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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아가 나타나 미국을 구했다"

[전쟁국가 미국·3강-①] 한국전쟁과 미국의 반공군사주의

한국전쟁이 끝나가던 1953년 7월 8일, 프린스턴대학에서 열린 한 세미나에서 딘 애치슨 전 국무장관은 이번 분쟁은 "우리의 논지를 입증했다(proved our thesis)"면서 "코리아가 나타나 우리를 구했다(Korea came along and saved us)"고 발언했다. 이 말은 무슨 의미인가?

한국전쟁이 있었기에 미국의 대대적 재무장 계획(NSC-68)의 실천이 가능해졌고, 이에 따라 냉전의 숙적 소련에 대한 압도적 힘의 우위를 달성됐으며, 이로써 미국의 세계 전략이 완성될 수 있었다는 뜻이다.

한국전쟁 기간 미국의 국방비는 3배 이상, 군수물자 생산은 약 7배 늘어났다. 또한 육군 병력은 300만 명, 공군력은 비행단 95개로 각각 2배 씩 강화됐다. 한국전쟁이 미국의 전면적 재무장에 대한 미 의회 및 국민의 전폭적 지지를 이끌어냈기에 가능해진 결과다.

한국전쟁의 영향은 미국의 재무장에 그치지 않는다. 2차 대전의 적국 서독과 일본을 재무장시키고 미국의 하위 동맹국으로 끌어들인 것도 한국전쟁 덕분이었다. 미군이 서유럽과 동아시아, 중동 등 지구 도처에 영구 주둔하게 된 것도 한국전쟁의 영향이다. 즉 한국전쟁을 계기로 미 군사력은 세계 곳곳에 미칠 만큼 비약적으로 강화된다. 이렇게 강화된 군사력이 미 세계전략의 핵심 동력이 된다.

한국전쟁은 2차 대전 이후의 세계사에서 중대한 변곡점이었다. 미국의 외교, 군사정책을 반공 군사주의로 고착시킨 결정적 계기였다. 군사력을 앞세워 소련 공산주의의 팽창을 봉쇄하는 한편 미국식 체제의 확산을 밀어붙인 것이다.

한국전쟁이 없었다면 유럽에서 프랑스와 영국이 2차 대전의 적국 서독과 함께 군사동맹(NATO)을 결성하는 일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프랑스는 2차 대전 때 독일에 5년간이나 점령당했고 영국 또한 독일의 공습으로 고초를 겪었다. 따라서 프랑스는 서독의 재무장은커녕 경제 재건에도 극력 반대했다.

당초 미국의 전후 계획은 독일을 유목국가로 만드는 것이었다. 새로운 전쟁의 가능성을 뿌리 뽑기 위해 독일의 전쟁 역량은 물론 산업 능력까지도 박탈하려 했다. 그러나 1947년 이후 소련과의 대결이 본격화되면서 이전까지 서유럽에서 가장 높은 생산성을 자랑했던 독일의 산업을 부흥시켜야 할 필요성이 대두됐다. 특히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서독의 재무장이 긴급해졌다. 서유럽을 소련의 군사적 위협으로부터 지켜야 했다. 당시 미국은 북한의 남침을 한반도의 국지적 사건이 아니라 소련 공산주의의 세계적 팽창으로 인식했기 때문이다.

1950년 9월 미군의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할 즈음 애치슨 당시 국무장관은 영국, 프랑스 외무장관을 뉴욕 월도프 아스토리아 호텔로 불러 폭탄선언을 했다. 서독을 나토의 틀 안에서 전면 재무장시킬 것이며 미 육군 4개 사단을 서유럽에 영구 주둔시키겠다는 것이었다. 1949년 4월 창립됐으나 유명무실했던 나토가 실질적 군사동맹으로 전환되는 순간이었다. 두 차례 세계대전에서 독일에 유린당했던 프랑스의 거센 반발도 소용없었다. 소련의 세계 적화 음모를 막으려면 이 길밖에 없다는 미국의 주장을 꺾을 수 없었다.

당초 미국은 마셜플랜(1948~52년)을 통해 서유럽의 경제 부흥을 꾀했으나 공화당 등의 퍼주기 반발 등으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었다. 게다가 1949년 8월 소련의 핵실험 성공으로 미국의 핵 독점이 무너지고 10월 공산 중국이 탄생하면서 미국의 위기의식은 커질 수밖에 없었다.

