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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에 그토록 많은 항일 독립군이 활약했단 말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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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에 그토록 많은 항일 독립군이 활약했단 말이오?"

[팩션] 실록소설 '행군-어느 민족주의자를 위한 변명' <10>

해방 후 왜곡된 역사 속에서, 지금까지의 한일 관계는 효용을 다했다. 그러나 예고된 갈등이었다. 일본은 구한말과 일제강점기 35년, 8.15 광복과 분단체제, 그 이후 70년의 강고한 구 체제 시스템 속에서 우리 내부 깊숙이 침투해 들어와 알게 모르게 생활의 일부가 되었다. 그 안에 우리 내부의 모순과 고뇌가 응축되어 있다. 이 모순과 고뇌를 탐구하려면 어떤 방법이 있을까.

한 개인사를 통해 시대와 사회를 비추는 거울 역할을 하는 것이 문학의 영역일 것이다. 그동안 우리는 외세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생존이 우선이었던 관계로 자기 자신을 앞세우지 못했다. 우리는 너무 쉽게 잊어버렸고 안일했다. 그러다보니 역사는 박물관에 소장된 문화재인 양 화석화되고, 현대의 역사는 더군다나 묻혔다.

기자 출신 이계홍 작가의 실록소설 '행군-어느 민족주의자를 위한 변명'은 그런 배경에서 나왔다. 이 소설은 2016년 10월호부터 2019년 6월호까지 문예월간 '월간문학'에 연재되었던 소설이다. 월간문학 연재를 마친 뒤 많은 부분을 수정 보완해 프레시안에 재수록한다.

이 연재물은 이른바 '팩션(Faction)'이다. 팩트와 픽션의 사이 어디에서 역사적 사실에 상상력을 덧붙인 '논픽션' 형식의 소설이다. 필자는 취재의 일환으로 일제강점기 말 일본 육사 출신 젊은 생도들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어지러운 시대, 그 안에서 제국주의 광풍에 휘말린 젊은이들의 시각을 잡아내려 했다. 이계홍은 "일본의 극우 정권이 일제강점기의 역사적 사실들까지도 왜곡하는 역사 모독에 대해 하나의 담론시장을 형성하자는 데 목적이 있다"고 했다. '행군-어느 민족주의자를 위한 변명'은 총 33회로 나뉘어 연재될 예정이다.(편집자)

바로가기 : 실록소설 '행군-어느 민족주의자를 위한 변명' 처음부터 보기

제10장, 사설 군사단체들, 휘날리는 깃발

"소개장을 가져왔다고 했나요?"
아고 대령은 청년의 말을 얼른 알아듣지 못하고 소파로 나왔다. 그는 미 군정 군사국 차장으로서 근래 군사영어학교(이하 군영) 창설을 서두르고 있었다.
"네, 저는 일본 육사를 다니다 해방이 되어 귀국한 오민균입니다. 몽양 선생께서 아고 대령 각하를 찾으라고 하셨습니다."
"자리에 앉으시오."
아고는 오민균을 소파에 앉도록 권하고, 그도 그의 맞은편 자리에 앉은 뒤 오민균이 내민 소개장과 이력서를 받아보았다.
"그래, 일본 육사에서는 어떤 과목을 배웠소?"
"제식훈련, 군정학, 병학, 일본사와 세계사, 기하학 대수학 화학을 배웠습니다."
"독일 육사 커리큘럼과 같군. 엘리트 장교를 양성하는 것이지만, 실전경험을 쌓는 교과목 위주지. 우리 군영에선 참모학을 배우고, 실전 배치를 위한 제반 지휘관 교육을 실시할 거요. 차량교육과 소총의 분해 결합까지 마스터할 것이오."
"거기에 하나 건의 말씀을 올린다면, 한국사와 세계사를 포함하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아고 대령이 알듯말듯한 웃음을 지었다. 사무실 한쪽 벽면에는 대형 한국 지도와 세계 지도가 나란히 붙어있었다.
"군영은 속성 과정이라서 그런 교양과목을 선택할지는 미지수요. 몽양 선생도 역사교육을 강조하더군. 그러나 교수진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는 애로가 있소. 한국에 한국사를 하는 사람이 없다니, 나도 놀랐소. 우리도 모르고 들어왔는데, 한국인도 잘 모르고 있었소."
"식민지 교육의 폐해입니다. 일본이 그렇게 잔혹하게 조선을 말살시켰습니다."
"흥미롭군. 그래서 우리는 자유롭게 생각하고 토론할 수 있도록 사상의 문제까지도 폭넓게 허용하기로 했소. 요즘 조선 사회의 분위기가 그러니까 따르도록 하고. 그것이 민주주의의 가치를 습득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라고 믿소. 겉멋으로 공산주의에 빠지는 것보다 그 실체를 정확히 아는 것이 중요하지."
"동의합니다."
"미국 군대를 어떻게 생각하시오?"
"일본 군대 문화에만 익숙해 있어서 사실 잘 모릅니다. 흥미롭게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군대 간다 하면 힘든 곳에서 고생한다고 여기는데, 달리 말하면 공동체 의식을 훈련하는 곳이오. 휴매니티의 포용성을 확장한다는 관점에서 미국 군대를 보아야 해요, 오해들을 하는데, 미 연합군은 적을 거꾸러뜨리기 위해 마구 총질하는 서부 사나이가 아니오. 군국주의 파쇼처럼 약탈하고 인권을 파괴하는 행위는 용납될 수 없소. 파쇼 군국주의자일수록 단일의 생각과 단일의 행동을 요구하지만, 미합중국 군인은 개성있는 자유분방한 기질을 익히라고 요구하고 있소. 그런 가운데서 애국심이 우러나도록 하는 거요. 강제된 애국관이 아니라 자발적인 애국심이오. 그것이 국가에 헌신하는 토대가 될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지. 군대가 남자로서 거쳐야 할 필수 코스라면, 그곳이 사회와 고립된 유령 섬이 아니라 한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민주시민으로서 연대감을 익히고 국가관과 애국관을 기르는 교육장으로 활용해야 한다는 것이 내 소신이오. 하지만 당신들은 일본 군대문화에 젖어서 '요시! 도츠게끼!' 밖에 모르더군, 하하하..."
"저는 지금까지 미국을 악마로만 배웠습니다. 저 뿐만 아니라 벗들 역시 미국 군대를 쏘아죽이고 찔러죽이고 찢어죽이자는 대상으로 증오를 키웠습니다. 그러니 지금 가치관의 혼란을 겪는 친구들이 많습니다. 엊그제까지만 해도 쳐부숴야 할 적인데, 어느날부터 아군이 되어야 하니. 거기에 해방군이 아니라 점령군으로 왔다는 데 적의감을 품고 있는 친구들도 있습니다."
"이해하오. 그동안 주적으로 간주하고 서로 총질했으니... 나는 한국에 와서 악마를 보았소. 압제에 피해를 입었으면 서로 상처를 씻어주고, 더불어 일어서는 해법을 찾아야 하는데, 일본이 물러간 뒤 서로 평생의 원수처럼 서로들 저주하며 싸우고 있단 말이오. 마치 운명적으로 만난 원수들 같소. 두 번 다시 만나지 않을 사이들처럼..."
그는 요즘 한국 상황을 짚고 있었다.
"한국 지도자들을 차례로 만나보았는데, 그들에게선 한결같이 일본 군사문화가 지배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소. 똑같은 것을 바라보고, 똑같은 생각을 하고, 똑같은 행동을 해야 안심하는 것 이오. 거기서 벗어나면 스스로 불안해하고, 자기와 길이 다르면 단번에 부정해버려. 상급자가 지시하면 아랫 사람은 으레 따라야 한다고 믿고, 나쁜 것을 번연히 알면서도 따르고, 끝내는 그것을 정당화·합리화해요. 그것이 그들만의 이익이라서 그런가. 원하는만큼 빠르지 않더라도 귀를 기울여서 진지하게 논의하고 합의하는 과정이 필요한데 생략돼버리오. 오 생도, 그래, 미국 대통령은 어떤 신분인 줄 아는가?"
"헌법을 준수하고 국가를 보위하는 국민의 대표자지요."
"교과서적으로 보면 그렇지. 국가를 보위하는 국민의 총사령관이지. 그러나 미국 대통령은 수많은 갈등과 싸워야 하는 통합의 사령관이오. 특정 세력의 이익만을 대변하는 신분이 아니지. 그런데 한국의 지도자들은 자기 세계관에서 벗어나면 그 즉시 적으로 돌리더군. 자기와 다르면 틀리다고 부정하지. 분열적이고 독재적 발상이오. 그런데 예외적 인물을 만났소."
"예외적 인물, 누굽니까."
"나이브하지만 경청과 존중을 아는 사람이오. 그래서 그와 친구가 되기로 했소. 몽양이란 사람이오."
"네." 하고 오민균이 가볍게 수긍했다. 일순 말이 통하는 미국 군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의 입지는 갈수록 좁아지고 있소. 기회주의자로 몰리고 있소. 우리는 그를 인정하려고 하는데, 국내 지도자들이 배척하고, 그를 버리라고 거칠게 요구하고 있소. 유연하다고 해서 원칙이 무너지는 것이 아닌데, 철저히 마이너리티로 밀어내고 있소. 그것은 좌익이건 우익이건 마찬가지요. 두 세력 모두 그를 없는 것으로 간주해요."
"왜 그렇습니까."
"그건 내가 질문하고 싶소. 왜 그런 거요. 왜 지도자들은 라이벌을 제거하려 하고, 편을 갈라서 분열을 확장하는지 모르겠소. 딱히 명분과 실리가 있는 것도 아닌데 다른 의견을 내면 당장 적으로 간주해버리오. 내가 조선총독부 관리로부터 조선조 왕의 에피소드를 들었지. 상을 당하자 신하들이 모자의 깃털을 오른쪽에 꽂아야 옳으냐, 왼쪽에 꽂아야 옳으냐로 피터지는 싸움을 벌이고, 그것으로 편이 갈려서 처참하게 죽고 죽이고, 그래서 엄청난 인적 손실과 국가적 에너지가 소모됐다는 말을 들었소. 그것이 오늘의 현실에서도 그대로 진행되고 있다고 보아지누만. 그게 답변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어쨌든 난 실망했소. 왜 경쟁하지 않고 제거해야만 내가 산다고 생각할까."
오민균은 침묵을 지켰다.
"그런 중에 섬세한 고급장교를 만났는데, 그는 우리가 할 일을 알아서 척척 해결했소. 디테일에 아주 강한 사람이더군. 이응준이란 고문관인데, 그는 생도 모집에 있어서 사상과 신원을 구분하지 않는다는 것을 불안해하더군. 그래서 내가 지시했소. 우리 미합중국은 그 어떤 것도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포용한다. 그러니까 군말없이 따르더군. 성실하게 내 군사철학을 이행했소."
"일제는 사상과 신원을 철저히 구분했죠. 일본은 일본 군국주의를 반대하는 사회주의를 이적시했죠. 그 영향일 겁니다. 한데 그게 군대에서만은 일정 부분 옳다고 생각합니다. 군대는 국가정체성을 분명히 하고, 이를 지키는 조직이니까요."
"우리가 일본군과 똑같이 사상검열을 해서 생도들을 입교시킨다는 것은 민주적 다원성을 해치는 일이고, 일본군을 닮으라는 것이고, 우리가 자신없는 나라가 된다는 것이오. 그래서 반대요. 미국 군대는 개인적 종교의 자유를 허용하듯이 사상의 지유도 보장하고 있소. 그것이 다양성과 다원성을 받쳐주는 민주국가의 기둥이 될 수 있지. 정체성은 국가주의 하나로 족하오."
오민균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독특한 시국관이고 사상관이었다. 그가 덧붙였다.
"우리는 군부 내의 사상문제는 앞으로 세워질 국방경비대 자체의 기구를 통해 조정되어야 한다고 믿소. 이응준 고문관의 견해를 포함해서 졸속이 되지 않고, 사람이 다치지 않도록 조처하는 것이오. 좌우간 이응준 같은 실무책임자가 우리 군에 들어왔다는 것이 우리에겐 매우 유익하오."
이응준은 일제 말 일본군 용산수송사령부 사령관으로 근무하던 일본 육사 26기 출신의 대좌(대령) 출신이었다. 그는 일본군에 협력했다는 이유로 한동안 자숙하며 근신중이었는데, 미군정청이 그를 불러내 건군 작업에 참여시켰다. 이응준은 아고의 사상검증 불필요 방침에 부정적이었으나 아고가 반대하자 이의없이 따랐다.
"군영과 곧 창설될 각 연대 병력은 군인으로서의 숙련도를 우선적으로 살피기로 했소. 건강한 신체의 남자면 충분하오. 그런데 사설 군사단체가 이들을 흡수하고 있으니 우리와 경쟁하자는 것인지, 납득할 수 없소. 그들은 완전히 군벌 체제요. 소문대로 비적 무리 아닌가?"
아고는 미군 태평양사령부의 정보장교와 작전참모로 복무한 고급장교였지만, 한반도에 관해서는 지식이 없었고, 그래서 서울에 군사 단체가 난립하는 배경을 잘 알지 못했다. 그는 이렇게 많은 군사단체가 활약했다면 일본군을 무찌르는데 큰 힘이 되었을 텐데 그 존재가치가 희박했다는 데 대해서도 의구심을 갖고 있었다.
미군은 일본군을 물리치기 위해 어떤 누구와도 연대를 모색했다. 그러나 조선의 군대는 시야에 잡히지 않았다. 조선의 제 군사단체들이 미연합군과 합세해 한반도로 진격했더라면 소련군을 불러들일 이유도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38선도 있을 수 없다. 그들의 존재 자체를 몰랐으니 소련에 참전을 요구했고, 38선에서 마주쳐 일본군을 무장해제시켰던 것이다.
"조선의 군사단체들이 연합군과 네트워크를 구축하지 못한 것은 그들이 영어를 몰라서인가?"
"단순히 영어를 몰라서가 아닙니다."
그는 미국을 적으로 알았던 식민지 백성의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다.
"저희 항일 투사들은 중국땅에서 중국이라는 창을 통해 세계를 보았습니다. 일본군의 헌병부대와 간도특설대 등 첩보 진압부대의 포악성 때문에 도망다니며 활약했고, 이름까지 두 개 세 개씩 바꿔가면서 변장과 변복을 하며 활동했습니다. 그렇게 해야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으니까요. 이러니 밥 한끼 해결할 처지가 못되고, 때로는 나무껍질, 풀뿌리를 뜯으며 산골짜기를 헤맸습니다. 그들은 일본군과 헌병대에 희생되었는데, 그중 저와 같이 일본군에 들어간 조선인 헌병과 밀정에 의해 많이 다치고 죽었습니다. 조선인의 생활방식과 근거지를 그들이 잘 아니까 적발해내기 쉬웠죠. 조선인 밀정을 통해 근거지를 알아내고 정밀타격해서 전과를 올립니다. 그 세력들이 어느새 미군의 품안에 들어가 건국의 중심이 되고 있습니다. 이것이 역사의 역설입니다. 미국이 그것을 알고 있나요?"
"일본군에 소속된 조선의 군사들이 항일운동 투쟁자들을 섬멸했다, 그 말이군?"
"그렇습니다. 항일 독립지사들의 투쟁은 일제의 보도 통제로 가려지거나 범죄집단으로 몰아붙여서 가려졌을 뿐, 그들의 전과가 적지 않습니다. 투쟁 시 병참 보급이 힘들기 때문에 한인마을, 중국마을에 들어가 민폐를 끼친 경우가 있습니다. 일본군은 이들을 도둑으로 몰아 주민과 이간질하면서 소탕작전을 폈습니다. 그렇게 해서 독립운동 투사들은 본의아니게 비적(匪賊)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철저하게 일본 헌병대의 모략에서 나온 이간책동이지요. 항일무장 투쟁가들은 농가의 삽을 사용하면 반드시 삽을 씻어서 제 자리에 갖다 놓았고, 밥을 먹으면 그에 합당한 노동을 해주고 떠났습니다. 한두 사람의 사례를 가지고 전체로 매도하는 것은 일본군이 저지르는 가장 비겁한 마타도어이아 데마고기입니다. 조선의 투쟁자들은 이들과 싸우다 보니 연합군과의 외연 확장에 소홀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습니다. 하지만 한민족은 이런 선구자들을 신화로 만들어 인민을 구원할 메시아로 여기고, 늘 해방을 꿈꾸었습니다."
오민균이 열을 올려 말하자 아고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질문했다.
"그런데 돌아온 그들은 왜 파쟁과 이념투쟁만 하고 있는가."
"그것 또한 일제 36년의 분열책동 후유증입니다. 서로 불신하고 배척하는 풍조가 만연한 것이지요."
"귀관 역시 조국을 찾겠다는 애국지사를 체포하고, 연합군을 공격하고, 일본의 세계 지배를 위해 일본 육사에 들어간 것 아닌가."
그의 표변한 태도에 오민균은 잠시 당황했다.
"일면 맞습니다만, 그러나 다릅니다."
"뭐가 다르다는 건가."
"일본군 장교를 지망한 건 맞습니다. 그러나 일본이 제 조국은 아닙니다. 장제스도 일본 육사를 나왔지만, 중국 국부군의 총사령관이었습니다."
"그래도 다이니뽕 데이고쿠 반자이!(대일본제국만세), 덴노헤이카 반자이!(천황폐하 만세)를 외치지 않았나. 귀관 말대로 다른 조선인들은 조국의 독립을 위해 투쟁할 때, 귀관은 황실문장이 새겨진 니뽄도를 차고 저패니스 스피리트라는 야마도 다마치(대화혼)를 외치며 도츠제키! (돌격 앞으로), 도츠제키를 외치지 않았나?"
오민균은 순간 모욕감을 느꼈지만, 순순히 받아들였다. 그의 말은 결코 틀린 말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아고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약속이 있으니 오늘은 이만하겠소. 주말에 다시 만납시다. 좀더 얘기를 나눠야 하겠군. 내가 저녁을 살테니 친구들과 함께 나와도 좋소. 조선 청년들의 생각이 뭔지 사심없이 듣고 싶소. 귀관의 군영 입교는 고려해봅시다. See you later!"

