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명하고 세계화된 경제'라는 타이틀로 노무현 정부의 '경제비전'을 대내외적으로 천명하는 국제회의가 30일 서울 신라호텔에서 열렸다. 일종의 국가IR(투자설명회)였다. 회의는 노무현 대통령의 기조연설을 시작으로 10여명의 국제적 지명도를 가진 국내외 학자들이 모여 발표와 토론을 가지는 방식으로 전개됐다.
도널드 존스턴 OECD 사무총장, 에이스케 사카키바라 일본 게이오대 교수, 로버트 배로 하버드대 교수 등 쟁쟁한 학자들이 패널로 포진했지만 토론자로 나선 피터 스타인 아시안월스트리트저널(AWJ) 홍콩본부 편집국장의 발언이 유독 언론의 관심을 끌었다. 그는 미국 예일대에서 비교문학으로 학위를 취득한 후 아시안월스트리트저널에서 편집장 및 리포터로 재직하다가 98년 이후에는 동 저널의 편집국장으로 활동하고 있는 '아시아통'이다.
저널리스트적인 감각적 표현과 본인의 표현을 빌면 "한국을 존경하는 마음에서 하는 발언"이라는 점이 수긍이 갈 만큼 비교적 진지하고 균형잡힌 시각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프레시안은 이에 스타인 국장을 이날 오후 따로 만나 보다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스타인 국장은 우선 SK글로벌 사태와 관련,"SK글로벌 문제는 한국의 일개 기업의 문제가 아니다. 이 문제를 어물쩍 처리하게 된다면 한국 경제에 보다 큰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닌가 의구심이 커질 수 있다. 주주들에 피해를 주면서까지 부실 계열사를 지원하는 한국의 재벌관행이 변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구심이 생길 수 있다"고 비판했다. 그는 "건전한 기업이 부실 계열사를 지원하는 것을 막을 필요가 있으며 정부도 규제완화와 함께 소액주주의 권리를 보호해줘야 한다"고 조언했다.
스타인 국장은 최근 조흥은행 파업사태 해결방식도 비판했다. 그는 "조흥은행 노조가 고통을 늦추기 위한 타협안을 맺는 과정에서 무리한 요구를 했고 이를 수용한 것이 신한-조흥의 타협안이었다고 보고 있다. 해외투자가들의 눈에는 이같은 타협안이 만들어진 것을 두고 한국의 노조 문제를 다루는 데 있어서 정부 의지의 후퇴로 간주하고 있다"는 보다 구체적이며 강도 높은 발언을 쏟아냈다.
그는 정부가 대표적 외자유치책으로 추진중인 경제특구에 대해서도 비판적 입장을 보였다. 그는 "외국인 투자자들이 경제특구 자체를 싫어한다고 할 수는 없지만 최대 혜택은 특정지역의 개혁보다는 전체적으로 제도개혁이 이뤄지는 것으로 생각한다"며 "일부 기업들에 대한 특혜는 기업 활동에 부정적인 효과를 가져오는 만큼 10% 외국인지분을 가진 재벌들이 외국인투자기업으로 특혜를 누린다는 상황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고 본다"고 지적했다.
그는 "홍콩에서 사업을 하려면 고비용, 고임금이 요구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홍콩에서 사업을 하는 것은 규제와 법체계가 예측가능하며 일관성이 있다는 점 때문"이라며 외국투자를 유치하기 위해선 우선적으로 일관된 정책과 법체제를 확립할 것을 주문했다.다음은 스타인 국장과의 인터뷰 내용 전문이다.
프레시안: 토론에서 비판을 많이 했던 SK글로벌 사태와 관련해서 우선 질문을 하겠다. 현재 해외채권단이 아시안월스트리트저널에서도 보도했듯 SK글로벌 자구안에 대해 거부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해외채권단이 국내채권단과는 달리 이같은 거부의 뜻을 보이는 것은 채권현금매입비율(CBO)을 올리는 게 목적인가 아니면 정말 순수하게 한국 기업의 투명성 제고를 위한 SK글로벌 청산이 목적인가.