결국 미국의 정책결정자들은 대대적 재무장을 통해 소련에 대한 힘의 우위를 달성하는 한편 서유럽 등 우방에 대해서는 대규모 군사원조를 통해 경제 부흥을 이룩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1950년 4월 작성된 국가안보회의 문서 68(NSC-68)이 그것이다.

NSC-68은 소련이 군사력으로 세계를 공산화하려 한다고 주장했다. 이를 막으려면 당시 국방비의 3-4배 증액이 필요하다고 했다. 트루먼 대통령은 물론 의회나 국민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요구였다. 그런 와중에 한국전쟁이 발발했고, 이는 한반도의 국지적 사건이 아니라 소련에 의한 세계 적화 음모의 시작으로 간주됐다. 즉 한국전쟁이 NSC-68에 대한 미 국민의 절대적 지지를 끌어낸 것이다.

NSC-68의 작성을 주도한 이가 바로 애치슨이다. "코리아가 나타나 우리를 구했다"는 애치슨의 발언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 한국전쟁을 계기로 NSC-68이 실행됐고 이로써 미국이 영구 전쟁국가로 변모한 과정은 지난해 2월 18, 19일 <프레시안>에 게재된 다음 글에 수록돼 있다.

(1) 영구 전쟁국가의 탄생: NSC-68과 한국전쟁 <상> (2018년 2월 18일)

(2) '군복 입은 케인스', 미국을 만들다: NSC-68과 한국전쟁 <하> (2018년 2월 19일)

그런데 위의 두 글은 유럽에서의 냉전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이번 글에서는 동아시아의 상황을 살펴보기로 한다. 2차 대전 후 동아시아의 냉전은 유럽과 전혀 성격이 달랐기 때문이다.

유럽의 '긴 평화'

유럽에서는 2차 대전 이후 군사 대치 속의 평화가 지속된 반면 동아시아에서는 중국의 국공내전에서 한국전쟁, 베트남전쟁까지 30년 전쟁(1945-75년)이 이어졌다. 냉전이 '긴 평화(Long Peace)'의 시기였다는 서방의 인식은 유럽에만 해당된다. 아시아와 아프리카, 중동, 그리고 중남미에서는 미국과 소련을 대신한 열전이 계속됐다.

영국 언론인 마틴 워커의 말을 빌리자면 "유럽에서 백인들 간의 싸움으로 시작된 냉전의 대가를 갈색, 검은색, 노란색 피부를 가진 제3세계 사람들이 치른" 셈이다. (<냉전의 역사>, The Cold War : A History, p.60)

냉전 시절의 유럽에서는 분단 독일을 경계로 삼엄한 군사적 대치가 지속됐으나 무력 투쟁으로까지 이어지지는 않았다. 유럽의 냉전에서 가장 큰 위기의 진원지는 베를린이었다. 소련의 베를린 봉쇄와 베를린 장벽 건설이 그것이다. 그러나 두 차례 모두 미국과 소련은 무력 대결을 회피했다. 작은 무력 충돌이 전면전으로 비화될 것을 우려한 때문이었다. 그만큼 유럽의 냉전은 안정적이었다.

베를린 봉쇄(1948년 6월 24일-1949년 5월 12일)는 냉전 후 유럽에서의 최초의 위기였다. 1948년 3월 미국과 영국은 서독의 점령지역을 통합하는 한편 독자적인 통화개혁을 실시했다. 이를 미국의 일방적 독일 분단으로 판단한 스탈린은 동독 내 위치한 베를린에 대한 육로 교통을 봉쇄했다. 미국 주도의 독일 분단을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일종의 실력 행사였다. 소련은 단일하며 중립화된 독일, 그리고 독일로부터의 전쟁 배상을 원했다.

연합군 점령 지역인 서베를린은 동독 영토 내에 있었다. 따라서 철도, 도로를 봉쇄하면 생활물자 공급이 차단되고 결국 미국이 서베를린을 포기할 수밖에 없으리라는 계산이었다. 독일 분단은 막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서베를린을 포기하게 함으로써 미국의 신뢰도에 타격을 가하겠다는 속셈이었다. 미국으로서는 서베를린을 지키기 위해 무력을 동원할 수도, 그렇다고 서베를린을 포기할 수도 없었다. 군사력 동원에는 전면전의 위험이 따르고, 서베를린 포기는 동맹국에 대한 미국의 신뢰도에 중대한 타격이 되기 때문이다.

미국은 1949년 9월까지 1년여간 무려 27만7000회의 공수 작전(62초당 항공기 1대꼴)으로 서베를린에 물자를 보급함으로써 베를린 봉쇄를 무력화시켰다. 미국의 압도적 경제력이 스탈린의 도발을 꺾은 셈이다.

