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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정이라 해봤자 민나 도로보데스야!"

[팩션] 실록소설 '행군-어느 민족주의자를 위한 변명' <13>

해방 후 왜곡된 역사 속에서, 지금까지의 한일 관계는 효용을 다했다. 그러나 예고된 갈등이었다. 일본은 구한말과 일제강점기 35년, 8.15 광복과 분단체제, 그 이후 70년의 강고한 구 체제 시스템 속에서 우리 내부 깊숙이 침투해 들어와 알게 모르게 생활의 일부가 되었다. 그 안에 우리 내부의 모순과 고뇌가 응축되어 있다. 이 모순과 고뇌를 탐구하려면 어떤 방법이 있을까.

한 개인사를 통해 시대와 사회를 비추는 거울 역할을 하는 것이 문학의 영역일 것이다. 그동안 우리는 외세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생존이 우선이었던 관계로 자기 자신을 앞세우지 못했다. 우리는 너무 쉽게 잊어버렸고 안일했다. 그러다보니 역사는 박물관에 소장된 문화재인 양 화석화되고, 현대의 역사는 더군다나 묻혔다.

기자 출신 이계홍 작가의 실록소설 '행군-어느 민족주의자를 위한 변명'은 그런 배경에서 나왔다. 이 소설은 2016년 10월호부터 2019년 6월호까지 문예월간 '월간문학'에 연재되었던 소설이다. 월간문학 연재를 마친 뒤 많은 부분을 수정 보완해 프레시안에 재수록한다.

이 연재물은 이른바 '팩션(Faction)'이다. 팩트와 픽션의 사이 어디에서 역사적 사실에 상상력을 덧붙인 '논픽션' 형식의 소설이다. 필자는 취재의 일환으로 일제강점기 말 일본 육사 출신 젊은 생도들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어지러운 시대, 그 안에서 제국주의 광풍에 휘말린 젊은이들의 시각을 잡아내려 했다. 이계홍은 "일본의 극우 정권이 일제강점기의 역사적 사실들까지도 왜곡하는 역사 모독에 대해 하나의 담론시장을 형성하자는 데 목적이 있다"고 했다. '행군-어느 민족주의자를 위한 변명'은 총 33회로 나뉘어 연재될 예정이다.(편집자)


제13장 순결한 땅 순결한 여자

칠흑같이 어두운 밤, 검은 물결을 가르며 소리없이 배가 들어오고 있었다. 배는 풍선·동력선 겸용이었지만 소음 때문에 발동기를 돌리지 않고 돛을 올려 노를 저어오고 있었다. 배가 포구에 이르자 선원 몇이 빠르게 움직였다. 그중 하나가 잔교에 밧줄을 던져놓고 뛰어내리더니 배를 끌어당겨 잔교에 접안시켰다. 배안의 선원들 움직임이 더 빨라졌다. 포구는 만의 꼭지점에 붙어있는 데다 불빛도 없어서 적막감마저 감돌았다. 배는 일부러 이런 외진 곳을 골라 입항하는 것 같았다. 선원들이 선미 쪽으로 가서 노와 돛을 수습할 때, 한 무리의 청년들이 불쑥 선상으로 뛰어들었다.
“꼼짝 마라.”
모두 각목을 들고 있었지만 그중 한 사람은 권총을 휴대하고 있었다. 그들은 각목으로 위협하며 선원들을 배 한쪽 구석으로 몰아붙였다. 한 선원이 난간을 타고 뛰어내려 도망가자 키 큰 청년이 달려가 그의 뒷덜미를 잡아채더니 각목으로 늑신하게 두둘겨팼다. 그가 패대기쳐진 개구리처럼 뻗자 선상의 선원들이 모두 무릎을 꿇더니 두 손을 모아 싹싹 비비기 시작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괴청년이 작달막한 체구의 선원을 군화발로 냅다 걷어찼다. 그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뻗자 곁의 선원이 떨며 애원하기 시작했다.
“살려 주십시오. 용서해주십시오. 목숨만 살려주십시오.”
“어디서 오나?”
권총을 빼든 사내가 짧게 물었다. 그는 경찰 복장을 하고 있었다.
“네네, 우도 앞바다에서 들어왔습니다. 고기를 잡다 늦었습니다.”
“이 자식이 헛소리하고 있어. 복강(福崗)이냐, 하관(下關)이냐?”
“아닙니다. 우도 어장에서 왔습니다.”
“다 알고 왔다. 후쿠오카나 시모노세키다. 거기서 오지 않았다면 오밤중에 적선처럼 스며들어올 리가 없다. 바른대로 대라!”
“아닙니다. 우리는 뱃사람입니다.”
“쌍노무 새끼, 우리 눈을 호주머니에 담고 다니는 줄 아나? 샅샅이 뒤지라우!”
선원들을 향해 겨누던 총을 옆구리 권총집에 찔러넣은 경찰 복장이 명령하자 괴청년들이 우루루 선실로 쏟아져 들어갔다. 쓰러진 선원이 신음소리를 토해내며 부시럭거렸다. 그가 겁에 질린 목소리로 말했다.
“우린 시킨대로 했을 뿐임더. 용서해주이소.”
경상도 말씨를 쓰는 그는 곁의 선원이 옆구리를 찔러 주의를 주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
“가져가이소. 우리완 상관 없으니까네. 우야튼지간에 우린 죄가 없다고러.”
선실에 들어갔던 청년 둘이 돌아나왔다.
“생선박스 밖에 없습니다.”
“위장이야. 이 자가 불었어. 시킨대로 했다잖아. 다시 들어가서 배 밑창 뜯어봐!”
둘이 선실로 다시 몰려 들어가고 한참 후 한아름 물건을 안고 나왔다,
“라지오, 화장품, 핸드박구, 사지 쓰봉을 찾아냈습니다.”
“아편, 총기류, 스트라이크(담배) 따위 없어?”
그러자 한 놈이 급하게 달려오더니 보고했다.
“미곡이 백 가마니 넘어보입니다. 밑창에 깔아놓고 판자로 덮었습니다.”
“식량 부족이니 쌀이 돈이 된다 이거지? 포박하라우.”
일당이 달려들어 네 선원을 포승줄로 결박했다. 군화발로 가슴을 맞은 자는 허리를 구부린 채 계속 헥헥거렸고, 어깻죽지를 맞은 자는 한쪽 팔이 처진 채 허수아비처럼 힘없이 팔을 팔랑거렸다.

