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체 속을 어디든 돌아다니며 세균을 죽이고 약물을 전달하는 바이러스 크기의 로봇, 파리만한 공격용 비행기, 분자 크기의 암세포 파괴 기구, 세포 크기만한 컴퓨터. 나노기술이 실현되면 한없이 작은 여러 가지 장치를 개발할 수 있다."
나노기술(NT)을 소개한 한 일간지의 칼럼 내용 중 일부이다. 최근 몇 년간 과학기술계의 가장 큰 화두는 생명공학(BT)과 나노기술이었다. 이중 생명공학이 인간 복제, 인간게놈프로젝트, 배아 복제 논쟁 등을 통해 여러 가지 사회, 윤리적 논쟁을 불러일으키며, 많은 관심을 받아왔던 반면 나노기술은 전세계적으로 엄청난 금액의 연구개발비가 들어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 기술의 실체가 베일에 싸여 있다.
***법에 명시된 기술영향평가 할 의지는 있나**
우리나라도 지난해 12월 나노기술개발촉진법이 제정한 이후, 지난달 말 시행령이 공포될 때까지 나노기술에 대한 어떤 사회적 토론도 부재했었다. 이러다보니 올해 2천4백96억원을 나노기술 개발에 투입하고 있으면서도, 나노기술이 가진 응용가능성에 대한 철저한 검토나 혹시 있을지 모를 부작용에 대한 관심은 거의 전무한 상태다. 언론 역시 나노기술 연구자들과 업계의 장밋빛 전망만 보도할 뿐, 나노기술을 똑바로 바라보기 위한 노력은 거의 기울이지 않고 있다.
나노기술에 대한 현 상황은 심각하다. 심지어 법에 명시된 영향평가 역시 무기한 연기하고 있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작년 12월에 제정된 나노기술촉진법에는 "나노기술의 발전과 산업화가 경제·사회·문화·윤리 및 환경에 미치는 영향 등을 미리 평가하고 그 결과를 정책에 반영하여야 한다"라고 명시되어 있다. 하지만 이런 영향평가에 대해서는 거의 신경을 쓰지 않은 채, 나노기술에 대한 투자만 계속 집행되고 있는 상황이다. "시행 주체가 명시되어 있지 않은 이런 법안은 생색내기용"이라는 시민단체 관계자들의 비판이 설득력을 얻는 대목이다.
이런 국내 현실을 비웃기라도 하듯 해외에서는 나노기술에 대한 부정적 전망이나 부작용에 대한 지적이 심심치 않게 나오고 있다.
***나노기술 시장전망 "과대포장됐다"**
나노기술은 머리카락 굵기의 10만분의 1에 해당되는 나노미터로 측정되는 극미한 원자나 분자를 다루는 기술을 포괄하는 명칭이다. 지난 2000년 당시 클린턴 미국 대통령이 '나노기술 이니셔티브'를 선포한 이후 전세계적으로 나노기술에 대한 투자 붐이 일었다. 미국은 2000년 이후 약 20억 달러를 나노기술 프로젝트에 투자했고, 유럽연합도 2002년부터 5년 동안 나노기술 연구에 약 10억 달러 이상을 투자할 계획을 가지고 시행중이다. 일본도 2002년에 7억 5천만 달러를 나노기술 연구에 투자하는 등 나노기술 연구개발에 신경을 써왔다.
하지만 최근 이런 나노기술에 대한 투자가 주춤해지는 움직임이 보인다. 가장 큰 이유는 "1조 달러라는 나노기술 시장전망이 과대포장됐다"는 비판이 업계 관계자들과 전문가들 사이에서 제기되었기 때문이다.
