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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10월 1일 대구에 울려퍼진 '적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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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1946년 10월 1일 대구에 울려퍼진 '적기가'

[팩션] 실록소설 '행군-어느 민족주의자를 위한 변명' <15>

해방 후 왜곡된 역사 속에서, 지금까지의 한일 관계는 효용을 다했다. 그러나 예고된 갈등이었다. 일본은 구한말과 일제강점기 35년, 8.15 광복과 분단체제, 그 이후 70년의 강고한 구 체제 시스템 속에서 우리 내부 깊숙이 침투해 들어와 알게 모르게 생활의 일부가 되었다. 그 안에 우리 내부의 모순과 고뇌가 응축되어 있다. 이 모순과 고뇌를 탐구하려면 어떤 방법이 있을까.

한 개인사를 통해 시대와 사회를 비추는 거울 역할을 하는 것이 문학의 영역일 것이다. 그동안 우리는 외세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생존이 우선이었던 관계로 자기 자신을 앞세우지 못했다. 우리는 너무 쉽게 잊어버렸고 안일했다. 그러다보니 역사는 박물관에 소장된 문화재인 양 화석화되고, 현대의 역사는 더군다나 묻혔다.

기자 출신 이계홍 작가의 실록소설 '행군-어느 민족주의자를 위한 변명'은 그런 배경에서 나왔다. 이 소설은 2016년 10월호부터 2019년 6월호까지 문예월간 '월간문학'에 연재되었던 소설이다. 월간문학 연재를 마친 뒤 많은 부분을 수정 보완해 프레시안에 재수록한다.

이 연재물은 이른바 '팩션(Faction)'이다. 팩트와 픽션의 사이 어디에서 역사적 사실에 상상력을 덧붙인 '논픽션' 형식의 소설이다. 필자는 취재의 일환으로 일제강점기 말 일본 육사 출신 젊은 생도들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어지러운 시대, 그 안에서 제국주의 광풍에 휘말린 젊은이들의 시각을 잡아내려 했다. 이계홍은 "일본의 극우 정권이 일제강점기의 역사적 사실들까지도 왜곡하는 역사 모독에 대해 하나의 담론시장을 형성하자는 데 목적이 있다"고 했다. '행군-어느 민족주의자를 위한 변명'은 총 33회로 나뉘어 연재될 예정이다.(편집자)


제15장 1946년 10월 1일 대구

아침부터 노동자와 시민들이 역 광장으로 모여들었다. 역 앞에는 운수노조사무실과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 조선노동조합지역평의회(노평) 대구지부 사무실이 있었는데, 오전 10시 무렵에는 시민과 노동자와 학생들이 광장을 가득 메우고, 어느새 인근 골목까지 인파로 꽉 들어찼다.
군중들은 지휘부가 선창하는대로 구호를 따라 외치고 우렁차게 노래를 불렀다. 처음에는 비장미가 느껴졌으나 군중이 광장을 가득 메운 이후부터는 너나없이 자신에 찬 모습이었다. 흡사 무슨 축제장 같은 분위기였다. 그런 가운데 구호들이 거침없이 쏟아져 나왔다.
“악질 경찰 물러나라!”
“배고파 못살겠다. 식량을 달라!”
“생필품을 풀어라!”
“병든 아이 다 죽는다 의약품을 달라!”
“친일경찰 물러가라!”
그리고 와-, 하는 함성과 함께 합창이 울려퍼지는데, 그것으로 그들은 하나로 결합된 듯했다.
1946년 10월 1일 오전 대구역 광장의 모습이다.

민중의 기 붉은 기는
전사의 시체를 싼다
시체가 식어 굳기 전에
혈조(血潮)는 깃발을 물들인다
높이 들어라 붉은 깃발을
그 밑에서 굳게 맹세해
비겁한 자야 갈테면 가라
우리들은 붉은 기를 지키리라

‘적기가’가 끝나자 다시 와- 하는 함성이 일었다. 그 함성은 수만의 군마가 흙먼지를 일으키며 적진을 향해 돌진하는 말발굽 소리와 같았다. 군중들 건너편엔 경찰진압대가 바리케이트를 친 가운데, 일부는 경찰봉을 쥐고 돌격 자세를 취하고, 그 뒤편에서는 칼이 장착된 엠원 총으로 집총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시위군중은 누군가가 흐름을 이끌고 있는 것 같았지만 확실한 실체는 없었다. 일주일 전 부산에서 8천여 명의 철도·부두노동자들이 파업에 돌입한 것에 자극을 받은 인상이었으나, 그러나 굳이 따지자면 그곳 사정과는 엄연히 구분되었다.
부산의 철도·부두노동자 파업이 정치 투쟁의 하나라면, 이곳의 소요는 민생과 생필품의 품귀, 만연하는 콜레라 대책에 대한 항의 시위였다. 아사자가 늘고, 전염병의 창궐로 어린아이들이 주로 희생되었다. 마당에서 깡총거리며 뛰어놀던 아이가 하루 아침에 시들시들하더니 죽어나가는 꼴을 지켜보는 부모들의 가슴은 천불을 맞은 것만큼이나 억장이 무너졌다. 영양부족 상태이니 면역성이 현저히 떨어져 전염병이 돌자마자 죽는데, 결국은 행정 관서의 무능만 드러났다. 도대체 방치하고 외면하는 것이었다. 관심 밖이라는 태도였다.
시민은 본인도 굶지만 아이들이 먹지 못하고, 속절없이 죽어나가자 가난한 자기 책임인 양 스스로를 자책하면서도 백성에게 한없이 비정한 정부에 분노와 증오의 눈빛을 보내며 광장으로 쏟아져나온 것이었다.
“식량을 달라!”
“밥을 달라!”
자고 나면 쌀값이 배로 뛰었다. 돈을 얼마간 모으면 벌써 쌀값은 몇 배 뛰어올라 있었다. 이렇게 해서 삼십배, 사십배나 뛰었다. 품귀 현상으로 돈 주고도 살 수 없었다. 굶주림을 매개로 한 저항의 바이러스는 다른 어떤 것보다 큰 폭발성을 지니고 있었다. 굶주림의 울분은 폭풍도 삼켜버리는 처절한 야수성과 복수의 비정성을 안고 있는 것이다.
당시 대구에서 펴낸 일간지 영남일보는 ‘배고파 못 살겠소-기아 시민 간청 쇄도’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갑-쌀은 주지 않고 교통은 전부 막아놓았으니 매일 지방을 돌아다니며 양식을 구해먹는 사람들이 어떻게 살 수가 있나.
을-나는 사흘 굶어서 일할 기운도 없소. 집에 식구들이 늘어져 누운 것을 보고 왔는데 그동안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르겠소.
병-배가 고파서 늘어져 누웠으면 호열자(콜레라)에 걸렸다고 와서 잡아가고, 쌀은 주지 않으니 세상에 이런 비정한 일이 어디 있는가.
쌀을 달라고 수천 명의 군중이 아침부터 대구부청과 경북도청으로 몰려와서 오후가 되도록 돌아가지 않고 어떻게든지 목숨을 구하도록 해달라고 부르짖는 그 전경은 참아 눈뜨고 볼 수 없거니와, 관계당국에서는 미군정 관장에 문의했으나 별다른 대책을 얻지 못하였으며, 다만 대구부가 가지고 있는 쌀과 잡곡 합해 600석을 배급하기로 했다. 이 600석의 쌀은 천 시민의 하루분 식량에 불과하다. 그야말로 붉은 화로에 떨어지는 눈방울로 30만 시민은 문자 그대로 생사의 기로에서 방황하고 있다.
-영남일보 1946년 7월2일자