한 겨울인데도 종로통은 와글와글 한 여름 술독처럼 바글거렸다. 플래카드를 들고 거리를 활보하는 각 정당의 애국청년들, 다방 구석마다 정치족과 건국배. 설익은 사회주의, 자본주의, 민주주의를 토론하며 건국 체제를 말하는 청년들, 서울 거리는 그런 정치탐닉과 선민의식이 사회적 대세를 이루고 있었다. 다방이든 살롱이든 대폿집이든 어딜 가나 정치 얘기와 애국론이 담론의 중심이 되었다. 그러나 그런 정치 과잉은 헛배만 부를 뿐, 무엇 하나 해결되고 뚫린 것이 없었다. 언어의 홍수는 말 그대로 추상적인 레토릭만 먼지처럼 거리에 나풀거렸다.
종로통의 카페 보헤미안.
서양식 고급 카페로 주로 미군들이 이용하고 있었다. 문을 열고 홀로 들어서면 기다란 스탠드바가 있고, 그 앞에 카키색 제복의 미군들이 줄줄이 앉아서 바텐더가 익숙하게 제조한 칵테일 술잔을 기울이며 분위기에 젖어가고 있었다. 칸막이된 홀에선 신사복 차림의 한국인과 미군이 섞여서 술을 마시고, 그 한쪽 스테이지에선 흐릿한 조명 아래 미군들이 여자를 끼고 블루스를 추고 있었다.
아고 대령은 단골인 듯 그가 들어서자 웨이터가 바람처럼 달려와 허리를 굽신하고 안쪽에 미리 자리를 잡고 앉은 조선인들에게로 안내했다.
"조선에서 그토록 많은 항일 독립군이 활약했단 말이오?"
아고 대령은 술잔이 몇 순배 돌고 거나해지자 이쾌대에게 물었다. 오민균은 이쾌대와 항일유격대 출신이라는 그의 친구 김천산과 함께 보헤미안에 왔다. 아고의 청을 받고 데리고 나온 사람들이었다.
"북만주에서 유격대로 활동해온 김천산 동지를 데리고 왔습니다."
오민균이 김천산을 소개했다. 행색은 꾀죄죄했으나 눈이 날카로운 김천산은 아고 대령을 곁눈질로 훑고 있었다. 경계하는 눈빛이 완연했다. 아고가 그에게 술잔을 내밀었다. 김천산이 술잔을 받은 뒤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미연합군사령부가 한반도 사정에 무지합니다."
실제로 미국은 한국 점령과 지배에 대비한 사전정보나 준비가 부족했다. 이 점은 당시의 대통령 트루만 회고록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2차대전 전, 대한민국에 대해서 아시아의 동쪽 먼 끝에 위치한 이상한 나라라는 정도 이상의 지식이나 관심을 가졌던 미국인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 극소수의 선교사를 제외하고는 1945년 늦여름, 미국 점령군이 상륙할 때까지 미국인들에게는 이 "조용한 아침의 나라"를 알 수 있는 기회가 드물었다.
-트루만 회고록(한림출판사 1971) p.379

