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순진했다. 탄핵정국이 끝나고 문재인 후보가 대통령 당선인이 되었을 때 편의점으로 달려가 맥주를 사서 축배도 들었다. 국토교통부 장관에 김현미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입각하자 더 희망에 부풀었다. 386 정치인들에 대한 신뢰는 없었지만 오영식 전 민주당 의원이 코레일 사장으로 취임하고 철도 공공성, 코레일과 수서고속철도(SR)의 통합을 이야기하자 한국철도의 미래가 낙관적으로 보였다. 더구나 남북 정상이 만나고 합의문 한 가운데 남북철도 연결 사업을 추진하자고 할 때에는 심장이 마구 뛰었다. 그동안 정치인으로서 보여준 김현미 장관의 강단과 능력, 의지를 볼 때 관료들의 포위망을 제대로 돌파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모두 착각이었다. 한국철도의 희망은커녕 더 확장된 관료들의 놀이터로 전락한 철도의 현실에 자괴감만 쌓였다.
이명박 전 대통령이 추진한 4대강 사업으로 임기 내내 건설사들은 주머니를 두둑이 챙겼다. 강물은 온통 녹조류로 덮여 썩고 있는 동안 그나마 혜택을 본 것은 철도다. 이 전 대통령 취임 초기 철도민영화를 언급했으나 4대강 사업에 매진하느라 수서고속철도 민영화는 레임덕에 빠진 임기 말에 추진됐기 때문이다. 결국 수서 발 고속철도 민영화는 불발되었다. 그러나 바통을 이어받은 박근혜 정권이 수서고속철도주식회사 출범을 이뤄냈다.
두 정권이 '철도 개혁'이란 이름 아래 추진한 정책은 지금도 여기저기서 파열음을 내고 있다. 국토부 관료들은 수서고속철도 출범으로 한국철도가 한 단계 도약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주장했지만 그 실체가 어떤 것인지는 보이지 않는다. 대신 지역에서는 불만이 폭주하고 있다. 여수, 순천, 창원, 마산, 진주, 포항, 전주 같은 도시에서는 도약했다는 철도가 왜 수서까지 직통 고속열차를 이용할 수 없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공교롭게도 촛불정신을 계승한 개혁 정권으로 자처한 문재인 정부의 국토부는 철도에까지 미쳐 손을 쓸 겨를도 없었다. 집권 초기 전격적으로 진행될 것 같던 철도 개혁은 관료들의 벽에 부딪혔다. '이명박근혜' 정권에서 철도정책을 추진했던 관료들이 하루아침에 자신들이 집행한 철도 정책을 뒤집기는 쉽지 않아 보였다. 그래서 장관의 결단과 추진력이 필요했다. 그러나 집권 초 폭등하는 아파트값을 잡지 못해 허둥지둥하더니 개혁 정부가 집값만 올려놨다는 서민들의 아우성에 변명도 제대로 못 할 지경이 되었다.
나는 진즉에 서울 시민들의 소박한 바람인 아파트 한 채를 장만하겠다는 꿈을 버렸다. 내가 사는 구의 30평형대 아파트 한 채 값은 10억이 훌쩍 넘는데 불과 몇 년 사이에 폭등한 결과였다. '노동귀족'으로 불리는 나 같은 사람도 지난 20년간 받은 임금을 단 한 푼도 쓰지 않고 모아야 살 수 있는 가격이다. 이렇게 노동을 배신하는 정책이 재테크란 이름으로 진행되도록 놔둔 책임을 정치인이 지지 않으면 누가 져야 할 것인가? 더구나 학업도 취업도 어려운 230대 젊은이들에게 현재의 부동산 가격은 넘을 수 없는 거대한 성벽이다. 이런 현실에서 꿈을 갖거나 도전을 하라거나 아이를 낳으라고 하는 것은 성안에 똬리를 튼 자들의 기만적 언사에 불과하다.
이런 상황 속에서 관료들은 자신감을 갖고 역공을 펼쳤다. 철도 개혁을 위한 연구 용역을 중단시키더니 아예 사장시켜 버렸다. 한국철도의 진정한 발전을 위해 네트워크 산업인 철도에 가장 적합한 체제인 코레일과 수서고속철도의 통합 여부에 대한 연구가 좌초된 것이다. 국토부 관료들은 장관도 통합에 대한 문제의식이 바뀌었다고 당당하게 주장한다. 관료들에 둘러싸여 통계수치와 그동안 정립된 논리들을 들으면 장관 입장에서도 그럴듯하게 여길 수 있다. 그러나 그동안 장관이 철도 통합을 주장하는 전문가나 시민사회단체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본 적이 있다는 소식은 들어보지 못했다. 부동산도 철도정책도 김현미 장관체제에서 '개혁'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 있는지 의문이다.
김현미 장관에게 더 실망스러운 것은 그가 수도권 광역 고속철도인 GTX 기공식을 자신의 치적처럼 선전하는 모양새로 만든 것이다. 수도권 이동을 수월하게 하는 광역고속철도망은 그 효용성 때문에 철도 중심 교통체제로의 전환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 문제는 그 추진 방식이다. 민자 사업으로 추진되는 GTX는 결국 대기업의 수익보장을 담보로 할 수밖에 없다. 그동안 지하철 9호선부터 신분당선까지 민자 철도 사업이 일으킨 문제는 한두 가지가 아니다. 또 그 폐해는 고스란히 이용 시민들의 몫이었다.
민자 사업으로 진행되는 GTX는 사업자들이 높은 이용요금을 책정할 논리와 여지가 충분하다. 고속열차로 빠른 이동 시간을 보장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수도권 광역 교통체계 요금을 훨씬 초과하는 요금을 책정할 것이다. 정부는 가능하면 GTX 사업을 재정사업으로 돌리거나 최소한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라는 가치를 내걸어 기업들과의 실시 협약 단계에서부터 시민들에게 과도한 부담을 지우지 않는 방안을 강구해야 한다.
장관이나 정책부서의 할 일은 자신의 정치적 치적거리로 활용할 수 있는 것들을 모아 스펙으로 쌓는 것이 아니다. 시민들에 이익이 가는 정책이 무엇이어야 하는지 늘 고민하고 실천하는 호민관의 모습이어야 한다. 그것이 민주공화국의 정신이다.
김현미 장관은 총선 출마설도 있고 총리 기용설도 있다. 정치권이나 일부 시민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는 정치인이기도 하다. 그러나 최소한 국토부 장관으로서 그가 보여준 모습은 소신과 비전을 가진 정치인의 모습은 아니었다. 김현미 장관을 보면서 새삼 깨닫게 되는 것은 정치인의 이미지와 철학 사이에는 꽤 큰 간극이 있다는 것이었다. 국토부는 마음 떠난 장관 눈치 안 보고 마음 놓고 자신들의 기존 정책을 추진한다는 소문도 들린다. 이것이 단지 소문이길 바란다. 김현미 장관에게 충심으로 부탁한다. 임기 마지막 순간까지 시민을 위한 정책을 고민해주기 바란다. 그리고 최소한 철도 정책만큼은 '이명박근혜' 정권 당시 추진된 적폐 정책을 폐기해야 한다. 그 출발점은 코레일과 수서고속철도의 통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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