스타인: 한국의 경제나 기업들에 관한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에 SK글로벌의 해외채권단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요구하고 있는지는 잘 모르지만, SK글로벌의 국내 채권단이 승인한 SK글로벌 지원안을 해외채권단이 일단 승인하지 않았다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은 SK글로벌의 지원안이라는 것이 해외채권단이나 소액주주들에게 결코 만족스러운 것이 아니라는 점을 보여주는 것이다.
프레시안: 토론에서 부실채권 처리에 한국이 모범을 보였다고 말했는데, 카드채 문제를 보면 한국은 여전히 허술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는 지적이 있는데.
스타인: 카드채 문제가 일어난 이유는 건전한 리스크 관리 절차를 갖추지 않았기 때문이다. 현재 리스크 평가 기준을 바꾸지 않는다면 카드채는 계속 위협이 될 수 있다.
프레시안: 카드채의 경우 리스크 관리가 부재했던 게 아니라 외환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의도적인 정책에 따른 결과가 아니냐는 시각도 있다.
스타인: 한국 정부가 의도적으로 신용카드 위기를 방조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국내 수요를 진작하겠다는 방식은 매우 스마트한 접근 방식이었다. 동아시아의 전통적인 경기성장책은 수출 위주였다. 그러나 선진경제라면 국내 소비도 어느 정도 일어나야 한다. 그런 점에서 경기변동에 따른 부작용으로부터 정부가 국내 소비를 일으키려는 시도는 현명했다. 그러나 한국은 소비신용에 엄격한 규제를 하다가 대폭적인 규제완화를 하는 식으로 극단적으로 변화를 겪다보니 금융기관, 소비자들이 대처할 능력이 떨어졌다.
프레시안: 카드채 문제가 제2의 금융위기를 불러일으키는 요인이 될 수도 있다는 경고도 나오고 있는데.
스타인: 카드채 문제가 제2의 IMF를 불러일으킬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아직 미진한 면이 없지는 않지만 시장감독이나 기업지배구조 등에서 상당한 개혁이 이뤄진 것으로 보고 있으며, 한국의 외환보유고가 1천2백억 달러에 달하는 반면 단기채무는 그 절반 이하인 것으로 알고 있어 과거와 같은 금융위기에 빠질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본다.
프레시안: 한국의 저명한 경제학자인 정운찬 서울대 총장은 외환위기 5년을 평가하는 심포지엄에서 "한국의 외환위기는 부실기업에 대한 금융지원 등의 문제가 쌓여있다가 외부의 충격으로 촉발된 미시구조적인 취약성 때문에 일어난 것으로 지금도 기업개혁이 미진해 언제든지 외부의 충격이 가해지면 IMF 위기가 닥칠 수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스타인: 한국에서 미시구조적인 개혁이 미진하다는 지적에는 동의한다. 한국의 경제가 장기적으로 견고하게 성장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조건이 갖춰져야 하는데, 일단 한국이 기존의 부실채권 처리를 잘 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앞으로 기업들이 새롭게 투자할 때 과연 현명하게 투자하고 있고, 은행들은 현명하게 대출을 해주고 있는가, 그래서 앞으로 5~10년후에 어떤 모습을 보일 것인가는 계속 지켜봐야 할 문제다. 그렇기 때문에 SK글로벌 사태를 전세계가 주시하고 있다. SK글로벌 문제는 한국의 일개 기업의 문제가 아니다. 이 문제를 어물쩍 처리하게 된다면 한국 경제에 보다 큰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닌가 의구심이 커질 수 있다. 주주들에 피해를 주면서까지 부실 계열사를 지원하는 한국의 재벌관행이 변하지 않았다는 의구심이 생길 수 있다는 것이다.
***신한-조흥 타협안은 노조에 대한 정부 의지의 후퇴**
프레시안: 금융 개혁이 잘 된 편이라고 말하는데, 최근의 조흥은행 매각은 제대로 이뤄진 것으로 보는가.