식량만이 아니다. 콜레라가 창궐했는데 대구는 발병률 1위였다. 경찰은 콜레라가 번질 것을 우려해 대구 시외로 나가는 모든 진출입로를 봉쇄했다. 대안이란 것이 시민이 오도가도 못하게 하는 통제 뿐이었다.
“시청으로 가자!”
”경찰서로 가자!”
“미창(米倉)으로 가자!”
“갑부 000 집으로 가자!”
이윽고 누군가의 선동으로 군중은 긴 타액처럼 이리저리 움직이며 시내로 진출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 광장에는 시민들이 끊임없이 모여들었다. 광장은 사람들을 모아서 필요한 곳으로 보내주는 배급처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었다.
시위대가 한 덩어리로 흩어지면서 모이고, 다시 모였다 흩어지니 진압 경찰도 어디서부터 손을 써야 할지 넋잃은 듯 지켜보고만 있었다. 숫자가 몇 백명이라야지 몇만 명이 모이니 속수무책인 것이다. 31운동에도 이렇게 모이진 않았다고 시민들은 스스로 감격스러워했다.
경찰과 대치한 가운데 시위대 선두에서 한 노동자가 나와 연설을 시작했다.
“나는 연탄공장 노동자 황말룡이올시다. 우리 식구는 일주일째 굶고, 자식들이 쓰러졌소. 관청 놈들은 애꿏은 농민들에게 쌀을 강탈하고, 경찰은 공출에 반항하는 시민을 잡아갔소! 벼룩의 간을 빼먹지, 우리에게서 양곡을 빼앗아 가다니, 이런 놈들을 그냥 놔둬야 합니까? 천벌을 받을 놈들이요. 바로 친일파 놈들이 하는 짓이요. 해방되었다고 하지만 바뀐 것이 하나도 없소이다!”
식량공출제는 일제 전시 체제기의 약탈적 식량정책이었다. 일제는 전쟁터로 군량미를 보내기 위해 농민들의 자가소비량을 일부 제하고 공출한다고 했지만, 부락 책임공출제, 사전할당제, 농업생산책임제 등으로 공출량을 터무니없이 높여 먹을 것까지 빼앗아가는 상황이었다. 그래도 할당량이 부족하면 시장에서 구입해서라도 채우라고 강요하고, 듣지 않으면 불량선인이라고 해서 잡아가두었다. 아이에게 먹일 장독대에 숨겨둔 최소한의 식량마저 뒤져서 압수했다. 해방이 되었는데도 매한가지였다. 수해와 한해가 겹쳐 생산량 자체가 미달해 숨겨둘 것조차 없는데 경찰은 집집마다 들쑤시며 한 톨의 곡식이라도 가져갔다. 약탈적 식량정책이 해방의 선물인 셈이었다.
황말룡이 물러나고 다른 청년이 시위대 앞으로 나가더니 외쳤다.
“나는 철도노동자 김종태라는 사람입니다. 식량을 얻기 위해 외갓집으로, 삼촌집으로, 시집간 누나집으로 가려고 하는데 경찰이 외곽을 봉쇄했습니다. 굶주려 죽거나 전염병에 걸려 죽으라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대로 앉아죽을 수 없소이다!”
다음에는 노동복 차림의 청년이었다.
“나는 담배공장 노동자입니다. 궐련에 붙이는 풀을 찍어먹고 연명했습니다. 오늘도 그 풀을 먹고 여기 나왔소. 이것이 나라의 꼴이오. 전매국 사람으로서 월급을 제대로 받는 나까지도 이 모양이오!”
그가 물러나고 대학 교복 차림이 나왔다.
“여러분, 똑똑히 보아둡시다. 친일자본가들이 활동자금을 만들어서 친일경찰, 친일관료를 지원하고 있습니다. 이 어려운 상황에서도 그자들은 천년만년 권세를 누리려고 온갖 협잡질을 다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떵떵거리며 사는데 전 시민은 기아와 질병 속에 신음하고 있습니다!”
부자와 빈민, 권력자와 시민, 관과 민, 순사와 백성, 이렇게 이분법적으로 분리하면 군중들의 적개심은 배가된다. 청년의 선동적인 절규는 누군가에 대한 적개심과 복수심을 충동질하기에 충분했다.
“악질 착취경찰 물러가라!”
“친일경찰 물러가라!”
“미국놈을 몰아내자!”
군중은 겁먹지 않았다. 경찰 진압대를 압박해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때 호각소리와 함께 진압 경찰이 곤봉을 휘두르며 들이닥쳐 군중을 제압해나가기 시작했다. 마상(馬上)에서 일본도를 휘두르며 채찍으로 내리치고 곤봉으로 갈기고, 피투성이가 된 시위대를 끌고 갔다. 총검부대가 집총자세를 취한 채 시위 군중을 향해 압박해 들어갔다.
군중들이 경찰을 향해 돌을 던지기 시작했다. 돌멩이, 유리병, 벽돌 따위를 던지고 화염병을 만들어 던지는 시민도 있었다. 경찰이 주춤주춤 뒤로 밀리고, 여세를 몰아 군중이 옥죄듯이 밀어붙이자 이윽고 그들이 도망가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미처 피하지 못한 경찰관이 밟히기도 하고 뒤통수가 깨져 피투성이가 되었다. 정통으로 돌멩이를 맞은 경찰이 고꾸라지면 다른 동료 경찰이 서둘러 부축해 사라졌다. 군중들은 더욱 자신감을 갖고 투석과 함께 함성을 지르며 경찰을 밀어붙였다.
바로 그 무렵, 시위대 대각선 방향에서 빵빵, 두발의 총성이 울렸다. 그것이 무슨 신호탄인 듯 뒤이어 연달아 수백 발, 수천 발의 총소리가 광장을 울렸다. 그쪽에 배치된 무장 경찰이 발포한 것이었다. 빵빵빵빵, 다다다다.... 시위대 선두에 섰던 황말룡과 김종태가 가슴과 머리에 총을 맞고 쓰러졌다. 다른 시위 군중 수십 명이 한꺼번에 쓰러졌다. 후미 쪽에서도 쓰러졌다. 총소리는 멈추지 않고 계속 난사되고 있었다.
군중이 일시에 흩어졌다. 그러나 어느 순간 두려움없이 한덩어리가 되더니 드럼통을 방패삼아 경찰을 향해 돌진해가기 시작했다. 피를 보자 더욱 흥분하는 모습이었다. 총검 경찰도 도망가기 시작했다. 군중들이 쏜살같이 뒤쫓아가 어디서 구했는지 모를 낫, 몽둥이, 도끼, 쇠스랑을 휘둘렀다. 빼앗은 총 개머리판으로 경찰 등을 내갈기고, 두상을 박살냈다. 시위 군중은 걷잡을 수 없이 폭발하고 있었다. 지도부가 있었더라도 의도와 달리 폭동화해 누구도 수습할 수가 없었다. 시위 동기가 기아와 돌림병과 생필품 부족, 아이들의 아사 때문이라는 구체성을 띠니 모두가 가슴에 불덩어리를 달고 있는 것 같았다.
시민과 경찰이 맞부딪쳤다는 소문이 시내에 퍼지자 일을 보러 나온 사람들, 집에 있던 사람들까지 가세해 순식간에 전 시민이 궐기하는 양상을 띠었다.
밤이 깊을 때까지 소요사태는 진정되지 않고 전 시내를 뒤흔들었다. 그 흥분은 오히려 다음날 절정에 달했다.
진실화해위원회 2010년 상반기조사보고서 등 자료에 따르면, 10월 2일 오전부터 대구역 앞에서 수만 명의 군중과 무장경찰이 대치한 가운데, 최무학 등 대구의전(경북대의대) 학생들을 중심으로 시위대가 죽은 시위대 시신을 들것에 메고 나타났다.
“총맞아 죽은 우리의 형제 노동자를 살려내라!”
그들은 시신을 들것에 메고 경찰서로 행진을 이끌었다. 의대 학생들이 입은 흰 가운에 시체의 피가 흘러내려 벌겋게 번지자 시민들은 더욱 흥분하기 시작했다. 다시 대오를 갖춰 시위 진압을 지휘했던 대구경찰서 수사주임이 도망가고, 순경 두 명이 붙잡혀 도끼로 맞아 두상이 갈라졌다. 오후가 되자 학생과 교수, 노동자, 시민 등 이만 여명의 군중이 대구경찰서를 에워쌌다. 사태를 살펴본 미군정 경찰부장 프레이저는 이성옥 대구경찰서장에게 무력으로 시위 군중을 해산할 것을 명령했다. 이성옥 서장은 주저하다 끝내 명령을 거부했다. 그는 동족끼리 피를 부르는 상잔(相殘)을 원하지 않았다. 대신 무기고를 잠그고 경찰 병력을 대구경찰서 인근 본정소학교(지금의 종로초등학교)로 철수시켰다.
“경찰들이 내빼고 있다! 쫓아가 전부 잡아라!”
후문을 통해 빠져나가는 경찰 대오를 보고 시위대들이 외치자 시위 군중이 일제히 대구경찰서로 난입했다. 미처 빠져나가지 못한 경찰 병력이 응사했으나 시위 군중은 단숨에 그들을 제압했다. 몇 명의 경찰이 맞아죽는 가운데 잔류 경찰도 도주했다.
“경찰서를 접수했다! 대구 시민 만세!”
“만세!”
시위대는 무기고를 털어 너나없이 무장했다. 무장대는 주로 노동자와 학생들이었지만, 거리의 부랑자도 상당수 끼여 있었다. 시위대는 유치장 문을 부수고 수감자 백여 명을 석방했다. 풀려난 수감자들까지 가세해 무장하니 위세는 시를 완전 압도하는 듯했다.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자 전평(노동조합전국평의회) 대구지부 지도부가 시민의 자제를 요청하는 방송을 했지만, 이미 활시위를 떠난 화살이었다. 그 방송은 시위 대오의 함성에 묻혀버렸다.
사태를 지켜보던 미군이 비상 갑호 명령을 내리고 강경 진압을 지시했다. 경찰은 진용을 재수습해 시위대를 밀어내는 과정에서 시위를 선도하는 제사공장 여공을 사살하고, 여공을 구출하러 나온 노동자들도 사살했다. 총소리가 계속 콩볶듯 했다. 그 자리에서 민간인 17명이 사망하고, 경찰도 4명이 숨지고 수백 명이 쓰러졌다.

