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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일본 육사 생도 귀에 히로히토의 떨리는 목소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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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1> 일본 육사 생도 귀에 히로히토의 떨리는 목소리가

[팩션] 실록소설 '행군-어느 민족주의자를 위한 변명' <1>

해방 후 왜곡된 역사 속에서, 지금까지의 한일 관계는 효용을 다했다. 그러나 예고된 갈등이었다. 일본은 구한말과 일제강점기 35년, 8.15 광복과 분단체제, 그 이후 70년의 강고한 구 체제 시스템 속에서 우리 내부 깊숙이 침투해 들어와 알게 모르게 생활의 일부가 되었다. 그 안에 우리 내부의 모순과 고뇌가 응축되어 있다. 이 모순과 고뇌를 탐구하려면 어떤 방법이 있을까.

한 개인사를 통해 시대와 사회를 비추는 거울 역할을 하는 것이 문학의 영역일 것이다. 그동안 우리는 외세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생존이 우선이었던 관계로 자기 자신을 앞세우지 못했다. 우리는 너무 쉽게 잊어버렸고 안일했다. 그러다보니 역사는 박물관에 소장된 문화재인 양 화석화되고, 현대의 역사는 더군다나 묻혔다.

기자 출신 이계홍 작가의 실록소설 '행군-어느 민족주의자를 위한 변명'은 그런 배경에서 나왔다. 이 소설은 2016년 10월호부터 2019년 6월호까지 문예월간 '월간문학'에 연재되었던 소설이다. 월간문학 연재를 마친 뒤 많은 부분을 수정 보완해 프레시안에 재수록한다.

이 연재물은 이른바 '팩션(Faction)'이다. 팩트와 픽션의 사이 어디에서 역사적 사실에 상상력을 덧붙인 '논픽션' 형식의 소설이다. 필자는 취재의 일환으로 일제강점기 말 일본 육사 출신 젊은 생도들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어지러운 시대, 그 안에서 제국주의 광풍에 휘말린 젊은이들의 시각을 잡아내려 했다. 이계홍은 "일본의 극우 정권이 일제강점기의 역사적 사실들까지도 왜곡하는 역사 모독에 대해 하나의 담론시장을 형성하자는 데 목적이 있다"고 했다. '행군-어느 민족주의자를 위한 변명'은 총 33회로 나뉘어 연재될 예정이다.(편집자)

8.15와 일본 육군사관학교

대일본제국 육군사관학교의 장교단과 사관후보생 전원이 대강당에 모였다. 교정은 이날따라 활시위 같은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오전부터 스피커 방송을 통해 전 교관단과 육사 생도는 낮 12시 정각 대강당으로 모이라는 특별 지시가 내려져 있었다.

육군사관학교는 도쿄시 남쪽 외곽 지역인 가나카와(神奈川)현 자마(座間)의 숲속에 숨은 듯이 자리잡고 있어서 얼핏 보면 숲 공원처럼 보였다. 연합군의 폭격에 대비하여 교직원과 학생 전원이 나가노(長野) 현으로 이동해 한동안 휴교 상태에 들어갔으나 이들은 최근 다시 이 교정으로 돌아왔다.

어디선가 공습경계 사이렌이 길게 울리고, 잊은 듯 아련하게 포성이 울리고, 일본군의 비행편대가 창공을 베듯 쏜살같이 날아 어디론가 사라졌다. 교정은 날씨마저 후텁지근하고 눅진눅진한 열기 속에 갇혀있어서 뭔가 불쾌하고 불길한 예감이 진하게 감돌았다. 지난 6일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떨어지고, 9일에는 나가사키에 또다시 투하되었다. 식자층은 패망을 짐작했지만 철저한 보도관제 속에 국민은 잘 알지 못했고, 알더라도 믿지 않으려 했다.

일본 제국 군대는 그럴수록 전의를 드높이고 있었다. 만주벌판에서, 태평양제도에서, 인도지나반도에서, 자바에서, 남중국에서 연전연승하고 있다는 방송보도가 이어졌고, 그것을 모두들 의심의 여지없이 받아들였다. <황국 신민>은 제국 군대가 밀린다고 해도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렇게 집단 최면에 걸려있었다.

일왕(日王) 히로히토의 육성 방송이 예고돼 있었지만, 예상치 않은 방송예고 때문에 마음 졸인 사람들이 많았다. 이윽고 낮 12시. 정오 시보가 울리자마자 남자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러나 방송 멘트가 전과 완전히 달랐다.

“지금부터 중대방송이 있겠습니다. 전국의 청취자 여러분, 모두 기립해주시기 바랍니다. 천황폐하께서 전 국민에 대하여 황공하옵게도 몸소 칙서를 말씀하시겠습니다. 지금부터 삼가 옥음(玉音)을 전해드리겠습니다.”

아나운서의 울먹이는 듯한 침울한 멘트에 이어 곧바로 일본 국가 기미가요가 흘러나왔다. 전례없는 일이었다. 실물도 아니고, 하다 못해 동상도 아닌 라디오 기계 앞에서 모두 기립해 부동자세를 취하고 기미가요를 들으라니? 상식이 있는 사람으로 보면 정신나간 일이었지만 반신반인(半神半人) 천황폐하의 옥음이니 지시하는대로 따르는 것이 지당했고, 그래서 사람들은 각자 자리에서 일어나 두 손을 앞에 모으고 기미가요를 따라 부르며 고개를 숙였다. 일본 본토와 식민지 조선반도는 그런 전체주의적 집단 최면에 감염된 지 수십 년째였다.
키미가요와 치요니 야치다이니 君(きみ)が代(よ)は 千代(ちよ)に八千代(やちだい)に
천황의 시대는 천대고 팔천대고
사자레이시노 이와오토나리테코케노무스마데 さざれ石(いし)の 巌(いわお)となりてこけのむすまで
자그마한 조약돌이 암석이 되어 이끼가 낄 때까지

장중한 기미가요가 끝나자 뒤이어 히로히토의 떨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짐은 깊이 세계의 대세와 제국의 현상에 감하여 비상조치로써 시국을 수습코자 여기 충량한 그대들 신민에게 고하노라. 짐은 제국 정부로 하여금 미·영·소·중 4국에 대하여 그 공동선언을 수락할 뜻을 통고케 하였다. 생각하건대 제국 신민의 강녕을 도모하고, 만방 공영의 낙을 같이함은 황조 황종의 유범으로서 짐의 권권복응하는 바 전일에 미·영 양국에 선전한 소이도 또한 실로 제국의 자존과 동아의 안전을 서기함에 불과하고 타국의 주권을 배하고 영토를 범함은 물론 짐의 뜻이 아니었다.

