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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희, 몽양, 그리고 박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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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박상희, 몽양, 그리고 박정희

[팩션] 실록소설 '행군-어느 민족주의자를 위한 변명' <14>

해방 후 왜곡된 역사 속에서, 지금까지의 한일 관계는 효용을 다했다. 그러나 예고된 갈등이었다. 일본은 구한말과 일제강점기 35년, 8.15 광복과 분단체제, 그 이후 70년의 강고한 구 체제 시스템 속에서 우리 내부 깊숙이 침투해 들어와 알게 모르게 생활의 일부가 되었다. 그 안에 우리 내부의 모순과 고뇌가 응축되어 있다. 이 모순과 고뇌를 탐구하려면 어떤 방법이 있을까.

한 개인사를 통해 시대와 사회를 비추는 거울 역할을 하는 것이 문학의 영역일 것이다. 그동안 우리는 외세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생존이 우선이었던 관계로 자기 자신을 앞세우지 못했다. 우리는 너무 쉽게 잊어버렸고 안일했다. 그러다보니 역사는 박물관에 소장된 문화재인 양 화석화되고, 현대의 역사는 더군다나 묻혔다.

기자 출신 이계홍 작가의 실록소설 '행군-어느 민족주의자를 위한 변명'은 그런 배경에서 나왔다. 이 소설은 2016년 10월호부터 2019년 6월호까지 문예월간 '월간문학'에 연재되었던 소설이다. 월간문학 연재를 마친 뒤 많은 부분을 수정 보완해 프레시안에 재수록한다.

이 연재물은 이른바 '팩션(Faction)'이다. 팩트와 픽션의 사이 어디에서 역사적 사실에 상상력을 덧붙인 '논픽션' 형식의 소설이다. 필자는 취재의 일환으로 일제강점기 말 일본 육사 출신 젊은 생도들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어지러운 시대, 그 안에서 제국주의 광풍에 휘말린 젊은이들의 시각을 잡아내려 했다. 이계홍은 "일본의 극우 정권이 일제강점기의 역사적 사실들까지도 왜곡하는 역사 모독에 대해 하나의 담론시장을 형성하자는 데 목적이 있다"고 했다. '행군-어느 민족주의자를 위한 변명'은 총 33회로 나뉘어 연재될 예정이다.(편집자)


제 14장 아버지와 아들

집집마다의 굴뚝에서 아침을 준비하는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물동이를 인 아낙네들이 돌담길에서 마주치면서 나누는 아침인사들이 다정했다. 서울의 잡답과는 완연히 다른 고향의 아침 풍경은 평화로웠다. 오민균이 모처럼 편하게 잠을 자고 자리에서 일어나 마당으로 나서는데 부친 오희동 선생이 사랑채로 그를 불러들였다.
오희동 선생은 청원 고을에서 보기 드물게 학식이 높고, 세상 물정을 아는 민족주의자였다. 젊었을 적 도청 측량기사로 근무해 타처 출입이 잦았고, 이때 세상의 물리를 체득했으며, 그런 가운데 지사적 풍모를 지니고 살아 고을에서 추앙을 받는 인물이었다.
오희동 선생은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아들이 걷는 군인의 길이 내심 불안했다. 해방 정국에서 어느 길인들 위태롭지 않은 것이 있겠는가만, 그중 건군의 실체가 모호하고, 그런 불확실한 미래에 청춘을 걸고 나아가는 군인의 길이 웬지 위태위태해 보였다.
미군정은 각 도의 주둔지를 기준으로 국방경비대를 창설해 나가는데, 질서가 잡혀있는 권위와 영광의 군인으로서가 아니라 국내 치안유지를 위한 경찰의 예비대 성격으로 운영된다는 것이니, 맥빠지는 일이었다. 명색이 엘리트 코스를 밟은 일본 육사 출신인데 가는 길이 고작 경찰의 보조직인가....
미군정은 군사영어학교, 경비대사관학교, 각 연대를 차례로 창설해나가지만 광복군 출신 등 민족계열이나 좌익세력은 배제했다. 그들이 먼저 참여를 거부한다는 것이지만 알게 모르게 미군정의 견제가 있었다. 그런 군은 경찰조직처럼 일본군 출신들이 점유해가고 있었다.
일제 경찰과 일본군 헌병대는 국민을 가혹하게 다루었다는 데 이의가 없었다. 그들은 세 살박이 아이에게까지도 ‘덴노헤이카 반자이’를 외치도록 요구했다. 왜 그래야 하는지를 질문해서도, 의문을 품어서도 안되었다. 그러는 사이 식자층부터 변절하기 시작했다. 이를 보고 무지랭이 백성들이 쉽게 세뇌되었다. 식자층은 변절의 대가가 있었지만 일반 백성은 얻은 것없이 주구장창 덴노헤이카 반자이를 외치며 노동을 바치고, 생필품, 전쟁물자를 바쳤다. 그 행동대가 경찰과 헌병대였다. 그 조직이 해방이 되자 대한민국 건국과 건군의 기초를 다지는 주역으로 나섰다.
오민균은 일본 육사를 다녔으니 일견 친일분자였다. 일제가 저지른 악행을 제 자리로 돌려놓고, 정의가 살아나도록 해야 하는 그 지점에 친일파 아들이 서있는 것으로 비쳐질 수도 있었다. 그런 것이 오희동 선생으로서는 불편했다.
그는 아들을 미국으로 보내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오민균이 귀국한 뒤 잠시 고향에 머물 때, 진로를 선택하는 것 중 하나로 미국 유학의 의중을 내비쳤지만 오희동 선생은 수용하지 않았다. 그는 가능한 한 큰아들을 곁에 두고 싶었다. 집안을 이끌어갈 큰아들이 만리타국에 떨어져 있다는 것은 어찌 보면 기둥뿌리 하나가 떨어져나가는 상실감을 주었다. 어떤 아들보다도 듬직한 큰아들은 그의 곁에 있어야 했다. 이런 저런 상념 끝에 오희동 선생이 마주 앉은 아들을 향해 물었다.
“국방경비대와 경비대사관학교는 일본군 출신이 장악했다는데 사실인가.”
“그렇습니다.”
“그게 옳은 길인가.”
오민균은 대답하지 않았다.
“너의 가는 길이 옳은가?”
오민균은 또 입을 다물었다. 솔직히 말하면 그 자신 어떤 관이 뚜렷하게 서있는 것은 아니었다. 마음 속으로는 민족의 길, 양심의 길을 간다고 했지만 요즘 같은 세상에서는 그런 말을 꺼내기가 민망하고 또 헷갈렸다. 내가 가는 이 길이 맞는지, 어디로 가는지, 걸어가고는 있지만 바른 길인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일본군과 일제 경찰 출신이 건국의 토대를 이룬다는 것은 문제인 것 같다. 그들이 세상의 중심이 된다는 것은 선혈들에 대한 모독이지. 항일세력이 나라의 정통성이 있지.”
그 점 그는 아버지와 생각이 같았다.
“하지만 그들이 참여하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왜 참여하지 않는다는 것인가.”
“그들은 국방경비대를 미국의 용병으로 보고 있습니다.”
“미군정과 총독부, 일본군 출신들이 광복군을 견제하는 것은 아니고?”
“견제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기 전에 그들이 민족적 자주성을 내세우며 참여하지 않는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그건 양쪽이 실수하는 것 같다. 미국 해방군은 그 민족의 뿌리를 봐야 하고, 항일 독립세력은 대의를 위해 협력할 것은 협력해야지. 오류를 범하지 않도록 견인해야지. 권력의 실체를 외면하면 엉뚱한 세력이 침투해 새로운 기득권을 형성한다는 걸 알아야 해. 한번 기득권을 잡으면 놓치지 않으려 하고, 한번 놓치는 사람은 좀처럼 기회를 잡을 수가 없지. 선점한 세력들이 결사적으로 막는 것이 권력이야. 기왕이면 이상적인 권력이 들어가기를 바라지만 백성의 뜻을 배반하는 것이 권력의 속성이지. 친일세력이 들어가고 있다니 문제다. 그들이 어떤 세력인가. 숫자도 숫자려니와 물적 토대를 독점한 세력 아닌가. 거기다 물러가는 조선총독부의 지원을 받고, 미군정도 실무경험이 많다고 해서 기용하고... 알다시피 친일세력이라는 우파는 잔인하고 가혹하다. 공격논리와 방어논리를 수천 가지 개발한 집단이다. 억지와 궤변으로 대중조작을 하는 기술을 갖고 있지. 왜놈 세상을 살아봐서 알지 않느냐. 양심과 시대정신과 국민지성이란 말은 그들에겐 거추장스러운 넝마와 같은 것이야. 자신들의 죄업이 드러나고 한 세상 흔들었던 권력을 잃을까봐 노심초사한 나머지 더많은 거짓과 변명으로 국민을 우롱한다. 가해자가 더 잔인한 것이 이들이 갖는 속성이야. 자기 잘못에 대해 부끄러워하긴 커녕 그걸 감추기 위해 더 잔혹하게 짓밟는 습성이 있다니까. 자신들의 과오를 그런 식으로 분식하지. 세상은 좌우 색깔론으로 정쟁의 불구덩이로 빠져들었는데, 이것이 그들의 피난처가 되고, 활개 치는 무대가 되고 있어. 그러니 쉽게 세상을 보아선 안된다. 이제 나이 스무살이라는 너는 친일과는 상관이 없다고 하더라도, 일본 육사 출신으로서 한 묶음으로 매도될 수 있으니 유념해야 한다. 나라를 찾기 위해 피 흘려 헌신한 사람들을 잊지 말아라.”