“우리 이모는 억척 투사였대.”
“이모님이요?”
“그래. 해녀조합 지휘자였어. 일본놈들이 해녀들이 채취한 해산물을 덮어놓고 가져가니까 나섰던 분이야.”
“해산물을요?”
“그렇지. 제주산 전복 문어 멍게 참돔 방어는 싱싱하고 맛이 좋아서 일본놈들이 환장했지. 홍콩과 마카오 신사들이 요릿집에서 즐겨 찾는 해산물이야. 해물맛을 아는 놈들이지.”
“그럼 부자가 됐겠네?”
“그랬으면 얼마나 좋겠니. 쓸어갔으니 억울할 뿐이지. 감태는 공업용 아교와 화장품 원료로 쓰느라 싹 쓸어가고, 우뭇가사리는 왜놈들이 좋아하는 양갱으로 가공해서 비싼 값으로 팔아먹었어.”
고길자와 임순심이 장독대 곁에 있는 물질 도구를 챙기며 얘기를 나누었다. 성산포 앞바다로 물질을 나가려는 중이었다. 고길자는 표선 집에서 나와 임순심과 함께 오조리 귀퉁이에 방을 얻어 살고 있었다. 스물여덟의 나이라면 혼기를 놓친 나이였고, 그런 노처녀가 일본에서 낯선 처녀를 데려왔으니 마을에 소문이 없을 수 없었다. 소문을 피하기 위해 그녀는 임순심을 데리고 바닷가 마을의 방을 얻어들었다.
임순심은 물옷과 물소중기 테왁 망사리 족쉐눈 창경 빗창 호맹이 작살 성게 칼을 차례로 챙겼다. 그러자 제법 해녀 꼴이 났다. 제주도에 정착하면서 그녀는 어느덧 마음 넉넉한 해녀로 변신해 있었다. 물질을 나갈 때마다 테왁을 소중하게 챙겼다. 잘 여문 박을 따내어 구멍을 뚫고 박씨를 빼낸 다음 물이 들어가지 않도록 송진으로 구멍을 막아 만든 테왁은 해녀들이 깊은 바다속에 들어갔다가 올라와 휘파람을 불며 숨을 고르는 소중한 생명의 꾸럭이었다. 테왁만 있으면 끝없이 바다에 떠있을 것 같고, 드넓은 대양도 나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답답할 때는 그것을 띄워놓고 가슴으로 누르며 무한 자유를 누리고 싶었다.
두 사람은 우도 쪽 바다로 나가는 길을 택해 걸었다.
“이모가 종달리, 성산포 해녀회관도 만들었지.”
제주 해안에는 언젠가부터 일본인들이 세운 해산물 가공공장이 들어서서 성황을 이루었다. 생선 통조림공장도 들어섰다. 이것들을 일본 제국 군대에 납품하고 일본 주요 도시의 식품점에도 내다 팔았다. 그러나 해산물 생산자인 해녀들은 돈맛을 보지 못했다.
일본인 주재원이 해녀들이 건져올린 해산물을 일방적으로 회수해가는 것이다. 매입한다고 했지만 말 뿐, 그냥 거둬들이는 수준이었다. 해녀들이 세화리 장날을 택해 시위를 벌였다. 호미와 빗창을 들고, 어깨띠를 두르고 행렬을 지어서 장터에 이르렀는데, 종달리 오조리 시흘리와 우도 해녀들까지 가세했다.
순경들이 총검으로 위협하고 방망이로 제압했으나 해녀들은 “우리들의 요구에 총칼로써 제압하면 우리는 죽음으로써 대응한다”고 외치며 맞섰다. 일본 상인 배척, 강제 지정판매 반대 등의 구호를 외치고 제주도청으로 몰려갔는데, 끝내 제주 도사(島司)로부터 요구를 해결해 주겠다는 약속을 받아내고 귀로에 들었다. 돌아오는 길목에 무장경찰의 습격을 받아 무차별적인 곤봉 세례로 피투성이가 되고, 주동자가 체포되고, 해녀 수십명이 주재소에 감금되었다.
“단독으로 일을 저질렀을 리 만무하다. 배후가 누구냐.”
야학 청년교사들이 배후로 지목되었다. 청년들은 하도리 세화리 종달리와 우도에서 야학을 통해 해녀들을 학습시킨 지역청년 교사들이었다.
“이모는 감옥에 갇혀서 고문 후유증으로 앓다가 돌아가셨어. 해녀회관은 이모네들의 천역(賤役)으로 세운 건물이야. 너도 그걸 알아둬. 시위는 천시받던 해녀들이 일으킨 운동이란 걸 알아라. 결코 굴하지 않았어. 운동이란 성공의 여부를 떠나 그렇게 깨어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란다. 지렁이도 건들면 꿈틀하는데 하물며 만물의 영장인데 어떡하겠니. 죽은 듯이 엎드려 있다면 그게 송장이지 뭐겠어?”
“이젠 알아요. 당하고만 살 순 없죠.”
임순심에게도 어느덧 결의가 묻어나고 있었다.
“오늘 저녁 회관에서 강연회가 열린다. 일본에서 유명한 분이 오신다고 청년회에서 알려왔어.”
“일본에서요?”
“그래. 일본인이 일본을 반대하는 분이야. 그런 양심가들이 있다는 게 신기해. 우리보다 더 저항하고, 감옥가고 처형당했다는 분들이 있대. 그분도 그중 하나야.”
“일본인이게도 그런 사람이 있나요?”
“사람은 층층이니까. 돌아가신 이모 아들이 그렇게 말해줬어. 강연회를 주선한 동생이야. 뼛속까지 정신이 스며들었지. 엄마의 한이 남아있기 때문이야.”
그렇게 말하자 임순심은 조금 부끄러웠다. 시키는대로 일본군에게 몸을 맡기고, 그것을 당연시 여기고, 하나의 의무로 받아들였다. 뭔가 잘못됐다고 생각은 했으나 누구나 그렇게 하니 그녀도 그러는 줄 알았다. 그것이 나라를 위한 일인 줄 알았다. 사실 누구나 그렇게 말했다. 면장도, 군수도 그랬고, 글쓰는 명사도 그랬고, 군대에선 대대장, 연대장, 사단장이 그랬다. 열여섯 살의 그녀가 세상의 물정을 아는 것이라곤 순응밖에 없었다.
“내가 살아온 것이 부끄러워요.”
“니가 끌려간 것은 니 자신의 뜻으로 된 것이 아니잖아. 그건 수치가 아니야. 약한 나라에서 태어난 죄값을 니가 대신 받은 거야. 처녀 총각들을 전쟁터로 몰아낸 사람들이 애국자로 변신해있는 게 온전한 세상이니? 소녀 하나 지켜주지 못한 어른들이 속임수로 병사들 욕정을 달래줄 도구로 보내고, 그러고도 지금 새 나라의 주인이 되었다고 떵떵거리니, 세상이 요지경 아니니? 사지에 내보낸 것을 입을 싹 씻고 호령하고 군림하고 있어. 세상 참 더럽지?”
“언니, 그런 말하면 또 무서워요.”
“그래, 말하지 않으려다가도 악이 받치면 분개하게 돼. 마음이 편치 않으면 좋은 것만 생각하기로 하자.”
그러나 어떻게 좋았던 것만을 생각할 수 있는가. 나날이 몸이 해체되고, 지금도 악몽 속에 잠을 못이루는데...
고길자는 언젠가 임순심이 매일 하체를 벌렸던 사연을 들었다. 하루 열댓 명, 많게는 마흔 명의 사내들을 받아내자 그녀의 샅은 너덜거리고, 헤진 담요가 핏물과 정액으로 흥건했다. 고통에 울면 그들은 더 흥분해 날뛰었다.
고길자는 임순심을 붙들고 함께 울었다. 이렇게 당한 아이가 얼굴 들 수 없다고 고향에 돌아가지 못한다니 더욱 서럽고 기가 찼다.
-니가 어떤 누구로부터도 위안받지 못해도 내가 널 지켜줄게. 넌 세상에서 가장 순결한 여자야.
고길자는 이렇게 마음 속으로 임순심을 위로했다.
임순심은 푸른 바다를 바라보면 하나가와 소위를 생각했다. 떠나갈 때 그녀를 향해 무릎꿇고 엎드려 절을 하고, 눈물을 보이던 그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녀는 그가 다시 찾아오리라고 굳게 믿었다. 그것이 무망한 기대였다는 것을 알아차렸지만 그와의 하룻밤은 너무도 소중한 추억이 되었다. 언제부터인가 그녀는 그가 금방 문을 열고 들어올 것같은 기대로 살았다. 그를 되살릴 때마다 가슴이 설레었다. 일본인에게도 그런 사람이 있었기에 길자 언니는 일본인이라고 해서 다 나쁜 것은 아니라고 했을 것이다.
“오민균 생도 생각 나니?”
“네.”
신체 건강한 눈부신 모습. 임순심은 순간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녀로서는 넘볼 수 없는 청년이었다. 임순심은 그와 헤어질 때 주소를 알아둘 걸, 하는 아쉬움이 있었지만 어떤 자격지심에서 물을 수가 없었다.
“그 사람하고 결혼하는 사람은 어떤 여자일까.”
고길자가 아련히 펼쳐진 먼 바다를 바라보며 엉뚱한 말을 했다.
“언니, 난 결혼하지 않을 거예요.”
“좋은 남자가 나타나도?”
“어떻게 할 수 있어요?”
“그래, 나도 마찬가지야. 난 나이를 너무 먹어버렸거든.”
파도가 일정한 간격을 두고 너울처럼 일렁이는 바다 가운데서 두 사람이 이윽고 자맥질을 시작했다.