다음날도 청년이 대구경찰서 앞 광장에 집결한 무장시위대 앞에 나서 외치면서 시위가 시작되었다.
“친애하는 대구시민 여러분! 저들은 총을 들었지만 우리는 맨주먹으로 끝까지 대구를 사수합시다. 우리 대구는 해방의 선물이 독립이 아니라 기근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따위 해방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저들은 쌀이 없으면 채소나 과일을 먹으라고 합니다. 이게 말이 됩니까? 그래서 우리가 대구를 접수했습니다. 대구는 우리의 해방구올시다! 경찰서 무기고에서 총 한자루씩 가져가이소!”
함성과 박수소리가 파도처럼 넘실거렸다. 용기를 얻은 청년이 다시 외쳤다.
“친일 시러베 놈들이 다 차지했습니다. 이 자들을 우리 대구 땅에서 영원히 박멸시킵시다. 누구나 평등하고, 사람이 대접받는 세상이 오도록 분기합시다. 우리의 앞길을 가로막는 자는 우리의 적이오! 친일의 잔재, 이 쓰레기들이 백성위에 올라타고 앉아서 여전히 배불리 먹고 단술에 취해서 국민을 벌레 취급하고 있습니다. 왜 해방된 지금도 권력과 부를 주무르고 있습니다. 이런 세상이라면 아이들에게 정의가 무엇이라고 가르치겠습니까!”
갑자기 탕! 하는 총소리가 났다. 연설 청년이 앞으로 푹 고꾸라졌다. 어느 건물 지붕에서 시위현장을 경계하던 무장경찰이 조준 사격을 해 청년을 쓰러뜨린 것이다. 시위대가 죽은 청년을 들것에 메고 거리로 나섰다. 무장시위대 무리가 뒤를 따랐다. 번화가를 비껴 선 고급주택단지의 한 저택 앞에 이르자 누군가 외쳤다.
“김가놈은 나오라! 당장 나와서 시민의 피를 빨아먹은 죄상을 토설하라!”
‘김가놈’이라는 사람은 술도가와 정미소를 경영하고, 시내에 커다란 상회를 운영하고 있는 부호의 이름이었다. 지역의 관급 토목공사도 독점하고 있는 세도가였다.
“김가놈은 군용기를 일제에 헌납한 대가로 관급공사를 따내 치부를 했으며, 물품을 관공서에 납품하면서 부를 쌓았다. 전투기 헌납보다 더 나쁜 것은 미곡으로 장난치고 있다는 점이다!”
그것이 사실이건 아니건간에 부자와 가난한 자 따위로 구분하는 선동적인 발언은 시위대를 자극하고도 남았다. 시위 군중들이 저택을 향해 돌을 던지자 와장창 유리창 깨지는 소리가 났다. 그와 함께 일부가 담을 타고 넘더니 안으로부터 대문 빗장을 활짝 열어젖혔다. 군중들이 흡입기처럼 집안으로 빨려들어가 응접실의 금고를 부수고, 귀금속을 꺼내고 장식대에 올려져있는 호화 도자기들을 바닥에 박살을 냈다. 경비 경찰과 경비원들이 막아선다고 했지만 시위대에 밀려 도망쳤다.
“가자! 미창으로!”
한 무더기가 향촌동 방향으로 쏟아져나갔다. 향촌동은 일본인이 거주하며 금융과 상권을 형성한 번화가였다. 그곳에 상회와 양곡을 보관한 미창(米倉)이 있었다. 그곳에 벌써 사람들이 몰려와있었다. 그들은 창고에서 쌀가마니를 꺼내 줄을 선 시민들에게 나눠주고 있었다.
“사람마다 쌀 한말씩 가져가소!“
쌀가마니가 쌓여있는 한 곳에는 노끈에 묶인 상회 직원들이 있었고, 그중 얼굴이 피투성이가 된 자도 있었다. 시위 군중은 차례로 고관들과 부호의 집을 공격했다. 그들 집에서 나온 식량과 재산을 시민에게 분배했다. 길바닥에 쌓아놓고 시민의 팔뚝에 빨간 페인트칠로 표시를 하고 몇됫박씩 나눠주고 있었다. 일반 상점이나 은행은 전연 피해를 입지 않았다.
이런 한편으로 시위대 주력은 대구역 광장을 시발점으로 하여 중앙로-공평사거리를 거쳐 대구시청으로, 노동자 시위대는 중앙로-우편국-경북도청을 거쳐 대구경찰서로, 학생시위대는 대구의전과 도립병원-삼덕사거리-달성경찰서-중앙파출소-통신골목-대구경찰서로, 운수노조와 전평 노평 시위대는 태평네거리-약전골목-반월당을 거쳐 고급 관료와 친일 인사들이 밀집해 살고있는 진골목으로 몰려가고, 대구사범학교 등 학생시위대는 달성공원에서 부호들의 주택 습격 후 취득한 노획물을 시민에게 나눠주고 있었다.
저녁 무렵 미 전술군이 대구 중심가에 투입되었다. 미군은 M-7mount 전차 4대와 기관총부대를 출동시키고, 대구시 전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했다. 위력적인 화기가 집중돼 경계에 나서자 외견상 대구 시내는 질서가 잡힌 듯했으나 다른 지역에서 폭발하고 말았다. 대구를 쪄누르자 풍선처럼 다른 인근 군 읍 면에서 터져버린 것이다. 대구에서 밀려난 무장시위대가 버스와 트럭을 탈취해 인근 지역으로 진출해 주민들을 자극했고, 지역민들이 동조해 낫과 쇠스랑, 죽창으로 무장하고 지방 경찰서와 면사무소를 공격한 것이다.
2일 밤 칠곡 고령 군위 영천에서 무장시위가 일어났고, 3일에는 성주 김천 선산 의성 예천 영일 경주 등지로 퍼져나갔다. 4일에는 영주 영덕에서 일어났으며, 6일에는 경상북도 전역으로 확대되었다. 꺼진 듯했다가도 다시 번져 무장봉기는 다음해 1월까지 1,2,3차에 걸쳐 연이어 일어났다. 이 시위는 도저한 위세로 전라도 충청도로까지 확산되었다.
처음 시위대는 미군정의 친일파 청산, 식량문제 해결과 노동자 임금인상 등 생계형 시위를 벌였지만, 민중이 대거 참여하면서 인민위원회 설치 요구 등 정치적 구호를 내걸었다. 이런 요구는 주민 자치와 새 세상을 열망하는 주민들의 숙원을 이룬다는 뜻의 반영이어서 특정세력을 제외하고 지지를 받았다. 시위대는 각 경찰서와 지서, 면사무소를 습격했는데, 관공서는 의외로 쉽게 접수됐다. 군·면 소재지 경찰은 대구 시내에 차출되어 귀환하지 않았고, 남아있는 경찰과 관리들은 겁을 먹고 도망을 가버렸던 것이다.
대오를 갖춘 시위대는 지역마다 보안대를 꾸리고 20명, 30명씩 조를 짜서 부호와 경찰가족을 습격했다. ‘칠곡 경찰서장 윤상탁은 황점암 일행에 의해 죽창과 낫으로 난자 당했다. 화원 지서장 김현태와 경관 정남수, 현무기, 윤삼문이 시위대가 탈추한 총에 맞아 숨졌다. 달성경찰서 경관 6명이 사살됐고, 17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107채의 가옥이 파괴되고 소실됐다. 왜관경찰서장 장석환, 과장 4명을 기둥에 묶어놓은 후 경찰서장은 혀를 잘라 죽이고, 4명은 도끼로 찍어 죽였다. 영천경찰서에 1만의 시위 군중 중 일부가 도끼, 낫, 죽창을 들고 들어가 15명의 경관들을 살해했고, 그 외 각 경찰서가 전소되고 많은 경찰관이 부상을 입었다. 공공기관 및 주택 100여 채가 소실됐다. 영천군수 이태수를 잡아 거꾸로 매달아 죽창과 낫으로 난자하고 군청에 불을 질렀다. 공무원 15명이 사망하고 가옥 200여 호가 불탔다. 이처럼 좌익들은 일본군의 잔인성을 능가했다’. <지만원의 ‘10·1 대구폭동사건-제1부 소련의 대남공작과 남한 공산당의 뿌리’(2014.10.07일자) 일부 인용>.
통계에서 보듯 경찰의 피해가 유난히 컸다. 이들에 대한 원성이 높았기 때문에 보복심 또한 그만큼 높았을 것이다. 그중 영천이 가장 드셌다. 그곳은 다른 지역보다 사회주의자들이 많이 포진해 있었다.
10.1항쟁은 대구를 비롯한 경상북도 18개 군과 남한 전역 73개 시군에 파급되어 성공한 듯이 보였다. 그러나 미군정과 경찰은 타도의 경찰병력과 서북청년단, 백의사, 족청 등 우익 청년조직을 차출해 대대적인 반격전에 나섰다. 경찰 피해가 많으니 경찰 지휘부가 더 화력을 집중해 소탕전을 벌였다.
영천경찰서에서는 경찰이 체포한 시위대 수십 명을 생매장시켰고, 주민들을 공회당에 모이라고 해놓고 수류탄을 던져 집단으로 폭사시켰다. 피검자들을 경찰서 지하실로 끌고 가 전기고문과 물고문으로 불구를 만들거나 죽였다.
태백산맥과 소백산맥으로 숨어든 야산대에 대한 대대적인 토벌작전도 벌였다. 그러나 깊은 산에 박힌 야산대를 쉽게 찾진 못했다. 야산대는 밤이 되면 시내로 내려와 동지나 친척이 보복당한 것을 확인하는 즉시, 경찰 뒤를 쫓아 복수극을 벌이고, 경찰서에 불을 질렀다. 이것이 남한 지역에서 활동한 빨치산 활동의 효시가 되었다. 야산대는 빨치산의 다른 이름이었다.

