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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1945년 8월과 9월, 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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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4> 1945년 8월과 9월, 서울

[팩션] 실록소설 '행군-어느 민족주의자를 위한 변명' <4>

해방 후 왜곡된 역사 속에서, 지금까지의 한일 관계는 효용을 다했다. 그러나 예고된 갈등이었다. 일본은 구한말과 일제강점기 35년, 8.15 광복과 분단체제, 그 이후 70년의 강고한 구 체제 시스템 속에서 우리 내부 깊숙이 침투해 들어와 알게 모르게 생활의 일부가 되었다. 그 안에 우리 내부의 모순과 고뇌가 응축되어 있다. 이 모순과 고뇌를 탐구하려면 어떤 방법이 있을까.

한 개인사를 통해 시대와 사회를 비추는 거울 역할을 하는 것이 문학의 영역일 것이다. 그동안 우리는 외세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생존이 우선이었던 관계로 자기 자신을 앞세우지 못했다. 우리는 너무 쉽게 잊어버렸고 안일했다. 그러다보니 역사는 박물관에 소장된 문화재인 양 화석화되고, 현대의 역사는 더군다나 묻혔다.

기자 출신 이계홍 작가의 실록소설 '행군-어느 민족주의자를 위한 변명'은 그런 배경에서 나왔다. 이 소설은 2016년 10월호부터 2019년 6월호까지 문예월간 '월간문학'에 연재되었던 소설이다. 월간문학 연재를 마친 뒤 많은 부분을 수정 보완해 프레시안에 재수록한다.

이 연재물은 이른바 '팩션(Faction)'이다. 팩트와 픽션의 사이 어디에서 역사적 사실에 상상력을 덧붙인 '논픽션' 형식의 소설이다. 필자는 취재의 일환으로 일제강점기 말 일본 육사 출신 젊은 생도들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어지러운 시대, 그 안에서 제국주의 광풍에 휘말린 젊은이들의 시각을 잡아내려 했다. 이계홍은 "일본의 극우 정권이 일제강점기의 역사적 사실들까지도 왜곡하는 역사 모독에 대해 하나의 담론시장을 형성하자는 데 목적이 있다"고 했다. '행군-어느 민족주의자를 위한 변명'은 총 33회로 나뉘어 연재될 예정이다.(편집자)


제4장 1945년 8월과 9월, 서울

몽양 여운형의 계동 집에 젊은 청년들이 모여들었다. 청년들은 선전부장 이정남의 부름을 받고 찾았는데 주로 전문학교 학생들이었다. 몽양은 응접실에서 마당과 방을 왔다갔다 부산나게 움직이는 청년들을 바라보면서 잔잔한 웃음을 지었다. 젊은 날, 쓰라림을 안고 일본으로, 중국으로, 시베리아로 정처없이 헤매면서도 오직 희망을 안고 지냈던 지난날들이 오버랩되어 가슴을 덥혀오고 있었다.

“이정남 동지, 젊은이들을 응접실로 잠깐 들어오도록 하게.”

건준 선전부장 이정남이 곧바로 청년들을 응접실로 불러들였다. 몽양이 의자에 먼저 앉고 청년들이 뒤따라 앉았다. 사각모를 쓴 청년이 먼저 입을 열었다.

“이런 날이 오니 정말 기쁩니다.”
“그래, 앞으로 할 일이 많이 있을 거야. 경성방송국 경비하랴, 밀려오는 손님 접대하랴....”
“선생님께서 연설하시는 것 보고 심장이 뛰었습니다.”

청년은 며칠 전의 감격이 아직도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는 듯했다. 휘문고보 운동장을 가득 메운 청중들, 교문 밖 길바닥은 물론 안국동 로터리까지 인파가 이어지고 있었다. 누구는 3.1운동 이후 가장 많은 인파였다고 했다. 이날 몽양은 다음과 같이 연설했다.

-나는 총독부로부터 치안권을 이양받았습니다... 이 땅에다 합리적이고 이상적인 낙원을 건설하여야 합니다. 개인적 영웅주의는 단연 없애고 끝까지 집단적으로 일사불란의 단결로 나아갑시다!
머지않아 연합군 군대가 입성할 터이며, 그들이 오면 우리 민족의 모양을 그대로 보게 될 터이니 우리들의 태도는 조금도 부끄럼이 없이 합시다. 세계 각국은 우리들을 주시할 것입니다. 그리고 백기를 든 일본의 심흉을 잘 살펴야 합니다. 물론 우리는 통쾌한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에 대하여 우리들의 아량을 보입시다. 세계문화건설에 백두산 밑에서 자라난 우리민족의 힘을 바칩시다. 이미 전문부학생·대학생·중학생의 경비대원이 주요 시설에 배치되었습니다. 이제 곧 여러곳으로부터 훌륭한 지도자가 들어오게 될 터이니 그들이 올 때까지 우리들의 힘은 적으나마 서로 협력하지 않으면 안될 것입니다. <1945년 8월16일 휘문중학교 운동장 연설>

명 연설가답게 그의 목소리는 우렁찼고, 열변은 호소력이 있었다. 훤칠한 키에 잘생긴 외모와 카리스마 넘치는 안광, 그리고 폭포수처럼 내쏟는 달변이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해방과 독립을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연설이 있던 날 아침 몽양은 동생 여운홍을 불렀다.

“지금 빨리 집으로 와야겠다.”

여운홍은 부랴부랴 원서동 집을 나와 형님 집이 있는 계동으로 달려갔다. 일찍부터 부르는 것이 급한 일이 있다고 생각하고 형님 집으로 들어섰는데 몽양은 의외의 말을 했다.

“지금 경성방송국을 접수해야겠다.”
“방송국이라니요?”
“아침에 엔도 류사쿠 정무총감을 만나기로 했어.”
“뭐 또 시비걸 일 있나 보죠?”
“아니야. 일본이 치안권을 넘기겠다는 의사를 보였어.”
“네? 치안권을 넘겨준다고요?”
“오늘 일본이 항복을 한다. 그래서 재류(在留) 일본인 무사 귀환을 상의하자고 만나자고 하는 거야.”
여운홍이 감격했으나 방송국부터 접수한다는 것이 이치에 안맞는 것 같았다.
“그런데 왜 방송국을 접수한다는 말씀입니까.”
“우리가 해방과 독립을 맞으면 맨먼저 우리말은 물론이요, 영어로도 방송을 해서 전 세계 인민에게 알려야 할 것 아닌가. 그런 다음 치안을 맡아야 하지.”

여운홍은 형님의 뜻을 헤아리고 이정남을 불러 당부했다. 선전활동을 확대하는 한편 청년들을 모아 주요 기관 경비를 강화하라고 지시했다.

몽양은 해방정국을 주도해나가고 있었지만 마음이 무거웠다. 벌써 방해자들이 나타나고 있었다. 그것은 조선총독부가 아니라 내부의 보수단체들이었다. 그래서 오늘 고위 인사회의를 소집해놓았다.

“제군들, 오늘도 경성방송국으로 나가봐야지?”
“선생님, 선생님의 경호가 더 중요하지 않습니까.”
“왜?”
“요즘 돌아가는 정세가 불안합니다.”

그러자 특유의 환한 얼굴로 몽양이 말했다.

“쓸데없는 말이야. 신생조국에서 나를 해칠 사람이 누가 있다고? 왜놈들한테도 견딘 목숨인데... 좌우간 외부 세력이 침투하지 않도록 방송국 경비나 잘 서게!”

권력의 진공상태인 지금 사실은 그의 안위가 무엇보다 중요했다. 요근래 비토 세력이 만만치 않았다. 그는 개의치 않았지만 상황은 유동적이었다.

“방송국 인근 설렁탕 집에 말해두었으니까 점심때 가서 배부르게 먹게. 이제는 잘 먹고 일해야지. 그리고 내 걱정일랑은 접어, 천하에 나를 해칠 사람은 없어, 하하하.”

몽양은 모든 사물이나 인간관계를 로맨틱하게 보았다. 사람들도 그를 소탈하고 솔직한 성격을 칭찬했을지언정 탓하지는 않았다.

회의 참석자들이 하나둘 마당으로 들어섰다. 민세 안재홍을 비롯 최근우 정백 이만규와 그의 동생 여운홍 등 측근들이었다. 청년들이 그들을 안내한 뒤 모두 각자의 일을 위해 밖으로 나가고, 방문 인사들이 응접실 의자에 앉았다. 녹차가 나오자 최근우가 먼저 말을 꺼냈다.

“우리 건준을 인정하지 않는단 말이올시다.”
“누가요?”
“고하지요.”

고하 송진우는 동아일보 사장이었다. 몽양은 고하가 건국준비위원회(건준)를 반대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부정하고 나오니 이해하기 어려운 사람이라고 고개를 갸웃했다. 그간의 조직체인 건국동맹을 해방이 되자 건준으로 확대 개편했고, 자리를 깔아놓았으니 모두 한 자리에 모이면 되는 것이었다. 자력으로 국가를 건설하고, 민족 자치를 바탕으로 국가 틀을 짜면서 외세를 활용하면 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고하는 거부했다. 주도권을 빼앗기지 않겠다는 고집이었다.