1961년 8월 동독이 베를린 장벽을 건설했을 때 미국은 백악관 차원에서 소련에 대한 전면 핵 공격을 검토했으나 실행에 옮기지는 않았다.

한편 1953년 출범한 아이젠하워 행정부는 공산국가의 해방을 위한 반격(Rollback) 정책을 천명했지만 1956년 일어난 헝가리 반공 봉기에 개입하지 않았다. 반격은 말뿐이었고 실제로는 트루먼 행정부의 봉쇄(Containment) 정책에서 벗어나지 않은 것이다. 이 역시 소련과의 군사 충돌을 우려한 때문이었다. 한마디로 유럽에서는 1989년 베를린 장벽 붕괴 때까지 실제 무력 충돌이 없었다. 나토와 바르샤바조약기구라는 군사동맹을 통해 각각의 하위 동맹국들을 통제하며 안정적 대치 상황을 유지했다.

▲ 한국전쟁 당시 38선 경계표시판 ⓒ프레시안 자료사진

동아시아의 '30년 전쟁'

반면 동아시아는 상황이 전혀 달랐다. 우선 1931년 만주 침략 이후 중국과 동남아에 대한 군사 정복을 계속해온 일본의 패배로 이 지역에는 거대한 힘의 공백이 생겼다. 여기에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피압박민족의 반제, 반식민 투쟁이 벌어졌다. 2차 대전 후 터져 나온 민족 해방의 거대한 흐름을 미국도 소련도 통제할 수 없었다. 유럽의 냉전이 자본주의 대 공산주의의 대결이었다면, 동아시아에서는 서구 식민 지배에 대한 피압박 민족의 독립투쟁이 기본적인 양상이었다.

전후 동유럽의 공산화는 기본적으로 소련의 군사적 강제에 의한 것이었다. 반면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의 자생적 민족해방투쟁은 주로 공산혁명의 형태로 나타났다. 동유럽의 공산화가 외부의 강요에 의한 것이었다면 동아시아에서는 사회주의자와 공산주의자들이 주도한 무장 독립투쟁이 벌어진 것이다. 그것은 민족자결을 위한 운동이었다.

미국은 2차 대전 참전의 주요 목표로 '민족자결'을 내세웠다. 그러나 동아시아에서 벌어진 민족해방운동을 민족자결로 보기보다는 소련의 지령에 의한 것으로 인식했다. 중국, 인도차이나, 말라야 등에서의 민족해방투쟁을 자생적 운동으로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 이러한 오판이 전후 동아시아에 대한 미국의 군사적 개입을 낳은 배경이다.

당초 미국은 중국의 국민당 정부를 전후 동아시아의 핵심 파트너로 상정했다. 그러나 국공 내전에서 국민당이 패배하면서 미국의 구상은 어그러졌다. 결국 일본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또한 한국전쟁은 남한과 대만을 미국의 동맹권 안에 편입하게 만들었고, 미국의 베트남 군사 개입을 촉발하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결국 중국 공산당의 승리와 뒤이은 베트남 등 피압박민족의 독립투쟁(중국은 1950년 1월 세계 최초로 호찌민의 베트남독립독맹을 공식 정부로 승인) 등은 미국의 군사적 일방주의를 초래했다. 북한의 남침, 베트남의 독립투쟁을 중국 공산 세력의 팽창으로 파악한 미국은 이를 군사력으로 저지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동아시아 30년 전쟁의 배경이다.

전후 동아시아 구상의 파탄

중일전쟁 이후 미국은 중국의 대일 항전을 적극 지원하면서 전후 세계 경영에서 일본 대신 중국을 새로운 파트너로 삼겠다는 복안을 갖고 있었다. 미국, 영국, 소련과 함께 중국을 전후 세계 안보를 책임질 4대 강국(Four Policeman)의 일원으로 지목한 것이다.

루스벨트는 1943년 중국과의 기존 불평등 조약을 파기하는 한편 12월 1일 카이로선언에서 조선의 독립을 비롯한 대(代)일본전의 기본 방침을 천명했다. 카이로 회담에 장개석 총통이 루스벨트, 처칠과 함께 참석한 것은 중국의 국제적 위상이 한층 높아진 것을 반영한다. 또한 1941년부터 조셉 스틸웰, 앨버트 웨드마이어 장군을 차례로 중국에 파견해 국민당 정부의 대일 항전과 국공 내전을 도왔다.

