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식시장과 외환시장이 난리다. 지난 6일 코스피 지수는 1900선을 턱걸이로 지켰다. "2500 가즈아!"를 호기롭게 외쳤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이제는 까마득한 과거의 추억이 되어버린 느낌이다. 코스닥 시장 역시 끝 모를 바닥으로 추락하는 것처럼 보인다. 당국의 구두개입으로 잠잠해졌지만, 환율 역시 심리적 저지선인 달러당 1200원을 돌파했다.
주가가 떨어지면 경제학자들이 바빠진다. 칼라일(T. Carlyle)이 말했듯 '우울한 학문'의 음산한 메시지들이 연일 경제학자들의 입에서, 또는 경제학을 배운 애널리스트의 글에서 터져 나온다. 그러나 이 음산한 메시지는 가려서 들어야 하고, 또 이 메시지 목록에 들어 있지 않은 함의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아래에서는 그런 일을 한번 해보기로 한다.
증시 폭락은 한일갈등 탓이 아니다
첫째, 어제의 증시 폭락은 일본과는 직접적 상관이 없다. 일본 문제는 최근 충분히 논의되었으므로 별도의 상황이 발생하지 않는 한 이미 주가에 거의 다 반영되었다고 봐야 한다. 어제는 예견되지 않은 대형 악재가 원인이었다. 바로 미국이 중국을 환율 조작국으로 지정했다는 뉴스다. 미중 무역분쟁이야 한일 간의 경제분쟁처럼 이미 충분히 분석된 이슈다. 그러나 이제까지는 주로 관세부과를 통한 압박과 이에 상응하는 대응 보복의 경제적 효과와 향후 전망이 분석의 단골 메뉴였다. 그런데 최근 중국이 1달러당 7위안이라는 심리적 저지선의 붕괴를 용인하고 이에 대응해 미국이 중국을 환율조작국으로 지정하면서 새로운 상황이 전개된 것이다.
무역분쟁과 환율분쟁은 그 파급의 민감도가 다르다. 무역분쟁은 물량을 통제하는 것이라서 운송이나 재고 등의 완충효과가 사라져야 직접적인 주름살이 느껴진다. 이에 비해 환율분쟁은 즉각적으로 연관된 모든 가격 변수에 영향을 미친다. 어제 증시는 주로 이런 이유 때문에 출렁였다고 봐야 한다.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유럽 등 세계 각국의 증시가 공통적으로 1~2% 정도 주저앉은 것도 이번 증시 폭락이 한일 무역분쟁 때문이 아님을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반도체 산업은 어떻게 흘러갈까
둘째, 한일 무역분쟁에 주로 영향을 받는 것으로 보도된 반도체 산업의 경우 그 빛과 그림자를 잘 구분해서 봐야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수요와 공급의 구분, 핵심 생산요소와 일반적 생산요소의 구분 등이다. 작년 상반기 반도체 산업은 천지창조 이래 최대의 호황을 누렸다. 재작년 내내 광풍처럼 휘몰아쳤던 가상화폐 투자 열풍이 채굴 활성화로 이어지면서 각종 메모리 반도체와 CPU에 대한 수요가 급증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상화폐 열풍은 작년 들어 시들해졌고, 반도체는 오히려 공급 과잉 상태에 빠졌다. 수요 부족은 시장가격 하락과 반도체 사업자의 이윤하락으로 이어졌다.
이에 비해 이번에 발생한 일본의 핵심 생산요소 통제는 공급부족을 야기하는 원인이다. 생산비용이 상승하거나 생산물량이 직접적으로 제약받기 때문이다. 공급부족은 수요부족과는 약간 다른 결과를 초래한다. 거래물량이 줄어드는 것은 공통적이지만, 반도체 가격은 오히려 상승할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반도체 업체의 총매출은 가격상승 효과와 물량감소 효과 중 어느 쪽이 더 압도적 영향을 미치는가에 따라 달라진다. 특히 향후 심각한 물량부족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예상이 반도체 완제품에 대한 가수요로 이어질 경우 이는 단기적으로 시장의 공급과잉을 해소하고, 반도체 회사의 경영실적 역시 단기적으로나마 호전시킬 수도 있다.
여기서 한가지 유의할 점은 반도체 완제품을 공급하는 삼성전자나 하이닉스의 상황과 이들에게 중간재를 납품하는 하청업체들의 상황은 다를 수 있다는 점이다. 수요부족이건 공급부족이건 공통적으로 반도체의 거래물량을 축소시킨다. 이에 따라 중간재를 납품하는 하청업체와 그곳에 근무하는 노동자들의 상황은 거의 확실히 악화될 것이다. 극단적인 가수요 증가가 시장의 공급물량을 획기적으로 늘리지 않는 한, 이들의 어려움은 불을 보듯 뻔하다.
대기업 중심의 대책에서 벗어날 때
마지막으로 위의 결론은 정부의 대응이 어디에 집중되어야 하는가를 잘 보여준다. 바로 하청업체와 그곳에 근무하는 노동자들이다. 이들은 미중 무역분쟁에 따르는 불확실성의 부정적 효과와 한일 무역분쟁에 따르는 생산물량 축소 효과를 모두 여과 없이 물려받는 계층이다. 따라서 정부의 단기대책은 이들의 어려움을 해소해주는 데 집중되어야 한다.
그러나 정부가 8월 5일 발표한 '소재·부품·장비 경쟁력 강화 대책'에는 이런 점에 대한 근본적인 인식이 존재하지 않는다. 대·중·소기업의 상생협력을 지원한다고는 하지만 실제 중소 하청업체에 대한 정책적 지원이나 노동자들에 대한 지원은 엿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왜 꼭 그래야만 하는지' 이유를 알 수 없는 '계열사 간 내부거래에 대한 규제 완화' 등이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하고 있다.
정부의 대책을 관류하는 발상의 기저에 소재·부품·장비의 경쟁력 강화는 '대기업이 하는 것'이라는 인식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대기업에 대해서는 각종 세제 혜택, 금융 지원을 몰아주고 규제를 완화해주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발상으로 과연 우리나라의 산업구조가 정상화될 수 있을까? 정말 일본에서 핵심 부품이나 원료를 공급하는 회사들이 하나같이 대기업이란 말인가? 오히려 이런 정책이 우리나라에서 정상적인 중간재 공급구조 정착을 멀어지게 하는 것은 아닌가? 오히려 단기적으로는 하청업체와 그 노동자들의 어려움을 돌보고, 장기적으로 이들이 경쟁력 있는 소재·부품·장비의 공급자로 성장하도록 지원해주는 정책이 필요한 것 아닐까?
여권은 이번 한일 무역분쟁을 정치적 호재로 생각하는 것 같다. 모처럼 애국심이 고취되고 국가의 존망에 대한 위기감이 커지면서 '전쟁 중에 장수를 갈지 않듯이' 내년 총선에서 여권을 선택하리라는 기대감 때문이다. 국정농단에 연루되었던 여러 재벌들도 이번 한일 무역분쟁을 자신들의 곤궁한 처지를 타개할 호재로 생각하는 것 같다. '나라가 이처럼 어려운데' 어찌 자신들을 핍박할 수 있겠는가라는 기대감 때문이다. 그러나 정작 이번 두 가지 무역분쟁의 직접적 피해자들은 이 사태를 절대 호재로 생각하지 않는다. 문제는 누가 이들의 처지를 돌봐줄 것인가이다. 그게 잘 안 보인다. 그래서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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