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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혹한 일제시기와 해방공간의 모순은 현재진행형"

[팩션] 실록소설 '행군-어느 민족주의자를 위한 변명' 재수록에 부쳐

작가의 말: 실록소설 '행군-어느 민족주의자를 위한 변명' 재수록에 부쳐

한일 관계가 어느때보다 긴장관계에 있다. 일본과의 관계가 언제건 매끄러웠던 시기가 있었을까만, 근자에 들어 그 강도가 '국교단절론'까지 거론되고 있는 상황이다. 구한말과 일제강점기 35년, 8.15 광복과 분단체제, 그 이후 70년의 강고한 구 체제 시스템 속에서 일본이 우리 내부 깊숙이 침투해 들어와 알게 모르게 생활의 일부가 되었다. 그런 과정에서 일본은 우리 정치ᐧ경제ᐧ사회ᐧ산업 전반의 지배체제, 즉 기득권 체제를 유지한 기둥이 되었다. 그 안에 우리 내부의 모순과 고뇌가 응축되어 있다.

그런데 망각의 강을 건너다 보니 그들이 저질렀던 과거를 잊은 것 같다. 더러는 그 시절이 그립고, 우리의 미래를 열어주었다는 칭송론까지 등장하고 있다. 교과서적인 진단으로, 일제강점기 우리는 그들로부터 온갖 수탈과 고난을 겪었다. 항일투사 체포와 처형, 강제징용, 일본군 위안부 등 헤아릴 수 없는 고통을 안겼다. 근자에는 독도 영유권 주장도 아무렇지 않게 내뱉는다. 독도가 대한민국의 고유 영토라는 고문서만 해도 150종이 넘는데, 일본 교과서에 독도가 일본 고유의 영토라고 우겨대는 지경이다. 혈맹이라는 미국은 분쟁지역으로 묶어두려는 관망 자세를 보이고 있다.

일본의 만행에 대해 좀더 세밀하게 살펴보자. 일본군 위안부는 프랑스군의 BMC(Bordel militaire de campagne:프랑스 야전 종군 매음굴)를 본뜬 군 공창(公娼)이라고 우기는 일본 극우론자와 국내 극우론자가 있다. 그러나 열다섯 살 먹은 소녀가 몸 팔러 군위안소에 취업했다는 기록이 이 세상 어디에 있는가. 수십 만명의 일본군 위안부 중에 그런 여성이 몇몇 있을 수 있다. 그런 특별한 몇 명을 가지고 일반화시키는 역사 모독을 그들은 아무렇지 않게 자행하고 있다. 프랑스 위안부는 자발성이라도 있겠지만, 조선의 일본군 위안부는 꾐에 빠졌을망정 자발적으로 간 소녀는 단 한 명도 없다. 그런데도 이런 궤변이 나온다.

일본과 대한민국의 어느 학자는 1937년-1945년 시기 쌀 수탈을 대대적으로 감행한 현실도 조선으로부터 '수입'했다고 역설한다. 아사자가 늘고, 근근히 초근목피하던 시절 조선 반도에 쌀이 남아돌아서 수출한다? 데라우치 총독이 쌀 수탈을 제대로 하지 못해 쫓겨난 이후 대대적인 수탈이 자행된 것이 역사적 사실이 아닌가. 일제의 조선반도 지배정책이 기본적으로 남농북공(南農北工)이었고, 농업을 삼남지방에, 공업을 북한 지역에 두고 빨대를 들이댔다. 이중 평야지대가 많은 호남지역이 주 수탈대상지역이 되었다(식량 자급이 조금이나마 해소된 것이 그로부터 30여 년이 지난 1970년대 중반 통일벼가 대대적으로 재배되던 때의 일이다).