스타인: 조흥은행 노조가 고통을 늦추기 위한 타협안을 맺는 과정에서 무리한 요구를 했고 이를 수용한 것이 신한-조흥의 타협안이었다고 보고 있다. 해외투자가들의 눈에는 이같은 타협안이 만들어진 것을 두고 한국의 노조 문제를 다루는데 있어서 정부 의지의 후퇴로 간주하고 있다. 한국에서 사업을 하는 데 어느 정도 어려울 것인가를 예측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일종의 신호가 되어 주고 있다. 한국에서 많은 기업들이 민영화될 것인지만 한국에서 사업하는 것이 쉽지 않겠구나 하는 생각을 갖게 만들었다.
프레시안: 김진표 경제부총리가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는 환경을 조성하겠다고 약속했다. 해외투자자들은 노무현 정부의 이러한 약속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고 있나.
스타인: 해외투자자들은 아직 노무현 정부에 대해 평가하기에 이른 시점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정보수집 단계다. 다만 해외투자가들은 노 대통령과 김 부총리의 정책 발표에 대해 호의적인 반응을 보일 것으로 본다. 김대중 전 대통령 때부터 해온 시장개혁을 지속해 나가겠다는 약속이 있었기 때문이다. 김 부총리도 회계 개혁, 신용평가기관 설립 등을 언급했는데 이 또한 외국 투자자들에게 바람직하게 받아들여지는 정책이다. 그러나 아직은 전체적으로 평가하기에는 이르다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SK글로벌 사태, 조흥은행 매각 등의 향후 전개상황을 예의주시하고 있다. 외국 투자자들은 이러한 현안들이 바로 노무현 정부가 약속한 정책들을 어느 정도까지 진지하게 추진할 것인지 가늠하게 해주는 시험대로 간주하고 있다.
프레시안: 노무현 정부가 추진중인 동북아 금융허브 구상에 대해선 어떻게 평가하나.
스타인: 금융허브가 되기 위해서는 예측가능한 규제, 법 정비 등이 전제가 되어야 한다. 동아시아에 하나의 금융허브만 존재하라는 법은 없다. 따라서 상하이가 금융허브로 발전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지만 아마도 5~10년내에 상하이가 금융허브가 될 가능성은 없다고 본다. 상하이에 많은 인재가 있지만 홍콩과 비교할 때 중국의 기업들이 해외에서 자금을 조달하려고 할 때 중국 상하이보다는 홍콩에서 자금 조달을 하려고 한다. 홍콩에는 자금조달 업무를 위해 필요한 회계사 등 펀더멘털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상하이가 금융허브가 된다는 것과 중국에 투자한다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상하이보다는 서울이 동아시아 지역에서 자금조달 창구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이 더 높으며, 한국 경제를 위해서도 서울이 중국의 기업들의 자금조달 창구로 이용할 수 있는 금융허브로 성장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경제특구, 일부의 특혜가 되면 호응 얻기 힘들어**
프레시안: 경제특구가 외자유치를 위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보는지.
스타인: 해외기업가들은 특정지역에 격리돼 특혜를 누리기보다는 전체지역에서 공정하게 거래할 수 있는 여건을 원한다.
프레시안: 흥미로운 지적을 해주었는데, 10%만 외국인 지분이 있으면 외국인투자기업으로 분류되는 경제특구법 조항에 따라 국내 재벌 기업들 주요기업 대부분이 외국인 투자기업으로서 경제특구에서 특혜를 누리게 되기 때문에 한국의 노조단체들이 노동조건 악화만 부르는 경제특구에 강력하게 반발하고 있다.
스타인: 외국인 투자자들이 경제특구 자체를 싫어한다고 할 수는 없지만 최대 혜택은 특정지역의 개혁보다는 전체적으로 제도개혁이 이뤄지는 것으로 생각한다. 일부 기업들에 대한 특혜는 기업 활동에 부정적인 효과를 가져온다. 10% 외국인지분을 가진 재벌들이 외국인투자기업으로 특혜를 누린다는 상황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고 본다.
법인세 인하 등이 가능하다면 그 혜택이 어느 기업에게건 골고루 돌아가야 한다. 홍콩에서 사업을 하려면 고비용, 고임금이 요구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홍콩에서 사업을 하는 것은 규제와 법체계가 예측가능하며 일관성이 있다는 점 때문이다. 낮은 법인세 등 특혜가 있다면 홍콩에선 모든 이가 동동한 특혜를 받고 있다는 것이다.