성산포와 구좌, 신양, 표선, 물 건너 우도에서 물질을 하던 해녀들이 모여들었다. 야학 청년교사들도 자리를 함께 했다. 사회자인 정성준이 장내를 정리했다. 그는 백록회라는 청년회 간부였고, 청년회와 해녀회원들이 회관에 모이도록 주선한 당사자였다. 그가 단상에 등장했다.
“여러분, 오늘 일본인 사상가를 모셨습니다. 이시하라 겐조 선생님입니다.”
그러자 장내가 술렁거렸다. 그가 소개를 이어갔다.
“이시하라 선생님은 우리 제주도 해녀 출신 양영자 여사님의 부군이십니다. 조선의 독립과 제주도에 남다른 애정을 가지신 분입니다. 반제국주의, 반전 평화운동을 펴오시다 오래도록 투옥된 분이시며, 그러면서도 이름없이 살기를 원하시는 참 스승님이십니다. 마침 제주에 오셨다는 소식을 듣고 저희가 어렵게 자리에 모셨습니다. 우리와 좋은 인연이 될 것으로 믿고 모셨으니 뜨겁게 환영해주시기 바랍니다.”
요란한 박수가 터져나왔다. 곧바로 은발에 작달막한 체구의 이시하라 상이 단상에 올랐다. 사십대 후반이었지만 풍상을 겪은 탓인지 깡마른 얼굴에 주름살이 깊게 패어 실제보다 나이가 들어보였다.
“반갑습니다. 저는 학문의 깊이는 얕지만 사회자께서 소개한대로 감히 이 자리에 설 자격이 있다고 자부합니다. 왜냐고요?”
이렇게 스스로 묻고 스스로 답했다.
“이 땅이 제가 사랑하는 아내의 고향이니까요. 저도 알게 모르게 제주 섬을 그리워하게 되었는데, 와보니 중독이 될 만하군요. 풍광이 아름다운 것만이 아니라 사람 사는 모습이 바로 제 이상향입니다. 서로 상부상조하고, 배려하며 사는 모습이 정겹습니다. 그리고 일본인으로서 제 개인적으로 여러분들에게 정중히 사과합니다. 제 개인적 사과가 얼마나 위안이 되겠습니까만, 여전히 반성할 줄 모르는 일본 나라를 대신해 제가 정중히 사과합니다.”
다시 박수가 터져나왔다. 박수가 멎기를 기다렸다가 그는 다음과 같이 길게 연설했다.
“나치 독일의 히틀러와 이탈리아의 파쇼 무솔리니는 패전 후 자살하거나 처형되었습니다. 히틀러는 연합군이 엘베강에서 소련군과 합류하고, 베를린이 함락되자 1945년 4월 30일 집무실 지하 벙커에서 연인 에바 브라운과 비밀결혼을 올리고, 청산가리를 나누어 마시고 권총 자살했습니다. 그의 시신은 불에 태워져서 소련군에 의해 하수구에 버려졌지요. 그보다 3일 앞선 4월 27일엔 무솔리니가 이탈리아 파르티잔에 의해 체포돼 즉결처분되었습니다. 무솔리니의 처형은 정말 극적이지요. 무솔리니는 1945년 4월 25일 이탈리아 반파쇼 의용군(파르티잔)에게 체포되었습니다. 무솔리니는 독일 하사관으로 변장해 연인 클라라 페타치와 수행원을 이끌고 스위스 코모호 인근의 마을로 숨어들었습니다. 도망가는 과정에서 독일군의 초소는 통과했지만 뒤쫓는 이탈리아 파르티잔의 추적을 피할 수는 없었습니다. 파쇼독재 전쟁국가로 몰아간 그를 자국의 이탈리아인이 체포한 것입니다. 무솔리니는 독일 군복으로 변장한 것까지는 좋았지만, 어이없게도 이탈리아 최고급 장화 때문에 발각되었소이다. 파르티잔들은 이탈리아 귀족이 아니면 신지 못하는 장화를 보고 단번에 무솔리니라고 단정했고, 그를 붙잡아 메체그라 마을 민가에 구금한 뒤 심문한 끝에 신원을 확인하고, 재판을 열어 총살형을 선고했고, 다음날 형을 집행했습니다. 연인인 페타치는 살려주었지만 무솔리니와 함께 죽겠다고 그녀 스스로 총맞아 죽었습니다. 무솔리니를 수행했던 근위병과 참모진도 총살되었습니다. 4월 29일 무솔리니와 페타치, 그와 함께 처형된 추종자들의 시체는 트럭에 실려서 밀라노 광장으로 운송되었습니다. 그곳은 무솔리니에 의해 반파쇼 운동가 15명이 총살된 곳이었습니다. 광장에 수많은 군중이 모인 가운데 그들의 시체는 주유소 서까래에 거꾸로 매달려 전시되었습니다. 무솔리니의 20세 연하의 연인 페타치는 치마를 입고 있었기 때문에 거꾸로 매달렸을 때 팬티를 노출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페타치의 치마를 묶어서 팬티가 드러나지 않게 한 것이 예의의 전부였을 뿐, 모두가 침을 뱉었고, 무솔리니에 의해 가족을 잃은 사람들이 차례로 그의 시체에 총을 쏘고 갔습니다. 그래서 무솔리니의 시체는 벌집이 되었습니다. 그를 체포한 파르티잔의 대장은 ‘페드로’라는 가명으로 불리웠지만 백작의 작위를 가진 귀족으로 본명은 피에르 루이지 벨라니 델레 스텔레였습니다(이상 나무위키 인용). 이탈리아 귀족이 파쇼 야만의 심장을 쏘아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수백 만을 죽인 일본의 범죄자 히로히토는 이상한 문서 한 장 연합국에 보내고는 건재합니다. 야수와 같은 그의 심장에 총알을 박아야 하는데, 누구도 그러지 못하고 여기까지 왔습니다. 도대체 일본의 양심과 지성은 죽었을까요? 미치광이 살인범을 살려둔 이유는 무엇일까요. 왜 여전히 숭배의 대상일까요. 여전히 신민(臣民) 의식으로 금수의 수준에 머물러 있어서일까요. 그리고 도대체 미국의 관용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관용이 아니라 범죄를 은폐한 범죄입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똑똑히 알아야 합니다.”
장내가 숙연해졌다. 그가 주전자의 물을 컵에 따르더니 길게 한잔 마시고 다시 연설을 시작했다.
“미국은 애초에 한국에 대한 인식이 없었습니다. 오직 전쟁 승리만을 바라보고 오키나와 전투에 전력을 투입했습니다. 자료에 따르면 약 두달 반의 오키나와 전투에서 일본측 추산으로 일본군 전사자가 10만 2000명, 미군 전사자 4만 7000명이라고 합니다. 미군 추산으로는 일본군 전사 6만 5000명, 미군 전사자 1만 1933명이라고 발표했소이다. 그러나 그중 가장 큰 피해자는 오키나와 주민들이요. 오키나와 본토 사망자만 12만 명(주민의33%)이란 것이오. 전쟁의 가장 큰 피해자는 양측 군인이 아닙니다. 죄없는 해당 지역의 어린이, 소녀, 부녀자들이오. 세상에 이런 일이 어디 있소? 그런데도 이들은 기록에도 없습니다. 조전민족은 어떻습니까. 오키나와는 전쟁이라도 해서 그런 피해가 있지만, 조선반도는 싸움 한번 하지 못하고 일본에 먹힌 채 36년동안 오키나와 인민이 피해 수십 배, 수백 배의 피해를 입었소이다. 그런데 이런 피해를 딛고 미국과 일본이 문서 한 장 형식적으로 쓰고 그들끼리 담합하고, 물밑 거래하고 있습니다. 패해자와는 아무런 상관없이 말이오. 그래서 여러분은 끊임없이 질문해야 합니다. 미국의 실체가 무엇이냐? 불행했던 식민지 국가의 사람들에 대한 시선이 무엇이냐. 인류가 지향하는 가치가 무엇이냐. 도대체 정의가 무엇이냐...”
장내가 조용한 가운데 뒤쪽에서 한숨소리가 터져나왔다. 이시하라 상이 말을 이었다.
“내가 당부하는 바인데, 여러분은 절대로 허무주의에 빠져선 안됩니다. 그런 비극을 숙명으로 받아들이면 누가 기뻐할까요. 범죄자들이지요. 일본놈이지요. 여러분만 또다시 힘들게 됩니다. 그러니 이론의 여지없이 뭉쳐서 응징해야지요. 그런데 뭉치는 그것을 내부에서 부수고 있습니다. 일본놈의 마름들이오. 음험한 국제 질서에 이용당하는지 모르고, 눈앞의 이익이 있다고 하수인이 되어서 영혼을 팔아먹고 있습니다. 이럴 때 어떻게 해야지요?”
“뭉쳐서 스스로의 힘으로 극복해 나가야지요!”
한 청년이 외쳤다.
“그렇지요. 그런데 여러분, 총독 아베 노부유키 류가 조선에서 물러나면서 뭐라고 말한 줄 아시오? 그는 이렇게 말했소이다. ‘조선은 스스로의 내분에 싸여 저절로 망할 것이다. 일일이 대응하지 말고 내버려두고 구경하고 있다가 때가 되면 거둬들이면 된다’고 했소이다. 조선국은 스스로 분열해 망할 것이며, 그때 조선을 일제 시기로 다시 소환하면 된다고 했소이다.“
청중들 사이에서 아아, 하는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지금 전개되는 상황을 보면, 사실로 드러나지 않습니까. 제 정파는 상대방을 죽이기 위해 온갖 음해와 모략과 폭력으로 진창 속으로 몰어넣고 있습니다. 분열 앞에는 어떤 나라도 망하지 않는 예가 없습니다. 그런데 친일경찰, 친일관료, 친일자본가들이 전면에서, 혹은 후방에서 기술자들을 동원해 교묘한 대중조작적 선전선동과 테러행위로 분열시키고, 이간질하면서 저항세력을 제거하고 있습니다. 정치단체, 청년단이 이용당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제거하려는 대상은 한결같이 양심세력들입니다. 왜 그럴까요. 자기들이 몰릴까 두려워서이고, 콤플렉스 때문입니다. 그들이 존재하면 그들이 존재할 근거가 없으니 일제강점기 때 익힌 고약한 버릇, 사소한 꼬투리 잡아서 패대기치는 것이올시다. 이것을 일본과 미국이 배후에서 지원하고 있소이다. 이러니 구세력들이 다시 살판나게 생겼습니다. 식민지를 기억하지 못한다면 조선은 또 과거의 고통을 고스란히 후세에게 물려주게 될 것입니다. 망한 뒤에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우리가 어리석을 때 나쁜 역사는 예외없이 반복된다는 것 알아주시오.”
아아, 하는 절망의 통탄들이 여기저기서 토해져 나왔다. 이시하라 상이 말을 이었다.
