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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 '금관가야 왕궁지' 과연 어디에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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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 '금관가야 왕궁지' 과연 어디에 있을까?

김해시의회 금관가야 바로알기 연구회 강연...고분ㆍ성곽 보존방향 제시

"금관가야의 성곽은 과연 있는가? 있다면 그 왕궁지는 어디에 있을까?

김해시의회 의원연구단체인 '금관가야 바로알기 연구회'(회장 김종근)는 지난 22일 특별위원회 회의실에서 신용민 한화문물연구 원장을 초빙해 '고분과 성곽으로 본 금관가야 고고학'이란 주제로 이같이 강연했다.

이번 강연회는 가야인의 생활상을 이해하고 가야와 금관가야에 대한 올바른 역사인식을 정립함으로써 최근 활발히 발굴되고 있는 유적의 보존과 활용방안, 가야사 복원 정책의 방향성 확립에 기여하기 위해 마련했다.
▲김해시의회 '금관가야 바로알기 연구회' 회원들의 모습.ⓒ김해시의회.
신 원장은 "'삼국유사' 가락국기조에 김수로왕이 즉위 2년에 신답평(新沓平)이라는 곳에 가궁(假宮)을 지었고 그 주위에 1500보(步)의 규모로 나성과 궁궐전당과 여러 청사건물을 그해 10월에 시작하여 다음해 2월까지 축조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신 원장은 "이때가 기원후 44년에 해당한다"며 "이 역사의 내용이 사실이라면 금관가야는 일찍부터 궁궐과 왕성(王城)이 있었다는 것이 된다"고 했다.

하지만 신 원장은 "이 내용을 증명할만한 고고학적인 조사와 자료는 불행하게도 아직까지 밝혀지지 못하고 있으며 기록에 언급한 신답평이 정확히 어디인지에 대한 고찰도 불명한 상태이다"고 말했다.

따라서 금관가야 고대국가로서 확고한 위상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면 우리가 이제까지 파상적으로 이해하고 알고 있던 왕릉급의 대형고분이 존재하고 있는 것보다 더 중요한 고고학적인 대상은 바로 성읍(城邑)·왕궁(王宮)·왕경성(王京城)이라는 것이다.

신 원장은 "금관가야에 대한 실체적인 접근방식에 대한 방향성과 학술적인 뒷받침이 절대적으로 부족하고 이에 대한 시각차가 너무나도 극명한 까닭에 지금 '가야사 복원'이라는 범국가적 움직임에서 조차도 한쪽 부분이 심각하게 결여된 상태로 진행되고 있다"고 우려했다.

최근 김해봉황대유적(사적 제2호)를 중심으로 금관가야 왕궁지 조사를 다년간의 중장기 계획을 수립하고 정밀 발굴조사 중에 있어 천만다행 이다는 것.

신 원장은 "지금 현재 발굴조사 중인 지역은 금관가야 대내외적으로 왕성한 국운발흥(國運勃興) 시기에는항구 정박시설이나 이와 관련된 성책(城柵)이 있었던 곳일 가능성이 많은 곳이다"고 주장했다.

즉 신 원장은 "당시 김해만(灣) 깊숙이 해반천을 따라 지금의 봉황대유적 공원에 위치한 부두에 배를 정박해 놓고 외국 사신이나 무역상이 입국하면 금관가야의 시조 무덤인 김수로왕릉과 대성동고분군에 자리잡은 이전 왕릉에 참배드린 후 살아있는 왕에게 문안하는 것이 자연수러운 왕경의 배치가 아닌가 생각된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한다면 신 원장은 "왕궁은 오히려 보다 육지쪽인 내륙에 있었을 것이며 왕릉군이 집중된 김해시의 서쪽부분인 지금의 대성동이나 서상동 부근이 아닌 동쪽부분인 동상동과 부원동 일대에 그 중심이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공개적으로 밝힌 것이다.

이날 신용민 원장은 강연을 통해 금관가야 고분의 종류와 입지, 집단화, 서열화, 대형화, 특수화와 금관가야 고분에서 보이는 각종 부장유물에 대해 설명하고 금관가야 고분과 성곽의 보존 방향도 제시했다는 큰 의미를 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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