연이나 교전이 이미 사세를 열하고 짐의 육·해 장병의 용전, 짐의 백료유사의 정려, 짐의 1억 중서(衆庶)의 봉공이 각각 최선을 다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전국은 필경에 호전되지 않으며 세계의 대세가 또한 우리에게 불리하다. 뿐만 아니라 적은 새로이 잔학한 폭탄을 사용하여 빈번히 무고한 백성을 살상하여 차해에 미치는 바 참으로 측량할 수 없게 되었다.

이 이상 교전을 계속하게 된다면 종래에 우리 민족의 멸망을 초래할 뿐더러 결국에는 인류의 문명까지도 파각하게 될 것이다. 여사히 되면 짐은 무엇으로 억조의 적자를 보하며 황조황종의 신령에 사할 것인가.

이것이 짐이 제국정부로 하여금 공동선언에 응하게 한 소이이다. 짐은 제국과 함께 종시 동아해방에 노력한 제 맹방에 대하여 유감의 뜻을 표하지 않을 수 없다. 제국신민으로서 전진에 죽고 직역에 순하고 비상에 패한 자 및 그 유족에 생각이 미치면 오체가 찢어지는 듯하며, 또 전상을 입고 재화를 만나 가업을 잃어버린 자의 후생에 관해서는 짐이 길이 진념하는 바이다.

생각하면 금후 제국의 받을 바 고난은 물론 심상치 않다. 그대들 신민의 충정은 짐이 선지하는 바이나 짐은 시운의 돌아가는 바 심난함을 감하고 인고함을 인하여서 만세를 위해서 태평을 고하고자 한다. 짐은 여기에 국체의 호지함을 얻어 충량한 그대를 신민의 적성에 신의하여 항상 그대들 신민과 함께 있다. 만약 정에 격하여 사정을 난조하여 혹은 일명 배제하여 서로 시국을 어지럽게 하고 대도를 그르치게 하여 신의를 세계에 잃게 함은 짐이 가장 경계하는 바이다.

모름지기 거국일치 자손상전하여 굳게 신국의 불멸을 믿고 각자 책임이 중하고 갈 길이 먼 것을 생각하여 총력을 장래의 건설에 쏟을 것이며 도의를 두텁게 하고 지조를 튼튼케 하여 국체의 정화를 발양하고 세계의 진운에 뒤지지 않도록 노력할지어다. 그대들 신민은 짐의 뜻을 받들어라. <일왕 히로히토의 ‘항복’선언문 전문>
히로히토의 육성을 듣기는 처음이었고, 방송도 최초의 일이었다. 열악한 음질과 ‘황조황종’ ‘유범’ ‘권권복응’ ‘백료유사’ ‘정려’ ‘중서’ 따위의 이해하기 어려운 한문용어, 그리고 히로히토 특유의 웅얼거리는 듯한 분명치 않은 발음 때문에 듣는 사람은 얼핏 무슨 뜻인지 잘 알지 못했다.

내용에는 항복을 한다든지 패전을 했다든지 잘못을 시인한다는 내용이 없었다. 일본이 전쟁을 일으킨 데에는 ‘동아의 안전이라는 목적을 위함이었는데, 연합군이 잔학한 폭탄을 투하하여 무고한 백성을 살상했다’는 뜻으로 억울해한다. 포츠담선언 수용에 대해 '동아시아 해방에 노력한 제 맹방에 대하여 유감'이며, 굳게 신국(神國)의 불멸을 믿으라는 것으로 세계평화를 위해 선언을 받아들였으니 다시 힘을 키우자고 말한다. 항복인지 격려인지 푸념인지 문맥만으로는 헷갈렸다. 다만 분위기로 보아 항복하는구나 하고 느낄 뿐이었다.

육사 강당은 히로히토의 방송이 끝나자마자 갑자기 들끓어 올랐다. 무릎 꿇고 엎드린 자세로 방송을 듣고 있던 교관단이 목을 놓아 흐느끼고, 생도들의 울음소리가 장송곡처럼 울려퍼졌다. 그것은 교정 전체로 감염돼 일제히 울부짖는 곡성으로 변했다. 흐느끼던 장교 몇 명이 격정을 못이긴 나머지 군도를 뽑아들어 스피커의 전선을 토막내며 절규하기 시작했다.

“이건 사실이 아니다. 절대로 아니다! 최후의 1인까지 천황폐하를 수호한다! 적과 맞서 싸운다! 쳐부수러 가자!”
“황성(皇城)으로 가자!”
“우리도 따른다! 가자!”

일단의 장교단이 집총한 채 칼을 휘두르며 쏜살같이 연병장 밖으로 뛰쳐나갔다. 따라나선 자가 수십 명이었다. 그들은 드리쿼터에 차례로 분숭해 도쿄 시내의 궁성으로 달려갔다. 이들을 이끈 장교가 제3중대 구대장 우에하라 대위였다.

그는 한달음에 궁성 수비사단(근위대)에 이르렀다. 궁성을 에돌고 있는 인공 운하의 수중 다리 앞에서 저지하던 초병들을 간단없이 제압하고, 근위대 본부 부관실로 뛰어들었다.

“나는 대일본제국 육군사관학교 제3중대 2구대장 우에하라 대위다! 근위대장을 만나러 왔다! 면담을 부탁한다!”
근위대 사단장 부관이 놀라며 들이닥친 이들을 가로막았다.

“사전 연락도 없이 이게 뭔가. 용건이 무엇인가.”
“부관이 알 필요없다. 시간없다. 빨리 근위대장을 대면시키라!”
“용건을 말하라! 내가 보고하고 응낙하시면 모시고 나오겠다.”
“근위대장 각하에게 직접 말하겠다! 근위대장을 대면시키라! 시간없다!”

근위대장실에서 일왕의 육성을 들은 뒤 그 역시 처연한 심정으로 실내를 서성거리고 있던 고노에 사단장이 밖의 소란스런 소리에 귀를 기울이다가 어두운 얼굴로 부관실로 나왔다.

“부관, 무슨 일인가?”

우에하라 대위가 단번에 부관을 제치고 그의 앞으로 불쑥 나서며 소리쳤다.

“사단장각하! 저는 육군사관학교 제3중대 구대장 우에하라 대위입니다. 천황폐하의 옥음방송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취소하도록 조치해주시기 바랍니다!”

고노에 사단장은 놀라지 않고 여전히 고뇌에 찬 표정을 지었다. 우국충정으로 달려온 육사 교관단의 애국적 행동은 헤아리고도 남았다. 하지만 천황의 발언은 바로 하늘의 말씀이 아닌가. 하늘의 말씀을 되돌릴 수도 없고, 부정할 수도 없다. 또 전투 상황도 종료되었다. 이미 끝난 일이다. 모든 신민이 천황폐하를 위해 옥쇄(玉碎)의 각오로 오늘에 이르렀듯이, 이제 천황폐하의 뜻을 충성스럽게 떠받들어야 할 뿐, 번복할 수 없는 것이다.