중요한 것은 스탈린도 루스벨트의 이러한 방침에 동조했다는 점이다. 1944년 8월 덤바튼 오크스 회의에서 중국 국민당 정부를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으로 하는 데 동의했고, 일본이 항복한 1945년 8월 15일에는 장개석 정부와 중소 우호협력조약을 체결했다. 즉 스탈린도 국민당 정부의 중국 석권을 예상했고 인정했다는 얘기다(당시 국민당 병력은 공산당의 5배였고, 그해 12월까지만 해도 5만 명의 미 해병이 중국에 주둔하고 있었다).

심지어 1949년 4월 국민당이 공산당에 밀려 수도 난징을 포기하고 광동으로 이전할 때는 오직 소련 대표부만이 국민당 정부를 따라갔을 정도다.

1945년 말 트루먼 대통령은 마셜 장군을 중국에 특사로 보내 1년여간 국민당을 주축으로 하는 연립정부 구성을 추진했으나 실패했다. 1946년 말이 되면 트루먼 정부는 국민당의 승리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한다. 전세를 뒤집기 위해서는 수십만 명의 병력을 동원한 미국의 대규모, 지속적 군사 개입이 필요한데 이를 위한 미 국민의 동의를 얻어내기란 불가능했다.

결국 1946년 11월 미 해병이 철수하기 시작하면서 미국은 군사 개입을 포기하고 경제적 지원만을 계속한다. 국민당의 패배가 임박한 1949년 8월 미 국무부는 1100여 쪽에 달하는 '중국백서(The China White Paper)'를 발간해 국민당 패배의 원인을 소상히 밝힌다. 국민당의 패배가 미국 책임이 아님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른바 '중국의 상실'은 이후 민주당과 국무부가 매카시즘 등 공화당의 집요한 반공 공세를 당하는 주요 빌미가 된다.

미국의 일본 점령 정책

일본에 대한 점령정책은 미국 단독으로 운영됐다. 독일에서는 미소영불 등 점령 4개국의 공동통치가 이루어진 반면 일본에서는 연합군 최고사령관 맥아더가 전권을 휘둘렀다. 뒤늦게 참전한 소련은 홋카이도 점령을 원했으나 간단하게 무시당했다. 영국조차 발언권을 가질 수 없었다. 영국과 호주 등 영연방 소속 군인 4만 명은 미 8군 예하로 배치됐다. 일본 헌법을 제정한 것도 미군이었다.

▲ 얄타 회담(1945년 2월) 당시 처칠, 루스벨트, 스탈린. ⓒ위키미디어커먼스

미국의 초기 일본 점령정책의 핵심은 '일본이 다시는 미국에 위협이 되지 않도록 한다'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일본의 군사력과 경제력을 해체하는 대신 정치적 민주화를 추진했다.

1945년 9월 22일 미 국무부는 '항복 후 미국의 초기 대일방침'이라는 문서를 통해 "일본의 군사력을 지탱하는 공업시설 등 경제적 기초는 파괴되며 재건하지 못한다." "일본인의 생활 수준은 그들이 침략한 아시아 각국의 생활 수준보다 높지 않도록 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또한 피침략국에 대한 전쟁 배상도 계획했었다. 1945년 11월 일본의 전쟁 배상을 위한 현지 조사를 수행한 에드윈 폴리 위원장은 '미국의 배상정책은 일본 경제에 필요한 최소한도 이외의 모든 것을 제거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1946년 6월 일본을 다시 방문한 폴리 위원장은 '일본의 화학공업 시설을 아시아 각지에 이전시켜 인공비료를 증산시킬 것'이라면서 '대일 배상의 근본은 일본의 전쟁능력을 박탈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처럼 군사, 경제 측면에서는 가혹한 응징을 하면서도 정치, 사회적으로는 공산당 합법화, 노조 활동 권장 등 민주화 조치를 단행했다. 항복 2개월 후인 1945년 10월에는 종교, 정치, 시민권에 대한 모든 통제를 해제하고 여성 참정권을 허용하며, 토지 개혁을 단행했다.

그러나 1947년 냉전이 본격화되고 중국 국민당의 패배가 확실해지면서 미국의 대일본정책은 급선회한다. 일본의 경제, 군사적 재기를 봉쇄하는 가혹한 응징을 포기하고 일본을 동아시아 반공의 보루로 삼는 이른바 '역코스(reverse course)'로 전환된 것이다. 중국 대신 일본이 동아시아의 핵심 맹방으로 간택된 셈이다.

