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후 왜곡된 역사 속에서, 지금까지의 한일 관계는 효용을 다했다. 그러나 예고된 갈등이었다. 일본은 구한말과 일제강점기 35년, 8.15 광복과 분단체제, 그 이후 70년의 강고한 구 체제 시스템 속에서 우리 내부 깊숙이 침투해 들어와 알게 모르게 생활의 일부가 되었다. 그 안에 우리 내부의 모순과 고뇌가 응축되어 있다. 이 모순과 고뇌를 탐구하려면 어떤 방법이 있을까.
한 개인사를 통해 시대와 사회를 비추는 거울 역할을 하는 것이 문학의 영역일 것이다. 그동안 우리는 외세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생존이 우선이었던 관계로 자기 자신을 앞세우지 못했다. 우리는 너무 쉽게 잊어버렸고 안일했다. 그러다보니 역사는 박물관에 소장된 문화재인 양 화석화되고, 현대의 역사는 더군다나 묻혔다.
기자 출신 이계홍 작가의 실록소설 '행군-어느 민족주의자를 위한 변명'은 그런 배경에서 나왔다. 이 소설은 2016년 10월호부터 2019년 6월호까지 문예월간 '월간문학'에 연재되었던 소설이다. 월간문학 연재를 마친 뒤 많은 부분을 수정 보완해 프레시안에 재수록한다.
이 연재물은 이른바 '팩션(Faction)'이다. 팩트와 픽션의 사이 어디에서 역사적 사실에 상상력을 덧붙인 '논픽션' 형식의 소설이다. 필자는 취재의 일환으로 일제강점기 말 일본 육사 출신 젊은 생도들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어지러운 시대, 그 안에서 제국주의 광풍에 휘말린 젊은이들의 시각을 잡아내려 했다. 이계홍은 "일본의 극우 정권이 일제강점기의 역사적 사실들까지도 왜곡하는 역사 모독에 대해 하나의 담론시장을 형성하자는 데 목적이 있다"고 했다. '행군-어느 민족주의자를 위한 변명'은 총 33회로 나뉘어 연재될 예정이다.(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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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장 "항일 투사에게 민족주의자 사회주의자가 따로 있나?"
"나도 차 한잔 얻어먹을까?"
훤칠한 키의 중후한 신사가 사무실로 들어섰다. 회색양복에 카이젤 수염, 이마가 훤하고 솟은 코, 하얀 피부에 빛나는 안광. 한 눈에 몽양 여운형임을 알 수 있었다. 모두들 자리에서 일어났고, 오민균은 습관처럼 부동자세를 취하며 손을 각지게 올려붙여 거수경례를 했다. 그들은 드럼통을 잘라 주먹탄을 집어넣은 난로에 둘러앉아 대화를 나누던 중이었다.
"아니 선생님, 몸이 불편하신데 어떻게 이렇게 어려운 걸음 하셨습니꺼."
이쾌대가 놀란 얼굴로 물었다. 몽양이 소년처럼 웃었다.
"꼭 지하당원들 같군. 이 선생, 불을 켜고 음악도 올려야지. 미술실 분위기가 더 좋잖나."
"네, 알겠습니더."
그들은 미술실로 자리를 옮겼다. 이쾌대가 익숙하게 벽면의 전원 스위치를 올리자 천장에 매달린 노란 호박등이 켜졌다. 카페처럼 미술실은 안온한 분위기를 풍겼다. 이쾌대가 이미 알고 있다는 듯 익숙하게 축음기에 레코드 판을 얹었다. 드볼작의 유모레스크가 바이얼린곡으로 흘러나왔다. 감미롭고 슬픈 곡이었다.
"마음이 허하면 이 화백에게 청해서 들어요. 아름답고도 뭔가 울림이 있지."
몽양은 감성이 풍부한 사람처럼 보였다. 사자후를 토하는 정치가답지 않았다.
"내 걱정일랑 말고 하던 얘기 계속하시오. 이 미남청년은 누구신고?"
오민균이 다시 벌떡 일어나서 자기 소개를 했다."오민균입니다. 충북 청원이 고향입니다. 이정길군과 일본 육사 동기생입니다."
"오, 그래. 잘 생겼군. 충북 청원이 고향이라. 물이 좋은 곳이지요?"
"산좋고 물도 좋지만 인심은 더 좋습니다."
"하하, 고향 얘기를 하면 누구나 그렇게 자랑을 하지. 고향은 언제나 내 영원한 솜이불 같은 곳이니까."
이쾌대가 찻잔에 차를 따라 그의 앞에 놓았다. 몽양은 화를 당한 사람답지 않게 여유롭고 평화로워 보였다.
"일본육사 생도들이라면 장래가 유망한 청년들이지."
"선생님께서 여러모로 애쓰신 모습에 감명을 받았습니다."
오민균이 공손히 말하자 몽양이 웃으며 받았다.
"이 선생한테 많이 배우시오. 난 이여성 동지보다 그 동생인 이쾌대 선생을 더 좋아해요. 이선생 그림은 살아있어. 리얼리즘 화풍이 어떻다는 것을 말해주지."
"과찬이십니더."
이쾌대가 경상도 억양으로 말하며 머리를 숙였다.
"나는 예술가 친구들이 많소. 일주 김진우라는 화가가 있지. 죽죽 뻗은 대나무와 소나무를 잘 그리는 사람이야. 감옥에서 바닥에 까는 거적의 짚을 뽑아 다듬어서 붓을 만들어 그림을 그렸던 사람이오. 기개는 푸른 하늘에 닿고, 성품이 명경지수같은 분이지. 내가 작년에 고향 양평에서 환갑잔치를 할 때였는데, 일주가 대뜸 나에게 다가와서 따질 때는 내가 정신이 아찔했소. 나를 나이를 훔친 도둑이라고 하지 않았겠소? 하하하."
"나이 훔친 도둑이라니요?"
오민균이 의아해서 물었다.
"그렇지. 일주가 그러는 거야. 갑신생인 자기가 올해 환갑이고 한 살 아래인 몽양은 내년이 환갑인데 어찌하여 지금 앞당겨서 환갑잔치 하느냐고 꼬장꼬장한 성격대로 따지지 않겠나. 그래서 내가 조용히 그의 귀를 잡아당겨서 속삭였지. '이 사람아, 밖에까지 다 들리게 소리지르면 어떡하나. 내가 환갑을 빙자하지 않으면 어떻게 자네들을 만날 수가 있겠는가', 그랬더니 일주가 무릎을 탁 치면서 '그러면 그렇지. 경무부 놈들이 주야로 저렇게 지키고 있으니 자넨들 견딜 수 있겠나. 친구 좋아하는 자네가 얼마나 답답했으면 이랬겠나. 맞네 맞아. 매년 환갑잔치 하시게' 하고 내 손을 꼭 잡아주지 않겠나, 하하하."
이쾌대와 이정길이 웃었으나 오민균은 눈물이 핑 돌았다. 건국동맹을 결성해 '3불(말을 내지 않기, 글자 남기지 않기, 이름 남기지 않기)'을 실천 강령으로 채택할만큼 감시받고 있던 그로서는 그 길밖에 없었다는 것이 가슴으로 아프게 전해왔다. 독립운동하던 사람들은 이름도 여러개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일본 순사보다 조선 순사, 조선인 밀정 때문에 더 괴로움을 겪던 시절이었다.