아고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래서 내가 여러분을 만나자고 한 거요. 귀하는 영어가 능통한데 유학파인가?"
"임무 때문에 영어와 로스케 말을 배웠습니다." 김천산이 대답했다.
"미스터 김, 내가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소. 한국은 일본의 일부가 아니었던가?"
"아닙니다!"
단번에 부정의 목소리가 나왔다. 강한 거부감 때문에 그의 목소리는 컸다.
"난 조선 반도가 일본의 일부이기 이전에는 중국의 일부로 알고 있었는데?"
"그것도 틀린 말입니다."
"그게 아니라니? 청일전쟁 뒤 일본과 중국이 맺은 협정 제1항에는 '중국은 조선의 종주국임을 주장하지 않는다'고 되어있소. 일본과 미국이 맺은 가쓰라-테프트 밀약(1905)에서도 미국의 필리핀 독점권과 일본의 조선지배권을 서로 인정했소. 일본은 필리핀에 대하여 침략적 의도를 품지 않으며, 미국의 필리핀 지배를 확인한다. 대신 한반도는 일본이 지배할 것을 승인한다고 합의했소. 가쓰라-데프트 협정에 따라 일본이 조선을 식민지로 삼은 것을 미국이 양해했던 것이고, 그래서 일본은 중국으로부터 종주국 자격을 빼앗아 조선 식민지 근거를 마련했던 것이오. 일본이 조선을 강제 병합하기 전엔 조선은 중국에 조공을 바치고, 세자 책봉도 황제의 허락을 받지 않았는가 말이오."
아고는 냉철하게 사물을 꿰뚫고 있었다. 일본이 러일전쟁, 청일전쟁을 승리로 이끌자 미국은 일본과 우호조약을 맺었다. 아시아 태평양 패권을 함께 나누겠다는 조치의 일환이고, 상호 전쟁하지 말자는 협약이었다. 그래서 양국은 식민지를 나눌만큼 긴밀한 협력 관계를 유지했다. 거기에 비해 조선 왕국은 밖의 사정에 어두웠다. 도도하게 흐르는 제국주의적 세계 지배전략을 알지 못했다. 알더라도 관념적이거나 막연했으며, 도포자락 휘날리며 어른행세하는 것만으로도 기득권 체제가 유지되었으니 알 필요도 없었다.
이런 역사적 배경도 해방관리에 있어서 발언권을 얻지 못한 큰 요인이 되었다. 오민균은 한반도가 강대국이 거래하는 물건 취급을 받는다는 모멸감에 한동안 몸을 떨었다. 알면 알수록 수치스러웠다. 지금도 한반도 운명의 논의 과정에서 주인의 의사는 외면된 채 노예처럼 거래 대상이 되고 있다. 아고는 그런 시각으로 한반도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한반도 이해도가 높다는 그도 이 모양이었다.
"미개한 조선 사람을 일본인이 들어와서 교육시켰다고 했소. 그들은 중국의 일부지만 변방으로서 하대받은 조선을 일본이 대신 근대화시켜주었다는 데 남다른 긍지를 갖고 있소. 능력이 부족한 중국 대신 일본 제국이 한반도에 근대화 프로그램을 진행했다는 거요. 조선총독부 관리는 수천 년간 한반도는 중국의 지배를 받았다고 했소. 일본이 아니었으면 젊은이들이 서당에서 공자왈 맹자왈로 하세월했을 것이라고 했소. 문맹도 90% 이상이었다고 했소. 그런데 일본이 신식학교를 세워서 국민 교육을 실시하고, 호적과 논밭의 지적도, 철도망, 화학공장, 비료공장, 방직공장을 세우고, 수리시설을 갖추었다고 했소. 한국의 일부 엘리트들은 조국이 번영해가는데 갑자기 해방된 것이 안타깝고, 이렇게 빨리 해방될 줄 몰랐기 때문에 혼란스럽다고 했소. 조금만 더 나갔으면 문명국이 될 수 있었는데, 그 기회를 박탈당했다고 안타까워 했소. 틀린 말인가?"
"개새끼들!" 김천산이 소리쳤다. "그자들은 그렇게 스스로를 열등민족으로 가두었습니다. 한국과 중국이 복잡한 역사적 관계를 갖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닐뿐더러, 실제적으로 단 한번도 종속된 적이 없습니다. 대국 대 소국으로 공존했을 뿐입니다. 반면 일본은 우리를 침략했고, 지배했고, 억압과 수탈을 강요했습니다. 수많은 사람을 일본 군대로, 징용으로, 어린 처녀들을 잡아서 성놀이개용으로 전선으로 보냈습니다. 일본은 철저히 조선을 짓밟았습니다. 철저히 밟은 것과 공존을 구분하지 못하다니요? 그 말 진정입니까?"
"조선이 990번의 외침을 받은 것 중 일본으로부터는 20%, 중국대륙으로부터 80%를 받았다고 하던데, 그것은 무엇으로 설명하겠소? 그리고 일본은 조선을 개화시켰다고 하잖소."
"일본은 우리를 노예로 만들었습니다. 이름까지 빼앗고, 전쟁 도구로 이용했고, 열등민족으로 몰았고, 어린 소녀까지 황군의 배설 도구로 사용했다니까요. 거기에 영합하고 굴종하는 사람만 혜택을 받았을 뿐, 조선반도는 철저히 불구가 되었습니다. 중국이 조선반도에 영향력을 행사했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개념입니다. 그래서 저항은 당연하며, 정당성이 있는 것입니다. 중국은 대국으로서의 품위를 잃지 않았습니다. 조공을 바치면 그보다 더 많은 은혜품이 왔습니다. 그것을 특권층이 독식한 구조라는 것이 문제였을 뿐입니다."
"나는 조선의 비적들이 군벌 휘하에서 만주와 시베리아에서 약탈행위를 일삼거나, 일부는 일본인의 첩자 노릇을 했다는 보고를 받았소. 산적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이었소. 소련측도 그런 그들을 보고 의심한 끝에 1937년 조선족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시키기까지 했다는 거요. 일본 첩자 노릇을 하기 때문에 강제 이주시켰다는 사실은 부정하지 않겠지요?"
김천산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친일 세력과 그 망나니들이 퍼뜨린 말에 놀아나다니. 당신이 정녕 한국을 도우러 온 해방군이오? 당신은 쪽발이의 이간질과 분열책동에 놀아나는 얼간이 아니오?"
"참아요." 이쾌대가 그를 제지했다. "아고 대령은 우리를 방해하기 위해 질문하는 것이 아니라, 공부하기 위해 우정을 갖고 질문하는 사람이요."
아고가 눈치를 못채고 물었다.
"일본관동군 중에 첩보부대인 간도특설대는 뭔가. 항일 조선인을 잡아들인 부대가 아닌가."
"간도특설대? 간토 도쿠세스부타이라고, 한마디로 쓰레기들입니다."
김천산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 부대의 대원을 내가 알지. 간토 도쿠세스부타이에서 큰 전공을 세웠다고 했소. 소련 공산당으로부터 두 차례나 체포돼 사형선고를 받고 탈출해 자유를 찾아 월남했다는 사람이오. 훌륭한 자유 투사요. 김창동이란 사람이오."
"아고 대령 각하, 독립운동을 하던 조선민중을 미행, 감시, 체포, 구금, 고문하며 승승장구한 민족반역자들이 있습니다. 잘 보세요. 건국을 위해 그들을 데려다 쓴다고요? 정보를 잘못 접하면 정책수행에 큰 오류를 범합니다. 우리의 독립전쟁투쟁사를 말해줄 거니까 잘 들으세요. 그건 미국 서부영화의 수천 편을 하나로 모은 것보다 더 장엄한 드라마요."
김천산이 양주를 단숨에 들이켠 다음 흥분한 목소리로 설명하기 시작했다.
"우리 선혈들의 무장독립전쟁은 1910년대부터 시작됩니다. 국권피탈 이후 만주와 연해주 일대에 항일 투쟁의 거점을 마련했는데 용정, 명동 등 북간도, 남만주의 삼원보, 블라디보스토크의 신한촌 등이 근거지입니다. 1920년대엔 천마산대, 보합단, 구월산대가 활약했습니다. 삼둔자전투와 봉오동전투에서 독립전쟁 전과를 크게 올렸습니다. 홍범도 장군의 대한독립군, 최진동 장군의 군무도독부군, 안무 장군의 국민회군의 연합부대가 두만강을 건너 삼둔자에서 일본군을 격파했습니다. 독립군의 본거지인 봉오동을 기습해온 일본군을 대파했습니다. 독립전쟁사에서 가장 큰 승리인 청산리대첩도 있습니다. 김좌진 장군의 북로군정서군, 홍범도 장군의 대한독립군의 연합부대가 일제가 훈춘사건을 조작하여 대부대를 만주로 보내 독립군을 포위하자, 열 차례의 전투를 벌여 격파했습니다. 이것도 내가 아는 지식의 일부분일 뿐입니다."
훈춘사건은 일제가 만주로 군대를 보낼 구실을 삼기 위해 조작한 사건이었다. 일제는 마적들을 매수해 일본인을 죽이게 한 후, 만주 일본영사관과 거류민을 보호한다는 구실 아래 대규모 병력을 출동시킨 것이다. 이렇게 설명한 김천산이 덧붙였다.
"일본놈들은 언제나 음모로 세상을 보는 자들입니다. 그런 비열한 자들 위에서 우리 독립군은 용전분투했습니다. 혁혁한 무공을 세운 우리의 독립군가를 들어보시오."
그가 주먹 쥔 손으로 박자를 맞춰 흔들며 소리높여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다른 좌석에서 취한 미군들이 덩달아 박자를 맞추며 손뼉을 쳤다.

요동만주 넓은 뜰을 쳐서 파하고
여진국을 토멸하고 개국하옵신
동명왕과 이지란의 용진법대로
우리들도 그와 같이 원수쳐보세

나가세 전쟁장으로 나가세 전쟁장으로
독립군아 용감력을 더욱 분발해
천번 만번 죽더라도 나아갑시다

창검빛은 번개같이 번쩍거리고
대포알은 우레같이 퉁탕거릴제
우리 군대 사격돌격 앞만 향하면
원수머리 낙엽같이 떨어지리라

나가세 전쟁장으로 나가세 전쟁장으로
독립군아 용감력을 더욱 분발해
천번만번 죽더라도 나아갑시다
<1910년대 독립군가 '용진가'>

노래를 마친 김천산의 두 눈에 물기가 어렸다. 오민균도 어떤 격정이 솟구쳐 올라 머리칼이 쭈볏 서는 느낌이었다. 김천산이 자리에 앉자 아고 대령이 물었다.
"그렇다면 조선독립군의 승리 전과는 무엇인가."
"꼭 물리적으로 승리했다는 것만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독립정신이 적의 심장을 관통했다는 것이 중요하죠. 동포 여성들이 치마폭에 밥을 싸가지고 빗발치는 총알을 뚫고 전선으로 날라 왔습니다. 마을의 남자들은 폭약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부러진 총신을 고쳐주었습니다. 이렇게 동포들은 너나없이 전사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대부분 죽었습니다."
"그러니 전술적 오류가 있는 것이오. 싸워서 점령했다면 끝까지 지켜야 하는데 치고 도망가면 정착해 살고있는 거류민만 희생되고 말지. 그들이 살려면 본의아니게 밀고자가 되어야 하고 비굴하게 협조가가 되어야 하지. 전투에서 이기면 뭘하나. 뺏은 땅은 더이상 뺏기지 말아야지. 동포들을 보호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니 더큰 패배를 맛보는 거요. 이때 미연합군을 찾아 연대를 모색했어야지. 힘께 힘을 모았다면 결과가 훨씬 좋았을 거요."
"미군은 아득히 먼 존재였습니다.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죠. 독립군은 그렇게 외로웠지만 투쟁력은 가열찼습니다. 나라 찾는 길만이 존재 이유였으니까요. 1930년대는 더 활발합니다."
그에 따르면, 양세봉 총사령의 조선혁명군이 남만주 일대에서 중국의용군과 연합작전을 전개해 영릉가전투, 흥경성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이청천 총사령 지휘의 한국독립군은 북만주 일대에서 중국 호로군과 합동작전을 펴 쌍성보전투, 경박호전투, 사도하자전투, 동경성전투, 대전자령전투에서 승리했다.
항일유격대의 활동도 두드러졌다. 이들은 중국 공산당 소속의 동북 인민혁명군으로 편성됐다가 동북 항일 연군으로 편입되었다. 갑산의 보천보전투에서 크게 전공을 세웠다. 일본군의 보복 소탕작전을 피해 일부는 소련 영내로 이동했다. 중⋅일전쟁 이후엔 중국 국민당 정부의 지원을 받아 조선민족혁명당을 조직하고 조선의용대를 창설했다. 국민당 정부군과 함께 항일전쟁에 참가했으며, 국민당군이 투쟁에 소극적 태도를 보이자 중국 공산당이 활동하는 화북지방으로 이동해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를 결성했다.
중국 공산당 군대와 더불어 호가장전투에 참가했으며, 1940년대엔 임시정부 휘하의 한국 광복군에 합류해 정식 국가조직의 군사단체로 발전했다. 이들은 공산주의·사회주의자들과 결합했으나 항일의 공동 목표를 위해 싸웠을 뿐, 이념체계에 갈등을 보이거나, 거기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충칭에서 광복군(총사령관 이청천)은 1941년 대일 선전포고를 했다.
"대일 선전포고를 했다면 병력은 얼마쯤이었소?"
"병력이 산개돼 숫자는 명확치 않지만 독자적 작전을 전개할만큼 규모를 갖추었습니다. 그중 광복군은 연합군의 일원으로 미얀마에서 영국군과 합동작전을 전개했습니다. 미군과의 협력하에 OSS 첩보단과 함께 국내 진격작전을 세우고, 진격훈련을 폈습니다."
"연합군과 함께? 서프라이즈! 난 그걸 몰랐군."
광복군은 대일 항전 선언에서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대한민국 원년(1919)에 정부가 공포한 군사조직법에 의거하여 중화민국 영토 내에 광복군을 조직하고 대한민국 22년(1940) 9월 17일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창설을 선언한다. 대한민국 광복군은 중화민국 국민과 합작하여 두 나라의 독립을 회복하고자 공동의 적인 일본 제국주의자들을 타도하기 위하여 연합군의 일원으로서 항전을 계속한다. …우리들은 한․중 연합전선에서 우리 스스로의 부단한 투쟁을 감행하여 동아시아 및 아시아 인민들의 자유와 평등을 쟁취할 것을 약속하는 바이다.

