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철희 의원을 31일 만났다. 마뜩치 않은 표정이었지만 직설적 표현 대신 "쇄신은 거역할 수 없는 흐름이다", "이해찬 대표가 쇄신의 주체로서 리더십을 발휘해야 한다"고 에둘렀다. 이 대표를 비롯한 지도부가 쇄신의 칼자루를 바짝 쥐고 "유권자가 선출한 권력을 뺀 모든 것을 열어놓고" 바꾸는 전면적 쇄신이 "책임지는 방식"이라는 것이다.
그러지 않으면? 1971년 노쇠한 신민당을 이끌던 유진산 총재에 빗댔다. 김영삼, 김대중의 '40대 기수론'을 "구상유취(입에서 젖비린내 난다)"라고 코웃음쳤던 '진산 체제'는 여론에 떠밀려 속절없이 무너졌다. 이 의미심장한 일화를 끄집어낸 이 의원은 "물꼬가 한번 터지자 기성체제는 완전히 뒤집어졌다. 그게 좋은 교훈이 될 것"이라고 했다.
이 의원은 쇄신을 낙관한다. "곧 변화가 생겨날 것"이라고 했다. "깊이 있게 총선 불출마를 고민하는 분이 얼추 20명 정도 된다"고도 했다. 그러면서 "386 세대의 마지막 정치적 임무는 새로운 세대가 진입할 수 있도록 하는 촉진자 역할"이 되기를 희망했다. "386 세대를 도덕적으로 비난해서 물러가라는 건 폭력적"이지만, "정치 멸종세대"인 20~30대에게 자리를 비켜줘야 할 때가 됐다는 것이다.
이 의원은 "20~30대가 국회에 20~30명만 들어와도 정치가 많이 달라진다"면서 "21대 국회의 비례대표 절반만이라도 청년으로 채우면 어떨까 싶다"는 파격적 제안도 했다.
임기 반환점에 이른 문재인 정부의 국정운영에 대해선 "적폐청산 프레임의 장기화"에 아쉬움을 드러냈다. 그는 "적폐청산이 사법적 처리로 들어가면서 검찰의 힘이 세졌다"며 "적폐청산과 검찰개혁 과제를 동시에 풀어내는 것이 굉장히 어렵게 됐다"고 짚었다.
청와대 참모진의 역할도 강조했다. 소득주도성장론이 사회주의 정책으로 오인되는 과정은 "비전의 실패라기보다 관리의 실패"라고 했다. 최근 문재인 대통령이 제기해 논란이 된 대입제도 정시 확대 문제도 "해법의 문제라기보다 인화성 강한 이슈인 교육문제를 청와대 참모들이 좀 더 치밀하고 꼼꼼하게 보좌해야 했다"고 했다.
불출마 의지는 확고해 보였다. 선진화법에 막혀 "누가 집권하든 아무것도 못하는 국회", "상대가 죽어야 내가 사는 정치"에 회의감이 강해 보였다. "상상 그 이상으로 20대 국회는 최악"이라고도 했다. "국민들을 양쪽으로 나누고, 한쪽이 자기를 지지하게 만들어 살아남는 정치인들의 생존 전략"은 '웃프다'고 했다. 여러 번 들춰본 듯, 소파에 놓인 막스 베버의 <소명으로서의 정치>가 꽤 낡아 보였다.
대신 국회의원이 아닌 다른 자리에서 정치적 역할을 맡아보겠다는 의지가 강하게 엿보였다. 불출마 선언은 "전략가, 기획통으로서 주특기와 장점을 살리는 선택"을 의미한다. 쇄신의 기로에선 민주당과 청와대가 그의 주특기에 어떤 값을 매길지도 지켜볼 일이다.
"상상 이상으로 20대 국회는 최악"
프레시안 : 초선이지만 정치 입문 20년이 넘었다. 정치 실정과 속사정을 모르지 않았을 텐데 갑자기 회의감을 표하며 불출마를 결심한 이유는?