무엇보다 경제 안정이 시급한 과제였다. 경제가 안정되지 못하면 일본 자체가 공산화될 수도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패전 이후 1947년 초까지 일본의 경제 상황은 절망적이었다.

점령 직후 맥아더는 본국에 식량 350만 톤이 긴급하게 필요하다고 보고하면서 '빵을 보내 달라, 아니면 총탄을 달라'고 할 정도였다. 1945년 말 일본의 산업 생산은 1940년의 16% 수준으로 격감했다. 1945년 한 해 동안 산업 생산은 64% 감소했으며 1946년에도 38%나 줄어들었다. 1947년 15% 증가로 돌아섰으나 1934년의 절반 수준에 불과했다.

1947년 봄 노조가 과격화하면서 총파업을 선언하는가 하면 5월에는 사회당 정권이 수립되자 본국에서는 맥아더가 일본에 사회주의를 도입하려 한다는 비판이 쏟아져 나왔다. 당시 일본 정부의 보유 쌀은 겨우 4일 치에 불과했다. 결국 점령 당국은 노조 파업을 금지하고 재벌 해체를 포기하는 등 역코스로 선회한다.

미 동아시아 전략의 초점이 중국에서 일본으로 옮겨간 것은 1947년 초부터였다. 1월 29일 신임 국무장관 조지 마셜은 딘 애치슨 차관에게 "남한 단독 정부 수립과 남한 경제를 일본 경제에 연결시킬" 방안을 찾아보라고 지시했다. 1946년 마셜은 트루먼 대통령의 특사로 중국 국공 합작을 추진했으나 결국 실패했다. 이로써 미국은 중국에 대한 희망을 접고 일본을 동아시아 반공의 보루로 삼기로 한 것이다.

이어 트루먼 독트린이 발표되던 3월 12일, 국무부는 "적극적인 경제 프로그램"을 통해 1950년까지 일본 경제를 "스스로 지탱할 수 있는 역동적인 경제로 만들어내야 한다"고 보고했다.

이러한 미 점령정책의 전환은 1948년 1월 6일 케네스 로열 육군부 장관의 다음 발언에 분명히 드러난다.

"일본이 순수한 농업국가로는 자립할 수 없음이 분명하다. 여기에 자영업자와 수공업자들이 더해진다 해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일정 정도의 대규모 산업생산이 부활되지 않는다면 일본의 경제적 곤경은 계속될 것이다. 우리는 일본을 스스로 지탱할 수 있는 민주국가로 만들 것이다. 스스로 자립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강력하고 충분히 안정된 국가로 만듦과 동시에 앞으로 극동지역에서 생겨날 전체주의 세력의 도전을 막아낼 수 있는 방파제로 만들 것이다."

즉 경제 부흥을 통해 일본을 동아시아 반공의 보루로 만들겠다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1948년 3월 국무부의 조지 케난과 윌리엄 드레이퍼 육군부 차관(은행가 출신으로 전후 서독의 경제고문이었다)이 일본 현지 조사를 벌였다. 그 결과 4월 26일 보고서를 통해 일본 경제에 대한 가혹한 정책을 완화하며 노조 활동을 통제하고 대기업 위주의 경제 부흥을 추진해야 한다는 방침을 포레스탈 국방장관에게 보고한다.

이 같은 미국 정부의 계획은 1948년 10월 9일 NSC-13/2(미국의 대일정책에 관한 권고)로 공식화됐다. 이에 대해 트루먼 대통령은 일본의 번영은 서방 진영의 자산이며 향후 미국의 정책 목표는 '민주적 일본이 스스로의 힘으로 지탱할 수 있는 무역 파트너로서 자유세계에 참여토록 준비시키는 것'이라고 천명했다.

이 보고서는 일본 경제의 부흥은 미국의 안보 이익 다음으로 중요한 사항이며 이를 위해 첫째 일본의 대외 교역을 가로막는 모든 장애물을 제거하고, 둘째 민간 기업의 회생을 촉진하며(재벌의 해체를 포기), 셋째 생산 확대를 통해 수출의 증대(즉 파업을 금지)가 필요하다고 보고했다. 이에 따라 당초 해체하기로 했던 대기업 325개 중 불과 19개만이 해체됐으며, 한때 5천5백 개 노조와 88만 당원을 보유했던 공산당은 사실상 유명무실해졌다.