우선 나노기술을 상품화하기에는 현재 기술이 너무 보잘것없다. 전문가들은 지금 우리가 나노기술이라고 부르는 것이 "앞으로 과연 나노기술이라는 한 가지 범주로 묶일 수 있는 것인지조차 불확실하다"고 지적한다. 나노기술은 그 예상되는 응용 분야만 통신, 생명공학, 초정밀전자공학, 에너지 분야 등 전혀 다른 산업일 뿐만 아니라 그 산업에서 어떤 식으로 응용될지도 아직 불분명하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바이러스 크기의 로봇 등 연구자들이 얘기하는 나노기술을 응용한 초소형 전자기계장치가 현실화하기 위해서는 넘어야 할 벽이 너무 많다는 지적이다. 현재 기계공학 분야의 초소형전자기계시스템은 나노기술을 응용하기에는 1천배나 더 크기 때문이다.
이런 불확실성을 틈타 나노기술과 별 상관없는 기존의 나노미터 영역을 다뤘던 고체 물리학, 재료공학 등의 연구자들이 자신들의 분야를 나노기술이라고 주장하는 일이 발생하기도 했다. 전문가들은 통상 10에서 1백 나노미터의 수준에서 이루어지는 기술을 나노기술로 명명하는 것이 적당하다고 얘기해 왔는데, 이 기준 역시 불명확하기 때문에 연구자들이 너도나도 자기 연구 분야를 나노기술 연구로 포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우리나라는 물론이고 선진국들의 나노기술 연구에 투자된 비용의 상당 부분은 이런 나노기술로 포장된 영역에 대한 투자"라고 지적한다.
이러다보니 나노기술 연구에 대한 막대한 투자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나노기술에 접근한 업체는 손으로 꼽을 정도다. ZDNet이나 이코노미스트 등 각종 디지털, 경제 전문지는 나노기술 기반 제품을 보유한 업체 중 비코 인스트루먼트, FEI 코프와 같은 극히 일부 업체만 순익을 내고 있는 실정이라고 지적한다. 최근 나노기술 전문가들이나 업계 관계자들이 "나노기술은 단기적인 이익보다는 장기적인 시야를 가지고 투자를 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내거나 "과학잡지, 시장조사기관, 경제 신문들의 과대포장을 경계해야 한다"고 자성을 촉구하는 것도 이런 사정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이다.
***인체나 환경에 치명적인 해를 입힐 가능성도 있어**
전세계 나노기술 연구자들을 더 긴장케 하는 것은 나노기술이 인체나 환경에 치명적인 해를 입힐 가능성이 있다는 연구 결과나 주장이 잇달아 나오는 현실이다.
지난 3월에는 나노기술을 응용해 만든 탄소 나노튜브를 쥐의 폐 조직에 주입했을 때, 쥐가 질식사하는 일이 발생했다. 또 미국에서는 폴리테트라플루오로에틸렌(PTFF)이란 물질을 1백30 나노미터 크기로 만들어 흡입시켰을 때 아무 이상 없던 쥐가 20 나노미터 입자를 흡입시켰을 때는 죽는 일도 발생했다. 마치 굵은 흙먼지보다 각종 미세먼지가 인체에 더 위협적인 것처럼, 아주 극미한 나노입자가 인체에 훨씬 치명적일 수 있다는 사실을 이 실험이 알려준 것이다. 관계자들은 "현재 나노입자가 선크림이나 화장품의 원료로 쓰이고 있기 때문에 대책이 시급히 요구된다"고 주장한다.
이런 나노입자의 위험성은 인체뿐만 아니라 환경에도 심각한 해를 입힐 수 있다. 인공의 나노입자는 자연계의 세포나 조직 어디든 침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썬마이크로시스템즈의 핵심 엔지니어이자 창업자이기도 한 빌 조이는 "더 큰 문제는 나노기술이 20세기 원자력이나 화학이 그랬던 것처럼 군사적으로 이용될 때"라고 주장하면서, 이런 "나노입자의 위험성이 군사기술로 응용될 경우에는 인체와 환경에 치명적인 해를 입힐 것"이라고 경고한다. 최근에는 영국의 환경 잡지 에콜로지스트가 많은 분량을 할애해 나노기술의 현재 모습과 그 위험을 다각도로 분석해 경종을 울리기도 했다.
