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후 왜곡된 역사 속에서, 지금까지의 한일 관계는 효용을 다했다. 그러나 예고된 갈등이었다. 일본은 구한말과 일제강점기 35년, 8.15 광복과 분단체제, 그 이후 70년의 강고한 구 체제 시스템 속에서 우리 내부 깊숙이 침투해 들어와 알게 모르게 생활의 일부가 되었다. 그 안에 우리 내부의 모순과 고뇌가 응축되어 있다. 이 모순과 고뇌를 탐구하려면 어떤 방법이 있을까.
한 개인사를 통해 시대와 사회를 비추는 거울 역할을 하는 것이 문학의 영역일 것이다. 그동안 우리는 외세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생존이 우선이었던 관계로 자기 자신을 앞세우지 못했다. 우리는 너무 쉽게 잊어버렸고 안일했다. 그러다보니 역사는 박물관에 소장된 문화재인 양 화석화되고, 현대의 역사는 더군다나 묻혔다.
기자 출신 이계홍 작가의 실록소설 '행군-어느 민족주의자를 위한 변명'은 그런 배경에서 나왔다. 이 소설은 2016년 10월호부터 2019년 6월호까지 문예월간 '월간문학'에 연재되었던 소설이다. 월간문학 연재를 마친 뒤 많은 부분을 수정 보완해 프레시안에 재수록한다.
이 연재물은 이른바 '팩션(Faction)'이다. 팩트와 픽션의 사이 어디에서 역사적 사실에 상상력을 덧붙인 '논픽션' 형식의 소설이다. 필자는 취재의 일환으로 일제강점기 말 일본 육사 출신 젊은 생도들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어지러운 시대, 그 안에서 제국주의 광풍에 휘말린 젊은이들의 시각을 잡아내려 했다. 이계홍은 "일본의 극우 정권이 일제강점기의 역사적 사실들까지도 왜곡하는 역사 모독에 대해 하나의 담론시장을 형성하자는 데 목적이 있다"고 했다. '행군-어느 민족주의자를 위한 변명'은 총 33회로 나뉘어 연재될 예정이다.(편집자)
12장, 통합적 리더십은 없는가
“선생님, 두통은 괜찮습니까.”
평남도청 사무실을 본부로 쓰고 있는 소련민정군사령부를 나오자 현준혁은 인근 다방으로 고당 조만식을 안내했다. 검정 두루마기에 흰 고무신을 신은 단아한 체구의 고당 조만식은 머리를 수건으로 질끈 동여매고 있었다. 그런 몸으로 로마넨코 소련민정군사령관을 만났다.
로마넨코 소장을 만나고 나온 뒤 그의 두통은 더욱 심해진 것 같았다. 계속 두 손으로 머리를 싸쥐고 있는 것으로 보아 발찌가 심하고, 그래서 오늘따라 모습이 추레해보였다. 그것은 그만큼 중요한 회담에 신경을 곧추세웠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고당은 서울의 몽양으로부터 연락을 받자 해방 이틀 후인 8월 17일 평양에 조선건국준비평남위원회(평남건준)를 조직하여 위원장으로 추대되었다. 18일엔 평남도청사에서 있었던 일본군 항복조인식에 북한 인민대표로 참석했다. 26일엔 평양 건준과 현준혁의 조선공산당이 합작해 평남건준을 발전적 해체하고 조선인민정치위원회를 결성했다. 좌우익 합작이었다.
치달리는 기차처럼 숨가쁘게 달려와 조직을 구성하기까지 고당의 협력과 현준혁의 적극적인 추진력이 있었다.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가 한 덩어리가 되어 정치결사체를 만든다는 것은 분열이 고질화되어있는 이 땅의 정치풍토에서 보기 드문 일이었다.
현준혁이 유연하게 각 공산당 정파를 아우르고 고당에게 합류한 것이 큰 힘이 되었다. 현준혁은 박헌영과 같이 국내파 공산주의자였지만 비타협적 모험주의가 아니라 포용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 그렇게 해서 민족주의 진영의 고당과 협상을 통해 좌우합작을 성공적으로 이뤄낸 것이다.
현준혁은 사회진보적 지식인층은 물론 민족주의자들에게도 신망이 두터웠다. 북한지역에서는 소련군 정치사령부가 후일 지원하는 김일성보다 유력한 미래의 지도자로 그를 지목했다. 고당은 이런 현준혁을 인정하고 건준과 인민정치위원회까지 부위원장으로 역할하도록 그에게 임무를 부여했다. 여기엔 몽양의 암묵적 지원도 작용했다.
그들 세 사람은 젊었을 적, 조국 독립을 위해 함께 힘을 모았다. 몽양은 현준혁이 대구사범학교 교사로 재직할 때부터 교류가 있었고, 고당과는 도산 안창호와 함께 YMCA를 중심으로 기독교 정신의 실천 운동을 폈다.
“로마넨코를 믿을 수 없단 말이야.”
고당이 상을 찌푸리며 탁자에 놓인 커피잔을 들어 한모금 마셨다. 두 사람은 인민정치위원회 위원장단 자격으로 소련민정군사령부를 방문해 로마넨코 소장에게 주민의 불만을 여과없이 전달했다.
“인민의 안녕과 질서를 지켜주어야 하는데 소련군이 무도한 짓을 저지르고 있소. 인민들은 일본군 못지 않게 악독한 짓을 한다고 원성이 높소. 재산을 약탈하거나 강간범죄를 저지르고 있소. 항의하는 주민의 가족을 살해하고 있다고 하오. 주민들이 자경단을 조직해 재산과 가족을 지키고 있는데, 각목 뿐인 그들이 어떻게 총칼로 무장한 소련군을 이기겠소?”
로마넨코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당의 얘기를 듣고 있었고, 고려인 출신 부관이 뒷자리에 앉아서 코를 박고 그들의 대화를 세세히 기록하고 있었다.
로마넨코는 고당의 고집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하부에선 불만을 토로하는 장교들이 적지 않았다. 소련군 진주 직후부터 소련군 병사들의 범죄행위에 대해 지속적으로 짚고 나온 것은 소련군 장교들을 자극하고도 남았다. 행정적인 측면에서도 식민지 시대의 소작제를 개선하기 위한 조치에 고당은 비협조적이었다. 그는 자산 계층의 이해관계를 일정 부분 대변했다. 그는 공산당이 주장하는 개혁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북한은 1946년 3월 ‘무상몰수·무상분배’라는 급진적인 방식으로 토지개혁 완료).
그러나 소련군은 그를 붙들어 두어야 할 입장이었다. 신망을 받고 있는 그를 내치기는 여론상 적절하지 못하고, 한동안 정치적 자산으로 활용해야 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었다.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은 1945년 8월 말 배치를 완료했다. 이때 소련군 총 수는 밝혀지지 않았으나 미국 정부는 4만명 가량으로 추산했다. 소련군이 진주한 도, 시, 군 단위마다 경무사령부가 설치되었는데, 그것은 소련 연해주군관구 군사회의의 명령에 따른 것이었다.
경무사령부는 일본군의 무장해제, 무기와 재산의 몰수와 잔여 병참 보존, 일본군과 일본인 퇴거 임무를 수행하면서, 치안 유지 명목으로 지역민의 성분조사를 수행했다. 사회질서 확립, 주민의 경제 및 문화생활의 정상화, 소련군에 필요한 식량, 생활필수품, 연료확보 등의 임무를 병행했다. 이러는 과정에서 주민간의 마찰이 잦았다.
북한에 진주했지만 소련군은 구체적인 대북한 정책이 준비되어있지 않았다. 무정부 상태를 방치할 수 없어서 각지방마다 민간인 중심으로 자치기구가 등장했다. 이 기구를 이끈 지도자들은 전통적 공동체를 이끈 각 고을의 존경받는 유림 출신 민족주의자들이었다.
그러나 소련군이 각 도 단위로 민족주의자들과 공산주의자들이 동수로 행정기관을 구성하도록 지시했다. 그러나 운영계획과 이념의 차이로 충돌이 잦았다. 이는 소련군이 민족주의자를 배제할 명분을 축적해가는 계기이기도 했다. 그들은 어느 일면 충돌을 부추기고 있었다.
같은 공산주의자들 사이에서도 그들끼리 주도권 경쟁으로 내분이 격화되었다. 어딜 가나 조선 사람들은 모이면 분열하고 대립하는 양상이었다. 결국은 어떤 누구에게도 먹히는 단초를 제공하는 우를 범하고 있었다(孫世一의 ‘한국 민족주의의 두 類型’ 중 일부 인용).
“소련 병사들이 저지른 비행은 유감입니다. 진주 초기라서 혼란스러운 처지인지라 일어나는 불미스런 일인데, 점차 나아질 것입니다. 사태 파악 중에 있으니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그런 일은 단연코 없애도록 하겠습니다.”