며칠 전, 여운형은 조선총독부 2인자인 정무총감 엔도로부텨 치안유지권을 물려받았다. 이때 그는 치안유지 절차를 밟아나가면서 국가 구성을 펼쳐나가면 된다고 내다보았다. 그것이 정권을 인수받는 데 자연스런 수순이다. 이미 깔아놓은 자리에 모든 단체, 모든 기구, 모든 인사가 참여하면 성대하게 국가 인수 기구가 발족하는 셈이었다. 거기에 무슨 이론(異論)이 있을 것인가.

몽양은 1940년대 초 탄압을 뚫고 조선건국동맹(건국동맹)을 결성했다. 국내 독립운동이 지리멸렬한 가운데 국내 및 해외독립운동 단체들간의 구심체 역할을 하는 창구로 건국동맹을 결성한 것이다. 해방이 되자 건국준비위원회(건준)라는 정부 인수기구로 확대, 개편했는데 조선총독부로부터 정권을 인수받을 수 있는 대응 기구였다.

이런 발빠른 조치는 누구로부터도 외면받을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없어도 있도록 만들어야 하는 판에 이미 존재했고, 또 누군가는 해야 했기 때문에 기존의 조직을 확대 개편해 건국준비 기구로 구성했던 것이다. 이을 인식하고 엔도 정무총감도 만나자고 하면서 정부 인수 절차를 제의해왔던 것이 아닌가.

그가 몽양을 만나자고 요청한 것은 일본인이 제재를 받지 않고 한국땅을 무사히 빠져나가는 일 때문이었다. 몽양은 그를 만나 준비해간 메모를 내밀었다.

“5개항의 요구사항이올시다. 첫째 정치범 석방, 둘째 3개월 식량 확보, 셋째 치안 유지와 건설산업 불간섭, 넷째 학생훈련, 청년조직 불간섭, 다섯째 전 조선 각 사업장 노동자들의 민족 건설산업 협력이오.”

엔도가 메모를 읽고 난 다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알겠소. 어떻게든 우리 일본인이 다쳐서는 안됩니다.”

일본인이 무사 귀국할 수 있도록 돕기만 한다면 어떤 요구도 거부하지 않겠다는 자세가 분명했다. 그만큼 그들은 떨고 있었다. 저지른 죄가 있기 때문에 두려워하는 것이었다. 그중 두려운 것이 보복이었다. 재산 다 내놓고, 자리도 내놓고, 세간살이까지 내놓고 갈테니 무사히 몸만 빠져나가게 해달라고 애걸하는 입장이었다.

어차피 떠나가는 마당이라면 그들의 요구사항을 받아들여도 선심쓰는 효과가 있다. 휘문고보 운동장에서 열린 연설회에서 몽양이 이같은 합의사항을 발표하자 관중들이 일제히 환호했다. 눈물을 흘린 사람도 있었다. 해방과 독립, 자주국가 건설을 눈앞에 두고, 이를 실감하는 순간, 누구도 감격하지 않은 사람은 없었다. 이린 수순이라면 총독부 접수, 신생국가 건설이 순조롭게 진행될 것이다.

그런데 최근우가 그간의 묘하게 삐걱거리는 상황을 보고하고 있었다. 최근우에 따르면, 엔도는 몽양을 만나기에 앞서 8월14일 동아일보 사장 고하 송진우를 만났다.

“고하 사장, 재류 일본인이 무사히 떠나가도록 치안을 보살펴 주시오.”

고하는 단번에 이맛살을 찌푸렸다. 패망해서 떠나가는 놈이 무슨 치안유지를 부탁하고, 재류일본인의 안전을 당부한단 말인가. 엔도는 나름으로 그간의 친교를 무기 삼아 그에게 치안을 부탁했는데 이맛살부터 찌푸리는 것이 내내 섭섭했다. 국내 인사 중 영향력 있는 동아일보 사장이 치안을 맡아주면 좀더 안심하고 떠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당장 거부감을 보이는 것이 다. 엔도는 한동안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고하 선생, 우리에게 필요한 조치는 생명과 재산을 보호받는 거요. 일어날 수 있는 불상사를 방지해야 하는 것 아니겠소?”
“나는 적임자가 아니오.”
“존경받는 고하 선생이 치안 문제를 받아주는 것이 현실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하는데 적임자가 아니라니요?”

고하는 충칭에 가있는 임시정부가 있는데 굳이 자신이 정권을 인수할 당사자가 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또 굳이 말한다면 그것은 새로 들어오는 연합군과 협상할 내용이지 패망한, 이른바 썩은 동아줄을 잡고 흥정할 수 없다고 보았다. 일제가 식민지 민중에 가한 가혹한 탄압정책에 대한 보복이 두려워서 뒷바라지해달라는데 민족 지도자로서 그러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고하 사장이 인수하기 어렵다면 적임자를 추천해 주시오.”

엔도는 어떻게든 고하를 붙들고 싶었다. 법도와 질서와 품위를 지키는 보수 우익 지도자 고하는 누가 봐도 존경받는 인격자였다. 일본유학파로서 일본 입장에서도 대화가 통하는 적임자였다. 그런데 뿌리치고 돌아가버렸다. 송진우가 돌아간 뒤 엔도는 총독부 조사과장인 최하영을 불렀다.

“고하가 거부하고 있소. 최 선생이 맡아줄 수 없소?”

최하영 역시 난색을 표했다. 최하영은 동경제대 출신으로 덕망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총독부 고급 관료라는 한계가 있다면서 대신 박석윤을 소개했다. 박석윤(1946년 월북) 역시 동경제대 출신으로 육당 최남선의 매제였으며, 외교관과 사업가로서 상하이 임시정부와도 선이 닿는 이념적 스펙트럼이 넓은 당대의 지식인이었다. 박석윤은 몽양과도 친했다. 박석윤은 엔도에게 불려가 건국동맹(건준 전신)의 몽양을 추천했다. 건국동맹에 그 역시 참여하고 있었다.

“몽양 여운형을 찾으시지요. 그라면 일본인 무사귀환을 보장할 수 있을 것입니다.”

현실적 실체로서 건국동맹을 결성해 조직을 이끌고 있으므로 이 기구를 활용하면 일본인 무사귀국은 별다른 저항이 없을 것이라고 그는 보고 있었다. 그러면서 건국 조직으로 전환하면 순조로운 권력 이양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보았다.

“조선치안유지협력회 사람들은 어떻소?”
“곤란합니다. 일제의 어용 조직이라면 당장 반발이 나올 수 있으니까요.”

해방된 나라에서 그런 조직은 정통성 문제와 함께 화를 불러올 것이 자명했다.

“하지만 몽양은...”

엔도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몽양과 친면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는 중국 유학파였고, YMCA를 중심으로 사회주의 운동을 펼쳐오고, 중국과 시베리아를 누비며 항일운동을 한 인물이라는 점이 거슬렸다.

“그러나 그는 유연합니다. 꼭 만나보십시오.”

박석윤의 간곡한 권유로 엔도는 부랴부랴 몽양을 만났는데, 의외로 일이 쉽게 풀렸다. 이 소식을 들은 고하가 즉각 반발하고 나섰다.

“지하조직 건국동맹을 건국준비위원회로 개편하고 전국 각지에 건준 지부를 조직했다고? 물러가는 일본에 대한 보복을 방지해주는 대가로 실권자로 나선다고? 이게 프랑스 페탕의 비시 정권과 무엇이 다른가?”

고하는 건준을 나치 지배 시절의 프랑스 비시 정권과 동일시하고 있었다. 충칭 임시정부의 법통을 이어받는 것이 선결과제이고, 전승국인 미국으로부터 통치권을 인수받아야 하는 것이 순서인데 건준이 나선다고? 몸서리처지는 일제로부터 권력을 이양받는다는 것은 그 기구 또한 의심해볼만 하다. 꼬장꼬장한 우파의 원칙주의자 고하는 이런 이유로 몽양을 비판했다.

“그래도 형님, 몽양 쪽 사람 만나서 협의는 해봅시다.”

낭산 김준연이 사무실을 서성거리며 생각에 잠겨있는 고하에게 조심스럽게 주문했다. 고하보다 몇 살 아래인 동경제대 출신의 판단력 빠른 낭산은 고하 밑에서 동아일보가 1941년 폐간되기 전까지 논설위원과 주필직을 맡아오고 있었다.

“자네, 정신 있나? 일본놈한테 정권을 물려받으라고?”