“알겠습니다.”
오민균은 어려서부터 아버지의 정신을 알게 모르게 습득하며 자랐다. 오희동 선생이 다시 물었다.
“국방경비대는 경찰의 보조기관이고, 정식 군대가 아니라는데 그게 맞는 말인가.”
“국방경비대는 독립적으로 각 도에 1개 연대씩 창설하고 있습니다. 청주 7연대도 그중 하나입니다. 미국 용병이라고 비난하는 자도 있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신문을 보니 학병동맹인가 하는 좌익 군사단체가 서울 도심에서 반탁전국학생총연맹 맹원을 습격해 수십 명이 부상당했더군. 너와는 상관없는 일이냐?”
“상관 없습니다. 경기도경찰부가 병력을 지휘해서 그들을 소탕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학병동맹원 몇이 사망하고 십수 명이 부상당했습니다. 신문 보도와는 다른 양상입니다.”
“그렇더군. 우익인 대한민청이 좌익 성향의 조선국군준비대를 습격해 국군준비대 본부와 훈련소를 부쉈더군. 쌍방이 시가전을 벌이다 미군이 장갑차와 포병대를 동원해 진압했다는데, 이런 식이라면 큰일나지 않을까 걱정이다. 물러가는 조선총독부는 느긋하게 시간을 벌고, 미군정은 개입의 빌미로 삼아 국민을 누를 구실로 삼고 있으니 꼭 누군가에게 놀아나는 것 같아서 답답하다. 이러다 외세에 또 당할 수 있지 않겠나.”
“이미 외세의 놀이터가 되었습니다.”
“그래....”
오희동 선생이 끙 하고 꺼지듯이 신음소리를 냈다.
실제로 군사단체끼리 부딪치는 일들이 많아졌다. 대한민청과 국군준비대의 충돌로 압수된 총기만도 기관총 10여 정과 소총 80여 정이었다. 국군준비대는 사설 군사단체 치고는 국가단위 군대처럼 규모가 크고, 중무장한 상태였다. 본부를 일본군이 기지로 사용하던 태릉연병장(오늘의 육군사관학교)을 접수해 사용하고 있었고, 1만5천명을 훈련시키는 남한 내 대표적인 군사조직으로 성장했다. 각 도에 지부를 두고 이들을 불러모아 태릉훈련장에서 기수별로 훈련하며 군벌의 위세를 떨쳤다.
그런데 용맹무쌍한 김두한이 민청 대원 수백 명을 이끌고 국준을 습격했다. 민청은 젊은 혈기의 맨주먹 청년들로 조직된 우익의 간판 단체였다. 두 단체의 충돌은 미군정을 위협하는 군벌들의 실력행사이기도 했다. 결국 미군 헌병대가 김두한 세력과 국군준비대의 무장을 해제했다. 태릉훈련장도 미군정이 접수했다.
해체된 이들의 상당수가 국방경비대 창설 병사로 입대했다. 군 내부로 좌우의 대립이 옮겨온 셈이었다. 미군정이 해체를 명령했다 해도 군사단체의 이합집산은 여전히 진행중이었다. 그중 학병동맹은 학도병 출신의 왕익권이 4천명에 가까운 대원을 모아 힘을 발휘하며, 한때 종로경찰서를 접수하는 위력을 발휘했다.
노선상의 차이로 우익 성향의 대원들이 탈퇴해 새롭게 학병단을 결성했는데 대원이 3천명에 이르러 이들이 또 학병동맹을 위협했다. 군사단체들은 이합집산하는 과정에서 충돌이 일상화되었다.
일본 육군 대령 출신 이응준은 일본 육사 출신자들을 중심으로 계림회라는 조직을 만들고, 뒤이어 조선임시군사위원회라는 군사조직으로 개편했다. 이응준은 처음에는 일본군 영관 출신이라는 신분 때문에 자숙했지만, 어느 순간부터 미군정 고문관으로 참여해 건군 모병에 앞장섰다. 만주관동군 중령 출신 원용덕도 만군 출신 병사들을 대동하고 이응준에게 합류했다. 이들은 건군의 핵심 역할을 맡았다.
오민균은 군 계보로 보아서 이응준의 휘하에 들어가야 했지만, 애초에 여운형을 따르면서 그들과는 거리를 두었다. 충칭 임시정부의 정식 군대인 광복군은 1946년까지 중국에서 돌아오지 않았다. 미군정이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개인자격으로 들어오라는 지침이 내려졌으며, 그래서 더러 개인적으로 들어왔으나 개별적으로 들어오다 보니 입국이 그만큼 늦어졌다. 그 사이 자리를 잡은 일본군 출신이 실력과 맨파워의 중심이 되었다.
몽양은 제 군사단체들을 모아 건준-인민위원회에 흡수하려고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실전경험이 풍부한 일본군 출신들이 총독부의 지원까지 받는데, 몽양에게 주도권을 빼앗길 수는 없었다. 여기에 한민당을 비롯한 우파 역시 몽양을 거부하니 그의 군사단체 통합 시도는 무위에 끝날 수밖에 없었다.
그의 정릉 백씨산장 군사 세력도 위축되더니 어느결에 쫓기는 신세가 되었다. 그의 존재감은 소멸해갔다. 인기란 실권이 없으면 거품과 같은 것이다.
오민균이 아버지로부터 군인의 길에 만족하느냐고 물었을 때, 선뜻 대답하지 못한 것도 이런 맥락 때문이었다. 그는 몽양이 군대를 보는 관점도 수사적이고 모호해서 불만이 적지 않았다. 정면으로 부딪쳐 나가야 하는데 이상주의에 머물거나, 밀리면 유약하게 회군해버린다.
“서울이 찬반탁으로 갈려서 혼란스러운데 어떻게 돌아갈 것 같으냐.”
“크게 세 갈래로 보시면 됩니다. 항일독립운동을 했던 세력은 민족주의 세력과 사회주의 세력인데 이들은 분파적이고, 반면에 친일세력이 총독부와 미군정의 엄호를 받으면서 통치 집단의 거대 축으로 나서고 있습니다.”
“조선역사에서 버려야 할 것이 있다면 바로 사대(事大) 아닌가?”
오희동 선생이 물었다. 그리고 그 스스로 답했다.
“사대는 지배층이 그동안 권력을 독점하는 수단으로 삼아왔지. 나는 조선조의 가장 나쁜 왕을 선조, 인조, 고종 세 사람을 지목해왔다. 이 나라는 예나 지금이나 타락한 지도층, 그러니까 국가를 위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움직이는 자들에 의해서 오염되어 왔어. 그중 선조는 야비한 군주였지. 수도를 즉각 포기한 보잘것없는 인간이야. 임진왜란을 극복한 것은 임금도 사대부도 아닌 백성들이었다. 선조는 도망쳤고. 사대부들은 가솔과 재산을 챙겨서 숨어버렸지. 백성들이 스스로 의병을 일으키고 이순신은 모함을 이겨내고 백의종군하면서 왜란을 극복했는데, 그러나 과실은 사대부들이 다 따먹었어. 그들은 시대에 맞는 자주 외교를 펼친 광해군도 반정으로 제거하지. 명에 대한 의리를 내세우며 인조라는 모자란 인간을 새 군주로 옹립했던 것이야.”
“기득세력들이 모자란 자를 지도자로 모셔놓고, 그 밑에서 마음껏 특권을 누렸다는 겁니까.”
“그렇지. 그 중심이 사대주의야. 선조나 인조는 친명배청(親明排淸)으로 명을 신주단지 모시듯 하다가 두 난을 자초했어. 나는 임진왜란, 정유재란보다 병자호란을 더 치욕으로 보는 사람인데, 백성들이 굶어죽고 칼맞아 죽고, 곡식 빼앗기고, 부녀자는 강간당하거나 첩으로 끌려가서 비참한 생활을 하는데도 그들은 과오에 대한 책임의식이란 것이 없었지. 책임은커녕 전선에서 죽음을 각오하고 싸운 장수를 불러다 놓고 병신 만들어 탄핵했지. 충성스럽고 정의로운 신하와 장수를 모함해 몰아내고 수염을 쓸며 거드름을 피웠어. 선조는 의병과 이순신 장군의 공이 아니라 명 황제의 도움으로 나라를 보존했다고 명나라에 고마워했지. 40년전 경술국치를 맞이한 고종도 마찬가지다. 격변과 광란의 시대에 방향을 잃고 쩔쩔매기만 했고, 그러면서도 고민이란 게 없었어. 이러는 과정에서 민족의 구성원이 외세에 순응한 자는 흥하고, 저항하는 도태되었다. 지배층은 언제나 사대 쪽이었지. 이러니 나라의 질서가 엉망이 되지. 저항세력을 진압하기 위해 외세를 끌어오고, 오로지 권력유지만을 위해 외세에 의존했지. 그렇게 해서 망국의 길을 간 거야. 그런데 그들 부스러기들이 지금 미국이란 외세 앞에 재빨리 변신해 휘파람을 불고 있구나. 독립군을 때려죽인 자들이 일본순사보다 조선인 경찰이 더 많았는데 그들이 나라의 관리자가 되고 지배자가 되니 암울하구나.”