로마넨코 소장은 노련한 정치장교였다. 고당의 비위를 거스를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는 소련군 극동군구야전군사령부 정치부장을 지내며, 극동에서 주로 군생활을 해와서 동양 정서와 동양인에 대한 이해도가 높은 사람이었다. 극동군구 제1적기군야전군 군사위원으로 복무하면서는 정치공작을 통한 정치 선동 선무활동에 능력을 보여준 장성이었다. 평양 주둔 제25군구사령부 치스차코프 대장 휘하에서 민정부를 설치해 민정군사령관직을 수행하고 있는 것도 그런 노련한 정치적 수완 때문이었다.
로마넨코의 좌우 연정 방침에서 보듯, 초기에는 김일성을 전면에 내세워 북한을 소비에트화하는 데 초점을 두지는 않았다. 순수하게 민족 통일정부를 수립하도록 하는 최대 강령과, 그것이 여의치 않으면 북한만이라도 소련에 우호적인 정부를 수립하도록 하는 최소 강령의 두 가지를 염두에 두고 민정 업무를 수행했다. 경제적으로 공산주의 이념에 맞게 토지개혁을 실시해 농민에게 무상으로 분배하고, 주요 산업을 국유화하며, 이를 위해 북조선 인민정치위원회를 행정 조직으로 전환해 나가고 있었다.
로마넨코가 차분하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고당 위원장 동무, 레닌 성명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레닌 동지는 ‘해방 지역에서는 공산주의 혁명을 추진할 것이 아니라 민족주의 운동에 주력해야 한다’고 말씀하시었습니다. 그 때문에 고당 위원장 동무를 모신 것입니다. 우리의 뜻을 헤아려 주십시오.”
“소비에트연방이 민족주의 운동에 주력한다는 이유가 뭐요?”
꼬장꼬장한 성격답게 고당이 캐묻자 로마넨코는 불통의 노인장, 왜 그래 쌌노? 하는 표정으로 그를 한동안 바라보았다. 로마넨코는 나름으로 해석하고 있었다. 소련 볼세비키와의 연대는 공산주의 혁명세력만이 전부가 아니다. 토착 민족주의 세력이 혁명의 성과를 올릴 수 있는 토대가 될 수 있고, 그래서 소비에트 연방은 그것을 뒷받침해준다. 민중은 공산주의 이론을 모르지만 민족주의는 전 민중에 가슴 속 깊이 침윤되어 있으며, 식민지를 겪은 나라일수록 그것은 하나의 이념처럼 절박하게 각인되어 있다. 그것은 필연적으로 반제국주의와 연결되기 때문에 반제와 약소민족의 보호라는 소련 공산주의 혁명정신과도 맥이 닿는다.
“황해도와 평안남북도에서 소련군의 약탈과 폭력, 부녀자 겁탈이 심하다고 합니다. 막아주시오. 단속하지 않으면 민란이 일어납니다. 한반도의 관서지방은 예부터 민란의 본거지올시다.”
초점을 흐리지 않으려 고당이 명토박듯 다시 강조했다.
“우리도 페드로프 중좌를 황해도와 평안남도 지역에 파견해 실태를 채집하고 있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나는 소련군의 포고문에 감동했소이다. 공산당 특유의 미사여구를 동원한 포고문이 아니겠지요? 그런 훌륭한 포고문이라면 좋소. 미문이 아니라도 주민이 편안하게 살 수만 있다면 인민은 지원하고 협력할 것입니다.”
빈틈없는 민족주의자 고당을 상대하기엔 로마넨코로서는 쉽다고 생각했다. 이런 사람들에게 체면을 세워주면 된다. 그들은 인민의 힘을 믿고 빡세게 나오지만 의외로 순진하다. 예의를 차리고 상대의 어떤 것도 진정성있게 경청하면 그것으로 반은 성공한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 주민이 한 사람이라도 다치면 안됩니다. 다치거나 사라질 경우 로마넨코 소장에게 책임을 물을 것이오이다.
“병사들이 전승의 희열에 잠깐 취해있다 보니 좀 과한 행동들을 보였는데 수습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사고 친 병사들은 이미 영창에 보냈습니다. 죄송스럽지만, 개인적 일탈이 어디나 있다는 것 알아주시고, 그런 일탈자는 소비에트군사령부가 가차없이 처벌하고 있으니 안심하고 돌아가십시오.”
고당은 다른 얘기를 하면 논점이 분산되고 희석될 수 있다고 보고 그 점 다시 강조했다.
“조선 여자들은 순결을 잃으면 칼을 입에 물고 자진한다는 점을 알아두시오. 두 번 다시 그런 일이 없도록 하시오.”
“명심하겠습니다. 재발하지 않도록 조치하겠습니다.”
그들은 그렇게 약속하고 헤어졌는데, 로마넨코는 곁에 있던 현준혁을 불쾌히 여기고 있었다. 공산당 대표라는 자가 소련군의 입장에 서있기보다 고당 편에 서서 소련군을 공격하는 자리에 나와있는 것이다. 로마넨코는 ‘저 자를 믿을 수 있나?’하는 의구심을 내내 떨치지 못했다. 여론을 반영해 현준혁도 정부 수반의 일역을 맡을 후보군으로 꼽았는데, 하는 행동이 도무지 마뜩치 않았다. 때리는 시어미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는 조선 속담이 그대로 생각나는 자였다.
현준혁은 반제, 반일의 성격이 공산주의 이념적 성향으로 비쳐졌을 뿐, 실상은 민족주의자였다. 그는 경성제대 법문학부를 졸업한 뒤 대구사범학교 교사로 재직했다. 재직시절인 1932년 학생들의 독서모임을 이끌며 학생들에게 독립 의식을 고취하다 4대 비밀 결사사건의 주범으로 체포돼 6년간 복역했다. 이때 그는 얼굴이 까무잡잡하고, 눈빛이 유독 빛나는 키 작은 학생을 만났다. 이름이 박정희라고 했다.
박정희는 대구사범 1학년생이었다. 당시는 시대적 울분을 토하는 창구로서 좌파 성향을 지닌 것이 지식인사회의 중심 사조였지만, 일제는 일본 제국주의를 반대한다는 이념으로 배척하고, 이를 철저히 단속했다. 그런데 박정희가 현준혁 교사에게 다가왔다.
박정희가 사회주의에 경도된 것은 현준혁의 대구사범독서회 사건의 영향이 컸다. 선배학생 27명이 현준혁 교사와 함께 구속되고 퇴학을 당하자 의분이 생겼다. 사회주의 서적을 탐독하고 나라의 독립을 꿈꾸었다고 해서 존경하는 선생님을 구속하고 선배 학생들을 체포하니 그로서는 납득할 수 없었다.
그는 잡혀가는 현준혁 교사를 교문 밖까지 뒤따라갔다. 현준혁은 그런 그를 놓쳐보지 않았다. 1학생 생도라 발언권은 없었지만 막상 체포돼가자 맨앞에서 그를 뒤따르며 두 주먹을 쥐었고, 실제로 독서 지도할 때도 열성을 보였다. 그런 것이 기특하고 대견했다.
박정희의 사회주의 경도는 가정환경적 요인, 시대적 배경, 개인적 성격이 작용했지만 존경하는 스승 때문에 더욱 흠뻑 빠져들었다. 불공평한 식민지 시대의 모순을 말해주는 스승이 있다는 것이 그로서는 가슴을 끓게 했다.
현준혁은 독서회를 통해 민족 독립과 사회주의 운동의 당위성을 설파한 것이 주효했다는 것을 박정희 생도를 통해 확인하고 끌려가면서도 만족했다.
현준혁은 학생들을 가르치는 한편으로 여운형ᐧ조만식ᐧ박상희와 비밀리에 조국의 해방과 독립에 대비했다. 이런 전력을 갖고 있는 현준혁을 소련 군정은 복잡미묘하게 보고 있었다. 우선 피아 구분이 분명치 않은 것이다.
-자존심 강한 토착사회주의자나 민족주의자는 소비에트혁명의 지원자가 아니라 방해물이 될 수 있다.
로마넨코는 민족주의 세력의 힘을 지원받으라는 레닌의 지시가 오류라고 생각했다.
“고당 선생님, 격무에 시달리다보니 두통이 심해집니다. 두통에는 국화차 구절초꽃차 꽃향유꽃차가 좋다고 합니다. 이 꽃들은 비타민 A와 B가 많이 함유되어 있어서 편두통 군집성두통 긴장성두통, 또는 원인모를 두통에 효험이 있다고 합니다. 모두 우리의 들판에서 채취할 수 있는 풀들이죠. 제 집에 이런 차들이 있으니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어찌 그리 현 선생은 아는 것이 많노.”
“대구사범 교사로 있을 때 붙들려가서 앓은 적이 있었지요. 노상 머리가 욱신거리고 띵하거나 조여오고, 피로와 수면부족, 스트레스, 몸의 긴장으로 머리가 지끈거렸습니다. 추운 곳에서 지내면 증상이 더 심했지요. 감옥에서 나온 뒤 어머니께서 한약방 어른으로부터 처방을 받아 야생화를 따와서 말려가지고 차를 달여주셨습니다. 그렇게 해서 두통을 잡았습니다. 지속되면 만성이 돼서 몸에 적신호가 오니 빨리 치료를 해야 합니다.”