"일주는 3년간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른 항일독립투사요. 곧은 절개 그대로 묵죽화와 초서에 경지를 이룬 분이지. 그이는 현실을 초월하거나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모순에 찬 시대를 정면으로 부딪치려는 작가정신을 갖고 있지. 이념적 지평이 넓어서 누구와도 교류하고, 사회통합, 분단 극복에 열정을 갖고 있어서 나와 동지적 관계가 깊지. 분열해서 남에게 이익을 안겨주는 우를 범해서는 안된다고 보고, 한민당의 고하나 애산(이인)을 만나서 통합하자고 애써왔지. 그런데 이쾌대 선생이 일주의 길을 따른단 말이야. 그림도 현장감이 있어서 좋고..."
"선생님을 습격한 자들은 한민당 진영 아닙니꺼?"
이쾌대가 화제를 바꿔 단호하게 물었다.
"그렇게 말하는 게 아니오. 고하는 그럴 사람이 아니야. 그만한 인격자는 조선반도에 없네."
몽양은 간단히 잘랐다. 두 번 다시 그런 말이 나와선 안된다는 추궁이 그 안엔 담겨있었다.
"나는 누구라고 지목하고 싶지 않아요. 그렇게 되면 나는 그를 미워하게 되니까. 내 지지자들 또한 그를 미워해서 복수하려고 하고, 그러면 또 파괴가 오고, 증오가 오고, 저주가 오고, 분열이 오니까."
그는 생사를 초월한 사람처럼 보였다.
"그래도 선생님을 해치려는 자가 있다면 가만있지 않겠습니다."
오민균이 나서자 몽양이 웃는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고맙소. 사실 주먹에는 버틸 장사가 없지. 경찰서나 감옥에 가면 매부터 맞는데 이걸 견디는 사람은 사실 아무도 없어. 매타작을 이기고, 전기고문, 인두로 지지는 화인(火印)고문을 이겨냈다는 사람은 없어. 괜히 하는 소리요. 누구나 비굴해져. 고문만 안한다면 고문하는 사람을 붙들고 한없이 울고 싶어져요. '때리지만 않는다면 평생의 은인으로 삼겠다', '한번만 봐주신다면 재산 모두 갖다 바치겠다'... 이렇게 애걸할 뿐, 증오나 복수심은 없어요. 인간은 본디 나약한 존재요. 인간의 나약한 약점을 노려서 이익을 취하려는 폭력세력은 그 맛에 계속 반복하며 즐기지만 사실은 그도 약한 존재요. 사디스트처럼 폭력적인 것도 한꺼풀 벗기면 나약한 인간이야. 다만 사는 방식이 틀려서 그렇지, 불쌍한 사람들 아닌가. 그러니 나를 죽이려 했대도 증오하진 말게. 복수가 무슨 의미가 있나. 행동대원들만 잡아들일텐데... 행동대원들은 불쌍한 하수인들 뿐이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무지이고, 무지보다 더 무서운 것이 자신이 무지하다는 것을 모르는 무지요. 돈 몇푼에 이용당하는 무지가 불쌍하잖나. 무엇을 알겠나. 그 뒤에 숨은 거대한 음모에 이용당했다가 끝내는 버려지는 것이 숙명인데... 테러리스트란 그 비장성에 비하면 정치적 효과는 크지 않소. 공포는 있을지언정 희생자의 정신이 오히려 살아나 영원화하는 힘이 있지. 링컨이 그렇고, 간디가 그렇고, 시저가 그렇소. 암살은 지금도 끊임없이 음험하게 꾸며지고 있지만 그 말로는 처절할만큼 비생산적이고 쓸쓸한 것이야. 대단히 소모적이지."
몽양은 암울한 현실로부터 떠나있는 사람과 같았다. 그가 다시 말했다.
"오 생도라고 했지요? 내가 테러를 당한 게 그리 억울한가. 테러는 왜 일어난다고 보는가."
"그야 정치적 이익을 얻고자 하는 자들의 폭력이겠죠."
"그렇지. 암살이라는 것은 최소 비용으로 최대 효과를 노리는 폭력이지. 암살은 정치란 무엇이고 권력이란 무엇이며, 인간사란 또 무엇인가에 대한 사유를 깊게 하지 못해요. 참, 허무한 것일세. 하지만 난 그런 거에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아요."
"선생님."
오민균이 몽양의 앞으로 가서 엎드렸다.
"이 민족을 위해서 오래오래 사셔야 합니다. 최후의 승리자는 장수자란 말을 배웠습니다. 식민지 36년을 견뎌오신 것이 억울하지 않습니까. 앞으로 그 연륜은 사셔야 합니다."
몽양이 웃으며 오민균을 일으켜 세웠다.
"덕담치고는 고마운 말이군. 걱정해줘서 고맙소. 젊은 학도들 하나 묻겠는데, 트리거 이론이란 걸 아시는가?"
"방아쇠 아닙니까?"
"그렇지. 하나의 사건이 연쇄반응을 유인하는 도화선 역할을 한다는 뜻이오. 한 개인의 죽음이 권력교체로 이어져서 사회를 발전시키는 계기가 되기도 하고, 반대로 혁명의 중단으로 지난한 역사 퇴보의 단초가 되기도 한다는 이론이오. 이런 점에서 내 몸이 신생조국 발전의 에너지가 된다면 나는 언제든지 기꺼이 내 몸을 내놓을 준비가 되어 있소."
형형하게 빛나는 안광, 바라보기만 해도 빠져들 것같은 외모가 누군가로부터 생명을 위협받고 있다는 것이 도무지 현실같지가 않았다. 오민균은 그의 매력은 용모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위기 앞에서도 의연한 자세. 담대한 여유, 이런 지도자라면 목숨을 걸어도 좋다고 생각했다. 오민균은 그에게 흠뻑 빠졌다.
"몽양 선생님께서 조선총독부를 통해 감옥에 갇힌 정치범을 석방하시고, 자치조직화와 식량공급을 요구하신 것, 해방 당일부터 치안을 맡고 행정의 제반 업무를 진행하신 일은 전세계 신생국가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업적입니다."
"나를 칭찬하시는가?"
"하지만 군대를 편성해야 합니다. 국가기구가 구성됐으면 당연히 군대를 편성해야죠. 힘이 있어야 이상을 실천할 동력이 생깁니다."
몽양이 놀란 눈으로 오민균을 바라보았다. 미국이 점령군의 자격으로 진주했고, 패망하긴 했지만 일본 조선군관구사령부가 여전히 무장한 상태로 남한에 잔류해있다. 미군은 일본의 조력을 받고 있었다. 조선인 지도자는 배제했다. 상대하더라도 형식적이었다.
"진주한 미군정이 군대를 창설한다는 것 알고 있나?"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쪽에서도 건준이든, 임정이든 창군해야 합니다. 그래야 국가기구로서 협상력을 높일 수 있습니다. 군사단체들이 난립하고 있으니까 이들을 결집시켜 국가기관의 군으로 재편성해야 합니다. 사설 군사단체의 사병(私兵)으로 식객 노릇만 하고 있으니 미군정도 우습게 봅니다."
몽양은 생각에 잠기는 듯하다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방법은 다를 수 있지만 방향은 옳은 지적이었다. 건준을 조직해 전국화했다면 당연히 창군했어야 했다. 그냥 치안유지와 질서확립을 위해 치안대를 창설해 주요 기관과 기업, 금융권, 방송사, 신문사 경비에만 신경을 썼다. 그런데 군대까진 생각이 미치지 못했다.
"조선총독부와의 약속은 그게 아니었잖나."
