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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 노키즈존'의 세상을

[청소년 인권을 말하다] '노키즈존' 논의에 왜 어린이청소년의 권리는 빠졌나

'노키즈존'이 늘어나고 있다. 흔히 '어린 사람'이 입장할 수 없는 공간을 일컫는 말인데, '어린 사람'의 기준은 공간마다 다르다. 어떤 가게에서는 영유아 및 어린이(보통 14세 미만)의 출입을 금지하기도 하고, 또 다른 곳에서는 청소년 및 중고등학생의 입장을 제한하기도 한다. 카페나 식당과 같은 영업장 등 공공장소에서 특정 나이를 기준으로 출입을 막는 일은 언제부터 생긴 걸까?

올해 3월, 어린이 작가 전이수 님의 일기가 공개되면서 다시 한 번 '노키즈존'이 우리 사회의 쟁점으로 떠올랐다. 전 작가는 일기를 통해 동생의 생일을 맞아 찾아간 레스토랑에서 "여기는 노키즈존이야. 애들은 여기 못 들어온다는 뜻이야"라며 출입을 거부당한 경험을 이야기했다. 이 일기는 여러 인터넷 기사와 온라인에서 언급되며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이전에도 '노키즈존'을 둘러싸고 찬반 논란은 있었다. 하지만 보통 '무개념 부모'의 문제를 지적하거나 '아이를 데리고 다니는 양육자들이 갈 곳이 없다'는 문제로 이야기되곤 했다. '아이들'은 부모가 데려왔다는 생각이 있고 '부모들의 문제'로만 여겨졌기 때문이다. '노키즈존'의 직접 대상이 되는 어린이와 청소년들의 문제로는 잘 인식되지 않은 것이다. 이 점에서 전 작가의 일기가 우리 사회에 던진 메시지를 주목할 만하다. "노키즈존 때문에 아이들이 상처받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는데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는 반응은 지금까지 우리 사회가 '노키즈존'이 어린이청소년의 권리에 관한 문제로는 인식하지 않았다는 걸 보여준다. 이 일기는 "아빠! 왜 개와 유대인은 가게에 들어갈 수 없어요?"라는 문장으로 끝맺는다. 공공장소에서 어린이 청소년의 출입을 금지하는 것이 마치 개와 유대인의 출입을 금지하는 것과 비슷하다는 문제의식을 알 수 있다.

'노키즈존'은 어린이 청소년에 대한 차별


'노키즈존'을 영업 방침으로 삼는 업주들의 입장에 따르면 아이들이 가게 안에서 뛰다가 사고가 날 위험이 있다는 것과 아이들이 내는 소리가 시끄러워 다른 손님들에게 방해가 된다는 것이 노키즈존의 주된 이유이다. 하지만 이는 우려일 뿐이다. 위험한 일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우려와 소란이 발생할 가능성을 그 집단 전체의 출입을 거부하는 이유로 삼을 수 있을까? 만약 아이들이 가게 안에서 뛰다가 사고가 날까봐 걱정이 된다면, 뛰어다니는 아이들에게 조심하라고 주의를 주거나, 설령 사고가 나더라도 큰 위험이 되지 않도록 가게의 구조를 바꾸고 모두가 안전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장비를 갖출 필요가 있을 것이다. 만약 아이들이 내는 시끄러운 소리가 다른 손님에게 방해가 될까 걱정이 된다면, 그 소음이 너무 커졌을 때 적절한 대응을 하면 될 일이다. 그런데 왜 특정 상황과 순간이 생기면 이렇게 대응합시다, 라고 하지 않고 아예 출입을 금지하는 걸까?

일하는 사람에게 반말을 하거나 물건을 집어던지는 등 무례하게 구는 진상 손님을 일일이 대응하기 힘들다는 이유로 갑질을 자주 일삼는 사람들의 연령대를 특정하여 "몇 살에서 몇 살까지는 진상 손님일 것 같으니 들어오지 마십시오"라고 주장할 수 있는가? 조용한 분위기를 유지해야 한다는 이유로 소음을 낼 가능성이 큰 '목소리가 큰 사람'의 출입을 금지시키는 사례가 있는가?

2017년, 국가인권위원회는 식당에서 아동이나 아동을 동반한 손님의 출입을 금지한 것은 아동을 차별하는 행위라고 판단했다. 그러면서 '아동이 차별받지 않을 권리'가 '사업주들이 누리는 영업의 자유'보다 우선한다고 강조했다. 또한 식당의 이용 가능성과 연령 기준의 합리적 연관성이 없으며, 식당을 이용하는 아동 중 일부가 산만하거나 무례한 행동을 한다는 이유로 아동 및 아동과 함께하는 사람들의 식당 이용을 전면적으로 배제하는 것은, 일부의 사례를 보고 과도하게 일반화한 것이라고 봤다.