“내 나이가 벌써 예순넷이오. 많이 살았소. 선조들에 비하면 많이 산 것이오.”
“아닙니다. 일제강점기 삼십육년은 저놈들 나이였으니 그 나이만큼은 더 사셔야 합니다.”
“어허, 그러면 백살이 넘게? 덕담으로 알겠소. 앞으로 현 선생같은 젊은이들이 큰 일 해야지.”
“저도 이제 사십입니다. 모두가 하나로 함께 힘을 모아야지요. 어쨌든 제게 구절초 차와 국화 차가 있으니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주변에 흔히 보는 산야초들이 사실은 좋은 약재입니다. 흔하니 업신여기고 있지만요.”
“흔하니 업신여긴다....그렇게 백성을 업신여기니 그 자신도 업신여김을 당하지.”
고당이 음미하듯 뇌었다. 그 말에도 뜻이 숨어있었다.
“들꽃엔 그런 철학도 들어있군요. 약초라고 하면 깊은 산에서 나는 산삼 따위를 채취해서 달인다는 생각을 갖는데 사실은 산야초를 직접 채취하여 달여먹으면 좋습니다. 아무리 밟아도 곧 일어서는 질경이풀 민들레 쑥부쟁이가 원기회복에 좋습니다. 저는 그런 토종을 좋아하고, 저 역시 그런 토종 아닙니까, 하하하.”
“우리 산천이 모두 약초밭이다. 좋은 말이오. 한데 로마넨코가 멋쩍더군. 내 청을 들어주는 것 같기도 하고, 그냥 넘기는 것 같기도 하고...”
“하지만 좌우합작 인민정치위원회에 대해선 우호적인 태도를 갖고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의 역할 여하에 달려있습니다. 우리가 힘을 결집시켜 나가면 그들도 돕겠지요. 그러니 단결해야 합니다,”
“독재자가 대개는 국민통제의 수단으로 단결하라고 강요하지. 히틀러가 그랬고, 일제가 그랬소. 야만과 지배의 수단으로 단합하자고 몰아가는 거요. 단합은 어디까지나 정의롭고 공정하고 평화로운 공감이 전제돼야 가치가 있는 법이지. 여태까지 우리는 못된 단합의 대상이 되었을 뿐이지. 독재ᐧ전제자들의 탐욕을 위해 동원체제적 단합만 강요되었소. 소련군 또한 그런 예단이 든단 말이오. 현 서기는 소련해방군과 이념이 같은가? 그렇다면 현 선생은 우리나라가 어떤 나라가 되어야 한다고 믿고 있소?”
“소련은 평등을 전위에 세우고 있습니다. 저는 우리나라를 누구나 평등하게, 가난이 벽이 아닌 나라로 만들고 싶습니다. 누구에게나 공평한 나라, 가난도 미덕인 나라, 그것을 원합니다. 사회의 가장자리로 내몰린 사람들에게 기회가 주어지고, 인생 자체가 무너져도 재기할 수 있는 발판을 만들어주는 나라, 그런 나라입니다. 백성들에게 최소한의 끼니와 안전조차 지켜주지 못한 지도자들을 보면서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가난한 사람에게도 공평한 기회가 주어지는 사회를 꿈꾸고 있습니다.”
“좋은 말씀이오. 역시 건강한 사회주의자다운 말씀이오. 헌데 그런 이상사회가 실현가능하겠소? 스탈린이 하는 것을 보면 수긍할 수가 없소. 그들끼리 집행하는 지도부의 교체에 머무는 정치는 진정한 변혁을 가져올 수 없지. 스탈린의 일방적 독재에 의해 이상주의가 퇴색되는 것을 볼 수 있소.”
“민주주의 제도도 마찬가지죠. 어찌 보면 사회주의나 민주주의 자체의 문제라기보다 권력 속성의 문제, 권력이 어떻게 이상을 실현해내는지, 반대로 그것이 어떻게 이상을 망가뜨리는지, 인간을 변하게 하는지, 그 권력의 속성을 보고, 내면을 파악해야 합니다. 그렇더라도 평등을 최우선 가치로 삼는 것이 중요합니다. 경제적 불평등이 사유재산제에서 비롯되므로 생산수단의 공동소유나 국유화를 통해 평등사회를 구현할 수 있다고 봅니다.”
“레닌이 주도한 러시아 혁명은 바로 분배의 평등이 이루어진 이상사회를 꿈꾸는 것이란 것이지요? 그러나 그게 실현되고 있소? 소련은 계급없는 평등사회라는 유토피아적 목표를 설정했지만 실현하기 어려울 거요. 그들이 평등을 추구할수록 개인의 자유는 더욱 억압되고, 근로의 동기 부여는 약화돼서 경제침체의 늪에 빠지게 되고, 똑같이 잘 살자는 것은 구호일 뿐, 똑같이 헐버고, 대신 지도부만 배부를 것이오. 권력은 음성적으로 그들끼리 나눠갖고, 그러면서 독재를 강화하오. 고용이 해결된다고 하나 서로 나태해지다 보니 생산물이 현저히 줄어들어서 항용 물자 부족이 일어나고, 그런 현상을 메우려고 배급제를 시행하는데 생산물이 떨어져서 인민이 결국 허덕이잖소. 그러면서 국가통제 시스템을 지도부가 원하는 방향으로 작동시켜 반인민적으로 운행하고 있소. 인민의 의지는 반영되지 않고. 그들이 운전하는 방향으로 체제가 운행된단 말이오. 그게 어떻게 사회주의 이상을 펼친다고 말할 수 있소? 나는 현 서기가 일본제국주의를 거부하는 이념적 지향으로서, 그리고 항일독립투쟁을 벌이는 수단으로서 사회주의를 차용한 것은 수긍하지만, 국가 정체를 세우는 데 있어서는 우리 옷에 맞지 않는다고 보고 있소.”
현준혁은 조용히 웃기만 했다. 그의 논리를 반박하기엔 시간이 필요하고, 그렇다고 상세히 설명한다고 해서 설득당할 사람이 아니라고 보았던 것이다.
“저는 선생님의 말씀에 동의하지 않지만 선생님의 의견을 존중합니다.”
“허허, 토론하기 싫은 모양인데, 사실 우리는 우리식대로 살아온 방식이 있소. 무능한 왕조를 타파했으니 백성이 주인인 세상을 만들어야 하는 것이오. 각자 생각이 달라도 서로 인정하며 자유롭게 사는 나라 말이오. 그건 기독교적 사랑 하나로도 가능하오. 몽양도 그랬소. 독립운동을 하다 캄캄한 지하실에 들어가 숨을 때, 먼저 숨어든 사람을 만나면서 너는 누구냐고 물으면 나는 사회주의자다, 그럼 나는 민족주의자다, 민주주의자다 하고 말하지. 그래서 서로 격의없고 의심없이 한 덩어리가 되어 뜻을 관철시켜 나간다는 정신, 몽양이 그 말을 하길래 나도 동감했소. 그가 건준을 조직하면서 서울로 오라고 했을 때도 뜻이 같으니 나는 내가 사는 평양에서 건준지부를 만들겠다고 했소. 이렇게 지향하는 가치가 같으니 상호 협력 가운데서 나라의 기틀을 만들 수 있었던 거요. 내가 한반도에 태어난 것은 내 선택에 의해 태어난 것은 아니지만, 이 땅에 태어난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것은 몽양같은 그릇을 만났다는 점이고, 그와 함께 신생 조국을 만들어 나간다는 자부심 때문이오. 현 서기와 뜻을 같이 한 것도 그런 뜻이 반영된 것이오. 몽양의 정신이 현 선생이 추구하는 것과 동일하고, 그래서 건준 위원을 좌우 반반씩 나눠서 위촉하자고 했을 때도 이의없이 받아들였던 것이오. 하지만 소련군이 이상하오. 소련군은 토착사회주의자나 토착민족주의자를 좋아하지 않아요. 뿌리가 있고, 자부심과 자존심이 강한 사람들이라고 다루기가 힘들다고 보고, 말 잘듣는 자를 전면에 내세울 가능성이 높아요. 잘 지켜보아야 합니다. 이럴수록 뭉쳐야 합니다. 서울처럼 서로 모해하고 대립하면 찢기고 말아요. 우리가 싸워야 할 대상은 이게 아닌데, 어느결에 나도 모르는 새 나라내 집단, 개인이 엉뚱한 곳으로 굴러가버린단 말이오. 소련이 반제(反帝)를 외치지만 그들은 제국주의 복판에 와있소. 반파쇼, 반제를 부르짖으며 제국주의적 행위를 답습하고 있소. 보다시피 제국주의자들은 잔악하지 않소? 테러 약탈 방화, 살인을 밥먹듯이 저지르오. 그런 세상은 더 이상 용납될 수 없지.”
“몽양 선생이 테러를 당했다는 얘길 들었습니다.”
“못된 것들! 혼란기엔 잘못된 신념으로 사람을 치고, 테러를 자행하는 자들이 횡행하오. 평양에도 그런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소. 지도자 하나 키우는데 얼마나 많은 민족적 에너지가 투입되는가. 그런데도 자기 눈앞의 이익만을 생각하고 파괴하는 극렬분자들이 설치니 안타깝소. 현 서기도 각별히 조심해야 하오.”