“그러면 제주도로 시각을 돌려 보겠습니다. 제주도는 주민들이 의식하건 안하건간에 공동체적 삶을 지향하는 아나키스트적 풍속이 뿌리를 내린 고장입니다. 아나키즘 하면 불온한 사상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것은 일제가 왜곡하고 조작해서 만든 프레임일 뿐, 사실은 인디안의 생활방식, 즉 공동체의 규약이나 약속들을 자발적으로 이행하며 사는 소박한 삶의 방식입니다. 왜 이런 사조가 나왔을까요. 거대한 중앙정부의 폭력성과 야만성 때문이지요. 그들의 횡포가 개인의 삶을 강박했기 때문입니다. 지원과 봉사는 없고, 부당한 간섭과 착취만 가했으니 그런 것을 배제하고 우리끼리 나누며 더불어 살아가자는 자치성과 자주성을 갖게 된 것입니다. 그것이 정부가 필요없는 무정부주의적 생활 방식이고, 아나키즘의 지향점입니다. 그런 본성을 저는 제주도에서 보고 배웠습니다. 제 이상향이죠. 아나키즘은 명확한 사상체계로서 인식하기보다 공동체적 생활철학 체계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일본 제국주의가 사회주의와 함께 공포스럽게 악마로 만들어서 오도된 부분이 있지만, 사실 아나키즘은 마르크스주의에 대항하는 다른 계열의 생활철학 진보운동이올시다. 결코 공산주의와 연계되는 이념체계가 아닙니다. 오히려 자본주의적 자유주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물론 바쿠닌과 같은 무장혁명가적 아나키스트도 있지요. 탄압을 하니 그렇게 저항한 것입니다. 그러나 톨스토이와 같은 낭만적·생활탐미적 아나키스트도 있다는 걸 알아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톨스토이 사상을 지향합니다. 아나키즘의 본질은 민족주의를 지향하는 것이 아닌데 조선지식인 청년들이 일제에 저항하다 보니 그 수단의 하나로서 민족주의적 항일독립운동 경향으로 나갔습니다. 그것은 그 공동체 안에서 적합한 형태로 재구성되니 이해될 수 있습니다. 무슨 사상이든 원리에만 충실하면 교조화하기 십상이니, 자기 토양에 맞게 이상적인 방향을 색칠해나가는 것은 바람직합니다. 이런 제반 현상을 나는 제주 땅에서 봅니다.”
그는 무정부주의 이론이 실천운동으로 접목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는 것으로 강연을 마쳤다. 뒤이어 질문시간이 주어졌는데 한 야학 청년교사가 일어섰다.
“말씀 잘 들었습니다. 아니키즘의 본성이 제주도의 생활방식에 녹아있다는 진단이신데, 굳이 따지자면 이런 것은 어느 고장에도 있는 현상 아닌가요?”
“질문 잘했습니다. 어느 고장이나 있지요. 하지만 구분되는 것은 주민의 생활이 노동조합운동과 같은 조직으로 연계되고, 공동체적 자구(自救)운동을 의도하는 것과 아닌 것과의 차이가 있을 것입니다. 운동을 지향하는 결사와 연동이 되냐 안되냐의 기준도 있을 것입니다. 제주 섬은 자주와 자립심이 강하게 표출되는 곳인데, 육지에선 그런 의식이 없습니다. 운동적 연대가 없이 그 할아버지, 아버지가 살았던 방식의 관성을 따르는 것이지요. 아나키스트 운동의 정의에서는 벗어납니다. 제주는 다릅니다. 왜 그럴까요. 중앙정부에선 그들이 설정한 행정 프로세스에 주민을 복속시키려 하지요. 그런데 차별하고 배척하고 탄압하고 외면한단 말입니다. 그러면 공동체가 자구책을 강구하는 것이 당연하지요. 이럴 때 정부는 자신을 따르지 않는다고 옥죕니다. 저항의 원인 제공을 누가 자초했습니까. 공동체의 지원자가 아니라 방해자가 된 중앙권력입니다. 제주도는 아시다시피 역사적으로 육지와 다른 특유의 경제·사회·문화공동체를 형성한 고장입니다. 거센 바다와 열악한 토지환경, 육지와 단절된 공간에서 사는데 중앙의 행정력은 명령과 지시와 횡포만이 있고, 또 착취와 수탈이 강요되었습니다. 이런 고단한 삶과 부당한 것에 대한 투쟁 속에서 자주적인 해방공동체를 구성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 투쟁 역사의 전통은 일제강점기엔 어느 지역보다 항일정신으로 강하게 표출되었고, 지금 미군정이 들어서서도 민족 해방과 자주 독립의 발언이 강하게 표출되고 있습니다. 남에게 의존하지 않고 우리끼리 더불어 살아간다는 모습은 정부가 필요없는 무정부주의를 지향하는 아나키즘의 가치와 일치합니다. 조선조나 일제와 같은 폭력적인 행정기구는 필요가 없는 것이지요. 백성을 지켜주지 못하고 축생처럼 여기는 그런 정부가 왜 필요합니까. 미군정도 마찬가지지요. 그러나 불행히도 여러분은 고립당하고 있습니다. 육지인들의 지원이 차단되어 있습니다. 물리적 거리의 한계와 섬에 대한 육지인들의 편견과 차별이 그들 속에 알게 모르게 침윤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섬사람에 대한 하대의식이 여러분 운동의 확장성에 한계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거기에 주요 언론이 제주와 육지를 분리시키고, 사실을 왜곡합니다. 일방적 경찰 정보에만 의존한 편파왜곡 보도를 합니다. 음해와 이간질이죠. 그러니 연대가 어려운 구조적 한계를 지니고 있습니다. 제한된 지리적 공간이라는 것 또한 결정적 취약점입니다. 만주벌판이나 개마고원, 지리산 같은 드넓은 육지 공간이라면 쫓기면 천지 사방으로 흩어질 수 있는데, 이곳은 쫓기면 바다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럴 때 악질 경찰이 곤봉으로 손쉽게 제압해버립니다. 독안에 든 쥐로 만들어버리죠. 안타깝습니다.”
한 청년교사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니 좌절하고 절망하라구요?”
“그렇게 받아들였습니까? 그렇게 받아들이면 곤란합니다. 육지와 제주의 지리적 단절은 역으로 제주사회가 자치적인 정치, 경제, 문화공동체로서의 독립성을 성숙시킵니다. 다만 고립을 막기 위해 어떻게든 타 지역과 연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타 지역이란 육지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외부 세계에 부단히 내 의사를 타전해야 합니다. 해외의 양심세력과도 연대해야 합니다. 일본에도 양심세력이 있습니다.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지향하는 양심세력들이 세계 도처에 있습니다. 그들과 제주 현실을 공유하고, 폭력 제거와 내상 치유의 길을 모색해야 합니다. 개인은 조국과 시대, 두 가지를 잘 타고나야 하는데 여러분은 불행히도 두 가지 모두 잘 타고 나지 못했습니다. 여러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닌 숙명적인 것이지만, 그래서 모순을 극복해나갈 숙명도 안고 있습니다만, 불행히도 여러분은 지금 기득권에 편입된 내부 적들의 분탕질 때문에 또다시 위기의 절벽에 몰리고 있습니다. 혁명은 그들의 방해 때문에 성공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이럴 때 외부 양심세력과 연대해야지요.”
다른 청년이 일어나 질문했다.
“북녘 세력과도 제휴하라는 말씀입니까?”
“그것은 이용당할 수 있습니다. 형제가 아니라 적으로 몰아가는 상황에서 화근을 만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차원을 높여 유니버설한 운동의 확장력을 말하고자 합니다. 북녘과의 관계도 거부할 이유가 없지만, 이용당할 것을 고려해서 미국 영국 프랑스 일본 등 서구라파와 아시아의 양심세력과 연대를 모색할 것을 조언합니다.”
“어떤 관계에는 때로 어떤 선의도 보장받을 수 없는 현실도 있지 않습니까.”
“양심의 목소리는 만인에게 친합니다.”
“그건 관념적 레토릭입니다. 저는 당장의 현실적인 고통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지금 제주도 귀환 인구가 몇 만명씩 늘어나고 있는데도 식량배급이 이루어지지 않고, 도리어 곡물 할당량을 과도하게 책정해 주민이 살 수가 없습니다. 일제강점기 때보다 더한 기근이 벌어지고, 그런 가운데서도 수탈과 착취가 벌어지고 있습니다. 돌림병까지 돌아서 움직일 수 없습니다. 경찰의 감시는 더 심해지고 있고요. 무역선들이 물품을 압수당하고 사람이 다치고 있습니다. 이것 어떻게 되는 겁니까?”
그러자 중절모를 쓴 나이 지긋한 인사가 일어났다. 그는 한동안 우두커니 서있다가 호흡을 고르더니 말하기 시작했다.
“제 경험담입니다. 제주도는 건준 제주지부를 결성했고, 건준이 발전적 해체해 만든 인민위원회 제주지부도 각 면·리 단위까지 설치되었습니다. 투표라는 민주적 과정을 거쳐서 설치한 것입니다. 제주도 인민위원회는 좌우연합적 성격을 띠었을 뿐 아니라 제주도 민중의 자치의식을 반영하는 기구입니다. 중앙과 별도로 독자적으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미군정에 의해 중앙인민위원회는 부인되었지만, 제주인민위원회는 여전히 존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제주인민위원회는 민족운동세력의 결합체며, 민중의 자치의식을 담아내는 그릇입니다. 부문별 조직을 확대하여 지역자치 체계를 구체화시켰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습니다. 그런데 미군정은 일본경찰을 승계하여 식민지 경찰체제를 갖추어 우리를 박해하고 있습니다. 일제 때도 평화롭게 사는 동네가 매일 들쑤셔지고 있습니다. 경찰국가 체제가 전보다 훨씬 더 강화되고 있습니다. 미군정의 통치방식은 제주 인민에게 분노를 안겨줍니다. 우리는 미군정이 일제와 동일한 제국주의 점령세력이라고 단정합니다. 주민을 억압하는 미군정을 반대합니다. 민중의 뜻을 수렴하는 인민위원회를 지지합니다. 인민위원회를 중심으로 한 자치정부의 구성을 지지합니다.”
<http://www.bgs.hs.kr/dapsa/jaeju(이성희) 등 자료인용>
“옳소!”
하며 여기저기서 박수가 터져나왔다. 일부 청년들은 “나가자! 싸우자!”하고 외쳤다. 한쪽 팔이 없는 청년도 따라 외치며 박수를 쳤는데, 그의 옷소매가 유독 팔랑거렸다. 이시하라 상이 다시 발언대에 나섰다.
“치열하고 진지해서 좋군요. 그러나 미국은 일본보다 엄청 큰 나라고, 세계전쟁을 승리로 이끈 나라입니다. 강압적인 나라이긴 하지만, 그나마 합리적 판단을 하는 나라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일본보다 대화가 통한다고 보지 않소? 당신들이 미군정 당국과 진정으로 대화를 나누어본 적이 있습니까. 미국의 양심세력과 대화해본 적이 있습니까.”