"여기서 확인하다시피 대일 항전은 우리만의 독립만이 아니라 아시아 인민의 자유와 평등을 위해 싸운 것입니다. 중국군이 연합군의 일원이기 때문에 우리도 당연히 연합군의 일원이었습니다."
김천산이 열을 뿜자 아고는 더욱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서프라이즈! 당신 말이 사실이라면 프랑스의 레지스탕스보다 더 놀라운 활약상이오. 항일전선에 투입된 여러분의 군사조직의 활약상은 하나의 장엄한 파노라마요. 전투 하나하나마다 대하 전쟁소설이 나올 만큼 장엄하고 드라마틱합니다. 한국 무장독립투쟁사만으로도 생도들의 교과목으로 채택해도 좋을 것 같소. 자랑스러운 역사요. 우리가 진작에 그 사실을 알았더라면 그 공을 인정하고, 연합군의 일원으로 받아들였을텐데 그러지 못한 것이 안타깝군. 우리는 조선인민은 모두 일본인이라고 보았소. 여러분이 있었다는 걸 몰랐소. 나아가 조선 역사와 전통, 문화적 배경을 알지 못했소. 철저히 일본의 일부로 보았을 뿐이오."
미군 장교도 놀라는 우리의 무장투쟁사를 오민균 역시 그 실체를 지금까지 모르고 있었다. 그런 자신이 한없이 부끄러웠다. 식민지 교육이란 것이 그랬다. 교사도 부모님도 숨기기에 바빴고, 알게 되면 곤욕을 치르게 되니 없는 것으로 알았다. 그들 또한 그런 지식과 정보가 없었으니 다른 방법도 없었을 것이다.
프랑스의 항독 레지스탕스는 종군기자군까지 이끌고 다니지 않았던가. 선전 선무활동을 강화하고, 연합군과 연대하고, 애국 국민의 지원을 받았다. 항일독립군도 그런 선전전을 확장해나갔더라면 대중성을 확보하는 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그것이 연합군사령부에도 전달되었을 수 있지 않았을까.
하지만 돌이켜보면 그것 또한 무책임하고 무의미한 진단이다. 말이 그렇다는 것 뿐, 어떤 누구도 노출되면 목숨 부지하기가 어려운 상황이다. 변복과 가명으로 암약한 투사들도 끝내 잡혀 비참한 죽음을 당했다. 어느 항일무장 투사의 위장에서는 나무 뿌리만 나왔다고 하지 않았던가. 산속에서 나무뿌리 풀뿌리로 연명하다 총맞아 죽은 것이다. 헌병 하나에 조선인 밀정이 1-2명이 달라붙어 활약했으니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있었겠는가.
"미스터 김을 통해 배운 바가 많았소."
"아고 대령 각하가 한국에 대해 편견과 오해에 사로잡혀 있는 것은 일본 관리들로부터 주입받은 일방적 정보 때문이라고 봅니다. 앞으로 우리와 긴밀히 협조해나가기를 바랍니다."
아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조선의 군사단체들은 중국을 통해서 세계를 보았고, 세상을 인식했습니다. 사분오열되어 확실한 주체세력이 없었다는 것도 아쉬운 대목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위대한 업적과 투쟁이 훼손될 수 없습니다."
"그래요. 연대하고 단결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군. 운동의 효율성이 떨어지고 포말화된 것이 아쉽소. 이것은 결국 강자의 의도에 놀아날 소지를 안겨주고 말지. 조직의 파편화는 강자가 관리하기 좋은 프레임이오"
아픈 대목이지만 오민균은 마음으로 동의했다. 아고 대령이 각자에게 양주를 한잔씩 따르고 건배를 제의했다.
"조선의 미래를 위해 건배!"
아고가 한사람 한사람 눈을 맞추더니 양주잔을 입에 탁 털어넣고 말했다.
"나 역시 하고 싶은 말이 많소. 서태평양 함상에서 애기(愛機)를 미국 전함에 부딪치면서 산화한 일본 가미가제 소년병(특공대)들을 보았소. 만세 돌격을 감행하며 옥새작전을 펴는 모습은 두려운 게 아니라 가련한 소꿉장난처럼 보였지. 벚꽃처럼 일시에 피었다가 장렬하게 사라진다는 정신은 기이하더군. 이런 죽음은 어디에서 연유하는가. 이것이 일본 군국주의가 만들어놓은 천황 신의 주술인가? 사쿠라 정신이라는 건가?"
이쾌대가 받았다.
"광기지요. 사쿠라꽃, 좋지요. 단순해서 그림 그리기 좋지만, 일본의 국화가 되니 사실 섬뜩해요. 사쿠라꽃이 무슨 죄가 있겠습니까마는, 일본인의 집단의식이자 무의식의 표상이 되니 단순한 꽃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생각이 복잡해집니다. 그렇게 두려움을 줍니다. 왜 그럴까요. 대화혼이라는 상징으로 천황이 사쿠라 꽃으로 의인화되어 하나의 응결체를 만드는데, 개인보다 집단을 우선시하는 정신, 절대숭배와 신격화, 그러나 속살을 들여다 보면 야만의 일체감 입니다. 그 정신이 주변국을 유린하면서 표상되니 아찔합니다. 인류에 재앙이 되는 표상, 평화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재앙을 키우기 위해 표상되는 상징 조작에 현기증이 나지요. 그런데 너도나도 거기에 첨벙 빠져들어 범죄를 모의하는 것입니다. 주변국과의 평화와 공존을 인정하지 않는 품성들이 그 안에 녹아있습니다. 그들은 지금 패망했지만 언젠가 다시 부활한다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사쿠라꽃처럼..."
"일본은 항복하면서 천황제만은 유지해달라고 애걸했소. 차후 재기의 발판으로 삼으려고 그랬던 것인가?"
"그렇습니다. 상징조작을 통해 일본을 하나로 묶고자 하는 음험한 흉계입니다."
"그렇더라도 여러분도 야마도 다마치에 철저히 복속해오지 않았던가? 특히 일본 육사 생도로서는 말이오."
이렇게 말하고 아고 대령이 오민균을 바라보았다.
"저는 어떤 확고한 신념이 있어서 그 학교를 선택한 것은 아닙니다. 식민지 소년으로서 혜택이 많은 그 학교가 있었기 때문에 지망했죠. 아시다시피 학생들에게 선망의 대상이 되었던 게 일본육사였습니다. 조선반도를 통틀어 매년 열 명 안팎의 합격생이 나오는 학교입니다. 저는 중학에 다닐 때 파견된 군관의 총애를 받았습니다. 학업성적이 우수하고 지도력과 모범적 행동, 무술이 뛰어나다는 평가로 육사 지망 티켓을 받았습니다. 가고 싶다고 해서 가는 학교가 아닙니다. 저는 그것을 영광으로 알았지 수치로 알진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일본군 장교로서 영광의 길을 간다고 생각하진 않았습니다. 입교한 뒤 민족의식이 가슴속에서 더 내연하고 있었습니다. 이시하라 상이라는 사상가를 만나면서 제 인생관과 세계관이 바뀌었습니다.""어떻게 바뀌었다는 것인가."
"내 안의 이중성을 극복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조선인으로서 일본 제국을 위해 몸 바친다는 것이 옳은 길인가 하고 고뇌하고 있을 때, 이시하라 선생은 '본질이 변하지 않으면 환경적 요인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서는 군대가 필요하고, 독립 후엔 더 필요하니 고민하지 말라. 언젠가는 유용하게 가치있게 써먹을 날이 올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일본 육사를 나와 소대장 중대장으로 복무 중 탈출해 항일투쟁에 나선 선배님들도 있습니다. 물론 천황폐하를 위해 더 많은 친일행각을 한 선배도 많지만요."
"일본군을 탈출해서 항일투쟁에 나선 장교들이 있다고? 그렇다면 그들이 과연 항일투쟁 전선에 투입된 것인가?"
"그렇습니다. 만주와 시베리아에서 독립전쟁을 주도했습니다. 노백린 김광서 김일성 지청천 유동열 이갑... 물론 아까 말했듯이 일제를 위해 헌신한 출신들도 많습니다. 일본인이지만 일본의 천황제를 통렬히 비판하고 저항하다 처형당한 사람이 있듯이, 우리도 일제를 반대한 일본 육사 출신이 많습니다."
"일본 제국주의 침략자들은 전 인민에 집단 최면을 걸어 어린 소년병을 차출해 사지로 몰아넣고 순교자라고 부른 것을 가미카제를 통해 직접 보았지. 그래서 나는 공산 독재보다 제국주의 우익 독재가 더 나쁘다고 보아왔소. 일본이 왜 이렇게 괴물이 되었는가."
"내가 본 바로는 연합국이 그렇게 키운 것이오."
김천산이었다.
"연합국이 키웠다구?"
"그래요."
아고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더니 길게 말했다.
"그런 것 같소. 세계 1차 대전 당시에는 일본의 국력이 영국, 프랑스, 미국과 견줄 만한 상대가 못되었지. 다만 영국의 동맹국으로 참전해서 이익을 보았던 거요. 일본은 인도 등 거대한 나라를 식민지로 둔 영국의 꽁무니를 따라다니며 연합군으로 참전했지. 그 덕에 1차 대전 이후 일본이 식민지 확장 정책을 펼치면서 만주에 대한 야욕으로 만주사변(1931년)을 일으켰소. 당시에는 만주의 군벌들과 비적떼들이 득실거리는 무법천지라 만주사변이 일어나자 태평양 건너의 미국인들은 부도덕한 비적떼를 소탕한 정의군으로 일본군을 평가했지. 다만 식자층은 좀 혼란스러워했지. 중국 영토인 만주를 침공한 것인지, 야비한 군벌과 비적떼가 득시글거리는 무법천지를 평정하기 위한 것인지 잘 알지 못했으니 의도를 의심했던 것이오. 그러나 중일전쟁(1937년)이 일어나자 일본의 중국 침략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미국은 일본에 대한 압박을 가했소. 당시에 영국이나 프랑스는 일본에 대해서 실질적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는 처지였소. 같은 연합국이었으니까. 그래서 미국과 함께 국제연맹을 통해 일본에 대한 압박을 가했는데, 일본이 반발한 나머지 국제연맹에서 탈퇴를 해버리지. 너희만 거대 식민지를 두고, 연합국의 일원인 일본은 가만있으라는 것이 말이 되느냐고 반발한 것이요. 식민지 획득과 확장은 선진국으로 가는 첩경으로 보았고, 식민지 획득이야말로 영국, 미국, 프랑스와 대등해 질 수 있는 지위이자 대일본제국을 확장할 수 있는 길로 보았던 것이요. 그래서 일본은 자신의 영토확장을 막으려는 강대국의 기도를 분쇄하겠다고 나선 것이오. 자기들은 자기네 땅보다 수십 배 되는 식민지를 가지고 있으면서 일본에게만 식민지 획득을 못하게 막는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는 것이오. 일본은 또 연합국의 군축회담 중 일본의 군축 비중이 많아 차별이 심하다고 보고, 1차 대전 당시 연합국(미국, 영국, 프랑스)에 대한 적대감이 커져 갑니다. 연합국이 일본을 동맹국으로 키웠지만, 일본이 같은 연합국인 중국 내부까지 침략해 들어가니 적국으로 간주했던 것이지, 다른 이유는 없소. 연합국은 전통적 우호관계나 영토 및 인구로 보아서 중국과 손을 잡아야 한다고 보았기 때문에 뒤늦게 연합국으로 합류한 일본을 침략근성을 갖고 있다고 하여 외면하지. 그 과정에서 식민지가 된 조선의 항일투쟁자들이 중국의 북부에서, 또 남부에서, 시베리아에서 비바람 눈보라를 헤치고 투쟁을 벌였다는 거였군? 안그런가?"
"자랑스럽지 않습니까?"
김천산이 받았다.
"그런데 자고나면 죽순처럼 수 십개의 군사단체가 난립하고, 수십 명에서 많게는 수천 명 단위의 대원들이 모여서 건물에 깃발을 꽂아놓고 고함만 지르고 있소. 우리는 그들이 무엇을 하는지 알 수 없소. 나의 눈에는 무의미하게 힘겨루기 하는 뒷골목의 패거리들처럼 보이오. 이러니 만주의 비적떼 출신들 아니냐고 의심해보는 거요. 당신들은 이들을 보고 조국을 해방하고 독립시킬 메시아로 가슴에 꿈을 품게 했지만 정작 돌아온 그들은 혼란의 주체, 건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오. 그러므로 이들을 관리할 책임은 미군정에 있소. 터져버린 내장 속처럼 엉망진창인 그들 조직을 하나로 묶든지 해체하는 것이 온당한 일 아닌가?"
그의 눈 뿐만이 아니라 한국인 누구에게도 혼란상은 불확실한 미래를 말해주고 있었다. 혼돈이 모든 것을 삼켜버리고 있었다.