“안된다. 끝난 일이다. 돌아가라.”
“옥음방송은 결단코 천황폐하께서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누군가의 음모입니다! 항복이라니요?”
“이미 늦었다. 돌아가기 바란다.”
“안됩니다. 취소하지 않으면 돌아갈 수 없습니다! 이건 단연코 음모입니다!”
“천황폐하의 옥음을 거역할텐가? 반역할텐가?”

그제서야 고노에 사단장이 짜증 섞어 화를 냈다. 제국 신민은, 특히 군인은 천황폐하에 대한 충성이 최고의 가치이자 덕목이 아닌가. 죽으라면 죽는 신국의 도구가 아닌가.

“사단장 각하! 이것만은 안됩니다. 세계 최강의 제국군대가 어떻게 이렇게 허무하게 무너집니까. 기개가 시퍼런 육사생도들을 보십시오. 저들이 도대체 무엇이 되겠습니까. 사기가 하늘을 찌르는 저들더러 자결하란 말입니까? 안됩니다! 천황폐하의 나라를 위해 목숨을 초개같이 버리려고 여기까지 왔습니다. 절대로 안됩니다!”

우에하라 대위는 울부짖고 있었다.

“뜻은 알겠다. 그러나 천황폐하의 뜻을 거역하면 대역죄인이 된다. 대역죄인이 어떤 길을 가는지 잘 알지 않는가? 철없이 굴지 말라! 물러가라! 절대로 안된다!”
“뭣이?”

그와 동시에 고노에 사단장의 두상이 바닥에 굴러 떨어져 나뒹굴었다. 우에하라가 군도를 뽑아들어 얏! 하는 기합과 함께 허공을 세차게 가르자 순식간에 사단장의 두상이 야자열매처럼 톡 떨어져 바닥에 나뒹군 것이다. 목이 베어진 그것은 피를 홀린 채 하찮은 돌멩이처럼 쓸쓸하게 바닥에 구르고 있었다. 너무나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서 부관이 얼어붙은 듯 서 있다가 책상 옆 벽면에 붙어있는 비상전화 부스로 달려갔다.

“1초소! 2초소! 3초소! 여긴 사단장 부관실이다! 모두 부관실로 출동하라!”
“가자!”
주춤하던 우에하라가 머뭇거리지 않고 교관단과 생도들을 향해 외쳤다.
“돌아가자!”

그는 교관단을 이끌고 다시 육사 교정으로 돌아왔다. 금방이라도 터질 것같은 흥분 속에 휩싸여 있던 강당은 우에하라 일당이 들이닥치자 더욱 비탄의 함성이 울려퍼졌다. 우에하라가 교단에 올라서서 외쳤다.

“나는 이 전쟁을 절대 포기할 수 없다! 절대로 우리는 질 수 없다. 항복을 받아들일 수 없다!”

와, 하는 함성이 일었다. 그것은 마치 사이비 종교집단의 광기어린 집회와 같았다. 강당은 이미 집단광기로 변질돼가고 있었다. 우에하라가 다시 외쳤다.

“생도 여러분, 내가 황성 근위대장 목을 치고 왔다. 천황폐하의 옥음방송을 막지 못한 죄를 물은 것이다! 우리는 굴복할 수 없다. 우리 갈 길에 훼방꾼은 없다! 있다면 단호히 처단한다. 나는 여러분의 기개를 믿는다. 최후의 일각까지 대일본제국을 위해 나가 싸우라! 천황폐하를 위해 한 목숨 초개처럼 버리라! 천황폐하 만세! 대일본제국 만세! 대일본제국군대 만세!”

그리고 그는 허리춤에서 군도를 뽑아들어 얏! 하는 기합과 함께 자신의 배를 갈랐다. 내장이 밖으로 쏟아져 나오고 쓰러져 숨을 거두면서도 그는 “천황폐하 만세!”를 외쳤다. 모든 것이 숨막히는 순간이었다. 교정은 더욱 혼란과 비탄과 절망의 절규로 요동치고 있었다.

이때 강당의 한쪽에서 또다른 흥분한 생도가 두 손을 높이 쳐들면서 만세를 불렀다.

“조선의 독립이다! 조선의 해방이다! 하하하! 만세, 만세, 만세!”

눈물 범벅이 되어 외친 사람은 3학년 조선인 생도 김재곤이었다. 항일 투쟁의 본산이라고 자부하던 부산 동래고보 출신이었다. 그것을 남다른 자긍심으로 여기던 그가 눈물과 콧물이 뒤범벅이 된 채 환희에 젖어 엉엉 울면서 만세를 외치고 있었다. 한쪽에서는 패전의 쓰라림으로 통한의 눈물을 삼키고 있는데, 다른 한쪽에선 압제와 핍박에서 벗어났다는 감격의 눈물을 쏟고 있다. 너무도 극적이고 대조적인 장면이었다. 하지만 이 양극단의 장면은 곧 일시에 무너졌다.

“뭣이? 빠가야로! 개자식!”

한발의 총성이 빵! 하고 실내를 울리고 김재곤이 그 자리에 나동그라졌다. 흥분한 소속 구대장이 권총을 뽑아들어 김재곤의 가슴을 향해 방아쇠를 당긴 것이다. 쓰러진 김재곤의 하얗게 치뜬 눈엔 여전히 눈물이 가득 고여있었고, 숨은 멎었지만 얼굴은 기쁨에 젖어있었다.

김재곤은 이렇게 조국의 해방과 독립의 벅찬 감격을 패망에 광분한 일본 육사 교관의 분노와 맞바꿔버렸다. 스물한 살의 젊은 생을 마감한 김재곤의 죽음은 조선인 생도들의 마음을 그대로 반영한 몸짓이었다. 일본군대의 군율을 지켜야 하는 현실과 조국을 생각하는 식민지 청년의 고뇌, 그런 내면의 이중성으로 사관학교를 다니고 있지만, 어느 한 순간 일본 패망이 확인되자 저 가슴 속 깊이 숨겨졌던 독립의 열망이 화산처럼 용솟음친 것이다.

오민균은 김재곤이 쓰러지자 앞으로 뛰쳐나가려다 말고 제 자리에 우뚝 섰다.

“야, 멈춰!”

2학년 생도대의 장지성과 조병헌이 오민균을 향해 거칠게 손을 가로젓고 있었다. 자중하란 뜻이다. 오민균의 정의감과 의협심을 모르지 않는 그들은 필시 그가 일을 낼 것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광란의 복판에서 자칫 개죽음을 당할 수 있다. 오민균은 1학년 생도 가운데 준수한 미남에다가 제식훈련, 마라톤, 축구, 검도와 각 학과목에서 두각을 나타낸 모범생도였다. 그래서 벌써부터 지도자급 생도로 인정받고 있었다. 일본인 생도들로부터도 명성이 높았다.

