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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일본의 야만, 그리고 일본의 양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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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2> 일본의 야만, 그리고 일본의 양심

[팩션] 실록소설 '행군-어느 민족주의자를 위한 변명' <2>

해방 후 왜곡된 역사 속에서, 지금까지의 한일 관계는 효용을 다했다. 그러나 예고된 갈등이었다. 일본은 구한말과 일제강점기 35년, 8.15 광복과 분단체제, 그 이후 70년의 강고한 구 체제 시스템 속에서 우리 내부 깊숙이 침투해 들어와 알게 모르게 생활의 일부가 되었다. 그 안에 우리 내부의 모순과 고뇌가 응축되어 있다. 이 모순과 고뇌를 탐구하려면 어떤 방법이 있을까.

한 개인사를 통해 시대와 사회를 비추는 거울 역할을 하는 것이 문학의 영역일 것이다. 그동안 우리는 외세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생존이 우선이었던 관계로 자기 자신을 앞세우지 못했다. 우리는 너무 쉽게 잊어버렸고 안일했다. 그러다보니 역사는 박물관에 소장된 문화재인 양 화석화되고, 현대의 역사는 더군다나 묻혔다.

기자 출신 이계홍 작가의 실록소설 '행군-어느 민족주의자를 위한 변명'은 그런 배경에서 나왔다. 이 소설은 2016년 10월호부터 2019년 6월호까지 문예월간 '월간문학'에 연재되었던 소설이다. 월간문학 연재를 마친 뒤 많은 부분을 수정 보완해 프레시안에 재수록한다.

이 연재물은 이른바 '팩션(Faction)'이다. 팩트와 픽션의 사이 어디에서 역사적 사실에 상상력을 덧붙인 '논픽션' 형식의 소설이다. 필자는 취재의 일환으로 일제강점기 말 일본 육사 출신 젊은 생도들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어지러운 시대, 그 안에서 제국주의 광풍에 휘말린 젊은이들의 시각을 잡아내려 했다. 이계홍은 "일본의 극우 정권이 일제강점기의 역사적 사실들까지도 왜곡하는 역사 모독에 대해 하나의 담론시장을 형성하자는 데 목적이 있다"고 했다. '행군-어느 민족주의자를 위한 변명'은 총 33회로 나뉘어 연재될 예정이다.(편집자)


1944년 2월 일본 육군사관학교 입교식이 끝나고 몇 주 지나서였다. 제57기 생도 졸업식에 참석하고 저녁을 마치고 일석 점호도 끝나고 잠자리에 들 무렵, 조선인 출신 졸업생 두 명이 갓 입학한 제60기 장지성 생도를 찾아왔다. “이성유 조병헌을 불러내라.” 이성유 조병헌은 장지성과 함께 입학한 동기 생도들이었다. 제60기로 들어온 조선인 생도는 모두 6명이었다. 이중 장지성 이성유 조병헌은 구대는 달랐지만 같은 중대 소속이었다. 그를 불러낸 졸업생은 경성 제일고보(경기고보) 출신 김영수와 김호량이었다.

“연병장 건너편 관목 숲으로 와라. 외길 숲속 구렁창이다.”

낮게 말한 두 사람은 곧바로 사라졌다. 운동복 차림으로 옷을 바꿔입은 장지성은 이성유와 조병헌을 찾아갔다.

“운동 나가자.”

눈치를 알지 못한 두 사람은 일석 점호도 끝났는데 무슨 운동? 하며 잠시 쭈볏거렸지만 함께 뛸 시간이 주어진 것과 사사로운 얘기도 나눌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장지성을 뒤따랐다. 운동이라면 무엇이든 좋아서 그들은 상쾌한 기분으로 연병장을 뛰었다. 관목 숲에 이르니 그쪽에서 먼저 알아차리고 손을 흔들며 방향을 알려주었다. 가까이 다가가자 동기생 두 명이 벌써 와있었다. 모두 빙 둘러서자 김영수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졸업생 중 박정희랑은 본래의 주둔지인 만주로 어제 떠났다. 그들은 일정 때문에 참석하지 못했지만 똑같은 마음을 갖고 있다고 너희들에게 전해달라고 하고 떠났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말을 해주었다.

“우리는 내일 새벽 남양군도 전선에 배속된다. 레이테도 쪽이 될 것이다. 너희를 만나 우리 뜻을 전달하는 것은 우리만의 전통이다. 그러니 말을 잘 새겨들어라. 이것은 육사 선배로서 하는 말이 아니라 피를 나눈 형제가 하는 말로 새겨라. 일본은 반드시 패망한다. 지금 그 길로 가고 있다. 조국을 찾을 때를 대비하라. 철두철미 군사학을 익히고 지식을 쌓아라. 그리고 꼭 살아남아라. 살아남는 자만이 승자가 된다. 우리의 영도자를 위해 죽을 때가 올 것이다. 조국을 되찾을 때 그때 죽어도 여한이 없다. 조국을 위해 태울 한 몸이니 건강 잘 지켜라.”

머리가 쭈볏 서는 발언이었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고보 시절에 이르기까지 줄곧 천황폐하 만세를 부르며 목숨을 던지자는 세뇌교육을 받아온 그들이 빼앗긴 조국을 되찾아 목숨 바칠 날이 오다니, 정말 꿈 같은 이야기였고, 무서운 이야기였다. 일본 군국주의의 심장이라는 육사 교정에서 이런 말이 나온다는 것은 정말이지 상상할 수 없었다. 고국에서도 그런 말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신문과 방송에서는 연일 태평양에서, 남양군도에서, 만주벌판에서 전승 메시지가 군가의 후렴처럼 쏟아져 나오는데 패망하게 되다니, 믿어지지 않았다. 더군다나 일본 패망 얘기가 나오는 자체가 불경이고 이적으로 몰리는 시대였다. 육사의 학풍이 자유롭다고는 해도 이렇게 노골적으로 패망 얘기를 할 정도로 기강이 해이된 것은 아니다. 그래서 그런 말을 듣는 자체가 살 떨리는 일이었다.

“절대로 기밀을 지켜라. 누설되면 다 죽는다. 그리고 자존감을 지켜라. 화랑의 후예답게 신체단련하고 학과에 충실하라. 일본인 생도에게 절대로 져서는 안된다. 일당백이다. 나라를 되찾으면 우리 군대를 만들 것이다. 부패하고 무능한 왕조에 안녕을 고하고 총통제든 공화제든 대통령제든 입헌군주제든 우리 국체를 정해 우리나라, 우리 국토를 지킬 것이다.”