대구는 해방되면서 만주 시베리아 연해주 화북 상하이 충칭 등지로 나갔던 사람들이 고향으로 돌아오는 숫자가 수만 명에 이르렀다. 귀국자들은 주로 망명 세력들이었으며, 독립을 위해 분투한 항일투사들과 그 가족들이었다.
대구는 전통적으로 민족의식이 뚜렷한 지역이었다. 출신 비율을 보면 경상북도 출신이 다른 어느 지역보다 월등히 높았다. 깨어있는 지식층이 많은 결과였다. 호남·충청 지역 역시 독립운동가들이 적지 않지만 이들은 대체로 전통 유림 계열에 비조직적인 데 반해, 경북 지역의 독립운동가들은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의식이 뚜렷한 지식인들이었다.
일제강점기, 민족주의는 사회주의 운동으로도 치환되었다. 일본 제국주의의 대립 이념이 사회주의였기 때문에 그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그중 대구 사회주의자들은 연대와 단합이 강고한 세력이었으니 일제 관헌은 이들을 붙잡기 위해 대대적인 체포령을 내렸고, 결국은 도피하거나 망명길을 택했다.
대구를 중심으로 활약해온 항일운동 사회주의자는 김단야(김천) 박열(문경) 김두봉(동래) 김원봉(밀양) 박문규(경산) 이여성(칠곡) 이쾌대(칠곡) 이관술(울산) 이재복(안동) 박상희(구미) 안영달(경남) 황태성(대구) 김달삼(대구) 등이다. 인근의 이만규 김삼룡, 양양의 최용달도 대구를 중심으로 활동했다.
지역민의 진보적 성향은 뿌리가 있었으니, 그 근원은 조선조 때 기호학파 세도에 밀린 영남학파가 현실타파를 위한 저항적 위정척사 운동으로 자신들의 세계관을 승화시킨 영향이 컸다. 그들은 의병활동, 국채보상운동, 항일독립운동 등 진보개혁운동의 선봉에 섰다. 10.1 대구 민중항쟁도 그 연장선이었다. 먼 훗날 4.19학생혁명, 6.3사태도 대구가 도화선이었던 것도 이런 진보적 성향의 맥락 때문이었다.
민족주의나 사회주의라는 이념은 정밀한 이념적 체계를 갖추었다기보다 일제에 저항하는 기제로 차용되었을 뿐, 실제적인 정치적 지향에서는 단순한 성격의 신념이었다. 일본 제국주의나 군국주의를 반대하고, 한반도 강점을 반대한다는 애국주의의 한 행동 양식이고, 차별과 탄압을 받지 아니하고 평등하게 평화롭게 사는 이념으로 인식되는 정도였다. 그런데 지금 조선총독부를 이어받은 미군정이 일제보다 더 거칠게 이를 구실로 국민을 탄압하고, 거대한 음모의 시선으로 몰아붙이고 있다. 생태적으로 불의를 거부한 귀국자들이 이를 침묵할 수 없었다.
해방이 되어서 돌아온 귀향객들은 먹고 살 수 없는 민생 문제와 함께 국토가 두 동강난 채 강대국 통치에 지도자들끼리 분열하는 모습을 보았다. 친일 사대주의자들은 어느새 옷을 갈아입고, 새 권력에 재빨리 기생하며 일제강점기 못지 않는 권력과 부를 축적하고 있다.
피흘려 쟁취한 해방과 독립의 초상이 이렇게 초라한 것인가 하는 좌절감이 귀향운동가들의 가슴을 압박했다. 뒤로 물러서야 할 친일파와 경찰이 지배층으로 우뚝 서있고, 미군정 역시 오만할 뿐, 무엇 하나 해결해주는 것이 없다. 경제적 어려움과 사회적 불평등, 당장의 기근으로 민생은 극도로 위협받고 있다. 그런 가운데서도 착취와 수탈이 자행되었다.
이런 현실을 보고 행동에 나서지 않는 것은 자기 세계관을 부정하는 일이 되었다. 투쟁의 경험을 살려 모순 극복의 선두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 거기엔 공산주의자와 사회주의자, 민족주의자 구분이 의미가 없었다. 조국의 해방과 독립을 위해 차용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그들은 강고한 투쟁을 위해 그 노선을 유지했다.
대구 항쟁은 이러한 저항세력이 풍부한 인적 자원에 의해 터져나온 자연스러운 운동이었다. 그래서 누가 주체세력이고 누가 추종세력이라는 개념도 사실상 모호했다. 누구나 동조자고 누구나 주동자였다. 조직력을 가진 전평과 노평, 운수노조 등 노동자 조직과 대구고보 대구사범 대구의전 등 학생들이 전면에 나선 것도 사실이고, 사회주의·공산주의·유림 세력이 나선 것도 부정할 수 없으며, 그중 양심세력이 중심이 되었던 것도 사실이다. 모순 극복이라는 공감과 연대가 확대되었기 때문에 전도민적 궐기로 나온 것이었다.
먼 훗날 승자 편에 선 사람들이 빨갱이 준동으로 왜곡했을 뿐, 당시는 누구나 나선 사회변동의 주체였던 것이다. 훗날 극우적 군부 정권의 기반이 된 지역 특성 때문에 이 운동은 크게 왜곡되었고, 피해자들은 살기 위해 숨을 죽였다. 그런 과정에서 가장 치열했던 해방공간의 고뇌가 상당히 의도적으로 파묻혀버렸던 것이다.
미군 정보보고서에 따르면, 1-3차 대구 봉기에서 경찰 및 공무원 201명, 민간인 73명이 사망하고, 부상 1,000명, 행방불명 30명, 파괴된 건물 776동 등의 피해를 입었다. 그리고 공산당원 7,000명이 검거되고 1,500명이 구속되었다(출처: 대한민국 근현대사에 대한 조명-대구10.1폭동사건, http://pkgroo.tistory.com/282 청년2부 그루터기선교회).
그러나 이런 집계 상황과 통계 수치는 신뢰할만한 것이 되지 못했다. 민간인 사망자보다 경찰 및 공무원의 희생이 훨씬 많았다는 것이 집계의 불신을 샀다. 경찰은 총기를 휴대했고, 중화기를 갖춘 미군의 지원을 받았기 때문에 압도적인 무기의 우위에 있었다. 당연히 민간인 피해가 클 수밖에 없었다. 대구형무소에 수감된 사상범을 집단 처형한 것만도 천 명이 넘는다고 했다. 그래서 경찰과 공무원의 피해가 더 컸다는 발표에 대해 믿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집계되지 않은 민간인 사망자ᐧ행불자만도 수만 명에 이르렀던 것이 당시 상황이었다.
1946년 10월 1일부터 다음해 1월까지 3차 봉기에 걸쳐 쌍방간에 희생이 컸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다. 해방 직후 가장 큰 사건이자, 가장 많은 인명 피해를 가져온 사변이었던 것을 부정하는 사람도 없다. 그런데 까마득하게 잊혀져갔다.