오민균은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으며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총성에 자극이라도 받은 듯 강당은 더욱 걷잡을 수 없는 살기의 광란 속으로 빠져들었다. 분을 못이긴 일본인 생도 몇 명이 스스로 자기 배를 가르거나 팔뚝에 자해하다가 피를 흘린 채 부축돼 나갔다. 강당은 어떤 무엇도 삼켜버릴 것같은 분위기로 치달았다.

일본 내각은 바로 전날 오전 내각회의를 열고 포츠담선언 수락을 결정했다. 그리고 15일 정오 일왕의 라디오 특별방송으로 항복을 선언하기로 결의했다.

포츠담회담은 독일이 연합군에 항복한 두달여 후인 7월 26일 독일의 포츠담에서 미국·영국·중국·소련이 수뇌회담을 열어 일본의 무조건 항복과 대일본 처리방침에 관한 공동 커뮤니케를 발표했다. 이 커뮤니케에서 ‘일본의 주권은 혼슈·홋카이도·규슈·시코쿠와 연합국이 결정하는 작은 섬들에 국한할 것”이라고 명시했다. 이는 1943년 11월 27일 발표한 카이로선언을 재확인한 것이었다.

서울에서 발행되던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는 ‘3대 연합국(미·영·중) 카이로선언문’을 1년9개월이나 늦은 해방 다음날(1945.8.16.) 보도했다. 이는 조선의 독립국임을 국제적으로 재확인하기 위한 그나마 발빠른 행보였다.

1940년 8월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조선중앙일보가 강제 폐간된 뒤로 매일신보는 한반도 내에서 유일한 일간지로 남아있었다. 매일신보는 조선총독부의 기관지였으나 해방이 되자 카이로선언을 보도하면서 재빠르게 변신을 모색했다.

-루즈벨트미국대통령, 蔣介石 중화민국주석 및 처칠 영국수상은 각 군사사절 및 군고문과 함께 1943年 11月27日 북아프리카 에집투의 수도 카이로에 회합하여 일본국에 대한 장래의 군사행동을 협정하고 다음과 같은 일반적 성명을 발표하였다.

각군사 사절단은 일본국에 대한 장래의 군사행동을 협정하였다. 3대 동맹국은 해로 육로 및 공로에 의하여 야만적인 적국에 대하여 가차없는 탄압을 가할 결의를 표명하였다. 이 탄압은 이미 증대하고 있다. 3대동맹국은 일본국의 침략을 정지시키며 이를 벌하기 위하여 今次 전쟁을 속행하고 있는 것이다. 右同盟國은 자국을 위하여 하등의 이득을 요구하는 것은 아니며 또 영토를 확장할 아무런 의도도 없는 것이다.

右同盟國의 목적은 일본국으로부터 1914年 제1차 세계대전 개시 이후에 일본국이 탈취 또는 점령한 태평양의 도서 일체를 박탈할 것과 만주 대만 및 팽호도(膨湖島)와 같이 일본국이 淸國人으로부터 盜取한 지역 일체를 중화민국에 반환함에 있다. 또한 일본국은 폭력과 탐욕에 의하여 약탈한 다른 일체의 지역으로부터 구축될 것이다. 前記 3대국은 朝鮮人民의 노예상태에 유의하여 적당한 시기에 맹서코 조선을 자주독립시킬 결의를 갖는 것이다. 이와같은 목적으로써 3대동맹국은 연합제국 중 일본국과 교전중인 제국과 협조하여 일본국의 무조건항복을 촉진재래(促進齎來)함에 필요한 중대차 장기한 행동을 續行한다.

보도에 따르면, 카이로 회담 선언문은 중국의 잃어버린 영토를 회복하는 내용 중심으로 구성되었는데, 그렇더라도 ‘맹서코 한국의 독립’을 확약했다. 그러나 일본이 카이로선언을 거부하고 계속 침략야욕을 확대해나가자 미국은 1945년 8월 6일과 9일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했다.

소련도 일본의 패망이 임박해지자 일본과 맺었던 불가침조약을 파기하고 대일 선전포고를 선언하면서 붉은 군대를 동원, 만주 관동군을 공격했다. 극동 제1방면군 제25군은 한반도 동북부로 진격해 8월 9일 함경북도 경흥, 11일 웅기, 12일 나진, 14일 청진ᐧ나남을 점령했다. 미국은 이보다 한달 늦은 9월 8일 미 24군단의 사단 병력이 인천에 상륙했다.

소련군이 거침없이 한반도로 진격한 것은 미국이 만주 주둔 일본 관동군이 막강하다고 오판한 데서 불러들인 결과였다. 또한 일본 관동군세가 지리멸렬했기 때문에 소련은 만주와 한반도 38 이북을 손쉽게 접수했다. 극동에 배치된 소련의 붉은 군대는 제대로 훈련받은 병력이 아니었다. 현지의 소년병, 불량배 따위를 쓸어모은 오합지졸에 불과했다.

일본 관동군은 주력이 전황이 불리한 태평양과 남양군도, 인도차이나반도, 중국 남부로 대거 투입돼 만주는 진공상태에 빠져있었다. 전쟁 말기에 이르러선 만주에는 간도특설대 등 특수부대가 비적과 게릴라 색출작전을 벌이는 정도였다. 매복·잠입·미행·감시 따위 밀정을 동원한 첩보활동 위주로 조선인 항일투사를 잡는 데 국한돼 있었다.

관동군의 주력이 만주에 남아있었다면 일본군이 허무하게 소련군에게 무너지진 않았을 것이다. 일본군은 조선에 19사단(함북 나남)과 20사단(서울 용산)이 주둔했다. 조선 내부의 저항세력은 헌병대와 일부 군 병력으로 제압이 가능했고, 그래서 이들 병력은 주로 수송과 병참을 맡고 있었다.

그에 비해 중국의 동북 3성과 몽골에는 엄청난 화력을 갖춘 관동군이 주둔했다. 일본 본토에는 도쿄에 동부군 52사단, 오사카에 중부군 53,54사단, 후쿠오카에 서부군 사령부가 설치되어 있었고, 나머지 병력은 모두 만주로 빼돌렸다. 이중 가장 북쪽에 주둔한 병력은 하이라얼의 관동군 제6군이었고, 가장 남쪽에 주둔한 병력은 광저우에 배치된 중국파견군 제23군이었다. 거리만도 수만 리였다. 이때 만주관동군은 최고 120만명까지 주둔하고 있었는데, 이들의 대부분이 전황이 불리해진 남태평양과 인도차이나반도, 중국 남부로 긴급 투입되었던 것이다. 이에따라 일본군 중에서도 막강 군대였던 관동군은 정작 만주에 없었다.