"도망가는 총독부 말을 들어줄 이유는 없습니다. 그런 약속 의미없죠. 치안유지를 위탁받았으면 행정권을 이양받는 수순이고, 행정권을 이양받으면 국가기관이 성립되는 것이고, 국가기관이 성립되면 군대 창설을 하는 것이 당연한 목표가 되죠. 그들이 경황이 없을 때 몰아붙였어야 했습니다. 기회를 포착하면 밀어붙이는 것이 운명을 가르게 됩니다."
몽양은 오민균을 찬찬히 뜯어보고 있었다. 가능성 여부와 상관없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 대견하고 기특했다. 순진하니까 그런 의견도 갖고 있을 것이다.
몽양은 잠시 회한에 잠겼다. 젊은이도 이런 구상을 하는데 제 세력들은 다된 밥인 줄 알고 제각기 밥그릇 싸움만 한다. 건준이 치안 유지와 정권 인수 매뉴얼을 짜놓고 움직인 것까지는 좋았으나 미군정과 조선총독부가 부정할 때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못했다. 미국에 대한 정보탐지는 물론 네트워크 확보를 방기했다. 그들의 전후 처리 과정을 지켜보며, 기회를 포착해 공동 주체로 나서야 하는데, 등한시한 것이다. 제 정파끼리 헐뜯고 밟는 데 휩쓸려다 보니 가닥을 잡지 못했다. 지엽말단적인 이해에 얽혀 에너지를 소모하고 말았다.
"오 생도, 지금 몇 살인가."
몽양이 새삼스럽게 물었다.
"열아홉입니다. 1926년생입니다."
"딱 보니 나보다 마흔살 아래군. 맏손자뻘 되는데 참 기특하이. 조백이 있어."
이쾌대 화백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오 생도의 말 중에 뼈아픈 대목이 있습니더. 총독부 놈들에게 숨돌릴 시간을 주어버렸다는 것 말입니더. 그들이 당황해할 때 군말없이 쫓아냈어야 하는데, 의미없는 내분에 싸여 갈팡질팡했다는 것, 그러다 보니 군사권은 여전히 일본군에게 있고, 권력은 그들 손에 있다고 오만을 부렸죠. 조선총독부는 조선관리 대책이 없는 미군을 지도하고 훈수하며 지배자의 여유를 부리기까지 합니더. 우리가 확실하게 몰아냈으면 미군정도 좋아했을 텐데 말입니더. 우리가 쫓아내는 것까지 미국이 거부할 이유가 없습니더. 미국의 적을 몰아냈으니까네예. 프레임을 그렇게 짰어야 했는데, 놓친 것이 아쉽습니더."
"저는 건준을 해체하고, 인민공화국을 선포한 것도 성급했다고 생각합니다."
오민균이 기왕 나선 김에 말을 바꿔 거침없이 쏟아냈다.
"그래요? 어째서."
"건준 중앙 아래 전국에 145개 지부를 두었고, 인선도 마무리했습니다. 지방엔 지금도 건준 간판이 붙어있습니다. 건준을 건국 조직으로 만든 만큼 존속시켜야 했습니다. 이 기구를 가지고 미군정과 대등한 위치에서 협상했어야 했습니다. 그들이 부정해도 유지해야 했습니다. 제 스탠스를 유지하지 못하고 흔들리면서 찬반탁 회오리에 말려들고 말았습니다."
몽양은 지난 몇달간 숨가쁘게 돌아간 국내 정세를 돌아보았다. 정말 모든 것이 어지럽고 혼란스러웠다. 그 자신 왜 이 자리에 있는지조차 존재 이유를 모를 정도였다.
몽양, 血濃於水
이정길은 귀국하자 형의 주선으로 계동 중앙학교 옆 건준 본부로 출근했다. 건준 본부는 마포의 부호 임용상이 제공한 사저를 사용하고 있었는데, 조직이 확대되자 종로통으로 사무실을 이전했다.
몽양은 해방되자마자 기존의 건국동맹 세력을 모체로 온건 우파인 안재홍, 좌파인 장안파 등 좌우익을 망라한 거국적 조직으로 건준을 발족시켰으나 고하가 이끄는 우파는 참여하지 않았다. 몽양의 인간적 친화력과 포용력 때문에 좌우파가 폭넓게 참여한다고 했지만 고하는 그를 외면했다.
몽양은 친일파 숙청과 함께 사회적 조류에 편승해 진보적 민주주의를 지향한다는 건준 강령을 내세웠다. 그것은 선열들이 일구어낸 조국독립 열망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이고, 해방정국에서 선행해야 할 과제라고 보았다. 이 점이 고하에게는 거슬렸다.
고하는 무 자르듯 친일파를 구분해 처단하면 유지 계급이 핵심세력인 자파의 앞날이 몹시 우려되었다. 임정 봉대론이 보수 우익 진영이 갈 길이라고 보고, 그것을 명분으로 건준을 외면했다. 그리고 임정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굳이 따지자면 로맨틱하고 기질적 영웅주의에 사로잡혀있는 몽양에게 주도권을 빼앗겼다는 것이 거부의 본질적 이유였다. 전통적 유생관(儒生觀)의 권위와 선비 기질이 있는 고하로서는 무언가 허술해보이는 몽양에게 주도권을 빼앗긴다는 것이 자존심상 허락지 않았다. 그래서 몽양 계열의 최근우, 정백, 김진우로부터 합작 권유를 받았을 때도 고개를 돌렸다. 참다 못한 김진우는 이렇게 쏘아붙였다.
"고하, 왜 그리 고집이 세오? 내가 공산당이면 공산당이지, 몽양이 공산당은 아니오. 한때 사치스럽게 공산당 단추를 달고 다니던 시절만 보고 단정하지 마시오. 몽양은 해방 정국에서 제 세력이 통합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하고 있소. 그는 그럴만한 그릇이 되잖소? 그것이 길이오. 출발이 좀 엉성해도 힘을 모아 나가면 완성체로 만들어 나갈 수 있소. 기회도 놓치고 시기도 놓치는 우를 범하지 말기를 바라오."
"몽양이 그릇이 크다고요?"
고하로서는 인정하기 싫은 평가였다.
"그의 노고를 고마워해야지요. 이건 누군가는 해야 할 일 아니오. 작은 차이로 비트는 것은 용렬하오. 이러다 잘못되면 고하에게 책임이 있다는 것 명심하시오. 좀 멀리 보시오!"
김진우는 사군자 중에서도 죽(竹)에 일가를 이룬 화가였다. 동아일보 신년 휘호에 그의 사군자가 빠짐없이 등장했다. 고하와의 깊은 인연 때문이었다. 이러니 고하에게 쓴소리도 마다하지 않은 사이였다.
그런 와중에 몽양 테러사건이 일어났다. 건준을 발전적 해체하고, 좌우 합작 국가기관으로 세우는 전국인민대표자대회가 열린 9월7일 저녁, 몽양이 회의를 마치고 귀가하던 도중 괴한들의 습격을 받아 쓰러졌다. 치명상은 면했지만 인근 의원으로 긴급 후송돼 응급치료를 받은 후 고향 인근인 가평으로 내려가서 치료와 정양을 했다.
그로인해 그가 주도했던 인민대표자대회 결산대회와 폐회식에 참석하지 못했다. 괴한들의 습격이 정황상 우파의 소행으로 보고 건준은 그 배후를 고하 세력으로 지목했다. 그러나 몽양의 피습에 대해 고하는 누구보다 먼저 분개했다.
"반드시 범인을 잡아들여라. 몽양은 지난달에도 습격을 받지 않았느냐. 건준 경호대나 치안대 놈들은 뭐하고 있냐."
