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슈퍼 매파'로 불려온 존 볼턴 백악관 안보보좌관을 전격적으로 경질하면서 북미 회담에 미칠 영향에 초미의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전부 아니면 전무(All or nothing)'를 고수해온 그의 퇴장은 미국의 대북정책이 보다 현실적으로 변화할 가능성을 잉태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트럼프가 밝힌 볼턴의 해임 사유가 주목을 끌고 있다. 그는 9월 11일 볼턴 경질 배경을 두고 "볼턴이 김정은을 향해 리비아 모델을 언급했을 때 일종의 매우 큰 잘못을 한 것"이라며 "그것은 좋은 언급이 아니었다"라고 평가했다. 리비아 모델 언급은 "우리가 차질을 빚게 했다"며, 이는 "터프함의 문제가 아니라 현명하지 못함의 문제"라고 지적했다.
리비아 모델에 담긴 '노딜 문서'
볼턴이 김정은 국무위원장에게 직접 리비아 모델을 언급했는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고 있다. 다만 그는 작년 사상 최초의 북미정상회담을 앞두고 리비아 모델을 여러 차례 언급했고 이에 대해 북한이 격렬하게 비난하면서 정상회담 자체가 무산될 뻔한 적은 있다.
더 주목해야 할 점은 올해 2월 하노이 정상회담에서 트럼프가 김정은에게 건넨 '비핵화 정의 문서'이다. 이 문서에는 리비아 모델이 고스란히 담겼고, 이를 주도한 인물이 바로 볼턴이었다는 것이다.
상당수 언론과 전문가들은 이 문서를 두고 '빅딜 문서'라고 불렀지만, 실제로는 '노딜 문서'였다. 북한이 도저히 수용할 수 없는 내용들이 담겨 있었고, 이 문서를 들이밀면 김정은이 거부할 것이라는 점은 볼턴을 포함한 트럼프 행정부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트럼프가 볼턴을 해임하면서 리비아 모델에 대해 강도 높은 비판을 가한 것은 희망적인 징후이다. 다만 이것이 획기적인 돌파구 마련으로 이어지려면 미국의 대북정책 내용도 실질적으로 바뀌어야 한다. 리비아 모델과 비교할 때, 네 가지가 중요하다.
북미 협상 성패를 좌우할 '네 가지'
첫째, 폐기 대상의 설정이다. 언론에선 대개 리비아 모델을 두고 '선 핵포기, 후 보상'으로 일컫고 있지만, 미국이 2003년에 리비아에게 요구한 것은 핵 개발 포기뿐만 아니라 화학무기와 생물무기, 그리고 탄도미사일을 모두 포기하라는 것이었다. 폐기 대상은 '대량파괴무기(WMD)+탄도미사일'이었고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그런데 하노이에서 미국이 북한에 요구한 것도 이와 동일한 것이었다. 이에 대해 북한은 비핵화를 한참 넘어선 사실상의 "무장해제" 요구라고 반발했음은 물론이다. 이에 따라 1차적인 관건은 미국이 과유불급을 접고 북핵 폐기로 선택과 집중을 할 것인가의 여부로 모아진다.
둘째, 상응조치의 순서이다. 미국은 리비아가 WMD 및 탄도미사일을 포기하면 금방이라도 외교적·경제적 상응조치를 취할 것처럼 말했지만, 실제로 테러지원국 해제와 관계정상화를 골자로 하는 미국의 약속 이행은 리비아의 포기 선언 이후 무려 30개월 만에 이뤄졌다.
그런데 하노이에서 미국이 북한에 제시한 상응조치도 이와 흡사했다. 북한이 먼저 핵을 포기해야 핵심적인 상응조치인 경제제재 해결이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북한이 말한 "미국의 낡은 계산법"의 핵심은 바로 이것이다. 따라서 관건은 미국이 '선 비핵화, 후 제재 해결'이라는 일방주의적 태도에서 벗어나 제재 문제 해결도 동시적·병렬적 조처에 포함시킬 것인가에 있다.
셋째, 북핵 폐기 방식이다. 미국은 리비아에게 핵 개발 관련 부품과 시설, 그리고 물질을 미국에 넘기라고 요구했고 이러한 요구는 관철되었다. 그리고 트럼프 행정부는 이 방식을 북한에도 적용하려고 했다. 핵물질과 핵무기를 미국으로 반출하라는 요구를 하노이에서도 꺼내든 것이다. 북한은 이를 두고 "강도적 요구", "비현실적인 방식"이라고 일컬으면서 거부 의사를 분명히 해왔다. 따라서 미국이 이러한 요구를 접을 것인지도 핵심적인 관전 포인트이다.
끝으로 안전 보장 문제이다. 리비아 모델에는 신뢰할 만한 안전 담보 약속이 없었고, 리비아 내전이 벌어지자 미국은 유럽의 나토 국가들과 함께 반군에 군사 지원을 제공했다. 그 결과 WMD 포기의 주역으로 칭송받았던 카다피는 반군에 생포되어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트럼프 본인도 이를 지적하면서 북한에는 확고한 안전보장을 제공하겠다고 밝혀왔다.
하지만 북한은 구두나 문서상의 안전보장 이상을 요구해왔다. 안전 담보는 법적 구속력을 갖춰야 하고, 전략 자산 한반도 배치·전개 및 한미연합군사훈련 중단과 같은 군사적 조치들로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볼턴은 비핵화는 남북한에게만 국한되어야 하고 전략 자산 전개 금지 등 미국의 군사적 활동에 제약을 가하는 내용은 비핵화에 포함되지 않아야 한다고 주장했었다. 이랬던 그의 퇴장이 안전보장 문제를 둘러싼 북미간의 이견을 좁힐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을지 주목되는 까닭이다.
이처럼 트럼프가 볼턴을 해고하면서 리비아 모델의 성토한 것은 희망의 근거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잠재적인 것이다. 이를 현실화하기 위해서는 미국의 태도 변화도 중요하지만 북한도 용단을 내려 긍정적인 화학작용을 일으켜야 한다.
우선 북한은 오판해서는 안 된다. 볼턴의 퇴장과 트럼프의 발언을 단계적 해법을 관철시킬 수 있는 기회로 여겨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오히려 북한은 마지막 단계로 상정해온 핵물질과 핵무기 처리 방안과 시기를 제시하면서 '북한식의 빅딜'을 시도해야 한다. 그래야만 트럼프의 용단도 이끌어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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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욱식
평화네트워크 대표 겸 한겨레평화연구소장
wooksik@gmail.com
정욱식 평화네트워크 대표는 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북한대학원대학교에서 군사·안보 전공으로 북한학 석사학위를 받았습니다. 1999년 대학 졸업과 함께 '평화군축을 통해 한반도 주민들의 인간다운 삶을 만들어보자'는 취지로 평화네트워크를 만들었습니다. 노무현 정부 대통령직인수위원회 통일·외교·안보 분과 자문위원을 역임했으며 저서로는 <말과 칼>, <MD본색>, <핵의 세계사> 등이 있습니다. 2021년 현재 한겨레 평화연구소 소장을 겸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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