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학술지 논문 게재를 중시하는 기준 때문에 학문평가에서 높은 점수 받으려고, 국내서 필요한 B형 간염바이러스 연구 대신 AIDS 연구에 치중해서야 말이 되냐."
경제학과와 물리학과 교수들이 한국대학교육협의회(대교협, 회장 김우식 연세대 총장)의 학문분야 평가를 최근 정면 거부키로 해, 올해 대교협 평가 사업 자체가 불투명해질 전망이다.
이런 교수들의 반발은 대교협 평가 사업 자체에 대한 비판 외에도, 최근 활발해진 학문 영역 평가 관행에 대한 문제제기도 포함하고 있어 그 결론이 주목된다.
***교수들의 이유 있는 항변**
전국 4년제 대학을 회원으로 하는 법률 단체인 대교협은 지난 10여년 동안 매년 두세 개의 학문 분야를 선정해 평가 사업을 진행해 왔다. 작년에 사회복지학, 수학, 토목공학과를 평가했고 올해는 경제학, 문헌정보학, 물리학과를 평가할 예정이다.
문제는 평가를 위해 대교협에서 배포한 평가 편람 내용에 경제학과 교수들이 강력히 반발하면서 시작되었다. 현재는 경제학 교수들뿐만 아니라 물리학 교수들도 “평가의 무기한 연기와 평가 체제의 전면적 개편을 요구”한 상태다. 관계자들은 이런 교수들의 반발은 지난 10여년간 진행돼 온 대교협의 평가 자체를 교수들이 부정하는 데 근본적인 원인이 있다고 입을 모은다.
평가 과정에서 발생하는 여러 가지 실무적인 문제점들도 많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국립대, 사립대, 수도권 대학, 지방대와 같은 전혀 상이한 조건에 처해 있는 대학의 학과들을 획일적인 기준으로 평가하려는 의도 자체에 거부감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올해 대교협 평가는 예년의 절대평가와 달리 상대평가를 시도할 예정이어서 그 거부감을 더욱 부추겼다는 것이다.
한 관계자는 “이런 교수들의 반발은 경제학이나 물리학과 같은 기초학문이 처한 어려운 현실과도 무관하지 않다”고 얘기한다. 특히 지방대의 경우에 “학생들이 지원을 안 한다는 이유로 공공연히 기초학문 분야 통폐합 얘기가 나오는 실정에서, 이런 대교협의 평가 결과는 대학 경영진의 ‘살생부’ 역할만 한다”는 것이다.
대교협 관계자는 프레시안과의 인터뷰에서 “교수들의 문제제기에 어느 정도 공감을 한다”면서 “평가가 갖는 부정적인 면뿐만 아니라 긍정적인 기능도 염두에 둔다면, 교수들도 무조건 거부할 게 아니라 보완하고 시정해서 그 긍정성을 극대화하도록 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학문 영역 평가 무엇이 문제인가?**
한편 이번 일을 기화로 최근 몇 년 새 교수 업적 평가 등을 이유로 활발해진 학문영역 평가에 대해서 근본적으로 검토해보자는 주장이 제기돼 관심을 끌고 있다.
문제가 제기된 부분은 <경제학 평가 편람>에 실린 교수 평가 부분이다.
편람에 따르면 국제 학술지 중에서 특히 미국 경제학 리뷰(AER)를 비롯한 미국의 일급 학술지에 실린 논문 한 편은 8점을 받는데 비해, 한국학술진흥재단에 등재된 국내 학술지에 실린 논문 한 편은 2점을 받도록 되어 있다. 이 문제를 본격적으로 공론화한 김종엽 교수(한신대, 사회학과)는 이런 평가 기준은 단순하게 “'영어로 논문 쓰는 것이 한국어로 쓰는 것보다 더 힘들고, AER같은 학술지에 싣는 것이 국내 학술지에 싣는 것보다 더 어려울 테니 당연한 것'이라고 넘기기엔 더 근본적인 문제점이 있다"고 지적한다.
김종엽 교수는 “미국의 일급 저널에 논문을 싣기 위해서는 국내 학술지에 게재할 논문을 쓰는 것과는 전혀 다른 연구 방향, 이론적 지향, 문체, 자료 수집이 요구된다”면서 “우리나라 경제학자가 미국 학술지에 논문을 싣는다는 것은 미국이라는 맥락 속에 깊이 발을 담그는 것을 의미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미국 종속적인 학문 세계의 질서를 강요하는 일이라는 것이다.
***이공계도 평가 관행 재검토해야**
이런 김종엽 교수의 지적에 이공계 역시 자유롭지 않다. 지난 10년간 이공계는 미국의 민간기관인 과학정보연구원(ISI)이 만든 과학인용색인(SCI)에 대한 의존도를 계속해서 높여 왔다. SCI 등재 학술지에 기고한 논문 편수가 교수들과 학생들의 연구 성과를 평가하는 가장 중요한 지표로 자리매김해 온 것이다.
이번 대교협의 평가 기준에서도 물리학 평가 편람에는 SCI 등재 학술지에 기고한 논문 편수에 더 높은 점수를 주고 있다. 프레시안이 확인한 바에 따르면 현재 서울대나 KAIST 등의 대학 역시 다른 항목들에 비해 SCI 등재 학술지에 기고한 논문 편수가 업적 평가할 때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이미 이공계 내부에서도 여러 차례 문제 제기가 있어왔다. 대표적인 지적이 ISI의 학술지 선택 기준 자체가 게재된 논문의 학문적 수준이 아니라 발간 예정일과 국제적 학술지 편집 관행의 준수 여부에 초점이 맞춰져 있기 때문에 적합한 평가 기준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심지어 2002년 4월에는 ISI 편집이사가 “한국과 같이 SCI를 교수들의 평가 기준으로 활용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세미나에서 밝히기도 했다. 그는 “SCI는 연구자들에게 정확한 학술 연구의 동향을 제공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라면서 “SCI 등재된 학술지에 실린 논문이 모두 우수하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국내의 잘못된 관행을 비판하기도 했다.
***국내 필요한 간염바이러스 연구보다 에이즈 연구에 몰두**
SCI 의존도가 높은 평가 관행처럼 과도한 국제화에 대한 집착은 국내 이공계 연구에 좀더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한다.
한 생화학 연구자는 프레시안과의 인터뷰에서 “바이러스 연구만을 놓고 보자면, 국내에 시급히 필요한 것은 B형 간염 바이러스 연구지만 일급의 연구자들은 오히려 AIDS의 원인이 되는 HIV 연구에 몰두해 있다”면서 “미국에서 HIV 연구가 한창일 때 그 연구로 학위를 받은 뒤 귀국해서도 국제 학계에서 더 인정을 받을 수 있는 HIV 연구만을 계속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한 이공계 연구자는 “최근의 학문 평가 관행은 우리나라에서 학문하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연구자들에게 묻고 있다”면서 “이 땅에서 인문학이나 자연과학과 같은 기초학문 연구가 뿌리내리지 못하고 인문학이나 이공계 기피가 고질적인 교육계의 문제로 대두된 것도 이런 현실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런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우선 학술진흥재단이나 대교협에서 최근 학문 평가 관행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내는 노력이 절실히 요구된다는 것이 관계자들의 지적이다.
김종엽 교수는 프레시안과의 전화 통화에서 “기존의 평가 기준을 만든 사람들도 개별 학문 분야의 교수들”이라면서 “무엇보다도 학술진흥재단과 같은 대표성을 갖는 단체에서 특정한 시각을 강요할 것이 아니라 다양한 관점들이 논의되고 합의되는 틀을 만드는 노력을 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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