이철희 : 정치는 스태프들이 아니라 플레이어들이 하는 거다. 국회의원이 아니면 모르는 영역이 있다. 국회의원이 아니면 국회의원 중심으로 정치가 작동하는 방식을 알기가 어렵다. 막상 의원이 되어 경험해보니 내가 스태프로 있던 때보다 의회정치의 질이 굉장히 나빠졌다. 원인은 두 가지라고 본다.
하나는 국회선진화법 때문이다. 날치기를 없애고 타협을 강제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라는 취지로 만들었는데, 그야말로 식물국회가 돼버렸다. 타협이 아니라 야당의 비토권을 극대화시켰다. 전 세계에서 야당이 이런 비토권을 가진 의회는 없을 거다. 비토권이 세진 야당은 이른바 '발목 잡는 정치', 봉쇄 전략에 올인 할 수밖에 없다. 우리도 그랬던 게 사실이고. 프란시스 후쿠야마 교수가 미국 정치를 비판할 때 썼던 '비토크라시', 아무것도 안 하는 의회가 됐다. 누가 집권하든 이 상황에선 아무것도 못한다. 선진화법은 바꿔야 한다.
두 번째는 20대 국회에서 이뤄진 탄핵이다. 현직 대통령이 파면 당하지 않았나. 대통령이 '파면당한' 쪽에는 심리적 열패감이 트라우마로 남아있다. 트라우마는 공격적으로 투영될 수밖에 없다. 자신들의 대통령을 탄핵한 세력이 집권자가 되고, 자신들은 반대자가 됐으니까 '너희들도 한번 당해봐라'는 심리가 작동한다.
그런 심리에 불을 지른 게 적폐청산의 장기화다. 적폐청산은 불가피했지만 그 프레임이 너무 장기화됐다. 상대가 공격하면 트라우마가 작동돼서 더 세게 반격하고, 그러면 '탄핵 당한 세력이 어디다 대고'라는 심리가 거칠게 상승 작용한다. 이건 정치가 아니다.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이 모여 숙의의 과정을 거쳐 타협하는 게 정치 시스템인데, 완전히 제로섬이 됐다. 상생도 공존도 할 수 없는, 상대가 죽어야 내가 사는 정치가 됐다. 같이 망하는 길로 가고 있는 것 같다. 상상 그 이상으로 20대 국회는 최악이었다. 되는 게 없더라. 우리가 야당일 때 어떻게 했는지, 저쪽이 야당일 때 어떻게 하는지 다 알지 않나. 이건 여야를 따지기 전에 정치권 전체의 책임이다.
'웃픈' 현실은 정치가 생산적 성과를 못내도 정치인은 살아남는다는 것이다. 정치인들은 진영논리를 작동시켜서 국민들을 양쪽으로 나누고, 한쪽이 자기를 지지하게 만들어 자기는 살아남는 생존전략을 구사한다. 정치를 망친 사람이 쉽게 살아남는 역설적인 길이 열린 것이다. 그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들에게 돌아간다.
프레시안 : 굳이 정기국회 회기 중에 불출마 선언을 한 배경에는 '조국 사태'의 영향도 있었던 것 같다.
이철희 : 조국 국면이 지속된 70여 일 동안 온 나라에 토론과 협의가 완전히 사라졌다.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룬 대한민국이 이런 사안 하나로 혼란의 도가니에 블랙홀처럼 빠졌다. 다른 현안이 없었던 것도 아닌데, 정치권도 언론도 전부 나 몰라라 아니었나. 우리나라 정치의 수준이랄까, 언론과 관료를 비롯해 정치 커뮤니티가 보여주는 수준이 너무 한심했다.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당초 국회의원직 자체를 열망한 것도 아니다. 정치적으로 중요한 일을 하려면 국회의원직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말하자면 수단으로서 국회의원직을 생각했던 것인데, 한 번 정도 하면 그런 자격을 획득한 것 아닌가 싶다. 주변에선 더 해야 한다는 권유가 많았다. '비례대표를 했으니 당에 신세를 진 것 아니냐', '인지도가 있는데 왜 안 하냐'는 두 가지 권유가 점점 압박으로 다가왔다. 어떤 선배 정치인은 자신의 지역구를 물려주겠다고 여러 차례 권유도 했다.