이 말을 듣자 모두들 머리가 쫑긋 서는 비장감을 느꼈다. 피로 맺은 동지적 결속력과 신뢰가 없이는 불가능한 엄숙한 발언이었다(그러나 김영수는 1944년 6월 필리핀 레이테도 전투에서 전사했고, 김호량은 1950년 한국전쟁 때 전사했다). 오민균이 제61기생으로 입학한 뒤 1945년 2월 생도졸업식이 있었다. 두 조선인 생도가 졸업식을 마치고 부대 배속을 받아 떠나기 전날, 그들도 똑같이 선배들이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조선인 입학 생도들을 일석점호 후 관목숲으로 불러냈다. 그리고 역시 똑같은 말을 했다. 오히려 내용은 1년 전보다 더 구체적이고 노골적이었다. 오민균은 일본 패망의 기류를 감지하긴 했지만 막연히 느낄 뿐이었다. 여전히 군율과 군기는 엄격했고, 라디오방송은 연일 승전 소식이어서 거기에 알게 모르게 순치되어 있었다. 신입생으로서 학과에 충실해야 한다는 것 뿐, 다른 생각을 할 수 없었다. 높은 경쟁률을 뚫고 들어온 선택받은 사람들 아닌가.

“히틀러는 러시아와의 싸움에서 대패한데다 러시아진격사령부 총사령관마저 소련에 투향했다. 최후의 일전을 위해 연합국 군대는 노르망디에 집결중이라고 한다. 추축국 중 일본제국 군대만이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데 그것도 잔명이 다했다.”
“사실입니까.”

이렇게 묻자 졸업생도가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메모를 하나 줄 테니까 메모가 가르킨대로 찾아가도록 해라. 우린 내일 새벽 떠난다. 언제나 최후를 대비하라. 조국을 위해 이 한 몸 원없이 쓸 때가 올 것이다. 옥체를 잘 간수하라.”

그것도 부족했던지 다른 선배가 덧붙였다.

“발설되면 밀고자도 누구도 다 당하게 돼있다. 조선인은 결국 이용당하고 죽는다. 배신자가 나올 수도 없고 나와서도 안된다.”

기밀을 지키라는 선배가 준엄히 말하고, 호주머니에서 종이를 꺼내더니 어둠 속에서 연필로 뭔가를 적어서 오민균에게 내밀었다.

“이학년 생도인 장지성 이성유 선배가 인도할 것이다.”

말을 마치자 그들은 소리없이 밤안개가 가득한 숲 속으로 사라졌다. 잠자리에 들었어도 오민균은 한동안 잠을 이루지 못했다. 조국, 강토, 인민, 해방, 그리고 아버지 어머니, 동생들.... 선배들을 만난 얼마 후 영친왕 이은이 조선인 입학생들을 왕궁으로 초청했다. 입학축하 다과회였다. 왕궁에서 만난 이은은 일본 육군중장 복장을 하고 있었고, 부인 이방자 여사는 기모노 차림이었다. 이은은 일본 육사 29기(1915년) 출신이었으니 오민균보다 32기가 앞선 대선배였다. 그는 말수가 적은데다 우리 말이 서툴렀고 기력이 쇠해보였다. 힘이라고는 없는 사람으로 보였다. 요요기연병장에서 그를 처음 보았을 때와 비슷한 얼굴이었다. 그날 그의 모습에 오민균은 실망과 비애를 느꼈다. 우리의 왕이 저렇게 초라하게 낯선 손님처럼 연병장에 서있어야만 하는가.

요요기 연병장에서는 히로히토의 생일인 천장절을 맞아 엄청난 규모의 관병식이 열리고 있었다. 그 엄청난 규모의 신무기들과 하늘을 찌를 것같은 열병 함성, 지축을 울리는 탱크부대와 창공을 수놓은 기세 좋은 제로센 비행편대, 그 규모와 짜임새로 보면 어떤 나라도 밟고 넘을 수 없을 것 같았다. 누가 감히 덤빌 것인가, 문자 그대로 무적의 군대였다. 거기에 비해 무기력한 회색분자로 보이는 우리의 왕은 너무도 초라하고 처량했다. 그를 보더라도 조선의 독립은 상상이 안되었다. 왕비 이방자 여사가 센베이 과자와 오차 한잔씩 따라주는데 돌멩이도 소화시키는 청년들에게는 빈약하기 짝이 없는 대접이었다. 그만큼 청년들의 정서를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오민균은 고향의 따뜻한 숭늉과 누릉지가 차라리 낫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돌아오는 길에 한결같이 투덜대었다.

“왕이 일본인이야, 조선인이야?”
“글쌔, 중간자도 아니고...”
“우리를 초청해주신 것만도 고맙다고 생각하자.”
“센베이 과자가 그렇게 중요한가. 보리밥 한그릇보다 못해. 왕은 완전 일본인이야. 하긴 아기 때 일본으로 끌려왔으니 보고 배운 것이 어쩌겠나.”

생도들은 저마다 실망하고 돌아왔다. 일요일 봄날의 아침. 오민균은 장지성과 함께 외출증을 끊어 도쿄로 나가 해안선이 길게 펼쳐진 만을 걸었다. 장지성은 입학하면서부터 두각을 나타낸 오민균을 눈여겨보았고, 둘은 곧바로 친해졌다. 일년 선후배 사이였지만 동지 같았다. 가는 도중 이정길 조병헌과 합류했다. 교정에서는 각자 따로 행동을 했다가 시내에서 조우하는 길을 택했다. 교내에서부터 단체로 움직이면 오해를 살 수 있는 것이다. 그들은 메모지가 가리킨대로 만의 뒷골목을 따라 움직였다.

“눈이 부시군.”

이시하라 상이 반갑게 그들을 맞았다. 사십대 초반쯤 돼보이는 그는 머리칼이 하얗게 새어있어서 생각보다 나이 들어 보였다.

“시내에서 합류해서 왔습니다.”

오민균이 메모쪽지를 펼쳐보이면서 말했다.

“잘 왔소. 이정길 군은 누구인가요.”

그는 일행을 하나씩 훑듯이 살펴본 뒤 물었다.

“접니다.”

이정길이 앞으로 얼굴을 내밀며 부동자세를 취했다.