만약 미국이 관동군의 정황을 정확히 파악하고 소련을 불러들이지 않았더라면? 한반도 역사는 달라졌을지 모른다. 또 만약 먼저 진격한 소련군이 미국이 제시한 38도선을 경계로 한 분할 통고를 무시하고 남쪽까지 내려 왔다면? 그 역시 한반도 지도는 달라졌을 것이다. 소련군은 고작 한반도의 2백km 안에 있었지만, 미군은 수천km 밖에 있는 데다 한반도에 대한 준비가 없었으니 소련이 마음만 먹었다면 소련의 의지대로 굴러갔을 가능성이 높다. 쿠릴열도 4개섬을 소련이 점령한 뒤 지금까지 러시아령이 된 것을 보아도 그렇다. 태평양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일본을 몰아낸 미국이 한반도에 대해 무지했고, 관심도 없었다는 것이, 그래서 더 큰 분단의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인식도 가능하다.

미·소 양국은 유럽전선에서 연합국의 일원으로서 큰 틀에서 협조적이고 우호적이었다. 냉전 대결로 맞짱을 뜨리라고는 어느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여기서 가설을 하나 더 붙인다면, 만약 히로시마에 원폭이 투하된 8월 6일 일본이 무조건 항복했다면 우리의 역사가 달라졌을 것이라는 점이다. 소련이 이틀 뒤 대일선전포고를 할 필요도 없었고, 따라서 한반도에 진격할 명분도 사라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소련은 그동안 일본의 항복을 앞당기기 위해 미국의 끈질긴 참전 독촉에도 침묵했다. 일본에 무조건 항복을 통고한 2주전의 포츠담회담에서도 소련은 참전 독려에 애매한 태도를 취했다. 일본과 맺은 불가침조약을 지킨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러나 핵폭탄 하나로 일본 패망이 앞당겨지자 언제 그랬더냐 싶게 재빨리 일본에 선전포고했다. 이런 ‘사소한 인연’의 잔상들이 한반도 운명을 갈랐다. 힘이 없으면 하찮은 우연에도 나라의 운명이 비참하게 찢기고 만다는 교훈을 주었다. 힘이 없으면 의지대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이 역사의 역설이다.

어쨌든 일본은 미국의 원자폭탄 투하와 사면초가의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8월 14일 내각회의를 열어 무조건 항복을 의결했다. 다음날 정오, 항복방송을 위해 히로히토는 14일 밤 늦게 NHK 제작진을 황궁으로 불러들여 군복을 차려입고 2차례 녹음했다. 녹음은 철저하게 기밀에 붙여졌다. 강경 군부의 반발이 예상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알게 되면 단연코 반발할 것이다. 호전주의자들은 진격의 관성에 매몰되어 있었던 것이다.

항복 문서는 몇 번의 문구 수정을 거친 끝에 14일 밤 11시 20분 녹음했다. 히로히토는 “첫번째 녹음이 시원찮다”며 재차 녹음했고, 두 번째 것이 채택되었다. 방송시간은 4분30초였다. 이 녹음 SP판을 도쿠가와 의전비서관이 보관했는데, 어떻게 기밀을 알아챈 육군 강경파 장교단이 SP음반 탈취사건을 벌였다. 이들을 간신히 빼돌린 것까지는 좋았으나, 항복 방송 직후 일본육사 우에하라 구대장의 궁성 난입은 막지 못했다.

오민균은 피를 흘린 채 숨진 김재곤을 바로 눈앞에서 지켜보았다.

-이런 황망함이 있나. 선배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않겠다....

그는 김재곤의 죽음을 씹듯이 되새겼다. 일본의 압제를 벗어난 희열. 그런데 쓸쓸한 주검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그의 죽음이 뭔가 조국의 앞날을 예고하는 불길한 예감이 드는 것도 부인할 수 없었다. 조국은 준비되지 않은 해방과 독립을 맞이하고 있었다.

기간병사들이 단상의 우에하라 구대장과 단 아래 김재곤의 시체를 거둬 단가에 싣고 어딘가로 사라졌다. 그 후 김재곤의 시신이 어디에 있는지 알려진 것이 없다. 일부 기록에는 단순히 ‘김모, 종전 직후 사망’으로 기재되어 있고, 창씨개명된 일본명 金光秀雄으로 이름이 나와 있는 정도다. 金光秀雄이란 이름도 김재곤의 동명이인인지 확인이 필요하다. 극도의 혼란 상황이었고, 일본의 입장에서 초상집에서 만세 부른 격이어서 배신감으로 일본 육사가 그를 불명예자로 기록에서 지워버렸을 수 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우리 스스로 그를 방치했다는 것은 독립국가로서의 의무를 다했다고 볼 수 없다. 이 광경을 직접 목격한 조선인 생도들만이 그날의 그를 아련하게 기억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들도 지금 자연사했거나, 민족군대의 이름으로 해방 공간의 모순과 싸우면서 숙군 과정에서 대부분 처형당해 그의 억울한 죽음을 대변해줄 사람들조차 사라진 상황이다.

1945년 8월 현재 일본 육군사관학교 생도는 모두 4,720명이었다. 학년당 정원이 1,500명이지만 편입생 및 전시 충원을 위해 탄력적으로 인원을 운용했기 때문에 전시엔 대개 정원보다 초과되었다. 장교보급 계획에 따라 학년제는 2년제, 3년제, 4년제 등 다양하게 운용됐는데 당시는 3년제였다.

생도들은 1학년 예과를 마치고 2학년으로 올라가 육사 본과와 항공사관학교로 나뉘어 배치되었다. 숫자상으로는 육사 배정이 압도적이어서 주류를 형성했다. 전체 생도 중 일본 본토 출신은 90%에 달했다. 나머지 10% 중 5%는 중국 출신이고, 그 나머지 5%는 조선 대만 필리핀 버마 태국 출신 등이 차지했다.

일본 육사는 1868년 창설되어 1945년 제61기로 폐교되기까지 총 5만7천여 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이중 조선인은 제11기(1886) 박유굉을 시작으로 제61기 오민균까지 모두 114명이다. 만주군관학교 예과 출신으로 일본육사 본과에 편입하여 졸업한 27명까지 더하면 141명이다. 졸업생 총수 5만7천명의 0.3%에 준하는 수치다.

그러나 이들이 한국현대사에 끼친 영향력은 막강하다.

이 학교 조선인 졸업생 중 노백린 이갑 박승훈 유동열 김광서(김일성) 지청천 등은 일본군 장교 복무 중 중국으로 망명해 항일 독립운동을 벌였고, 일본 반혁명사건(혁명일심회)에 연루되어 처형된 졸업생도 있었다. 일본 육사를 졸업하고 귀국해 항일투쟁을 벌인 중국의 장제스(21기)와 비슷한 경로를 밟은 인물들이다. 반면 일제 군국주의 체제 아래서 핵심적인 일본군 장교로 변신한 졸업생도 많다.