“그들은 우리를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야만인 취급합니다. 경찰의 정보만을 신뢰합니다.”
“그렇더라도 권력의 현실적 실체인 미군정과의 대화 추진이 필요합니다. 대안을 만들어 만나십시오. 미국 양심에게도 호소하세요. 미국은 여론을 중시합니다. 미국은 다양한 의사결집체입니다.”
“우리야 당연히 그럴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제주 주민의 구할 이상이 우리 청년단을 지지합니다. 육지에서 들어온 경찰이 우릴 찢어놓고 있을 뿐입니다. 이간질하고 분열시키고, 고자질하도록 이용한 뒤 내칩니다. 미군정은 그런 그들을 두둔하고 지원합니다. 외람된 말씀이지만, 선생님의 견해는 향기없는 장미꽃 같은 발언입니다. 사변적이고 피상적이며 현학적입니다. 이 시간 현재 제주도는 참혹합니다.”
상당히 모욕적인 발언이었지만 이시하라 상은 조용히 미소를 머금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뜻인지 알겠소. 그런데 내가 여러분에게 이렇게 묻고 싶습니다. 만일 일제 통치가 몇십 년 더 지속되었다면 과연 조선 역사가 있었을까요? 아마도 모두 일본화됐을 것입니다. 지식인이 먼저 이익을 따라 변절하고, 항일투사들도 지친 나머지 체념하거나 잠복해버리고, 무지한 민중은 노예처럼 뒤따를 것이니까요. 다행히도 지금 일제 36년의 체제가 종식되었습니다. 여러분의 의식·무의식 속에 녹아들었던 허무주의, 패배주의가 사라지고, 희망이 펼쳐졌습니다. 그런데 이게 뭡니까. 또다른 함정이 여러분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한반도가 세계 양대 강국의 힘을 겨루는 리트머스 시험지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내부적 힘은 약화되고, 외세에 의존하는 세력이 힘을 받고 있으니 자주독립의 기반은 여지없이 허물어지고 있습니다. 외세는 한반도에 대한 이해가 없기도 하지만, 통일시켜 주어야 할 어떤 성자의 위치가 아닙니다. 그런데 그들을 뒷받침해주는 자발적 추종 세력이 나타나니 안주하겠지요. 치안이나 유지하면서 조선사람들 굶기지 않게 적당히 먹고 사는 문제를 챙겨주고 돌아가면 그만이라는 생각을 했던 그들이 이런 자발적 추종 세력에 의해 오만한 군림의 지배욕구가 생기는 것입니다. 제주 청년들의 순수하고 고결한 정신이 그들에 의해 악용되고 있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여러분의 일차적인 적은 외세가 아닙니다. 외세를 등에 업은 조선의 기득권 세력입니다. 친일세력이지요. 그들은 외세를 등에 업고 귀하들을 적으로 돌려 공포사회로 만들면서 자신들의 체제를 강화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 기제로 사용되고 있을 뿐입니다. 나는 도쿄에서 조선총독부가 무차별적으로 조선은행권을 찍어내 마음껏 쓰고, 미군정에 비용을 대고 있다는 얘길 들었습니다. 이로인해 경제가 마비되고, 경제질서가 무너지고, 혼란이 가중된다고 우려를 표명한 적도 있습니다. 그런데도 여러분은 이런 사실을 모르고 있습니다. 일본의 간계를 보고도 조선지도자라는 사람들 사분오열되어서 싸우는 것 보면, 절망적이지요. 여러분 역시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정보가 없으니 그럴 수밖에 없다고 하지만, 그래서 영명한 지도자가 길을 선도해야 한다고 보는데 그러지 못한 것이 안타깝습니다. 민중은 본래 무지하기 때문에 민중입니다. 더러 유식하더라도 의견을 결집시켜 반영할 통로가 없으니 무지한 계층과 다를 바 없습니다. 일제가 그렇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지배하기 좋으니까요. 그래서 그동안 무엇을 배웠습니까, 의식화할 기회가 있었습니까. 가축처럼 지배자의 도구로 길러졌을 뿐이지요. 깨어나려면 젊은이들이 행동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더 많은 공부와 더 높은 세계관을 가져야 합니다. 이제 여러분이 지도자입니다. 기존의 지도자들은 모순을 깨우치지 못합니다. 귀국선의 침몰도 있는지 없는지조차 모릅니다. 분단은 양대 강국의 문제가 아니라 내부적 대립과 분열에서 파생된 것이고, 대결은 모든 에너지를 소진할 것이고, 불행히도 그것을 외세가 바란다는 점입니다. 지도자들은 그 사실조차 모르고 싸우는 것이 비극적입니다. 불행은 잉태되고 있습니다. 내전과 국제전도 불러올 불행이 오고 있습니다. 거대한 해일처럼 덮쳐올 것입니다.”
노농복 차림의 청년이 일어섰다.
“분이 나서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해상무역을 하는 제 삼촌이 당했습니다. 귀환 가족과 그들의 짐을 실어오는데 경찰과 청년단이 들어가 압수했습니다. 밀선이라며 들여온 물품을 압수하고, 반입을 허용하는 대가로 돈을 뜯습니다. 이런 개새끼들이 있습니까.”
“우리 큰 형님도 그랬어!”
제주항에선 자유무역이 성행하고, 그것이 일정 부분 제주 경제를 지탱하는 힘이 되었다. 그러나 경찰이 단속하며 이권에 개입하고 있었다. 정부가 서기 전의 자유무역 형태의 상거래는 불법이 아니었으나 단속의 손길은 집요하게 뻗쳤다. 해방과 함께 귀환한 일본유학생 출신들이 이런 부조리를 보고 침묵하지 않았다.
귀국 유학생들은 대체로 일제에 저항한 열혈청년들이었다. 당시의 사조는 민족주의와 사회주의적 성향이 지식인사회를 지배하고 있었다. 독립을 위한 혁명적 사고는 민족적이고 민중적이었으며, 그것은 사회주의와 밀접한 연관성을 지니고 있었다. 일본 군국주의의 반대개념이 사회주의였고, 민주주의는 제대로 전파되지 않았다.
식민지 탄압은 근로자 착취와 노동탄압에서 나온 것이고, 그것은 사회주의에 반하는 일들이었다. 그래서 이에 대한 결사와 항의가 분출했다. 한국의 사회주의는 민족주의와 결합한 독특한 형태의 테제로 진화했다. 그리고 지금, 해방의 기쁨과 이상은 사라지고, 대신 일제강점기보다 더한 탄압과 억압구조가 진행되니 쪄누른만큼 용수철처럼 튕겨져나오는 관성이 근로대중들로부터 터져나오고, 그것은 반제국주의·반군국주의 민족운동으로 전개되는 흐름을 탔다. 이들을 선도한 계층이 귀국한 유학생들이었다.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제주 섬은 일제시대부터 생업이 돼오다시피 한 일본-제주-육지 간의 중간무역이 성행했습니다. 주민들의 생산품을 거둬다 일본에 내다 팔고 일본에서 주요 생필품을 들여와 제주나 육지 항구를 돌며 판매하는 중간 상업 활동을 한 것이 주로 제주의 선박들입니다. 헌데 육지에서 건너온 청년단이 위협하고 돈을 갈취하고 있습니다. 물론 중간무역상 중 부당한 거래를 한 자도 있겠지요. 그렇다면 가려내서 징벌하면 되지, 모든 업자들을 범인시하고 거래세, 통관세 따위 말도 안되는 명목으로 선박까지 부수고, 사람을 치고 있습니다. 경찰이 뒤에서 비호하고 있습니다. 이게 말이 됩니까?”
또다시 여기저기서 분통이 터져나왔다.
“미군정이라 해봤자 민나 도로보데스야!(모두 도둑놈들이다)”
“우리식대로 사는 거야!”
회의에 참석하고 보니 임순심은 제주도의 아름다운 풍광으로부터 깨어났다. 그가 바라본 제주섬은 아름답기만 했는데, 이런 어두운 현실에 직면해 있다는 것을 알았다. 들어보지 못한 생생한 분노들을 듣고 나서 그녀 역시 주먹이 불끈 쥐어졌다. 엄중한 삶의 무게를 느낄 수 있었다.
“제주도는 육지인과 동족인데도 타민족처럼 멸시받고, 육지의 식민지처럼 차별받아 왔습니다. 우리는 일제의 식민지이면서, 육지의 식민지로 이중 식민지의 고통을 겪었습니다. 이로인해 생긴 배타적인 주민 정서를 미군정의 개, 경찰이란 놈들이 불온한 시선으로 우리를 노려보고 있습니다. 개버릇 누구 안준다고, 일제 때의 경찰국가의 모습 그대로 눈을 부라리고 있습니다.”
차별의식은 공공연했고 섬사람에 대한 비하는 일상화되었다. 반발하면 사상불온자로 몰아붙였다. 이 틈을 노려서 잠복해있던 진짜 공산 세력이 손을 뻗쳤다.
공산주의는 모순이 활개치는 거리에서 크게 번식하는 습성을 가지고 있다. 당시 좌익은 우익과 마찬가지로 공기처럼 주민 의식 속에 깔려있었다. 그런데 어느 시점부터 정책이 바뀌었다. 합법화도 아니고 불법화도 아닌 어정쩡한 스탠스를 밟았다. 그것은 더큰 사회적 혼란을 부추겼다. 일제 시기, 공산주의자, 사회주의자, 민족주의자를 편리한대로 재단해 잡아들여서 치안유지 수단으로 삼았던 것과 같이 걸리적거리면 빨갱이로 지목해 잡아들였다. 잡아가두고 고문하면서 승진과 영전 따위 출세의 도구로 이용한 것이었다. 조작도 자행되었다. 잡아 족치니 그들이 숨는 곳은 좌익 지도자나 민족주의자들의 품이었다.
“가만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직접 나서야 합니다. 치안행정을 우리가 맡읍시다. 치안의 참 모습이 어떻다, 라는 전범을 보여줍시다. 더 이상 당할 수 없습니다.”
“옳소! 나가자!”
일제히 함성이 일었고, 스무 명 남짓의 청년들이 우루루 밖으로 쏟아져 나갔다. 이시하라 상은 이런 광경을 쓸쓸하게 지켜보았다. 그런 그들의 모습이 흡사 전등불에 엉겨붙는 하루살이 같았다. 그가 경험한 바로는 이런 의분은 가차없이 치는 명분을 제공할 뿐이다.
어수선하게 강연회가 마무리 되자 고길자가 말했다.
“순심아, 너 먼저 집에 가있어.” 그리고 한 청년을 불러세웠다. “상준아, 이 애 집에 데려다 주고 와라.”
“누난?”
“응, 난 회원들하고 해야 할 일이 있어.”
임순심은 고상준과 함께 밤길을 걸었다. 잔잔한 파도소리가 가깝게 들려왔다.
“외지인이 잘 안들어오는데 들어왔군요. 여자는 더욱이나 들어오지 않는데...”
고상준이 궁금해 했다. 누나와 물질을 하며 만났다면 모르지만 물질 또한 서툴렀다. 그러나 관심은 갔다.
“예쁜 모습을 보고 만났으면 했습니다.”
임순심은 말없이 그의 뒤를 따라 걸었다. 가슴이 아릿하고 뜨거우면서 마음이 복잡해지고 있었다.