3.1운동 이후 일제는 무단통치에서 문화통치로 전환했다. 일본의 직업관료 집단이 침략적인 해외 식민지 침탈에 대한 군부를 견제하기 위해 또다른 지배정책을 편 것인데, 근본적으로는 더 악랄했다. 식민지 백성끼리 이간질하도록 분열시키고, 지식인 사회를 변절로 분탕질한 추악한 식민통치정책을 폈다. 대동아전쟁이 격화하면서는 더 야만적인 식량공출과 착취, 강제 징용과 어린 소녀들을 잡아다가 젊은 군인들의 병영에 집어넣었다.

그러나 더 큰 죄악은 일본이 물러가면서 분단국가라는 가장 잔혹한 범죄를 남기고 떠났다는 사실이다. 조선총독부는 미 태평양사령부와의 패전 관리 협상에서 남북 분단의 모든 단초를 제공했다. 그것을 우리의 지도자들이 모르고, 반목과 대결로 통일기반을 무화(無化)시키고 말았다. 이런 뼈아픈 역사 과정을 우리 후세들은 너무도 모른다.

요즘 일본에 비판적이면 국가주의자, 국수주의자로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으로 치부된다. 특히 젊은 세대에게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그들은 또 알게 모르게 좌파주의자로 규정된다. 민족주의란 애초에 보수의 가치인데 한국에선 이상하게 왜곡되어 '진보의 아이콘'처럼 인식되고 있다. 이런 황당한 논리는 일본 등 외세를 바라보는 시선 때문이다. 우리의 이른바 보수 기득권자들은 일제 시기는 물론 해방관리 시기에 나라의 주류로 우뚝 서 권력ᐧ자본ᐧ정보ᐧ인사권을 독점, 배분해왔고, 그것이 지난 70년 체제를 뒷받침한 기둥이 되었다. 여기에서 이익을 본 세력들이 역사를 희화화하거나 굴절시키고 있다.

분단 구조는 해방 공간에서 조선총독부와 미국 태평양사령부의 장난에서 나온 씻을 수 없는 죄악이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까지 불행히도 현재진행형이다. 남북이 분단되고, 서로 피흘려 대결하는 사이 자국의 이익을 도모하겠다는 것이 일본의 책략이고, 분쟁지역으로 남겨두겠다는 것이 미국의 동아시아 패권정책이다.

그런데 일본의 아베 정권의 '경제침탈' 이후 잠자던 우리의 민족의식이 일깨워지고 있다. 역설적이게도 일본의 극우정권이 우리의 잊었던 과거를 소환하고, 현실과 미래를 내다보게 하고 있다. 이에 필자는 제대로 우리 현대사를 들여다보자는 욕구가 생겼다. 까맣게 잊혀진 해방공간의 역사를 되살려보자는 것이다. 돌아볼수록 안타깝고 뼈아픈 역사들이다. 우리가 제대로 역사에 충실했다면 분단의 고통과 모순을 극복하지 않았을까....

필자는 취재의 일환으로 일제강점기 말 일본 육사 출신 젊은 생도들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국방일보에 최갑석, 장지량, 채명신 장군의 이야기를 인물전기로 연재하면서 주변 인물들을 취재한 것이다. 그중 아까운 청춘들이 시대적 광기의 제물이 되었다. 일본 육사 마지막 기인 오일균 조병건 홍승화 이재일 김재곤 이성구 생도가 대표적이다.

4.3 제주 항쟁 시 제주 포로수용소장으로서 좌익으로 몰려 처형된 오일균 소령 이야기는 필자에게 어떤 부채감을 안겨주었다. 그가 1945년 2월 일본 육사 1학년에 들어가던 때는 19세의 나이다. 그리고 처형되던 때는 23세 때다. 그런 그가 세상을 알면 얼마나 알고, 공산주의 사회주의를 알면 얼마나 알았을까. 그런데 새파랗게 젊은 나이에 이념의 제물이 되었다.