“그렇군. 형이 이정남씨랬지요?”
“그렇습니다.”
“지금 서울에 계시지요?”
“네. 회사에 다니고 있습니다.”
“내가 형의 주오(중앙)대학 선배요. 활동을 같이했소. 지금 몽양(여운형) 선생 밑에서 일하고 있다지요?” “잘 모르겠습니다.”

생도들은 그가 이정길의 형과 가까운 사이라고 하자 더 가깝게 느꼈다. 그러나 청년들 모두 몽양에 대해선 잘 알지 못했다. 그만큼 그들은 학과공부에만 충실한 청년들이었다.

“내가 보기로는 몽양 선생의 방향이 옳은 것 같은데....”

생도들이 별다른 반응이 없자 말을 바꾸었다.

“나를 따라오시오.”

그는 생도들을 안방 안에 있는 또다른 미닫이문을 열고 깊숙이 자리잡은 서재로 안내했다. 서가에는 수천 권의 책이 사방 벽을 둘러싸고 있었고, 한쪽 면 서가엔 체호프, 고리끼, 톨스토이, 도스또옙스키 등 러시아작가 전집이 꽂혀 있었다.

“나는 일본 군국주의가 망해야 세계평화가 온다는 것을 믿는 사람이오.”

뜻밖의 발언이었다. 그는 방안의 다기를 풀어 차를 끓여 내놓은 뒤 말을 이어갔다.

“이정남 동지 동생이 찾아올 거라는 연락을 받았소. 이 동지는 몽양 밑에서 선전부 일을 보고 있다는데 여러분은 잘 모르고 있군. 그는 깨어있는 사람이는 사람이라서 존경하오.”

벽에 걸려있는 머리를 박박 깎은 죄수복 차림의 액자 사진 속 청년의 눈매가 날카롭고 강인해보였다. 그의 젊었을 적 사진이었다.

“어느 민족이든 자국의 체제와 문화로 평화롭게 살 권리가 있소. 여러분은 일본패망 뒤를 대비하시오. 일본이란 나라의 광기의 결말이 어떠하리라는 것은 인류문명사가 말해주고 있소. 로마제국, 오스만제국의 전쟁, 십자군전쟁이 다 그렇소. 오만의 결과가 어떻게 되리라는 것은 결과로써 말해줄 것이오. 여러분은 무지개보다 찬란한 조선의 청춘들이오. 조국해방의 내일을 짊어지고 나갈 주인공들이란 점 명심하시오.”

일본의 패망, 조국해방, 그리고 빛나는 무지개 계절을 사는 청춘. 말만 들어도 가슴이 뜨겁게 덥혀져왔다. 생도들은 그의 짙은 눈썹과 형형하게 빛나는 안광에 압도되었다.

“일본 패망을 말씀하시는데 왜 그렇습니까.” 이정길이 물었다. 그로서는 일본 패망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탐욕의 질주는 끝내 패망을 가져오게 되어있소. 그중 진주만 습격이 패망을 자초했소.”
“패망하기 위해 진주만을 습격했다구요?”

젊은 생도들은 일본이 왜 진주만을 습격하고, 왜 미국과 싸워야 했는지를 알지 못했다. 어느 누구도 명쾌하게 가르쳐준 사람이 없었다. 대일본제국이 하는 일은 모두 옳았고, 대국을 밟았다는 데 자부심을 주었고, 그렇게 하여 열도가 열광했던 것이다.

“일본은 조선 병탄, 러일전쟁, 청일전쟁, 만주사변, 난징사변, 진주만 습격 모두 승리했소. 패배를 모르는 불패제국이라는 명망을 얻게 되었지. 그러나 그것은 자멸을 자초하는 출발점이었소.”

1930년 전후 일본의 기술 산업은 세계 정상급이었다. 서구의 전투기보다 성능이 뛰어난 전투기를 생산하고 있었고, 전함과 항공모함을 건조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었다. 보병은 배부르게 먹고, 절도있는 전쟁 실습으로 가는 곳마다 불패의 위력을 과시했다. 해군은 태평양 해역과 러시아·중국 해상권을 장악했다. 그런 능력은 두 말할 것없이 엄청난 자본의 힘 덕분이었다. 그 자본은 식민지에서 조달했다. 조선과 대만 만주 등 식민지의 생산물을 수탈해 고스란히 군수산업에 투입했다. 자국도 마찬가지였지만, 놋그릇 숟가락은 물론 깨 파마자 잔디씨 송진까지 식민지 산하에서 훑어갔다. 젊은 군인들의 성욕을 채워 사기를 세워주기 위해 식민지 처녀들을 잡아다가 각 부대에 배분했다. 아닌게 아니라 병사들은 욕구를 충족하며 사기가 충천했다. 그러나 인류사를 통해서 볼 때 가장 치욕스럽고 더러운 전쟁이었다. 씻을 수 없는 인류의 모독이었다. 군사의 치오르는 사기에 힘입어 일본군은 중국의 동북 3성과 몽골까지 침공해 만주국을 세우고 중국 본토를 잠식했다. 그들은 6개월 정도면 중국 전역을 장악할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주요 도시는 점령했지만 끝없이 펼쳐진 넓은 면적의 농촌과 산간지역은 점령하기가 쉽지 않았다. 마오쩌뚱이 이끄는 홍군의 지구전과 미국의 지원을 받은 장제스의 국부군과 토착 유격대가 도처에서 출몰해 장기전으로 변모했고, 그것은 끊임없이 소탕작전을 펴도 솜이불에 박힌 이처럼 중국 군대와 게릴라들은 제거되지 않았다. 내부로 들어갈수록 험한 지형과 깊은 종심으로 일본군은 수렁에 빠져들어 되돌아 나오기도 힘들었다. 일본군대는 전선 경계가 불분명한 게릴라전에 익숙하지 못했으며, 공세 지속력이 한계에 부딪쳐서 지구전을 감당하는 데 몹시 힘에 부쳤다. 광활한 영토에서 지구전의 성패는 안정적인 군수물자 보급에 있고, 그 핵심은 식량과 석유자원인데, 그중 석유 조달이 쉽지 않았다. 본토는 물론 그들이 장악한 식민지에서는 석유 한방울 나오지 않았다. 대안을 찾다 보니 동남아 유전 지역을 점령해 조달하는 방법 밖에 없었다.