그는 자신과 의견이 다르다고 해서 거목을 쓰러뜨릴 옹졸한 인간이 아니었다.
몽양은 그에앞서 8월18일에도 괴한들의 피습을 받았다. 누군가는 공산 계열의 소행으로 보는 견해도 있었지만, 그들에게 우호적인 몽양에게 그런 일을 벌였을 리는 만무했다. 경찰이나 친일파의 소행을 의심했다. 몽양은 당의 정강 정책에서 먼저 그들을 청산하겠다고 선언했다.
"선생님 경호가 그렇게 허술해서 쓰겠나?"
어느날 이정길을 만나자 오민균이 분통을 터뜨렸다. 그러나 경호대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몽양은 총독부 엔도 정무총감의 치안유지 요청을 받고 장안빌딩에서 호위대와 치안대를 조직해 심복 이영근이 호위대를 이끌도록 했다. YMCA 체육부 소속으로 유도사범을 하고 있는 장권에게는 건국청년치안대를 이끌도록 지시했다. 청년학생 2,000명을 모집해 안국동 풍문여학교에 본부를 둔 치안대는 서울 시내 질서유지와 관공서와 언론사·은행·기업체를 경비했다. 이렇게 두 단체로 하여금 사회질서를 잡도록 했는데, 정작 자신의 신변 보호에는 등한시했다.
"선생님이 자유분방하셔서 그렇게 당하고도 끄떡 없으셔. 두려워하지 않아."
그렇게 말했지만 이정길 역시 몽양이 걱정되었다. 누구든지 스스럼없이 받아주는 품성 때문에 그는 더 위험에 더 노출되어 있었다.
"경호를 내가 맡겠어."
오민균이 말하자 이정길이 말했다.
"불호령이 떨어지실 걸. 공부할 사람은 공부하라고 말이야. 나도 공부 좀 한다고 몇 번 모임에 참석했었지."
이정길은 짧은 기간 동안 형의 지시로 공산주의자들의 회합에 나갔다. 생리에 맞지 않았지만 흥미는 있었다. 참여자들은 겉멋이 들어 찾은 청년들이었고, 끼리끼리 모여든 자들이었다. 이념성이 뚜렷한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지도부의 선창에 따라 "우리 조국 소비에트 만세"라느니, "붉은 깃발만이 진정한 깃발" 따위의 구호를 외치고 '적기가'를 부르고 헤어졌다.
적기가는 영국의 노동가요인 'Red Flag'를 '아카하타노의 노래(赤旗の歌)'로 번역되어 일본 사회에서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혁명가로, 공산주의자들의 투쟁가로 애창된 노래였다. 그들은 3절에서 더욱 열을 내서 합창했다. 그가 학습회에서 확실히 배운 것은 적기가였다.
붉은 기를 높이 들고 우리는 나가길 맹세해
오너라 감옥아 단두대야 이것이 고별의 노래란다
높이 들어라 붉은 깃발을 그 밑에서 굳게 맹세해
비겁한 자야 갈테면 가라 우리들은 붉은 기를 지키리라.
이정길은 건준 사무실이 종로통으로 이전하면서 그 모임에 발길을 끊었다.
"야, 점령군사령관으로 입국한 하지 중장이 총독 정치를 유지하려고 한대. 우린 미국의 식민지가 됐어. 우리가 꿈군 것은 이것이 아니었는데 말이야."
이정길이 얼굴을 찌푸렸다. 미군은 남한에 진주할 때까지 확실한 통치정책을 세우지 않았다. 다만 편의적으로 그동안 조선을 지배해온 총독정치를 그대로 계승하려고 했다. 여기에 눈치 빠른 경찰세력과 관료 조직이 재빨리 영합했다.
"소비에트만세를 부르는 세력보다 더 나쁜 자들이 세상의 주류로 등장하는 거야."
"그럼 몽양 선생은?"
"사람들은 좌파니 사회주의자니 공산주의자니 하지만 그분은 좌도 우도 아닌 민족주의 노선이야. 구체적으로는 반봉건, 반파쇼, 기본권보장, 자본주의 모순 타파지. 이건 우익도 내거는 슬로건이잖아. 차이가 있다면 친일파 청산인데, 그것을 마다할 조선 국민은 없을 거야. 그것도 온건한 노선이야."
이정길은 사상이나 이념보다 피가 우선한다는 몽양의 정신을 흠모했다. 바로 혈농어수(血濃於水)다.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는 어떤 차이가 있나. 섞갈려."
오민균은 그게 그거 같은데 용어를 분리해 사용하는 것이 이상했다.
"행성과 행성과의 거리만큼 떨어져있어. 공산주의자들은 사회주의를 공산주의의 한 부분으로 말하고 있지만, 사실은 공산주의가 사회주의의 한 부분이라고 봐야지. 사회주의사상은 고대에서부터 존재해 왔다고 할 수 있잖나. 공산주의는 극단적인 개인주의 병폐에 대한 개선의 의미로 사용된 사회주의적 평등과 생산수단의 공유를 차용해 전환된 이데올로기로 봐야지. 평등의 구체적인 경제실천 체계가 공산주의라는 거야.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실천 담론으로 '이제까지의 모든 사회의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라고 선언에 썼지."
"이제까지의 모든 역사는 어디서부터 어디까지야? 계급투쟁이라는 건 또 뭐지?"
"이제까지의 모든 사회의 역사는 문서로 기록된 역사를 말하지. 그 이전의 역사는 원시공동체 사회이고, 거기서는 계급 분열이 있었다고 보지 않지. 정치사회적 욕망이 없는 시대야.
"원시부족사회도 사회적 관계망이 있지 않나? 동물의 세계에도 엄연히 욕망이 있고, 계급이 존재하잖아."
"본능에 의한 계급성은 구분되어야 한다는 것이지. 단순히 식욕과 성욕을 채우기 위해 만들어진 차원을 넘지 못하는 것이니까. 하지만 문자가 생긴 이래로 욕망이 끊임없이 진화하면서 계급투쟁의 역사가 시작되었다는 것이지. 문명사가 계급투쟁의 역사인데, 그게 강자에 의한 강제 모순으로 치달았다는 거지."
"어렵군. 엥겔스-마르크스에 이어 거론되는 레닌은 또 뭐야?"
"너 나 테스트하니? 일본육사를 어떻게 다녔어? 이시하라 상이 가르쳐주지 않았나?"
깊이 들어갈수록 이정길도 잘 몰랐다.
"이시하라 상은 도교적 아나키스트지. 난 학과에 열중했을 뿐이고..."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에 관해 먼저 떠오르는 인물은 마르크스와 레닌인 것은 맞아. 이들은 공산주의의 사상을 유럽에 전파하면서 볼셰비키 혁명을 이끌었고, 이때 보편적 공산주의 사상을 실천한 거야. 자본주의의 모순점을 파헤치고 자본주의의 단점인 노동자들과 부르주아의 부익부 빈익빈 현상을 타파하고자 투쟁했지. 이게 러시아를 휩쓸고 동유럽 국가들을 소비에트연방으로 연합해나가는 동력이 되었어."