그러나 낭산의 생각은 달랐다. 갑작스런 항복으로 정신이 없는 저들이 애가 닳아 목숨을 구걸하고 있을 때, 선심쓰듯 받아들이면 고맙게 생각할 것이다. 그렇게 권력을 이양받는 것도 전략 중 하나다. 굴러온 호박을 이런저런 명분으로 거부하면 기회를 놓칠 수 있다. 권력의 현실적 실체로서 조선총독부는 여전히 존재하고 있고, 그들이 숨돌릴 시간 여유를 확보하면 나중 무슨 꾀를 낼지 모른다. 일본의 기질 중에는 언제나 뒤통수를 치는 습관이 있다. 그런 뒤통수칠 시간과 기회를 주지 않는 것도 전술 중의 하나다.

“형님, 저놈들은 패망했다지만 무기를 갖고 있습니다. 우리는 각목밖에 없습니다. 저들이 철수하면서 조선인들을 쏘고 떠나지 말란 없도 없습니다. 우리 민중은 보복의 자세로 저놈들을 칠 수도 있고요. 서로 싸움질이 벌어지면 더 큰 일 아닙니까. 저들이 인수인계 절차를 밟자고 요구할 때 응하는 것도 방법입니다.”

그것은 몽양의 생각이기도 했다. 서로 진영은 달랐지만 몽양의 생각과 낭산의 생각은 같았다. 둘은 기본적으로 타협주의자였다. 결과론적으로 말하면 이런 타협주의 정신이 국면 타개의 힘이 되었을 수 있다.

한반도는 전승국도 아니고 패전국도 아닌, 어찌 보면 2차 세계대전의 손님이자 객이었다. 전승에 기여한 바가 없기 때문에 발언권이 있을 리 없다. 그러므로 이럴 때 취해야 할 자세는 기회가 왔을 때 재빨리 붙들어 매야 하는 것이다. 국익 우선의 기본 전제는 실리를 챙기는 일이다. 현실은 한반도가 일본 제국주의의 희생물이었지만, 전승국인 연합군의 입장에서는 한반도 역시 전범국가다. 이때 전쟁 피해국의 입장을 전달하고, 전후(戰後) 처리 과정에 주체적으로 참여해야 한다는 것이다. 당당하게 그 일원이 되어야 한다. 그 전제는 발빠른 판단력과 유연성과 순발력이다.

그런데 벌써부터 분열하고 대립하고 있다. 주도권 쟁탈로 좋은 기회를 놓치고 있다. 도자기는 굳기 전에 작가의 솜씨가 발휘되어야 작품이 나온다. 놀고 싸우다 시간을 허비하면 조악품이 되거나 폐품이 된다. 해방 공간의 기회와 시간을 살리지 못함으로써 나라를 치유할 수 없는 불구상태를 만들면 어떻게 될 것인가. 그 절망과 좌절을 어떻게 치유할 것인가. 그리스 신화에 이런 것이 있다.

내가 벌거벗고 있는 이유는 누구에게나 쉽게 눈에 띄기 위함이고,
앞머리가 무성한 것은 사람들이 나를 쉽게 잡을 수 있도록,
뒷머리가 대머리인 것은 내가 지나가면 다시 붙잡지 못하도록,
어깨와 발뒤꿈치에 날개가 있는 것은 최대한 빨리 사라지기 위함이다.
내 이름은 카이로스다.
바로 기회다.

한번 지나가면 다시 붙잡을 수 없는 것. 그것을 지도자들은 알고 있을까. 해방공간을 제대로 관리하느냐 못하느냐가 민족의 미래를 여느냐 못여느냐의 기로에 섰다는 것을 몰랐을까... 그런 기회비용은 초기에는 염가일 수 있다. 그러나 굳어지면 영영 분단의 고통 속에 갇히게 된다.

굳이 말한다면, 고하나 몽양의 시국관이 크게 차이가 나는 것은 아니었다. 개인적 성격의 차이만 있을 뿐, 차이라는 것이 없었다. 그리고 차이가 적이 될 수 없었다. 그런데 철천지 원수처럼 적으로 돌아섰다.

조선조 유생의 깐깐하고 원칙주의적인 품성을 지닌 고하에 비해 몽양은 나이브한 돌파형이다. 고하 입장에서 몽양은 미더워 보이지 않았다. 사는 방식이나 품성, 그리고 이념의 경계가 모호하다. 자유분방하니 엄격한 유교적 도덕주의자 눈으로 볼 때는 미심쩍고 신뢰가 가지 않았다. 반면에 몽양은 고하가 답답하고 시대 흐름을 읽지 못하는 꽁생원이다. 권위주의가 만연해 사고의 유연성이 없다.

몽양과 고하는 정치인이었지만 모두 언론인이었다. 두 사람은 1941년 강제 폐간 당한 조선중앙일보와 동아일보의 사장 자리에 있었다. 두 매체는 민족지로서의 경쟁의식이 있었지만 사세는 동아일보가 월등했다. 그래서 고하는 알게 모르게 몽양을 무시했다.

‘매일신보(총독부 관영지) 사장은 자가용타고, 동아일보 사장은 인력거 타고, 중앙일보 사장은 걸어서 다니네’라는 시중 잡답(雜沓)의 언어 그대로 조선중앙일보의 몽양은 재정적으로 늘 허덕였다. 걸어서 출퇴근하는 건 소탈하고 호방한 성격을 말해주지만 당시 궁핍한 세상에서는 가난이 청렴이 아니라 무시의 대상이었다.

고하의 주변엔 인촌 김성수를 비롯해 김병로 이인 백관수 장덕수 김준연 등 기라성 같은 일본 유학파 수재들이 포진해있었다. 운동가라기보다 테크노크라트 중심의 인재풀이었다.

반면에 몽양 주변엔 빛나는 스타들일지라도 사회주의 성향의 자유주의자들이 동가숙서가식하며 모여들었다. 대체로 지사적 풍모를 지니고 있었다. 그런 그들이 건준을 꿰차고 정권을 인수할 시물레이션을 하고 있다. 거기에 몽양의 휘문고보 연설회에 서울 시민의 반이 모였다고 할 정도로 대성황이었다고 하니 솔직히 배알이 뒤틀렸다.
머리 좋고 잘 생기고 장래가 약속된 친구라도 식객 노릇을 하면 업신여기기 십상인데, 몽양이 그랬다. 인품과 학식이 없었다면 잘생긴 얼굴을 밑천으로 대처를 나대는 난봉꾼 신세가 될 사람으로 볼 만했다. 난세의 영웅은 고향에서 대접받지 못한다는 말이 있듯, 젊었을 적 식객 노릇하던 자가 훌쩍 커서 세상을 호령하는 처지가 되니 젊은 시절을 함께 보낸 친구가 이를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거기에 고하는 근래 몽양이 엔도로부터 정치 자금을 받았다는 괴소문까지 떠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것은 엔도가 고하를 묶어두기 위한 고도의 공작 음모일 수도 있었지만, 고하는 그것을 믿는 모양이었다. 인간은 본시 반대파의 나쁜 정보는 그대로 믿고 증폭시키고, 좋은 정보는 부정하거나 비트는 습성이 있다.

“사람이 쓸개가 있지, 망해가는 놈들의 뒷돈을 받아서 그 자식들 귀향 편의를 봐준다고? 염치없는 일 아닌가.”

고하는 도리어 낭산더러 진상을 알아보도록 지시했다. 몽양은 낭산의 전화를 받고 최근우를 대신 만날 장소로 보냈다. 몽양의 심복 최근우는 낭산과 대학 동문이었다. 낭산은 최근우보다 나이가 많았지만 동경 유학시절부터 친구 사이로 지낸데다 이념적으로도 가까운 사이였다. 두 사람은 조선공산당에 가입한 경력이 있었다. 몽양은 고하의 심뽀와는 상관없이 그를 어떻게든 건준에 끌어들일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게 쉬울 것 같지 않소.”

최근우로부터 몽양의 뜻을 전달받은 낭산은 고개부터 살레살레 저었다.

“도대체 고하가 어떤 생각을 갖고 있소? 어차피 건준이 조직되었으니 함께 참여해 일하는 것이 좋은 일 아니오?”

낭산도 불만을 갖고 있는 듯했지만 고하의 뜻을 거역할 수 없었다.

“고하는 미군정과의 협력이 긴요하다는 것이야. 통치권을 물려받는다면 연합국으로부터 받아야 하고, 그 경우도 국민대회를 거쳐야 한다는 것이지. 임시 정부가 들어오면 그때 정권을 인수하도록 역할하면 된다는 것이야.”

절차상으로 보면 맞는 수순이었다. 그러나 그럴수록 인수인계할 구심체가 있어야 했다. 미국의 속마음을 알지 못하니 내부적 결속력을 갖추고 준비하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최근우가 사무실로 돌아와 고하측과 접촉한 과정을 상세히 보고하자 몽양이 평가했다.

“시간이 없네. 인수 기구를 갖춰 대비해도 시간에 쫓기는데, 임정을 무작정 기다리라니... 쇠뿔은 단 김에 뽑으라고 했잖는가. 대책도 없이 미군사령부를 맞이한다면 그들 뜻대로 끌고갈 수 있고, 왜놈들이 끼어들어 분탕질할 수 있네. 왜놈들 성질 모르는가? 정권 인수인계 과정에서 일본놈들이 농간을 부릴 수 있단 말이지. 조선 지도자들이 미군사령부와 연이 닿아있지 않은 마당이라면, 협상 때 우리도 이런 정부 인수기구가 있다 하고 당당히 나서야 할 것이란 말일세.”