“역사에 대해 저는 잘 몰랐습니다. 공부를 더해야겠습니다.”
“그러니 더 듣거라. 청나라 창건자 누루하치가 조선의 지배층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는구나. ‘너희 나라 신(臣)들이 도포자락 휘날리며 붓을 드는데, 그런 위엄으로 무지한 조선민중을 호령할 수는 있어도 외적을 물리칠 수 없다. 우리는 백만의 인구지만 모두가 백만의 전사다’ 라고 했지. 그런 백만의 후금(후에 청)이 일억의 명을 제압했어. 이런 사이 우리는 친명만 내세우면 다 되는 줄 알았구나. 위기에 처하면 그저 명이 구해줄 줄 알았어. 율곡 선생의 양병설도 몽유병자의 헛소리라고 밟아버렸지. 힘이 없으면 어떤 누구로부터도 배척당하는 줄도 모르고 말이다.”
오민균은 아버지의 말을 듣고 저도 모르게 주먹을 쥐었다.
“아버님 말씀대로 강력한 군을 세워야지요.”
“반드시 그래야 한다. 그러나 힘들지도 몰라. 세상은 의외로 불공정하고 불공평하지. 삼전도 삼고구례(三顧求禮)의 굴욕을 내보이면서도 왕과 사대부는 여전히 백성 위에 득세했던 그것이 사백 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다. 미국이 하필이면 친일 관료와 경찰을 앞세우고 있으니 나라 체면이 아니다. 그래, 너는 어떤 세상이 와야 한다고 생각하느냐.”
오민균이 잠시 생각하다가 정리해 말했다.
“국민여론상 우리나라는 민족주의적 사회주의 국가가 대세입니다. 얼마전 미군정이 서울시민을 상대로 여론조사를 실시한 결과 시민의 70% 이상이 사회주의 노선을 지지하고 있었습니다. 왕을 모시자는 사람, 총통제를 실시하자는 사람, 대통령제를 실시하자는 사람, 입헌군주제를 실시하자는 사람들이 있지만 방향은 그쪽입니다. 저는 국민이 지향하는 정체(政體)를 바탕으로 모든 사람이 조화를 이루고, 공평한 기회를 누리고, 평화롭게 사는 세상을 꿈꿉니다. 미국도 소련도 다 몰아내야 합니다.”
“그럴 힘이 있냐. 그리고 민족주의적 사회주의, 좀 모호하구나.”
“민주주의도 추상적이긴 마찬가지죠.”
“사회주의와 민족주의는 개념이 다르지 않는가?”
“이념의 차이는 있지만 민 중심이라는 방향은 같습니다. 사회주의자는 이상주의자로 보시면 됩니다.”
“이상주의가 실현되는 것 보았는가. 사회주의라면 소련을 지향하는 것 아닌가.”
“소련의 체제는 이상적인 사회주의가 아닙니다.”
“소련 세력이 강고해지면 미국도 가만있지 않을 것이다. 강대국이란 싸움판을 벌이는 걸 즐기는 세력이지만 손해보는 짓은 안한다. 남의 나라 젊은이로 대신 전쟁을 치르고, 자국의 재고 무기 소비하고, 그러면서 발언권 높여가는 것이 강대국이야, 결국 전쟁터로 제공된 현지 주민만이 고스란히 희생을 강요받지. 그러니 힘을 키워야 하는데, 저렇게 분열되어 한치 앞을 내다보지 못하니 답답하구나. 힘을 모아도 부족할 판에 서로 찢고 있다니...”
“미국이란 나라는 군사력을 앞세운 일방주의로 나갈 것입니다. 힘을 바탕으로 내 힘대로 간다는 오만이죠. 우리 땅에 들어온 그들이 현지의 역사성이나 국민 정서, 요구사항은 고려하지 않고, 그들 편의주의에 입각해 불안한 지배를 계속할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대립에도 개입의 명분을 극대화할 수 있으니까요. 엄청난 대가를 치를 텐데도 친일파를 등용하는 것 보십시오. 불만을 증폭시키고 있습니다. 불만과 갈등이 있는 곳에 그들이 설 수 있는 토양이 마련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배들은 만주벌판으로 가서 군대를 양성해 훈련시킨 뒤 돌아와 완전히 판을 쓸어버리자고 비분강개하고 있습니다. 북으로 간 친구도 있고요.”
“현실에 눈을 박고 잘 생각해야 한다. 그들은 세계 최강의 나라다. 국부로 보면 일본의 30배가 넘는다고 하지 않던가. 조선은 일본 국부의 50분지 일도 안될 것이다. 그런 일본이 패망했지만 지금 어느새 미국과 동맹국의 지위를 확보하고 있다. 진주만 습격으로 미국민 수만명을 살상하고, 미국 비행기를 수백척 부수고 항공모함을 침몰시켰어도 지금 두 나라는 언제 그랬더냐 싶게 쌍방이 자국의 이익을 위해 화친하고 있다. 미소 양강이 대립하고, 미국이 소련을 견제하는 환경을 일본이 이렇게 이용하고 있다. 그것이 외교란 것이다. 쓰잘 데 없는 명분론으로 실리를 놓치는 것이 아니지. 강국은 점령국에서 현실에 맞지 않는 정책을 수행하고 오류를 범해도 결코 실패하지 않는다. 승자는 어떤 정책을 펴도 판을 이끌어갈 힘이 있으니까. 그래서 그들은 어떤 결정을 내려도 그들의 뜻대로 판을 만들어가는 것이야. 반면에 약소국은 어떤 선한 의지를 가지고 있어도 실패하고 굴복하게 된다. 왜냐하면 힘이 없으니까. 이것을 해결하는 방법이 일차적으로는 군사력이지만, 그에 앞서 외교력이다. 피 흘리지 않고 성취할 수 있는 게 외교전쟁이야. 미국이란 나라는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합리적이다. 그동안의 제국들은 종교적 인종적 관용이 없었기 때문에 세력을 확장했어도 결국은 몰락했어. 반면에 미국은 군사 대국이고 오만해도 나름으로 합리적 준거 틀을 갖고 있다. 미국의 양심과 지성이 균형을 맞추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을 상대하는 훌륭한 외교관이 나와야 한다. 지금처럼 격동기이자 과도기엔 외교시대야. 하수인으로서가 아니라 자존심을 지키면서 이익을 찾는 것, 그게 중요한 덕목이야. 네가 그 일을 했으면 좋겠다.”
“하지만 아버지, 미국은 승전의 미주(美酒)에 취해 있습니다. 빌붙는 세력만을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합리적이라 할지라도 친일부역자들이 껌딱지처럼 붙어서 알랑대는 한 그들은 그 길에 충실할 것입니다. 편한 길이 있는데 복잡하게 현지 주민의 애로를 고려할 아량이 없는 것이지요. 잘못된 정보가 입력되었더라도 빨아주고 핥아주는데 거기에 젖어들게 되어있지요.”
“그러니 수완있는 외교관이 필요하단 거지. 자기 이익이 아니라 진정 나라를 생각하는 협상가 말이다. 올바른 협상 주역 말이다.”
“저는 군에서 멋진 장교가 되어 나라에 이바지하겠습니다.”
“그렇다면 네가 처한 위치에서 굴하지 말고 늠름하게 너의 길을 가거라. 어느쪽이든 치우치지 말고 사물을 곧고 바르게 보아야 한다. 깨어있는 사람도 자신의 이익에 부합된다고 생각하면, 그른 길인데도 그 길을 가는 습관이 있다. 너는 늘 평상심을 유지해 양심의 소명에 따라 움직여라.”
“명심하겠습니다.”
“가난한 이웃들을 생각하여라. 배운 자는 억울하고 소외받고 낮은 사람들의 이웃이다. 그들과 함께하는 삶이 배운 자의 도리다. 배운 것을 높은 자의 웃음을 위해 사용하는 것이 아니다.”
“명심하겠습니다.”
