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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내가 죽더라도 나처럼 대해 주소"

[謹弔] 정주영 회장이 김정일 위원장에게 한 '유언'

남북 경협사업에 깊게 관여한 현대그룹 관계자의 전언이다.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지난 1999년 10월1일 평양을 방문해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두번째이자 생애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일이다. 이날 회동은 정 명예회장의 각별한 부탁으로 성사된 것이었다. 주위의 부축없이는 걷기 힘들 정도로 이미 건강이 악화될대로 악화됐던 당시 84세의 정 명예회장은 함께 배석해 있던 정몽헌 당시 현대그룹회장을 가리키며 김 위원장에게 이런 부탁을 했다 한다.

"이제 내가 갈 날이 얼마 안 남은 것 같소. 내가 죽더라도 남북경협은 계속 돼야 하오. 내가 하던 일을 모두 여기 정몽헌 회장에게 맡길 테니, 앞으로 김위원장께서도 정회장을 만나면 나 만나듯 똑같이 대해 주시구려."

일종의 '유언'이었다. 김 위원장은 숙연한 태도로 정주영 명예회장에게 "그러겠습니다"라고 약속했고, 그후 2001년 3월 정 명예회장 별세이후에도 대북사업 독점권이 부여되는 등 약속은 지켜졌다고 현대 관계자는 기자에게 전했다.

정 명예회장 타계후 정몽헌 회장은 '선친의 유언'을 지키기 위해 나름대로 부단히 애썼다고 주위에서 전한다. 하지만 선친이 타계한 뒤 2년5개월만인 4일 새벽 그는 자살이라는 극한선택을 했다. 누가 그를 4일 새벽 선친의 손떼가 묻어있는 계동사옥에서 고독하게 죽음을 택하게 만들었나.

***현대 관계자, "공짜로 관광 보내달랄 때는 언제고..."**

현대그룹의 금강산 관광 열기가 한창 뜨겁던 지난 99년의 일이다. 현대의 한 관계자는 기자에게 이런 푸념을 했다.

"공짜 관광을 시켜달라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골치가 지끈거린다.

모국립대학 교수들을 배에 태워 공짜로 금강산에 보내줬더니, 이 사실을 안 모대학 교수들이 '현대가 대학 차별하기냐'고 야단이어서 그들도 보내줘야 할 판이다.

기자들도 마찬가지다. 우리와 아무런 상관도 없는 출입처들까지도 매일같이 '우리는 안보내줄 거냐'고 난리다. '상전'인 언론들이 그러는데 우리에게 무슨 힘이 있나. VIP 대우로 보내 줄 수밖에.

다른 내로라하는 집단들의 경우도 마찬가지고. 이러다가 나중에 현대가 쪽박 차는 거나 아닌지 모르겠다."

그는 그로부터 1년 뒤인 2000년 3월 이른바 '왕자의 난'을 계기로 현대그룹이 심각한 유동성 위기에 직면하면서 언론이 연일 대북사업을 펴온 현대그룹의 '실력이상의 과욕'을 비난하는 기사를 쓰자, 이렇게 푸념했다.

"내 이럴 줄 알았다. 벌떼처럼 달라붙어 지지고 볶고...

대북사업이 우리 현대에겐 힘에 벅차는 과욕이었다고... 맞는 말이다. 대북사업은 현대 혼자 힘으로 하기에는 너무나 벅찬 사업이었다. 지금까지 북한에다가 엄청 쏟아부었다. 한 1조원 가까이 되지 않았을까. 그렇다고 투자한 돈이 바로 회수될 수 있는 성질의 것도 아니고...

하지만 눈앞의 단기이익 차원을 떠나 누군가 해야 할 일 아닌가. 특히 정부가 앞장서 해야 할 일 아닌가. 하지만 정부는 야당 눈치만 보면서 모른 채 하고 있으니, 우리가 하게 된 것 아닌가.

현대가 금강산 관광을 계기로 남북관계에 물꼬를 트면서 국가 전체로 볼 때 얼마나 많은 무형의 이득이 있었나. 금강산 다녀온 사람만 30만이 넘는다(현재는 50만 돌파). 분단국가에서 이 얼마나 대단한 일이냐. 이제는 남북이 서로 피붙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나. 전쟁 위험이 그만큼 사라지지 않았나. 돈으로 따지면 국가 차원에서 볼 때 수조, 수십조원의 이득을 보는 남는 장사를 한 게 아니겠나.

그런데도 언론이나 내로라 하는 인사들은 연일 몽둥이질이니... 그렇게 정말로 현대가 걱정되고, 한국경제가 걱정된다면 공짜로 금강산 갔다온 이들이 먼저 각자 백수십만원씩 토해 놓은 뒤에 몽둥이질을 해도 해야, 도리가 아니겠나."