건너편 자리의 정백이 나섰다.

“그런데 말이지요, 저자들이 우리더러 총독부 자금을 받아 쓴다고 악선전하고 있습니다.”
“정백 동지도 그런 소문을 들었소?”

몽양이 언성을 높였다.

“들었습니다.”
“고하가 나더러 총독부 돈을 받았다고 음해해? 나를 시중잡배로 몰다니! 용서할 수 없소!”

그의 손이 떨렸다. 몽양은 조선인들의 안위를 걱정해 비폭력주의에 입각해 일본인을 보내준다는 것이고, 그런 다음 권력을 인수받는 것이 현실적 대안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돈받아먹고 후사를 도모해준다고 모해하다니.... 다른 회동자들도 비분강개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일본놈으로 말하자면 우리가 더 이가 갈리지. 그들은 대접받고 살았지만 우리는 매번 당하고 살았잖소. 핍박당한 우리보다 그자들이 더 방방 뛰니 우리가 매국노가 돼버린 꼴일세, 허허 참.”
“설사 돈 받으면 어떤가. 지들처럼 우리가 총독부에 놀아날 사람들인가. 이건 치욕이다. 지놈들이 쌀밥만 먹고 살아서 남의 배고픈 것을 모르고, 이렇게 함부로 씨부리는 거야.”
“이것은 배신행위보다 더 나쁜 거요! 함께 하지 않겠다는 흉계요.”

모두들 흥분하자 몽양이 다시 주변을 정리했다.

“여러 말 할 것없이 우리가 치안유지한 상태에서 미군정을 받아들이고, 상해 임정을 받아들이면 되는 것 아니겠소. 우리가 먼저 임시정부 귀국환영회를 준비합시다.”

몽양은 선제적으로 임정을 환영하자고 했지만, 배석자들은 떨떠름한 표정이었다. 몽양과 백범 김구간에 감정의 앙금이 있었다. 그것을 배석자들은 알고 있었다. 몽양이 상하이 임정시절 중국에 들어가 함께 활약할 때, 징계를 받은 일이 있었다. 그는 국민대표회 안창호, 김동삼과 함께 개조파로 활동해 김구 노선과는 다른 길을 걸었다. 모스크바를 찾아 레닌을 만나고 쑨원을 만나고, 장제스를 만나는 등 독자적으로 활동하며 이념적 스펙트럼을 넓혔다. 그것이 임정의 눈에 거슬렸다. 경계 구분없이 종횡무진 활동하는 것이 임정으로서는 독단적인데다 그의 정체가 불분명했다. 그런 연유로 징계도 받았던 것이다.

이때 몽양은 동아일보 통신원과 러시아의 타스통신 기자로 활동하고 있었다. 동아일보 상하이 주재 통신원은 고하의 주선이었다. 그런데 지금 고하는 임정을 보는 시선과 노선이 다를 뿐만 아니라 음해까지 하고 있다. 지도자들은 이렇게 자잘한 시비에 말려 쉽게 접근하지 못하고 있었다.

“날 협잡꾼으로 모는 것은 어이상실이야.”

몽양은 경기도 양평 부호의 후예였으며, 구한 말 기독교의 평등사상을 수용하면서 노비들을 해방시킨 사람이었다. 돈에 연연하지 않고 양심의 소명대로 정의롭게 살아왔다고 자부해왔다. 풍류객으로서의 기질은 있었지만 남의 돈을 부정하게 탐해본 적은 없었다.

해방 전후의 정치지도자 인기도로 보면 몽양은 단연 민중의 스타였다. 여론조사에서 몽양이 늘 1위였고, 2위 이승만, 3위 김구 순이었다. 따지고 보면 고하는 손 아래 급이었으며, 그랬음에도 불구하고 소탈한 성격 그대로 그와도 스스럼없이 동지로 지내고 있었다.

“자고 나면 세상이 바뀌는데 임정이 언제 들어올지도 모르고, 또 돌아올 때까지 한가롭게 기다린다는 것은 두 손 놓고 있자는 것과 무엇이 다릅니까. 기회가 있을 때 빨리 붙잡아야지 미적거리다가는 다 놓쳐요. 임정봉대론, 좋습니다. 그럴려면 기구를 만들어서 맞아야지요. 이것저것 갖추지 않으면 또 일본놈 밥이 되고 말 거요.”
“그러게 말입니다. 일본놈들이 벌써 연합군과 밀통(密通)을 주고 받는다는 풍설도 있소이다. 조선인은 능력이 없는 사람들이라고 벌써부터 모략하고 있습니다. 이럴 때 조직을 강화하고, 건준으로 하여금 임정 귀국환영회를 열지요.”

회동은 이렇게 결론이 났다. 건준은 산하의 보안대를 건국치안대로 개편하고 청년학도들을 중심으로 관공서ᐧ경찰서ᐧ금융기관ᐧ방송사 등 주요 건물 보호에 나섰다. 전국 시·군·읍ᐧ면 단위에 광범위한 지부 조직을 결성했다. 전국 145개 지부가 설치되어 9월1일 전국건국준비위원회가 열렸다. 이렇게 발빠르게 국내 유일의 정치결사체로 모습을 갖춰나갔다. 여세를 몰아 9월6일 경기여고 강당에서 전국인민대표대회를 열었다. 대회에서 조선인민공화국(인공) 조직기본법을 채택하고 인민위원을 선출해 신정부를 구성했다.

조각 명단을 보면 주석 이승만, 부주석 여운형, 국무총리 허헌, 내무부장 김구, 외교부장 김규식, 재정부장 조만식, 군사부장 김원봉, 경제부장 하필원, 서기장 이강국, 기획부장 최근우가 지명되었다. 대회에서는 임정환영준비회 및 미군환영회도 구성하기로 결의했다.

인공이 출범했지만 갑자기 새로운 국면이 전개되었다. 일제에 쫓겨 전라남도 광주시 백운동 벽돌공장에서 노동자로 숨어지내던 박헌영이 나타난 것이다. 몽양은 그와 제휴해 조직 기반을 확대해나갔다. 어떻게든 세를 결집하여 나라의 미래를 열어가고자 했다.

그러나 박헌영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장안파, ML파, 화요회로 분열되어있는 3파의 공산당 조직을 하나로 통합해 인공에 합류했다. 결집력이 강한 그들이 어느결에 건준 조직의 중심부를 장악했다. 이를 보고 부위원장 안재홍 등 민족진영이 이탈했다. 몽양은 사회 여론을 중시해 좌우 합작을 꾀하는 것이 독립국가를 건설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보았지만, 중도 우파들이 이탈해 그의 조직 장악력은 현저하게 약화되었다. 사람 좋은 그는 누구나 받아들이면서, 동시에 누구나 놓치는 우를 범하고 있었다.

이 무렵 원세훈 조병옥은 조선민족당, 안재홍 허정 윤치영 윤보선은 한국국민당, 송진우 김성수 백관수 김병로 김준연은 한국민주당을 창당했는데, 이중 한민당이 막대한 호남 자본력을 바탕으로 우파 주류로 등장했다. 당시까지만 해도 한반도의 주산업이 농업이고, 호남은 곡창지대였으니 한국 자본시장을 쥐락펴락하고 있었다. 한민당은 김구, 이시영이 이끄는 임시정부 법통을 이어받는다는 방침 아래 9월 7일 한민당 발기대회를 열었다. 이때 서울에는 174개의 정당이 난립했는데 그 중에는 1인 정당도 있었다.

몽양은 분열을 막기 위해 양 진영의 통합을 전제로 재차 고하에게 협상을 요구했다. 그러나 고하는 여전히 건준을 부정했다. 임시정부가 있는데 또다른 정부기구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이 거부 이유였다. 그것은 일단 합리적인 판단으로 보였다. 그러나 몽양에게 주도권을 빼앗기지 않겠다는 태도가 본질적인 이유라고 볼 수 있었다.

분열이 내면화한 한국민의 기질 때문에 대립은 일상화되었다. 대의를 위해 소아를 버리는 것이 대인(大人)의 풍모라는 정신을 외면했다. 기왕 설치된 기구를 통해 임정봉대론을 펴고, 임정이 귀국해 기구를 흡수, 확대해 나가면 된다는 것이 평범한 시민들의 기대인데 지도자들은 그런 단순방정식 대신 소소한 대립 문법으로 부딪치는 것을 일상화했다.

고하가 한민당을 창립한 것도 따지고 보면 임정 봉대론을 편 입장에선 모순이다. 고하의 한민당은 정당의 하나이고, 정당은 기본적으로 집권을 목표로 하는 기구다. 임정 세력은 별도로 한독당을 창당했다. 그 역시 권력 쟁취를 위한 정당으로 나선 것이다. 그렇다면 한민당과 한독당은 대립적 위치에 있지 통합의 대상이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임정에 모든 권한을 위임하자는 것은 앞뒤가 안맞는 것이다.