냉천동 군사영어학교

“한달 후면 학교가 태릉으로 옮겨가네. 국방경비대 1연대가 창설되고, 경비대사관학교가 세워질 거야. 지금 모병중인데, 데려올 친구 있나?”
일본 육사 선배인 장창혁 교관이 물었다.
“생도들이 있긴 한데, 지금은 모두들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오민균이 대답했다.
삭풍이 몰아칠 때마다 운동장의 흙먼지들이 이리저리 휩쓸려 다니는 게 을씨년스러워 보였다. 눈발이 흩날릴 듯 하늘은 잔뜩 찌푸려져 있었다. 서울 서대문구 냉천동 감리교신학교. 휴교령이 내려져서 목사 지망 학생들이 학교에 나오지 않은 대신 군사영어학교(군영)가 들어섰다. 군영 생도들이 휴식시간 삼삼오오 운동장 옆 벤치에 앉아 이야기꽃을 피우는데, 장창혁과 오민균도 그중 하나였다.
오민균이 이곳 군영에 입교했을 때는 2차 수료자를 낸 상태였다. 장창혁은 이형근 채병덕 최경록 강문봉 등과 함께 첫 수료생이었으며, 지금은 생도 교육을 맡는 교관이었다. 군영은 수시로 입교생을 받아들여서 길게는 50일, 짧게는 열흘만에 장교로 배출했다. 때로는 입교하지 않아도 수료증을 발행해 현지 임관시킨 경우도 있었다.
“시국이 좋지 않다. 행동에 주의하라.”
오민균도 감지하고 있었다. 정릉의 백씨산장에서 제기된 문제가 바로 그것이었다. 장창혁이 다시 낮게 말했다.
“경고망동했다가는 누구도 모르게 사라질 수 있다. 너도나도 설치고 있는데, 그게 찬ᐧ반탁이다. 우리 생활의 금과옥조가 되어버렸어.”
“난 잘 모르겠습니다.”
“신경 쓰지 말고 앞만 보고 가라.”
앞만 보고 가라고 했지만 방향을 알 수가 없었다. 거대한 무엇인가가 꿈틀거리고 있는데 무엇 하나 딱 부러지게 손에 잡히는 게 없었다. 구성원 모두 탁류 속에 휩쓸려 허우적거리고 있는 형상이었다.
“오 생도는 누구 소개로 입교했나?”
사실대로 말할까말까 망설였으나 그는 참았다. 장창혁의 말마따나 시국이 어수선해 잘못 엮이면 골로 가는 수가 있다. 상대방이 못마땅해 하면 잘못 말한 것이 된다. 군영에도 공포가 지배하고 있었다.
“나는 오해를 받고 있다.”
“오해를 받다니요?”
미 군정청이 군사영어학교를 개교했지만, 생각이 다른 입교생들 때문에 내부 사정이 복잡했다. 만군계, 광복군계, 팔로군계, 항일연군계, 일본군계로 나뉘는 가운데 사회주의 계열과 광복군계는 군영 입교를 거부했다. 학병동맹과 국군준비대, 광복군계 등은 어제까지만 해도 적이었던 일본군 출신들과 그들이 똑같은 취급을 받는 것이 부당하다며 외면했다. 구조가 경찰의 하부조직이라고 부정했다.
“어느날 친구들이 나를 이응준 군정고문관한테 가서 동태를 살피고 오라는 거야. 이 고문관은 나를 아낀 분이었거든. 그는 내가 찾아가자 ‘왜 여태까지 기별이 없었나. 그러잖아도 사람을 보내려는 참이었는데 잘 왔다’면서 즉석에서 선서문을 낭독하라는 거야. 그리고는 그 자리에서 나를 군영 생도 겸 직원으로 발령을 내버린 거야. 친구들이 상황을 염탐하고 오라고 보냈더니 혼자 교관을 얻어 왔으니 입장이 어떻게 되겠나. 당장 비난을 받았지. 하지만 대선배님의 명령을 어떻게 거역하겠나. 이런 직위가 싫지도 않았고...”
“저는 몽양 선생님이 추천해서 들어왔습니다.”
그제서야 오민균도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뭐 몽양 선생?” 그가 놀라더니 말했다. “여기저기 휩쓸리지 말라고 했지? 시절이 하수상할수록 지켜보는 거야. 승산이 있는 곳에 붙는 거야. 나는 창설되는 국방경비대사관학교 교관으로 배속될 거다. 오 생도가 군영을 수료하면 부를게. 그러니 여기저기 기웃거리지 말고 기다리라구. 알겠나?”
오민균은 자신을 살펴주는 선배가 있다는 것에 가슴 부풀어 올랐지만 몽양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이 의아스럽고, 조금은 불쾌했다.
“혼란기엔 자기 의사와 상관없이 패가 나뉜다. 그의 철학과 내면의 세계가 어떻고, 인생관이 어떻다는 것은 세력 싸움터에선 의미가 없어. 고려의 대상이 안되지. 결국은 자기 조직에 복속하게 돼. 이익을 따라 움직이는 거야. 깨어있는 사람이라도 자신의 이익에 부합된다고 생각하면 맞지 않아도 그에 소속돼 움직이게 돼있다구. 이런 때 줄을 잘못 서면 개짱나지.”
오민균이 듣고 있자 그가 더 힘주어 말했다.
“미군정은 사상의 자유를 허용한다고 했지. 그러나 말하는 사람들이나 듣는 사람들 모두 순진한 사람들이야. 그렇게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돼. 정책은 편의적으로 바뀌라고 있는 거야. 군에 사상의 문제나 정체성의 문제가 명료하지 않은 게 말이 되냐? 더 혼란스럽고 복잡하지. 군맥이 조성되고, 기강이 무너지고, 명령체계가 흔들리고...그 과정에서 누군가 다칠 수가 있다.”
벌써 군부 내는 사상별, 출신 지역별, 출신 군별(軍別)로 나뉘고, 같은 계열이라도 라이벌의식 때문에 서로 부딪쳤다. 성적이 우수하면 우수할수록 경쟁의식이 심했다.
“채병덕 대위와 이형근 대위의 충돌 사건 알고 있나?”
“그런 일도 있었나요”
“군번 1번을 가지고 두 사람이 으르렁거리고 있는 것 보면 참 우습기도 하고, 어린애 장난같기고 해서 한심해보이더군. 인간은 역시 속물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나봐. 지금이 어느 시국인데 그런 것 가지고 다투나. 헌데 그런 것들이 엄연한 현실이니 기가 막히지.”
이형근은 군사영어학교 수석 졸업이라는 성적으로 군번 1번을 달았다고 했지만 채병덕은 수석의 개념도 모호하고, 단지 군 편성을 주도한 미 고문관 이응준의 특혜 때문이라고 했다. 이형근은 이응준의 사위였다. 채병덕은 일본 육사 49기에 일본군 소령 출신이었다. 반면 이형근은 일본 육사 56기로 채병덕보다 7기 아래 기수인데다 일본군 대위 출신이었다. 군영 임관 뒤 군번 1번과 5번까지는 대위 계급장을 주었기 때문에 채병덕은 일본군 계급에서 한 계급 강등된 셈이고, 이형근은 일본군 계급장을 그대로 물려받은 셈이었다.
이형근은 “나는 일본 육군 3사단 야포병연대 중대장으로 상계작전 등 여러 실전에 참가했고, 영어도 능통하다. 반면에 채병덕은 병기 창고에 근무하며 소총탄의 세례 한번 받지 못한 사람이야. 영어는 까막눈이고. 선배면 다 선배냐?”라고 무시했다. 채병덕은 “군영에서 졸업시험을 본 것도 아니고 추천만으로 당일 임관한 장교도 있고, 서류상으로 함께 졸업한 경우도 있어서 수석 졸업이란 개념도 모호한데 수석졸업이라니 혼자 웃기는군” 하며 구군(舊軍) 경력과 계급을 참고로 군번을 주는 것이 관례라면 “내가 당연히 그보다 상위 군번을 받아야지” 하고 목소리를 높였다.
당초 구 계급 경력으로 임관시킨다는 계획은 각 군 출신을 고려할 때, 합당한 계급 부여가 되지 못했다. 각 군 편제상 계급과 군 조직 체계가 달랐기 때문이다. 거기에 초기 입교를 거부하다가 뒤늦게 참여한 광복군 출신은 특례조치로 영관급 계급장을 주어 주로 군 지휘부에 입성했다. 그러나 나이가 연만한데다 신군사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이 많아서 정예군이라고 자부하는 일본군계가 따르지 않고 무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같이 중국에서 활동했다 해도 항일 연군 계열이 있고, 반대로 이들을 때려잡는 일본군계, 만주군계가 있었다. 또 같은 만주 관동군 출신이라도 파가 갈렸다. 백선진 정일권 김창동 최남근 박정희가 모두 만주 관동군 출신이지만, 최남근 박정희는 민족진영에서 움직였다. 군맥은 인과 관계로 형성되고, 형성된 다음에는 서로 대치했웠다(사사키의‘한국전 비사-건군과 시련’ 일부 참조).
창설된 군영은 일본군 장교 훈련교본을 교재로 선택했다. 제복도 일본군이 버리고 간 낡은 군복을 입었다. 군영을 이어받아 창설된 경비대사관학교도 마찬가지였다. 맞지 않는 일본군복과 군모를 눌러쓰고, 목총을 메고 뛰면 말 그대로 일본군 패잔병 그대로였다.
그들 중 상당수는 여러 사설 군사단체와 연결되어 있었고, 정치단체와도 선을 대고 있었다. 정치 단체들은 △미국파=이승만 조병옥 이기붕 허정 △상해 임정파=김구 김규식 이범석 이시영 신익희 △국내민족파=조만식 송진우 김성수 장덕수 장택상 김준연 △국내 중도(좌)파=여운형 안재홍 홍명희 조봉암 △연안파=김두봉 최창익 무정 허정숙 △소련파=김일성 최용건 남일 김책 김광협 △공산계 장안파=이영 정백 최익한 이승엽 △공산계 재건파(화요회)=박헌영 이관술 김삼룡 이주하 △ML(마르크스레닌)파=이정윤 신용우 박용선 △기타=박열 김원봉 계열로 나뉘었다. 젊은이들은 이 파벌에 얽혀 세가 나뉘었다.(출처:조지훈저 한국민족운동사)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과가 이들 정치단체와 군사단체를 더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다. 지도자들은 상황을 이끌어갈 로드맵이 없이 이해에만 매몰되어서 다툰다. 꼭 급류에 휩쓸려 떠내려가는 조각배 같아. 비전없이 충돌해. 다시 당부하지만 이런 때, 주변 관리를 잘해야 한다.”
장창혁은 거듭 강조하고 짧게 영어로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You are responsible for your own action, OK?(당신 행동은 당신이 책임져야 한다, 알았나?)"
이응준은 1946년 1월 5일부터 미군정청 204호실 군정고문관실로 출근했다. 그는 곧바로 국군의 모체인 조선국방경비대를 창설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군사국 차장인 아고 대령은 군의 주둔 위치와 편성, 병력 장비와 모병, 군사 교육 커리큘럼에 관해 이응준의 자문을 받았는데, 어느날부터는 행정 실무 전부를 맡겼다. 이응준은 나이답지 않게 신속하고 완전하게 업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일본 군대에서 군대 편성을 해본 경험자다운 실력이었다.
“군벌이나 사적인 군사조직을 만드는 것만 경계하면 됩니다.”
“사상의 문제가 조직을 흐트릴 수 있습니다.”
“우려할 바가 아닙니다. 미국의 민주주의는 나치즘만 빼면 모두 허용합니다. 그것이 민주주의의 본질적 가치지요. 말하자면 어떤 이념도 용광로에 넣어 녹여낸다는 사상적 똘레랑스(관용)하는 것입니다.”
이응준은 아고의 방침을 마음 속으로 우려했다. 이념이 혼재된 상황에선 군의 질서를 도모하기엔 한계가 있다. 군대에서는 그런 설정이 이상론에 머물 수 있다. 아닌게 아니라 여기저기서 대결이 터져나왔다. 미군정 내부에도 강온파가 있고, 군 출신에 따라 의견이 달라 정책 또한 왔다갔다 했다.
아고는 레오나도 버치 중위에게 군 편제 구성 임무를 맡겼다. 버치는 하바드대학 출신으로 하지 장군의 정치담당 부관이었다. 계급은 중위였지만 그의 직무상 통제 범위는 넓고 영향력도 컸다. 버치는 좌우를 아우른 정치 지형을 고려해 좌우가 공존하는 군을 편성했다. 한국 정치현실과 맞물리는 방식이었다. 아고의 정치적 지향과 같았다.