오희동 선생은 근엄했으나 자상했다. 마을 청년이 억울함을 참지 못하고 왜놈 지주를 두들겨패고 밤사이 도망쳤다는 소식을 접하고 “그 집에 쌀 가져다 주어라” 라고 암암리에 응원했다. 징용에 끌려간 집에 일손이 부족하면 가을걷이를 도와주도록 머슴들을 보냈다. 갖춘 사람으로서 가져야 할 도덕적 책무로 알고 그렇게 행동하고 실천했다.
“동생들도 보살피거라. 네 밑으로 동생들이 다섯이다. 그중 보균이가 올해 졸업반인데 진로문제를 고민하는 것 같다.”
“알겠습니다.”
오보균은 오민균의 바로 밑 동생이었다. 구제(舊制) 청주고보 그의 2년 후배였다.

“진로는 정했니?”
오민균과 오보균은 나란히 마을 앞 작은 개울을 따라 이어진 천변 길을 걸었다. 주변 논엔 산골짜기에서 흘러내려온 물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모를 심기 위해 물을 대는 중이었다. 오보균은 형과 함께 걷는 것이 가슴이 커지는 느낌이었다. 그는 형의 존재만으로도 힘이 되었다.
“대학 진학도 생각해보았지만 혼란한 정국이라 길이 안보이고, 취직을 하자니 일자리가 쉽게 있는 것도 아니고, 답답하네요.”
“길을 잃어버려야 새 길을 내는 법이지. 걱정하지 말아라. 시간과 자유가 있으면 어떤 무엇도 선택할 수 있는 길이 열린다.”
스물한살의 형은 어른스러웠다.
“나도 형 따라 군인이 되고 싶은데 형 생각은 어때요? 청주 연대에 입대하고 싶어.”
“그건 안돼.”
오민균이 간단히 잘랐다. 연대는 어수선할 뿐, 꼴을 갖추지 못했다. 병사들은 꾀죄죄한 오합지졸 그대로였다.
“이번 졸업한 친구들 중 상당수가 입대한다고 했어요.”
“물론 군인이 되겠다고 한다면 장교가 되어야지. 경비대사관학교가 창설됐으니 군에 들어가고 싶다면 사관학교에 입교해라.”
오보균이 눈을 크게 뜨고 형을 바라보았다.
"그럼 장교가 되는 거요?“
“그래. 하지만 한 집안에서 형제가 나란히 군인의 길을 가는 것이 온당한지도 생각해봐.”
“걱정없어요. 명예로운 군인가족이 된다는 것, 얼마나 자랑스럽습니까. 나도 형처럼 멋있는 군인이 될 거유. 미국 육군사관생도처럼 멋진 제복도 지급될 것 아닌가?”
“제복 입자고 장교가 되니?”
그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웃었다. 오보균은 푸른 사월의 하늘을 우러르며 꿈에 부풀었다. 그러나 군대 현실은 순조롭지 못했다. 배식이 시원치 않아서 수제비로 끼니를 때우기 일쑤였고, 장비도 경찰에 비해 현저하게 수준이 떨어졌다. 소문대로 국방경비대는 경찰의 보조기관이며, 정식군대가 아니었다. 정식군대는 추후 모집될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고, 일부 지원자 중에서는 시시하다며 탈영한 경우도 있었다.
오민균은 고향의 연대 창설을 지원한 만큼 의욕적으로 연대 운영과 훈련 계획을 짜서 연대장에게 브리핑했다. 군 사기를 위해서는 충분한 배식과 자존감을 세우는 훈련이 요구된다는 제안이었다. 그러나 그의 안은 뚜렷한 이유없이 묵살되었다. 병사들은 훈련은커녕 구보 한번 없이 퀀셋 귀퉁이에 쪼그리고 앉아 주린 배를 움켜쥐고 쓸데없는 농담으로 소일했다. 연대장은 다른 장교를 중대장으로 임명했다. 군번도 아래고, 군사영어학교도 후임인데 나이가 두세 살 많다는 이유로 오민균을 제치고 그를 중대장에 임명한 것이다. 엘리트 장교로서의 자질을 가졌다고 생각하는데, 대신 능력이 없는 자를 중대장으로 임명하니 그는 불쾌했다. 고향에 와서 망신당하는 것 같아서 난감해지는 것이었다.
일하는 아이가 마을 쪽에서 달려오더니 손에 쥐었던 종이쪽지를 오민균에게 내밀었다. 전보였다. ‘금일중급상경요장창혁’. 단 열 자의 전문이었다.

혼돈의 계절

장창혁은 경비대사관학교 교수부장 겸 부교장을 맡고 있었다. 그는 군영시절, 오민균을 곁에 둘 생각을 했다. 그런데 그는 한사코 고향으로 가겠다고 자원했다. 그 얼마 후 그가 청주연대에서 고생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교관 보충계획이 서자 맨먼저 그를 불러들였다. 교수부장실에 들어선 오민균을 앉혀놓고 장장혁이 말했다.
“군인의 이상을 펴봐. 내가 부른 이유 알겠나?”
“알겠습니다. 하지만 부탁이 있습니다.”
“뭔가.”
“멋진 생도들을 배출하려면 팀워크가 필요합니다. 호흡이 맞는 교관이 있습니다.”
“누군가?”
“조병헌 소위를 추천합니다. 제 육사 동기입니다.”
“그래? 알았다. 그 일은 나에게 맡기고 오 소위는 생도 훈련교범부터 만들라. 일본육사 생도 교본을 필사하라.”
그날부터 그는 밤새워 훈련교본을 만들었다. 제식훈련과 사격술, 각개전투, 유격훈련 및 행군, 경계훈련, 시위진압작전 따위를 일본 육사 훈련교본에서 인용해 만들었다. 며칠 후 조병헌이 배속되어 왔다. 그들은 버드나무가 줄지어 서있는 연병장 끝으로 가서 앉았다.
“니가 날 끌었니?”
“함께 일해야지.”
“하지만 이러다 우리가 친일세력의 지배놀음을 뒷받침해주는 것 아냐?”
조병헌은 성격이 직선적이지만 사려가 깊은 동기생이었다.
“왜 그게 거슬리나? 군대는 다르잖나. 정식 군사교육을 받고 실전경험이 많은 일본군 출신들이 두각을 나타내고 있어. 그에 비하면 광복군이나 팔로군 출신들은 수준이 떨어지지. 그들은 후방 지역에서만 활동했으니 전투경험이 없잖나. 미군정은 기능적인 실무자를 평가하고 있다구.”
“그렇다면 넌 그게 옳다고 생각하나?”
“옳다는 것은 아니지만, 그게 중요한 것도 사실이야. 우린 생도들을 잘 가르치기만 하면 돼.”
“그런데 군 편성이 이상하다.”
“뭐가 이상하다는 거야?”
“생각해봐라. 이게 정상인지...”
미국은 조선국방경비대 창설 계획과 관련해, 한국군 창설은 전승국의 국제 공약과 결부돼 있으므로 군 창설을 허용할 수 없다는 방침을 정했다. 본래 미군정은 장차 주한 미 점령군 철수계획에 대비해 한국의 토착 군사력을 육성할 준비에 착수했었다. 육군 및 공군 총병력을 3개 사단 1개 군단 4만5천명 선으로 유지하고, 해군 및 해안경비대를 5천 명 정도 유지해 육·해·공군의 조직을 1949년까지 완료한다는 계획이었다.
그런데 미 국방성 3부조정위원회(SWNCC)가 남한에서 단독적으로 군사력을 확보할 경우, 미·소간에 군사적으로 충돌할 위험성이 있다는 우려를 표했다. 곧 열리게 될 미·소공동위원회(1945.12 모스크바)에서 분단 관리에 악영향을 줄 수 있다는 점과, 군을 창설한다면 미·소간의 교섭에 의해 한반도 통일이 실현되기 어려울 것이라는 점을 내다보고, 이 계획을 승인하지 않았다. 대신 국내 치안을 담당할 2만5천 명 규모의 경찰예비대를 창설하도록 지시했다.
여기에는 주한 미 점령군 사령관 존 하지 중장과 태평양사령관 더글라스 맥아더 원수의 견해 차이도 있었다. 하지는 군 창설을 주장한 반면에 맥아더는 남한에 군대를 창설하는 문제는 자기 소관 밖이라고 미온적 태도를 보이고, 이를 미국방성에 위임해버렸다. 미 국방성은 종래의 방침대로 경찰예비대 창설을 지시했다.
이에따라 군 창설계획을 포기한 하지 중장은 아더 챔프니 대령에게 필리핀식 경찰 예비대 창설을 주도하도록 명령했다. 그 결과 작성된 것이 뱀부 계획(Bamboo Plan)이다. 이 계획에 따르면, 경찰의 국내 치안을 지원할 경찰예비대를 남한 8개도에 1개 연대씩 창설하고, 1946년 1월부터 서울을 시작으로 각 도별로 대원모집에 착수하기로 했다. 화기 중대가 없는 미군 보병중대를 기준으로 하여 장교 6명, 사병 225명으로 구성된 1개 중대를 편성하고, 이를 장차 연대-여단으로 확대하며, 장교는 중앙의 장교 훈련학교에서 제공한다고 명시했다.