현재 홍콩과 중국 본토간의 무역협정을 둘러싸고 큰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중국에서 홍콩 기업이 들어와주면 특혜를 주겠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홍콩 기업이라는 것이 중국인이 소유하고 있는 것만 말하는지, 홍콩에서 활동하는 모든 기업을 포함하는지에 대한 논란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홍콩에서 활동하는 기업주가 중국인이 아닌 경우 중국과의 거래에서 차별을 받는다면 이는 홍콩에서 활동하는 모든 기업들에 '동등한 여건을 제공한다'는 홍콩의 정신을 위반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기업들이 많다.
프레시안: 북한의 신의주 특구의 경우에 대해서 현재 상황을 어떻게 보고 있나.
스타인: 신의주 특구는 중국의 선전 등 특구를 흉내낸 것에 불과하다. 중국의 사업가 양빈을 행정장관에 임명했을 때부터 북한의 진지한 의지가 있는지에 대해 상당한 의구심을 가졌다. 북한이 가격 통제, 시장 규제 등에 대한 한계를 느껴 어쩔 수 없이 경제특구라는 형식으로 규제완화를 시도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신의주 특구는 특구 구상에 대한 발표와 양빈의 임명에서 체포에 이르기까지 과정을 보면 2002년 세계 언론을 장식한 뉴스 중 가장 기괴한 것이라 말하고 싶다.
***미국 경제 회복 여부는 큰 의문부호**
프레시안: 한국의 경제는 2.4분기가 경기의 바닥이 아니라 L자형 침체곡선을 그리는 시작이라는 위기감이 고조되고 있다. 30일 심포지엄에서는 향후 한국의 경제에 대해 긍정적인 전망이 대세를 이뤘는데, 미국 경제가 하반기에 회복할 것이라는 전제를 깔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스타인: 미국 경제가 하반기에 정말 회복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커다란 의문이 든다. 아직 어떻다고 판단을 내릴 수 없다. 다만 미국의 경제회복 여부가 한국 경제의 회복에 큰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점은 별 의문이 없다.
프레시안: 최근 미국, 일본 등 세계 각국이 중국의 위앤화에 대해 평가절상 압력을 넣고 있는데, 금융선진국인 홍콩부터 고평가된 홍콩달러를 왜 평가절하하지 못하느냐.
스타인: 홍콩은 중국에 반환되는 시점에서 홍콩달러에 대한 투매가 일어나자 이를 막기 위해 '커런시 보드 시스템'이라는 환율체제를 채택했다. 이것은 중국의 페그제와 다르다. 홍콩달러와 미국달러를 7.8대 1의 비율로 고정시켰을 뿐 아니라 홍콩 정부가 홍콩달러와 달러를 완전히 동등한 보장을 받는 화폐로 대우하고 무제한 교환을 보증하는 체제다. 중국은 이와달리 달러와의 교환에 많은 제한이 있다.
이 때문에 홍콩당국이 커런시 보드 시스템을 포기하는 순간 투자자의 신뢰를 저버리는 파괴적 선택을 하는 셈이 된다. 따라서 중국이 위앤화에 대해 변동폭을 늘려주는 방안을 택하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홍콩의 환율체제에 손대는 것이 어려운 일이다.
홍콩이 커런트 보드 시스템을 택했다는 것은 미국의 그린스펀에게 홍콩의 통화정책을 아웃소싱한 것과 같다고 비유할 수 있다. 미국이 금리를 내리면 홍콩도 금리를 똑같이 내리게 되는 것이다. 커런트 보드 시스템을 채택하는 나라는 세계에서 별로 없으며 마치 배우자를 선택하는 것처럼 한 번 선택하면 탈출할 수 없는 종류의 극단적 처방인 것이다.
프레시안: 홍콩 경제의 현황은 어떤가.
스타인: 홍콩은 아시아 위기 때 부동산 거품이 꺼지면서 60% 이상 폭락했는데 이 때문에 부동산에 투자한 많은 기업들이 큰 손해를 보았다. 세계 경제 특히 미국 경제가 악화되고 이라크 전쟁, 사스 등이 겹치면서 홍콩의 실업률이 8.3%로 치솟는 등 경제가 상당히 취약해졌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