그러나 인도네시아 말레이반도 인도차이나 반도는 서구 열강이 먼저 들어가 깃발을 꽂은 곳이었다. 다행히도 그 무렵 프랑스와 네덜란드는 독일에 패배해 식민지 관리에 헉헉거렸다. 일본에게는 기회였다. 그런데 말라카 해협이 문제였다. 맥아더가 지휘하는 미국 태평양사령부가 필리핀에 주둔하고 있으니 말라카 해협을 통과하는 데 목에 가시가 걸린 것같은 기분이었다. 동남아시아 지역의 미곡과 석유자원이 절대적으로 필요한데 미 태평양사령부가 말라카 해협을 장악하고 있으니 자유로운 내왕이 쉽지 않은 것이다. 미국은 그들대로 일본의 침략 야욕이 끝 모르게 이어지자 일본의 팽창 정책을 억제해야 할 과제에 직면해 있었다. 뒤늦게 유럽전쟁에 개입해 유럽 전선에 깊숙이 발을 들여놓고, 다른 한 발은 태평양에 걸치고 있어서 전선이 이분화되어 있었다. 유럽 서부전선을 공략하기 위해 태평양을 사이에 둔 일본과는 충돌 없이 지내려는 것이 미국의 입장이었다. 미국 내에는 이민의 나라답게 많은 일본인이 미국에 들어와 큰 상권을 형성하고 있었다. 주요 정치ᐧ행정조직에도 참여해 우호 관계가 깊었다. 그러나 일본의 야욕이 드러나자 위협을 느끼기 시작했다. 외교적으로 가까운 중국 본토를 침공하자 묵과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끝없는 탐욕을 방치할 수 없다고 생각한 미국은 어느날 일본에 석유 금수조치를 단행했다. 석유가 있어야 탱크와 수송차량을 굴리고 함대와 전투기를 띄우는데, 석유 공급이 차질이 생기자 일본은 독자적으로 에너지 공급선을 찾아나섰다. 일본이 점령한 조선과 중국 동북 3성, 내몽고는 넓은 영토와 인구, 여타 지하자원이 풍부하게 매장되어 있었으나 결정적으로 석유가 한방울도 나오지 않았다. 중국 대륙의 종심까지 깊숙이 들어간 일본군은 석유 보급이 없으면 전쟁을 치르나 마나였다. 일본군은 군사비밀문건을 통해 ‘중국을 점령하려거든 만주를 정복하고, 세계를 정복하려거든 중국 대륙을 정복해야 한다’고 군사들을 고무했다. 그 결과 만주에 이어 중국 대륙을 거의 집어삼키는 막바지에 있는데, 미국이 석유 금수조치를 단행해버린 것이다. 일본군의 군사작전은 차질을 빚고, 종심으로의 진격은 더딜 수밖에 없었다. 가설을 붙인다면, 만약에 만주에 석유가 풍부하게 매장되었더라면 미국과의 태평양전쟁에서 일본이 쉽게 무너졌을까. 또 만약에 태평양전쟁이 일어나지 않고 미국과 공존이 유지되었다면 한반도는 물론 만주, 중국본토까지도 운명이 달라지지 않았을까.

일본군 수뇌부는 중·일전쟁의 장기전에 대비하기 위해 미 태평양사령부의 본부인 진주만을 치기로 결정했다. 그것은 말라카 해협을 뚫는 길이고, 동남아시아 지역에 매장된 석유자원을 확보하는 첩경이었다. 그래서 결단코 말라카 해협을 확보해야 했다. 이에따라 이 해역을 맡고 있는 태평양사령부 심장을 치기 위해 야마모토 이소로쿠 일본 해군연합함대사령부가 진주만 기습작전을 감행했다. 예상치 못한 기습에 미국은 한동안 혼비백산했다. 필리핀까지 올라온 맥아더 태평양사령관은 호주로 도망쳤다. 말라카 해협을 뚫은 일본은 여세를 몰아 미얀마 라오스 중국 남부 내륙을 접수하고, 보르네오 스마투라 말레이시아 싱가포르에 상륙했다. 미국의 식민지 필리핀도 접수했다. 이제 전쟁은 일본군 승리로 끝나는 듯했다.

“여러분이 열광했던 진주만 습격은 벌써 3년 전의 일이 되었군. 1941년 12월 8일 일본은 선전포고 없이 진주만과 필리핀·말레이 반도를 동시에 공격했던 것이지. 일본 군국주의가 진주만을 공격한 목적은 미 태평양함대를 무력화시킴으로써 중부태평양과 동남아시아 전역을 장악하고, 이 일대에서 풍부한 에너지 자원을 확보하자는 것이었지. 그 지역은 3모작이 가능한 쌀생산지와 석유가 풍부하게 매장되어 있었으니까 이기면 일거삼득인 셈이지.”

450대의 항공기를 실은 6척의 일본군 항공모함이 하룻만에 미 태평양함대를 격침시킴으로써 세계를 경악시켰다.

“진주만에 주둔해 있던 미해군의 전함 7척 가운데 5척이 격침되고, 200여 대의 항공기가 파괴되었으니까 한마디로 일방적 승리 전과지. 맥아더가 주둔했던 필리핀에서도 공습을 받고 절반 가량의 항공기 손실을 입었소. 싱가포르에서 영국 공군력이 초토화되고, 괌, 레이크도, 홍콩 등지에서 연합군 기지들이 차례로 파괴되었소. 가는 곳마다 야마모토 해군은 연전연승이었소.”

일본군은 침공 6개월만에 태평양 제해권을 장악했으며 상륙전에서도 25만 명의 연합군 포로를 획득하고, 인구 2억이 넘는 인구의 점령지를 확보했다 그러나 이시하라 상은 야마모토 이소로쿠 사령관의 전과를 인정하지 않았다.

“나는 그를 군인으로 평가하지 않소.”

야마모토 이소로쿠 제독이라고 하면 일본 국민에게 천황 다음으로 우러르는 존재가 아닌가. 그래서 원수 계급이 추증되고, 신화가 된 인물이다. 하지만 이시하라 상은 그를 평가하지 않는다. 전쟁영웅을 단칼에 잘라버린다는 것은 육사 생도들로서는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생도들은 어느 일면 모욕을 당한 기분이었다.

“저희는 야마모토 장군의 위대한 전술과 군인정신을 배웠습니다.”
“그래요? 자, 한번 봅시다. 야마모토 제독은 세계전쟁사에 기록될 전과를 올린 것은 분명하오. 하지만 그는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의 관망자 입장에서 당사자로 돌아서게 한 수훈갑이 되었소. 그게 전쟁 영웅인가? 세상을 보는 소양이 그렇게도 부족하단 말인가?”