1945년을 기준으로 조선인 출신은 졸업반 생도 3명, 2학년 6명, 1학년 8명이다. 만주군관학교에서 편입한 생도들을 합해도 일본 육사 조선인 출신은 학년당 8명을 넘지 않았다. 일본 육사는 조선인 청년들에게 입학이 거의 허용되지 않았던 군사 교육기관이라고 보아도 무방했다. 차별이라고 할 정도로 인색했다. 엘리트 집단이자 특수조직이었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여지지만, 근본적으로 반도인에 대한 차별에서 초래된 결과다.

어쨌든 이들은 출신 고보에서 교련선생과 교장선생을 통해 엄격하게 성적·신체조건·품성이 걸러진데다 본고사에서도 어려운 관문을 뚫었기 때문에 수재 중의 수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일본 육사는 일본 황실이 직접 관장하는 교육기관(복장·총검·학습도구를 포함한 모든 로고는 황실을 상징히는 국화 문장을 사용)이었지만, 생각보다 이념적 스펙트럼이 넓었다. 군사학과 군사훈련을 주로 배웠으나 철학 세계사 물리 화학 어학(독어·불어·러시아어 중 택일)도 집중적으로 배웠다. 독학으로 생소한 몽골어를 공부하는 학생도 있었으며, 학문적으로 맑스 엥겔스를 읽는 생도도 있었다.

초중등학교 시절 전체 조회와 수신시간에 외던 천황폐하 칭송문 따위는 생략되었다. 대신 깊이있는 사상 서적 탐독까지 암묵적으로 허용되었다. 일제를 위해 한 몸 바치겠다는 머리 좋은 학생들이 입교했으니 상투적인 정치적 선전선동을 주입시킬 필요가 없었으며, 대신 고급 교육커리큘럼을 통해 인생관과 세계관을 확장하라는 교육관이 있었다. 그런 교육 커리큘럼 때문인지 생도들의 인문학적 상상력은 풍부했다.

특히 조선인 생도의 경우 정체성이 명료한 가운데 민족의식이 내면화한 경우가 많았다. 일본육사 출신은 모두 친일파라는 기계적인 등식은 피상적이라는 분석도 이 때문이다. 그 단적인 예가 김재곤의 죽음이다. 조국의 해방을 갈망하고 있었음을 그의 격정적인 행동을 통해 실펴볼 수 있다. 일본 황실의 지원으로 월급까지 받아가며 학교를 다니고 있지만, 근원적으로 조국의 독립과 해방을 희구해왔던 내 안의 이중성을 지니고 있었다.

일본 육사에 입교하기 전에는 민족의식이나 애국심이 무엇인지 몰랐으나 육사를 다니면서 역설적으로 민족의식이 체화한 세계관을 가졌다. 즉 다른 차원의 민족적 정체성을 지니고 살았던 존재였던 것이다. 이는 엄격한 군율 속에서도 열린 학풍의 산물이었다.

절망에 빠져있는 육사 교정은 김재곤의 죽음 이후 조선인 생도에 대한 태도가 돌변했다. 일본인 생도들로 급조된 극단적 과격파 동구대가 조선인 생도들을 살해의 대상으로 몰아가고 있었다. 폐교와 함께 생도들이 수용소에 수용된다는 괴소문이 돌아 이들을 더욱 자극하고 있었다. 결국 조선인 생도들은 해방의 기쁨을 맛보긴커녕 또다른 위험에 노출되어 있었다.

“이 자식들, 대일본제국에 충성한 것이 아니라 그들 조국 독립만을 꿈꾸던 배신자들이었어. 그들이 적국 미국놈과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김재곤에게 모욕을 당한 듯 그들은 조선인 생도에 대해 노골적으로 적의감을 품고 다녔다. 그중 타깃은 청주고보 출신 이성유 생도였다. 8월 23일 밤 일본인 생도들이 이성유에게 위해를 가할 것이라는 첩보가 들어왔다. 비밀문서 창고를 자주 드나들었으니 제국 군대 비밀을 많이 알고 있고, 김재곤과 가깝게 지냈으니 이적행위를 할 것이라고 본 것이다.

그들은 관동대지진(대진재)과 다를 바 없는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 지진 재앙의 보복극으로 근거없는 재일 조선인을 표적 삼아 살인을 저지른 사건을 또다시 범하려 한 것이다. 1923년 9월 1일 일본 간토·시즈오카·야마나시 지방에서 일어난 대지진은 12만 가구의 집이 무너지고 45만 가구가 불탔으며, 사망자와 행방불명자가 총 40만 명에 달했다.

이로인해 혼란이 극심해지자, 일본 정부는 국민의 불만을 돌리기 위해 한국인과 사회주의자들이 폭동을 일으켰다는 괴소문을 퍼뜨렸다. 이에 격분한 일본인들이 자경단(自警團)을 조직해 경찰과 헌병들과 함께 조선인을 눈에 보이는대로 체포·구타·살해했다. 이 사건으로 적게는 2천 명, 많게는 6천 명의 조선인이 무고하게 희생되었다.

조선인 생도들은 하나같이 잘 생기고 의젓하고 대륙적 풍모를 지녔다. 품격에도 범접할 수 없는 근엄함이 있었다. 그런 것도 은연중 시기의 대상이 되었다. 그런 자들이 고국으로 돌아가면 지도자가 되어 일본에 보복할지도 모른다. 김재곤 사건으로 볼 때, 그들은 황실의 국비로 제국 군대의 정신을 익힌 것이 아니라 그들 조국의 해방과 독립을 희구하고 있었지 않았는가. 동구대는 그런 논리를 만들어 적의를 품고 있었다.

“이성유 그 자가 공부한다면서 군사기밀을 빼내 적과 내통하려고 했던 거야! 배신자는 어떤 대가를 치러야 하는지를 분명히 가르쳐줘야 돼.”

유언비어와 흑색선전은 격동의 혼란기일수록 기승을 부린다. 그리고 극단적인 상황에서는 언제나 강경파가 상황을 주도해나간다. 그것이라야 내용의 진위 여부를 살필 것도 없이 조직을 결속시키는 힘이 있다. 예상대로 “없애버리자!” 라는 방침이 정해졌고, 디데이는 8월 23일 밤이었다. 패전의 분풀이를 어떤 식으로든 분출하고 싶은 그들에게는 이렇게 폭발의 출구를 향해 한걸음 한걸음 다가서고 있었다.

밤이 깊어가자 2학년 동기생 오카다가 이성유를 찾았다. 오카다는 그가 정말 배신자인가를 알고 싶었다. 동구대원들이 배신자가 확실하다고 방방 뜨니까 그는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 그는 이성유를 불러내 연병장 귀퉁이로 이끌었다.

“너 나 믿나?”

이성유는 오카다의 갑작스런 질문이 의아했지만 스스럼없이 대답했다.

“새삼스럽게 왜?”

이성유는 오카다의 고향도 함께 여행한 사이였다. 오카다는 일본으로 귀화한 조선인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재일동포 2세였다. 그러나 그를 조선인 출신으로 아는 사람은 없었다.