적막한 빈소

오민균이 구미에 내려갔을 때는 저녁 어스름 무렵이었다. 박정희의 집은 기울어져가는 초가가 말해주듯 몹시 빈궁해보였다. 빈소가 차려진 곳이라고 했지만 사람들의 그림자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오민균이 싸리문을 열고 마당으로 들어설 때까지 집안은 고요적막했다. 그는 한참 우두커니 서서 비어있는 집안을 둘러보았다.
“어디서 오는 객이시오?”
사립문 밖 골목에서 한 사내가 다가오더니 물었다. 오민균은 조금 놀랐으나 정색을 하고 대답했다.
“네, 박정희 생도를 찾아왔습니다.”
“박씨가 여기 있는 걸 어떻게 알았소?”
그는 경계의 눈초리로 오민균의 위아래를 훑었다. 어떤 피해의식 때문인지 그는 낯선 방문자를 곁눈으로 살피고 있었다.
“비보를 듣고 찾아왔습니다. 저는 경비대사관학교 교관입니다.”
“조문 온 것이오?”
“그렇습니다.”
“헌데 웬 젊은이가 문상을....”
학교 대표쯤 되는 사람이 찾아야 예의가 아니냐는 태도였다.
“교수부장님께서 내려가서 애도를 표하고 오라고 하셨습니다. 교수부장님과 저는 박정희 생도님의 일본 육사 후배들이고, 그래서 박정희 생도님께 사적 인연을 갖고 있습니다.”
그제서야 그가 경계심을 풀고 말했다.
“먼 길 오시느라 욕봤소. 망자를 내가 달려가서 업고 온 사람이오. 피흘리지 않게 이불자락을 뜯어서 가슴을 막고 집으로 업고 왔소.”
“그러셨군요. 다시 한번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다 쓸데없는 짓이오. 한 인물을 없애다니, 난세가 아니고는 이럴 수는 없재. 나라에서 데려다 써야 할 재목을 이렇게 없애버리니 하늘이 두렵지 않은지 모르겠소. 빌어먹을 세상이재.”
“어떻게 되는 분이신지....”
“매부되는 사람이오. 한정봉이오.”
“그러셨군요. 우선 빈소에 조문을 하고 싶습니다.”
“빈소고 뭐고 이 난리에 무얼 차리겠소? 장례도 치르는둥 마는둥 했소.”
장례식은 박상희가 지역사회의 지도자여서 성대하게 치러야 했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제대로 치를 수가 없었다.
“박 선배님을 만나고 가려고 합니다.”
“따라오시오.”
그가 싸리문을 나와 말없이 앞장섰다. 서녘 하늘이 붉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멀리 보이는 강물도 함께 물들어 처연해보였다. 한정봉은 갈대가 우거진 강변을 걷다가 굽이에서 위쪽으로 틀어진 지형을 타고 올랐다. 언덕에 오르자 주변 산야와 강이 한 눈에 들어왔다. 한결같이 고요하고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이런 산야에서 피를 부르는 비극이 계속되고 있다는 것이 현실같지 않았다. 한정봉이 독백하듯 말했다.
“학식과 인격이 높은 사람이지. 그래서 모두 지도자로 모셨재. 풍모 또한 잘 갖추어서 큰 일을 할 것이라고 다들 믿었재. 해방이 됐으니 당연히 큰일을 해야 할 사람이라고 보았재. 그런데 이 지경이 되니 나도 총을 들고 싶고마.”
“박 생도님이 누구보다 형님을 존경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애국자시라구요.”
“고마 그런 사람 근동에 없다 아이가. 망자는 근동에서 찾아볼 수 없는 인물이오. 나라를 위해서 헌신했으면 대접받고 살 줄 알았는데, 이게 무슨 날벼락이가?”
그는 꺼져가듯 탄식했다. 박상희는 일본 패망을 선산경찰서 유치장에서 맞았다. 몽양 여운형이 이끌던 비밀결사 건국동맹의 일원으로 활동하다가 체포되었다. 경찰의 예비검속망을 벗어나지 못해 체포되어 갇혔는데 어느날 해방을 맞아 풀려난 것이었다. 청년기 신간회 참여시절부터 당했기 때문에 신경쓰지 않았는데, 안에서 고문당하고 맞는 구속자들을 보면서 알게모르게 경찰에 대한 적개심과 증오심을 가졌다. 그는 출소하자마자 건준 선산 구미지부를 꾸리고,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의 무장을 해제하고 무기를 압수했다.
이 무렵 대구에서 대대적인 무장시위가 일어났다. 대구의 폭발은 인근 지역 인민봉기의 기폭제가 되었다. 그가 시위대를 이끄니 따르는 자가 이천 명에 이르렀다. 그는 이들을 지휘해 선산경찰서와 구미지서, 구미면사무소를 접수했다. 건국동맹-건준이 인민위원회로 개칭되자 면사무소에 인민위원회 간판을 걸었다.
경찰서장을 비롯한 경찰관 16명과 친일분자를 유치장에 잡아 가두었다. 경찰서 입구에 인민위원회보안서라는 간판을 내걸고 전국에서 유일하게 인민재판을 실시했는데, 이때 경찰서장 이하 20여 명을 구속했다. 강경파가 구금한 경찰들을 모조리 처단하려 하자 박상희는 죄의 경중을 따져서 처리할 것을 지시해 억울한 인명살상만은 막았다. 그러나 그는 경찰로부터 처단의 중심 인물로 꼽혔다. 박상희는 구미면사무소를 접수한 뒤엔 양곡 135가마를 풀어 주민에게 나눠주었다.
박상희는 사회주의 계열인 선산청년동맹의 상무위원 겸 집행위원으로 활동하며 일제에 맞섰다. 신간회가 창설되자 주요 활동가로 나섰으나 이 단체가 강제 해산되자 1934년 몽양이 사장으로 있는 조선중앙일보 대구지국장을 맡아 언론인으로 변신했다. 이듬해 동아일보의 구미지국장 겸 주재기자로 옮겨 활동 폭을 넓혔다. 지국장으로 활동하면서 주민의 어려운 일들을 도와 신망이 높았다. 그것이 대구 항쟁에서 주민을 결집하는 데 큰 힘이 되었고, 선산ᐧ구미지역이 영천 지역과 함께 다른 어떤 지역보다 강한 활동 배경이 되었다.<이상 위키백과 일부 인용>
박정희는 먼 훗날 펴낸 수기 「나의 소년시절」에서 “어려운 생활속에서도 어머니는 상희 형을 학교에 보냈다”라고 회상했다. 어려서부터 총명했기 때문에 가난한 살림살이 가운데서도 형을 학교에 보낸 것인데, 머리 좋은 그가 가난 때문에 상급학교 진학을 못하면서 시대와의 불화를 견디지 못했다는 것이다.
박상희 세력이 선산경찰서를 접수한 지 사흘만인 10월 6일 충청도에서 증파된 경찰과 서울에서 증파된 족청, 백의사, 서북청년회 등 우파 청년단체들이 선산경찰서를 탈환하려고 칼빈 총으로 공격했다. 박상희는 사세의 불리를 판단하고 “동지들은 일단 피하라”고 독려하고, 경찰지서 앞 논두렁으로 달려가 엎드려 피신했다.
이를 지켜보던 경찰이 집중 사격을 가해 그가 쓰러졌다. 매제 한정봉이 총탄을 무릅쓰고 다가갔을 때, 그는 가슴과 배에서 피를 콸콸 쏟아낸 채 숨져 있었다. 그의 나이 만 41세였다. 시신은 한정봉에 의해 수습돼 집으로 옮겨졌다. 그의 명망을 생각하면 문상객이 줄을 이을 법도 했지만 삼엄한 분위기 탓에 장례는 쓸쓸하게 치러졌다. 경찰 총에 맞아 죽었으니 지지자들로부터 가해질 보복을 두려워한 경찰도 집 주위에서 이중삼중으로 엄중한 경계망을 펴고 있었다.
박싱희는 인민위원회 부위원장이고 선산군 남로당 내정부장이었으니 공산주의자란 말을 들어도 부정할 사람은 없었다. 지방의 인민위원회는 사회주의자, 또는 공산주의자가 중심이 된 것은 맞지만, 그러나 민족의식이 없는 사람은 해당되지 않았다. 지식층과 젊은이들의 집합체란 말이 더 맞는 기구였다. 당시 풍조에서 이들은 지식인의 표상이었다. 당시는 사회주의자, 민족주의자 구분이 사실상 무의미한 것이었으나 백색 테러가 횡행하면서 악마화되었다.