쥐뿔도 없는 나를 좋게 봐서 지역구를 물려주겠다고 하고, 내 역할이 있다고들 해서 출마하는 쪽으로 생각해보려고 했다. 특히 내년 총선 이후 다음 대선까지는 선거가 없는 시기다. 개헌을 포함해서 한국 사회를 바꿀만한 여러 가지를 해볼 수 있는 기회 아닌가. 그때 이철희의 역할이 있다는 얘기는 솔깃하게 들렸다. 그 과정에 참여하고자하는 열망도 있어서 출마 쪽으로 한두 달 고민을 했지만, 마지막 문턱을 못 넘어섰다. 추석에 아내가 결심했냐고 물어보기에, 생각해봤지만 꼭지가 잘 따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런 와중에 잘 아는 어떤 분이 '내가 아는 이철희는 전략가이고 기획통인데, 지역구로 가면 전략가나 기획통으로서의 역량을 발휘하기 어렵다. 대부분의 시간을 지역구에 쏟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국회의원도 괜찮을 수 있지만, 1/300이다. 국회의원이 아니더라도 전략가, 기획통으로서 주특기와 장점을 살리는 선택이 맞지 않겠냐'고 하시더라. 그게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내가 언제 국회의원직에 연연했다고 특성과 장점을 버리면서까지 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추석 직후에 그렇게 결심을 했다.
불출마 발표 시점은 정기국회가 끝난 뒤로 생각했다. 그냥 출마하지 않으면 되지 왜 공식 발표까지 하느냐고 묻는다면, 그래야 주변의 권유가 정리되고 나에게 지역구를 물려주려는 분도 정리를 할 것 같았다. 불가역적인 선언과 조치를 취하려고 공식적으로 불출마 선언을 했다. 조국 국면과 국정감사가 끝나고 스트레스 극에 달했을 때이기도 했다. 조국 전 장관이 사퇴한 다음날 불출마 선언을 했는데, 조국 혼자 책임질 일은 아니지 않느냐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나도 불출마를 결심했는데, 그쯤에서 어떤 메시지 던짐으로서 우리 전체가 성찰하고 쇄신하는 계기로 삼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해찬 대표, 쇄신의 리더십 발휘 못하면…"
프레시안 : 이해찬 대표와 별도로 만나 혁신을 요청하기도 했는데, 이 대표의 기자회견에 그 고언이 반영됐다고 보나.
이철희 : 이해찬 대표가 물러나는 게 책임지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합법적으로 선출된 사람을 임의로 배제하려는 시도는 옳지 않다. 다만, 이해찬 대표와 지도부가 쇄신의 리더십을 발휘해야 하는 것은 맞다. 쇄신의 주체로서 그에 응당한 리더십을 발휘해야 한다. 쇄신의 폭과 시기는 본인들의 판단보다는 전체 당원과 국민의 눈높이에 맞춰야 한다. 대체로 혼자 생각하는 쇄신의 수준은 국민들 눈높이와 맞지 않다. 쇄신의 물꼬가 터진 때에는 저항한다고 되지도 않는다. 쇄신에 순응해야 한다. 그나마 쇄신을 주도하면 제어력을 가질 수 있겠지만, 쇄신을 적극적으로 선도하지 않고 미온적 자세를 보이면 봇물이 터져 밀려오는 쇄신을 막을 수 없다. 과거 김영삼, 김대중이 40대 기수론을 들고나오자 유진산 총재는 구상유취, 젖비린내 난다고 했다. 하지만 물꼬가 한번 터지니까 기성체제는 완전히 뒤집어졌다. 그게 좋은 교훈이 될 거라고 생각한다.