미군정청 정보장교 데이비드 미첨 소령이 아고 대령 사무실을 찾았다. 그는 국내 신문과 영자지를 옆구리에 끼고 들어왔다.
"한민당의 고하 송진우 당수와 임정의 백범 김구 선생이 심한 언쟁을 했습니다. 휴민트를 통해 입수한 정보입니다."
1945년 12월 28일 조선반도의 신탁통치 소식이 전해졌을 때, 미첨은 고하의 움직임을 예의 주시했다. 고하는 일정 부분 미군정과 뜻을 같이하고 있었으며, 한국 통치는 미국이 의도하는 바대로 일정 훈정기를 거치는 것을 양해해도 된다는 유연한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훈정기란 한 체제가 자치능력을 갖출 때까지 계도적 통치기간을 거쳐 국가성립(憲政期)에 이르는 과정을 거치는 기간이다. 이 기간동안 정치적 대립 관계에 있던 제 세력의 갈등을 조정해 국가성립 기구로 견인하자는 것이 미국의 신생국가 관리 플랜이었다.
그런데 모스크바 삼상회의 발표문이 나오자마자 경교장의 임정이 들끓었다. 신탁통치라니 천부당만부당한 일이었다. 백범 김구는 이날 저녁 각 정당 대표회의를 긴급 소집했다. 고하는 낭산 김준연을 대동했다. 모임에 참석한 전원은 신탁통치를 반대한다는 목표 하나로 뭉친 듯했다. 임정계는 즉시 미군정을 부정하고 독립을 선포하는 동시에 내친 김에 정권을 인수하자고 들고 일어났다.
이때 발언권을 얻은 고하는 여러 말 끝에 우리는 아직 민주주의를 달성할 국민적 기반이 닦여져 있지 않으니 미군정의 신탁통치안을 수용해야 한다는 요지의 발언을 했다.
"정보에 따르면 정당 대표들, 좌익 우익 중간파 할 것 없이 다 모였습니다. 그런데 다들 격해 있었습니다. 백범은 '우리가 왜 서양사람 신발을 신고 다니느냐'면서 화를 냈지요. 모인 사람들 대부분이 그런 입장이었어요. 헌데 고하만이 달랐습니다."
"어떻게?"
"5년 이내에 끝나는 신탁통치를 받아들이고 정당, 사회단체들과 의논해 민주적인 통일정부를 세우자고 발언했습니다. 그는 우리끼리 정부를 세우려고 하면 지금과 같은 갈등과 대립상 속에서 과연 5년 안에 통일정부를 세울 수 있겠느냐고 의문을 제기했는데, 대부분의 인사들이 그따위 소리를 하려거든 당장 나가라며 분통을 터뜨렸습니다."
"고하 선생, 답답한 원칙주의자인 줄 알았더니 의외로 합리적이군."
고하는 기본적으로는 신탁통치를 반대했지만 유연한 태도 때문에 시중에는 신탁통치를 찬성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이런 소문을 듣고 한민당 계열 인사들이나 유연한 원세훈이 걱정이 돼서 고하에게 전화를 걸었다.
"고하와 백범 간에 의견 대립이 있었다는데 사실이오?"
"글쎄 임정에서는 지금부터 당장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편다는군요. 반탁은 나도 찬성이오. 다만 방법론상의 차이가 있습니다. 현실에 대한 인식이 부족한 문제해결 방식은 무모한 구호에 지나지 않소. 이상주의로는 해결이 어렵소이다. 디테일이 중요해요."
하지만 당시 사회적 분위기는 민족 주권을 찾자는 것이 대세였고, 그래서 신탁통치 반대는 움직일 수 없는 방향이었으며, 반대로 찬탁 주장은 변명의 여지없는 반동이었다.
"나도 임정을 정통정부로 내세우려고 몽양과도 싸우지 않았습니까. 미국이 들어오면 임정이 절차를 밟아 권력을 인수하도록 서울운동장에서 궐기대회까지 열었지요. 그러나 자기들만이 애국의 선봉에 있다고 애국을 독점하고 있소. 우월적 도그마에 빠져있어요. 타협을 모르고 배타적이에요. 나도 그런 고집이 없는 것은 아니나 큰 틀에서는 통합적이오. 우리는 미국과 대립했을 때 오는 손익도 계산해야지요. 국제정세로 볼 때 감정적 반탁이 옳은 길인가를 살펴봐야 합니다. 과연 지금 우리가 정권을 받을 준비가 되어있소? 극단의 대립을 보이고 있는 이런 때는 일정 기간 숨고르는 훈정기가 필요해요."
그러나 고하는 이런 주장으로 비판 대상이 되었고, 그의 주장을 부수는 것이 곧 애국행위처럼 받아들여졌다. 그의 타협적 반탁론은 한 순간에 배신자, 또는 반역이 되어버렸다.
"송 당수를 보호해야 합니다. 그의 방향은 옳고, 그런 만큼 우리가 보호해야 해요."
"불통의 유생인 줄 알았더니 의외로 시국을 내다보는 안목이 있는 분이군."
그러나 고하는 1945년 12월 30일 새벽 서울 종로구 원서동 자택에서 테러리스트 한현우의 저격으로 암살 당했다. 그는 해방정국의 분열과 대립상의 첫 희생양이었다. 정치적 주도권을 잡기 위해서는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경쟁자를 압살하는 비정한 정치테러의 첫 신호탄이었다.
고하의 장례가 준비되는 동안 미첨 정보장교가 다시 아고 대령을 찾아 보고했다.
"송진우 당수가 사장으로 있는 동아일보사가 송 당수의 뜻과 다른 논조로 계속 논설을 내고 있습니다. 기이한 현상입니다. 사실은 오보인데, 그걸로 여론몰이를 하고 있습니다."
미첨이 국내 신문기사와 외신 원문기사를 아고에게 내밀었다.
"영자지는 UP통신입니다. 이것을 동아일보가 그대로 받아서 보도했습니다."
12월 27일자 1면 톱 메인 타이틀은 '소련은 신탁통치 주장-소련의 구실은 38선 분할점령, 미국은 즉시 독립주장'이라고 되어있고, 상단 머리 부제로 '외상회의에 논의된 조선독립문제'가 걸려 있었다. 사이드 톱에는 '조선의 분점은 부당, 미 여론에 속출되는 38선'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려 있었다. 1면을 도배한 듯한 기사 배치가 다분히 의도적인 제작으로 비쳐졌다.
"이건 아닌데..."
하며 아고가 제목을 훑은 뒤 기사 원문을 읽기 시작했다.

<화성돈(워싱턴)12월25일발 합동지급보> 막사과(모스크바)에서 개최된 3국 외상회의를 계기로 조선 독립문제가 표면화하지 않는가 하는 관측이 농후하여 가고 있다. 즉 반즈 미 국무장관은 출발 당시에 소련의 신탁통치안에 반대하여 즉시 독립을 주장하는 훈령을 받았다고 하는데, 3국간에 어떠한 협정이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불명하나, 미국의 태도는 카이로선언에 의하여 조선은 국민투표로써 그 정부의 형태를 결정할 것을 약속한 점에 있는데, 소련은 남북 양 지역을 일괄한 일국 신탁통치를 주장하여 38도선에 의한 분할이 계속되는 한 국민투표는 불가능하다고 하고 있다.

문장이 모호해 섞갈리긴 해도 요지는 미국은 신탁통치안을 반대하고, 소련이 찬성한다는 취지의 기사였다. 이 기사는 당일 다른 조간에도 실렸는데 석간인 동아일보가 유독 자극적인 제목을 붙였다. 기사는 모스크바에서 삼상회의 공식 결정이 나오기 전 25일 워싱턴에서 나온 추측성 기사였다.
동아일보의 기사는 소련을 신탁통치안의 주체로 상정해놓고, 횡설수설, 사설까지 동원해 집중적으로 수련을 비판했다. 고하가 찬반탁에 앞서 실력양성론, 세계대세 순응론을 내걸어 신중론을 편 것과 달리, 신문은 '탁치반대! 독립전취!'(12월 30일자 1면) 따위로 반탁 여론을 주도했다.
고하의 암살사건은 고하가 신탁통치를 지지한다는 소문이 나온 분위기에서 일어났는데, 그가 사장으로 있는 신문 지면은 이렇게 판이하게 정반대의 논조로 나온 것이 이상했다. 신문 사설의 경우는 더 분명하고 노골적이었다.

민족적 모독-신탁 운운에 대하야 소련에 경고(1945.12.28.일자 동아일보 사설)
(전략)그런데 작보와 같이 외전은 조선에 대한 미소 양국의 견해가 다름을 지적하야 미국은 즉시 독립을 주장하고 소련은 신탁관리를 주장한다고 전한다. 회의로부터 발표된 정식 공보가 아니매 그 진부는 속단키 어려우며 따라서 비판의 정도도 기하기 어려운 터이나 이것이 만일 사실이라면 어찌할 것인가? 전문이 간단하야 그 주장의 근거에 대한 설명도 모호한 감이 없지 않으나 대체로 미국은 카이로선언을 준수하여 국민투표에 의한 즉시 독립을 승인하자는 것이며, 소련은 삼팔선의 존속으로 국민투표는 불가능하니 일국의 신탁관리로 하자는 것이라 한다. 미국의 주장과 논거는 명명백백한지라 그 우호적 태도를 신뢰하는 바이나 소련의 일기(日氣)는 이 하등의 궤변이며 이 하등의 폭언인가?

순혈을 축적하라, 형제의 심장에 격한다(1945년 12월29일자 동아일보 사설)
우리의 국토를 양단하고、국민을 양단하야 분열을 조장하고 대립을 심각케 하는 38 장벽이 그대로 존속되어 있는 현재에 또 한편으로 원산 청진의 부동항에 대한 이권을 요구한다는 풍설이 들리며、뒤를 이어서 신탁관리라는 언어도단의 폭언이 방출되는 이 냉엄한 현실을 삼천만 동포는 어떠케 보는가? 그리고 무엇을 생각하는가? 망국의 통한이 아직도 완전히 풀리지 못한 채 민족의 자주를 무시하고 민족의 존엄을 모독하는 이 국제적 모욕을 당하는 이 급박한 현실에 대하야 삼천만 형제는 어찌할 각오이며 무엇을 요구하겠는가?

모스크바 삼상회의는 한국 문제만이 아니라 세계 2차대전 전후 처리를 위한 회담이었다. 삼상회의 7번째 의제 중 한국 문제는 6번째로 다뤄졌다. 삼상회의 합의문에서 한국 관련 사항은 '신탁통치 결정'이 아니라 '신탁통치안의 제시'였다. 자료를 인용해보자.