이같은 뱀부 계획에 따라 1946년 1월 11일 조선경비대총사령부가 설치되었으며, 1월 15일 그 산하 국방경비대가 창설되었다. 1946년 1월 15일 태릉 주둔 제1연대를 시작으로 8개 연대가 차례로 창설되었고, 제주도가 전라남도에서 분리되자 1946년 11월 16일 제주 9연대가 창설되었다.
미군정은 그에 앞서 국방경비대와 미군 사이의 소통을 원활하게 하기 위한 통역관 양성과 장차 군 간부를 양성할 목적으로 1945년 12월 5일 감리교 신학교에 군사영어학교(Military Language School:군영)를 설치했다. 이때 광복군 출신과 좌익 계열은 장차 국군이 광복군의 법통을 이어받아야 한다는 명분론을 내세워 입교를 거부했다. 거부의 주 이유는 일본군과 만주군에 몸담았던 자들과 똑같은 대우를 받으며 입교해야 한다는 원칙을 따를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로인해 민족 진영과 좌익 계열 대신 군영 학생은 일본군과 만주군 출신들로 채워졌다.
군영은 국방경비대가 창설되자 교사(校舍)를 태릉으로 이전했다가 1946년 4월 30일 폐교되었다. 이 학교출신자들은 이후 신생 국군의 핵심 지도자가 되었으며, 한국정치사의 중심 세력을 형성했다. 5개월 동안 배출된 110명의 장교들은 건군의 기반이 되었는데, 면면을 살펴보면 68명이 장성으로 진급했다. 그중 대장 진급자는 8명, 중장이 20명이었으며, 참모총장을 지낸 사람은 13명이었다.<건군사(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2002), 창군(한용원, 박영사, 1984), 한국전쟁사1-해방과 건군(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 1967),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참고>

1946년 현재, 조선국방경비대는 군대 조직이 아니라 경찰의 보조 조직이라는 사실이었다. 시작부터 조직이 어설프게 설정되었다. 경찰관들이 무시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춘 셈이었다.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도 예외는 아니었다. 북한 진주 소련군은 정치위원회를 구성해 북한 내 정치 요원 교육을 실시하고 있었지만, 내막적으로는 장교 교육이었다. 양국이 눈 가리리고 아웅하는 셈이었다.
국방경비대 모병활동은 젊은 장교들이 시내 중심가로 나가 가두방송을 하거나 벽보를 요소요소에 붙이면서 시작되었다. 직장이 없거나 끼니를 해결하기 어려운 청년들, 농촌에 묻혀 사는 것이 답답하다는 청년들이 모여들었다. 더러는 뒷골목의 패거리와 부랑자도 끼어들었다. 문맹자도 꽤 있었고, 총을 거꾸로 메는 지원자도 수두룩했다.
그보다 질이 나은 국방경비대사관학교 입교생은 충원이 되지 않아 수시로 모집했다. 정규 모집이란 있을 수 없었고, 모집 정원도 정해진 것이 없었다.
사관학교 2기생 모집 때 면접관으로 참여한 오민균은 나이가 많은 한 응시생을 맞았다. 때가 전 노동복을 입은 그는 눈 위쪽에 흉터가 있었고, 차림이 추레한데다 몇년 목욕을 안한 것처럼 몸에서 지독한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그가 오민균 앞에서 거수경례를 착 올려붙였다.
“관등성명은?”
“만주군에서 헌병으로 복무했던 김창동입네다.”
“생년월일은?”
옆의 면접관 조병헌이 물었다.
“나이로 서열을 매깁네까?”
지원자는 함경도 사투리인지 평안도 사투리인지 섞갈리는 어투로 당돌하게 되물었다. 이런 경우는 드물었다.
“지원자는 질문을 할 수가 없다. 면접관이 묻는대로만 답하라. 몇 년생인가?”
“1916년생입네다. 함경도 출생입네다. 헌병 출신입네다.”
오민균보다 열 살이 위였다. 장형이거나 삼촌뻘 되는 사람이 사관학교를 지망한 것이 이상했다. 이렇게 나이 들고 거렁뱅이 신세가 지원한 경우는 이례적이었다. 오민균은 약간의 불쾌감을 참으며 물었다.
“헌병 출신이라고? 소속부대는?”
“일본 관동군 만주리헌병대와 면도하분견소입네다. 계급은 오장입네다.”
“주임무는?”
“빨갱이놈들 잡았댔시오.”
그의 태도가 당당해서 그런지 그에게선 어떤 범접할 수 없는 카리스마 같은 것이 느껴졌다.
“활동 내용을 설명해보시오.”
그가 길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고향에서 농잠학교를 마친 후 제사공장에 들어갔다가 야망을 품고 만주로 튀어 남만주철도주식회사 역원으로 근무했으며, 성격에 맞지 않아서 그곳을 그만두고 신징(新京)의 관동군헌병교습소에 입소했다. 그후 관동군 헌병보조원으로 근무하다가 중지나군의 파견헌병대에 배속되어 소만 국경지대에서 공산당과 연해주 한인의 동태를 미행 감시하는 활동을 폈다. 중국공산당 거물을 체포하는데 공을 세웠고, 그를 취조하면서 얻은 정보로 소만국경에서 그들과 연대해 활동하는 조선항일운동자 조직을 적발해 일망타진했다.
“그 공으로 헌병 오장으로 특진했습네다. 헌병대분견소에서 다수의 불온분자 조직을 적발했댔시오.”
“그들이 불온분자라고?”
“그렇습네다. 거렁뱅이 새끼들을 일망타진했댔시오. 빨갱이 새끼들이디요.”
면접은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그들이 나 빨갱이요, 하고 이마빡에 써붙이고 다니나?”
“거야 조지면 다 나오게 돼있디요. 너 이 자식! 빨갱이디? 하고 몇방 쪼인트를 까면 곰방 예예, 하고 실토하디요. 깡부리는 놈한텐 전기선을 들이대면 곰방이디요.”
“전기선?”
“그런 기야 조막손 놀음이우다. 그깟놈들 인간도 아니라우요. 독립운동한다지만 비적떼들이오. 도둑질하며 연명하고 사는 놈들입네다. 대일본제국은 사회주의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디 않가소? 그런 자들 전기선을 대거나 공중에 매달아 뺑뺑이를 돌리면 곰방 끝나디요. 남조선도 지금 빨간 물이 들고 있습네다. 미치고 환장할 일입네다.”
그는 미군정의 노선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배포있게 말하고 있었다. 북한과 달리 남한사회는 일제 세력이 권력의 중심에 서있고, 미군정을 뒷받침하는 기둥이 되었다. 그래서 소만국경에서 사상불온자를 미행 감시하고, 항일조직을 일망타진한 것이 업적이 되면 되었지, 죄가 될 수 없는 것이다. 오민균과 조병헌은 서로 한동안 멀뚱히 쳐다보았다. 야릇한 절망감이 폐부 깊숙이 파고들었다. 이윽고 오민균이 말했다.
“알았소. 나가보시오.”
“젊은 장교님들, 같은 일본군 출신이라면 동지들 앙이오? 위관 계급장을 다는 것이 내 소원이외다.”
그는 당당하게 말한 것에 비해 퇴장할 때는 비굴할 정도로 허리를 굽신거렸다. 오민균과 조병헌은 우선적으로 그를 면접에서 탈락시켰다.
“수치야.”
조병헌이 짧게 말하고 침을 칵 세멘트 바닥에 뱉었다. 김창동은 불합격 사실을 확인하고 이를 뿌드득 갈았다. 새파란 놈들한테 허리까지 굽신했는데 탈락이라니, 그들의 사상이 이상하지 않는 한 자신을 불합격시킬 이유는 없었다. 일부러 무용담까지 내세웠는데 탈락이라니...
“두고 보자. 내가 어뜨렇게 삼팔선을 넘었는데 어린 것들이 날 낭떠러지로 밀어넣어!”
그는 일본이 패망하고 자신의 헌병대가 무장해제되자 누구나와 같이 함경도 고향으로 돌아갔다. 진주한 소련군은 일본인과 일제경찰, 일본군 출신을 중점적으로 찾고 있었는데, 헌병과 사찰계 경찰 출신은 도주하면 사살해도 좋다는 지침까지 내려졌다. 그만큼 악질적인 행위를 했다고 보는 것이다. 함경도는 소련군이 바글거려 더 이상 고향에 머물 수가 없었다.
그는 38선 근방 철원으로 숨어들었다. 철원은 면도하헌병분견소 정보보조원으로 데리고 있던 젊은 청년 김종팔의 고향이었다. 김종팔은 김창동을 맞자 태도를 돌변해 보안서에 밀고해버렸다. 세상은 그렇게 달라져 있었다. 체포된 그가 소련 첩보원을 미행 감시 공격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약식재판을 통해 사형을 선고받았다. 형을 집행하기 위해 함흥전범수용소로 이송되던 도중 기차에서 뛰어내려 극적으로 탈출했다.