쇄신의 필요성은 한 두 명의 욕심 때문에 제기되는 것이 아니다. 문책하고 인책하자는 게 아니다. 크게 봐도 대통령 임기가 절반이 됐고, 후반기에 새로운 체제로 전환할 때도 됐다. 총선이 6개월 정도 남았기 때문에 통상적 문법에 따르더라도 체제 개편을 할 때가 됐다. 게다가 조국 국면을 겪으면서 혼란이 있었고 지지율도 빠졌다. 여권 전체에 대한 신뢰도 떨어졌다면, 변화를 통해서 민심을 다시 회복해야 한다. 쇄신해야 할 이유는 이것으로도 충분하다.
나는 책임을 묻자고 말하지 않았다. 쇄신이 책임지는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잘못했기 때문에 사퇴하라는 게 아니라, 여러 이유로 쇄신할 필요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 필요성을 받아들여 좀 더 과감하게 가야한다는 게 내 생각이다. 쇄신의 첫 번째 조치는 사과다. 어쨌든 이해찬 대표가 사과는 했다. 그다음에 어떻게 갈지는 아무도 모른다. 대표를 비롯한 당 지도부와 의원들이 쇄신의 내용을 어떻게 채울 건지 지혜를 모아야 한다. 대표만 쳐다보고 왜 쇄신 안 하냐고 해서도 안 되고, 이 대표도 의원들이나 당원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들어봐야 한다. 이런 과정 속에서 쇄신의 내용이 나올 거다. 쇄신은 거역할 수 없는 흐름이다.
프레시안 : 이 대표의 구상과 별개로, 이 의원이 생각하는 쇄신의 구체적 내용은 뭔가.
이철희 : 하고 싶은 말은 마음에 있지만, 무슨 조치를 요구하면 그걸 수용하니 안 하니 하면서 진의와 내용이 왜소화된다. 쇄신은 묵은 먼지를 털고 때를 벗겨 새롭게 가자는 거다. 새로움을 어떻게 보여줄지를 고민해야 한다. 모든 것을 다 열어놔야 한다. 유권자가 선출한 권력까지 건드릴 수는 없지만 나머지는 전부를 다 열어놓고 고민해야 한다.
새로움은 미래로 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진보는 미래를 잃으면 아무것도 없다. 진보세력에도 현실에 안주하는 듯한 모습이 많다. '진보 꼰대'라는 표현이 있듯이 보수에만 수구가 있는 게 아니라 진보에도 수구가 있다. 진보세력의 상당 부분이 낡은 담론과 아젠다에 얽매여있다. 공유경제, 데이터경제, AI, 자율주행차 등 생각하지도 못한 일들이 사회에서 벌어지는데 우리는 옛날 문법과 사고에 젖어있다. 현실에서 생겨난 흐름은 눈을 감는다고 해서 사라지지 않는다.
현재는 민주화 세력과 산업화 세력이 병존하고 있다. 우리가 집권했을 때 4차 산업혁명을 주도해서 성공적으로 이끌어내면 민주화 세력과 산업화 세력은 동일시된다. 지금까지 두 세력이 경쟁했던 구도에서 완전히 정통성과 정당성을 갖는 세력이 되는 것이다. 그러려면 과거에 연연하면 안 된다. 정말 담대한 용기를 가져야 한다. 절호의 역사적 기회가 왔고, 우리가 감당해내느냐 못하느냐는 전적으로 우리 능력에 달렸다. 그 핵심은 새로운 것을 상상하는 능력에 있다. 실패해도 좋으니 담대하게 한번 가봐야 한다. 감히 말하자면 우리 당을 비롯해서 진보 전체에 그것이 부족해 보인다. 복지연합도 익숙한 문법으로 그려낸 것이 아니다. 새로운 기획과 담대한 도전으로 만들어냈다. 오랫동안 마이너리티로서 비판하는 자세에만 안주해선 새로운 사회를 열어갈 수 없다.
프레시안 : 이런 목소리를 내는 분들은 초선의원 몇 명 외엔 드러나지 않고 있다. 이 대표의 기자회견에도 쇄신의 내용은 제시되지 않았다. 쇄신 흐름이 대세라고 볼 수 있을까.
