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 매미가 한반도 전역을 강타해 1백여명이 넘는 인명 피해가 발생하고, 재산 피해만 수조원이 넘는 것이 예상돼 전국민이 가슴 아픈 한 주를 시작한 15일 오전, 태풍 매미로 도시 전역이 초토화되다시피 한 부산역 광장에서 도저히 믿기지 않는 일이 벌어졌다.
난데없는 풍악소리가 울리고 고삿상이 차려지는 등 어이없는 '관료들만의 잔치'가 벌어진 것이다.
사연인즉 철도청이 개최한 '고속철도 성공 개통 기원 국토종단 마라톤 이어달리기 대회'의 시작을 알리는 팡파레였다.
***철도청 등, 부산·경남 수해에 풍악 울려?**
부산환경운동연합 김달수 부장의 제보에 따르면, 15일 오전 10시경 부산역 광장에서 고삿상이 차려지고 풍물패를 동원한 시끌벅적한 행사가 시작되었다. 행사 현장에는 철도청 명의의 대회 개막을 축하하는 현수막도 걸려 있었다.
부산·경남 지역을 강타한 태풍 때문에 전시민이 피해 복구에 한창인 때에 여는 행사였기 때문에 지나가는 시민들은 눈살을 찌푸리며 "뭐하는 짓들이냐"는 비난을 퍼부었다. 그러나 이같은 시민들의 따가운 눈총에도 불구하고, 일반시민 참여자 한 명 없는 형식적인 관료들의 축하 행사는 예정대로 40여분간이나 계속되었다.
현장에 있었던 김 부장의 전언에 따르면, 일부 시민들이 행사 주최자에게 "지금이 어느 때인데 이런 행사를 부산역 광장에서 개최하느냐"고 항의하자 관계자들은 "사전에 계획된 것이기 때문에 하는 것이다"라고 해명했다.
김 부장은 "민간 기업들도 아니고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철도청이 국민과 고통을 함께 할 시기에 단지 사전에 계획되었다는 행사라는 이유만으로 이런 행사를 개최한 데 대해 분노를 넘어 슬픔을 느낀다"면서 "단순히 철도청의 문제라기보다는 '생각 없이 밀어붙이기만 하는' 현재 정부 관료들의 수준과 행태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일"이라고 질타했다.
김부장은 이어 "10년 전에 계획되었다는 이유로 고속철도 노선을 변경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건설교통부의 행태를 비롯한 최근 정부의 여러 가지 밀어붙이기식 실정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라면서, "어처구니없는 관습과 관행을 고치지 않는다면 참여정부의 개혁도 실패로 돌아갈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철도청, "동아리에서 한 일, 해명 필요 못 느껴"**
철도청 관계자는 이번 사태와 관련한 프레시안의 취재에 대해 "해명할 필요도 못 느낀다"는 무감각의 극치를 보였다.
프레시안과의 전화 통화에서 철도청 관계자는 "철도청 직원들의 동아리인 철도청건강달리기모임이 한달 전부터 자체적으로 준비한 행사로 알고 있다"면서 "건강달리기모임에서 부탁해서 철도청 명의로 각 언론사에 보도자료를 대신 발송했을 뿐 철도청이 주관하는 공식적인 행사는 아니다"라고 해명했다.
이 관계자는 또 15일 오전 행사를 사전에 알고 있었는지를 묻는 질문에 "사전에 알고 있었지만, 동아리에서 자체적으로 하는 행사에 대해서 철도청이 왈가왈부하는 일은 없다"고 답했다.
이 관계자는 현수막 등에 철도청 명의가 적힌 것에 대해서도 "철도청 직원들로 이뤄진 동호회가 하는 행사에서 철도청 명의를 사용하는 것이 뭐가 잘못이냐"면서 "더 자세한 것은 동호회 관계자에 물어보라"고 답했다. 그는 "철도청의 공식적인 행사도 아닌데, 해명할 필요도 못 느낀다"고 덧붙였다.
이번 폭풍 매미는 분명 천재지변이다. 그러나 태풍 경보에 국민들이 긴장하고 있을 때 태연하게 제주에서 골프를 치는 경제부총리가 있는가 하면, 태풍으로 도시 전역이 찢겨진 부산 한 가운데서 풍물놀이를 하는 '무감각 강심장'들이 존재하는 한 이번 피해는 '인재'이기도 하다.
공무원의 기강 해이가 태풍 매미보다도 몇배 더 공포스러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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