"생산수단과 분배까지 통제한다면 그건 이념이 아니라 경제적 실천 체계지."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는 유사 개념이고 차별이 없는 평등사회를 이루고자 하는 인류의 꿈을 대변한다는 이념 체계야.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공산당선언 이후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사이에 개념 차이가 생겨났지. 내가 알기로, 사회주의는 국가가 생산기반을 통제하는 형식이고, 공산주의는 국가가 생산기반만이 아니라 분배까지 통제한다는 것으로 알아. 그렇게해서 평등하고 행복한 이상사회를 실현한다는 거지. 생산물의 가치는 자본에 있는 것이 아니라 노동력에 달렸다고 주장하지. 그래야 착취가 사라지고 유산자계급, 즉 봉건적 영주랄까, 부르주아를 타도하고, 평등한 세상을 만든다는 논리야. 사유재산을 폐지해야 한다는 것이 공산주의의 핵심적 지향점이야. 옛날부터 내려온 땅이 왜 개인의 재산이라고 우기느냐는 거지. 우리 모두의 공공재고, 그래서 공동체 대표인 국가가 편의상 관리한다는 거지, 투기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것이지. 나도 사실은 사전적 의미일 뿐, 세부적인 건 잘 몰라. 현실 적용은 더 모르겠고...개똥철학이고, 수박 겉핥기라니까. 그런데 우린 잘 알지도 못하면서 진영으로 구분해 피아 구분을 한단 말이야."
"그럼 그 대칭 개념이라는 민주주의는 또 뭐야?"
"잘 모른다니까, 굳이 말한다면 민주주의는 국민이 주인이 되어 국민을 위해 정치가 이루어지는 제도라고 봐야지. 말로만이 아니라 실제로 사람 대접받는 개인의 인권이 존중받는 제도라는 것이지.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국민주권 사상이야. 국민이 바로 권력이지만 다 참여할 수 없으니 그 수단으로 대의제를 실시하는 거지. 땅도 개인의 재화라는 거고, 경제활동이든 무엇이든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것 이외의 간섭은 정당하지 않다는 것이고, 남을 부당하게 탄압하지 않는다는 것, 어떤 결정도 번복할 수 없는 것을 허용치 않는다는 것... 자유가 전제되지만 평등도 있지. 민주주의는 국민의 지적 수준이 높고, 국민의 삶이 향상된 사회에서 작동하기 좋은 제도라고 봐. 수준 낮은 민도로는 운영할 수 없는 고급스런 실천체계야. 그리고 이념이 아니야. 우파 독재자가 즐겨 사용할 수 있는 제도야. 그래서 민주주의의 반대는 독재주의야. 사회주의나 공산주의가 아니지. 민주주의의 우익 독재가 더 잔혹하고 부패하고 무섭다는 것 알아야 돼."
"자유 민주의 개념은 공산주의나 사회주의에도 있잖나."
"그렇지. 공산주의 국가도 프롤레타리아 데모크라시라고 하잖아. 민주주의 제도가 좋기 때문에 너도나도 차용하는 거야. 독재적 요소가 많은 왕조도 민주주의를 넣잖아. 어쨌든 사회주의는 이념적 개념인 반면에 공산주의는 경제적 개념이야. 사회주의의 대칭 개념은 민주주의이고, 공산주의의 대칭 개념은 자본주의라고 볼 수 있어. 자본주의의 폐단은 독과점과 실업문제, 빈부격차지. 강자의 포식이 이 범주에 들고. 공산주의는 생산기반과 독과점, 실업문제를 국가가 통제함으로써 평등하게 살 수 있다는 건데, 그것도 프로레타리아 일당 독재를 가져오는 폐단이 있지."
"그게 현실적으로 가능할까? 민주주의의 반대는 사회주의나 공산주의가 아니라 독재주의라고 했잖나. 나는 전체주의라고 생각해. 일본의 전체주의, 독일 나치즘, 스페인 파시즘이 모두 전체주의 시스템이야. 반민주제도지. 그런데 모두들 이념과잉에 빠져서 제대로 된 이념을 소화하지도 못하면서 이념의 구렁창에 빠져서 허우적거리고 있는 것 같애."
"나도 헷갈려. 교과서적인 개념도 파악하지 못하고 죽고 죽이는 테러 행위를 저지르고 있어."
"정남 형은 박헌영 사무실에 나가신다고?"
"그래. 선전부장으로 활동하고 있어. 집에 있는 책을 탐독하라고 했어. 헌데 보니 모두 단풍들이야."
"단풍이라니?"
"모두 붉은 사상서들이야. 난 생리적으로 싫어. 어떤 강제된 힘이 작동하는 것 같애."
"너도 일본 제국주의가 반대파를 잡아가두기 위해 만들어놓은 덫에 걸려들었군. 제국주의자들을 반대하는 세력이 모두 사회주의자들이니까 그런 책을 읽는 사람들을 하나같이 빨갱이로 몰았잖아. 이제 우린 그런 시대를 사는 게 아니라 자유 시대를 구가하는 사회에 와있다구. 책 읽는 자유를 얻은 게 무엇보다 기쁘잖니?"
"하지만 모르겠어. 혼란스럽다."
일정한 갈 곳이 없었기 때문에 오민균은 매일같이 이정길 사무실을 드나들었다. 둘이 앉아 세상 돌아가는 얘기에 매일 정신줄을 놓았다.
"무슨 얘기들을 그렇게 맛있게 하노? 듣고 보니 흥미롭던데..."
어느날 이쾌대가 들어서면서 물었다. 그의 경상도 억양이 다정해보였다.
"쓸데없는 잡담을 했습니다. 우리가 공부들이 짧아서요."
그가 의자를 끌어다 당겨 앉았다.
"내가 걱정하는 것은 미국과 소련이 민주주의와 공산주의로 대립하면서 블록화하고, 그것이 한반도에서 각축전을 벌이게 된다는 것이오. 원하든 원하지 않든 둘로 쪼개졌으니 외세 경쟁의 실험장이 된 거지. 그 대결 국면은 끝내 국토를, 민족을 가를 것 같소. 그런데도 지도자들은 엉뚱한 데서 겉돌고 있소. 일본놈들이 만들어놓은 이간책에 말려든 셈인데, 몽양 선생은 분단이 굳기 전에 극복해야 한다는 지론이오. 그렇지 않으면 큰일 난다는 거요. 내 생각도 그렇소."
"미군정도 공산당을 인정하지 않습니까."
오민균이 물었다.
"그렇지. 미군정은 자유민주주의 국가에는 어떤 정당도 받아들여서 용광로처럼 녹여낸다고 했지. 그게 민주주의 강점이라고 했소. 그러나 관(觀)이 분명하게 서있지 않아요. 총독부 놈들이 개입하고 있어니까 놀아날 수 있지. 방해물이 하나 더 생긴 꼴이오. 이것 한번 읽어보겠소?"
그가 호주머니에서 접어 넣어두었던 몽양의 신문 인터뷰 기사를 오민균에게 내밀었다.
우익이 만일 반동적 탄압을 한다면 오히려 공산주의 혁명을 촉진시킬 뿐이다. 나는 공산주의자를 겁내지 않는다. 급진적 좌익 이론은 정당하다고 보지 않지만 인공을 적색이라고 아는 사람은 소학교 일학년과 같은 사람이다. 나누면 무너지고 합하면 이룬다. 한민당, 국민당, 건준이 모두 집결해야 한다. 그러나 사대주의와 배외사상은 절대 배척해야 한다.
오민균이 기사를 읽고 나자 이쾌대가 이번에는 탁자 밑에서 낡은 책을 꺼냈다. '학병'이라는 잡지 앞 페이지에 몽양의 권두논문 '우리나라의 정치적 진로'가 실려 있었다. 오민균은 긴 글 중 연필로 언더라인이 된 글을 읽었다.