이철희 : 곧 변화가 생겨날 거다. A부터 Z까지 바꾸는 쇄신을 요구하는 건 아니다. 쇄신을 하더라도 질서 있게 해야 하고 지도부가 쇄신의 고삐를 잡아야 한다. 전부를 바꾸자는 건 아니지만 어느 수준과 보폭으로 갈 건지 대표가 다양한 모임과의 소통을 통해 정해야 한다. 기존 역량을 보존하면서 업그레이드 하는 쇄신이 돼야 한다. 다운그레이드 하는 쇄신이 될까봐 우리 당 사람들이 조심스러워하는 것 같다. 열린우리당 당시 '108 번뇌'니 친노니 비노니 하면서 당이 깨졌던 트라우마가 깊게 존재한다. 그 사례를 유념할 필요가 있다. 벌떼가 일어나 봉기하는 것 같은 쇄신을 원하는 것은 아니다.
프레시안 : 조국 사태를 겪으며 386 세대의 기득권 포기 내지는 자기희생이 필요하다는 주장도 있다.
이철희 : 필요한 게 아니라 불가피해졌다. 386세대가 큰 죄를 저지른 세대는 아니다. 우리나라를 민주화하는데 크게 기여한 세대라는 것은 분명하다. 다른 한편으로는 고도성장의 혜택을 본 세대다. 그게 동전의 양면이다. 나도 386이지만, 우리가 학교 다니며 데모를 할 수 있었던 이유 중에는 일자리가 넘쳐났다는 환경적 요인도 있다. 데모해도 졸업하면 취업할 수 있었다. 지금은 당장의 취업 문제가 걸려있어 그럴 수가 없다.
지금의 현실에 대한 책임이 386에게만 있는 건 아니겠지만 책임의 일단이 없다고도 할 순 없다. 2000년대 들어 386세대가 출마하기 시작했으니 얼추 20년이 됐다. 원내대표나 장관이 될 정도로 무게를 가졌음에도 우리 사회를 제대로 바꾸지 못한 점, 청년들이 '헬조선', 'N포세대'를 말할 지경이 된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다.
결국 정치를 통해 풀어야 한다. 지금은 정치에 들어온 20~30대가 없다. 멸종세대다. 2030세대가 국회에 들어와 세대의 이해를 정확하게 대변하고 반영하면 정치도 20~30대 친화적 구조로 바뀌어 갈 것이다. 세대감수성이 떨어진 기성세대가 2030 친화적인 구조로 바꿔주겠다는 건 설득력이 없다. 나만 해도 청년감수성이 떨어진다. 분명하고 간단하다. 20~30대가 국회에 20~30명만 들어와도 정치가 많이 달라진다. 정치가 그렇게 바뀌면 사회경제적 구조에서도 20~30대를 고려하는 변화가 생겨날 것이다.
청년을 국회로 진입시키는 것은 의지의 문제다. 욕심 같아선 21대 국회 한번만이라도 비례대표를 모두 2030세대로 채우고 싶지만, 사회적 약자도 배려해야 하니 비례대표 절반이라도 청년으로 채우면 어떨까 싶다. 그러면 2030세대 의원 20명을 배출할 수 있다. 당이 집중해서 캠페인을 하면 우리당에도 20명 정도 들어올 거다.
여기서 당의 의지가 중요하다. 질서 있게 평화적으로 교체되려면 원래 있던 사람들이 비켜줘야 한다. 나도, 표창원 의원도 386세대 중 한 명이다. 우리 말고도 상당수가 양보할 생각이 있다. 하지만 청산의 대상으로 찍혀서 내몰리는 것은 옳지 않다. 도덕적으로 비난해서 물러가라는 건 폭력적이고 좋지 않다. 정치를 바꾸는 데에 386세대가 어떤 역할 해달고 문제제기를 한다면 흔쾌히 비켜줄 수 있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프레시안 : 실제로 양보 의사를 가진 분들이 당에 있나?
