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미국과 이란 간 갈등을 중재하는 임무를 띠고 일본 총리로서는 41년만에 이란을 방문해 이란의 최고 지도자 아야톨라 하메네이를 만난 13일(현지시간) 이란 앞바다인 오만해(오만만)에서 대형 유조선 두 척이 공격을 받아 파괴됐다. 선원들이 긴급 대피해 인명피해는 나지 않았지만, 선체는 심하게 손상됐다.
피격된 유조선 두 척에 실린 석유화학 원료는 모두 일본과 관련된 것이며, 유조선 한 척은 일본 선사 소속이다. 아베 총리의 중재 임무를 물거품으로 만드는 공격으로, 외교적 해법이 더 이상 불가능하다는 명분을 제공할 만한 범죄의 성격이 농후하다. 이때문에 '계획 범죄'일 가능성이 높다는 관측까지 제기되고 있다.
오만만은 페르시아만(걸프만)과 호르무즈 해협으로 연결된 아라비아해의 연안이다. 호르무즈 해협은 세계 원유 수송량의 3분의 1이 거쳐가는 요충지라는 점에서, 유조선 피격 소식에 국제원유가격이 3% 넘게 폭등하는 등 민감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트럼프, 선택의 기로"...1990년 걸프전 이후 긴장 최고조
미국은 유조선 공격의 주체에 대해 즉시 "이란에 의한 도발"이라고 규정했다.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은 이날 워싱턴DC의 국무부 청사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이란이 이번 공격에 책임이 있다는 것이 미국 정부의 평가"라고 밝혔다. 미국 정부는 지난달 같은 장소에서 유조선 4척에 대한 비슷한 공격도 이란이 배후에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모두 뚜렷한 증거를 제시한 것은 아니다. 이에 대해 이란은 "미국이 전쟁을 획책하기 위해 역정보 공작을 하고 있다"고 반박했다.
<뉴욕타임스>는 "이란의 관료들은 이번 유조선 공격은 미국에게 이란을 군사공격할 것을 오랫동안 요구해온 사우디아라비아, 아랍에미리트 또는 이스라엘 등 미국의 동맹국들의 치밀한 음모로 꾸민 공작으로 의심하고 있다"고 전했다. 신문은 "반면에 미국 등 서방권에서는 지난달 유조선 공격의 배후는 이란이라는 점에 의견을 모아가고 있으며, 이란은 이런 도발로 국제 원유 시장을 뒤흔들 수 있는 힘을 과시하려는 것이지만 미국의 군사적 보복을 초래할 흔적을 남기지 않기는 어렵다고 주장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이번 사건과 관련해 미국의 요청으로 유엔은 안전보장이사회 긴급회의를 소집해 비공개로 대응방안을 논의하기로 했다. 하지만 유조선 공격의 배후가 어느 쪽이든 외교적 해법을 차단하고 군사적 충돌로 비화될 가능성이 높아 국제사회의 우려는 커지고 있다.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은 "이번 유조선 피격 사건이 군사적 충돌로 이어질까봐 매우 우려된다"고 말했다.
이날 이란의 하메네이는 아베 총리에게 "미국과 협상할 일이 없다"고 외교적 해법에 대한 가능성을 일축했다. 아베 총리가 이란 방문 첫날인 12일 하산 로하니 이란 대통령과의 공동기자회견에서 중동의 평화와 안정을 위해 협력하고, 2015년 이란 핵협정의 중요성을 확인했다고 밝혔지만, 하루 만에 그 의미를 상실하게 된 셈이다.
로하니 대통령은 "무슨 일이 있더라도 무력 충돌을 피해야 한다"고 강조한 아베 총리에 대해 "우리는 미국과의 전쟁을 추구하지 않는다. 하지만 도발에는 단호히 행동하겠다"면서, 전쟁 위기를 고조시키는 도발의 책임은 미국 측에 있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아베 총리는 하메네이와 만나서도 "트럼프 대통령의 메시지를 전하려고 이란에 왔다"고 말했지만, 하메네이는 “나는 트럼프가 메시지를 교환할 만한 상대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지금이나 앞으로 트럼프에게 전할 말도 없을 것"이라고 협상 제의를 거부했다. 또 아베 총리가 "미국은 이란의 정권을 교체하려 하지 않는다"는 트럼프 대통령의 메시지를 전하자 하메네이는 "미국은 이란 정권을 교체할 만한 능력이 없다"고 코웃음을 쳤다.
<뉴욕타임스>는 "폼페이오 국무장관이 유조선 공격의 배후를 이란으로 지목함에 따라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의 이익이 위협받으면 이란이 엄청난 고통을 받게 될 것'이라는 자신의 경고를 실행할 것이냐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됐다"고 분석했다.
일본에서는 아베 총리의 이란 중재 노력에 대해 논란이 일고 있다. 일본 정부가 미국과 이란의 분쟁에 말려든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특히 이란에 대한 군사적 공격을 주장해온 존 볼턴 국가안보보좌관 등 트럼프 행정부 내의 강경파들이 "동맹국 일본까지 나서 중재했는데 이란이 거부했다"면서 군사적 공격의 명분으로 이용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미국과 이란이 잇따른 유조선 공격의 배후로 서로를 지목하는 공방 속에, 호르무즈 해협을 둘러싼 군사적 충돌 가능성은 지난 1990년 걸프전 이후 최고 수준으로 치닫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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