1. 조선을 독립국가로 재건설하며 조선을 민주주의적 원칙하에 발전시키는 조건을 조성하고 가급적 조속히 장구한 일본의 조선통치의 참담한 결과를 청산하기 위하여 조선의 공업ᐧ교통ᐧ농업과 조선인민의 민족문화 발전에 필요한 모든 시설을 취할 임시 조선민주주의 정부(a provisional Korean democratic government)를 수립할 것이다.
(중략)3. 조선인민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진보와 민주주의적 자치발전과 독립국가의 수립을 원조 협력할 방안을 작성함에는 또한 조선임시정부 및 민주주의 단체의 참여하에서 공동위원회가 수행하되, 공동위원회의 제안은 최고 5년 기한으로 4개국 신탁통치(Trusteeship)의 협약을 작성하기 위하여 미·영·소·중 4국정부가 공동 참작할 수 있도록 조선임시정부와 협의한 후(following consultation with the provisional Korean government)제출되어야 한다.
<출처: The Ambossador in the Soviet Union(harriman) to the Secretary of State. Moscow. December 27, 1945. Foreign Relations of United States. 1945. Vol. VI(Washuington D.C.;Government Printing Office, 1969) pp.1150~1151. 번역: 박태균, 한국전쟁(책과 함께, 2005) 47쪽>

이중 중요한 것은 1항과 3항이다. 1항을 이행하면 한반도 전체를 총괄하는 단일 임시정부가 구성되며, 3항은 그렇게 구성된 임시정부와 '협의'하에 4개국 신탁통치가 실시되는데 최장 5년의 기간으로 되어있다. 조선 임시정부에 신탁통치를 거부할 권한이 있다는 내용이 없어서 신탁통치 자체를 거부할 수는 없었지만, 대신 기간이 제한적이고, 조선의 민중이 직간접적으로 참여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이 결정서에서 결정된 내용은 신탁통치를 하겠다는 것뿐이다. 그 외의 것들은 임시정부와 협의토록 규정하고 있는데, 신탁통치에 대한 방안 작성조차도 한국 임시정부와의 '협의 대상'에 포함시켰다.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과는 한국시각으로 1945년 12월28일 오후 6시 공식 발표되었다. 그러나 동아일보는 하루 전인 12월 27일자에서 소련은 신탁통치를 주장하고, 미국은 즉시 독립을 주장했다는 제하의 기사를 내보내고, "소련의 구실은 삼팔선 분할점령"이라는 부제까지 달아 모스크바 삼상회의를 소련의 음모의 장으로 몰아갔다.
기사가 나가자 대대적인 반탁운동이 일어나는데 이때는 좌우 구별이 없었다. 삼상회의 결과가 공식 발표된 며칠후에는 좌파가 삼상회의 지지(찬탁)로 선회했다. 여기엔 소련의 지시도 있었지만 좌파 쪽에서 삼상회의에 대해 좀더 이해한 측면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신탁통치를 제2의 망국이라고 철석같이 믿었던 민족주의 세력과, 신탁통치를 받아들이게 되면 건준을 어렵사리 부숴가면서까지 확립해둔 남한에 대한 미국의 지배권을 잃게 될 것을 염려한 우파에게 있어서 이러한 좌파의 태도변화는 '배신'에 다름 아니었다. 거기다 동아일보는 소련이 삼상회의 결정을 추진하려고 하는 배경으로 삼팔선 이북에 대한 분할지배를 강화하려는 의도라고 해설을 함으로써 미국의 편에 서는 사람은 통일과 즉시 독립을 지향하는 애국지사가 되는 반면, 소련의 편에 서는 사람은 반통일, 반독립의 반민족적인 인사가 되게끔 만들어버리는 바람에 좌파는 그 입지가 더더욱 좁아지고 만다.
그렇다면 실제는 어땠을까? 즉시 독립을 주장했다는 동아일보 기사와는 달리 미국은 삼상회의 논의 과정에서 최장 30년간의 신탁통치를 주장했다. 그들의 신탁통치라는 것은 삼상회의 결정서에 나타난 소련의 방식인 '선 정부수립, 후 신탁통치'와는 다른 4강대국 협의만으로 이루어지는 '공동관리'와 유사한 개념으로 해방된 한국의 뜻은 거의 참작되지 않는 것이었다. 방식만 놓고 보자면 소련의 신탁통치안이 미국의 것보다 합리적이며, 한국에 유리한 것이었다. 일단 단일정부가 들어서고 비록 당장은 아니지만 길어봤자 5년의 신탁통치 기간만 거치면 바로 독립이 되는 것이니까 말이다.
그렇다고 소련이 미국보다 선의를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소련은 한국 민중에게 보다 많은 권리를 주면 해방 직후 사회주의적 경향이 팽배했던 한국의 사회여건상 자연스럽게 친소정권이 들어설 것으로 전망했다. 때문에 삼상회의 결정서와 같은 방식의 파격을 주장할 수 있었던 것이고, 상대적으로 수세에 놓여있던 미국은 일단 친소적인 분위기가 희석되어 친미정권이 자연스럽게 들어설 수 있을 때까지 장기적으로 한반도를 관리할 필요가 있다고 보고 장기적인 신탁통치를 주장했던 것이다.
우연인지 고의적인지는 모르지만 동아일보의 오보가 나가면서 극렬한 대립과 함께 남한의 상황은 미국 쪽에 유리하게 흘러갔다. 이후 미국은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과를 전면 부정하는 태도를 취하며 미소공동위원회에도 무성의하게 임한다. 결국 소련측 안의 첫 단계인 임시정부 수립은 무산되고, 미국은 유엔에 한국문제를 상정하게 된다. 탁치정국은 얼핏 오해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이지만 사실 좌우 불신이 더큰 요인이 되었다. 민족주의 세력은 미·소 강대국의 신탁통치를 또다른 형태의 식민지배를 위한 구실이라고 거부했고, 미국과 우익은 소련의 공산주의 세력확장을 위한 방안이라고 의심했으며, 소련과 좌파는 미국의 불성실한 태도를 친미정권 수립을 위한 시간벌기로 의심했다. 그 와중에 순진한 민중들만 찬·반탁으로 나뉘어 서로 피흘리며 모든 국력을 소모했던 것이다.
<출처:http://blog.naver.com/posnmrhj/ 오해와 진실-조선에 관한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

모스크바 삼상회의의 결정문은 역사적 의미를 갖고 있다. 즉 △즉시 통일된 형태의 조선임시민주주의 정부수립 △조선임시민주주의 정부수립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미·소공동위원회 개최 △최장 5년 기한의 4개국(미영소중) 신탁통치를 실시하되, 구체적인 방안은 조선임시민주주의 정부수립 후 결정한다는 것이다. 이는 나치 독일에 합병된 오스트리아의 경우와 같은 합의내용이었다.
2차 세계대전 후 오스트리아는 나치 독일에 합병됐던 독일로부터 영토를 회복해 한반도처럼 연합국의 분할점령을 받았다. 연합국은 일정 기간 신탁통치를 거치면 독립을 보장하겠다고 약속했는데, 이때 오스트리아 제 정치세력은 이 제안을 수용했다. 오스트리아는 실제 1945년부터 1955년까지 10년간 미·소·영·불의 신탁통치를 받은 뒤 약속대로 영세중립 통일국가를 수립, 독립했다. 그에 비해 우리는 신탁통치 기간이 최장 5년에 불과했다.(실제는 3년).
분단과 분열의 문제가 단순히 동아일보 오보사건에 있는 것은 아니지만, 상당한 영향을 준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적극적 보호제도(protectorcte)라는 의미의 신탁통치(trasteeship)는 미국이 내건 조건이며, 소련은 수동적 후견인(tutelage) 제도를 주장했다.
1946년 1월25일자 소련의 타스통신은 모스크바 삼상회의 관련 기사에서 '소련이 신속한 독립을 주장했으나 미국은 조선의 신탁통치를 10년으로 하자는 제안을 했고, 소련이 5년으로 타협안을 제시해 관철됐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국내에선 기름에 불을 붙인 듯한 극렬한 반탁 분위기에 휩쓸려 이 기사는 묻혔다. 반탁을 거스르는 그 어떤 담론도 매국이 되어 그 어떤 합리적 판단도 비집고 들어설 수가 없었다.
본래 신탁통치안의 아이디어는 2차대전 종전 4개월 전 병사한 루즈벨트의 구상이었다. 그는 30년의 한반도 신탁통치안을 갖고 있었다. 그것은 시간을 벌고 보자는 편의적 구상이었으며, 잔여 임기를 물려받은 투르먼은 전임의 정책기조를 그대로 이어갔다.