현준혁도 며칠 전 정체불명의 자로부터 미행을 당했다. 밤길의 그를 젊은이 셋이 미행하고 있었다. 이상한 낌새를 느끼고 그가 한 순간 멈춰 서서 획하니 뒤를 돌아보았다.
“누군가?”
그러자 세놈 중 한 놈이 그의 앞으로 불쑥 다가오더니 말했다.
“현준혁 선생님, 저희가 잠깐 모셔도 되겠습니까?”
“뉘시오?”
“네, 저희들은 영명사에서 왔습니다. 기림리 공설운동장 뒷편에 있는 영명사입니다.”
“그런데 왜 미행을 하시오?”
“미행이 아니라 선생님 댁을 찾아가는 중이었습니다.”
그래도 뭔가 미심쩍고 불쾌했다.
“그러면 떳떳하게 대낮에 찾아와야지. 몰래 밤길을 뒤따르니 보기가 민망하오. 난 영명사의 염동진 단장을 잘 알고 있소.”
“마침 염 단장님께서 찾아뵈라고 해서...”
“그럼 염 단장이 내일 내 사무실로 오도록 하시오. 밤늦게 따라붙는 것이 떳떳치 못하오.”
그는 그들을 돌려보냈다. 영명사는 민족주의자들과 일부 사회주의 성향을 지닌 젊은이들이 뜻을 품고 모여든 곳이었다. 영명사의 주지는 박고봉이었는데 임시정부에 참여한 승려였다. 염동진은 중국에서 돌아와 영명사에 본부를 두고 애국청년단인 대동단을 결성해 단장을 맡고 있었다.
다음날, 염동진이 부하 셋을 대동하고 현준혁의 사무실을 찾았다. 그는 자리에 앉자마자 도발적으로 거칠게 말했다.
“소련군의 만행을 왜 방치하는 겁니까?”
“방치라니요?”
“그렇소. 방치하니까 로스케 군대가 저 지랄하는 거 아니요! 현 선생이 조선공산당 책임자라면 로스케 군대가 부리는 못된 행패를 막아야 할 것 아니오!”
선글라스를 착용해서인지 그의 표정을 읽어낼 수는 없었으나 그는 냉혈한 같은 차가운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그가 말을 계속했다.
“나는 애초에 공산당 패거리들을 좋아하지 않소. 무슨 일이든지 다 할 것처럼 뻥을 치지만, 내용은 허당인 족속들이오. 당신이 로스케 군대의 약탈과 강간과 폭력을 막지 못한다면 당신도 그들 편이오. 그러면 우리도 가만있지 않겠소.”
소문에 따르면 그는 여기저기 이권에 개입하는 등 분명치 않은 자금으로 뒷골목의 패거리들을 모아 관리하고 있었다. 불한당이 주민의 민원을 해결해준다고 나선 꼴이었다. 이런 자들일수록 정의감을 독점하듯이 하면서 뒤로는 몹쓸 짓을 한다.
“북녘땅에 공산당 정권이 들어선다면 현 서기가 집권할텐데, 그러면 남녘과는 어뜨렇게 되는 거야요?”
현준혁은 대답하지 않았다. 해방 한달 여만에 확실한 무엇이 손에 잡히는 것은 없었다. 다만 중지를 모아 협상을 진행중이었다.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우리는 공산 정권을 수용하지 않을 것이오.”
염동진의 태도는 거칠었다.
“염단장, 말을 함부로 하지 마시오.”
“나는 틀린 말은 하지 않소.”
염동진은 얼굴에 칼자국이 선명한 흉터와 싸늘하고 위압적인 태도 때문에 어떤 누구도 그를 보면 겁을 먹었다. 장제스의 비밀조직인 남의사 대원으로 활약하고, 상해 임정과 김구 선생 밑에서 활약했다는 소문이 있었지만, 만주에서 활약 중 일본 관동군 헌병대에 체포돼 회유되어 변절했다는 소문이 더 왁자하게 돌 정도로 정체가 불분명한 사람이었다. 장제스 휘하에 있었던 만큼 공산당이라면 경기를 일으킬 정도로 거부감이 심했고, 실제로 공산주의자라면 가차없이 부수었다. 그는 고문 후유증으로 시력이 나빠지고, 그래서 고향인 평양으로 낙향해 근신하던 중 영명사에서 대원들을 하나하나 규합했다. 역할과 가는 방향은 다르지만 대구사범 교사로 재직하다 형을 살고 고향에 돌아온 현준혁과 인생 경로가 비슷했다.
암살의 일상화
“무슨 고민거리라도 있소?”
현준혁이 생각에 몰두해 한동안 침묵을 지키고 있자 고당이 물었다. 현준혁은 염동진을 만난 일을 꺼낼까 말까 망설였다. 하지만 노인에게 또다른 걱정거리를 안겨줄 수 없다고 생각되어 고쳐서 말했다.
“선생님, 몸을 잘 보호해야 합니다.”
“그건 내가 현 서기에게 하고 싶은 말이오. 현서기가 몸조심해야 하오.”
그들은 다방을 나와 일제 고물 화물자동차를 타고 번화가를 벗어났다. 대동강이 내려다보이는 커브길에 이르자 화물차가 털털거리며 서서히 돌았다. 그때 소년 하나가 운전석 난간을 붙들고 차에 올라탔다. 고물 화물차였으므로 대개의 차량들이 그렇듯이 차창도 없었다. 소년이 난간에 발을 붙이고 엉기듯이 차에 붙어 서서 안을 살피더니 오른쪽에 앉은 현준혁을 향해 권총을 발사했다. 한발은 하복부를 관통하고, 나머지 한발은 그의 가슴을 뚫었다. 운전사가 급브레이크를 밟았으나 소년은 벌써 차에서 뛰어내려 골목으로 사라졌다.
“정세를 파악하시오! 소련군이 들어왔는데 우리만의 독자적인 당 운영이 말이 됩니까?”
장시우가 화를 냈다. 조선공산당 사무실은 회의 시작하자마자부터 패가 갈렸다. 연해주 등 소련령의 원동에서 활약해온 장시우 김용범 박정애가 토착 공산주의 세력과 사사건건 대립하고 있었다.
현준혁은 고당 조만식과 합의하에 민족주의자 16명과 사회주의자 16명이 합작하여 평남건준을 결성했다. 정치장교로 먼저 들어온 소련 군정 레베데프 소장도 이를 동의했다. 건준위원으로 민족주의자 몫으로 김광진 등이 포함돼 있었으나 그들은 본래 사회주의자였기 때문에 무게 중심은 자연 사회주의 진영으로 기울었다. 고당의 인품과 권위와 신망 때문에 고당이 건준을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으나 현준혁의 주도로 조직이 굴러가고 있었는데 내막은 좀 복잡했다.
사회주의 계열 내부에서 노선상의 대립이 심각했다. 현준혁은 토착 공산주의 세력을 중심으로 세력을 재편하는 중이었고, 장시우 김용범 박정애는 소비에트 국가건설을 목표로 움직이고 있었다.
“현준혁 동무, 고당은 공산주의를 배격하는 기독교 장로 아니오? 물과 기름인데 과연 서로를 섞어서 목적을 달성할 수 있겠소? 애당초 되지 않을 일을 나서서 하는 건 시간낭비요. 프로레타리아 소비에트화가 우리당의 당면과제라는 것 명심하시오.”
그러나 현준혁의 생각은 달랐다.
“서울의 미군사령부는 정국을 조선 국민의 시각으로 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일제와 동조하며 조선총독부 정책을 이어가고 있소. 조선 민중의 이해에 대해선 철저히 외면하고 있는 것이오. 그래서 몽양을 비롯한 제 세력들이 사태를 보고 있는데, 평양 역시 소련군의 지휘 아래 움직이고 있다면 미제와 다를 것이 뭐가 되겠소? 그들과 일정 거리를 두어야 하오. 정통성을 확보하고, 신생 조국의 미래를 조선인의 의지로 만들어가야 하오.”
“그런 논리는 낭만적이고 몽상적이오. 소련 군정은 이미 조선반도 깊숙이 들어와 있소. 그게 현실인데, 그들을 배격한다는 것은 비현실적일 뿐더러, 현 동무의 정치적 야심과 결부시켜 의구심을 살 수 있는 것이오.”
“나는 통합의 나라를 생각하고 합작을 생각하고 협력을 생각하는 사람이오. 소련 25군 정치위원 레베데프 소장을 만나서 건준-인민자치위원회를 추인 받았고, 로마넨코 민정군사령관의 양해도 받았소.”
“그건 사실과 다릅니다. 그들은 여러 개의 노선 중 하나를 말한 것이고, 실제로 그들은 다른 방안도 모색하고, 또 검토하고 있소.”
“소련 말만 믿을 거요? 제 몸통으로 사물을 보시오.”