조선총독부의 대 조선 인식은 제 정당이 생각하는 것과는 사뭇 달랐다. 총독부는 조선 지도자들의 내분과 분열이 심화하자 한결 여유를 갖고 즐기는 입장이 되었다. 손안대고 코를 푸는 격이 된 것이다. 자고 나니 시간은 그들 편이고, 그래서 패망 직후 쩔쩔 매던 것이 창피할 지경이었다.

조선총독부는 건준이 조직 확대를 꾀하자 조급한 김에 허용하는 듯했으나 어느 순간부터 제동을 걸기 시작했다. 한국 지도자들끼리 피 터지는 쟁투를 벌이면서 여유를 찾게 되었다. 기다리기만 하면 다시금 통치의 희열을 맛볼 수 있다고 보았다. 뭉치면 대적하기 힘든데, 그래서 갈라놓는 정책을 식민지정책의 주요 의제로 설정했는데 개입하지 않아도 서로 진흙밭의 개싸움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개미 두 마리가 서로 물고 물리는 싸움을 한다. 약한 개미가 먼저 희생된다. 그러나 승리한 개미도 물린 상처로 인해 결국은 죽게 된다. 먼저 죽느냐 나중 죽느냐의 차이일 뿐, 두 개미는 결국 죽는다. 이렇게 끝내 둘 다 나가떨어지는 치킨 게임의 처절한 모습은 물러가는 조선총독부가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통쾌한 관전 포인트였다.

건준 지도부는 조선총독부의 감독을 받는다는 것을 애초부터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들 스스로 건국의 기치를 내걸고 시가행진을 벌이고 관공서, 신문사, 방송국, 경찰서, 기업 등 주요 기관 경비를 명분으로 삼아 접수했다. 상대방이 힘 떨어질 때 밀어붙이는 것은 정당하고 당연한 전술이었다. 빼앗긴 것을 되돌려 받기 때문에 도둑질이라고 말할 수도 없었다. 원래대로 되돌려놓는 것이니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조선총독부가 몽양에게 치안권을 위임했다면 건준을 당연히 정권인수 기구로 인정한다는 뜻 아닌가. 하지만 총독부는 어느날 권력이양을 약속한 바가 없다고 포고문을 발표했다. 역시 일본은 기회를 놓치지 않는다.
당시 조선총독부는 다음과 같이 사태를 분석했다.

-고하 세력은 8.15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무책이 상책이라고 보고 있다.
몽양은 고하의 인식과 반대로 8.15 상황을 신속하게 대처하고 긴급하게 움직이고 있다.
두 세력은 정파주의에 빠져있다.
조선총독부는 미군정과 협상하여 조선반도 관리 일정을 연장할 수 있다. 연장이 용이치 않으면 총독부 의지대로 환경을 조성해나간다.
기회는 조성되고 있고, 연합군과의 협상 채널은 다양하게 확보되어 있다.

그 진단은 정확하게 맥을 짚고 있었다. 고하는 건준을 조선총독부에 협력하는 괴뢰정권이라고 공격했다. 건준은 고하가 임정봉대론을 주장하면서 한민당을 창당한 것이 모순이라고 공격했다. 이것 모두 총독부가 이간질하기에는 좋은 환경이었다. 일본의 조선군관구사령부와 경찰은 이를 보고 다음과 같이 성명을 발표했다.

-당국의 지시에 따라 생업에 종사하고, 경거망동하는 일이 없기를 요한다.
민심을 교란시키고, 치안을 문란하게 하는 일이 있으면 군과 경찰은 단호히 조치를 취할 것이다.

조선총독부는 더 나아가 ‘건국준비위원회 등에 맹성을 촉구한다’람는 담화를 발표했다.

-건준의 본래의 사명은 총독부 행정의 치안유지에 협력하는 것인데, 본래 사명을 일탈하는 점이 많다. 건준 활동 및 의지 발표를 보면 생명 재산의 보증, 정규 군대의 편성, 식량물자 운영, 통제기관의 장악 등이 포함되어 있고, 행정 기관의 접수를 촉구하는 등 정치적 의지 표시, 또는 독립 정권 획득의 준비 공작 등의 표명으로 인하여 심대한 과오를 범하고 있다. 이같은은 일탈적인 행위에 대하여서는 엄하게 단속, 조치할 것이다.

건준의 명칭도 조선총독부가 지시하는 취지에 맞게 바꿀 것을 요구했다. 국내 세력이 조선총독부에 손을 써 건준 명칭을 바꿔 쓰도록 요청까지 했으니 조선총독부로서는 국내 유일의 건국기구를 무력화시키는 데 더할 수 없는 힘의 탄력을 받고 있었다. 일본의 힘을 빌어 이익을 취하려는 국내 세력들 역시 힘을 받아가고 있었다.

이로 인해 8.15 해방과 독립은 기록상일 뿐, 현실은 일제 치하나 다름이 없었다. 몽양에게 협력을 요청했던 조선총독부가 갑자기 태도를 바꾼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는지 모른다. 수많은 정파와 군벌이 난립하지만 내버려 두어도 그들끼리 충돌해 끝내는 자멸한다. 이걸 지켜보며 식민지 관리를 여유있게 연장할 수 있다. 그런 과정에서 미군정과의 네트워크를 활발히 작동해 일본의 복안대로 남한을 물려주고 퇴각하면 된다. 인적 물적 손실 하나 없이 제2의 친일국가를 구성하고 떠나가면 되는 것이다.

이를 지켜본 오카 조선총독부 정무국장은 “자식들” 하고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역시 조선놈들은 재미있단 말이야. 지들끼리 진흙탕을 뒤집어쓴 채 깃발을 꽂으러 언덕에 기어 오르는데, 꽂을만 하면 밑엣놈이 바짓가랑이를 끌어내려 진흙구덩이에 쳐박아버린단 말이야. 그렇게 서로 진흙탕에 나뒹군단 말이야. 하여간에 재미있는 종들이야.”

이런 가운데 조선총독부는 일본 군사 3천명을 경찰로 전속, 배치했다. 일본군은 무장해제가 되었기 때문에 이들을 써먹어야 할 마땅한 곳을 찾던 중이었는데, 다행히 불안한 정국이 전신의 계기가 되었다. 치안유지 명목으로 미군으로부터 일정 기간 통치를 위임받을 수 있다. 이러니 해방과 독립은 개뿔, 여전히 일제의 연장일 뿐이었다. 그 사실을 우리만 모르고 있었다. 오카는 웃음이 터져나오는 것을 참지 못하면서 다른 성명서를 준비했다.

-현재의 정세는 대일본제국이 미ᐧ영ᐧ중ᐧ소 4개국과의 전투 행위를 일시 정지한 것에 불과하며, 조선의 사태는 금후 일본과 공동선언의 상대국과의 사이에 이루어질 합의에 의하야 비로소 통치권의 수수(授受)가 이루어질 것이다.
고로 그 때까지는 조선에 있어서의 제국의 통치권은 엄연히 조선총독부에 존재하며, 그 사이 조선총독부에 통치의 모든 권한과 책임이 있다. 즉, 사태는 직접 전투행위가 정지된 것에 불과하다.
조선의 문제도 금후의 조약 내지 법제적 수속이 진행된 이후의 일이다.
누가 조선통치의 책임 있는 지위에 설 것인가는 결정되어 있지 않다. 조선통치의 책임과 그 통치를 위한 시설 일체는 현재 역시 조선총독부 자체의 수중에 있다. 고로 치안을 교란시키는 일이 있으면 총독부는 그 책임으로서 단호한 조치를 취할 것이다.

실제로 기마병이 일본 군도를 차고 위협적으로 서울 중심부를 순찰을 돌고, 행인이 오인을 받아 기마경찰이 쏜 총에 쓰러져 죽었다. 기마경찰의 채찍을 맞고 부상당한 시민도 부지기수였다. 경찰은 용산역 앞에서 항의하는 의과전문학생을 경찰진압봉으로 때려죽이고, 시민을 곤봉으로 갈기면서 잡아가두었다. 민중들은 해방을 실감하지 못했다.

조선군관구사령부의 담화는 그것을 잘 말해준다.

-소위 정식 정전 협정은 금후 대일본제국과 연합국 당국간에 진행될 것이다.
…조선은 여전히 일본 제국의 통치하에 있으며, 그 통치권은 조금도 움직임이 없다.
항간에 떠도는 신정부의 인물 구성과 같은 것은 일부 망동자의 흑색선전에 불과하다는 것이 시일의 경과와 함께 명백해지고 있다.
일부 책동분자가 지도권을 획득하려고 기도한 일시적 파문은 군관의 적절한 조치에 의하야 즉각 진정될 것이다.
일부 책동분자의 암약은 아직 근절되지 않았으며, 기회를 보아서 재발하리라 예상되기 때문에 충분한 경계심을 필요로 할 것이다.