1948년 11월 대선에서 재선에 성공한 트루먼은 12월 디트로이트의 은행가이자 전 미국 은행협회 회장인 조셉 닷지를 일본경제 재건의 책임자로 지명해 일본에 파견한다. '경제 황제(economic czar)'로 불렸던 닷지는 정부의 복지 예산을 축소하고 공무원 25만 명을 해고하는 한편 1949년 4월 통상산업성(MITI)을 창설해 일본 경제를 '정부 주도의 수출지향형 경제'로 만들어냈다. '발전국가' 또는 '일본주식회사'로 불리는 오늘날 일본 경제의 원형은 바로 미국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닷지는 일본의 수출 진흥과 경제 부흥, 그리고 공산주의에 대한 봉쇄정책이 서로 연관된 것으로 보았다. 경제적으로 안정된 일본은 공산주의와 자본주의 간 세계적 충돌의 최전방 전선이 될 것이며, 이념적으로 서방과 결합되고 상업적으로는 아시아와 연결된 일본이야말로 공산권의 범아시아 적화 음모를 격퇴할 수 있는 보루라는 것이다. 그는 1950년 초 의회 청문회에서 미국은 일본을 통해 "미국의 극동 지역 원조를 위한 물자를 공급할 수 있을 것"이며 이에 따라 "동양과의 관계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증언했다.

동남아지역의 중요성

전후 미국의 동아시아 정책에서 일본이 중요했던 이유는 아시아 유일의 산업 국가였기 때문이다. 미국 세계 전략의 핵심은 산업 역량을 가진 국가들을 우방으로 끌어들이는 것이었다. 산업 역량이야말로 세계 자본주의 체제의 복원은 물론 전쟁 역량의 바탕이 되기 때문이다. 당시 세계에는 5개의 산업 지역이 있었다. 미국, 영국, 서유럽, 소련, 일본이 그것이다.

만일 일본이 공산진영으로 넘어간다면 미국은 아시아에서 발붙일 곳이 없어질 뿐만 아니라 일본의 산업 역량을 확보한 소련의 경제 및 군사 역량이 비약적으로 강화되게 된다. 한마디로 아시아 전체가 붉게 물들여지는 셈이다. 결국 중국의 공산화 이후 일본은 동아시아에서 미국이 반드시 지켜야 할 핵심 국가가 된 것이다.

그런데 전쟁 이전 일본 자본주의는 조선과 만주라는 배후지가 있었기에 번영할 수 있었다. 즉 만주와 조선이 원자재 공급처 및 일본 제품의 시장 역할을 했던 것이다.

중국의 공산화로 전통적 배후지를 상실한 일본이 살길은 두 가지였다. 중립을 표방하며 중국, 소련 등과 교역하든가, 아니면 새로운 배후지를 확보해야 했다. 미국의 입장에서 일본과 공산 진영과의 경제 교류는 허용할 수 없었다. 그것은 곧 핵심 동맹으로서의 일본의 상실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미국은 일본 경제를 부활시키기 위해 새로운 배후지를 확보해야만 했다. 그곳이 바로 동남아지역이다. 석유, 고무, 주석 등 동남아지역의 풍부한 원자재, 그리고 시장이 없다면 일본 경제의 자립화는 불가능할 터였다.

1948년 5월 작성된 중앙정보국(CIA) 보고서는 일본 경제의 부흥을 위해서는 동북아시아와의 교역이 필수적이며, 만일 중국 공산화로 이것이 불가능해진다면 동남아 및 필리핀과의 교역을 추진해야 한다고 밝혔다.

이 때문에 미 정부는 일본과 동남아의 경제 통합을 추진하면서 이를 아시아판 '마셜 플랜'이라고 불렀다. 심지어 '대동아공영권'의 부활을 외치는 목소리도 있었다. 문제는 당시 인도차이나와 말라야,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 등 동남아 지역에서 공산주의 세력이 강력했다는 점이다. 중국 혁명의 영향이었다.

1950년에 이르기까지 동남아의 향방은 지극히 불투명했다. 공산화의 가능성이 오히려 컸다고 볼 수 있다. 일례로 미국 언론인 조셉 알솝과 스튜어트 알솝 형제는 1949년 8~9월 <워싱턴포스트>를 통해 동남아 공산화의 위험성을 경고했다. 중국 공산화 이후 소련이 동남아에 '공산주의 공영권'의 건설을 획책하고 있으며 만일 동남아가 공산화된다면 일본은 결국 소련 세력권에 흡수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특히 스튜어트 알솝은 1950년 3월 11일 <새터데이 이브닝 포스트>에 기고한 글 '우리는 빠른 속도로 아시아를 잃고 있다(We are losing Asia fast)'에서 섬뜩한 경고를 내놓았다. 일본 공산당 지도자 노사카 산조가 시베리아에서 기니에 이르는 지역에 긴 호를 그리고는 "커다란 미소"와 함께 "머지않아 이 광대하고 새로운 러시아 제국에" 일본이 흡수될 것이라고 예언했다는 것이다. 미국으로서는 일본을 지키기 위해 동남아의 공산화를 막아야 했다. 도미노이론이 탄생한 배경이다.