일주일 가까이 산속을 헤매며 탈출과정에서 입은 상처를 다스리다 함경도 산골짜기 이종사촌 동생 집을 찾았다. 이종사촌은 새로 임명된 그 고을의 보안대장이었다. 이종사촌은 새 세상에 대한 열망으로 눈이 뒤집혀져 있었고, 결국 그는 그에 의해 다시 체포돼 약식 재판을 받고 재차 사형선고를 받았다. 형 집행을 앞두고 이제는 끝나는구나, 절망에 빠져있는데, 마침 영창을 지키는 초병이 졸고 있었다. 그때 그는 그의 허리춤에서 군도를 뽑아 단번에 그를 찔러 죽이고 탈출했다. 험난한 운명이었지만 이런 극적인 행운도 따랐다.
북한사회는 그때까지 행정체계나 치안체계가 제대로 갖춰지지 않아서 눈치 빠르고 행동 날렵한 자들이 삵괭이처럼 움직이기엔 좋은 환경이었다.
북한 사회에서 일본군 헌병 출신은 살아갈 수 없다고 판단한 그는 남한 땅이 선택지라고 단정했다. 그는 남하 중 검문에 걸릴 때마다 손목시계 따위와 비상금으로 로스케 병사와 보위대원을 구워삶은 뒤 삼팔선을 넘어 서울에 들어왔다.
남한 땅은 과연 일제의 중심 세력들이 편안하게 활동하고, 각 요직에 들어가 활동하고 있었다. 이때 만군 동료들은 그에게 경비대사관학교에 입교하라고 조언했고, 그에따라 2기 모집에 응시했는데, 두 젊은 면접관이 탈락시켜버렸다. 그자들이 자신을 탈락시킨 것은 그들 역시 소련군과 같은 족속이고, 빨갱이 사상을 지녔기 때문이라고 확신했다. 그는 사물을 흑 아니면 백으로 단순화시켜 보는 습성이 있었다. 그렇게 구분해서 사는 것이 편리했다. 인생 복잡하게 생각할 것이 없었다.
불합격의 쓰라림을 안고 그는 거렁뱅이처럼 만군 시절의 전우들을 찾아 전전하다 3기생 모집에 재응시했다. 이때 오민균은 지방 출장중이었다. 그것이 김창동에겐 행운이었다. 합격통지서를 받은 김창동은 기고만장했던 지난날을 돌아보며 납작 엎드려 지냈다. 힘을 기를 때까지는 오만하게 나대는 것은 금물이었다. 호랑이발톱 숨기기의 특기는 빨갱이 잡는 주요한 기술 중 하나였다.

어느날 오민균은 생도들을 연병장에 집합시켜 놓고 일장 훈화를 했다.
“나는 일본 육사 1학년을 다니다 해방을 맞았다. 일본 육사 출신이니 친일 성향이 아니겠나 하고 보는 자도 있을 것이다. 그런 선입견은 버려주기 바란다. 미군이 들어와 있지만 그들은 미군일 뿐이다. 우리 땅은 우리가 지켜야 한다. 미군이 나가도 당당히 설 민족군대를 우리가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두 번 다시 외세에 밟혀선 안된다.”
어라, 이 새끼 봐라. 미군을 쫓아내고 민족군대를 세운다고? 뒷 열에서 무심히 듣고 있던 김창동은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쥐었다. 밀고해버려? 그는 그 방면에 놀라운 동물적 감각을 지니고 있었다. 당장 그를 반미행위자로 묶어넣을 수 있다. 민족군대로 설 강군을 만들자는 그의 강조법의 취지는 어느새 ‘미군을 쫓아내고 민족군대를 만들자’는 것으로 둔갑했다. 그것은 북한이 내세우는 군의 이념체계가 아닌가. 조작은 그동안 그가 수행해왔던 직업상의 기본체질이었다. 감히 미군을 쫓아내고 민족군대 운운하다니. 요씨, 이 새끼 두고 보자...
오민균 생도대장의 연설은 계속되었다.
“입교생 중엔 나보다 나이많은 생도도 있고, 사상적으로 다른 이념을 가진 생도도 있을 것이다. 나는 그것을 모두 훈련의 용광로에 녹여낼 것이다. 출신 성분이 어떻고 이념적 지향이 어떻다 해도 모두 한 식구다. 가는 곳마다 내분이 격화되고 충돌이 일어나도 우리는 훈련에만 정진한다. 외세가 우리 민족의 의사를 무시하고 자기네 뜻대로 한반도를 운전하지만, 우리가 힘이 강고해지면 얼마든지 극복해낼 수 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히 해야 할 것은, 민족을 팔아먹은 자에 대해선 관용이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이다. 나라를 찾기 위해 체포되어 갇히고 고문당한 끝에 억울하게 죽어간 선혈들을 생각해보라. 그들에게 예의를 갖추기 위해서도 정의와 마주하고,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한다. 가해자에겐 반드시 책임을 물어야 한다. 그것이 역사의 가르침이다. 그런 연후에야 화해가 이루어진다.”
김창동은 긴장하면서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꼭 그 자신을 두고 하는 말인 것 같았다.
“미국이 일본을 패망시키고 우리는 그 덕으로 나라를 찾았다. 미국이 우리의 지도국이 되면서 우리는 평등 자유 정의 민주주의 가치를 수혈받게 되었다. 이런 미국적 가치는 제도로 뒷받침되고 있다. 서열이나 나이로 상하 관계를 정하지 않는다. 나이가 벼슬인 시대도 지났다. 낡은 유제를 청산하고 서구의 민주적 가치에 충실하면 된다. 그러려면 우리 내면의 봉건성과 폭력성을 청산해야 한다. 나는 인격 대 인격으로써 제군 생도들을 대할 것이다.”
훈화를 마치고 씨레이션을 풀었다. 생도들이 와, 함성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생도들은 그동안 일본군이 버리고 간 군복을 입었고, 주부식은 풀죽 따위였다. 이런 때 씨레이션이 제공되니 선택된 군인이 된 기분이었다. 김창동은 오민균이 비상식량을 몰래 빼돌려 생도들에게 섬심쓰는 것에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다. 의심하고 보면 모든 것이 의심의 대상이 된다.
어느날 장창혁 교수부장이 오민균을 불렀다.
“씨레이션은 어디서 나온 건가.”
엉뚱한 질문이었다.
“네?”
“생도들에게 나눠준 씨레이션 말이야. 교내가 시끄럽다.”
“군사국으로부터 받은 것입니다.”
“미 군정청 군사국? 무슨 이유로?”
오민균은 사실대로 말하는 것이 옳은가를 생각했지만 떳떳하게 말했다.
“이고 대령으로부터 고향의 어르신들에게 보내주라고 사적으로 받은 선물입니다.”
“그게 온당한가? 다른 교관들은 생도들에게 지급할 것이 없어서 지지를 못받고, 오 소위는 그것으로 인기를 얻고 있다면 분파 행동 아닌가. 상대적 박탈감을 가질 것이 아닌가? 그런 행동이 정당하다고 보는가?”
여기까지 미치자 누군가 그의 뒤를 캐고 있다는 것을 그는 직감적으로 알았다.
“밀고자가 누굽니까?”
“밀고자가 누구냐가 얘기의 본질이 아니잖나.”
“주의하겠습니다.”
오민균은 숙소로 돌아왔지만 불쾌감이 지워지지 않았다. 실눈을 뜨며 유난히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피는 생도가 떠올랐다. 어디서 많이 본 듯한데 생각이 떠오르지 않는 자였다. 그런 어느날이었다. 취침에 들 무렵 농부 두 사람이 찾아와 다짜고짜 소리질렀다.
“훈련병들이 우리 무 밭을 아작냈소. 이럴 수가 있소? 변상하시오. 변상하지 않으면 고발하겠소!”
생도대 중 한 구대원들이 불암산 유격훈련을 갔다가 귀대 중 능골과 마방골의 무밭에서 닥치는대로 무를 뽑아먹었다는 것이다. 농부들은 철 좋은 때 출하하기 위해 무를 뽑지 않고 계절을 나고 있었는데 생도들이 그것들을 도리해버렸다는 것이다. 그들은 권한없는 구대장보다는 실권이 있는 생도대장에게 직접 찾아와 따지고 들었다.
“무 밭이 몇평입니까.”
오민균이 물었다.
“이천평이오.”
“이천평의 무를 다 뽑아먹었단 말입니까?”
“마구 짓밟고 난리가 아니었소.”
“무를 뽑아먹으러 바둑이처럼 날뛰었을 리는 없고, 사실대로 말해봅시다. 3구대 생도가 20명이니 이들이 평균 두세 개씩 뽑아먹었다고 칩시다. 그럼 최대 60개군요. 그 배 값을 물어드리겠습니다. 대신 이 일은 비밀로 붙여주세요. 앞으로 더 이상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오민균은 관물대 서랍에 넣어두었던 지갑을 꺼냈다. 그동안 쓰지 않고 모아두었던 월급에서 셈을 헤아려 넉넉하게 무값을 지불했다. 농부를 돌려보내고 생도 전체를 연병장에 비상 소집했다.