야마모토는 미국 유학파였고 주미 일본대사관 무관으로 근무한 경력을 갖고 있었다. 주미대사관 시절 미국의 산업생산력과 과학기술력을 직접 지켜보았다. 미국의 산업생산량을 정확하게 파악하여 어떤 나라도 미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다고 내다본 사람이었다.

“야마모토는 초기에는 미국과의 전쟁을 주장하는 도조 히데키 육군 강경파에 맞서 전쟁을 반대했소. 고노에 수상이 승리 가능성을 묻자 만약 이기더라도 유지할 수 있는 시간은 1년이라고 했소. 이 발언 때문에 강경파로부터 암살 위협을 받기도 했소. 그런데 신념을 꺾었소. 그들에게 굴복하고 변신했소. 그의 예측대로 결과가 빤한데 왜 끝까지 전쟁 반대를 관철시키지 못했나? 그런 반대가 무슨 의미가 있소? 이중적이지 않은가? 조선의 이순신 장군은 자기정신을 끝내 관철시켰고, 죽어서 나라를 건졌지만, 야마모토는 전사하고 패배했소. 소신도 버리고 목숨까지 잃었소. 비전이 없는 기능적 전쟁기술자와 세상의 철리를 아는 장군과의 차이요. 과연 그가 영웅으로 칭송받을 자격이 있소?”

생도들은 그의 풍부한 군사정보, 상황을 분석하는 날카로운 논지에 차츰 빠져들어가고 있었다. 선배들이 가르쳐준대로 그는 폭넓은 시국관을 갖고 있었다. 천황폐하 만세만을 외치는 그들에게 경이로움 그 자체였다.

“야마모토는 중부 태평양에서 미군을 몰아내고, 호주와 미국의 병참선을 끊기 위해 과달카날 비행장을 건설하기 시작했는데 이때 징용으로 끌려간 조선인 노동자가 만 명이었소. 강제노역에 동원되었다가 이름도 없이 사라져간 사람들이 기백 명이오. 노임 한 푼 받지 못하고 목숨까지 잃었으니 원혼인들 왜 할 말이 없겠소? 이런 야만이 어디 있소? 한 맺힌 귀곡성은 하늘에 닿고, 그래서 가해자는 당연히 대가를 치러야지. 그들의 원성이 제로센 전투기 날개에, 엔진에 침투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지. 그래서 야마모토부터 잡아간 거요.”

1943년 4월 18일 야마모토는 일본군 전선과 비상 활주로 건설 상황을 시찰하기 위해 과달카날 섬 시찰에 나섰다. 이때 미군사령부는 일본군 사령탑의 동태를 파악하는 암호를 해독해놓고 있었다. 미군은 야마모토가 라바울 상공을 시찰한다는 암호문을 해독하고, 호위기 편대와 공격기 편대를 편성했다. 호위조가 일본군 호위기들과 공중전을 벌이는 사이 공격조가 야마모토의 전용기에 집중적으로 기총소사를 퍼붓기로 하고 출격해,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야마모토 전용기는 시퍼런 태평양 깊은 바다에 수장되었다.

“2억의 식민지를 새롭게 장악하고 태평양 제해권을 확보했으니 오만이 극에 달했지요. 그들의 남은 문제는 광활한 점령지역을 어떻게 계속 유지할 수 있는가의 문제였소. 일으키는 것보다 끝내기가 어려운 것이 전쟁의 속성인데, 그들이 그럴 능력이 있는가. 열강들이 암암리에 휴전에 동의해 달라고 요청해왔는데도 오만이 극에 달해 계속 내달리다가 폭망하게 되었지. 공격의 관성은 그렇게 이성을 마비시키는 것이오. 암호문자 하나로 패망의 길로 들어서는데 말이오. 우리는 불패제국의 허상을 보고 있소.”
“미군이 어떻게 암호문을 해독했습니까.”

오민균이 물었다.

“미국은 영국이 개발한 레이더 기술과 암호해독 기술을 지원받은 거요. 독일군 정보탐지를 위해 개발한 것을 미국에 기술 이전을 해준 것이오. 레이더와 애니악컴퓨터를 이용한 암호해독 기술이었소. 일본 해군은 신식 항공모함 5척을 이끌고 당당하게 미군함대를 향해 진격했는데 미군은 일본의 공격 날짜와 시간, 장소, 전함과 병력 규모를 모두 간파했소. 미군 항모는 진주만에서 다 깨지고 고물 2척밖에 없었지만 대신 레이더 장치로 수평선 너머로부터 진격해오는 일본 함대의 동향을 손금보듯 꿰뜷어 보면서 미드웨이섬에 도달하기 전에 전투기로 정밀 타격했소. 폭탄을 가득 싣고 오던 일본 함대가 미군기의 공격으로 폭발해 항모전단을 모두 잃었소. 이렇게 해서 태평양의 제해권은 다시 미국으로 넘어갔지. 호주로 퇴각한 맥아더가 다시 필리핀으로 돌아와 대대적인 일본 본토 진격계획을 세웠소.”
“선생님은 어떻게 그런 정보들을 알고 계시나요?”
“감옥에 있으나 사회에 있으나 나는 경계 없이 세상을 보는 눈을 가졌소. 인간의 영감은 놀랍소. 그 부분에 대해 더 이상 알려고 하지 마시오.”

이시하라 상 특유의 안광이 다시 빛났다.

“나는 일본이 난징대학살을 자행하면서 패망의 길로 가는구나, 단정했소. 무력으로 세상을 지배하는 나라가 온전히 버틴 역사가 있소? 독재자가 영원히 길을 열어간 역사가 있소? 침략으로 세운 문명은 결국 멸망했소. 호전성이 세상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오. 짧게는 몇개월에 머문 경우도 있소. 그 시기를 산 백성들만이 고스란히 희생을 강요받는데 그 원혼인들 가만있겠냐 말이오. 이건 미신이 아니오. 사람을 죽이면 미치게 되어있소. 이런 미친 전쟁에 선량한 백성들이 끌려가 이유도 없이 죽어갔소. 조선의 백성들이 끌려가 죽었소. 난징에선 아버지와 어머니를 멋모르고 따라간 어린아이들을 물건처럼 구덩이에 집어던지는 게임을 했소. 누가 멀리 던지나 내기를 하면서 웃었소. 누가 많이 찔러죽이나 내기를 했소. 이런 나라가 망하지 않는다면 신이 필요하겠소? 종교가 필요하겠소? 양심이 필요하겠소? 농사짓는 선량한 농부를 데려다가 죽도록 일을 시키고, 돈 한푼 주지 않고 죽이거나 쫓아버리니 이런 도둑놈의 새끼들이 온전하겠소?”

