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안 주민과 정부 사이의 협상이 사실상 결렬된 가운데 부안 사태는 일촉즉발의 위기로 치닫고 있다. 대책위는 18일 대화 결렬을 공식적으로 선언하고, 19일 부안군민 총파업과 대규모 궐기대회를 열 예정이다.
가장 걱정되는 상황은 또 한번 정부에게 배신당했다는 부안 주민들의 분노를 대책위 등 지도부가 통제하는 것이 힘든 데 있다. 이미 17일 부안 주민 1천여명이 정부의 대화 거부에 항의하면서 경찰과 대치해 경찰과 주민 60여명이 다치는 불상사가 발생했다. 이 자리에서 주민들은 가스통에 불을 붙이고, 화염병과 농기구를 준비해 경찰과 대치했다. 사태가 겉잡을 수 없이 흘러가고 있다.
정부의 대화의지를 믿고, 정부와 합의문에 서명했던 부안 성당의 문규현 신부가 노무현 대통령과 고건 총리에게 다시 편지를 보내왔다. 이 편지는 지난 12일 써둔 것이나 정부의 대화의지를 믿고 미뤄두었다 17일 사태를 접하고 프레시안을 통해 공개하는, 사실상 마지막 편지다.
문 신부는 노무현 대통령과 고건 총리에게 "정부가 대화기구를 오로지 시간 끌기와 군민 분열정책, 변명과 책임 전가, 위도 핵폐기장 강행을 위한 명분 축적의 관점에서만 관철하려 하고 있다"면서 "정부를 잠시라도 믿었던 것이 주민들에게 부끄럽기만 하다"고 노 대통령과 고건 총리에 대한 배반감을 토로했다.
문 신부는 "민심(民心)은 천심(天心)"이라면서 "힘없는 사람들의 막다른 호소와 절망을 방치하고 외면한다면 농민, 노동자들의 연이은 죽음과 마찬가지 사태가 부안에서도 벌어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문 신부는 "부안 주민들이 원하는 것은 단 하나, 평화로운 일상으로 돌아가는 것"이라며 "부안 주민의 입장에서, 국민의 입장에서 평화로운 미래로 이끌어 줄 것"을 다시 한번 호소했다.
문 신부는 정부와 대화결렬에 대한 책임을 지고, 무기한 단식 농성에 들어간다. 문 신부가 편지에서 당부한대로, 노무현 대통령과 고건 총리가 '평화의 지혜'를 발휘할 시점이다.
다음은 문규현 신부의 편지 전문.
***노무현 대통령님, 고건 총리님**
주권재민(主權在民)이요, 민심(民心)은 천심(天心)입니다.
새 시대를 여는 지도자이길 원하신다면 부디 그에 맞는 길을 가십시오. 언제까지 이렇게 힘없는 사람들의 막다른 호소와 절망을 그저 방치하고 외면하는 정책을 고수할 것입니까? 가진 것 없고 기댈 곳 없는 이들에게 이 정부의 통치는 어찌 이다지도 차갑고 억압적이란 말입니까. 농민 이경해님과 여러 노동자들의 연이은 죽음, 그들이 겪은 암울함과 고통을, 밑바닥 절망의 늪 속에서도 한 가닥 희망이라도 건져볼까 마지막까지 몸부림을 친 그들의 절규가 무엇인지를 아십니까? 그들이 사랑하는 가족들 두고 제 생목숨 제 손으로 끊어가며 세상에 남기고, 대통령님과 총리님께 드리고자 했던 유언이 과연 무엇인 줄 아십니까?
이제 그런 비극이 이곳 부안에서도 벌어지려 하고 있습니다. 대통령님과 총리님은 지금이라도 부안 군민의 분노를 바로 보시길 바랍니다. 지난 11월 8일, 경찰은 또다시 군민을 향해 무자비한 폭력을 휘둘렀고 또다시 많은 군민이 중상을 입고 병원으로 실려갔습니다. 지금 군민의 분노는 '민란'으로 폭발하기 직전입니다. 또한 정부는 대화 진행을 위해 대책위와 약속한 바를 하나도 지키지 않고 있습니다. 그 무엇에서도 정부의 진실성도 성실성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 같은 정부의 방침은 공동 협의회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대책위와의 대화기구를 오로지 시간 끌기와 군민 분열정책, 변명과 책임 전가, 위도 핵폐기장 강행을 위한 명분 축적의 관점에서만 관철하려 하고 있습니다. 경찰의 폭력과 정부 문건대로 강행되고 있는 이 야만적인 현실 앞에서 이 정부에 대해 우리가 무엇을 생각할 수 있을까요?
노무현 대통령님, 고건 총리님
핵폐기장 유치를 반대하는 부안군민의 의지는 단순히 핵폐기장의 안전성과 핵에 대한 이해가 없는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여기는 그런 단순한 판단은, 이미 17년 전 굴업도와 안면도의 교훈을 통해 접었어야 합니다. 그때로부터 단 한 가지 교훈도 배우지 못하고 미래 비전도 세우지 못한 채, 똑같은 방식으로 비민주적이고 부도덕하며 폭력적 태도를 답습하고 있는 관료들과 이 정부의 통치 행태가 참으로 안타깝고 슬플 따름입니다.