“현 동무가 고당과 합의해 주도권을 장악해 서울로 권력을 넘기려 하는 것 알고 있소. 현 동무는 서울에 매수되어 순종하는 수정주의자로 변질돼가고 있단 말이오. 합작과 협력이란 말은 구실이고, 현 동무의 야심이 정국을 장악하려는 것 아니갔소? 몽양을 얘기하는데 그는 기회주의자일 뿐, 확실한 비전이 없소.”
김용범은 강경파였다. 장시우와 함께 시베리아 원동, 동만주에서 지하운동으로 항일투쟁을 하다가 체포되어 장기간 복역했으며, 부인 박정애와 함께 해방이 되자 석방됐으나 평양에 들어와보니 현준혁에게 선수를 빼앗긴 처지였다. 평양은 벌써 현준혁이 조선공산당을 결성해 책임자인 총서기를 맡고 있었다.
장시우와 김용범과 박정애는 현준혁의 타협적 태도가 내내 마땅치 않았다. 사회주의자의 눈으로는 회색분자였다. 사실 두 사람은 소련의 밀명을 받고 평양에 돌아온 인물이었다. 그들은 소련을 따르지 않으면 누구도 부정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다. 그런 배경 때문인지 그들의 행동은 자신감이 넘쳤고, 행동 또한 거칠었다.
현준혁은 조선공산당 본부를 숭실전문학교에 두고 조직 확장과 건국 준비를 착착 진행해 나갔다. 그러나 강경파의 도전이 만만치 않았다.
현준혁은 극우파로부터도 공격을 받고 있었다. 대동단의 염동진이었다. 그의 본명이 염응택이었지만 가명을 여러개 사용해서 때로 정체가 섞갈리는 인물이었다. 그는 제거 대상이다 하면 가차없이 하수인을 시켜 상대방을 제거하는 극우 행동파였다.
염동진은 며칠 후 현준혁을 다시 찾아 소련군의 약탈과 강간 행위를 막지 못한다고 시비를 걸었다.
“내 조카딸애가 북청에서 로스케군대 놈들에게 윤간을 당했소. 모녀가 당한 사람도 있소. 그자들이 짐승이 아니고 뭐요. 그런데도 공산당 서기란 사람이 이것 하나 막지 못한단 말이오? 공산당은 뭣때매 하오? 못된 짓하려고 공산당 하기요?”
“말을 함부로 하지 마시오. 그런 사례들을 모아서 제출하시오.”
“모아두나 마나 당신이 직접 저자거리에 나가면 다 알 수 있는 사실이오. 이러니 공산당 놈들은 불한당이지.”
“말 함부로 하지 마시라니까. 냉정하시오.”
“냉정하게 됐소? 당장 멈추도록 하지 않으면 당신도 한 패거리로 볼 수밖에 없소.”
염동진은 대단히 거칠었다. 후일의 기록이지만 미국의 정보보고인 ‘실리 보고서’는 염동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염동진은 파시스트 성향의 반공 지하조직을 설립하였다. 이 지하조직의 주요 목적은 모든 공산주의자들과 반정부 정치인들을 암살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남한의 송진우, 장덕수, 여운형, 김구 암살의 배후로도 지목되었다. 요인 암살의 맥을 짚어보면 일정한 흐름이 있는데, 그것은 비밀결사체가 정치적으로 이익을 챙기려는 집단과, 반대로 정치적으로 손해를 입을 것이라고 우려하는 정치세력과 결합해 암약하는 족적을 보였다. 뚜렷한 이념적 지향이 있다기보다 이익과 필요에 따라 감행하기 때문에 직업적인 전문 킬러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었다.
나중에 조금씩 드러나긴 하지만, 테러분자들은 대체로 북한에서 내려온 반공 성향이 짙은 청년들이었다. 계보의 역사성도 지니고 있는 데다 조직화된 계보를 운영하고 있었다. 테러 혐의자나 지원 세력은 친일 경력이 있는 자들이고, 친일의 흠결을 가리기 위해 반공을 표면에 내세워 암살을 정당화하는 속성을 지니고 있었다. 따라서 해방이 되었어도 청산되지 않고 재등용된 친일 권력과 친일 자본이 해방 정국의 비극적 암살을 가져온 배경이라는 것은 알려진 비밀이 되고 있었다.
“소련군의 횡포를 막지 못하고서 민족주의자들과 어뜨렇게 합작한다는 거요? 그걸 막지 못한다면 그런 합작은 허구요!”
염동진이 계속 현준혁을 몰아붙였다. 소련군이라고 했지만 현준혁은 아직 그들과 명쾌하게 네트워크가 형성되어있는 입장이 아니었다. 소련은 확실한 무엇이 드러날 때까진 일단 주시하는 태도를 보였다.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지만 미래를 담보할 어떤 깊숙한 대화도 나눈 상태가 아니었다.
“이틀 내로 확답을 받아주시오. 그렇지 못할 경우엔....”
“ 협박 같구려.”
“협박 같은 것이 아니라 협박하는 거요!”
염동진은 눈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위협적이어서 현준혁은 기분이 몹시 언짢았다.
“모레까지 확실한 답변이 나오도록 해주시오. 소련군사령부의 성명이 나오면 될 것이오. 현 서기, 책임질 일은 책임져야 하는 것, 알겠지요?”
그러나 현준혁이 레베데프와 로마넨코를 만났을 때, 의례적인 답변만 했다. 걱정하지 말라는 데는 달리 따질 수가 없었다. 그런 가운데서도 청진ᐧ신의주ᐧ영변ᐧ원산 쪽에서 약탈과 부녀자 강간 등 소련군의 만행이 계속되고 있었다.
조선공산당 평남 책임비서인 현준혁의 암살사건의 배경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염동진의 표적은 공산당이었다. 그는 공산당으로 맹활약 중인 현준혁을 제거하면서 대동단의 존재감을 과시할 겸 소련군사령부도 긴장시킨다는 계획이었다. 의지대로 정국을 이끌어갈 수 없다는 신호를 보내는 것이었다.
현준혁의 암살범은 적위대 복장을 한 백관옥이다. 당시 21세의 청년이었다. 그는 대동단원이었으며, 추후 서울에서 염동진이 재결성한 백의사의 핵심단원이 되었다. 현준혁 암살 직후 조만식과 대화를 나눈 유기선 동평양경찰서장의 전언이다. 유기선은 조만식의 조선민주당(조민당) 핵심 당원이었다.
“민족계열이었던 내가 동평양 경찰서장을 맡은 지 얼마되지 않은 9월초로 기억한다. 1945년 9월 3일이나 4일쯤이었을 것이다. 점심시간이 지났는데 고등과 서원(경찰 직원)이 헐레벌떡 서장실로 뛰어들어 왔다. 조만식 선생과 함께 트럭을 타고 가던 현준혁이 총에 맞아 죽었다는 것이다. 현은 당시 합리적인 공산주의자라는 평가를 받고 있어서 민족진영에 인기가 있었고, 조만식 선생과도 잘 지냈다. 깜짝 놀라서 먼저 조만식 선생의 집으로 부하를 데리고 달려갔다.
선생은 놀라서 정신이 없는 모습이었다. 머리에 발찌가 나서 붕대를 두르고 눈이 휘둥그래진 모습으로 당시 정황을 이렇게 설명했다.
“나와 준혁군을 태운 일제 트럭이 평양시 교외의 커브길을 도는데 갑자기 17,8세 정도로 되어보이는 적위대 복장을 한 소년이 차에 올라타는 거이야. 운전사 옆 좌석에 내가 앉고 문 옆에는 현군이 앉아 있었어. 커브길이니까 속력이 줄어들자 골목에 서있던 소년이 따르더니 트럭에 올라타. 그러면서 트럭 문을 잡고 안을 힐끗 보더니 현군의 가슴에 대고 권총을 쏘는 거야. 땅땅 하는 소리가 두 번 들렸던 것 같은데 (내 정신이 혼미한 가운데)현군이 내 무릎 위로 푹 쓰러져. 그래 내가 현군, 현군 하고 소리를 지르며 일으켜 세웠더니, 현군 가슴에서 피가 콸콸 쏟아졌어. 총을 손 소년은 뒤를 흘끗 한번 보면서 골목 안으로 급히 사라졌어.”<중앙일보 ‘비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김국후 1992,130-131p 일부 인용>
현준혁은 그 자리에서 사망했고, 범인은 잡지 못했다. 해방 직후 평양엔 치안을 담당하는 기관이 세군데 있었다. 평양경찰서는 공산 계열인 송창렴이, 동평양과 서평양은 민족주의 계열인 유기선과 윤무준이 맡았다. 이러한 배치는 해방 직후인 8월 27일 재편된 평남인민정치위원회(위원장 조만식)에서 결정되었다.