한국전쟁, 동아시아 냉전체제의 완성

한국전쟁은 전후 동아시아의 불확실한 상황에 분명한 경계선을 긋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즉 미국의 즉각 군사 개입으로 동아시아 대(大)분단의 대치선이 확정되는 것과 함께 30년 전쟁의 본격적 시발점이 된 것이다.

세계적 차원에서 한국전쟁은 미국 등의 대대적 재무장을 가능케 함으로써 서방의 경제 재건과 군사동맹 결성을 완성시켰으며 이로써 소련에 대한 미국의 전략적 우위를 달성했다.

한반도 차원에서는 1949년 6월 철수했던 미군을 다시 불러들임으로써 분단 고착화와 미군 영구 주둔의 길을 열었다. 당초 미국은 소련의 전면전에서 한반도는 전략적 가치가 없다는 이유로 철수했으나 6.25를 계기로 한미 군사동맹을 결성하기에 이른다.

또한 미국은 대만에 제7함대를 파견해 군사적 보호에 나섰고 베트남에는 군사고문단을 파견한다. 이로써 미국은 공산 중국과 정면 대립하게 됐고 베트남에서는 이후 20여년간 군사 개입을 하게 된다.

미국은 한국전쟁 직전까지 대만 장개석 정권의 교체를 전제로 대륙 정권과의 수교를 고려하고 있었다. 이른바 차이나 로비, 즉 미국 공화당 등에 대한 막강한 로비를 통해 '본토 수복'을 고집하는 장제스 정권의 제거를 전제로 공산당 정부와의 수교 가능성을 모색하고 있었다.

실제로 영국은 1950년 1월 마오쩌둥 정부를 승인했으며 미국에 대해서도 수교를 촉구했다. 또한 미국의 현지 외교관들도 모택동 정부가 소련의 하수인이 아니며 소련보다는 미국과의 협력을 원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그러나 6.25 발발로 이 가능성은 무산된다. 미국의 대만 방어에 이어 1950년 10월 중공군의 개입으로 미군이 처참한 패배를 당하면서 이후 1972년까지 미국과 중국은 극단적 대립을 지속한다.

또한 6.25 이전까지 미국은 프랑스의 인도차이나전쟁에 경제 지원을 했으나 군사 개입은 삼갔다. 식민지 해방을 내세운 처지에서 과거 식민지를 유지하려는 시대착오적 전쟁을 도울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프랑스를 지원한 것은 서유럽 냉전에서 프랑스의 협조를 끌어내기 위한 고육책이었다. 그러나 6.25가 발발하자 베트남의 공산화를 우려한 미국은 전쟁에 직접 뛰어든다. 미국의 베트남전쟁 개입은 사실상 6.25와 함께 시작된 셈이다.

일본 경제의 부흥

동아시아 차원에서 한국전쟁은 일본 경제 부흥과 미일 군사동맹의 결정적 계기로 작용했다. 미군이 전쟁물자의 대부분을 일본에서 현지 조달했기 때문이다. 6.25 특수의 영향으로 일본의 제조업 생산은 이미 1950년 10월이 되면 전쟁 이전 수준을 훨씬 뛰어넘는다. 당시 요시다 시게루 총리의 말대로 6.25는 '하늘이 내린 선물'이었다.

전쟁 기간 미국은 의회 승인 없이 군부 재량으로 물품을 구입하는 특수공급(Special Procurement)이라는 제도를 통해 약 35억 달러 상당의 전쟁 물자를 일본에서 구매했다. 이는 마셜 플랜을 통해 서독 경제에 투입된 액수와 같다. 1950-52년 일본 수출의 70%가 미국의 군수물자 구매였다.

또한 전쟁 특수를 통한 외화 수입이 전체 외화(달러) 수입의 30%가량을 차지했다. 일본 외무성이 1955년 집계한 바에 따르면 전쟁 첫해 전쟁 특수에 의한 수입은 1억4800만 달러로 전체 외화 수입의 14.8%였다. 1951년에는 5억9000만 달러, 26.4%로 껑충 뛰었고, 1952년 8억2400만 달러로 36.8%, 1953년 8억900만 달러로 38.1%가 된다.