이철희 : 있다. 내가 따져보니, 깊이 있게 불출마를 고민하는 분은 얼추 20명 정도 된다. 다른 사정이 생겼거나 자리를 옮겨가는 분들을 포함해 자발적 용퇴를 할 수 있는 규모가 제법 크게 형성될 수 있다. 386세대의 정치적 라스트 미션이 새로운 세대가 진입할 수 있도록 촉진하는 역할로 자기규정되면 좋겠다. 그게 아름답다. 조국 국면을 거치면서 무리하게 386세대 문제를 겨냥하고 386 책임론을 말하는 것은 정치적 의도가 있지만, 일부 정치적 의도를 가진 비난을 빼고 보면 사회적 문제로 인식할 수 있다.
"청와대 참모들, 꼼꼼하게 보좌하고 있나?"
프레시안 : 당 쇄신에 강조점을 두고 있지만, 이번 사태를 복기해보면 발단은 청와대 아닌가? 대통령이 유감 표명을 했지만, 내각이나 청와대 비서실 개편 소식은 없다. 정시 확대 대책도 즉자적이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가장 경직된 곳을 쇄신해야 의미가 살지 않을까?
이철희 : 정시 확대는 선택의 문제다. 그게 완전히 틀렸다고 보지 않는다. 젊은 세대가 갖는 공정성의 문제제기는 절차적, 기계적 공정성이다. 계량화된 수치로 판정되지 않으면 결과를 신뢰하지 않는다. 부모 세대도 수시라는 입시 정책이 공정하다고 여기지 않는다. 계량화된 숫자로 당락을 결정하는 것이 옳다면 정시확대가 맞다.
한편으로 수시가 다양성을 추구하는 것이지만, 그 방법이 과연 약자를 위한 건지 가진 자를 위한 건지도 냉정하게 따져봐야 한다. 제도를 운용해본 결과를 봐도 수시가 약자에게 유리한 제도는 아니다. 자원을 가진 사람에게 통로를 열어준 것이다. 통로가 다양화됐다고 할 수도 있지만 여기에도 불평등의 문제가 있다. 수시 전형의 상당수가 미국 방식이다. 기본적으로 기득권을 인정하고 가는 것이다.
입시문제에만 너무 천착하지 말고 교육 과정 전체의 문제로 논의를 해야 한다. 지금 세대가 불공정에 분노한다면 정시를 어느 정도 선에서 늘리도록 몇몇 대학들에 대한 조치가 필요하다고 본다. 대통령도 이런 것들을 고민했을 것이다.
다만 대통령이 내놓은 해법의 문제라기보다는, 시정연설 전날 참모들은 정시 확대가 왜 나왔는지 의미를 대통령에게 설명했어야 한다. 그것이 참모의 기본이다. 리더는 결정해서 제시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고, 전후과정을 잘 살펴서 준비하고 추진하는 것은 참모의 영역이다. 교육문제는 인화성 강한 이슈인데, 청와대 참모들이 왜 놓쳤는지 모르겠다. 많은 사람들을 화나게 하고 혼란에 빠뜨리는 이슈라면, 좀 더 치밀하고 꼼꼼하게 보좌해야 했는데, 그 부분이 개인적으로 실망스럽다.
프레시안 : 문재인 대통령 임기 절반이 지나갔다. 국정운영을 어떻게 평가하나.
이철희 : 나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상당히 많은걸 해냈다. 대목마다 아쉬움도 있고 되돌아볼 여지가 있다고 하더라도 2년 반의 성적표 나쁘지 않다고 본다. 터닝하는 시기여서 기존의 낡은 해법으로는 답이 나오지 않는다. 새로운 해법은 검증이 되지 않은 것이다. 미국 사회를 바꾼 뉴딜도 이걸 하면 성공한다고 확신해서 추진한 것이 아니다. 실험적 정책으로 해본 거다. 마치 만병통치약이 있는 것처럼 착각하는데 그렇지 않다.