“김재곤과 나눈 대화들이 반동이란 거 모르나?”
“반동? 그와 무슨 말을 나눴는데?”
“그건 니가 더 잘 알 것 아닌가.”
“고향 얘기하고, 장래 얘기하고, 부모님 얘기를 했다. 너하고 얘기한 것과 비슷하게.”
“내가 널 배신한다면?”

오카다가 엉뚱한 얘기를 했다.

“네가 날 배신할 친구인가. 네가 만일 날 배신하더라도 난 너를 배신할 수 없다. 우리의 우정은 영원하다.”
“군사 기밀을 팔아먹었다는 소문이 파다하다. 맥아더 태평양사령부 알고 있나?”
“잘 알고 있다.”
“너 지금 뭐라고 했나.”
“잘 알고 있다고 했다. 일본 함대사령부가 진주만 습격을 한 것은 맥아더에게 보복할 빌미를 제공했다. 석유보급로를 확보한다고 했지만 엄청난 오류를 범했다. 그것이 잘못됐다고 생각했다. 시간은 그들 편이었고....”
“뭐라고?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

오카다는 소문대로 이성유가 정체불명의 생도라고 생각했다.

“야마모토 이소로쿠 사령관 전사 이후 전열을 재정비했어야 했다. 전선을 확장하는 것이 아니라 추슬러서 선택과 집중을 했어야 했다. 공격 대 공격, 확전 대 확전만 거듭하다 수습도 못하고 역공을 자초했다. 역습은 역공을 가져온다. 난 군사(軍史)와 전술, 그런 쪽에 관심이 많다. 전쟁은 벌여놓은 것보다 수습이 더 중요하지. 지나치면 부족함만 못하다. 거친 탐욕이 패인을 불러온다.”
“그럴싸한 말이다.”

오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근래 그가 생각하는 것과 비슷했다. 이성유는 의문의 여지없이 진지한 학구파였을 뿐, 이적행위를 한 친구는 아니라고 판단되었다.

“가능하다면 빨리 이곳을 떠나라. 분위기가 살벌하다. 폐교가 결정됐잖나?”

전승국은 패전의 상징으로 사관학교부터 폐교한다고 포고했다. 그래서 더욱 비탄과 자조와 절망의 절규가 들끓었다. 이런 때 누군가 희생양이 요구되는 것이다.

“고맙다. 하지만 나 홀로 피할 수 없다. 내가 탈출하면 다른 동포 생도들이 위험하다. 난 동포생도들과 생사를 함께 할 거다. 비록 내가 잘못된다 해도... 그리고 너와의 우정은 평생을 지고 가겠다. 잊지 않을 것이다.”
“네 생각이 그렇다면 알았다.”

그들은 굳게 악수를 나누고 어둠 속에서 헤어졌다.

2학년 생도 장지성은 사토 구대장이 찾는다는 전갈을 받았다. 뒤숭숭하게 나날을 보내던 그도 올 것이 왔구나 하는 긴장감이 엄습해왔다. 조국이 해방과 독립이 되었다고는 하지만 인신(人身)은 구속되어 있는 상태다. 자유의 몸은 커녕 또다른 위협 속에 노출돼있는 것이다. 그는 마음속으로 각오를 다지며 구대장실을 찾았다. 사토 구대장 앞에 서자 사토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돌아가겠느냐, 남겠느냐.”

고국으로 돌아가겠느냐, 아니면 일본에 남겠느냐는 질문이다.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 장지성은 잠시 망설였다. 장교단이 오히려 더 거칠고 강경하다. 말 한마디가 목숨과 바꾸는 긴박한 순간이었다. 그를 해치기 위한 질문이라면 피하기 위해서라도 그들이 원하는 답을 내놓아야 했다. 하지만 어느것이 정답이 될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장지성은 정직하게 짧게 대답했다.

“돌아가겠습니다.”
“돌아간다고?” 사토가 더 상을 찌푸렸다. “정말로 돌아간다고? 네가 일본에 남는다면 대학을 보내주고, 취업을 원한다면 취직시켜 줄 수 있다. 학교 방침이 그렇다. 학교에서 그렇게 결정했다. 어떤가?”
“아닙니다. 돌아가야 합니다.”
“돌아가서 뭘 할 건가.”
“신생 조국에서 우리 군대를 만들어야 합니다.”
“보복하기 위해서인가? 일본이 적국이 될텐데?”
“내 나라를 지켜야 합니다.”

한참동안 침묵을 지키고 있던 그가 갑자기 허리에 찬 군도를 뽑아들었다. 60cm 정도 되는 긴 칼이다. 그는 칼날에 손을 대더니 위에서 아래로 천천히 훑어 내려갔다. 장지성은 순간 현기증이 났지만 애써 태연한 표정을 지었다. 사토가 칼을 좌우로 가볍게 흔들어보였다. 휘두를 때마다 칼날이 번쩍거렸다. 만감이 교차하는 듯 그의 표정이 복잡해졌다.

일본 무인은 전통적으로 예측이 불가능하다. 사무라이 정신 그대로 그들이 믿는다고 하면 그대로 결행하는 기질이 있었다.

사토는 한동안 침묵하다가 칼을 칼집에 집어넣고는 테이블로 가서 서랍을 뒤졌다. 권총을 꺼내 이리저리 바라보더니 갑자기 장지성을 향해 총구를 겨눴다. 장지성은 일순 숨이 멎어버리는 것 같았다. 그러나 잠시후 의외로 담담해졌다. 극단적인 상황에 이르면 도리어 의연해지는 것이다. 사토가 천천히 말했다.

“이것은 내가 소위 임관 때 장만한 것이다.”

그는 권총을 장지성에게 내밀었다. 장지성은 무슨 뜻인지 몰라 한동안 멈칫거렸다.

“이건 너의 것이다.”

팽팽한 긴장감이 허물어지자 장지성은 머릿속이 하얗게 새버린 느낌이었다.

“사나이로서 자기 조국을 지키겠다는 것은 옳다. 너는 너의 조국으로 돌아가는 거다. 그것은 정당하다. 너는 괜찮은 생도다. 다른 놈은 위기를 벗어나고자 얼버무리는데 너는 사나이다. 그런 네가 내 생도답다. 나는 네가 일본에 남아 혼도 없이 살아갈 것이 두려웠다.”

사토가 장지성에게 다가와 칼을 손에 쥐어주었다. 칼집도 풀어서 건넸다.

“패전국인 나는 무기를 소지할 수 없다. 무장해제가 되었다. 그래서 네가 내 대신 맡는 거다. 지금 사회가 불안하고 민심이 흉흉한데 신변을 보호하라. 일본은 지금 전국적으로 패닉상태에 빠졌고, 극도의 카오스 사회가 되었다. 자살자가 속출하고 조선인·중국인·대만인에 대한 폭력이 도처에서 감행되고 있다. 무사히 일본을 빠져나가야 한다. 지금 목숨을 잃으면 개죽음이다. 내가 너를 위해 해줄 수 있는 것은 이것밖에 없다.”