현준혁의 암살사건에 또다른 자료가 있다.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다큐 프로 ‘비밀결사-백의사편’(2002.1.20. 46회)에서도 이 문제를 중점적으로 다루었다. 암살범 백관옥의 형인 백근옥이 1986년 5월 21일 백관옥이 고백했다는 녹음 내용을 공개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나는 소련군)강훈 소좌를 염선생(염동진)과 두 번 만났거든. (강훈)그놈이 동무들은 위대한 소련군을 리해 못한다. 스탈린그라드를 점령한 독일군도 여자(겁탈)하고 재산 약탈하고 그랬다. 그런데 뭘 그러느냐....(현준혁)당신이 공산당 책임자니까니 (소련군에게)이야기 하시오. 그러자 (현준혁이)내가 이야기하지요. 그래서 내일 다시 오겠다 하고 (다음날)또 갔지. 그것 어떻게 됐습니까 하니까 (현준혁이)뭐 어쩌구 해. 그래서 알았어, 이건 없애야 되겠어. 그래서 없어진 거야.”
이 녹취록을 근거로 하면 결국 현준혁은 백색 테러를 당한 셈이다. 범인 백관옥은 대동단(추후 백의사) 단원이었고, 백의사는 극우 계열의 비밀결사 단체였으며, 그는 염동진의 지시를 받은 행동대원이었다. 이 내용을 유기선이 증언하는 조만식의 주장과 연결시키면 백관옥은 범행 당일 적위대 복장으로 변복하고 사건을 저지른 것이다.
백의사가 현준혁을 죽인 이유는 뭘까. 녹취 자료에서 보듯, 당시 소련군의 약탈과 폭력을 막지 못한 공산주의 조직 책임자에 대한 극우파의 응징이었고, 극우파의 존재감을 과시하는 한 방법이었다.
소련의 제국주의적 약탈의 대표적인 것이 소련군의 수풍발전소 발전설비와 평양의 고무공장 생산설비 이전, 알미늄 공장 설비를 해체해 소련으로 빼돌린 행위다. 해제된 소련 비밀외교문서는 1946년 5월 3,460만엔의 전리품과 신상품이 소련에 반입되었다고 나온다. 구체적으로 금 1,500kg, 5톤의 은이 포함된 4361톤의 구리와 납 광석, 베릴름 20톤, 페로텅스텐 78톤, 흑연 454톤, 전해 연 1388톤, 탄탈니오브 2.5톤 등 광범위했다.
이를 보면 반공산주의의 시각이 아니더라도 그들의 행태에 분개하지 않을 사람이 없었다. 북한 공산당에서 전향한 김창순의 증언이다.
“현준혁은 소련군에게 필요한 사람이 아니었다. 소련 군정으로서는 김일성을 내세우려는데 현준혁이 먼저 평양에다 조직 기반을 선점하면 곤란했다. 그래서 소련 군정은 현준혁과 동지적 결의를 맺은 공산주의자 가운데 김용범 장시우 박정애 최경덕 이주연을 떼어서 김일성에게 연결시키려 했고, 그 와중에 암살이 벌어진 것이다.”
전 북한 민주조선 주필 한재덕의 이야기다.
“김일성 등 소련파와 김용범 장시우 등은 현준혁을 그대로 두었다가는 공산당이 북한에서 패배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로마넨코 소장실에 이들이 찾아가 현준혁 처리에 관한 비밀회담을 했고, 그 자리에서 현의 살해를 결정했다.”
해방 직후 김일성이 그런 미션을 세웠을까. 당시 현준혁 암살을 김일성과 연관시킨 뒤, 1945년 9월 28일 암살되었다고 했는데 제반 사정으로 보아 설득력이 떨어진다. 현준혁 암살사건의 발생 시기는 현존하는 가장 근접한 자료에 9월 3일로 나와있고, 김일성의 입국은 9월 19일이다. 설사 9월 28일 암살되었다고 해도 국내 정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김일성이 그런 암살작업부터 감행했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국내 상황부터 점검한 다음 행동반경을 결정했으리라는 것은 상식이다.
아직은 해방의 분위기에 모두가 들떠있고, 미래 상황에 대한 뚜렷한 예비지식도, 비전도 없는 시기다. 모두가 붕 떠있고, 아직 가닥을 추리지 못한 때였던 것이다.
현준혁 암살 사건의 기록 자료는 현준혁의 지인인 나일부가 1946년 10월호 월간지 ‘신천지’에 쓴 ‘해방 후 보름만에 아깝게도 쓰러진 우리들의 지도자 현준혁의 내력’에 그대로 나와 있다. 지인 안지홍도 사건 날짜와 배경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현준혁은 (친 소련 군정)방송을 한 5일 후인 9월1일 불만을 갖고 있던 같은 공산당 간부인 크레믈린 광신자 장모 김모의 사주를 받은 악도의 흉탄에 아깝게 쓰러지고 말았다”(안지홍 ‘진정 민주주의-자주민주통일 독립의 이론’. 한일도서출판,1949년 77p).
장 모와 김 모는 소련군과의 관계 설정을 놓고 현준혁과 갈등관계에 있던 장시우와 김용범을 가리킨다.
종합하면 현준혁은 1945년 9월 3일 정오경 암살되었다. 현장에 있던 유기선의 증언과 나일부의 ‘해방후 보름만에’라는 기록이 그것을 뒷받침해준다. 사건 일시를 9월 28일로 보는 견해는 반김일성 성향과 관련해 어떻게든 김일성과 연관시키려는 의도 때문으로 보인다.
현준혁 암살을 김일성과 연관시키려는 언급은 비과학적이지만, 그럴만한 개연성 또한 없지 않다. 김일성과는 직접적인 연관이 없다고 하더라도 소련은 현준혁을 의중에서 지우려 했던 것만은 부인할 수 없었다. 그후 그 자리에 김일성이 들어선 것이다.
토착 사회주의자인 현준혁은 스탈린주의 세력과의 싸움의 희생자거나 공산당을 배격한 극우 행동파의 비밀결사 세력의 행동 중 하나인 것만은 분명해보인다. 최고 학력과 항일투쟁의 화려한 경력에 비해 현준혁은 남에서나 북에서나 주목받지 못하고 사라졌다. 남쪽의 몽양이나 북쪽의 현준혁 등 타협적인 민족세력은 이렇게 하나둘씩 제거되고 있었다.
군사정치훈련소 정릉의 백씨 산장
정릉 골짜기에 이르자 얼음장 밑으로 계곡 물이 흐르고 있었다. 산이 깊어서인지 겨울인데도 물이 마르지 않았다. 이정길이 앞장서고 그 뒤를 오민균, 최명산이 따랐다. 계곡을 따라 한참 길을 오르니 좁고 희미한 산길이 나왔는데 거기서도 조금 오르자 상수리나무 도토리나무 소나무 숲속에 큰 기와집 한 채와 부속 건물이 보였다. 백씨 산장이었다.
“어떻게 이런 곳에 대궐같은 집을 지었을까”
오민성이 묻자 이정길이 대답했다.
“윤비의 상궁들이 살다가 해방이 되자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대. 본래는 부호 백씨 별장이었고.”
육중한 대문 앞에 이르러 이정길이 쾅쾅 문을 두드렸다. 한참을 지나자 대문 옆 쪽문이 열리고, 상고머리 청년이 불쑥 얼굴만 밖으로 내밀면서 물었다.
“누구시오?”
“연락을 받고 왔습니다. 두 사람을 대동했습니다. 나는 이정길입니다.”
그러자 문이 열렸다. 그가 벌써 알고 있다는 듯 말없이 앞장 서서 그들을 안내했다. 염세주의자나 은둔자의 안식처처럼 집은 숲속에 숨은 듯이 호젓하게 앉아 있었다. 집안은 쓸쓸하고 고적해 보였다. 안채로 들어서자 청년들이 묵언수행하는 것처럼 입을 다문 채 발뒤꿈치를 세워 조용조용 대청마루를 지나다니고 있었다. 상고머리를 따라 골방에 이르자 회색 누비옷을 입은 여러 명이 둘러앉아 있는데 맨 앞에 몽양이 있었다. 오민균이 절도있게 그를 향해 거수경례를 붙였다. 몽양이 희미하게 웃으며 짧게 말했다.
“단복을 입고 오시게.”
그들은 다시 상고머리를 따라 널따란 방으로 갔다. 상고머리가 한쪽 켠 서랍장에서 두터운 누비옷을 꺼내 각자에게 내밀었다. 그들은 옷을 받아 갈아입고 다시 골방으로 들어갔다. 이미 모인 청년들은 가슴에 이름표를 부착하고 있었는데 가장 눈에 띠는 사람은 준수한 얼굴에 키가 큰 박승환이었고, 그 옆으로 이상렬 최남근 김종석 박임항 김광식 등이 앉아있었다. 박승환이 대오를 향해 정렬하라고 지시하자 이십여 명의 청년들이 절도있게 횡렬 대오를 갖추어 앉았다. 몽양이 청년들을 향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조국이 해방되었을 때 많은 사람들은 자주 통일국가가 수립될 것이라고 보았소. 그러나 현실은 남쪽은 미국, 북쪽은 소련이 장악한 분단국가가 되었소. 여기에 찬반탁의 회오리에 휩쓸려서 무정부상태가 되고 있소이다. 한마디로 나라가 뒤틀리고 있소. 제 정파는 정파대로, 군사단체는 군사단체대로 친미냐 친소냐로 갈리고, 거기서 또 강경이냐 온건이냐, 갈리고 나뉘고 있소. 만주나 시베리아에서 온 세력은 주로 북한에 붙고, 남한의 친일 매국세력은 반공의 애국자로 변신해 미국에 붙고 있소. 내 땅, 내 영토에서 외국 군대의 하수인이 되어서 모리배가 되어가고 있으니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소. 내가 이를 막지 못해 통탄을 금치 못하오.”