“모두 옷을 벗는다.”
생도들은 군장을 하지 않고 연병장에 소집된 것이 이상했지만 명령대로 옷을 벗었다.
“모두 낮은 포복자세를 취하라!”
일제히 엎드려서 포복자세를 취했다. 땅의 찬 기운이 몸속으로 어김없이 스며들었다.
“토끼뜀 자세로 연병장을 돈다. 늦게 도착한 다섯 명은 다시 한바퀴 돌린다!”
이건 비상훈련이 아니라 기합이었다. 생도들은 처음엔 서로를 보아가며 천천히 나아갔으나 중간쯤 가서는 서로 뒤처지지 않기 위해 경쟁적으로 전진했다. 편상화가 벗겨지고, 팔굽과 무릎이 까인 생도도 나타났다. 그중 한 생도가 유난히 늦게 골인지점에 도착했다. 그는 숫제 지렁이처럼 기어오고 있었다. 분명히 불만을 표출한 사보타지 행동이었다. 오민균은 언명한대로 그를 한바퀴 더 연병장을 돌렸다. 그가 돌아올 때까지 십분도 더 걸렸다. 다른 생도들이 짜증을 부렸다. 돌아온 그를 오민균은 대오 앞에 세웠다.
“기다리는 생도가 미안하지 않은가.”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래 가지고 엘리트장교가 될 자질이 있는가? 관등성명을 대라!”
“김창동입네다.”
그제서야 오민균은 그를 알아차렸다. 2기 시험 때 면접에서 탈락시킨 자였다. 무슨 악연같은 질긴 끈이 연결된 것 같아 오민균은 순간 몸이 오싹했다.
“김 생도, 나이가 벼슬이 아니다. 여긴 군대다. 나는 감정으로 김 생도를 대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김 생도 태도가 뭔가.”
대답이 없었다. 이만 하면 됐다 하고 오민균은 그를 대오로 들여보내고 다시 일장 훈화를 시작했다.
“제군들은 밥이 부족해 입에 닿는 것이라면 닥치는대로 먹어치우는 청춘들이다. 그러나 나라의 형편이 넉넉하지 못해서 제공되는 배식 상태가 취약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남의 무 밭에서 함부로 무를 뽑아먹는 자유가 허용된 것은 아니다. 그 행위는 정당화될 수 없다. 장교가 되고자 하는 자로서는 수치다. 호랑이는 아무리 배가 고파도 풀을 뜯어먹지 않는다. 한 구대에서 훈련 중 어렵게 농사지은 농부의 밭에 들어가 무를 뽑아먹었다. 그 책임을 묻기 위해 전체가 단체기합을 받은 것이다. 무슨 뜻인지 알겠나?”
그제서야 일제히 예! 하고 함성을 질렀다.
“이것으로 이 문제는 일단락 짓는다. 모두들 돌아가 씻고 취침하라.”
오민균의 엄격한 군율과 기합은 생도들의 뇌리에 깊이 박혔다. 기합이 일본 군대와는 확연히 달랐다. 일본군의 기합은 느닷없이 발길질이 들어오고 감정 섞인 주먹뺨이 날아가는 악의적이고 야만적인 것이 많았다. 병사가 조선인이면 더 가혹하게 체벌했다. 차별은 당연한 듯했고, 당사자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오민균의 기합 역시 일본군으로부터 물려받은 것이긴 했으나, 타당한 이유가 있었고, 보상이 따랐다. 기합의 이유 제시와 그것이 끝나면 휴식이 제공되었다. 어느 순간부터 생도들은 오민균을 따랐다.
며칠 후 생도 몇이 그를 찾아왔다.
“퇴교당한 동급생들을 구해주십시오.”
오민균의 앞 선임 생도대장 이치구 대위가 숙소에서 취침 도중 후보생들에게 집단구타를 당한 사건이 있었다. 가담자는 색출되어 모두 퇴교 당했다. 군의 내부 사정은 여전히 복잡하고 혼란스러웠다. 생도들 중 남산에서 열린 좌익의 궐기대회에 다녀온 자도 있었고, 우익청년들과 함께 죽창을 들고 거리를 활보하다 돌아온 자도 있었다. 찬반탁의 대결을 빌미로 세력간 싸움의 도구로 이용되고 있었다. 대화보다 물리력이 앞서고, 논리보다 억지가 대세를 이루었다. 국방경비대 각 연대는 물론 경비대사관학교도 예외없이 그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사상의 자유가 구가되던 시절인지라 어느 누구도 함부로 설쳤으나 그것이 빌미가 되어 쫓기거나 행불이 되고, 퇴교당한 경우가 속출했다.
경비대사관학교 2기생과 3기생은 사회주의 사상을 신봉하는 생도들이 많았다. 이상주의로 받아들이며 따르는 자들이 많았다. 교관들의 영향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었지만, 시대상황과 환경이 그렇게 끌어가고 있었다. 교관들이라고 해도 그들은 갓 스무살 나이를 넘긴 청년들이 대부분이었다. 이십대 후반, 혹은 삼십대를 뛰어넘는 병사들이나 하사관들을 사상적으로 주도할 처지는 못되었던 것이다.
하사관들이 젊은 장교들을 가지고 노는 경우가 많았다. 일본 군대에서 산전수전 겪은 하사관 출신들이 젊은 신입 장교를 가지고 노는 이상한 풍조였다. 고참병과 하사관들을 제압하는 수단은 강훈련과 원칙에 투철한 군율 적용이었다. 오민균의 지론이었다. 그것만이 생도들을 묶는 길이라고 여겼다.
“그건 하극상이다. 받아들일 수 없다.”
선임 생도대장을 구타하고 퇴교당한 자를 원대복귀 시킨다? 일본 군대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이치구 대위는 정치적 성향이 없는 실무 장교였는데 가해자들을 복교시킨다는 것은 그를 물 먹이고, 구타사건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그것은 군기상 허용될 수 없었다.
“이 대위는 박정희 생도 요청을 거부했습니다.”
“뭐? 박정희 생도?”
“네. 박 소위가 2기생 졸업을 앞두고 생도대 교관으로 남게 해달라고 부탁한 것을 이 대위가 거부했습니다.”
“무슨 얘기야?”
금시초문이었다.
“이치구 생도대장은 박정희 생도의 요구를 거부하고 사적으로 아는 지인을 교관으로 추천했습니다. 그래서 생도들이 봐버렸다고 합니다.”
“봐버렸다고?”
“박 생도의 정당한 요구가 거부되자 그들이 행동에 나선 것입니다.”
생도들은 만주군관학교에서 일본 육사에 편입해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군인정신 투철한 박정희 생도를 따르고 있었다. 체구가 작지만 당찬 태도와 연만한 나이가 주는 무게감이 생도들에게 어떤 신비스런 권위를 느끼게 했다. 말수가 적고 잘 웃지 않는 꽉 다문 입이 군인다운 모습으로 비쳐져 생도들은 그를 지도자로 따르고 있었다.
“교관님, 선임 생도대장의 비행을 알고 있습니다. 그는 군인 자격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더욱 안된다. 당당하지 못하게 뒤를 캐 약점을 물고 늘어지는 것은 사관생도로서의 품격이 아니다. 그러니 그들의 복학은 안돼. 내가 그럴 권한을 갖고 있는 것도 아니지만, 있다 하더라도 제군들의 말을 들은 이상 받아들일 수 없다. 대신 오해를 살 소지가 있으니 나는 제군들의 요구를 듣지 않은 걸로 하겠다. 당장 돌아가라.”
일본 패망 이후 베이징, 충칭을 돌아 뒤늦게 귀국한 만주 관동군 중위 출신 박정희가 경비대사관학교 2기로 입교한 것은 1946년 9월이었다. 후배들보다 한참 늦은 귀국에 늦은 사관학교 입교였다. 그는 1937년 문경 초등학교 교사 생활을 접고 1940년 신경군관학교 2기, 1944년 일본 육사 57기를 거쳐 1946년 다시 조선 국방경비대사관학교 2기생으로 입교함으로써 세 군데의 사관학교를 다닌 보기 드문 경력의 소유자였다.
박정희는 경비대사관학교 2기 졸업을 앞두고 이치구 생도대장을 찾아가 사관학교 교관직을 요구했다. 그로서는 그럴만한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치구는 당연한 자기 보직인 듯이 교관직을 요구하는 것이 불쾌했다.
“실력 갖추었다고 주제넘게 나오는군.”
박정희는 입교 시험에서 애국가 가사를 1절부터 4절까지 한 구절도 틀리지 않게 적어낸 유일한 응시생이었다. 보통학교 교원 출신으로서 디테일에 강한 세심한 탐구력이 다른 동기생과 구별되었던 것이다. 5척 단구에서 풍기는 모습은 독일병정처럼 단아해보였고, 사물을 보는 눈이 날카로웠다. 군사 지식이 뛰어나 교관으로 배속되는 것은 당연해보였다. 그런데 이치구 대위가 묵살해버렸다.