밀담

한정봉의 안내를 받아 주막의 으슥진 뒷방으로 들어서자 촉수 낮은 불빛 아래 박정희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오민균을 맞았다. 방안에는 중년 남자들과 젊은이들이 둥그런 술상을 가운데 놓고 둘러앉아 있었다.
“어떻게 이렇게 먼 길을 왔소.”
“교수부장님의 지시로 왔습니다. 형님의 타계에 대해 심심한 애도를 표해달라고 하셨습니다.”
오민균이 거수경례를 붙이고 깍듯이 보고했다. 교관이 생도에게 거수경례를 붙이는 것은 군기상 맞지 않는 것이었지만, 그는 이렇게 예의를 차렸다. 한정봉은 앉을 자리가 아닌 듯 돌아갔다.
“부모님상도 아니고 백씨상인데... 어쨌든 먼 길을 오시느라 수고했소.”
“말씀 낮추십시오.”
그러자 박정희가 소리없이 웃으며 받았다.
“오 소위는 교관이고 나는 생도 아닙니까.”
좌중의 사람들이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을 번갈아보며 의아스런 표정을 지었다. 나이로 보나 외관상으로 보나 교관과 생도가 뒤바뀌어 보이는데 반대되는 대화를 나누니 이상한 것이다. 오민균이 그들을 향해 해명하듯 말했다.
“박정희 선배님은 일본 육사 57기시고, 저는 61기입니다. 연령도 저보다 아홉 살이 위이십니다. 저는 1학년 생도 때 해방을 맞았고, 박정희 선배님은 관동군 중위로 복무하시던 중 해방을 맞으셨습니다. 저는 곧바로 귀국해서 군사영어학교에 입교했고, 선배님은 뒤늦게 귀국하신 바람에 늦게 경비대사관학교에 입교하셨습니다. 그래서 형식은 지금 제 밑에서 생도생활을 하고 계시지만 임관하시면 위치가 달라질 것입니다. 이런 사례들로 교내에서 쑥스러운 일들도 많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이해하십시오. 교관들이나 생도들은 일찍부터 선배님의 해박한 군사이론, 실전론을 높이 사고 있습니다. 평판이 자자합니다.”
“멋적은 소리 그만 하고, 어서 술이나 받으시오.”
주변에서도 자리를 내 앉기를 권하자 오민균이 박정희 곁자리에 끼어 앉았다. 술상에는 찌그러진 막걸리 주전자와 익힌 돼지창자, 비개가 많은 돼지 고깃살과 총각김치가 쟁반에 가득 담겨져 올라와 있었다.
“내 소개하겠소. 이쪽 어르신은 이재복 선생이십니다. 그 옆엔 황태성 선생이시고, 임종업 선생이십니다. 형님이 돌아가시자 어르신들이 어려운 가운데서도 내 일처럼 장례를 치러주셨소. 그래서 사은의 뜻으로 내가 모셨소. 모두들 상희 형님과 호형호제하시는 분들로 내가 어렵게 모시는 분들입니다. 뒤의 청년들은 형님을 따르는 젊은이들이고...”
오민균은 한 사람씩 소개할 때마다 그들을 향해 일일이 목례했다. 술판은 말없이 무르익어갔다. 누군가 입을 열지 않으면 굳게 입을 닫고 있겠다는 듯 좌중은 무겁게 침묵을 지키며 술잔을 기울였다. 비탄의 고독감이 뼛속까지 스며드는 것 같았다. 한참 잔을 주고 받은 뒤 박정희가 침묵을 깼다.
“젊은이들은 대구사범 출신들인가?”
“그렇습니다. 저희들은 현지 학교에 부임한 보통학교 교사들입니다. 박상희 위원장님의 민전 청년부에서 활약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박정희 선배님 말씀 많이 듣고 자부심을 느껴왔습니다.”
박정희가 희미하게 웃으며 청년들과 오민균을 번갈아 보았다. 청년교사가 박정희에게 정중히 술잔을 올린 뒤 말했다.
“경찰서를 부수겠습니다. 싹 갈아엎어버리겠습니다. 본떼를 보여야지요. 함무라비 법전이 아니라도 이에는 이, 눈에는 눈입니다.”
“그래야 될까?”
가로막은 사람은 황태성이었다. 그러나 청년교사는 물러서지 않았다.
“무참히 당했는데 참고 있으라고요? 견딜 수 없는 모욕입니다. 박상희 위원장님은 세상이 아는 분입니다. 경찰 수백과도 바꿀 수 없는 분이시죠.”
“복수라면 더 큰 것이 있소.”
황태성이 단호하게 말했다. 그는 처가가 있는 김천에서 손위 처남 임종업과 함께 일제에 투쟁해온 사회주의자였다. 황대용이란 가명으로 활동해 그의 실체는 가려졌으나 고향인 상주와 김천에 지지자들을 모아놓고 박상희 이재복과 동선을 같이하면서 지하운동을 폈다. 박상희의 죽음은 팔이 한쪽 잘려나간 것만큼 그에게는 큰 아픔이자 손실이었다. 대구에서 함께 활동해온 현준혁의 죽음 이후 또다시 이런 비극을 맞으니 심사가 몹시 괴로웠다. 하고자 하는 일이 수포로 돌아갈 위기에 있었다. 조금만 투쟁 대오를 강화하면 결실을 볼 수 있다는 희망을 그는 갖고 있었다. 그들 모두 박정희보다 열 살 이상 되는 연령대였고, 오민균에게는 아버지뻘이었다.
“미국은 국민의 안녕과 질서를 잡아주고 물러가야 하는데 경찰 놈들을 앞장세워 죽도 밥도 아니게 나라를 분탕질하고 있소이다. 약소국이 겪은 서러움은 안중에도 없고, 약소국의 처지가 어떻다는 것에도 관심이 없어요. 왜 그들이 조선반도에 들어왔는지 어이상실이오. 주재국에 무지한 자들이 주재국의 운명을 좌지우지한다는 것은 용납할 수 없습니다. 올바로 국정을 수행하라고 요구하는 사람이 희생되고 있으니, 이러다 나라의 동량들이 모두 쓰러져갈지 모르겠소. 다시 망국의 길로 가지 않을까 걱정이오. 이러다 전쟁이 터질지 모르오. 이자들이 구도를 그렇게 몰아가고 있는 것같소.”
“그들은 전쟁으로 부강해진 나라니까요.” 곁의 청년이 받았다. “하지만 그럴수록 우리도 맞서야 합니다. 일제와도 사십년을 싸웠는데, 일만 년인들 못싸우겠습니까. 미국이란 나라는 그들을 괴롭혀야 요구에 응합니다. 우리가 운전자가 되기 위해서는 더 강력하게 투쟁해야 합니다.”
“아니오. 미국이란 나라는 우리가 그렇게 나오기를 바래요. 그들이 자랑하는 것은 힘이니까 세계 도처에서 싸울 곳을 물색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마치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기를 기다렸다가 어느 순간에 한꺼번에 불을 확 질러서 싸그리 없애버리는 것, 그런 정책을 쓰고 있소. 왜 거기에 말려들려고 그래요? 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시기라는 것이 있소. 우리가 이 정도 한 것으로 우리의 힘과 실체는 증명되었소.”
이재복이었다. 그는 항쟁의 배후였지만 사세를 좀더 살피고 행동하자는 신중파였다.