이런 연구결과와 경고를 감안해 미국의 연방 의회는 지난 4월 9일 직접 전문가들의 발언을 경청하기도 했다. 이 자리에 참석한 저명한 기술철학자인 랭던 위너는 나노기술의 잠재적 위험성을 경고하면서 그 대책을 촉구했고, 미국 라이스대 나노기술환경생물센터 비키 콜빈 소장은 "나노입자가 더 퍼지기 전에 안정성에 대한 평가를 하는 것이 피해를 줄이는 최선책"이라고 주장했다. 또 캐나다의 민간 환경 단체인 ETC 역시 "안정성이 입증될 때까지 전세계적으로 나노입자의 생산을 금지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한국, 나노기술 위험성 시험장이 될 수도 있어**
한국의 많은 나노 연구자들과 정책 입안자들은 "한국의 나노기술 연구 수준이 미국, 유럽 등 선진국에 비해서 뒤떨어지지 않기 때문에, 빨리 연구개발을 수행할 경우 선진국보다 앞서 갈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작년 12월 미국과 일본이 나노기술촉진법을 준비하고 있을 때, 미리 법안을 통과시킨 것도 이런 사정과 무관하지 않다.
하지만 오히려 "이런 조급함이 자칫 한국을 나노기술 위험성 시험장으로 전락시킬지 모른다"는 비판도 제기되고 있다. 한 전문가는 프레시안과의 전화 통화에서 "한국은 지금까지 항상 선진국의 과학기술을 따라가기(catch-up)만 했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과학기술 지식뿐만 아니라 그것의 다양한 부작용까지도 미리 인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나노기술은 한국이 가장 앞설 수도 있다. 바로 이 때문에 나노기술의 잠재적 위험을 한국이 고스란히 안고 갈수도 있는 것이다"라고 지적했다.
미국이 '나노기술 이니셔티브'를 가장 먼저 주장한 뒤에도 신중하게 나노기술을 둘러싼 다양한 면을 고려하고 법안에 포함시킨 것을 주목해야 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훨씬 장기간의 준비 기간을 거쳐 나온 미국의 나노기술 법안은 우리나라보다 몇 개월 늦게 제정되긴 했지만 훨씬 충실한 내용을 담고 있다. 프레시안이 확인한 바에 따르면 미국은 법안에 연구개발, 인력양성, 정보유통 등 통상 기술촉진법이 담고 있는 내용뿐만 아니라 나노기술 연구비의 5%를 무조건 나노기술의 영향평가에 쓰도록 규정하고 있다. 현재 연구비 규모를 감안할 때 5%는 매년 50만 달러에 해당되는 돈이다.
***기술영향평가, 법제도적 시스템부터 완비해야**
더구나 미국은 영향평가를 위한 별도의 기관(American Nanotechnology Preparedness Center)까지 명시하고 있어, 나노기술에 대한 본격적인 평가를 진행할 예정이다. 특히 미국은 법안에서 나노기술의 교육적, 법적, 고용 효과의 측면과 사회, 윤리적 함의를 평가하도록 하는 등 그 구체적 항목을 명확히 규정하고 있고, 평가 단계부터 평가 결과를 사회에 확산시키는 것까지 전 과정이 기술되어 있어 국내 법안과 비교하기가 민망할 정도이다.
한 나노기술 연구자는 "부실한 법안을 몇 개월 먼저 만들어놓고, '이제 미국과 일본 등 나노 선진국을 앞설 수 있다'라고 얘기하는 한심한 작태에서 벗어나, 선진국이 신기술을 어떤 사회적 합의 과정을 거쳐서 발전시키고 있는지 노하우를 배우려고 노력해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다행스러운 것은 우리나라 역시 과학기술기본법에 제정된 기술영향평가를 수행할 움직임이 보인다는 것이다. 정부는 최초의 기술영향평가 대상으로 나노기술을 선정할 예정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움직임에 대해 관계자들은 "자칫 형식적인 기술영향평가가 될 수도 있다"면서 "서두르기보다는 평가 항목을 선정하고 담당 주체를 확실하게 정하는 등 법제도적 시스템을 정비하는 것이 시급하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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