그는 권총집과 권총도 내주었다. 장지성은 선 자리에서 소리내어 울었다. 사토 구대장은 한동안 그를 지켜보다가 그의 등을 가볍게 토닥거리며 말했다.

“조선인 생도들이 무사히 돌아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 그러기 전에 스스로 지켜야 한다. 일본은 걷잡을 수 없는 패닉 상태다.”

장지성은 숙소로 돌아와 권총과 군도를 침낭 속 깊숙이 숨겼다. 룸메이트는 잠들어 있었지만 그는 밤 깊도록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절대적 위기에 우정은 꽃핀다고 했던가. 일본 무관의 배려는 그의 가슴 속 깊이 진한 감동으로 남았다. 국가나 사회는 몰이성적으로 광분해있는데, 개인은 이런 사람도 있다. 일본의 패망과 조국의 미래, 사토 구대장과 일본인 생도들, 그리고 조선인 생도들을 생각했다. 동구대의 극단주의자들 얼굴도 떠올랐다. 따지자면 그들은 호전적인 장교단에 놀아난 것이지만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 때문에 더욱 이성이 마비된 광란에 빠져있었다.

밖에서 똑똑똑 노크 소리가 났다. 뒤이어 장지성, 장지성 하고 낮은 목소리로 부르는 소리가 이어졌다. 그는 침낭에서 권총을 꺼내 옆구리에 찔러넣었다. 방문을 열자 동기생 이성유가 문앞에 서있었다.

“잠깐 나가자.”

그는 어둠침침한 복도 끝으로 장지량을 이끌더니 말했다.

“잘 됐다.”
“뭐가 말인가.”
“오카다가 나를 구출했다. 오카다는 동구대 멤버잖나. 오카다가 나를 만나고 가서 그들을 설득한 모양이다. 오해에서 풀려났다.”
“오카다가 널 변호했다니 다행이다. 그래도 안심이 안된다. 이곳을 빠져나갈 때까지는...”
“알아.”
“뭐라고 말했다든?”
“응, ‘이성유는 내가 잘 안다. 학구파 청년이다. 해칠 만한 친구가 아니다. 기밀문서를 탐독했던 것은 학구열 때문이고, 자신이 이성유를 만나 경위를 알아보았는데 변함없이 순수한 청년이다. 그런 그를 해치겠다는 것은 우리 뜻을 잘못 전파하는 것이다’ 라고 말했다는 거지.”
“그렇지. 무턱대고 분풀이하면 끝이 없지. 그들 후사도 좋지 못하고 말이야.”
“그런데 내 대신 오민균을 타격하자는 모의를 했다는 거야.”
“1학년 생도 오민균?”

장지성이 놀라서 물었다. 오민균은 일본인 생도들에게 콤플렉스를 자극하는 인물이었고, 부정의 눈으로 보면 위험인물이었다. 정의감이 있고, 사리분별이 분명한 생도다. 그리고 무엇보다 잘 생기고 늠름하고 생도로서의 기개와 품위를 잃지 않은 청년이다. 그는 전승국의 일원이 되어 고국으로 돌아가면 만행을 저지른 일본에 대해 보복할지도 모른다고 일본애들은 벌써부터 우려하고 있었다. 그는 늘 일본의 폭력성을 비판하지 않았던가. 그래서 보복할 수 있다. 과격파들은 스로 설정한 도그마에 빠져서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오민균을 만나러 가자.”

1학년 생도반은 연병장 끝머리에 있었다. 오민균도 자신이 테러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제까짓 새끼들 한 주먹감도 아니니까요.”
“넌 너무 용감해서 탈이다.”
“제2의 장제스, 노백린, 이갑, 김일성으로 몰아가고 있다.”

이성유가 걱정했다. 장제스가 일본 육사를 마치고 고국으로 돌아가 항일전선을 편 것을 일본인 생도들은 배신자라고 비난했다. 제26기 김광서도 그랬다. 일본군을 탈출해 김일성이란 가명으로 만주벌판에서 신출귀몰하며 일본군을 타격한 영웅으로, 그들에게는 대일본제국의 반역자였던 것이다. 노백린 이갑 지청천도 마찬가지다. 오민균도 그중 일원이 될 것이라고 판단하고 있었다.

독일의 예에서처럼 육사 생도는 모두 사살된다는 풍문이 유포되자 교정은 갈수록 분위기가 흉흉해졌다. 절망감을 못이기고 스스로 할복해 목숨을 끊은 생도도 나왔다.

“나는 도쿄를 벗어나 센자키현에서 소형 선박을 마련해서 탈주할 계획을 세우고 있습니다.”

오민균이 의외의 말을 했다.

“탈주계획이라고?”
“그렇습니다.”

오민균은 며칠 전 자신을 따르는 일본인 동급 생도에게 제의했다. 동급 생도는 부친이 센자키 현에서 배를 여러척 가지고 있는 어선단의 주인이었다.

“가능할까. 난 도요카 읍내에 있는 유우키씨 집에 집결해 귀국할 계획을 세우고 있는데....”

장지성은 장씨 성을 가진 유우키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장지성의 먼 일가뻘 되는 재일동포였다. 아버지가 힘들면 찾아보라는 사람이었다. 그는 유우키의 집으로 가서 준비를 한 다음 니가타에서 폐선박을 구입해 해안을 타고 아래로 내려와 현해탄을 건너 부산항에 입항한다는 계획을 세워놓고 있었다. 험한 파도를 건너야 했지만, 대신 육지와 가까운 코스를 택하는 것이 최상의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계획을 세웠으면 빨리 떠나자.”

그러나 모든 길은 차단돼있고, 민심은 흉악해지고 있었다. 그는 도쿄 시내 이시하라 상을 생각했다. 이시하라 상은 사찰계 경찰로부터 감시받아온 인물이었다. 하지만 지금 세상이 바뀌었으니 감시망이 사라졌을 수 있다. 어쩌면 이제 그의 세상이 올지도 모른다. 일본 패전이 그에게는 더 안전할지 모르고, 그래서 그가 그들의 신변을 보호해줄 적임자일 수도 있었다. 이시하라 상은 일본 군국주의를 반대하면서, 그 대안으로 아나키즘 사회를 꿈꿔온 사람이었다.

“이시하라 선생 계속 만나나?”

장지성이 물었다.

“공습이 심해서 요즘 댁을 찾지 못했습니다.”

오민균은 주말 외출 시 늘 이시하라 선생을 찾았다. 지적 욕구를 충족하는 데 부족함이 없었고, 그것은 그의 이상과 합치되는 부분이 많았다.

“모임 장소는 두 곳 중 하나다. 유우키씨 댁과 이시하라 선생 댁...”

센자키 방향은 일단 접기로 했다. 그들은 각자 숙소로 돌아갔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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