복 문서만 받아내면 족하다고 보고 별다른 요구사항이 없었으나, 일본은 미국측에 세 가지 요구 조건을 제시했다.
첫째는 천황 주권을 유지해달라는 것이고, 둘째는 일본이 섬나라이기 때문에 배가 없으면 먹고 살 길이 막막하니 현재의 모든 배를 그대로 인정해달라는 것이었다. 세 번째 조건은 식민지로 갖고 있던 조선과 대만을 일본 영토로 계속 양해해달라는 요구였다.
첫 번째 요구 사항인 천황제를 유지하려면 일본은 히로히토를 전범으로 처리해서는 안되었다. 히로히토는 단순한 국가 상징이 아니다. 대일본제국을 하나로 묶는 야마토 다마시(大和魂)의 꼭지점인 것이다. 그래서 일본은 항복하기 전부터 천황제를 유지하려고 온갖 공작을 꾸몄고(그것은 다시 일어선다는 야망의 표시이기도 하다), 이때 미국은 별다른 고려없이 일왕 히로히토를 전범으로 처리하지 않는 데 동의했다. 미국의 시각으로 볼 때, 전범은 히로히토가 아니라 강경 군부였던 것이다. 2차대전의 전범 히틀러와 무쏠리니는 처단된 반면, 히로히토는 건재한 것은 이런 배경 때문이었다.
전승 연합국은 히로히토의 전쟁 범죄를 조사하여 제소하고자 했다. 관동군 731부대의 인간 생체실험, 난징대학살, 일본군 세계여성 성폭행범죄(위안부), 조선인 강제징용·강제노동, 황금백합작전(일본이 패망 직전 중국 등 아시아 전역에서 막대한 양의 황금과 보물을 약탈한 작전), 그리고 각종 제노사이드(인종, 이념 등의 대립을 이유로 특정 집단의 구성원을 대량 학살한 행위) 등을 진상 조사하자고 했다. 그러나 태평양전쟁의 단독 전쟁 주역인 미국이 이를 외면함으로써 다른 연합국이 개입할 소지가 차단되었고, 이로 인해 A급 전범자 히로히토를 극동전범재판소에 회부하고자 하는 연합국의 계획은 좌절되었다.
미국의 이런 태도에는 루즈벨트 대통령과 달리 소련을 싫어하는 후임 트루만 대통령의 퍼스낼리티가 크게 작용했다. 루즈벨트는 소련과 함께 세계 질서를 잡아가고자 하는 친소파였으나 트루만은 소련을 경계했다. 영국의 윈스턴 처칠 수상의 격려 발언도 트루만을 고무시켰다.
본래 미국은 영국과 중국, 소련 네 나라가 함께 일본 본토를 분할 통치하기로 했다. 1945년 7월 26일 공포된 포츠담선언 제7항은 연합국은 일본 영토의 보장점령, 즉 분할점령을 결정했다. 홋카이도는 소련, 혼슈 및 오키나와는 미국, 규슈는 영국, 시코쿠는 중국이 토막내 분할 통치하기로 했다. 그런데 처칠이 미국의 트루먼에게 “소련이 극동에 교두보를 설치하려 한다”고 전하자 트루만은 이 분할 통치 계획을 취소했다. 처칠은 소련을 ‘철의 장막(Iron Curtain)’ 속에 있는 ‘음험한 곰’이라고 규정하고, 소련의 야욕을 경계했다.
1946년 3월 5일 미국을 방문한 처칠은 미주리주 웨스트민스터 대학에서 ‘평화의 원동력 (Sinews of Peace)‘이라는 제목의 연설을 했다.
“오늘날 발트 해의 수데텐란트(폴란드 북부)에서부터 아드리아 해의 트리에스테까지 대륙을 가로지르는 ‘철의 장막’이 내려져 있다. ‘철의 장막’ 뒤에는 바르샤바, 베를린, 프라하, 빈, 부다페스트, 베오그라드, 부쿠레슈티, 소피아, 이 유명한 도시와 주민들이 이른바 소비에트 연방의 세력권에 있으며, 그들 모두는 어떤 식으로든 소련의 영향 뿐만 아니라 커져가는 모스크바의 통제에 묶여 있다.”