국가인권위가 판단한 것처럼 '노키즈존'은 결국 어린이 청소년에 대한 차별일 뿐이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 차별 행위에 대해 감당해야 하는 부담이 적기 때문일까? 여전히 '노키즈존'은 영업의 자유라며 당당하게 차별을 시행하는 곳이 적지 않다. 가게 안에서 일어날 수도 있는 사고를 대비하기에는 비용이 들고 소음에 대응하기는 벅차다는 이유로 '어린 사람'의 입장을 금지시키는 '손쉬운 방법'을 택한 것은 아닐까? '노키즈존'이 어린이 청소년에 대한 차별이라는 사회적 인식이 부족해서일 수도 있지만 그게 차별 행위임을 알면서도 차별을 줄이기 위한 방법을 고민하는 걸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는 의심을 거두기 어렵다.

소음과 소란을 거부하는 사회


'노키즈존'이 점점 늘어나는 또다른 이유는 '노키즈존'을 선호하는 사람들이 많아져서이지 않을까 하는 질문을 던져본다. 가게를 운영하지 않더라도 '노키즈존'을 찬성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언젠가부터 우리 사회는 어린이·청소년들의 행동 중에서도 몰려있거나 뛰어다니는 것, 그리고 어린이·청소년들이 내는 소리 중에서도 특히 우는 소리를 싫어한다. 카페나 식당과 같은 가게를 이용할 때 시끄러운 소리가 나면 불쾌해하며 자신이 '손해를 봤다', '방해받았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공공장소에서 나는 타인의 행동, 소리를 받아들이기 힘들어하는 것이다.

하지만 여러 사람이 이용하는 공간에서 어떤 소리가 나고, 다른 존재의 행동에 크든 작든 영향을 받게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인가. 언제부터 주위의 소란스러움이 '방해'로 여겨졌을까. 우리 사회의 소음에 대한 기준이 점점 까다로워지고 있다는 생각도 든다. 어쩌면 우리 사회가 어떤 소리와 행동은 받아들이면서 어떤 소리와 행동은 이질적으로 느끼며 불편해하는지가 핵심 문제인지도 모른다. 같은 소리라 해도 '어른들'이 내는 소리는 받아들이지만 '아이들'이 내는 소리에는 유독 눈살을 찌푸리는 경우가 있다. 이런 점이 '노키즈존'을 찬성하고 어린이·청소년에 대한 차별을 자신도 모르게 지지하게 되는 근거로 자리 잡은 건 아닐까?

몇 년 전, 어느 독서실에 붙은 포스트잇 문구가 화제가 되었다. "코 훌쩍거리는 소리가 너무 신경 쓰인다. 자제 부탁드린다." 라는 내용이었다. 코훌쩍이는 소리뿐만 아니라 다리 떠는 소리, 가방의 지퍼를 여닫는 소리, 목소리 가다듬는 소리, 책장 넘기는 소리도 비슷한 지적을 받는 현상을 볼 수 있다. 이런 메시지에 공감하며 코 훌쩍임 등의 소리를 내는 사람들을 향해 "민폐충", "기본 에티켓도 안 지키는 사람"이라고 탓하는 반응이 있는가 하면, 한편에서는 "지나친 예민함도 민폐다", "그 정도도 못 참냐"며 이런 메시지를 남기는 게 더 불편하다는 반응도 있다. 이러한 갈등에 대처하기 위해 '소음 규정'을 만드는 독서실도 있다고 한다. 이와 같은 현상을 보며 우리 사회가 점점 다른 사람의 존재와 행동을 이해하기보다는 엄격해지고 더욱 민감해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곤 한다.