나라의 독립을 완성하려면 땅의 남북과 사상의 좌우를 가릴 필요가 어디에 있는가. 과거의 지하운동시대를 생각해보자. 어두컴컴한 감방에서 더듬더듬 걷다가 탁 부닥친 연후에 '너는 누구냐'고 물으면 '나는 공산주의다', '나는 민주주의자다'라고 말하며 서로 껴안고 어쩔 줄 모르던 혁명 투사들 간에는 민주주의자도 공산주의자도 없었던 것이 아닌가. 인민 대중을 위하여 싸우려면 노동 대중의 이익을 위하여 투쟁하는 인민의 복리를 위하여 싸우려는 공산주의자와 손을 잡지 않을 수 없지 않은가.
책을 덮어 건네자 이쾌대가 아쉽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전국인민대표자대회 중앙위원회 회의 도중 몽양 선생이 테러를 당하신 것이 결정적인 실기를 한 것 같소. 중요한 시기에 선생님이 병원에 계시고, 한달 가량을 요양생활하시다 보니 강경 좌익계가 인공을 주도해버렸소. 이 바람에 중심이 되어줄 민세(안재홍) 선생이 이탈해버렸소."
건준은 해방 직후 정치적 공백기를 메우면서 건국 단계로 이끄는 국내 유일의 정치세력이었으나 해방 20일 후 발전적 해체를 하고 인공에 흡수되었는데 몽양이 테러를 당하면서 조직 장악력이 박헌영계로 넘어가버린 것이었다.
"공산주의자들의 결속력은 강하오. 몽양 선생이나 되니까 끌고 가시는데 하필이면 공백기가 한달이나 돼버리니 조직이 약화되었소. 몽양의 지지자인 정백 최근우 이여성 이만규 최용달 선생 등 지체있는 좌파들은 박헝영의 재건파에 밀리고, 재건파가 실무 조직을 장악하니 역할이 없어진 거요."
박헌영은 미군이 상륙하기 전 인민공화국을 선포하면 미군이 기득권을 인정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보았고, 설사 인정되지 않더라도 인공이라는 국가조직을 내세우면 협상력을 높일 수 있다고 몽양을 설득했다. 그것은 몽양의 생각이기도 했으나 기존 건준 조직을 허물 이유는 되지 못했다. 헌데 그에게 말려들어 주도권을 빼앗겼다.
몽양은 인공 선포때 국호를 '조선민주공화국'으로 미리 정해놓았다. '조선인민공화국(인공)'은 본래의 복안이 아니었다. 이는 공산측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전국인민대표자대회 중앙위원회 회의장에서 한 대의원이 '인민공화국'이라는 호칭의 타당성을 주장했다. 어느결에 이를 지지하는 분위기가 장내를 압도해 '인공'으로 국체가 결정되었다. 당시의 '인민'은 누구나 자신을 국가의 일원으로 등치시켜 친근감과 함께 자부심을 가졌기 때문에 누구나 이의없이 동조했던 것이다.
그러나 허헌과 최용달에 의해 상정 통과된 '조선인민공화국조직법(헌법)'은 자본주의 국가의 민주주의 헌법을 기초로 한 것이었다. 국호나 헌법이 민주공화정에 기초했던 것인데, 위원장인 몽양이 참석하지 못한 바람에 '인공'으로 결정됨으로써 훗날 그것으로 인한 엄청난 대가를 치르게 되었다. 시작은 사소했지만 후유증은 심각했다.
"공산 독재가 무섭다고 하지만 사실은 우익 독재가 더 무섭데이." 이쾌대가 말했다. "우린 우익 독재 밑에서 살아봤잖나. 히틀러, 무솔리니, 히로히토, 그중 스페인의 프랑코가 무섭데이."
그는 프랑코에 대해 길게 설명했다.
"열정의 이미지가 강한 스페인은 그림을 하는 내 마음속에 이상국가로 새겨져 있지. 그런데 폭압적인 정치체제를 보고 환멸을 느꼈데이. 프랑코가 군사쿠데타를 일으켜서 공화국 정부를 전복시켰을 때, 수십 만명을 자기를 반대한다는 이유로 죽이거나 추방했지."
프랑코 체제는 군대와 가톨릭교회를 권력기반으로 지배 구조를 강화했다. 군대는 무력으로 프랑코 체제를 뒷받침하고, 프랑코를 추종하는 민간인 집결체인 팔랑헤는 독재통치에 필요한 관료집단을 공급하고, 카돌릭 교회는 국교로 인정받는 대가로 독재체제를 정당화시켜 주었다. 이후 이들이 모든 혜택과 특권을 향유하면서 사회의 지배계급으로 등장해 이익을 독점하는데, 이때 반대하는 지식인 등 저항세력을 죽이는 데 방조했다.
"일제 때 친일파를 통한 우익독재, 제국주의 경찰통치가 우리 강토에 뿌리박혀 왔잖소. 지금 이 땅에도 그런 정치 프레임을 짜가고 있소."
"막을 방법이 뭡니까."
"확실하게 해야지. 스페인 내전에는 파시즘에 반대하는 세계의 지성들이 참여하고 있소. 국제여단 지원군에는 미국의 소설가 어네스트 헤밍웨이, 프랑스의 소설가 생텍쥐베리가 참여하고 있소. 영국 작가 조지 오웰도 참여했는데, 그는 프랑코의 승리로 끝난 스페인의 내전을 보고 '스페인 역사는 1936년에 죽었다'고 썼소. 군대를 동원해서 자국민을 학살하는 야만이 찬란한 스페인 문화를 짓밟았다고 세계에 고발했소. 이처럼 국제적 연대가 있는데 우리는 그렇지가 못하다카이. 새로운 친구가 일제의 총독정치를 이어받고 있단 말이오. 해방군이 아니라 점령군으로 들어와서, 판세를 오독하며 일제를 그대로 복사하는 기라. 인민이 또다시 짓밟힐 수 있는 위기의 순간에 와있소. 우리의 권력 이행이 일제 치하 인사들에 의해 주도되면 볼장 다 보는 기요. 그런 음모가 여기저기서 살아나고 있소. 그래서 몽양 선생이 보수 강경파나 극좌의 대립을 극복하고 양 진영의 협력을 받아내 단합된 힘으로 새 나라를 건설하겠다는 것인데, 양측으로부터 배척받고 있소. 그 길이 외줄타는 것만큼이나 위태로워요. 이 길이 최상의 길인데 말이오."
이쾌대는 조국의 현실이 이러한 때, 한가하게 풍경화를 그릴 수만은 없었다며 다음과 같이 말을 이어갔다.
"이 시간 현재 여전히 강력한 힘을 갖고 있는 세력은 친일조직이오. 자본력·정보력·인적 자원을 풍부하게 보유하고 있으니까. 그들은 과거를 무덤 속에 묻자는 자들이오. 실용이라는 이름으로 과거는 덮어두자는 '망각 협정'에 서명하자는 거요. 그러니 과거청산이 힘겹소. 그자들은 오로지 자신들의 기득권이 유지되고 이익만 담보되면 민족의 미래 따윈 관심이 없다고 보는 자들이오. 벌써 생각없이 미군정에 붙었소. 원죄를 숨길 수 없어서 숨어서 모사를 꾸미는데 여기에 한민당 계열이 그들을 대변하고 있소, 우리 뇌 속에 장착되어있는 망각이라는 회로를 작동시켜서 그동안 억압했던 구조들을 잊자고 하면서 그들의 들러리를 서고 있소. 망각에서 재생산된 불의에 기반을 둔 나라는 빌어먹을 민족이 되고 말아요. 누가 그 자존을 지켜주겠소. 그래서 나쁜 과거를 청산하고 가자는 건데... 그들이 미워서가 아니오. 나쁜 과거 청산없는 미래는 그려질 수가 없는 것이오. 문명국 프랑스를 보시오. 그들이 야만인이라서 혹독한 과거 청산을 하는가? 파괴분자여서 그러나? 물론 화해하고 용서해야지. 하지만 진정한 화해란 속죄와 함께 저지른 과오의 인정 아니겠소? 피해자가 먼저 용서하는 것은 비굴한 자의 자기위안일 뿐이오. 안그렇소?"