아고는 어느날 이쾌대, 김천산, 이정길을 종로통의 카페 보헤미안으로 불러냈다. 모처럼 술 한잔 하면서 한국 상황을 탐색해보기로 한 것이다. 그는 한국의 군 계보가 도대체 미스터리였다. 어디서부터 뿌리가 연원하고, 어디서부터 군인이라고 해야 할지 설정이 모호했다. 활동의 방향과 목표도 불분명한 가운데 군사단체는 난립하고 있었다. 그런 반면에 경찰은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움직였다.
“공주 출신 중에 아는 사람 있나?”
아고가 갑자기 묻자 김천산이 대답했다.
“내 외가가 공주요. 왜 그러십니까.”
“그러면 조지 윌리암스란 사람을 알고 있나?”
김천산이 멀뚱히 그를 바라보았다. 알 수 없는 사람이었다. 더군다나 외국인을 알 리가 만무했다. 그는 해방 이전 만주에서 주로 살았다.
“조지 윌리암스는 공주에 영명학교를 설립한 프랭크 윌리암스 선교사의 아들이지. 조지는 그곳에서 태어나 열일곱살 때까지 살았는데 한국어에 능통하오. 한국정치를 알려면 그 정도 휴민트가 있어야 하지 않겠나? 당신들의 한계가 그거야.”
“그것이 그렇게 중요합니까?”
“그렇지. 그는 미군사령부에서 중요한 포지션을 차지하고 있지. 그런 사람과 인맥을 갖는 것이 중요해. 그는 ‘해방된 조선에서 중립이란 불가능하며 좌파와 우파 중 양자택일의 길이 최선의 방향이다. 소련이 북을 지휘하고 있는 상황에서는 좌우파 모두 포용할 수 없다’고 말하고 있지. 그것이 맥아더의 정치철학이기도 해.”
윌리암스는 하지 장군의 통역관이며 한국인 기용과 배치의 인사정책을 수행하는 실무자 중 주요 멤버였다. 태평양전쟁이 막바지에 이를 무렵 미24군단이 한국 상륙을 준비할 때, 24군단은 한국어에 능통한 장교를 찾았다. 이때 발탁된 장교가 조지 윌리암스였다.
그는 하지를 수행해 서울에 입성한 뒤 한국말의 위력을 유감없이 발휘하면서 권한 행사의 위력도 발휘했다. 한국에 대해 무지한 미군에게 그에 의한 인재 등용은 거칠 것이 없었다. 그는 치안유지 관련 인사에 중요 역할을 수행했는데, 이때 공주 영명학교 출신을 대폭 기용했다. 조병옥(2회) 정한범(7회) 이묘묵(영명학교 교목) 등이었다. 조병옥은 미군정 시기 챔프니-아고에 이어 경무국장-경무부장으로 한국 경찰의 최고위 직책을 맡았다.
조병옥은 미군정의 권한을 위임받아 경찰권을 쥔 뒤 경험많은 경찰 출신들을 전면 배치해 진용을 갖췄다. 경험많은 경찰은 두 말할 것없이 일제 경찰 출신들이었다. 그들의 치안 유지 기본 방침은 사상범 색출이었다. 그들의 입장에서 해방의 혼란기에 사상범은 골치 아픈 병균 덩어리였다. 일제 강점기부터 활동한 주요 역할인데, 그것으로 치안을 유지하고 반대파를 제거하는 수단이 되었다.
그 병균 덩어리가 군부에 침투해 있었다. 아고의 군부 운영 방침에 따른 영향이지만, 경찰에 대한 반감을 가지고 들어온 청년들도 적지 않았다. 민족 중심의 새 나라를 건설해야 하는데, 친일파 중심으로 구성되었다는 것이 젊은 군인장교들의 불만이었다.
하지의 정치장교 레오나드 버치는 아고와 같은 이념적 성향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윌리암스와는 다른 길을 걸었다. 버치는 아고와 함께 여운형이 이끄는 건국준비위원회 치안대장 장권을 경무국장 후보로 하지에게 추천했다. 그러나 하지는 윌리암스가 내세운 조병옥 안을 받아들였다.
하지는 몽양에 대해 좋은 인상을 갖고 있지 않았다. 그가 이승만, 김구, 김규식 등 한국의 지도층 10여명을 미고문단으로 위촉해 초치했을 때, 유일하게 거부했던 사람이었다. 몽양의 거부 이유는 이랬다.
“내가 건준-인공을 세웠으니 귀하가 나의 고문이 되어야 하는데, 내가 어찌 귀하의 고문이 된단 말인가. 앞뒤가 맞지 않으니 불참하겠소.”
권력의 현실적 실체는 미군정이었으니 그의 이런 발언은 오판이었다. 유연한 그가 이런 기회를 놓칠 리 없는데, 상황은 그가 들어올 수 없도록 불리하게 전개된 측면도 있었다. 이를 윌리암스와 우파들이 역으로 이용했다. 정책은 합리적 근거에서보다 개인의 감정적 차원에서 결정되는 경우가 많다. 몽양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상급자의 멘탈리티를 부하들은 활용하는 것이다. 이를 기화로 그를 도외시하는 명분을 쌓고, 대신 반대 진영의 인사를 대폭 기용한다. 반대 진영과 밀접하게 선이 닿아있는 입장에서는 고소원불감청(固所願不敢請)이었다.
반면에 아고와 버치는 몽양의 그릇을 알고 있었다. 이해가 엇갈린 정치집단 사이에서 폭넓게 이견을 수용하면서 정치철학을 펼쳐나가는 태도는 조선 민중을 끌어갈 지도자로서 자질이 충분하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를 지도자로 옹립하려는 계획을 추진했던 것이고, 그 정지 작업의 일환으로 치안책임자로 그의 측근인 장권이라는 인물을 천거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 안이 한 순간에 묵살되었다.
-태평양 전쟁 때 미국을 격렬히 공격하면서 일본에 협력한 사람들, 이제는 태도를 바꿔 진심으로 미국인에게 협력하고 있다. 아마도 때가 되면 소련인과도 진심으로 협력할 것이다. 이런 자들이 힘을 쓰고 있는 현실이다.
버치는 변신의 명수는 언제든지 이익을 따라 또 변신할 것이라고 내다보았다. 버치는 이렇게 한국의 우파를 의심했으며, 사대주의 집단이라고 신뢰하지 않았다. 그런데 현실은 반대방향으로 가고 있었다. 몽양이 기회주의자, 회색분자로 몰리고, 우파는 애국 세력으로 우뚝 섰다.
자본과 경찰, 관료라는 거대한 조직을 확보한 우파는 정적들을 사상불온자로 낙인을 찍어서 공격하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일제 강점기, 일제에 대항해 피흘려 싸운 노고가 완전히 무시되었다.
반대파는 어떤 누구도 반역이 되었다. 일본 제국주의에 저항한 자는 사상을 의심받는 자로 규정되었기 때문에 그 관성으로 그들 사냥에 나섰다. 하지 중장은 이런 작전을 하나의 전과로 인정했다.
그는 전형적인 직업군인이었으며, 정치는 백치 수준이었다. 치안유지를 위해선 어떤 조직이라도 말 잘 듣는 사람이면 되었다. 그 나라의 전통적 가치, 역사적 맥락, 시민적 지향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다. 직업군인다운 풍모로 복잡하게 생각할 것없이 제압하고 관리하면 되는 것이었다. 그 핵심 참모가 조지 윌리암스 부관이었다. 한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그의 역할은 이런 단순명쾌한 정책결정에 큰 힘이 되었다. 일본과 비슷한 정책 판단이어서 신뢰가 더 갔다.
윌리암스가 특별히 공산주의자들을 경계할 이유는 없었지만, 굳이 따진다면 선교사 자식으로서 공산당을 배격하는 종교적 신념 때문이었다. 북한에선 기독교 신자를 탄압해 이들의 대대적인 엑소더스가 진행되고 있었는데, 이것도 그에게 자극을 주었다.

어느날 아고 대령은 버치 중위에게 돌아가는 국내 상황을 물었다.
“버치 고문관, 사태가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지 않소? 몽양이 분명하게 배제되고 있소.”
“나도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나는 몽양이 남을 비방하는 것을 보지 못했소. 좌파 우파 누구로부터도 비난을 받지만, 그는 어떤 누구도 원망하거나 비난하지 않아요. 자신이 부끄럽다고 여기고, 자기 이름을 떨치기 위해 위세를 부리지 않소. 헌신적으로 나서면서 영광과 명예는 남에게 돌리오.”
“그런 사람이 몰리기만 하니 안타깝습니다. 그는 테러와 암살의 위협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그것 때문에 행동의 제약을 받고 있지요. 정적들이 그의 행동을 묶어두기 위해 그런 짓을 하는 것 같습니다. 좌우파 가릴 것이 없어요. 그리고 그의 한계도 있는데, 그는 결정적인 순간에 회군해버리는 낭만주의자입니다. 싸우려 하지 않아요. 그게 아쉽습니다.”
“당차지 못하단 말인가? 그러니까 정치적 시중잡배들과는 다른 것 같소.”
“그런 가운데서도 그는 강고한 유교적 멘탈리티에 젖어 있어요. 그게 사태를 그르치고 있습니다.”
“무슨 뜻이오?”
“하지 사령관을 만나야 하는데 회담 자체를 보이콧했습니다. 그답지 않은 태도입니다. 전략과 전술의 미스가 보입니다.”
“그것은 몽양만의 태도가 아니오. 조선지도자들이 모두 그런 품성을 갖고 있지 않소?”
“그렇더라도 몽양만은 달라야지요.”아고 대령과 버치 중위는 좌우 합작 적임자로 몽양과 김규식을 지목하고 작업을 수행했다. 그러나 강경파에 밀리고 있었다. 강경파는 실권을 쥐고 있는 윌리암스-조병옥 라인이었다. 이들은 새 정치세력과의 제휴를 모색하고 있었는데, 그중 이승만의 독립촉성국민회(독촉)와 접선하고 있었다. 이승만은 미국파인데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다. 조병옥 역시 미국 유학파인데다 기독교도였다.