곧 진주할 미군 태평양사령부는 조선총독부가 취한 전후 조선반도 관리 정책을 인정하고, 독려했다. 미군은 조선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고, 대화할 한국의 파트너 역시 정해진 것이 없었다. 그것을 조선총독부가 대신했고, 한국의 지도자는 관여하지 못했다.

미군 태평양사령부는 조선의 지도자를 아는 사람이 전무했으며, 대한반도 정책 또한 뚜렷이 갖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우선 치안을 유지하는 근간을 조선총독부와 일본 군경에 위임했다.

조선총독부는 일본군 제17방면군의 무장해제와 함께 또다시 9천명의 군인을 경찰관으로 전속시켜 특별경찰대를 편성했다. 조선의 지도자들은 이런 변화를 감지하지 못하고 피터지는 싸움에 에너지를 소모하고 있었다. 조선총독부 공작반이 해왔던 분열 책동을 조선의 지도자들 스스로가 나서서 찢고 가르고 있었다.

건국동맹-건국준비위원회-인민위원회-인민공화국으로 건국 기구를 개칭하면서 세를 확장해가던 몽양의 세력은 조선총독부에게는 최대 걸림돌이었다. 보아하니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 민족주의자 등 항일투쟁 세력이 중심이 된 건준이 정부 기구로 등장하면 일본에게 우호적일 리 없는 정부가 된다. 다른 정파들과의 갈등 때문에 몽양 세력이 약화되긴 했지만, 여전히 유일 건국 기구인 것만은 분명하기 때문에 제동을 걸 필요가 있었다. 조선총독부는 다음과 같이 몽양 세력을 견제할 방침을 정했다.

-여운형 등의 정치 공작이 당국과 충분한 사전협의 없이 이루어졌다.
새로운 상황 변화에 적극적으로 대처하기 위하여 「정치운동 단속요령」을 발표한다.
(1)현저히 저하된 경찰력을 보강하여 종래와 같이 조선총독부 스스로가 치안을 확보한다
(2)건준에 의해 접수된 중요 시설 및 공공기관을 탈환한다
(3)이 과정에서 발생될 조선인의 저항을 분쇄하기 위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권한을 행사한다.

요약하면 건준 활동을 통제하고, 끝내 불허한다는 방침인 것이다. 이후 건준 사무실 주변에 경찰이 집중적으로 배치되었다. 여운형의 좌우 합작을 위한 조직 체계는 우익세력과 총독부의 탄압과 협공으로 뚜렷하게 동력을 잃었다. 동시에 좌우파로부터도 공격을 받았다. 좌파로부터는 기회주의자, 또는 친미파로, 우파로부터는 좌익빨갱이, 친소파라는 공격이었다. 일본인은 저절로 즐기는 입장이 되었다. 오카는 “조선인은 시키지 않아도 갖춰진 기구마저 부숴버리는 재주가 있군” 하고 속으로 웃었다.
1945년 9월 8일 미 24군단장 존 리드 하지 중장이 사단 병력을 이끌고 인천에 상륙했다. 그는 미군정 사령관으로서 38 이남 지역에 미군정을 선포하면서 조선총독부의 통치 체제를 존속, 유지한다고 발표했다.

미국으로서는 한반도 처리에 관해 독립할 때까지 신탁통치를 고려하고 있었을 뿐, 한국에 대해서 아는 바가 없었다. 미 군정은 조선총독부의 자문을 받아 통치체제를 승계하는 정책을 펴나가는 것으로 일단 방침을 정했다. 군정을 이끄는 하지 중장이나 군정장관 아놀드 소장은 전쟁만을 아는 직업군인이어서 뚜렷한 신생 독립국 건설 철학을 갖고 있지 못했다. 신생국의 민족성이나 역사, 전통, 인민의 생각과 고민에 대한 식견을 미리 숙지하거나 인문학적 세계관을 갖춘 인물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만에 국한되는 문제가 아니었다. 갑작스럽게 세계 패권국가로 부상한 미국 정부 자체가 그러했다.

이런 가운데 10월 16일 이승만이 미국에서 귀국했다. 그는 좌우의 대동단결을 도모하기 위해 독립촉성중앙협의회(독촉)를 구성했다. 이 기구는 상징적 존재였을 뿐 실체는 없었다. 11월 23일과 12월 2일엔 충칭 임시정부 요인이 1,2개조로 나뉘어 차례로 귀국했다. 모두 개인자격이었다. 임정은 정통 정부임을 내세워 기성 정당을 외면하고 독자적인 노선을 걸으며, 한독당을 창당했다. 임정봉대론을 내세웠던 한민당과도 아무런 연고가 없는 셈이 되었다.

임정은 조각을 하면서 주석 김구, 부주석 김규식, 국무위원 이시영, 외무부장 조소앙, 내무부장 신익희, 국방부장 김약수, 총참모장 유동열, 광복군사령 이청천, 참모장 이범석을 임명했다. 건준이 전국인민대회에서 발표한 조각은 휴지조각이 되었다.

해외 세력의 귀국으로 국내 정정은 더욱 복잡해졌고, 미 군정은 건준-인민위원회(인공)와 충칭 임정 모두 불법화했다. 대신 정당 활동의 자유는 허용했는데, 이로인해 어느새 200여개의 당 깃발이 거리에 나부꼈다. 이들 당은 자고나면 탄생하고 소멸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소소한 명분으로 대결을 일삼았다. 첫 단추를 잘못 뀀으로써 건국은 만신창이가 되어가고 있었다. 피를 부르는 내전의 중심부로 달려가는 형국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

아사코의 집 개보수작업을 마치고 생도 일행이 이시하라 상 집으로 돌아오자 밤이 깊었다. 모처럼 일을 한 보람으로 생도들은 피곤했지만 저마다 기쁨에 넘쳤다.

“우리가 방공호를 파고 진지 보수공사를 한 노역이 이렇게 먹힐 줄 몰랐네. 노가다나 데모도로도 먹고 살 수 있겠어. 우리 여기 그대로 눌러앉아? 토건업이면 금방 부자가 되겠어.”

장지성이 농담하며 구릿빛으로 그을린 팔을 들어보였다.

“다른 집들도 수리해달라고 아우성인데, 이를 어쩌지?”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는 것은 인지상정이오. 귀국선이 준비될 때까지 좋은 일 하고 가시오. 사람들이 오래오래 기억할 것이오.”

이시하라 상이 청년들을 격려하고 말을 이었다.

“그것이 사실은 아나키즘의 정신이오. 아나키즘은 미래에 다가올 평화를 내다보는 사상이오. 그 실현을 위해 풀뿌리 공동체를 형성하자는 것인데, 진정한 지방자치의 모습이오. 거기 가장 현실적으로 가닿은 곳이 제주도지. 거기가 나의 실험장이고 실천현장이고, 이상향이오. 부단히 실험하고 응용하고 실천해갈 곳이오.”

생도들은 또 아나키즘 선전인가 해서 고개를 갸웃했지만 오민균이 물었다.

“왜 제주도가 실험장이고 실천장입니까?”
“거기에 아나키즘의 원형이 살아있다는 거요. 중앙정부의 통제권 밖이고 혜택도 없으니 스스로 더불어 살아가자는 방식의 룰, 바로 자생적 공동체의 모습이오. 그들의 서로를 위한 헌신성은 놀랍소. 억압과 수탈을 자행하는 중앙정부에 대한 기대가 아니라 이웃과 자신이 몸담고 있는 공동체에 대한 배려와 헌신이오. 그게 바로 인디안 정신이오.”

그는 식은 차를 후루룩 마신 뒤 다시 설명했다.

“조선의 아나키즘은 아나키즘을 통해 독립운동을 해왔소. 국제주의 기준에는 맞지 않지만 나는 그걸 이해하오. 민족주의는 영토와 국경을 확장하는 침략적인 제국주의로 나타나기도 하고, 타민족의 간섭을 배제하는 민족해방운동으로 나타나기도 하는데, 조선의 아나키스트들은 이런 두가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아나키즘을 활용해왔소. 그 정신에는 정당성이 있소.”

일본의 일극주의만을 생각하고 있던 오민균은 그의 지적이 새로웠다. 그는 지적 호기심이 발동해 개인의 자유를 갈구했던 아나키스트들이 걸어간 삶이 어떤 것인가를 그려보았다. 신생조국에 그 접목이 가능할까.

“조선의 아나키스트들에게서는 민족주의 냄새가 나오. 그들이 독립을 위해 아나키즘을 이용했으니까 불가피한 측면이 있지. 그런데 경찰이 그들을 결박했소. 본래는 무저항주의인데, 일부 무력사용자를 걸고 무자비하게 탄압했소. 내가 말한 바와 같이 아나키즘은 밥상의 밑반찬과 같은 거요. 어떤 사조도 충돌없이 수용할 수 있소. 차별없는 개인의 자유와 평등한 세상을 꿈꾸는 사상이오. 폭력을 정당화하는 아나키스트는 극소수요. 나는 철저하게 그들과는 선을 긋고 있소. 헌데 누구로부터도 동의받지 못했소. 왜 그런가. 경찰이 괴물로 만들어 제압했으니까. 그들로 인해 군국주의자 제국주의자는 물론 공산주의자, 민족주의자들로부터도 외면받았소. 이런 음모와 조작을 이길 수 있소?”