그는 어느새 선동가처럼 열을 뿜었다.

“제군들이 군인이 되려는 것은 전쟁광이 되려는 것이 아니지요? 그런데 이 나라엔 그런 미치광이들이 수도 없이 많고, 그런 전쟁광을 배출하려고 난리요. 나라를 위한다고 분식하고 미화해서 수천명, 수만명의 미치광이를 만들어내고 있소. 당신들도 어느 사이에 전쟁광의 도구가 되어 함께 미쳐갈지 모르겠소. 하지만 힘을 가지고 욕망을 배설하는 것이 아니라 평화를 산다는 것 명심하시오. 아무리 좋은 전쟁도 나쁜 평화보다 못하오. 아무리 비싼 평화도 싼 전쟁보다 염가요. 사람을 죽여야 평화가 온다는 것은 문명사가 가르친 배덕일 뿐이오. 나폴레옹이 이겼다고 한 세기를 갔나, 히틀러가 이겼다고 20년을 갔나? 당대의 무고한 백성들만 희생시켰을 뿐 남은 것은 처절한 자기파괴와 자기부정 뿐이오. 난징대학살의 인권유린 행위에 대한 국제적인 여론이 어떠한 것인지 알고 있지요?”

생도들은 난징 학살사건을 잘 알지 못했다.

“난징대학살을 보고 국제연맹은 물론 일본내 양심세력도 침묵하지 않았소.”

국제연맹은 일본제국이 원래 가지고 있던 조선반도와 대만의 영유권을 건드리지 않을 테니 더 이상 중국과 여타의 나라를 침공하지 말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일본은 이를 묵살했다. 오히려 더 잔혹하게 아시아 곳곳에서 침략 학살을 자행했다. 석유를 얻어서 대동아공영권, 즉 팍스 저페니스를 달성하려는 야욕이었다.

“지금 분명 광기의 시대요. 그래서 내가 살 길을 생각해낸 것이 아나키스트운동이오.”

그가 지향하는 바가 무엇인가를 생도들은 알았다. 하지만 열아홉 살의 모범청년들은 아나키스트가 무엇인지 잘 알지 못했다. 그것이 뭐길래 일본 군국주의를 증오하고 저주하는가. 오민균은 그가 조선인보다 더 반일감정이 강한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선생님께서 일본을 반대하신 점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더군다나 일본인이신데요.”

그러자 이시하라 상이 희미하게 웃더니 정색을 했다.

“나는 일본에 분노하는 것이 아니오. 군국주의 범법자들을 욕하는 것이오. 배웠다는 사람이 죽은 지식 팔아서 뭘하게? 하긴 먹고 살기야 쉽겠지. 하지만 고귀하게 얻은 지식을 그런 사사로운 것과 맞바꿔먹는 것이 얼마나 빈약한 영혼입니까. 자, 보세요. 1923년 9월 관동대진재(關東大震災) 때 조선인이 무차별적으로 학살당했소. 지진이 난 후 도쿄, 요코하마, 사이타마, 이바라기 등지에서 지진 여파로 각처에 불이 나고 건물이 타고 사람이 죽자 관청 놈들이 조선인이 저지른 만행으로 날조했소. 자기들 구호의 실책을 엉뚱한 방향으로 돌려서 증오심을 촉발시킨 거요. 일본 우익 군경과 자경단(自警團)이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넣어 일본인을 죽였다‘, '조센징이 방화와 약탈을 저지르고 있다’고 벽보를 붙이고 조선인 사냥에 나섰소. 일본 정부가 민심을 돌리려고 유언비어반, 공작반, 타격반을 조직해 이 짓을 한 것이오. 공권력이 그런 것이오. 헌데 그것을 누가 고발한 줄 아시오? 양심을 가진 일본 지성들이 했소. 이건 인간의 짓이 아니다, 사기 치지 말라, 선량한 사람을 부려먹고 불구덩이에 집어넣는 게 인간이 할 짓이냐, 그만두라고 고발했소. 조선인들이 우물에 독약을 풀었다니요? 조선인이 건물에 불을 질렀다니요? 조선인이 약탈을 했다니요? 그들은 숨죽이며 불쌍하게 살았을 뿐이오. 그런데 이런 식으로 증오를 심어서 재해의 분풀이로 삼았소.”

청년들은 비감해졌다. 관동대진재의 참상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조선인이 이토록 처참하게 타격의 대상이 됐다는 것이 현실 같지 않은 것이다. 그것을 일본인으로부터 들으니 더욱 씁쓸했다.

"군경과 자경단이 무기를 들고 돌아 다니는데, 조선인이다 싶으면 몽둥이로 패죽이고, 끈으로 결박해서 매달아놓고 장작불에 태워죽였소. 어떤 상점 주인이 조선인 하인이 불쌍해서 몰래 도망가도록 도와주는데 자경단이 뒤쫓아가서 쇠갈고리로 그의 등을 찍어서 눕히고 칼로 배를 도려내고 창자를 끄집에내 빨랫줄에 걸었소. '고국에 아내가 있고 나는 아무 짓도 안했습니다. 일본에서 일만 하고 있어요‘라고 서툰 일본어로 끊임없이 사죄하며 무릎 꿇고 빌던 조선인의 목을 베었다는 소녀의 목격담도 있습니다. 이런 비극을 누가 고발했습니까. 그럴 수밖에 없었겠지만 용기있는 조선인은 없었습니다. 스스로를 지키겠다는 자구대도 없었습니다. 이것을 고발한 사람들이 일본의 양심들이에요. 왜? 인류가 지향하는 가치에 위배되니까. 그들이 주로 사회주의자들, 아나키스트들, 노동맹원들입니다. 그런데 그들도 타격 대상이 되어서 체포, 구금되었소. 양심적인 일본의 문사들도 글로 썼지요. 당시 11살이던 시노하라 교코(篠原京子)가 소설로 상점의 조선인 하인이 살려달라고 서툰 일본어로 끊임없이 빌면서 사죄했지만 청년들에게 칼로 난도질 당하던 장면을 묘사했습니다. 벼랑에서 바다에 던진 조선인이 헤엄쳐 다른 쪽 기슭으로 올라오는데 나오려고 하면 다시 바닷물로 집어넣고 또 집어넣고, 종당에는 몽둥이로 머리를 쳐서 물속에 영원히 가라앉힌 참상도 일본인 시인이 고발했소. 어느 여류학자는 ’남동생이 어디서 가져왔는지 소방대가 지니고 다니는 쇠갈고리 막대를 나에게 쥐어 줬다. 동생은 이것을 조선인에 대한 호신용으로 쥐어준 것이라고 했는데 동생도 누구의 지시를 받았는지 독기를 품고 쇠갈고리를 들고 다니면서 조선인을 해쳤다고 했다’고 고백했소. 그런데 조선인은? 조선의 시인 작가 문사들은? 조선의 지식인들은? 저들의 행태는 지금도 진행중이오. 그런데 조선의 양심가들은? 학자들은? 종교인은? 지금 뭐하고 있소?“

그가 말을 마치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생도들 역시 절망감에 빠져서 우두커니 천장을 바라보았다. 오민균은 이시하라 상의 사상적 기저를 머릿속으로 탐색했다. 약소민족의 비애를 대변하는 저 담대한 시선...