몽양의 이마에 쓸쓸한 바람이 스쳐지나가고 있었다. 그가 말을 이었다.
“만주에서, 중국에서, 남지나 부대에서 우리 청년들이 속속 귀국하고 있는데, 이전의 소속부대가 중요한 것이 아니오. 어떻게 건국과 건군을 할 것이냐로 중지를 모아야 할 때요. 내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은 얼마전 일본육사 마지막 기인 오민균 생도의 질책에 자아비판을 하면서부터요.“
몽양이 맨 뒷줄에 앉은 오민균을 눈으로 좇자 청년단의 시선들이 일제히 뒤돌아 그를 보았다. 오민균은 굳은 자세로 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군은 먼저 자립군대를 양성해야 한다고 했소. 제 군사단체의 난립상을 보고 통합시키지 못하는 것을 비판했소. 규합해 자강 군대부터 만들어야 한다고 했소. 그 말은 백번 옳은 말이오. 1944년 본인이 건국동맹을 창설할 때 노농군을 조직해 만주의 박승환 동지에게 병사들을 모아 훈련시키고 했던 것인데, 왜놈들이 일찍 항복한 바람에 우리의 계획이 차질이 빚어졌소. 그랬더라도 오민균 군의 지적대로 건준 결성 때 건군에 착수했어야 했소. 이 늙은 기독교도는 군사 문제를 절박하게 인지하지 못하고 기회를 상실했던 거요. 해방이 되었으니 순진하게 권력 이양이 되리라고 믿었소. 아베 노부유키가 퇴각하면서 하는 말을 새겨들었어야 하는데 대세를 오판한 셈이 되었소.”
아베 노부유키는 1944년 7월 마지막 조선 총독으로 부임한 인물이었다. 부임 후 전쟁수행을 위한 물적·인적 자원 수탈에 총력을 기울였으며, 위안부 모집에 열을 쏟았다. 즉, 징병·징용 및 근로보국대의 기피자 징발에 광분했으며, 심지어는 만 12세 이상 40세 미만의 여성에게 정신근무령서를 발부했고, 이중에는 일본군 성놀이개로 보내는 위안부가 대량 포함되었다. 징발에 불응할 시 국가총동원법에 의해 구속해 징역형을 살았다.
일본 패망 한달 전인 1945년 7월에는 국민의용대 조선총사령부를 조직하여 조선인에 대한 통제를 강화했다. 1945년 9월 8일 미군이 남한에 진주하자, 9월 9일 항복문서에 조인한 뒤에도 미군 임무를 도왔다.
아베 총독은 돌아가면서 “일본은 졌지만 조선이 승리한 것이 아니다. 장담하건대 조선인들은 서로 분열하며 노예적 삶을 살 것이다. 현재의 조선은 일본 식민교육의 노예로 전락했다. 그래서 나 아베 노부유키는 다시 돌아올 것이다”라고 호언했다.
몽양의 말이 이어졌다.
“지금 우리 청년들이 전선에서 각기 돌아오고 있는데, 귀향대를 조직해 이 산장에 귀향 병사들의 숙영지로 삼고, 군사교육을 실시하려고 하오. 만주에서 돌아온 박승환 동지가 여러분을 훈련시킬 것이오. 북한에서도 정치훈련소가 마련됐는데 정치훈련소까지 가지 않더라도 우리는 군사정훈교육과 대민 접촉 선무교육을 실시할 것이오. 박승환 동지에게 마이크를 넘기니 세부 지침을 말하시오.”
박승환이 자리에서 일어나 마이크를 잡았다. 이십대 후반의 키가 큰 미남자였다.
“얼마전 국군준비대(국준) 결성이 있었는데 정치적 편향성이 강한 편이 아닌데도 미군정의 탄압이 있었습니다. 반면에 한민당 계열의 건국청년회(건청)가 조선인민보를 습격했는데 미군정이 뒤에서 비호했소. 건청은 기업주들의 자금 지원을 받아 각 노조사무실도 습격했는데, 이 과정에서 불만을 가진 국준 대원들이 건청 사무실을 습격해 감금되어 있던 인민보사 직원들을 구출하고, 건청 단원 17명을 포승줄로 묶어 국준사령부로 연행했습니다. 미군정은 국준이 건청사령부를 습격한 책임을 물어 국준사령관 이혁기를 체포했소. 보름이 지난 지금까지 그는 돌아오지 않고 있소. 그것만이 아닙니다. 미군정은 국준이 중립성을 잃고 좌익에 편향되었다고 주요 인물을 미행 감시하고 있소. 이들은 총독부의 블랙 리스트에 오른 인물들이오. 총독부로부터 블랙 리스트를 물려받아 체포 작전을 벌이는 것이오. 공산주의자를 죄악시한 일본의 이간질에 미군정이 놀아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가 각종 대회의 경비를 서는 역할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거요. 무엇보다 지방의 인민위원회를 보호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알다시피 전국인민위원회는 좌파만의 단체가 아니오. 인공 중앙위원회는 출범 이후 좌익의 주도권 아래 놓였지만, 그래서 민세(안재홍) 선생은 합류를 거부하고 떠나시고, 몽양 선생은 거리를 두고 계시지만, 지방의 인민위원회는 자생적 자치조직으로서 여전히 존재한 가운데 민족주의 세력의 주축을 이루고, 굳이 노선을 따지자면 중도 민족주의 성향의 인물들이오. 이 기구를 우리가 보호해야 합니다. 우익에 의해 파괴되는데, 반드시 지부 조직을 지켜야 합니다.”
지방인민위원회는 해방과 더불어 조선총독부의 통치 기구가 철폐되는 것으로 생각했으며, 그를 대신하는 정권 인수기구로서 인민위원회가 들어설 것으로 알았다. 그런데 이승만이 주석 추대를 거부하고, 상해 임정 계열도 인공을 부정하고, 미군정 역시 인공과 지방인민위원회 해체를 요구함으로써 사실상 몽양의 정치결사체는 좌초했다.
박승환이 자리에 앉고 몽양이 다시 마이크를 잡았다.
“우리의 길을 찾는 데는 젊은이의 뜻이 중요하오. 기독교청년회에서 익힌 것인데, 브레인 스토밍(Brain storming)이라는 회의를 진행하겠소. 최근 알렉스 아스본이란 이가 개발한 아이디어 창출 기법인데, 구성원의 자유발언을 통한 아이디어 제시를 요구하면서 새로운 발상을 찾아낸다는 것이오. 누구의 아이디어든지 비판을 삼가라, 평가하지 말라, 허황된 생각이라도 격려하라, 중구난방도 기뻐하라, 타인의 아이디어 베끼기를 허하라는 거요. 지게꾼의 아이디어도 좋고 독재자의 아이디어도 좋소. 누구에게나 자유롭게 거리낌없이 의견을 내시오. 주제는 ‘조선반도의 통일과 미래전망’이오. 이 땅의 주인공은 소련놈도 미국놈도 아니오. 운명적으로 우리가 짊어지고 가야 할 우리 땅이므로 우리가 주인이오. 이 땅을 짊어지고 가는 여러분이 길을 찾아야 하오.”
이 말을 남기고 몽양은 박승환에게 후속 회의를 맡기고 자리를 떴다. 박승환은 청년들을 5개조로 나누어 분임토의를 진행했다. 각 조에서 모인 아이디어들은 풍부했다.
-조선총독부는 패망직후 소련군이 한반도 전역을 점령할 것으로 판단했다. 그런데 미·소에 의해 한반도가 38선을 경계로 분할 점령된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이 사실이 알려진 뒤 조선총독부는 한반도 분할 점령이 자신들의 숨통이 트일 기회가 된다고 보고 미태평양사령부에 모든 협조를 아끼지 않겠다는 무전을 타전했다. 전쟁밖에 모르고 행정수행 능력이 결여된 미군은 총독부의 제안을 별다른 고려없이 받아들였다. 이후 총독부는 돌변해 몽양의 건준에 위임했던 치안권을 회수해 식민지 때와 같은 강압통치정책을 폈다. 총독부의 협조 아래 이루어진 미군 상륙은 조선 민중을 적대시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했는데, 이것이 해방정국 미군정의 성격을 규정짓는 기준이다. 여기서부터 조국의 미래가 꼬이기 시작했다.
-1945년 9월 8일 인천항을 통해 들어오는 미군을 환영하기 위해 나온 인천의 노동조합원들을 일본경찰이 발포해 노동조합 인천중앙위원장 권평근과 건준 보안대원 이석우가 즉사하고, 14명이 부상을 당했다. 미군과 일본군은 치안유지를 방해한 자에 대한 법적 제재이고, 정당방위라고 언명하였다.