"맞습니다."
오민균이 힘주어 받았다.
"몽양 선생은 일제 탄압과 민족말살 정책이 정점에 달한 시기에도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았소. 그런데 지금 양 진영으로부터 비난을 받고 있소. 여간 불쾌한 게 아니에요. 일제의 외압과 회유로 상당수 독립운동가들이 변절했지만, 선생은 냉철한 정세 판단으로 일제의 패망을 예견하고, 독립국가 건설을 위한 준비에 박차를 가했지. 그러기 위해 건맹-건준-인공을 결성했는데, 모함의 대상이 되어버렸단 말이오."
어느새 밖에는 어둠이 내리고 있었다.
몽양은 1945년 8월 말 박헌영의 방문을 받았다.
"몽양 선생님, 미군이 들어오면 미래가 불확실해집니다. 그들이 들어오기 전에 정부를 수립해야 합니다. 9월 8일 들어온다는 첩보를 접했습니다."
그동안 투옥과 수배생활에 대해 위로하려는데, 박헌영은 만나자마자 이렇게 엉뚱하게 서두를 꺼냈다.
"미군이 진주해서 군정을 선포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먼저 정부를 선포해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 우리의 정부 기구를 기정사실화할 수 있습니다."
몽양 자신도 어떻게든 건준 조직을 정부 기구로 전환하려고 동분서주하고 있었다. 몽양이 신중한 자세를 보이자 박헌영이 다시 재촉하듯 말했다.
"공화국이 선포됐다는 것을 널리 알리면 각인효과가 있어서 현실로 인정받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선수를 치는 것입니다. 그래도 외면받을 경우 투쟁할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되는 것이지요. 국민총동원력이 생기는 것입니다. 어차피 정부를 만들어야 하는데 우리가 기득권을 확보하면 유리하지요. 미군정 고문관 역할을 하는 총독부의 관여를 어떻게든 막아야 합니다."
몽양은 박헌영의 요구를 받아들여 9월 6일 건준 본부에서 전국인민대표자대회를 소집했다. 건준에는 몽양의 중도파와 민세의 온건 우파, 공산 진영인 장안파 등 고하 진영을 제외한 제 세력이 참여했다.
그때까지 충칭에서 김구가 주도하는 임시정부는 돌아오지 않았고, 귀국하지 않은 이승만과 독립촉성국민회(독촉)는 구성되지 않았다. 좌익 계열 장안파는 화요파, 상하이파, ML파 등 여러 계파가 망라돼있었으며, 전향한 사람도 대거 참여한 온건 좌파였다.
박헌영은 해방되자마자 숨어 지내던 광주의 한 벽돌공장에서 나와 곧바로 상경한 뒤, 장안파에 맞서 공산당 재건파를 결성했다. 재건파는 박헌영의 성격 그대로 근본주의적이고 모험주의적인 성향을 띠고 있었다. 이들의 활동은 정통성 면에서 장안파보다 우위에 있었다. 이런 명분과 힘으로 박헌영은 공산당 합작 연석회의를 통해 장안파를 접수했다. 그리고 '현 정세와 우리의 임무'라는 <8월 테제>를 발표하여 8.15 상황을 혁명단계로 규정하고, 노동자 농민 및 양심있는 지주자본가와 연합하여 혁명전선을 쟁취해 나간다고 선언했다.
재건파는 단단한 조직력과 투쟁력으로 9월 6일부터 3일간 열린 전국인민대표자대회를 주도했다. 어느 조직이건 강경파가 대세를 장악하기 마련이다. 이때 여운형의 중도파, 안재홍의 온건 우파, 좌익 장안파 등 연합세력으로 발족한 건준 주축이 재건파의 힘에 눌려버렸다. 이에 불만을 품은 안재홍 세력이 이탈하고, 여운형 세력도 위축되면서 상당수가 흩어졌다. 결국 해방과 동시에 결성되었던 건준의 건국운동과 건국정신은 퇴색하고, 깃발만 나부끼는 형세로 몰락했다.
몽양이 괴한들로부터 피습을 받아 요양중인 것이 뼈아픈 대목이었다. 그 중대한 시기에 한달이라는 소중한 시간을 소비해버렸다. 조정자로서 통합력과 리더십을 발휘할 기회를 놓치고 만 것이다.
몽양이 어느날 사무실에 나오더니 오민균을 불렀다.
"미군이 군대를 양성한다는 말 들었는가."
"들었습니다."
"현실을 바로 보아야 하네. 어떻게 생각하나."
"바로 보아야죠."
"스스로 군대를 양성할 수 없는 여건이라면 새로운 기회를 활용하는 것도 방법이지."
몽양은 얼마전 오민균이 "건준이 군대 양성을 했어야 한다"는 말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오민균의 이상적 순수성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현실론도 부정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군대 양성은 미 군정이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 점령군으로 왔는데 군대 양성을 허용하겠는가. 그래서 건준도 임정도 인공도 거부되었다. 그런 마당에 군대를 설치한다? 강적 미국과 대적한다? 세계 패권국과 겨룬다? 상상할 수 없었다.
그는 대신 정치적으로 고하를 끌어들이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고 있었다. 좀더 시간 여유를 두고 부딪칠걸. 정치란 진리를 따지는 학문의 장이 아니다. 굴욕을 감수하고서라도 끌어들일 건 끌어들여 이상을 관철해야 한다...
"미군정은 군벌을 인정하지 않지. 우리 독자적 군대를 허용하지 않지."
그러나 오민균은 양보하고 싶지 않았다.
"그럼 건준-인공을 만든 이유가 불분명하지요. 건준도, 인공도 출발선에 있고, 미군정도 스타트 라인에 섰습니다. 그렇다면 창설해야죠. 협상을 하든 하부 조직으로 편입되든 길은 열려있으니까요. 건준이 정부를 이양받기 위한 조직이라면 당연히 국가의 간성을 양성하는 것이 필요한 조치였다고 생각합니다. 제 정파들과 다툴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한 줌도 안되는 몽상가들의 탁상공론보다 그것이 훨씬 현실적 대안일 수 있습니다. 협상력은 총구에서 나옵니다. 힘이 없으면 어떤 협상도 미래가 무망합니다."
몽양은 잠시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그는 일본이 패색을 보이던 1944년 초, 군사단체를 결성해 대일 항전을 준비했다.
비밀유지를 위해 불언(不言)·불문(不文)·불명(不名)을 3대 준칙으로 삼고, 전국 10개 시도에 건국동맹 조직망을 갖추면서 노농군(老農軍)을 편성했다. 군사위원회도 설치했다. 만주군관학교의 박승환에게는 유격대를 편성하도록 훈령했다. 노농군은 후방 교란을 위한 기간병으로 활용할 방침이었다. 광복군의 일부가 연합군에 편성돼 조국으로 진격한다는 첩보도 있었던 만큼 연합전선을 꾀할 구상도 했다<이동화의 '8.15를 전후한 여운형의 정치활동' 일부 인용>.
그랬더라면? 그는 안타까운 듯 길게 심호흡을 했다. 정말 그랬다면 연합군의 일원으로서 조국을 찾는 데 기여했을 것이다. 상하이의 광복군과 국내의 노농군이 결합한다. 만주의 항일연군, 팔로군에 편성된 우리 독립군 부대와도 협력해 기반을 닦는다.