***"현대는 북한의 경제 과외선생이었다"**

현대의 개성공단 사업에 초기부터 깊숙이 관여한 현대그룹내의 한 싱크탱크는 기자에게 이런 비사를 전해줬다.

"그 동안에 북한에 여러 차례 비밀리에 들어가 그쪽 관계자들과 만났다. 금강산 관광단에 섞여 가지고 일반 관광객처럼 해로로 금강산에 들어간 뒤 비밀리에 차를 타고 육로로 8시간에 걸쳐 평양에 들어가는 식이었다.

이렇게 힘들게 들어가 북한 고위관리들을 만나보면 이건 자본주의의 '자'자도 이해 못하고 있는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남쪽 기업들이나 외국 기업들이 북한 공단에 진출하게 하기 위해선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거의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럴 때마다 '경제 과외선생' 노릇을 해야 했다. 완전히 불모지에다가 밭을 일구고 씨앗을 뿌리는 심정으로 때로는 격렬하게 싸우고 때로는 설득해 가면서, 하나씩 일을 풀어나가야 했다. 그래도 상대가 현대니까 북한도 믿고 따랐다.

이런 지난한 과정이 있었기에 북핵위기를 둘러싸고 전쟁 일보직전의 긴장상태까지 갔어도 최근 개성공단을 만들기로 하고 금강산 육로관광 길도 뚫릴 수 있었던 것이다."

***너무도 큰 '빈 자리'**

그는 정몽헌 현대아산이사회 의장의 4일 급작스런 죽음에 대해서도 '남북관계' 측면에서 더없이 안타까워 했다.

"현대는 남북경협의 커다란 한 축이었다. 그 축의 한 가운데에 정몽헌 의장이 있었다. 모두가 그를 '실패한 경영자'라고 비난하고 외면할 때도 그는 선친으로부터 물려받은 그 유업만은 반드시 실현하려 애썼다.

북한도 정 의장의 뜻을 알고 있었다. 북한은 정 의장과 현대에게 대단히 미안해 하고 있다. 자신들을 돕다가 어려움에 처한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정 의장이 금강산 육로관광과 개성공단 일을 매듭짓지 위해 북한에 들어갈 때마다 찬밥 신세인 국내와는 대조적으로 정 의장을 정중히 맞았고, 정 의장이 들고 들어간 사업에도 합의하기에 이르른 것이다.

하지만 이제 정 의장이 사라졌다. 이제 누가 그 역할을 대신 할 것인가. 남북관계라는 것이 정부 고위급인사들끼리 공개리에 회담을 갖는다고 해서 다 풀리는 것인가. 민간부문의 내밀한 접촉과 협상없이 과연 정부간 공식협상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게 얼마나 되겠는가.

앞으로 열릴 6자회담의 경우만 해도 그러하다. 회담이 교착상태에 빠지면 온갖 비공식 라인을 통해 상대방 의중을 파악하고 돌파구를 찾아야 할 텐데, 북한이 그래도 가장 믿던 정의장이 사라졌으니 누가 이 일을 대신할 것인가. 안타깝고 아찔할 따름이다."

***'역사의 희생양'이냐 '역사의 선구자'냐는 우리 몫**

정몽헌 의장은 살아 생전에 경영자로서는 적잖은 실수를 했다. LG반도체를 무리하게 인수해 하이닉스 반도체를 만든 것도 그렇고, '왕자의 난'으로 물의를 빚은 대목도 그러하다.

하지만 정의장은 죽으면서 "내 유분을 금강산에 뿌려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살아 생전 경영자 개인으로서의 실수를 모두 덮을 '큰 유언'이다. 소떼를 몰고 휴전선 철조망을 뚫고 가던 선친의 호연지기를 잇는 '큰 모습'이다.

이제 정 의장이 못다하고 남긴 '일'은 살아남은 우리 몫이 됐다. 정 의장은 유서에서 김윤규 현대아산 사장에게 "대북경협을 강력 추진하라"고 당부했다. 하지만 이 일은 김사장 혼자 할 일도 아니고, 할 수 있는 일도 아니다.

살아남은 우리는 우선 정 의장의 죽음앞에 '공범'이라는 인식부터 가져야 한다. 동시에 '민족'이라는 단어에 대해 정말 깊게 진지하게 생각해봐야 한다. 말로만 '민족' 운운했던 게 아닌가 반성해야 한다.

정 의장의 죽음이 '역사의 희생양'이 아닌 '역사의 선구자'가 되느냐 아니냐는 지금 살아남은 우리의 몫인 것이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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