“본떼를 보여줘야 합니다. 조직을 재정비했습니다.”
“아서요. 복수보다 더 큰 것이 있소. 지금은 단일전선 단일대오 단일주장이요. 철두철미 민생문제에 매달려야 합니다. 전염병, 기아, 쌀값폭등, 민생고... 이런 것에 주안점을 두면 물고기는 저절로 물로 들어오지요. 백성의 지지가 우리의 힘이오. 자, 보시오. 당연한 결과지만 민심은 우리 편에 섰소. 행정 관리와 금융기관 직원, 회사원과 같은 중간계층도 우리 시위대에 호응하고 있소. 중간층 민심도 미국의 행태를 비판하고 있소. 대구시의사회와 의대 교수들이 ‘시민에게 발포한 경찰관 부상자의 치료를 거부한다’는 경고문을 병원앞에 써붙이지 않았는가. 대구 항쟁은 전민 봉기, 전민 항쟁의 성격을 지니고 있는 것이오. 노동자 농민 학생 시민 일부 군정 관리 의사, 순경들까지 지지하고 있다면 우리의 목적하는 바는 달성된 것이오. 이익을 탐하는 친일·친미세력, 일부 자산 계급을 제외하고는 전 민중이 지지하고 있소. 애국자는 자신의 위험을 감수하고 나라에 이익을 가져다 주기 위해 분투하는 사람이고, 매국노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나라의 이익을 훼손하는 현실이 입증되고 있으니 시간은 우리 편이오. 소수의 선동에 의한 폭동으로 몰고 가려고 해도 그 기도는 좌절되고 말 것이요. 이럴수록 경고망동하면 안돼요. 다만 공산당이 사주했다는 선동이 걱정이오. 그런 말이 널리 유포되면 탄압의 빌미만 제공하고 말 것이니까.”
“실제로 박헌영 선생이 지휘하지 않았습니까.”
청년교사가 물었다.
“개입한 건 맞아요. 공산당에 입당한 노동자들이 앞장섰으니까요. 그러나 공산당의 지령은 9월 총파업에만 국한되어 있지, 대구항쟁까지 지시한 것은 아니오.”
이재복은 박헌영의 심복이었다. 임종업이 나섰다.
“미군정의 태도가 문제요. 미소공동위원회가 성과 없이 결렬되고, 찬반탁 시위에서 좌익세력만 집중적으로 탄압받고, 그런 한편으로 그들은 좌우합작을 추진하는 이중성을 보이고 있소. 이러니 박헌영 동지 등 원칙주의자들은 미군정에 도전하는 신전술로 대응하는 거요. 그들은 몽양과 규사(김규식)를 중심으로 하는 온건 세력에게 좌우 합작노선을 제시하면서도 탄압했소. 너무나 이중적이오. 우리가 과격하다고 불법시하는데 왜 과격해졌는지를 알아야지요. 그러면우익 테러는 왜 방조하는 거요?”
“잡초가 무성할 때까지 기다린 거라니까요. 어차피 우리는 마른 덤불 신세입니다.”
“군정은 이승만과 김구 세력도 견제하는데, 어느것이 진심인지 모르겠소. 어떤 때는 여론을 부추기면서, 또 어떤 때는 여론을 배반한단 말이오. 이런 이중성을 내보이면서 유독 대구경북의 사회운동세력들을 죄악시하는 거요. 이상한 전략이오. 식량난이 말할 수 없이 비참한 상황인데, 사회운동 세력이 이것을 외면할 수가 있는가 말이오. 자유 곡가제를 시행하다가 공정가격제를 실시했다가 미곡 수집령을 공포했다가 강제 수거령을 내리고, 거기에 연명하기도 어려운 살인적인 배급 정책, 이렇게 오락가락하는 식량 정책에 하곡 수집까지 또 강제했소. 한해와 수해가 겹쳐서 생산량이 턱없이 부족한데도 경북 지역만 유독 가혹한 공출 정책을 쓰고 있소. 도대체 무쇤들 견뎌내겠소? 무슨 억하심정인지 모르겠소.”
“우리 저항 세력을 때려잡으려고 그따위 정책을 쓰는 거요. 구실을 잡기 위해 백성을 볼모로 묶는단 말이오.”
“친일 세력의 이간질도 보아야 하오. 그들이 마음놓고 살려고 비판세력을 제거하려는 것이오.”
“맞습니다. 모두 친일파 놈들의 장난이오. 그들이 경찰에게 뒷돈을 대주고 있소.”
“그러게 말이오. 놈들부터 처단해야 합니다. 한번 따져봅시다. 먹을 것이 없으니 풍기 영주 청송 영양 봉화 산간지역에선 아사자가 속출했소. 어린아이들은 호열자에 속수무책으로 죽어나가고 있소. 경찰은 방역이란 이유로 교통을 통제하고, 사회운동세력을 검거하는 기회로 이용하고 있소. 이런 모든 것이 친일 관료와 경찰, 친일 업자들이 합작해서 벌인 장난이오. 미국놈들이 알면 얼마나 알겠소. 그 자들이 미군 뒤에서 장난치는 거요. 그래서 끝난 것이 아니라 이제 시작입니다.”
그것이 맞는지 안맞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다만 타깃이 분명해야 시민을 결집시킬 수 있다. 좌중은 이렇게 분석한 뒤 결의를 다지듯 가득 채워진 술잔들을 단숨에 비웠다.
“박헌영 선생의 노선이 강경한 것 아닙니까? 비타협적 노선에, 소련만 지지하는 것은 스스로 묘혈을 파는 것 아닌가요?”
청년교사가 불만을 토로했다.
“그런 것은 아니오.” 이재복이 응답했다. “정판사(위조지폐 제조사)사건이 터지면서 터무니없이 공산당에 대한 불법화, 당 간부들에 대한 체포령이 내려지니 자구책을 갖는 건 당연하지. 급진성은 그들의 강경책 때문에 나온 대응인 거요. 알다시피 9월 총파업은 노동계급의 파업만 설정했을 뿐, 무력투쟁은 상정되지 않았소. 박헌영 동지는 미군정의 체포령을 피해서 관속에 누워서 영구차로 비밀리에 월북했소. 그러니 현장지휘란 있을 수 없소. 지도자가 현지지도를 해도 상황 변화를 끌어오기 어려운데, 그가 부재한 가운데서 눈 앞의 지휘자처럼 무장혁명을 이끈다? 그가 영향을 주긴 했지만 절대적인 힘을 발휘한 것은 아니오. 그가 항쟁을 주도적으로 일으켰다고 하는 것은 우리 세력을 때려잡기 위한 모략이요. 설령 공산당에서 지휘했다고 해도 백성들이 따르지 않으면 무슨 소용이 있소? 대구 항쟁은 억울한 민심이 견디다 못해 들고 일어난 민중혁명이오. 인민위원회나 민전(민주주의민족전선)이 부추길 수는 있지만, 대구항쟁은 대구시민 모두가 함께 한 동조자고 주동자요. 추종세력이고 주체세력이란 말이오. 그들을 구분하거나 모욕하지 마시오. 이런 상황에선 미물도 일어날 형편이오. 솔직히 우린 민심을 수습할 역량이 부족했소. 광범위한 대중의 집약된 불만을 그릇에 담아서 대안을 내놓을 역할을 다하지 못했소. 그러니 앞으로가 문제요. 누구나 싸울 수는 있지만, 이긴다는 보장은 없소. 국면을 우리 것으로 끌어오는 데는 지혜가 필요해요.”
“경찰이나 미군정은 앞으로 모든 폭동은 좌익의 소행이라고 공격해올 것입니다. 야산대도 그런 전략으로 소탕에 나설 것입니다.”