“선생님, 아나키즘운동이 그렇게 용기를 주시나요?” 한참 후 조병헌이 물었다. 이시하라 상이 예의 조용히 웃다가 다시 설명하기 시작했다. “통제되어서 제한된 지식밖에 유통되지 못했으니 여러분들이 모르는 것은 당연하지. 그렇게 군국주의 체제가 음해하고 이적시하고 있으니까. 하지만 인류가 지향해야 할 최선의 가치 중 하나요. 아나키스트는 무정부주의자가 아니오.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를 부정하는 공산주의를 지향하는 것도 아니오. 인문학적 사유의 사상적 체계라기보다 말 그대로 공화주의를 지향하는 생활철학이자 실천운동이오. 공동체가 평화롭게 제도법 이전의 규범으로, 관습법으로 사는 것.... 바로 인디안의 생활방식이오. 조선의 제주도에 그런 제도가 있소. 바로 아나키스트의 이상향이오.”
“인디안의 생활방식이 제주도에도 있다구요?”
“그렇소. 아나키즘이란 인디안의 삶의 족적을 더듬어 가는 사상이오. 좀더 설명하자면, 아나키즘은 개인의 자유, 평등의 세상을 꿈꾸는 사상이오. 폭력을 정당화하는 것이 아니오. 물론 그런 사람도 있지만 나는 철저하게 그런 그들과는 선을 긋고 있소. 폭동을 선동한 바쿠닌과 같은 극단적 혁명주의자가 있지만, 우리는 톨스토이와 같은 인본주의적 가치를 이상으로 삼고 있소. 낭만적이지만 실천가능한 사상이오. 일본 군국주의가 인간본성과 양심을 파괴하는데, 그래서 수탈과 억압을 경험한 조선 지식인들의 상당수가 저항의 이름으로 아나키즘을 이용하고 있는데 근본정신은 민족주의 저항정신과는 개념이 다르오. 제주도는 그런 이념 체계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생활 수단으로써 체득하고 있는 생활방식이어서 이상적이오. 아나키즘과는 우연의 일치겠지만, 중앙정부로부터 혜택은 못받고 소외받고 차별받고 착취 당하니 자구의 수단으로 자기들끼리 더불어 사는 약속인 향약 같은 것을 지키며 사는 방식, 얼마나 아름답소. 소외된 사람들이 스스로 결속하고 유대해서 아름다운 공동체를 만들어간다는 것, 바로 인디안 정신 아니겠소? 국가단위로서는 규모가 작아서 수용이 어려울지 모르지만, 그런 작은 공동체로 살아가는 것이 모이면 국가 단위가 되겠지. 제도폭력이 난무하니 생각해보는 사조요. 그런데 그런 것일수록 쉽게 강자에게 밟힌다는 것이 한계지.”

이시하라 상은 1911년 처형된 고토쿠 슈스이를 스승으로 삼고 있다고 했다.

“고토쿠 선생님은 메이지시대를 대표하는 반군국주의자로 모반사건의 주모자로 몰려서 처형당한 일본의 양심이었소.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비전론(非戰論)을 제창하셨는데 바탕은 자유 민권이라는 사상적 지향에서 나온 것이었소. 대역사건은 구체적인 행위 때문이 아니라 그런 신념 때문에 처형된 것이오. 그를 따르는 열한 명의 제자도 함께 처형되었지. 뿌리가 뽑힌 것 같지만 빌라도 밑의 갈릴리 사람들처럼 숨어서 한숨지을 망정 뜻을 이어온 사람들이 있소. 옳은 가치는 탄압을 받을수록 힘있게 이어가는 줄기찬 에너지가 있지요. 우리의 아나키스트가 그렇소. 군국주의 파쇼가 탄압하니 오히려 생명력이 유지되는 거요.”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하나의 울림이 되어 심장이 와박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뭔가 공허하고 허기가 졌다. 세상은 급박하게 돌아가는데 목가적 레토릭만으로 이상세계를 실현할 수 있는가. 그가 거듭 말했다.

“나 역시 그의 정신을 따라 '나의 양심은 나의 것이고, 나의 정의는 나의 것이고, 나의 자유 또한 나의 최고의 가치'라고 선언했던 푸르동과, 민중을 신뢰하고 사랑했던 크로포트킨의 영향을 따르려 하고 있소. 인간 자체를 사랑해야지 살상을 자행하는 무기를 사랑할 수 없는 것 아니오?”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하지만 저는 선생님의 의견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조병헌이 이의를 제기하자 이시하라 상이 그를 바라보았다.