장지성이 받았다.

“하지만 그런 사조는 격동기의 세상에서는 비현실적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상이 될 순 있지만 힘이 되진 못하죠. 그리고 악법도 법이라고 따르는 것이 현실입니다. 소크라테스도 그랬잖아요. 악법도 법이니 따르겠다면서 독배를 마셨으니까요.”

오민균이 이의를 달았다.

“악법도 법이라고 독배를 마신 소크라테스는 위선자입니다. 어떻게 악법을 만든 자를 용서하고, 그가 만든 악법도 법이라고 독배를 마십니까. 그는 결국 압제자들이 파놓은 함정에 빠져서 그들을 인정하고 말았습니다. 위대한 성인도 법을 지키기 위해 독배를 마셨다... 압제자는 얼마나 대중 조작의 도구로 선전하겠습니까. 악법을 지키기 위해 독배를 마실 것이 아니라 독배를 던져버려야지요. 어차피 죽는 것 싸우다 장렬하게 전사해야지요.”
“좋아요. 그렇게 좋은 생각들을 해봅시다. 여러분들에게 나눠줄 것이 있소.“

이시하라 상이 등사물을 돌렸다. 이시하라 상 옆에 생도들이 둘러앉았다.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것이 무엇인 줄 아시오?”

이시하라 상이 화두를 던졌다.

“귀신 같은 그런 사물을 말씀하신 겁니까?”

이정길이 물었다.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란 뜻으로 내가 직접 대답하지요. 제일 무서운 것은 귀신도, 짐승도, 그렇다고 빈곤도 질병도 아니고, 다름아닌 삶의 권태와 허무라는 거요. 이건 마키아벨리의 말인데, 권태와 허무란, 무엇인가를 해도 무엇을 하는지조차 모르는 무력감. 내 삶의 근원적 이유를 찾지 못한 데서 오는 권태. 무엇을 위해 사는 것인지, 좌표도 방향도 모르고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열심히 허둥대는 것을 말하지요. 전쟁을 위해 맹목적으로 달려갔지만 막상 전쟁이 끝나니 남는 허무감, 그동안 사회를 위해선지 국가를 위해선지, 혹은 자신을 위해선지 모르는 것에 맹렬히 질주했으나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다는 허망감. 그런데 여러분은 작은 실천으로 이런 권태와 허무를 극복했소. 그 안에 소속된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었소. 조그만 실마리가 그들의 생명력을 일깨워준 것이오. 절망 가운데서 인종과 국경을 넘어 인간애를 실천한 청년들을 보고 비로소 그들은 인간의 실존을 확인한 것이오.”

그는 청년들이 아사코와 그 이웃집 사람들에게 배려해준 것이 권태를 이기는 길이라고 지적하고 있었다. 그런 작은 희망이 평화의 등불이 된다고 했다. 그가 말을 이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우리의 허무와 권태와 좌절은 지금 조선 민족에게 당면한 과제가 되었소. 게다가 남북이 갈라졌으니 그 심도는더욱 깊어질 것이오. 하나로 결집시키지 못하는 비애. 분열에는 능하지만 단합의 기제들이 부족하니 어느새 증오까지 겹치게 되었소. 그게 왜 그러는지 아시오?”

청년들이 대답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조선인보다 더 조선인 같았다.

“일본제국주의가 만든 분열 책동 때문이오.”
“저는 우리의 나쁜 왕조 질서가 나라를 망가뜨렸다고 봅니다.” 이정길이 응대했다. “우리의 왕조는 지나쳤습니다. 역모죄는 3대를 멸했으니까요. 그런 후과로 국민적 자생력이 사라졌다는 것이죠.”
“그거야 다른 왕조도 마찬가지 아닌가?”
“그럴 수 있겠군. 그래서 정도의 차이가 있는 것이오. 같은 사안이라도 표독스런 왕조가 있고, 인자한 왕조가 있지. 방향이 좀 다른 이야긴데, 나는 오스트리아를 주의깊게 보고 있소. 그들은 독일 제국인 양 일본과 마찬가지로 주변국의 희생을 강요하면서 자국의 번영을 추구한 나라였소. 주변국이 오스트리아라면 치를 떨지요. 이 때문에 연합군이 오스트리아를 4분할했소. 그러나 그들은 외부적 통제를 뚫고 가까운 시일 내에 통일국가로 나설 것이오. 외부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냉철한 자기 반성과 내부 검열을 통해 힘을 결집해서 방향을 잡아 길을 만들고 통일의 길로 나아갈 거요. 그러나 조선은 동질성을 파괴하는 파쟁의 행진만 벌이고 있소. 반대와 배제의 기제가 중심이 되고 있소. 그중 정치인이 가장 타락했고, 다음이 언론이고, 지식인이오. 그러니 통일은 난망하지 않나 싶소. 그들은 분단을 이용해 이익을 추구할 것이오. 그것으로 기득권을 쌓아가는데, 그런 사람들일수록 공동체의 공동선이라는 것이 없지. 구한말의 지도자들처럼, 철저하게 이익의 자기화, 손실의 사회화를 지향하는 지도층이오. 그러면 누가 좋아하겠소.”
“외부세력이겠죠.”

오민균이 답했다.

“그렇지. 모양만 다를 뿐 다시 식민지가 되는 거요.”
“선생님,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그동안 조국을 찾겠노라고 상하이에서, 만주에서, 시베리아에서 우리 선각자들의 분투가 있었습니다. 독립투쟁의 자산이 있습니다. 저희의 허무와 좌절을 극복하기 위해 그들 자신의 안락과 이익을 기꺼이 희생한 분들입니다. 저희 조국은 빛나는 선구자들의 이름으로 점철된 역사 그 자체입니다. 그들에 의해 깨끗한 조국이 들어설 것입니다. 선생님은 우리 민족성을 얕잡아보시는 것 아닙니까?”

조병헌이었다.

“그중 어느게 문제라고 보시오?”
“파편화를 말씀하시는데, 그것이 민족성일 수는 없습니다. 외부적 영향으로 온 것이지만 이젠 내부적 결속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기를 바라오. 하지만 문제는 언론이요. 일제 강점기 언론 스스로 부역자를 자임했소. 나치에 점령된 프랑스 비시 정권 하의 언론보다 더한 변절 신문들이오. 신문과 전파는 오늘도 내일도 미래도 편파 왜곡, 조작으로 여러분을 분열시킬 것이오. 20세기 문명은 배운 자, 가진 자들이 인민을 눈멀게 하여 이익을 챙기는 시대요. 그들이 더 악질이오. 그들부터 처단해야 하는데 그들 힘이 크니 다른 방도가 없소. 그들이 제 소명을 다했다면 세상이 이리 됐을까?... 나 역시 옳은 일을 한다고 하는데 그들에 의해 악마가 되었소.”

그는 계속 안타깝다는 표정이었다.

“언론이 제 역할을 했다면 세기의 비극은 막을 수 있었단 말인가요?”

장지성이 물었다.

“그렇소. 예로부터 한국엔 노론, 근자에는 친일파 세력이 주도했는데 그들의 이익을 대변한 게 언론이었소. 한마디로 썩었지. 지도자의 헌신성은 사라지고 누구보다 타락하면서 사익을 취 한자의 편에 섰소. 언론이 바른 길로 인도해야 하는데, 더많이 썩어버렸소. 일본 천황을 신처럼 떠받드는 신문이 일본에서보다 조선의 신문에서 나왔소.”

한번도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는 청년들은 놀라고 있었다.

“민중이 살아있어야 하는데, 그들은 무지하고 힘이 없소. 여러분의 역할이 중요해요. 여러분부터 힘을 기르시오. 뭔가 만들어 조직적으로 움직여야 해요. 백성을 깨우쳐야 해요.”
“결사체를 만들라는 뜻입니까?”
“지도자는 궁극적으로 선을 지키기 위해서 힘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오. 일본제국주의가 폭력으로 세상을 흐려놓을 때, 언론이 제 역할을 했다면 이런 엉터리 광기는 없었을 것이요. 아무리 악한 지도자라도 누군가 견제했다면 못된 짓은 크게 저지르진 못했을 거요. 그 역할을 언론이 해야 하는데 그들이 함께 썩고 기득권에 편집되었으니 광인에게 칼을 쥐어준 격이 되었소.”