1951년 3월 제조업 생산은 전년 대비 50% 증가했으며 1952년이 되면 생활 수준이 전쟁 이전 수준으로 회복됐다. 1953년 제조업 생산은 1949년의 2배가 된다.

미국은 1946년 일본의 조선업을 완전 폐기할 계획이었으나 6.25를 계기로 소생한 조선업은 1956년 세계 조선의 26%를 차지하면서 한 세대 동안 부동의 세계 1위를 차지한다. 재벌 해체는 없던 일이 돼 미쓰이, 미쓰비시, 스미토모 등 3대 재벌이 부활한다. '코리아가 나타나 일본을 구했다'고도 할 수 있겠다.

아이러니는 일본의 대동아공영권을 저지하기 위해 전쟁을 벌인 미국이 전후 불과 5년 만에 바로 그러한 경제권(공산 중국을 제외한)을 만들어 주었다는 것이다. 냉전의 논리는 미국으로 하여금 일본의 경제 부흥에 직접 나서도록 만든 것이다

중국의 상실로 일본의 부흥이 시작됐고, 일본의 부흥은 북한의 남침을 촉발했으며, 한국전쟁은 일본뿐만 아니라 남한, 대만도 미국의 전략적 자산으로 격상시켰고, 궁극적으로 지구 반대편 서독의 재건까지 미국이 떠맡도록 만들었다.

보다 긴 역사적 안목으로 보자면 1854년 일본을 개항시켰고 1904년 러시아의 동진을 막기 위해 일본을 지원했던 미국이 2차 대전 때는 일본의 동아시아 정복을 막기 위해 소련과 손을 잡았고, 전후 중국이 공산화되고 소련과 동맹을 맺자 공산주의의 팽창을 저지하기 위해 이번에는 일본을 도와 동남아 경제와의 연결을(태평양전쟁 당시 일본이 추구했던) 추진한 것이다.

이러한 역사의 아이러니 속에서도 미국에게는 단 하나의 일관된 목표가 있었다. 그것은 아시아를 미국의 이익에 맞게 문호 개방시키는 것이다. 미국 역사가 월터 라페버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아시아를 개방적이며 지구적인 자본주의 체제에 통합하는 것이야말로 미국의 일관된 목표였다. 이 목표를 위해 일본과 싸워야 했다면 싸웠고, 일본 경제를 부흥시키고 다른 아시아 경제와 통합시켜야 했다면 그렇게 했다. 일본의 문화는 흥미롭고 강했지만, 미국이 보기에 얼마든지 변형 가능했다. 미국의 세계관에 봉사하도록 만들 수 있었다. 미국에게 일본은 목표가 아니라 수단이었다. 미국 대외 정책의 보다 넓은 지역적, 세계적 목표를 달성하는 데 필요한 수단일 뿐이었다."(<충돌 : 역사 속의 미일 관계>, The Clash: U.S.-Japanese Relations Throughout History, p. 271)

한편 6.25는 전범 등 일본 보수세력 재기의 기회가 된다. 일례로 미군 점령 당국은 6.25 발발 직후 일본 공산당 기관지 <아카하타>에서 공산당원 및 동조자 70명을 해고한 데 이어 가을에는 <아카하타>를 무기 정간시키고 언론계 전체에서 공산당 동조자 700명을 축출한다. 반면 1951년에는 전후 군국주의자로 분류돼 추방됐던 보수파 언론인 351명을 복직시킨다.

나아가 1951년 4월 11일 맥아더 해임 이후 연합군 총사령관에 임명된 리지웨이 장군은 전범 등으로 정계에서 추방된 인사 중 25만 명을 복권시킨다. 일본이 주권을 회복한 이후 첫 선거인 1952년 10월 총선에서 당선된 중의원 중 42%가 추방 해제 인사였다. 전범 세력의 화려한 복귀가 이루어진 것이다. (2편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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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규

서울대학교를 나와 경향신문에서 워싱턴 특파원, 국제부 차장을 지내다 2001년 프레시안을 창간했다. 편집국장을 거쳐 2003년부터 대표이사로 재직했고, 2013년 프레시안이 협동조합으로 전환하면서 이사장을 맡았다. 남북관계 및 국제정세에 대한 전문 지식을 바탕으로 연재를 계속하고 있다. 현재 프레시안 상임고문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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