“그렇지. 차이는 있으나 적이 될 수 없지. 그런데 세상은 차이가 있으면 적으로 돌려버린단 말이오. 그렇다면 왜 그렇소?”
“악에 대한 복수의식이 솟아납니다. 정의의 칼이라고 해도 좋습니다. 그런데 선생님의 가치로 어느 세월에 그런 복수가 가능하겠습니까. 한가한 도덕적 이상으로 폭력적인 세상의 모순을 극복할 수 있겠습니까. 성직자에게나 필요한 것이지, 현실적 대안은 되지 않는다고 봅니다.”
“사물을 복수의 관점으로만 보시는가? 일차적으로 보면 그건 맞소. 어설픈 관용은 역습을 초래할 수 있으니까. 나처럼 인간이겠거니 하는데 그가 짐승일 수 있으니까. 그래서 행위에는 책임이 따른다는 것을 보여줘야지. 그런데 무엇으로? 힘이 없는데 무엇으로? 그런데도 또다른 복수를 준비하자고? 그러나 이길 수 있소? 그래서 양심이 상처받지만 양심으로 이기자는 것이오. 그것이 대안이 되지 못한다는 건가?”
“그런 말씀은 인격자면 누구나 합니다. 하지만 그것을 지키는 사람은 결국 패자가 됩니다. 그걸 지키는 시간을 이용해 힘 가진 자들은 반칙으로 세상을 지배합니다. 양심을 지키다 그마저 빼앗기라고요? 그들은 어떤 무엇을 해도 이기는데, 결국 양심을 지키는 사람은 패배하고 목숨을 내놓아야 합니다. 반동의 역사는 더욱 힘을 얻지요.” “그래서 일본전쟁광들처럼 맞서자는 건가?”
"요순시대나 가능한 건 무의미하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 폭력을 이길 수 있는 무기가 있소?”
“선생님의 정신만으로는 힘들다는 것이지요. 준비하지 않는 자는 무너집니다. 저희 선현 중에 이율곡 선생이란 분이 계십니다. 임진왜란 때 왜적의 침략에 대비해 10만양병설을 주장했는데 기득 사대부가 묵살해버려서 왜란을 겪었습니다. 구한말엔 군량미에 모래를 섞어서 군졸에게 지급했다가 종당에는 일본식민지로 전락했고요. 준비를 모르는 민족이었습니다. 조국의 앞날이 암담한 이때 현실적 방안이 무엇이냐를 따져야 할 상황 아니겠습니까. 선생님의 말씀은 한가한 도가의 말씀처럼 들립니다.”
“조 생도가 내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말에 동의하오. 그러나 전쟁을 위한 엄혹한 동원체제와 권력이 인간성을 파괴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것에서부터 우리의 이상주의는 합치되고 있소. 다만 나는 영감을 갖자는 것이지.”
“양심과 정의 앞에 서라. 사랑과 평화와 진리를 구하라. 공맹과 석가모니 예수가 다 하는 말씀입니다. 그런 도덕적 실천이 세상을 바로잡을 수 있습니까.”
“오늘은 토론하는 자리가 아닌 것 같습니다.”

이시하라 상이 말하고자 하는 의도를 곡해하는 것같아서 오민균은 마음이 언짢았다. 이시하라 상이 오민균을 바라보더니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역사는 아나키즘을 부활시킬 거요. 야만의 시대가 아닌 공동의 이해, 공동의 규범과 질서를 유지할 수 있다는 것, 숭고하지 않소? 동원체제적 정치 프로파간다에 의한 애국심을 봅시다. 나는 그것이 미신적 맹신의 결과이며, 그런 애국주의란 야수의 본성이라고 보는 사람이오, 광란이자 허구라고 주장하신 고토쿠 슈스이 스승님 말씀에 적극 공감하오. 군국주의와 애국주의는 동전의 앞뒷면과 같은 관계요. 그런데 거기엔 함정이 도사리고 있지. 지배자가 민중을 개돼지로 보는 관점이오. 권력이 어떠한 짓을 해도 굴종하게 만드는 국민 사기극이오. 자기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 쳐놓은 덫이요. 전쟁을 끌어들여서 백성을 불구덩이에 몰아넣고 자신들은 그 위에서 즐기는 사디스트들... 어찌보면 그들의 광기가 나쁘다기보다 백성들이 무지한 게 더 나쁘지. 깨어있지 못하니 백성은 금수 취급받소.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는 예수에게 돌팔매질하는 유대 사람들처럼 말이오. 강자는 어떤 무엇을 해도 이겨요. 그러나 약자는 어떤 무엇을 해도 패배하지. 그런 가운데 강자를 추종하는 노예들이 나와서 밥벌이를 하는데, 그래 자신들을 탄압하는 권력자를 향해 경배하고 지지하고 스스로 노예를 자청하다니. 그래서 예수는 자신에게 돌을 던지며 날뛰던 군중을 향해 ‘주여 저들은 모르나이다’ 하고 절망하지 않았소? 권력의 주술에 넘어간 줄도 모르는 백성들이 불쌍하지 않소? 그렇다면 대안이 무엇인가. 시간이 걸리더라도 깨우쳐 알려야지. 그것이 종국에는 더 빠를 수 있소. 그러면 어떤 컨텐츠로? 연대요. 바로 세계주의와 향토주의의 결합이오. 아나키스트의 길이고, 보편적 가치에 충실하는 길이오.“
“세계주의와 향토주의...”
“인디안과 제주도의 생활방식이오.“
“인디안에게 세계주의가 있다는 겁니까?”
“일면의 진실만 보는데, 그건 올바른 인식체계가 아니오. 그들의 세계관은 우주에 가닿아 있소. 주술주의가 아니오.”
“급박한 현실에 정말 한가합니다.”

이정길이 이의를 달았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것 때문에 감옥 가고 처형되고 그랬소. 제국주의·군국주의·애국주의의 허상에 사로잡힌 포로가 되니 볼 것을 제대로 못보고 있소.”

그는 어떤 신념에 차있었다. 그가 말을 계속했다.

”천황폐하에 대한 경례는 필수다. 거부하면 국가를 반역했다고 잡아가둔다. 그러나 경배를 거부할 수 있소. 왜? 사기니까. 그런데 우리는 쉽게 동화되고, 회의론자는 좌절하고 절망하오. 그런 면에서 50년 전의 고토쿠 슈스이 선생이 앞서간 인물이오. 자, 현실을 봅시다. 일본 제국주의 왕권이 지배하면 미래는 난망이오. 백성들은 동원체제적인 그물망에 갇혀 개미처럼 일하지만 사고는 천박한 수준일 거요. 그렇게 그들은 길들여져 왔소. 그리고 일본이란 나라의 실체에 대해서 지적하고 싶소. 일본인 개인은 착하고 정직하고 도덕적인데, 집단화하면 부도덕하다고 했지요? 천만의 말씀이오. 일본인이란 약한 자의 소를 잡아먹고 고양이 잡아먹었다고 강아지 뼈 내놓는 족속이요. 그러나 강자에겐 고양이 잡아먹고 호랑이 잡았다고 호랑이 가죽을 바치는 자들이오. 그렇게 살아온 민족이오. 잘 살피시오.”

꽉 막힌 오민균의 머릿속은 더 혼란스러웠다. 독백인 듯 독백 아닌 독백 같은 레토릭. 모든 것이 헷갈렸다. 그것이 바로 해방 여섯 달 전의 일이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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