고하의 유연한 반탁론은 신탁통치를 끌고 가려는 하지 중장의 견해와 일정 부분 맥을 같이했다. 그래서 미군정과 호흡이 맞아떨어지는 측면도 있었다. 그의 타협적 반탁론은 맹목적 애국주의자들의 거친 반탁론보다 현실적인 대안이었다고 후일 학자들은 평가한다. 그 시기를 오스트리아의 예에서처럼 민주주의 훈련기간으로 보고, 극도의 대립상을 중화시키면서 민주주의 체제를 가다듬는 기간으로 이끌어갈 수 있었다는 것이다.
고하가 암살당하고 장례식이 치러진 이틀 후인 1946년 1월 7일 우익의 한민당과 국민당, 좌익의 인민당과 공산당 대표들이 만나 신탁통치안의 입장을 조율하고 '조선의 문제에 관한 모스크바 3국회담의 결정에 대하여 조선의 자주적 독립을 보장하고 민주주의적 발전을 원조한다는 정신과 의도를 전면적으로 지지한다. 신탁은 장래 수립될 우리 정부로 하여금 자주독립정신 터전으로 삼는다'는 성명서를 전원 일치로 채택했다.
역사학자 서중석은 이에대해 '모스크바 3상회의가 한국에 통일된 독립정부를 수립하는 데 합의를 본 것이라면, 4당 합의는 국내 대표 정당이 한국에 민주국가를 수립하는 데 합의를 본 유일의 문서'라고 평가했다. 고하의 죽음에 대한 자성으로 받아들여진 측면도 고려되었겠지만, 이 기조를 그대로 유지했다면 우리 역사는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고하 암살은 참 미스터리란 말이야."
아고 대령이 깊은 생각에서 빠져나오면서 물었다.
"고하의 신중한 반탁을 찬탁이라고 매도한 세력의 짓이겠죠. 경교장회의 참석자 중 한명의 짓 같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소행도 이해할만 합니다. 일제로부터 해방되자마자 또 식민지와 똑같은 신탁통치를 받는다는 것은 민족적 자존심상 허락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지요. 또 식민지배와 같은 체제냐고 울분을 토할 수 있지요."
"그런데 고하의 철학과는 반대로 신문지면은 온통 반탁기사란 말이야. 그게 이상하지 않나? 이해할 수 없어. 그가 경영하는 신문사에서 왜 그런다고 보나?""그건 고하가 여론으로부터 뭇매를 맞는 것에 대한 자기 변명 같은 것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결코 찬탁이 아니다, 라는 커밍아웃이죠. 방향은 반탁이지만 방법론에선 유연한 대화와 협상을 통한 훈정기를 갖자는 것인데, 그게 임정 등 근본주의자들에게 배신으로 낙인찍힌 것이죠. 근본주의자들은 믿는 도끼에 발등 찍혔다고 그를 배격하고 나섰는데, 동아일보는 지면을 통해 그건 오해다, 라고 불붙은 여론을 잠재우려는 시그널을 보낸 겁니다. 언제나 강경 근본주의자들이 상황을 주도해나가는데 지면은 고하도 본질에 있어서는 너희와 다르지 않다, 라는 신호를 보낸 거죠."
"그렇다면 귀관은 이 사건을 임정의 소행이라고 보는가?"
"의심이 갑니다."
"정보를 담당하는 입장에선 어떤 무엇도 단정적인 결론은 위험해."
"알겠습니다. 그런 정황이 보인다는 것 뿐, 그들을 용의자로 단정하진 않습니다. 다만 동아일보는 좌익세력과 대결중인데, 좌익과의 대결을 위한 공격 프레임을 그렇게 짜고 있는 듯합니다. 한민당-우익-미국과, 공산당-좌익-소련이라는 프레임이죠."
"이승만 박사 입장은?"
"고하와 가깝습니다. 한민당의 지원을 받고 있는 데다 그의 평소 지론도 독립준비론입니다. 그는 임정이 주도권을 행사하는 것에 심기가 불편합니다. 반탁에 있어선 김구 선생과 같지만 라이벌 의식이 강합니다. 힘이 길러지면 백범을 무력화시킬 것입니다. 사회적 분위기는 백범에게 밀리지만 동력이 생기면 제압한다고 자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스탠스가 모호합니다."
"참 이상해. 같은 길을 가는 사람들이 분열한단 말이야. 내가 아니면 안된다는 독선 때문인가, 아니면 탐욕 때문인가."
"독립을 위해 싸울 때는 지향하는 목표가 같아서 뭉치지만, 해방이 되자 자기 세상으로 알고, 자기들 세력기반을 확보하려고 각기 이해를 달리하면서 대립하는 것이겠죠."
"몽양 선생 동향은 어떤가?"
"소수로 전락했습니다. 좌우 양측으로부터 밀려나있습니다. 사실 몽양과 고하의 지향점은 신탁통치에선 접점이 닿아있습니다. 그런데도 앙숙으로 서로를 배제하는 것이 보기엔 흥미롭습니다."
"몽양이 배제하는 것은 아니지. 그가 배제되는 것이지. 어쨌든 대결론자보다 협상론자가 밀리게 돼있는 게 조직의 생리야. 몽양을 잘 관찰하게, 그 역시 타켓이 되고 있어."
아고 대령은 몽양의 식견과 통찰력을 생각하고 있었다. 몽양은 모스크바 삼상회의가 열리기 전의 어느날, 아고를 불러내더니 말했다.
"루즈벨트 대통령은 한반도의 즉각 독립보다 일정기간 신탁통치로 근대화시킨다는 계획을 갖고 있었다는데 맞소?"
"맞습니다."
"소련은 대 독일전과 내전 때문에 극동에 관심이 없는데 루즈벨트가 한사코 스탈린을 불러냈다는데 맞소?"
"그런 것 같습니다."
이미 공공연한 비밀인데 몽양이 펄쩍 뛰는 게 이상했다.
소련은 1944년 대 독일전에서 전황을 유리하게 이끌어간 반면, 미국은 태평양전쟁에서 일본의 극렬한 전투력에 밀려 인적 물적 손실이 컸다. 그래서 소련의 힘을 빌리려 했다. 그는 만주 관동군을 과대평가하고 소련군의 참전을 독려했다. 마침내 스탈린은 참전을 선언하고 만주 국경선을 넘었다.
루즈벨트는 1945년 2월 얄타회담에서 조선의 신탁통치 기간을 30년으로 하자고 소련에 제시했다. 이에 소련은 유보적 태도를 보였다. 전략적 가치를 크게 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미국은 먹을 것 없어보이는 한반도를 독자적으로 운영하는 것에 부담스러워했다. 조선은 일본의 속국으로 세계무대에 볼품없는 전리품으로 내던져진 존재였고, 미ᐧ소 양자에겐 생소한 땅이자 매력없는 지역으로 인식되었다. 그래서 소련은 군사적으로 유리한 위치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분할점령 이외 다른 욕심을 내지 않았다. 물론 여기에는 미국과의 신의를 지키는 것이 한반도 전체를 점령하는 것보다 낫다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만큼 양국은 우호적이었으며, 양국 모두 한반도를 전략적 가치를 높게 평가하지 않은 측면이 고려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일본에 대해서만은 욕심을 냈다. 그중 미태평양사령부 맥아더 사령관은 일본을 누구에게도 빼앗기지 않겠다는 철학을 갖고 있었다. 맥아더는 자신의 단독전쟁 승리의 전리품으로 일본을 모두 점령할 기득권을 주장했던 것이고, 그 점에서 명분이 약한 소련은 이를 수용하고 북방 4개 도서를 회복하는 선에서 만족했다.
몽양이 엉뚱하게 말했다.
"한반도 분할은 소련보다 미국의 책임이 더 크오. 38선 분할도 그렇지만, 우리 항일투쟁 군사단체와 협의 없이 어떻게 한반도 진격을 수행했소이까? 소련군의 진격을 유도하기보다 만주벌판에서 활약하던 우리 항일 독립투사들을 파트너로 규합했어야지. 나의 노농군도 결성되어 있었소. 병력이 십만명이 넘었소."
아고는 놀랐지만 머리를 저으며 받았다.
"그것은 내가 할 말입니다. 반대로 묻겠습니다. 왜 우리를 활용하지 않았습니까. 그 많은 군사단체 중에 영어를 할 줄 아는 자가 몇명이라도 있었을 것 아닙니까. 미군은 중국에도 있었고, 필리핀에도 있었고, 인도지나반도에도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네트웍을 확장했어야지요. 그게 안타깝소. 하지만 지금도 늦지 않았습니다. 남한 지역은 좌우 대결로 혼란이 가중되고 있는데, 북한은 소비에트화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들은 일본을 몰아내고 단결의 동력을 십분 살리고 있소. 하지만 남한사회는 카오스입니다."
그래서 소련이 즉각 독립정부를 주장했구나, 하고 몽양은 생각했다. 소련에 의한 북한의 안정, 신탁통치기간을 짧게 하자는 제안도 그들이 장악한 북한이 빠르게 안정되어갔기 때문이다. 그런 다음 남한을 먹어치우겠다는 계산이 아닌가.
"아고 대령, 나한테 친절한 것은 고맙소만 때로 부담이 될 때도 있소. 혹시 나를 감시하는 차원은 아니겠지요?"
"몽양 선생, 나는 선생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나는 이념의 포로가 아닙니다. 본질적인 것은 인간화의 문제죠. 전 한때 마르크스 레닌에 빠져있었지요. 전향한 몽양 선생과 동일노선입니다. 한국에 부임하면서 몽양선생을 만났을 때, 그런 체험적 삶이 내 사유체계와 같고, 그게 얼마나 인생을 풍요롭게 하나, 생각했습니다. 인간적으로 존경합니다."
"고맙소. 아고 대령을 만난 것이 행운이오."
"그러나 조심해야 합니다. 나는 군인이며, 미합중국의 결정을 따르는 애국적인 장교입니다. 한국의 좌우 대결 문제를 더 이상 방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명령이 떨어지면 작전을 수행해야 하는 것이 군인이오. 그리고 나는 한반도 좌우 대결에서 관리ᐧ조정의 적임자가 되지 못한다고 교체될지도 몰라요."
몽양은 아고의 답변에 그의 두 손을 굳게 잡았다.
그것을 생각하며 아고가 미첨에게 말했다.
"제 정당과 군사단체 테러리스트들이 암약하고 있는 것을 추적하시오. 사상의 저수지엔 뜻하지 않은 변종들이 헤엄쳐다니오. 부유하는 망종도 있으니 동향 잘 살피시오."
"예설."
미첨이 거수경례를 붙이고 밖으로 나갔다. 밖은 어둠이 내리고 있었다.