아시겠지만 저와 대책위는 부안군민의 정부와 대화 자체에 대한 극도의 불신도 뒤로 하고, 정부와의 기본적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 대화기구 구성에 합의했습니다. 정부에게도 적당한 명분과 기회를 주고, 부안군민 또한 더 이상 고통받고 희생당하지 않기를 바라는 절박한 마음에서였습니다. 경찰의 강경진압으로 인해 군민 200여명이 병원 치료를 받아야 했습니다. 또 구속자만 16명에 불구속자 53명, 수배자 7명이라는 이 엄청난 현실에 정부의 그 누구 하나 책임지는 사람도, 사과하는 사람도, 위로하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걸 기대하지도 않았지만, 그 모든 억울함과 상처도 접고 우리는 정부와의 대화에 나섰습니다. 잘못 낀 단추를 하나하나 풀어 원점부터 다시 시작하자는 것이었고, 우리가 원하는 건 그 무슨 보상도 지원도 아니라 그저 다시 평화로운 일상으로 돌아가는 것이었습니다.
정부와의 대화를 시작하면서 저는 고건 총리님에게 저의 진정을 담아 편지를 보냈습니다. 부안군민의 염원에 진지하게 귀를 기울여줄 것과 대화기구를 핵폐기장 강행을 위한 명분 쌓기 용으로 절대 이용하지 말아줄 것을 청했습니다. 부안군민의 분노가 더 이상 걷잡을 수 없는 상황으로 치닫지 않도록 서로 노력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이 과정을 통해 진심으로 정부가 부안군민과 수많은 국민의 신뢰를 다시 회복하게 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랬습니다. 그러나 그런 기대와 희망은 얼마나 어리석고 부질없는 것이었습니까?
노무현 대통령님, 고건 총리님
부안군민의 촛불집회가 1백10일을 넘어가고 있습니다. 부안군민들은 아름다운 고향 땅을 지키고 후손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겠다고 말합니다. 태풍 매미가 뿌려대는 폭우와 강풍 속에서도, 추석 명절에도 촛불을 놓지 않았던 군민들은 이제, 이 추운 날 비가와도 촛불집회장을 지키고, 한 겨울 눈보라가 몰아쳐도 핵폐기장 유치가 백지화되는 그 날까지 결코 자리를 뜨지 않을 것이라 말합니다. 100일 째 촛불집회에 참석한 위도 주민들은 내내 눈물을 흘렸고, 지금 위도에선 백지화를 위한 단식에 들어간 이도 있습니다. 시간이 흐르고 회유하고 매수한다 해서 이 애절함이, 이 눈물의 의미가 흐려지리라 믿습니까? 설사 그리해서 정부가 원하는 대로 된다 한들, 한 지역 공동체를 낱낱이 파괴하고 얻는 그 핵폐기장의 의미는 대체 무엇이란 말입니까?
저는 부안군민에게 정부와의 대화를 믿어보자고 설득하고 정부와의 합의문에 서명한 당사자입니다. 그러나 정부의 태도에 그 어떤 진실함도 신뢰할만한 면도 전혀 없음을 확인하고 또 확인한 지금, 경찰의 폭력에 다치고 실려 가는 군민만 늘어가는 지금, 저는 부안 군민에게 무어라 말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군민의 분노와 피눈물을 어떻게 위로하고 달래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저와 대책위에 대한 군민들의 인내와 신뢰에 어떻게 책임을 져야 할지 참으로 죄스러울 따름입니다.
노무현 대통령님, 고건 총리님
절대로 잊지 마십시오. 주권재민(主權在民)이요, 민심(民心)은 천심(天心)입니다.
이것을 잊은 어떤 정책도 성공할 수 없고, 어떤 정권도 안정될 수 없습니다. 부안은 철저하게 잘못된 정책의 희생자입니다. 따라서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거짓과 술수, 폭력을 앞세워 책임을 모면해 온 자들에게 반드시 응분의 책임을 물어주시길 바랍니다. 또한 위도 핵폐기장을 백지화시키고, 핵 발전에만 의지하는 에너지 정책도 미래 지향적으로 변화시켜 줄 것을 촉구합니다. 하늘이 주는 무한한 선물, 태양도 일하고 바람도 물도 일하게 하는 그런 평화로운 미래로 우리 국민을 이끌어 주길 바랍니다.
백성을 살리기 위해 죽음의 길을 마다 않으신 스승 예수님을 생각합니다. 부안 군민에게 더 이상의 희생과 고통이 있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며, 이제 할 수 있다면 그 무거운 십자가를 제가 지려 합니다. 또 정부와의 대화에 합의하고 서명한 당사자로서의 책임을 다하고자, 끝 날을 알 수 없는 단식에 들어갑니다. 이것이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이요, 마지막 기도의 여정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길에서 또한, 대통령님과 총리님께도 지혜와 평화가 있으시길 기도하겠습니다.
2003년 11월 12일
전북 부안군 부안읍 서외리 부안성당 주임 문규현 신부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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