“친구들, 오늘 즐겁게 취해보자.”
아고는 한국인 친구들을 불러모았다. 그들의 사심없는 얘기를 듣고 싶었다.
“좋은 일 있습니까?”
“좋지 않은 일이 있을 때도 술을 마시지.”
아고가 웨이터를 불러 위스키와 맥주를 주문했다. 그가 맥주잔에 위스키를 따른 뒤 잔에 얼음을 가득 채워넣었다.
“조선인들의 취향은 원샷의 스킬이 있어서 언더 락을 깨작거리면서 마시는 것으로 알더군.”
“그렇지요. 만주벌판에서 오십도의 빼갈도 냉수처럼 벌컥벌컥 마셨댔지요.”
김천산이 맞장구쳤다. 그는 어느새 아고의 친구가 되어 있었다. 김천산이 뭔가 느끼는 게 있어서 정색을 했다.
“무슨 일이 있지요?”
“오늘이 소중한 시간이 될지 모르겠소.”
그러면서 아고가 뚱딴지같이 물었다.
“김천산 동지, 늘 의문스러운 것이 있는데, 조선은 왜 그리 군사단체가 난립하오?”
아고는 군영 창설과 국방경비대 창설을 계기로 군 계보를 파악했는데 난마처럼 얽혀있는 제 군사단체들을 보고 먼저 놀랐던 것이다. 그것은 그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대목이었다.
해방과 함께 국내에 들어온 군사조직은 △일본군계 △만주군계△중국군계로 나뉘었다. 일본군계는 정규 육사와 학병·지원병, 봉천·신경군관학교 출신으로 구분되었다. 중국계는 청산리대첩의 김좌진, 조선혁명군의 양세봉, 동북 항일연군의 양정우, 조선의용대의 김원봉과 무정, 조선민족혁명당의 김두봉, 항일유격대 및 빨치산 활동을 한 김일성 최용건과 그 휘하 군맥이다.
군사단체들은 이렇게 여러 갈래의 군 출신 성분에 따라 이합집산하는 모습을 보였는데, 이중 딱 부러진 주도 세력이 없었다. 누군가 주체가 되어 각 파벌을 통합해 통일된 목소리를 내면 최소한 그들이 원하는 독립국가 건설의 한 축을 맡을 수도 있었을 것인데, 그게 아니다.
미군사령부가 부인하더라도 힘있게 대오를 갖춰 발언권을 행사하면 뜻을 반영할 토대가 마련된다. 여론을 중시하는 미군은 합리적 주장까지 외면하진 않는다. 현지주의에 입각한 민족적 지향점을 염두에 두지 않은 미군정의 전후 처리 과정에 문제 제기를 하고, 원하는 대안을 제시하면 되는 것이다. 관철 여부와 상관없이 그렇게 주장하고 나서는 것이 순서다.
몽양도 마찬가지다. 소수자로 전락해버린 뒤 힘이 현저하게 약화되었다. 국내 지도자들이 사분오열되어 그를 끌어내리는 사이, 조선총독부는 어느새 다시 지배국가 권한을 행사했다.
건국 기구인 건준이 존재하는데도 건준을 부정하며 한국사회를 분열시키고, 찬반탁 싸움에 올라타 내부를 찢고, 조선은행권도 마구 찍어내 자고 나면 물가가 배로 뛰는 경제 혼란까지 초래했다. 따지고 보면 모두 조선의 지도자들이 자행한 일이었다.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가리지 않고 다투다 보니 정작 가져야 할 소중한 것들을 잃어버리고 있었다.
아고가 말했다.
“우리는 일본의 항복 시기를 1947년 경으로 잡았소. 그때까지 인명 피해가 100만명에서 200만명이 나올 것으로 예상했지. 이런 인명 피해를 최소한으로 줄이기 위해 원자폭탄을 준비하고, 소련군의 참전을 독려했던 것이오. 그 사이 여러분은 독립전쟁을 치렀는데 우리에겐 크레 노출되지 않았소. 우리와의 직선, 계선(界線), 축선(軸線) 확보를 방기한 탓이오.”
당시 미 육군성은 일본 관동군의 전력 약화를 보고 소련군의 참전을 견인하지 않아도 무방하다는 보고서를 백악관에 올렸지만, 루즈벨트 대통령은 확실한 승리를 담보하기 위해 소련군의 참전을 독려했다. 일본 관동군의 전력을 여전히 과대평가한 나머지 취한 행동이었지만, 유럽에서와 마찬가지로 소련과의 연합작전에 방점을 둔 태도이기도 했다.
그에 앞서 소련은 일본과 맺은 불가침조약 체결 때, 조선의 39도선 이북의 노획을 논의했다. 식민지 대만이 미군에 접수되고, 조선마저 미국에 빼앗길 위기에 놓이자 일본은 소련의 요구에 응하겠다는 비밀 옵션을 제시했다는 설도 있다.
소련은 태평양진출을 위해서는 부동항의 확보가 긴요했고, 그래서 1800년대 말 이런 협상을 진행한 바도 있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양다리를 걸친 소련만 실리를 추구한 셈이다. 그래서 영국의 한 언론은 ‘미국은 이기기 위해 싸우고, 소련은 전쟁 후를 생각해 싸운다’고 보도했다.
김천산이 생각한 뒤 말했다.
“소련군은 만주 작전을 위해서 화력을 집중한 반면에 한반도에 진격할 계획은 없었다고 봅니다. 그런데 미국의 집요한 참전 종용을 받고 강제수용소에 수감중인 죄수와 잡범들까지 끌어내 군단을 긴급 편성해 남진 명령을 내렸습니다. 미군은 앞뒤 재지 않고 소련군을 불러들였던 셈이죠. 그 후과를 고려하지 않았습니까?”
일본군의 막강 관동군은 이미 태평양전선으로 주요 전력을 빼돌렸기 때문에 진공 상태였고, 소련군이 이때 만주 작전에 투입되었다. 소련군은 한반도까지 계속 남하할 정도의 병력 소요를 갖추지 못했으나 일본군이 지리멸렬했기 때문에 의외로 진격이 쉬웠고, 마음만 먹으면 부산까지 진격할 수 있었다.
그 무렵 오키나와에 진주했던 미군은 한반도로 진격하는 것보다 일본의 규슈가 목표였고, 한반도에 상륙한다고 하더라도 병력 수송과 병참선 구축이 2개월 이상 소요되는 상황이어서 일본군을 패망시키는 데는 소련군의 힘이 무엇보다 크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미국은 한반도 38도선에서 미·소 양군이 일본군을 무장해제 시키자고 제안했다. 소련은 이의없이 이를 받아들였다. 이렇게 해서 식민지 치하에서 숨죽이며 신음하던 한반도 국민과 영토는 편의상 인위적으로 두 동강이가 났다.
김천산이 말하는 ‘후과’는 그 점을 지적하고 있었다. 역사적 맥락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해도 이것은 세계사에서도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기이한 분할선이다. 민족공동체적 이해와 단일민족이라는 현실을 고려하지 않은 분할은 고스란히 해당 국민에게 희생을 강요하고, 내전 상황을 키워가는 불행의 불씨를 안겨준 것이다.
“문제 해결의 단초는 조선 지도자들의 손에 달려 있소. 약소국을 도와줄 선한 강대국은 세상에 없소. 남에게 의존할 상황도 아니고, 의존해서도 안되오. 우리 연합군이 현지의 역사, 문화, 전통을 다 알아야 할 의무는 없으니까, 그래서 자국 지도자들의 진정성이 담긴 건설적 설득과 협상력이 절실히 요구되는 거요. 분단선은 2차대전 종식을 위해 편의상 미국에 의해 그어졌지만 해결해줄 의무까지는 없소. 그런데 여러분은 영구 분단으로 가는 구조를 즐기는 것 같소. 좋은 것도 나쁜 방향으로 몰아가요. 분단이 꼭 미국의 책임이란 거요?”
이정길이 나섰다.
“그렇습니다. 미국의 힘으로 우리가 독립했지만, 서로 싸우라고 선을 그어준 셈입니다. 그 사이 일본은 털끝 하나 다치지 않고 물러가고, 일본 제국이 모국인 줄 알았던 숨죽이던 국내 세력들이 재빨리 미국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기회를 엿보고 있습니다.”
“정말 조선엔 쥐새끼 같은 자들이 많다는 것인가?”
치욕적인 말이었다. 그러나 틀린 말은 아니라고 생각되었다.
“각하가 뭐라고 하든 미국은 미국대로의 책임이 있습니다. 역사 퇴행과 역사 반동이 분단 하에서 구조화될 수밖에 없는 우를 미국이 범하고 있습니다. 친일 부역세력이 건국의 주도세력으로 둔갑하는 역사의 역설을 미국이 제공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이 더 미국인 행세를 하고 있습니다. 조선의 지도자들 중 상당수는 그런 사대주의에 익숙해있고, 그것으로 밥먹는 동력으로 삼아왔어요. 그리고 미국을 등에 업고 군림하고 있습니다. 자, 보십시오. 우리는 식민지 시대가 길었습니다. 그러는 과정에서 머리 회전이 빠른 지도자들은 변절했습니다. 그들은 상황논리를 전개합니다. 불가피했으며, 어쩔 수 없었다고 말합니다. 배운 사람답게 고상하고 현란한 수사법으로 자신의 상황을 합리화ᐧ정당화하죠. 그중 어떤 사람은 조국이 이렇게 빨리 해방될 줄 몰랐다고까지 합니다. 이렇게 해방될 줄 알았다면 무너지지 않고 버티는 건데 하고 후회합니다. 그런 변명과 합리화의 기회를 미국이 제공한 것입니다.”
“우리가 여러분의 역사와 전통, 국민정서까지 세세하게 파악할 수 없는 일 아닌가. 우리가 여러분의 지저분한 콧물까지 닦아주어야 하나?”
“귀국의 전쟁승리 이유가 뭐요? 약소국을 해방한 전승국이라면 새 동맹국의 역사와 전통과 정신을 공유해야지요. 승자라고 해서 무책임하게 편의상이란 말을 함부로 사용해도 됩니까. 편의상 그은 분단선이 조선 민중에게 돌이킬 수 없는 고통을 주고, 내전 상황으로 몰고 가고 있다는 걸 알아주시오. 일제식민지 통치가 가혹했기 때문에 우리 스스로 준비할 토양을 마련하지 못한 현실도 이해해야죠.”
아고가 이정길의 말을 가로막았다.
“민주주의는 비용이 들지만 혼란까지 수용하지는 않소. 서로를 증오하는 문서가 도심에 대대적으로 뿌려지고 테러와 납치가 빈번하고, 살인까지 벌어지고 있소. 나는 만주벌판에서, 시베리아 광야에서 항일투쟁을 한 당신들의 투쟁역사를 보고 감동했소. 하지만 그 결과물이 고작 이것인가? 그 많은 군대들이 들어와 있는데, 도대체 뭐하자는 거요? 그렇게 싸웠는데도 지금 무엇을 남겼소? 그렇게 좁은 세계관으로 무엇을 하자는 시튜에이션이오?”
아고와 버치는 몇주 후 타부대로 전속되었다. 그들의 역할이 현저히 줄더니 본국 송환 명령이 떨어진 것이다.

오민균은 소위로 임관하자 청주시 사천면 개설리에 창설된 청주 7연대로 보병장교로 배속되었다. 당초 그는 경비대사관학교 교관으로 갈 예정이었으나 고향에 연대가 창설된다는 소식을 듣고 자원했다. 고향에서 부모형제와 함께 지내면서 잠시 머리를 식히고 싶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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