오일균은 해방이 되어서 귀국한 뒤 군사영어학교를 거쳐 국방경비대 장교가 되고, 제주 4.3이 터지자 부산 5연대 대대장으로서 제주에 응원군으로 파견되어 김익렬 9연대장의 핵심 참모로사 4.3의 평화적 해결을 위해 숨은 역할을 했다. 그는 이념과 상관없는 모범적인 군인이었으나 제주 주민을 학살하는 경찰과 서북청년단의 행패를 보고 분노해 주민의 편에 섰다가 공산주의자로 몰려 처형당했다. 그의 일본 육사 동기들 또한 민족주의적 이상국가를 꿈꾸다 좌익으로 몰려 행불이 되거나 처형되었다. 일본 육사 출신 하면 모두 친일파로 규정되는데, 그런 재단이 일정 부분 허구라는 점도 내세울 수 있는 근거가 되었다.

당시 일본 육사 1,2학년 생도들은 해방이 되자 민족의 성원으로서 독립국가의 간성으로서의 역할을 다하겠다는 포부를 가졌다. 새롭게 민족의식에 눈뜬 젊은이들이었다. 전승국 미국과 패전국 일본이 야합하여 친일파 재등용 등 한반도 해방 관리를 펴나가는 것을 지켜보면서 이것은 아니다, 하고 고뇌하는데, 이것이 족쇄가 되었다. 그리고 정국은 이념투쟁과 헤게머니 쟁탈전으로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혼란상이 가중된다. 대구 10.1항쟁, 제주 4.3항쟁, 10.19 여순사건을 거치면서 이들이 한결같이 좌익으로 몰려 사라진다. 일본이 패망 후 보복을 당할까봐 가장 경계했다는 한반도가 반신불수가 되는 도구가 되어버린 것이다.

한 개인사를 통해 시대와 사회를 비추는 거울 역할을 하는 것이 문학의 영역일 것이다. 그동안 우리는 외세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생존이 우선이었던 관계로 자기 자신을 앞세우지 못했다. 독재시절을 살아오면서 평화, 분단극복, 민족이란 말을 함부로 꺼내지도 못했다. 자기를 끊임없이 부정하고 자학하면서 외세지향적인 태도를 갖는 것, 그러면서 대결적이고 호전적인 강제된 정서에 매몰되었다. 미국과 일본을 추앙하는 태도들이 세련된 세계 시민인 양 인식되었다. 일본을 주군으로 맹신하면서 구질서 아래 이익을 취하고자 하는 착각이 모범적인 삶인 양 포장되었다.

우리는 너무 쉽게 잊어버렸고 안일했다. 그러다보니 역사는 박물관에 소장된 문화재인 양 화석화되고, 현대의 역사는 더군다나 묻혔다. 이런 아픈 현실을 돌아보고자 실록소설 '행군-어느 민족주의자를 위한 변명'을 쓰게 되었다. 이 소설은 2016년 10월호부터 2019년 6월호까지 문예월간 '월간문학'에 연재되었던 소설이다. 월간문학 연재를 마친 뒤 많은 부분을 수정 보완해 프레시안에 재수록한다. 이는 대중들로부터 더많은 공감지수를 얻기 위한 일환이다.

이 연재물은 일본의 극우 정권이 일제강점기의 역사적 사실들까지도 왜곡하는 역사 모독에 대해 하나의 담론시장을 형성하자는 데 목적이 있다. 기자적 현장성과 작가적 상상력, 증언과 기록을 중심으로 엮은 해방 공간의 스토리 텔링인데, 표현 양식은 논픽션 형식을 빌었다. 인물들이 20대 초반 일찍 사라진 관계로 자료가 절대 부족해 캐릭터들을 충분히 살리지 못한 아쉬움이 있다.

이들에 대한 군 기록물도 거의 없다. 갓 20대 연령대라는 한계도 있지만, 의도적으로 자료를 파기한 흔적도 보인다. 인용 자료 중 부분적으로 출처가 밝혀지지 않은 부분도 있을 것이다. 출처를 찾지 못했거나 작가가 녹여서 쓴 것은 굳이 밝히지 않았는데, 이 점 널리 양해를 구하는 바이다. 연재 과정에서 계속 수정 보완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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