우리가 내놓은 소득주도성장이라는 것은 다른 얘기로 하면 중산층 확장이다. 케인지언 해법인데 마치 이것을 사회주의 해법인 것처럼, 비주류 사이비 정책인 것처럼 이념적으로 공격하는 것에 대한 말려든 것에 화가 난다. 이 해법 자체가 틀린 건 아니지만, 완결성을 내지 못한 참모의 역량은 준엄하게 비판해야 한다. 터닝하는 과정에서 생긴 노이즈는 비전의 실패라기보다는 관리의 실패라고 본다.
남북관계와 안보는 기대 이상으로 깜짝 놀랄 성과를 만들어 냈다. 또 다른 고비를 넘어서기 위한 단계에 와있지만, 그것도 성공이 만들어낸 위기다. 원래 썼던 정책을 썼으면 여기까지 올 수도 없었다. 이건 대통령을 비롯한 참모들이 배짱 있게 밀어붙여야 한다.
정치적으로도 협치의 노력을 상당히 했다고 본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야당에 이러저러한 제안들을 많이 했었고 실제로 상당히 진전됐다가 막판에 안 된 것이 많았다. 그렇더라도 제일 아쉬운 부분은 정치다. 개혁이 성공하려면 정치의 과정을 통해 도장을 찍어야 한다. 그 부분이 아쉽지만, 선진화법과 탄핵 이후 거칠어진 국회 상황을 감안할 수밖에 없다. 탄핵 이후 치러진 대선을 통해 대통령이 당선됐는데, 국회는 탄핵 이전에 치러진 총선으로 구성된 2년의 갭, 미스매치가 있었다.
결과적으로 놓고 보면 지난 2년 반을 완전히 헤맨 혼란의 시기라고 보지는 않는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선에서 최선을 다했고, 더 잘할 수 있었음에도 부족했던 부분은 쇄신을 통해 채워가야 한다.
프레시안 : 검찰개혁이 요즘 화두지만 개혁 정부에서 제도화된 개혁 성과는 별로 없다. 앞서 적폐 청산이 너무 늘어졌다고 말씀했지만, 그로 인해 정치개혁이나 사회개혁 타이밍을 놓친 게 아니냐는 지적이 있다.
이철희 : 적폐청산 프레임이 늘어진 것은 굉장히 아쉬운 대목이다. 사법농단 이슈가 컸다고 본다. 사법농단이 처음 제기됐을 때 '김명수 법원'이 주체적이고 자율적으로 내부를 들어내고 정리하는 작업에 들어갔다면 마무리 됐을 텐데, 미적대다가 검찰수사로 가면서 사법농단 사건이 굉장히 늘어졌다. 그러다 보니 다음 국면으로 터닝을 못했다. 돌아보면 무척 아쉬운 대목이다.
적폐청산은 탄핵과 촛불시민들의 요구이기 때문에 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다만 처음부터 적폐청산을 무한정 끌고 가려고 했던 건 아니지만, 풀어가는 과정에서 뜻하지 않은 여러 요인 때문에 길어졌다는 얘기다. 적폐청산이 사법적 처리로 들어가면 검찰의 힘이 세진 건데, 적폐청산과 사법개혁 검찰개혁 과제를 동시에 풀어내는 것이 굉장히 어렵게 됐다. 썩 잘해낸 것 같진 않다. 검찰이 저렇게 나오는 것을 보면 창의적인 해법을 고민했어야 하는데 부족했다.
프레시안 : 청와대와 당이 충성도 높은 지지층을 지나치게 의식해 국민들과의 거리가 벌어졌다는 지적도 있다.
이철희 : 나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 핵심 지지층을 생각하지 않는 정치는 없다. 핵심 지지층과 중도층, 스윙보터는 이슈에 대한 이해와 판단이 다르다. 이 양 세력을 어떻게 하나의 틀로 끌고 가느냐가 모든 집권 세력의 고민이다. 항상 긴장이 있을 수밖에 없다. 다만 긴장을 관리하는데 성공했느냐고 하면 지적할 대목이 있다고 본다. 정당 지지율을 보면 완전히 해체되지는 않았지만, 양 세력이 하나의 울타리 안에서 공존하고 시너지를 낼 수 있도록 리더십을 발휘했냐고 한다면 그건 아니다. 그 부분은 우리 당이 깊이 반성하고 성찰해야 한다.