생도들은 침통한 표정으로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따지고 보면, 일제시대 독립운동을 한 조선 사람은 그리 많지 않소. 미나미 총독이 독립운동가의 뿌리를 뽑아버린 탓일까? 외관상 그런 것 같지만, 그게 아니오. 일본인 경찰보다 더 잔혹한 조선인 경찰들 때문이오. 미행하고 감시하고 잡아가두고 고문하고 죽이고.... 이런 마당에 독립운동가들이 배겨낼 수 있겠소? 그 정도로라도 명맥을 유지했던 것은 목숨 걸고 나선 그들의 헌신성 때문이었소. 밥먹는 것조차 해결하지 못할 지경이었으니 활동이 한정적일 수밖에 없었지. 나는 경찰 토벌대에 사살된 조선의 독립투사 위장에서 나무뿌리만 나왔다는 말을 듣고 한없는 슬픔에 젖은 적이 있소. 그를 조선인 경찰이 사살했소. 해방이 되었다고 해도 그런 경찰이 나라의 주역이 되고 있으니 권태와 허무감은 말할 수가 없소. 그들의 수법 모르오? 억지와 포악성... 거기에 독립운동 세력보다 친일세력의 숫자가 압도적으로 많다는 사실도 권태에 빠지게 하고 있소. 그들은 권력ᐧ자본·정보·휴민트·지배의 노하우를 갖고 있소. 새로운 식민지를 확보한 미국은 일본의 자문을 받아 그들을 이용할 것이오. 조선의 사정은 알 바도 아니고, 알려고도 하지 않고, 오직 총독부가 제공한 통치 노하우로 조선반도 통치기반으로 삼을 것이오. 그중 경찰이 중심이 되겠지. 경찰국가를 유지하는 데는 그만한 충성 도구가 없으니까.”
“그것은 말도 안됩니다. 경찰조직을 신생조국의 치안책임자로 앉힌다면 가만있지 않겠습니다.”

오민균이었다.

“그러나 독립운동 세력은 친일 세력을 이기지 못해요. 숫자에서나 화력 면에서나. 거기에 미 점령군이 있지. 그들에게 시대정신과 영혼의 유무는 의미가 없소. 이익을 위한 충성만이 자원일 뿐이오.”
“그런 놈들은 부숴야지요.”

오민균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몽양 선생에게 그 뜻을 전하겠소. 귀국하면 찾으시오. 거친 세상에 유연한 그가 화를 입지 않을까 걱정이오. 여러분은 몽양 선생이 건국준비위원회를 결성한 것 알고 있지요?”
“형님으로부터 소식은 듣고 있습니다.”

이정길이 응답했다.

“미군정은 건국준비위원회도 임시정부도 인정하지 않을 것이오. 조선총독부로부터 그런 교시를 받았다고 하오. 그리고 송진우의 한민당은 미군정에 의한 잠정적인 훈정기가 필요하다고 보고, 미군정을 도와서 장차 정부수립 때 필요한 절차를 밟자고 하는 모양인데, 민족세력이 거부할 거요.”
“왜 그렇습니까.”
“미군정은 그런 민족주의자들이 귀찮아요. 미군정에 충성하겠다는 세력도 배제할 거요. 결국 조선총독부가 자문하는 프로그램대로 국정을 운영할 거요. 그러면 제2의 일제가 시작되는 거요.”
“그럼 민족세력은 배제된다는 것입니까”
“나쁘게 말하면 이용되고 말 것이오. 말 잘듣는 충성자들이 필요하고, 그런 세력이 차고도 넘치니까.”
“그럼 몽양 선생도 고하 선생도, 이승만 박사도 김구 선생도 버림을 받는단 말씀입니까.”
“그럴 수 있지. 그런데 불행히도 그들은 그렇게 이용당한다는 것을 몰라요. 고루한 자기확신편향에만 차있소. 그건 오만이지. 그들의 어깨가 얼마나 무거운데. 그런데도 사고는 조선조의 훈구파의 것이고, 노론파의 것이오. 세계관이 옹졸하오.”
“그것은 모욕입니다.”

조병헌이 즉각 반발했다. 지금까지 그를 존경해왔지만 조국의 지도자들을 이렇게까지 폄하한다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아하, 그렇게 화를 내니 내가 반갑소. 당연히 화를 내야지요. 왜 화를 내지 않았나 했지. 살아있는 젊은이들을 만나니 기쁘오.”

일하는 아주머니가 술상을 차려왔다.

“여러분의 충정과 조국을 바라보는 태도를 보니 내가 즐겁소. 높은 이상과 냉철한 현실인식, 넓은 세계관을 갖기를 바랍니다. 나도 곧 제주도로 떠날 거요. 아내를 만나야 하거든.”

술이 몇순배 돌자 갑자기 조병헌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리의 독립군들이 불렀던 노래를 선생님께 헌정합니다. 용진가입니다.”

그리고 힘차게 부르자 생도들이 따라불렀다.

요동만주 넓은 뜰을 쳐서 파하고
여진국을 토멸하고 개국하옵신
동명왕과 이지란의 용진법대로
우리들도 그와 같이 원수쳐보세
나가세 전쟁장으로 나가세 전쟁장으로
검수도산 무릅쓰고 나아갈 적에
독립군아 용감력을 더욱 분발해
삼천만번 죽더라도 나아갑시다!
나가세 전쟁장으로 나가세 전쟁장으로

청년 사관생도들의 가슴이 파동을 치는 것 같았다. 이정길의 눈에 물기가 어렸다.

사관생도들은 며칠째 아사코 집으로 향했다. 청년들이 달려들자 대번에 집의 꼴이 잡혔다. 허물어진 지붕과 망가진 벽체, 굴뚝을 바로 세우고, 다다미방, 화장실을 고쳤다. 마을사람들이 아사코 집으로 모여들었다. 그중에는 후리소데 기모노를 차려입고 찾아온 여인도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한결같이 절망에 젖어있는데, 조선인 청년들이 찾아와 삽과 망치를 드니 제 정신이 드는 것이었다.

“아사코 짱 집이 새 집이 된 게 무엇보다 기뻐요. 두 모녀가 힘들었는데....”

여자들이 말끔하게 정돈된 방안을 휘 둘러보았다. 미나미 여사도 환한 얼굴로 벽에 몸을 기대고 비스듬히 앉았다.

“정성이 모이면 어떤 무엇도 이루는군요. 나도 몸이 나아졌답니다.”

그 고마움을 모찌, 무시모노, 히가시를 쟁반에 담아 표시했다. 기모노 차림의 아주머니가 투명한 젤리 같은 것으로 여러 가지 색깔의 꽃을 그려넣은 와가시를 한 손으로 받쳐들고 오민균에게 공손히 내밀었다.

“드셔보세요. 행운이 따른답니다. 돌아갈 건가요?”
“네. 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릴 적으로 돌리겠지요? 우리가 저지른 죄업이 너무나 많으니까요. 그러면 아사코 짱이 어떻게 되나요?”
“무슨 걱정을... 구원(舊怨)을 딛고 양국이 가까워질 텐데요,”
“그렇게 될까요. 조선인들이 묵과할까요. 저지른 죄가 너무 많은데...”
“오민균 짱이 병원 의사들이 못한 일을 했답니다. 고름이 흐르는 상처 부위를 입으로 빨아내서 소독하고 낫게 해주었답니다.”

미나미 여사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세상에나, 어떻게 그런 고마운 일을...”

여인들이 한결같이 놀랐다.

“어머니가 그렇게 제 상처를 낫게 해주셨습니다.”
“그래. 훌륭한 어머니시군요. 형제들은 어떻게 되나요?”
“제 어머니는 9남매를 낳으셨습니다. 아버지의 전처이신 큰 누나까지 합하면 열 명의 자식을 건사하셨습니다.”
“전처의 딸자식까지?”
“네. 아버님의 전처는 큰 누나를 낳고 산후통으로 일주일만에 돌아가셨습니다. 그래서 부랴부랴 새 장가를 들어 어린 신부에게 신생아를 맡긴 것이지요. 이웃마을에 열여덟 살 먹은 가난한 집 처녀를 데려왔는데, 그분이 제 어머니이십니다. 어린 처녀가 시집와서 전처의 딸을 키우고, 또 아홉명의 자식을 낳아 기르신 거죠. 그래서 도시로 나가 중학을 다니다가 방학이 되어 집에 가면 언제나 어머니는 배가 불러있었지요. 어머니가 배가 불러있는 것만 기억에 남아있습니다.”
“아버지는요?”
“제 아버님은 한학을 하신 완고하신 분입니다. 어머니가 고생을 하셨지요.”
“그래서 이렇게 번듯한 청년을 두셨군요. 절도있고 예의바르고... 고국에 돌아가면 무슨 일을 하실 건가요?”
“군인이 되겠습니다. 나라를 잃은 게 군대를 제대로 기르지 못한 데서 온 비극입니다.”

그러자 모두들 서먹서먹해졌다. 미나미 여사가 말했다.

“제 개인적으로라도 사과하고 싶군요.”
“그럼 사과해야죠. 아사코를 위해서라도.”

다른 여인이 받았다.

“아사코 짱이랑 태화 짱이 안보이네요?”

두 사람은 벌써 황혼넠의 언덕을 오르고 있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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