그런데 불행히도 횡적 연대 고리가 빈약했다. 그런 가운데 일본이 갑자기 항복해버렸다. 노농군 투입 기회를 노렸던 몽양은 부랴부랴 건국동맹을 건준으로 전환해 전국 조직화에 나섰는데, 노농군의 건준 편입을 고려하지 못했다. 그리고 군벌들이 난립하는 소용돌이에 휘말려버렸다. 그 상위 개념에서 건국을 디자인했어야 하는데, 제 정파들이 물고 늘어지는 통에 거기에 묻혀 헤어나지 못했다. 소소한 것을 극복했어야 하는데 뛰어넘지 못한 것이 한계라면 한계였다.
그런데 갓 스무살의 젊은 사관생도는 이 지점을 짚는다. 건준 발족과 동시에 군대를 편성해 연합군을 맞이했으면 자주 군대로서의 역할과 건국 정체성을 명료히 할 수가 있었다는 주장. 제 정파의 참여 유도보다 여러 사설 군사단체를 모아 건국군대를 먼저 만들었어야 한다는 주문. 그리고 권력은 총구로부터 나온다는 경구. 모두가 뼈아픈 충고다.
젊은 청년이 말한대로 지금 제 군사단체는 보스 아래서 하릴없이 서울 거리를 배회하며 하잘 것 없는 식객노릇만 하고 있다. 학병동맹 조선국군준비대 조선임시군사위원회 치안대총사령부 보안대 학도대 장총단 대한무관학교 등 50여 군사단체가 좌우로 나뉘어 뒷골목 패거리들처럼 이리저리 몰려다니는데, 하나로 묶는 것이 성사 여부와 상관없이 필요한 조치였다. 그렇게 해서 미국과 협상하거나 산하 조직으로 들어가는 일이 중요했다. 그들의 요구 때문이 아니라 자주군대의 자격으로 가기 위한 도정인 것이다. 그것이 과오였을까, 몽양이 말했다.
"아쉬운 면이 있네."
건준 치안대에는 일본군 장교 출신 박임항과 강문봉이 참여해 중요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그들은 군대 창설 문제에 대한 건의는 없었지만, 치안업무를 열성적으로 수행했다. 그런데 인공 선포 후 미묘한 시각차가 있었다. 그들의 인공에 대한 인식 태도 때문이었다. 몽양은 결론삼아 말했다.
"오 생도, 군인의 길을 가게. 긴 호흡으로, 넓은 시선으로 세상을 보게."
환갑을 맞은 지도자가 젊은 생도의 얘기를 묵살하지 않고 수용하는 태도가 대인다운 풍모라고 오민균은 생각했다.
"선생님을 경호하고 싶습니다."
"나는 경호받기를 필요로 하지 않네. 내가 두려울 것이 무엇인가. 난 죽었으면 일본놈들한테 벌써 죽었어. 어떻게 내 동포에게 죽는단 말인가. 내 걱정은 말고, 진정으로 무엇이 될 것인가를 생각하게."
"선생님 말씀대로 군인의 길을 가겠습니다."
"그래. 오군은 그 길이 맞네. 오군 같은 정신이 바른 청년들이 신생조국의 간성이 되는 것이야. 더이상 나라를 빼앗기는 역사를 반복해선 안되지. 이제는 영토를 지키는 것뿐만 아니라 확장해야지.
그러자 곁의 이정길이 나섰다.
"선생님, 그런데 우리 지도자들이 문제입니다. 몰이성적입니다. 너무나 절망적입니다. 양심적인 인사들까지 자기 아집만 키우고 있습니다. 선생님이 당하신 것을 생각하면 견딜 수 없습니다. 우리 민족은 왜 이렇게 못났습니까."
"그건 좀 우쭐대는 말이지. 해방과 독립이 연합국의 승리로만 온 것은 아닐세. 우리 민족의 독립운동 역량이 상승작용을 일으켜서 해방을 맞은 것이야. 민족의 저력을 과소평가해선 안되네. 자기 비하가 더 큰 허무주의를 가져온다는 걸 명심하게."
"선생님이 일방적으로 몰리니 안타까워서 그렇습니다."
조선총독부가 몽양에게 국내 치안을 당부한 것도 민중들이 존경하고 있다는 데 근거했을 것이고, 감옥에 갇힌 애국자들을 석방조치한 것도 그런 지도자적 역량이 반영된 결과였을 것이다. 누구하고도 사심없이 토론을 즐기고, 또 누구에게도 격의없이 대하는 천의무봉(天衣無縫)과 같은 풍모를 지닌 지도자를 사람들은 모함하고 투기한다. 참으로 견딜 수 없는 모욕이다.
"잘 듣게. 거듭 말하지만, 일본의 패망은 국제 관계의 산물이지만, 우리 내부에서 일본에 대한 저항이 지속되어 왔고, 그런 희생의 결과 오늘이 있게 된 것이야. 지금 일본이라는 거대한 악의 축에 부역했던 자들이 대세를 이루는 듯하지만, 그걸 넘어설 때가 오네. 투쟁했던 이들의 고마움을 잊지 말게. 이건 이데올로기의 문제가 아니야. 민족주의 노선을 걷든 사회주의 노선을 걷든 눈물겨운 독립운동을 했던 것은 증류수보다 더 명징한 순수의 몸짓 바로 그것이었으니까. 그런 그들을 야유하는 세력들이 발호한다고 해서 그 정신이 훼손되거나 소멸된다고 보진 않아. 결국 소멸되는 것은 그들이야. 역사의 진전을 믿게. 낙관이 아니라 그런 믿음으로 세상을 보게."
"친일파, 그 자들이 선생님을 해쳤습니다!"
이정길이 분노의 목소리로 단정했다. 그들의 첫째 방해물이 몽양이다. 건준 발족과 인공 선포에 제정치 세력의 견제가 있었지만 그 뿌리는 친일세력에 있다고 보는 것이다.
"낙담 말게. 내가 습격을 받았다 해도 자주적이고 민주적인 통일정부를 세울 수 있는 기반이 상실되는 것은 아닐세. 내가 꼬꾸라져도 제2, 제3의 몽양이 나올 거니까. 제군들이 있지 않는가. 제군들이 몽양이야. 처한 상황이 방향을 잃고, 문제가 풀리지 않는다고 해서 쉽게 좌절하고 무너지는 것이 더 나쁜 일이야. 가능성을 믿고 끊임없이 추구하고 실현할 수 있는 길을 열어가야 하네. 길이 구부려졌으면 돌아가는 지혜도 생각하고..."
"선생님, 몸조심 하십시오."
이정길이 그의 앞으로 나아가 엎드리더니 소리내어 울음을 터뜨렸다. 이런 지도자가 테러의 대상이 되고, 공격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 가슴이 저렸다.
"일어나게. 우리에겐 길이 있어."
몽양이 이정길의 몸을 일으켜 세웠다.
"자넨 서울대학을 가고, 오군은 군에 입대하게. 나라 사랑하는 일은 여러가질세. 오군은 소개장 써줄테니 미군정 아고 대령을 찾게."
오민균이 주춤거리자 몽양이 덧붙였다.
"챔프니 대령과 아고 대령 휘하에 지금 이응준이란 일본군 대좌 출신이 가있네. 아고 대령을 먼저 만나게. 군사영어학교를 창설한다네. 아고는 이념의 스펙트럼이 넓은 사람이야."<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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