내가 <진보는 어떻게 다수파가 되는가>를 번역해 낸 것도 그런 맥락이다. 우리 지지층만 가지고는 운이 좋아야 이길 수 있지만, 다수파로 만들면 대체로 이긴다. 진보가 다수파가 될 때 그 사회가 좋은 사회가 된다. 두 덩어리의 세력을 한 울타리 안에서 어떻게 잘 통합시켜 갈 거냐, 이 고민을 해야 한다.
진보가 마이너리티에 만족하면 세상을 바꿀 수 없다. 집권하고도 마이너리티 콤플렉스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우왕좌왕하다가 끝난다. 집권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진보는 한 사회의 다수를 만들어내는 게임에서 이겨 사회를 바꿔내는 전략을 써야 한다. 진보-중도-보수 세 덩어리를 놓고 보면 중도와 진보가 한 울타리 안에서 손잡도록 하는 게 핵심이다. 복지연합, 뉴딜연합도 그렇게 성공한 것이다.
프레시안 : 집권 후 2년 반 동안 다수파 전략을 쓸 수 있는 기회가 꽤 많았는데.
이철희 : 그렇다. 다만 정답이 있는 게 아니라 선택이다. 왜 오답을 선택했냐고 볼 문제는 아니다. 지금이라도 총선에서 이겨서 좋은 결과를 얻는다면, 그 이후부터 다음 대선 때까지 안정적인 다수파 연합을 만들어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자꾸 우리가 그때 못했다고 자책만 하고 있을 일은 아니다. 지나간 건 지나간 거다.
진보의 나쁜 습성 중 하나는 조금만 생각이 다르면 적대시한다는 것이다. 그건 정치문법과 맞지 않다. 똑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만 모여선 이길 수 없는 게임이 정치다. 다름을 전제로 공통의 목표를 어떻게 설정하느냐가 정치 역동성의 핵심인데, 진보는 조금만 생각이 다르면 변절했다고 공격한다. 강퍅한 편가르기다. 진보는 정치적으로 유능해야 하는데, 과거 노무현 정부에 대한 '지못미' 정서가 있지 않나. 그 반작용으로 조금이라도 정부를 공격하면 용납하지 못하는 양극단이 됐다. 이 정부가 진보정부라면 생각이 조금 다르다고 적대시해선 안정적 다수를 만들 수 없다. 우리 안의 작은 차이를 너무 강조하는 행태가 내장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프레시안 : 성적표는 내년 총선에서 받게 될 텐데, 이번에 입은 충격이 총선에도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나.
이철희 :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이번 일을 좋은 약으로 쓸 수도 있다. 여권 전체가 쇄신하면 국민적 지지를 많이 받을 수 있는 계기가 된다고 생각한다. 잘못 대응하면 이른바 '카트리나 모멘트'(대형 사건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해 정권이 위기에 빠지는 현상)가 될 수도 있다. 만약 총선 2~3개월 전에 이런 사건이 터졌다고 생각하면 오싹하다. 아직 6개월이 남았고, 잘 극복한다면 신뢰가 다시 생기고 굳건해질 것이다. 지금은 좀 실망하는 사람들이 늘어났지만 그렇다고 자유한국당이 믿음직한 모습 보여주는 것도 아니지 않나. 국민들이 구태와 못된 버릇을 못 버리고 있는 한국당을 지지하고 있다고 보진 않는다.
다만 민주당이 마음에 안 들어서 전술적으로 민주당 지지를 유보하거나 한국당을 지지하는 흐름은 있을 수 있다고 본다. 우리가 여기서 더 잘못하면 유권자들은 우리를 혼내주기 위해서 한국당을 찍을 수 있다. 아직 그 지경은 아니지만 더 나쁘면 그럴 수도 있다는 것이다. 정치는 살아있는 생물이기 때문에 우리가 어떻게 하느냐가 독립변수다. 여전히 기회가 있고, 우리가 하기 나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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