사실 ‘철의 장막’이라는 말은 나치 독일의 선전상 요제프 괴벨스가 적국인 소련 사회주의의 팽창을 경계하는 표현으로 한 말이었다. 소련을 경계하는 데 있어선 처칠도 적(독일)과 같은 시각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서방세계의 패권을 향유하고자 하는 대결의 서막이었다.
전 인류에게 전쟁의 참화를 안겨 주었던 2차 대전이 연합국의 승리로 끝난 지 1년이 안된 시점이었고, 세계는 전쟁이 없는 평화에 대한 부푼 꿈을 꾸고 있을 때, 처칠은 새로운 세계 질서를 냉전구도로 몰아가는 신호탄을 쏘아올린 것이다. 이것은 엉뚱하게 히로히토를 사면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트루만은 동북아에서 소련과 중국의 사회주의 팽창을 저지하고 일본의 동반국가로 이끌어내려고 전략을 수정했다. 그는 개인적으로 대학시절부터 일본인과 친한 관계를 맺어온, 이른바 친일파였다.
그리고 미국은 일본과 3년의 전쟁을 치른 것 이외 나머지 150년은 우호국이었다. 영국 역시 일본과 싸운 적이 없을 뿐만 아니라 백년 이상 대사를 교환한 우호국이었다. 특별한 이해가 없는데 일본과 전후에도 원수질 일이 없었다.
그러나 역사 정리 차원에서 트루만과 처칠의 행동은 반문명적인 태도였다. 일본 제국의 천황제 유지를 인정한 미국의 행위는 누가 봐도 인권적 차원, 정의의 차원에서 황당하고도 수긍하기 어려웠다.
일본이 저지른 전쟁의 책임을 묻지 않은 부작용은 당장 나타났다. 패망이 되었어도 일본군은 여전히 한국 사회에서 야만적 폭력행위를 멈추지 않았던 것이다. 일본은 소련군이 사할린-홋카이도-일본 본토로 진격해올 것을 우려해 사할린에서 조선인을 소련군 스파이로 몰아 집단 학살했다. 일본인에게 조선인이 보이는 즉시 죽이라고 사주하기까지 했다. 일본은 진격해 내려오는 소련군에 조선인 징용자 1만 여명이 보복심으로 합세하면 일본 북방 지역을 점령당할 것이라고 보았다.
이 결과 일본군은 일본 북부 아오모리현에 끌려간 조선인 강제징용자와 강제노동자를 해방 일주일만에 서둘러 귀국선에 승선하도록 명령하고, 이중 수천 명을 바다에 수장시켜버렸다. 바로 우키시마호의 폭침이다. 일본군은 혼슈의 최북단 시모키타반도 일대 군사 시설에 투입되었던 1만여 명의 조선인 징용자를 긴급 소개하기 위해 이들과 그 가족을 오미나토 군항으로 들어오도록 유도하고, 이들을 우키시마호에 태워 일본 교토부 마이즈루만에서 폭파 침몰시켰던 것이다. 일본측은 사고사거나 미군 기뢰에 의한 침몰이라고 발표했으나 생존자의 여러 증언과 객관적 원인 규명상 의도적인 폭침이었음이 드러났다. 그런데도 수송 당사자인 일본과 당시 전후 처리를 책임지고 있는 미국은 75년이 지난 지금까지 이를 회피하거나 외면했다. 명확한 원인 규명과 피해 상황은 여전히 미제로 남아있다.<이상 전재진 우키시마호폭침진상규명회 대표의 ‘우키시마호 폭침사건은 끝나지 않았다’ 중 일부 인용>
미국이 일본 천황제를 인정해준 다른 소문도 떠돌았다. 미국은 일본 황실이 조선과 대만 식민지 오지에 은닉해두었던 수천 톤의 금괴를 미국이 전쟁배상금으로 받고 천황제를 양해했다는 설이다. 소설인 듯 소설 아닌 소설 같은 이 이야기는 일부에서 끊임없이 회자되었다. 이 금괴는 물론 중국, 조선, 대만, 필리핀, 인도지나 반도 등 일본 식민지에서 약탈한 재화들이라는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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