일본이 불순하게 행동하는 한 민족주의는 존재한다

찬반탁 회오리는 걷잡을 수 없이 전국을 강타하고 있었다.
군사영어학교 입교를 앞두고 오민균이 이정길의 사무실을 찾았다. 몽양이 이쾌대와 이정길을 앞에 두고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몽양은 테러의 후유증 때문인지 지쳐보였다. 그러나 스스럼없이 아랫 사람들과 대화하는 모습이 다정하고 친근해 보였다. 권위와 거리가 있으나, 그렇다고 근엄함을 잃은 것은 아니었다.
"오군이 군영에 들어가게 되었으니 축하할 일이오. 우리가 하던 이야기에 오 군도 끼어들어야지?"
몽양은 대화를 즐기는 사람처럼 화제를 이끌었다.
"나는 어떡하든 분단을 막자는 주의야. 미·소의 대결이 강화되어도 이것을 막을 힘은 우리밖에 없소. 내 의견에 동의 하시겠는가?"
"일본이 뒤에 숨어있고, 알게모르게 조선 사정에 어두운 미국을 조정하고 있습니다. 일본은 부려먹었던 기득권층을 테크노크라트라는 이름으로 전면에 배치하고 있습니다. 국민정서와는 동떨어진 조치들입니다. 근본적으로 통일정부가 세워지기 어려운 것은 이런 것들 때문입니다. 그들은 통일을 반대하지요. 그들이 광범위하게 활동하면 우리가 단합된 힘을 쓸 수 없도록 음모를 꾸미고 있습니다. 그림자처럼 소리없이 움직이는 실체를 정확히 파악해야 합니다."
이정길이었다. 이쾌대가 나섰다.
"우리는 일본의 실체에 대해서 너무도 모릅니더. 모순적인 행동이랄까, 이중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일본 사람들은 '스미마셍(미안합니다)'을 입버릇처럼 교양있게 말합니다. 조그만 도움을 받아도 스미마셍, 식당에서 음식을 주문할 때도 '스미마셍'을 말합니다. 무엇이 그렇게 미안한 일들이 많을까요. 그런데 미안해하지 않은 일들을 너무 많이 만듭니다. 이런 이중성은 싸움을 좋아하면서 얌전하고, 불손하면서 예의 바르고, 용감하면서 겁쟁이며, 보수적이면서 개방적인 모순적인 태도에서 극명하게 나타납니다(루르 베네딕트의 '국화와 칼' 인용). 일본인은 자기 행동을 강자가 어떻게 생각하는가에 놀랄 만큼 민감하지만, 동시에 다른 사람이 자기의 잘못된 행동을 모른다고 생각할 때는 가차없이 죄악을 저지릅니다. 여기엔 강자나 약자나 상관이 없습니다. 약자일수록 변명의 여지없이 밟고 가진 것을 빼앗아버립니다. 그들이 거짓이 없고, 진실하고, 교양이 있다는 말은 수정되어야지요."
"맞는 말이요. 일본인의 기질과 성향을 잘 알아야 해요. 지금 분단이 우리의 가장 큰 당면과제요. 이는 일본이 여건을 만들고, 미·소 양강이 국제 질서를 만들어낸 산물이지만, 해결자는 결국 우리 자신이오. 그런데 국내 정치세력들은 이런 상황에 무지하거나 둔감해 있소. 기회란 잡으라고 있는 것인데, 자꾸만 밀어내버린 형국입니다. 내부 역량이 부족하니 국제적 분쟁 지역이 되고, 국내적으로는 진영 대결로 갈등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이런 대결 국면은 미·소가 한반도에서 나가더라도 분단 체제를 극복하지 못하리라는 우려가 큽니다. 일본놈들이 36년동안 내부를 갈갈이 찢어놓고 이간질한 요인이 크지만, 거기에 휘둘려서 극복하지 못하는 우리의 내부 역량 또한 문제지요."
"그렇습니다. 우리는 일본이 미국에 패배한 나라로 보았습니다. 그러나 미국은 일본을 패전국으로 보지 않고 우방국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전범국가와 동맹을 맺는 것입니다. 일본이 미국의 대 한반도 자문역을 자임하면서 우리는 미국과 일본의 식민지가 된 꼴입니다. 그런 과정에서 일본은 몸 하나 다치지 않고 물러갔니다."
몽양이 길게 한숨을 쉬었다.
"일본은 통일 한국을 경계하지. 조선 반도가 힘이 세지면 당장 위협이 된다고 보니까. 식민지 통치 시절 그들이 저지른 죄업을 지우려면 조선반도 내부가 분열되어서 그들끼리 싸우고, 힘이 분산되는 것이 좋다고 보는 것이지. 그러면서 미국을 수호신처럼 받들고 있소.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변신하는 모습을 봐요. 한마디로 무서운 놈들이야. 엊그제까지 수백 만명이 죽고, 한 순간에 항공모함 다섯 척이 태평양에 수장되고, 원자탄을 맞고 나라가 초토화되었는데도 이렇게 미국 품에 안겨서 애완견이 되는 저 현란한 변신의 모습, 미군 장성이 투숙한 호텔 방에 게이샤, 그렇지 갈보들을 들이밀어넣고 이익을 추구하는 것 좀 봐. 그렇게 현실 상황을 관리하면서 백년 후, 이백년 후를 내다보고 또 준비하는 거요. 소소한 차이로 싸우는 우리와는 근본적으로 다르지."
"일본이 분단구조를 강화하고 있다 이 말씀인가요?"
"그렇지 않은가. 이 땅에서 민주주의니 공산주의니로 갈라놓은 게 누군가. 일제 강점기의 조선반도 지배정책 아닌가. 그 재판이 나오고 있잖나. 거듭 말하지만 그들이 물러가면서도 부단히 미군정청에 친일 세력을 조선 통치 대리인으로 밀어넣고 있소. 이들이 빨갱이 사냥을 나서면서 분열ᐧ이간책동을 벌이지. 그들은 그동안 쌓아둔 막강한 자본력과 정보력을 가지고 미군정청과 관료집단, 우파 세력에게 활동자금을 지원하고 있는 거요. 그들의 휴민트 네트워크는 놀라울 정도네. 이 라인 작동으로 부단히 조선 반도 내부의 대결을 부추기고, 파괴 공작을 벌이고 있네. 이런 현실을 경고해도 사람들은 자기 이익과 결부시켜 사물을 보지. 자기 이익이 되나 안되나에 기준점을 둔단 말일세. 국가적 장래는 아랑곳없어."
"절망적입니까."
"그렇게 패배주의에 젖을 필요는 없지만, 국제 환경도 좋지 않네. 인도 식민지를 갖고 있는 영국은 조선의 독립을 적극 반대했네. 그렇게 나가면 식민지 인도도 내놓아야 하는 논리가 성립되니까, 처칠이 조선반도를 4대국의 신탁 통치하에 두고 적당한 시기에 독립시키자고 했던 것이야... 외세는 모두 자기 이익과 결부시켜서 사물을 보지. 그러니 어떤 외세도 혈맹이 될 수 없어. 예외적으로 소련이 가능한 한 빨리 신탁통치에서 벗어나게 하자고 제안했어. 반대로 미국이 더 길게 신탁통치를 하자고 했던 것이야."
"신문은 그 반대였습니다. 그렇다면 소련이 왜 신탁통치를 빨리 끝내자고 했나요?"
"그들은 조선 사회가 전체적으로 사회주의 경향성을 띠고 있고, 그래서 굳이 5년, 10년 신탁통치할 것까지 갈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지. 금방 사회주의 세상이 되는데 오래 끌 필요가 있느냐는 것이지."
이정길이 나섰다.
"미국은 김구 선생을 신탁통치의 걸림돌로 보는 것 같습니다. 민족주의자들은 외세를 근본적으로 싫어한다고 보니까요. 소련은 또 인공을 장악한 박헌영이 독자적 세력을 가졌으니까 그를 걸림돌로 보고 있고요. 그래서 몽양 선생님의 건준-인민위원회가 현실적 대안세력으로 보는데, 면전에서 송구스럽지만 선생님이 나이브하기 때문에 양 극단 세력들의 견제로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있습니다. 몽양 선생님은 타협주의자로서 미국이 파트너로 삼을 수 있다고 보는데, 국내 정치세력들이 한결같이 부정하고, 반대하니 밀려나버렸습니다. 이런 때 식민지 정책을 통해 한국인의 뼛속까지 꿰는 일본이라는 병원균이 퍼져들어오기 딱 좋게 환경이 조성되었습니다. 그들은 후견인으로 내세운 친일 세력들이 맹약하도록 독려하고 있습니다."
"이정길 군의 진단이 정확하군. 사실 신탁통치 구상이란 게 그렇게 비합리적인 것만은 아니야. 우리가 내부적 갈등과 분열로 피투성이가 되는 것보다 민주주의 교육을 받은 다음 독립해도 늦지 않다고 본 것이 현실적인 대안일 수 있네. 밸런스 파워가 필요한 때가 있지. 오스트리아가 그렇지 않나? 우리와 똑같은 문제에 직면했는데 내부 라이벌들이 갈등을 조정해서 합의점에 도달했어. 10년 신탁통치 받아들이자고."
"우리는 하루속히 독립국가를 구성하자는 여론이 대세 아닙니까."
오민균이 물었다.
"이론상으로는 맞네. 하지만 현실적 대안은 못돼. 5년 이내의 4대국 신탁통치안은 완전한 독립을 준비하는 시간을 벌자는 것이지, 긴 세월의 식민지 지배를 말하는 것이 아니야. 오스트리아보다 반 이상이 줄어든 신탁기간이야. 그 시간 분단이 아니고 통일을 향해 가자는 말일세. 국제정세의 흐름에 둔감하면 안되네. 외세에 무너져선 안되지만, 이용하는 것도 활로를 여는 방법이야. 지금 북이나 남이나 통일에 관한 한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니야. 남북 모두 어떤 확실한 통일 방안을 가진 것도 아니고, 완강하게 고집 피우는 것도 아니야. 일부에서 고함지르니 엄청난 차이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한꺼풀 벗기면 거기서 거기야. 굳어버리기 전에 뭔가를 빚어내야 하네. 이러다 자칫 조선반도 통일 무화론이란 허무주의가 퍼지지 않을까 걱정일세. 사실 미국의 생각, 소련의 생각, 이승만의 생각, 김구의 생각, 나의 생각이 차이가 있으면 얼마나 있나. 누구는 비타협적이고, 누구는 타협적인 차이가 있을 뿐이야. 조율하고 합의에 도달하는 기술이 미숙하니 서로 빈 총만 쏴대고 있어. 외부적 장애요소를 내부에서 극복해야 하는데 내부가 먼저 찢기고 있으니 외세가 어느새 비집고 들어와서 그들 방식으로 한반도를 디자인하잖나. 결코 외세가 도와줄 리는 없어. 분열의 모습을 즐기면서, 그들 식으로 통치하는 기회로 삼는 거야. 그래서 조선 반도 분단이 냉전의 산물로 구렁창에 빠질 공산이 커. 사정이야 어떻든 이것을 극복하지 못하면 우리에게 재앙이 오는 것이야."
"선생님께서 나서셔야 하는데, 밀리시니 안타깝습니다. 일본놈들한테 전쟁 배상도 요구해야지요. 적임자는 선생님이십니다. "
"왜 내가 적임자라고 보나."
"총독부가 선생님을 파트너로 정했잖습니까. 그들이 그 권한을 회수했다고 해서 자격이 박탈되는 것은 아닙니다. 패전한 그들의 지시가 법적 근거도 없으니까요. 그래서 밀고 나가야 합니다. 전쟁 책임을 묻고 배상을 받아내야 합니다. 귀국선 우끼시마호 폭발 사고 진상조사와 희생자 배상, 탄광의 희생자, 집단 수용소의 억울한 죽음들, 소녀들을 강제로 성놀이개로 병영에 집어던진 일 등이 너무도 분이 납니다. 군량미는 물론 놋그릇, 송진, 호박씨, 파마자씨까지 착취하고 수탈한 일본놈들을 어떻게 그대로 놔둔단 말입니까. 그런데도 미국 뒤에 숨어서 분열의 통치 수법을 교사하는 것 보십시오. 참으로 못된 놈들입니다."<이상 중앙일보 이정민의 오코노기 마사오 게이오대 교수 직격인터뷰 "남북 공존 주장하면서 왜 남남갈등 심한지 이해 안돼" 일부 참조>
듣고만 있언 이쾌대가 나섰다.
"왜놈들 말 나오니까 한마디 하겠습니다. 그자들이 아시아 수많은 주변국에 피해를 입힌 과거사를 묵살하고, 또다시 야욕을 키우고 있습니다. 조선인은 무지한 우마(牛馬)와 같으니 여전히 멱살잡아 쥐어흔들어도 된다는 대상으로 보고 있습니다. 우리가 일본놈들에게 털린 세월이 36년이라고 하지만, 고종 대부터 따지면 어언 한 세기 세월입니더. 이 세월 동안 우린 왜놈 똥개 노릇하며 살았소이다. 지금은 양키 바지가랑이 잡고 추파 던지는 꼴이고요. 더욱 참담한 것은 이런 꼬락서니를 주도하는 세력이 나라를 설계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검은 머리 미국인으로 신분 세탁한 쪽바리 새끼들이지요. 끝없는 사대주의로 권력의 곁불을 쬐며 사익을 취한 자들이요. 왜 개인의 이익이 민족의 이익보다 우선합니까?"
"어허, 이쾌대 선생이 비분강개하시는군. 하지만 극단으로는 보지 마시오."
"저는 이쾌대 선생님 말씀에 동의합니다."
이정길이 불쑥 나섰다. 그러자 이쾌대가 더욱 자신감을 얻어 말을 이었다.
"그렇지예? 동경제대 출신의 정치학과 학생 마루야마 마사오가 쓴 글이 생각나는군요. 그는 1944년 초 갑자기 군대 소집 영장이 날아와서 전선에 투입되었습니다. 결혼한 지 3개월밖에 안된 때였습니다. 그 시기는 전황상 살아돌아오기 어려운 때였습니다. 일본이 오죽했으면 동경제대생들까지 전선에 동원했겠습니까. 그는 전장에서 정치학도답게 태평양전쟁의 개전과 패전 상황을 살피면서 일본제국 붕괴의 필연성을 간파했습니다.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이 근대화를 이루면서도 실제로는 전근대적·봉건적 문화가 지배하고 있다는 것이 패배의 원인으로 지적했습니다. 천황 주권의 총체인 이른바 '국체'라는 것이 절대 권위를 휘두르면서도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 무책임성, 일본의 근대가 서구의 근대를 모델로 본떴지만, 서구의 근대와는 동떨어진 봉건 영주체제라는 것, 민주적 가치를 찾아볼 수 없고, 명령과 복종의 체계라는 것이 패망을 부를 것이라고 보았죠. 근대란 시민혁명과 산업혁명의 소산입니다. 봉건적 신분질서를 종식시키고 상하구별 없이 민족의 이름으로 구성원을 단결시키지만, 기계가 등장해 생산성을 획기적으로 높이면서 다른 한편으로 지도층의 각성과 내부의 변혁, 시민혁명과 함께 아래로부터의 변혁을 추진한 것입니더. 후발 주자였던 일본이 따르긴 했으나 근대가 누리는 외형적 물질에만 빠지고 말았지요. 근대를 지탱하는 내면적 정신과 철학이 결여되었습니다. 인권과 민주주의, 평등, 박애라는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몰각하고, 또 이를 지킬만한 시민의 힘이 배태되지 않았다는 것이죠. 민주주의와 거리가 먼 상징 조작 천황이라는 파시스트가 권력을 주무르도록 그 하부인 군부가 부도덕한 힘을 지탱해주었습니다. 독일은 패전 이후 파시스트들에게 유린당한 나라를 재건하기 위해 과거를 뼛속까지 씻어내 청산하고, 나치 협력자를 전승국들보다 더 엄격하게 처단했습니더. 그 정신은 유럽 사회의 모범적인 민주국가로 진입하는 토대가 되었습니다. 반면에 일본은 천황제를 맥아더로부터 승인받으면서 반성하기는커녕, 전쟁의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 코스프레를 했습니다. 그런 면에서 맥아더의 오류는 큽니다. 나쁜 놈이죠. 일본은 사과하긴 커녕 전쟁의 끔찍한 참화로 피해를 받았다는 억지를 부렸습니다. 그럼 우린 무엇입니까. 그들이 주변 아시아인에게 범한 온갖 죄악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 두 방을 얻어맞은 피해로 상쇄시키고 어물쩍 넘어간 것입니다. 그러잖아도 근본이 없는 놈들인데 미국이 비호해주었습니다. 이러니 서구의 공동체 의식과 통절한 반성없이 오만하게 세상을 보는 것입니다. 거듭 말하지만 미국이 이걸 도와주고 있습니다. 저는 일본놈들보다 미국이 더 나쁘다고 생각합니다.(이태희 실학박물관장 '일본은 왜 패망했는가' 일부 참조). 그런 면에서 저는 일본놈, 미국놈들 개무시하고 민족의 이름으로 치고 나갈 필요가 있습니더. 친일분자들이 더 이상 터를 잡지 못하게요."
"민족, 민족 하는 것은 지나친 국수주의적 태도 아닌가?"
"일본이 폐를 끼치는 한에 있어서는 우리가 민족주의자가 될 수밖에 없지요. 그들이 피해를 주지 않을 때, 민족을 들먹일 필요는 없습니다. 인간으로서, 글로벌 스탠다드의 규범을 지키는 인류애로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못된 짓을 하는 데 있어선 이건 아닙니더. 더욱 가열차게 민족을 내세워야 합니더. 인천 부두 노동자들이 왜국 타도, 외세 타도 시위를 벌인다고 하는데 플래카드를 만들어가지고 나가겠십니더."
그는 칠곡의 고향 청년들을 서울로 불러들여놓고 있었다. 인천부두노동자 시위에 동참할 계획이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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