한국 사회에서 먹고 살기가 힘들다는 이야기를 많이 하곤 한다. 스펙 경쟁과 각자도생을 강조하는 사회에서 나를 제외한 타인은 경쟁상대로 보일 수밖에 없다. '자기계발서'가 여전히 베스트셀러를 차지하고, 타인을 비롯한 다른 사회적 자원과 지지망에 의지하기보다는 알아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메시지를 주는 사회이다. 그러다보니 나의 작은 행동이 자칫하면 타인에게 꼬투리 잡히거나 방해가 될 수 있다 생각하고, 타인의 작은 행동과 작은 실수는 '민폐'로 여겨진다. 사람들은 서로에게 영향을 끼치는 일 자체를 꺼려하며 자신과 다른 존재를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이런 상황에서 타인이 내는 소음과 소란에 대한 거부감이 점점 커지고 있다. '다른 사람에게 방해가 되는' 존재와 소리는 배제해야 마땅하다는 감각도 점점 넓게 공유되고 있다. 결국 이러한 사회적 감각들이 '노키즈존'을 지지하는 기반이 된 건 아닐까.

유엔아동권리위원회, "한국은 아동을 혐오하는 국가인 것 같다"


올해 한국 정부에 대한 유엔아동권리위원회의 사전 심의가 진행되었다. 유엔아동권리위원회에서는 한국 사회의 어린이·청소년 인권 실태와 이를 통해 주요하게 짚어야 할 목록을 쟁점화 하여 다루었다. 그 중에는 '노키즈존' 문제도 포함되어 있었다. 한 위원은 한국 사회에서 점점 늘어가는 '노키즈존'을 비롯한 여러 어린이·청소년 인권 실태에 대하여 "전반적으로 한국은 아동을 혐오하는 국가라는 인상을 받았다."라고 말했다. 사실 '노키즈존' 문제는 2019년에만 다뤄진 주제는 아니다. 2013년, 유엔아동권리위원회는 다음과 같이 일반논평을 발표한 바 있다.

"아동이 놀이, 오락, 그리고 그들만의 문화적인 활동을 하기 위해 공공장소를 사용하는 것은 증가하는 공공장소의 상업화로 인해 방해받고 있으며, 그 공공장소로부터 아동들은 배제당한다. 더구나 세상의 많은 공공장소에서는 아동에 대한 관용이 감소하고 있다. 예를 들면 공공장소에서의 아동에 대한 출입금지, 커뮤니티나 공원의 닫힘, 소음에 대한 관용의 감소, "조건에 맞는" 놀이 태도를 엄격히 규정하는 놀이터, 쇼핑몰 접근 제한은 아동을 "문제"나 혹은 "비행자"로 인식하게 만든다."-2013년 유엔아동권리협약 일반논평 17번 중에서

전이수 작가는 "어른들이 편히 있고 싶어 하는 그 권리보다 아이들이 가게에 들어올 수 있는 권리가 더 중요하다"고 했다. 유엔아동권리위원회와 국가인권위원회가 말하는 바도 이와 비슷하다. 공공장소는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어야 한다. 돈을 내고 이용하는 상업적인 시설도 공공장소이긴 마찬가지다. 그러나 '노키즈존'은 '어린 사람'이 이러한 공공장소에 입장할 권리를 차단한다. 이는 우리 사회가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어린이·청소년들에게 '공적인 장소/자리'를 허락하지 않는 현상과 연결된다. 한 명의 인간이자 시민으로서 그 존재가 드러나는 공간에 모습을 보이지 말라는 암묵적인 메시지 같기도 하다. 결국 '노키즈존'은 어린이·청소년에 대한 차별이며 명백한 인권 침해이자 어린이·청소년의 특성이라고 '짐작되는' 요소들을 싫어하고 배제해도 된다는 감각이 만들어낸 '어린이·청소년 혐오'이다.

누군가의 편안함을 방해한다는 이유로 밀어내도 된다고 여겨지는 사람은 누구인가. 사회가 생각하는 모습대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서 배제당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공공장소는 다양한 사람들이 이용하는 공간이다. 소란을 싫어하고 거부하는 사회, 소음에 대한 관용이 줄어드는 사회, '공공장소를 이용하고 머무를 권리'보다 '누군가가 방해받지 않고 조용히 있을 권리'가 우선되는 사회라면 그 사회는 어떤 사람만 살 수 있는 곳인가. 특정 사람들에게만 허락된 공간은 '가진 사람'만 편하게 살 수 있는 세상과 닮아 있다. 공공장소에서 입장을 거부당하지 않아야 한다고 말하는 이유이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공장소에 입장하고, 머무르고, 누리고, 함께 살아갈 수 있어야 한다. 어떤 모습이든, 어떤 정체성이든 상관없이 자신의 모습 그대로 존재할 권리는 시민으로서 살아가는 데 필요한 기본적인 권리다. 어린이청소년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다. '노키즈존'이 늘어나고 있는 요즘, 어린이·청소년의 공공장소에 대한 권리가 제대로 보장되고 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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