이때 한 하사관은 박정희가 만주군관학교 입교 시 연령 초과로 입학 자격이 없는데도 충성맹세를 다짐하는 혈서를 써서 학교에 보내 편법으로 특례 입학했다고 폭로한 적이 있었다. 이처럼 따르는 후배가 있는 반면에 배척하는 동기생도 있었다. 이치구는 이런 것까지 싸잡아서 박정희의 요구를 묵살해버렸다. 그 며칠 후 그는 일단의 사관후보생들의 습격을 받았다. 통위부(국방부) 감찰부장 이응준 대령이 이치구의 병실을 찾아 누구의 소행인지를 물었지만 이치구는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동아일보‘군-어제와 오늘’ 73회분 인용(1994.3.24)>.
하지만 그런 크고 작은 사건사고는 끊임없이 터져나왔다. 태릉 1연대에서 하사관들이 병사들을 선동해 장교들을 집단 구타한 사건이 비일비재했다. 하사관들은 새파란 장교를 상관으로 여기지도 않았다. 군 유경험자가 계급을 앞서고 있었다.
군과 경찰이 교전한 사건도 빈발했다. 전남 영암에선 휴가 중인 병사를 조롱하던 경찰에 보복하기 위해 국방경비대 병력이 출동해 총격전을 벌이고, 이때 병사 6명과 경찰 1명이 사망하고 쌍방 수십 명이 부상했다.
오민균은 어느날 생경한 광경을 목도했다. 송호성(육군총사령관 출신)이 2기생으로 입교했는데, 그의 나이는 벌써 40 중년이었다. 그렇더라도 생도는 생도였다. 나이가 천차만별이었지만 모두 생도 자격으로 다루지 않으면 기강이 무너졌다.
어느날 송호성이 무단외출한 뒤 일주일 내내 훈련에 참가하지 않았다. 젊은 생도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퇴교했다고 생각했는데 일주일 후 그가 소리소문도 없이 소령 계급장을 달고 학교에 나타났다. 일주일 전 이치구 대위의 생도에 지나지 않던 그가 이치구보다 한 계급 높은 소령 계급장을 달고 나타나니 모두들 눈이 휘둥그래졌다. 위계질서가 엉망이었다. 이러니 나이 많은 유경험자 박정희가 교관직을 내놓으라고 요구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오민균은 장창혁 교수부장을 찾았다.
“박정희 생도를 교관으로 불러주십시오. 훌륭한 지휘관이고 이론가입니다. 저는 일선 부대로 나가겠습니다.”
“지금 문제가 생겼다. 대구에서 사건이 터졌단 말이다. 대구가 심각하다.”
“대구가 심각하다니요?”
“대폭동이야!”
1946년 10월 1일 대구에서 대규모 폭동이 일어났다. 시민들의 시위에 경찰이 총격을 가하면서 시민들이 죽고 다치자 순식간에 폭발해버렸다. 미군정이 계엄령을 선포하고 진압하는 과정에서 더많은 사상자가 났다. 건준-인민위원회 간부인 박상희는 구미에서 시위대를 이끌던 중 경찰의 총에 맞아 숨졌다. 그는 박정희의 친형이었다.
“박 생도가 형의 사망 소식을 듣고 어쩔 줄 모르더군. 존경하는 형이 졸지에 가니 분을 못참더라고. 그의 형은 지역의 독립지사였다는 거야. 지역민 누구나가 존경하던 분이야. 내 재량으로 휴가를 보내주었다. 그렇게 알구 있어.”
대구사건은 처음엔 외부에 잘 알려지지 않았다. 철저하게 지역을 고립시키는 보도 관제가 이루어진 탓이었다. 하지만 어느새 그것은 들불처럼 번져서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각 지역마다 해방 공간의 운영에 대한 불만이 쌓여 있었으니 누군가 불을 당기면 확 폭발해버리는 내연성(內燃性)을 안고 있었다.
장창혁 교수부장이 첩보 사항이 기재된 서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미군정이 친일 관리를 고용하고 토지개혁을 지연하며, 식량 공출 정책을 강압적으로 시행하자 불만을 가진 민간인과 좌익세력이 경찰과 행정당국에 맞서 일어난 사건이라는군. 대구는 사회주의자들이 활개치는 지역이야.”
“사회주의자들이 많으면 폭발력이 있다는 것입니까?”
“주민들은 일제 강점기, 자신들을 억압하는 데 앞장섰던 경찰관들에 대해 적대감을 지니고 있는 거다. 일제 강점기 때와 마찬가지로 쌀을 강제로 빼앗다시피 공출해가는 것을 겪으면서 민심이 흉흉해졌군. 항의하면 가두고 탄압하니 약자 편에 선다는 사회주의 지식층들이 외면하지 않고 들고 일어난 걸로 되었어...”
실제로 대구경북 지역은 사회주의 기풍이 다른 어느 지역보다 높은 곳이었다. 흔히 대구를 ‘조선의 모스크바’라고 불렀다. 그들의 진보적 세계관은 지식층이 두껍고, 항일투쟁의 역사가 깊은 데 연유했다.
박상희 역시 대구경북을 대표하는 항일 사회주의자이자 민족주의자였다. 그는 일찍이 몽양과 힘께 항일 투쟁의 길을 걸었다. 해방이 되자 건준 구미지부를 창설하고 건준이 인민위원회로 개편되자 선산 구미지부 인민위원회 내정부장을 맡았다. 대구 10월 항쟁 중에는 조선공산당 선산군당위원장, 민주주의민족전선(민전) 선산군 사무국장을 지냈다.
민전은 30개 좌익 및 진보정당이 연합해 만든 기구였는데, 여운형 박헌영 김원봉 백남운 허헌 등 다섯 사람이 공동의장을 맡고 있었다. 모스크바 삼상회의에서 신탁통치가 결정되자 박상희는 민족주의 노선인 반탁운동에 나섰다.
박헌영이 모스크바 삼상회의 지지로 돌아서자 그들과는 일정 선을 그었다. 그들과 다른 결인 몽양의 길을 선택한 것이다. 그는 몽양처럼 이념적 스펙트럼이 넓었다. 때로 공산주의 계열에 몸담기도 했으나 개인적 연고로 직함을 걸었을 뿐, 당시 대부분의 사회주의자들이 그랬듯이 직접 공산주의 활동을 한 적은 없었다. 후덕한 인상에 사교성이 있고 인맥이 넓은 박상희는 나라와 고향을 위해서라면 어떤 직함, 어떤 지위도 마다하지 않은 호방한 성격이었다.
몽양이 운영하는 조선중앙일보 기자와 동아일보 구미지국장 겸 기자로 근무하면서 문명도 널리 알렸다. 박정희는 이런 형을 잃었다. 누구보다 존경했던 친형을 잃자 박정희는 복수심이 끓어올랐다.<박정희 형 박상희-독립운동가 스토리(95) 인용(2016.6.27.)>.
“주민의 어려움을 대변했다고 쏴죽인 놈들이 어디 있나?”
생각할수록 분통터지는 일이었다. 대구경북 지역은 여느 지역보다 유독 쌀 배급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일부 모리배들의 장난 때문이었다. 이들이 미곡을 사재기하면서 쌀값이 자고 나면 몇 배씩 뛰어오르고 있었다. 나중에는 30배나 뛰었고, 돈을 주고도 사먹지 못했다. 여기에 콜레라가 창궐해 대구 경북에서만 수백명의 주민이 사망했다. 미군정은 전염을 막는다며 통행차량 제한은 물론 주민을 타지역으로 이동하지 못하도록 진출입을 막았다. 병사자와 아사자가 늘어났다. 결국 9월부터 대구시민은 미군정의 식량정책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였다. 대구지역의 노동자들도 가세했다.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가 벌인 9월 총파업에 맞추어 대구 노동자들이 일제히 파업에 들어갔다. 부산 노동자들도 동조했다. 그리고 마침내 10월 항쟁이 터졌다. 시민들은 곡괭이와 도끼, 일부는 일본군이 버리고 간 99식 소총과 군도로 무장해 거리로 나섰다.
“계엄령이 선포되었으니 군대가 진압 차 출동할 거다. 대형 사고가 날지 모르겠다.”
장창혁이 침통한 어조로 말했다.
“그건 안됩니다. 군이 자국의 백성을 중화기로 진압하다니요?”
“쌍방이 교전을 하고 있어. 경찰서를 접수하고, 경찰관을 쏴죽였어. 폭도시위대 위세가 만만치 않다.”
그러면서 한동안 침묵을 지키던 장창혁이 오민균을 뚫어져라 응시하더니 나직히 말했다.
“한번 다녀오라우. 비밀리에 다녀오라우. 조의금도 준비할테니 전해주고 와. 이건 어디까지나 내 개인적 의사표시야.”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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