당시 미군측 보고서에는 “(미군의 인천상륙 때)인천 부두 교차 지점을 검은 제복을 입은 일본경찰이 지키고 있었는데, 몇몇은 말을 탔고 그들 모두 착검된 총을 메고 있었다. 경찰은 조선인의 대규모 시위를 효과적으로 막았으며, 하지 장군의 명령을 정확히 인지해 시행했다”고 썼다. 미군이 조선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의 단면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대목이다.
-미군이 서울 입성한 9월 9일 성북경찰서 관내의 치안유지에 나섰던 조선학도대의 연희전문학생 안기창과 이인제, 조선인 경찰관 1명이 일본 경찰이 쏜 총에 맞아 사망했다. 사망한 학생들은 경기도 경찰부장이 발부한 ‘치안단’이라는 증명서를 갖고 있었다. 9월 10일에는 용산 방면의 치안유지에 나섰던 학도대원 신성문이 삼각지 부근에서 일본 경찰의 총에 맞아 숨졌다. 신성문 역시 경기도 경찰부장의 증명서를 소지한 치안단 사람이었다. 왜 일제 경찰은 자신들이 발급한 증명서까지 갖고 있던 학도대원들에게 총격을 가했을까?
-서울 지역에서의 학도대 희생은 건준 산하 치안단체가 경찰서를 접수하려는 시도와 맞물려 미군으로부터 치안유지권을 보장받은 일제경찰과 맞부딪치면서 일어났다. 일본군이 주둔하지 않은 지방이나 미군 점령이 늦어진 지방에서는 건준·인민위원회가 경찰서 등 기관을 접수해 치안을 유지했으나, 서울에서는 건준·인민위원회가 접수 도중 미군의 후원을 받은 일제 경찰에 의해 저지되었다. 주도권을 빼앗길 것을 우려한 한민당도 방해하였다. 도시게릴라 작전을 펴서라도 일본 경찰의 폭압적 단속을 막고, 미군에게 항의해야 한다. 떠나는 왜놈들이 중무장한 상태로 끝까지 버티고 있다면 해방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제2의 독립투쟁이 불가피하다.
-몽양은 조선총독부, 미군정, 한민당으로부터 공격을 받고 있다. 소극적 대응이 더 위축을 불러온다. 죽음으로써 당당히 맞서자. 테러단을 구성할 것을 제안한다.
-아놀드 미군정장관 성명은 정치단체, 귀환 병단 또는 일반 시민대가 경찰력 및 그 기능을 행사하는 것을 금한다고 했다. 미 제24군단 사령관 하지 중장은 친일파·대지주들로 구성된 한민당을 상대할 뿐, 몽양 선생에 대해서는 무시했다. 아놀드 군정장관이 기자회견을 열어 ‘명령의 성질을 가진 요구’라며 “자칭 조선인민공화국이든가 자칭 조선공화국 내각은 세력과 실체가 없는 것이다. 만일 이러한 직을 참칭하는 자들이 흥행적 가치조차 의심할만한 괴뢰극을 하는 배우라면 즉시 그 극을 폐막하여야 할 것”이라고 했다. 몽양을 ‘흥행적 가치조차 의심할만한 괴뢰극을 하는 배우’라고 매도했다. 정당한 소리가 가로막히고 있다.
-미군이 한반도에 진주하기 전 일본군과 서로 통신을 주고받은 결과로써 건준이 무력화되었다. 건준과 인공은 일본 경찰과 미군 양측으로부터 협공을 받고 불법화되었다. 국내의 제 정파들이 주도권 다툼을 벌이며 제 식구끼리 총질하다 보니 양자 모두 쓰러지게 되었다. 이런 조선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
-건준 결성과 인공 수립을 선언한 것은 성급했다. 충분히 협의의 과정을 거쳤어야 했다.
-소련군은 행정권을 인민위원회에 이관한 데 비해 미군정은 인공도 임정도 인정하지 않았다. 미군정이 기존의 관료조직, 경찰조직, 자본가의 인적·물적 지원을 받으니 식민지 청산은 사실상 물건너 갔다. 이런 처사에 항의하는 대중적 도덕적 기반을 갖고 있는 세력이 이적시되고 있다.
-외세에 기대어 터를 잡는 기생충들. 토착 왜구에 희망이? 민족·국가존엄을 최우선 가치로 하는 수구 보수주의자가 거리낌없이 외세에 기댄다. 조선조 때 유교 철학을 관념적으로 해석하고 현실과 괴리시켜 국력을 약화시키고, 일제 강점을 초래한 노론 당파의 후예답게 나라 팔아먹을 때는 불가피하다고 현실론을 들먹인다. 혼이 없는 매국노들. 매국 깡패들에게 얹혀 세상이 지배되고 있다. 조국의 미래를 절망한다.
-사는 것에 대한 이유의 부재와 조선민족이 겪는 고통의 좌절이 아프다. 왜 부조리한 환경이 조선민족에게만 부여되었는가. 가해자는 패망해도 떵떵거리는데 피해자는 갈수록 절망의 구렁창으로 빠져든다. 과연 신이 있는가.
-허무적인 역사 결정론이 더 허무적이다. 분단과 분열이 운명이라고 체념하고, 대결을 국민기질이라고 자기부정하는 것이 패배주의다. 나라를 세우려는 의지도 없이 외세의 처분만을 기다린다는 것이 더 큰 패배주의다. 내가 먼저 행동하고 연대할 때다.
-인구의 80% 가량이 농민인 상태에서 일제 강점기를 거치며 많은 토지가 친일파 대지주들의 소유가 되었고, 이로인해 대부분의 농민들은 소작인으로 전락했다. 토지개혁은 피할 수 없는 과제다. 건준이 전국인민대표대회를 개최해 인공 수립을 선언하면서 일본제국주의와 민족반역자들의 토지를 몰수하여 국유화하고, 이를 농민에게 분배하고 비몰수 토지의 소작료는 수확물의 30%만 지주에게 주고, 70%를 소작인이 갖는 3·7제를 하기로 한 방침은 합리적이다. 일본제국주의자와 민족반역자들의 광산, 공장, 철도, 항만, 선박, 통신기관, 금융기관 및 기타 일체의 시설을 몰수하여 국유화한다, 18세 이상 남녀 인민(민족반역자는 제외)의 선거권, 피선거권의 향유, 특권을 허용치 않고 전 인민의 절대평등 보장, 여성의 완전한 해방과 남녀평등권 보장, 8시간 노동제의 실시, 만 14세 이하 소년의 노동금지, 만 18세 이하의 청년노동 6시간제 확정, 최저임금제 확립, 고리대금업 제도 철폐, 고리대금업적 대차 관계 파기 등을 환영한다. 토지문제는 반봉건적 반농노적 관계로부터 농민을 해방하여 그들이 절대적으로 원하는 토지를 보장해주는 것이므로 환영하는 바이다.
(김종민의 ‘해방정국 친일파 상대한 미군정, 치안 맡은 일본군 비극의 씨앗’ 일부 인용>
-통일은 저절로 오는 축복이 아니라 눈물과 피로 일구어내는 보상이다. 분단으로 이익을 챙기는 기득세력의 방해와 저항을 분쇄하자. 외세에 기생하는 기득권 세력은 민족이란 단어는 촌티나고 의미없는 삶의 악세사리라고 비웃는다. 외세지향 대 민족세력의 대결로 갈 것이 분명하다. 강경 대결론자들이 협상하자는 민족세력을 빨갱이 공안몰이로 공격하면서 권력과 자본을 독점하며 이익을 챙기고 있다.
-오스트리아 사례에서 배우자. 오스트리아는 영세중립국을 모토로 제 정파가 분할 점령한 4대강국을 몰아내는 중이다. 그 힘은 단결이다. 그 힘으로 4대국 신탁통치 10년을 통일로 답할 것이다.
-미군이 패전국 일본과 내통하는 뒤를 캐내야 한다. 미군정 인맥 관리가 우리가 나아갈 방향의 큰 미션이자 솔루션이다. 정보 탐지를 강화하고, 그런 정보를 가공하는 기술을 익혀야 한다. 미군정 군사국에서도 좌우합작을 지원하는 인물들이 있다. 이들 인맥을 활용할 필요가 있다.
의견들이 자유분방하게 쏟아져 나왔다. 아이디어를 모아 살핀 뒤 박승환이 오민균을 불렀다.
“여러 의견들을 정리할 수 있겠나? 이걸 가지고 조국의 방향성을 찾아보도록.”
“군사영어학교에 입교했숩니다. 시간이 없을 것 같습니다.”
“그것 잘 됐군. 오생도는 군에서 한 역할 애햐지. 여기 모인 상당수의 생도들이 국경(국방경비대)과 군영에 들어갈 것이다. 최남근 김종석 이기선도 들어갈 것이다. 귀국하지 않은 박정희도 들어갈 것이다. 오 생도는 찬반탁이건 좌우익이건 좌고우면하지 말고 이들 선배들과 비선을 확보하고, 군생활에 충실하라. 때가 올 것이다.”
“알겠습니다.”
그러나 최명산은 모임의 성격이 취향에 맞지 않다며 그 길로 백씨 산장을 떠났다. 최명산은 곧바로 서북청년회에 입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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