“짊어지고 가야 할 것은 짊어지고 가는 것이 우리 운동자의 숙명이오. 이런 일은 우리만이 겪는 것이 아니오. 세계사에 무수히 일어난 민중봉기들은 권력쟁취를 위해서라기보다 생존권을 위해, 비인간적인 현실에 저항해 생명을 걸고 일어난 것들 아니겠소. 그것이 도리이고 사는 가치이고, 정의라고 보는 것이오. 그것을 모해하고 탄압의 빌미로 삼는 세력이 있지만, 그럴수록 흔들리지 말고 가는 거요. 그것이 우리의 숙명이오. 백성과 함께 가는 길은 외롭지 않소.”
“좋습니다. 그러면 이번 사건을 정리해보겠습니다. 이번 사건은 일제강점기의 지배층을 제대로 가려내지 않은 미군정의 오류와 식량정책 실패, 가혹한 양곡 공출정책, 경찰과 반공청년단의 좌익사냥, 친일파와 민족반역자들의 권력 복귀로 민심이 분노해서 일어난 봉기입니다. 이것을 널리 주입시켜야 합니다. 이런 근본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제2, 제3, 아니 제10의 대구 항쟁이 일어난다고 경고해야 할 것입니다.”
“그보다 근원적인 것은 민족의식을 바로잡는 거요. 무정부적 무정견의 혼란시대일수록 민족정체성의 확립이 필요해요.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친일파를 청산해야 합니다. 그들이 나라를 이끌어가면 정의가 물구나무서는 것이오. 능률성 기능성, 전문성 따위가 무슨 소용이 있소? 우리는 농경사회와 유교적 전통시대를 사는데, 거기에 능률성과 기능성이 요구되면 얼마나 요구되겠느냔 말이오. 느리더라도 확실한 민족관과 국가관, 가치관을 내세워서 새롭게 출발해야 하는 것이오. 그런데 제 정치세력은 대구 항쟁을 피상적으로 보고 있는 것 같소. 코끼리 몸만지기 식이오. 순결한 정신을 기망하고 있소.”
“그런 것 같습니다. 한민당은 대구항쟁을 박헌영 일파의 선동 놀음에 기인한 것이라고 벌써부터 비난하고 있습니다. 변함없이 분열의 인자들을 갖고 있습니다. 이영과 정백 등 반박헌영세력 공산주의자들도 박헌영의 모험주의가 빚어낸 비극이라고 비난했습니다. 몽양 선생은 미군정의 정책 오류가 인민 항쟁의 주원인이라고 진단했지만, 폭력으로 혼란을 일으킨 원흉은 조선공산당이라고 비판했습니다. 규사 선생은 조선 독립을 방해하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우려했습니다. 다른 정치지도자들은 침묵입니다. 이해득실에 따라 관점이 각기 다릅니다.”
오민균은 몽양과 아고 대령간의 관계를 생각했다. 아고는 몽양을 조선의 미래를 짊어지고 갈 인물로 보았고, 그를 어떻게든 옹립하려고 했다. 하지만 경무부와 한민당 세력은 그를 비토하고 나섰고, 귀국한 이승만과 김구도 그의 활동에 제동을 걸었다. 오민균은 작은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분열하는 지도자들의 행태가 못마땅했다. 큰 차이를 발견하지 못하겠는데 싸움은 피터지게 하고 있는 것이다.
“친일파 청산하라, 공출제를 폐지하라, 쌀과 의약품을 제공하라.... 이렇게 민생 문제를 들고 나갑시다. 민중의 증오심을 키운 경찰과 식량배급 문제는 꼭 들고 나가야 합니다. 이념 과잉은 저 자들의 농간에 넘어가는 하수요. 저 자들은 계속 우리를 파괴적인 빨갱이 세력이라고 몰아가는데, 따라서 지도부는 지역 세포들에게 자중과 자제로 때를 기다리도록 합시다.”
그들은 회합을 마친 뒤 상당히 취한 몸으로 조심스럽게 각자 어두운 밤길을 나섰다. 상모리 마을을 향해 가는 박정희를 이재복이 불러세웠다.
“형님을 잃었지만 어쩌겠나. 이곳 문제는 우리에게 맡기고 어서 군문으로 돌아가시게. 올라가면 내가 찾아가겠네. 할 일이 많을 거야.”
박정희는 말없이 우두커니 서있었다. 그 침묵이 무서운 고독감을 안겨주고 있었다. 작고 단단한 체구였지만 그의 몸에선 어떤 절망감이 감돌고 있었다.
“내 말 명심하게.”
“올라오시면 연락 주십시오.”
이재복이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박정희와 오민균 둘만이 남게 되자 박정희가 길가로 가서 오줌을 누기 시작했다. 그가 앞을 탈탈 털더니 말했다.
“걱정이군.”
오민균은 그가 대구 항쟁의 앞날을 걱정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대구 항쟁은 진정한 민심의 표현인데, 군정이 민심을 수용해줄지 걱정이네요.”
“그게 아니야. 우후죽순처럼 정당을 만들어 나라를 망치는 자들이 문제란 말이야. 군사단체 난립도 그렇고. 독립운동했습네 하는 사람들이 서로 찢고 발기고 있는 것도 그렇고, 나라 꼴이 뭔가. 그게 걱정이라는 거지.”
그는 오민균과 다르게 말했다. 그렇더라도 오민균이 평소 생각하는 것과 다르지 않아서 그는 그와의 깊은 연대의식을 느꼈다.
“오 소위, 여기까지 왔는데 대접하지 못해서 미안하오. 함께 군문에 있으니 자주 볼 날이 있겠지. 추후를 기약합시다. 조심해서 올라가시오.”
다음날 선산경찰서가 다시 공격을 받고, 다른 지역 경찰서도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지휘부의 생각과 달리 농민과 청년들이 주축이 된 야산대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경찰서와 관공서를 습격했다. 어떤 곳은 쌍방간에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졌다. 산악지대가 많은 경상도 지역은 야산대가 활약하기 좋은 환경이었다. 군과 경찰이 투입돼 대대적인 토벌작전에 나섰지만 야산대 또한 저항이 만만치 않았다. 쌍방 피해는 가중되었다.
박정희가 경비대사관학교 2기를 수료하고 춘천 8연대로 배속된 것은 그해가 저물어가는 12월이었다. 8연대는 연대 중에서도 장교들이 기피하는 곳이었다. 활동 근거지가 지형적으로 험한 산악지대인데다 날씨가 춥고, 부대는 시설도 병력도 제대로 갖춰지지 않아서 불만들이 많았다. 그곳엔 최남근 이상진 이병주 등 만주군관학교 출신들이 배속돼 있었는데, 그들은 군 계보상 비주류들이었다.
오민균은 박정희를 교관으로 불러들여야 한다고 교무부에 건의했다. 사관생도들에게 풍부한 군사지식을 주입시킬 적임자는 그라고 보았고, 과묵하지만 깊은 정이 묻어나는 그를 가까이 하고 싶다는 개인적 소망도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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