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과 미국의 '포스트 하노이' 구상이 접점을 찾을 수 있을까. 평행선을 긋는 북미가 문재인 대통령과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한미 정상회담을 하루 앞두고 서로를 향해 제재 문제에 관한 메시지를 내놓았다. 교착이 장기화될 수도, 극적인 전환점을 맞을 수도 있는 양면적 내용이 담겨있다.
11일 <조선중앙통신> 등 북한 매체 보도에 따르면,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전날 노동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를 주재하며 "당 중앙은 자력갱생의 기치 높이 사회주의 강국을 건설하는 것이 우리 당의 확고부동한 정치노선"이라고 했다.
김 위원장은 '자력갱생'이라는 단어를 27차례나 언급했다. 미국과 국제사회의 제재로 대외 교류가 봉쇄된 현실 속에서 자력갱생은 북한 정권이 취할 수 있는 유일한 자구책이다. 1년 전에 천명한 경제발전 총력집중 노선을 이어가겠다는 의미로 풀이된다.
김 위원장은 "자력갱생의 기치 높이 사회주의 건설을 더욱 줄기차게 전진시켜 나감으로써 제재로 우리를 굴복시킬 수 있다고 혈안이 되어 오판하는 적대세력들에게 심각한 타격을 주어야 한다"고도 말했다.
자력갱생이 경제적 자구책에 그치지 않고 대북 제재의 실효성에 타격을 입히는 저항 수단이라는 인식이다. 이런 방침이 성과를 거두려면 북한 경제의 건재를 사실적으로 입증해야 하고 그에 따른 시간이 소요된다. 이는 상응조치 약속이 나올 때까지 미국과 '시간 게임'을 하겠다는 메시지를 발신한 것으로 풀이된다.
앞서 하노이 회담 결렬 직후 리용호 북한 외무상이 부분적 제재 결의 해제를 요구하며 "우리의 이러한 원칙적 입장에는 추호도 변함이 없을 것이며, 앞으로 미국 측이 다시 협상을 제안해오는 경우에도 우리 방안에는 변함이 없을 것"이라고 밝혔던 것과 같은 맥락이다.
실제로 2차 북미 정상회담에서 입장 차이가 가장 크게 드러난 대목은 대북 제재 문제였다. 북한은 주민들 생활에 영향을 미치는 2016년 이후 채택된 유엔 대북제재 5건에 대한 해제를 요구했다.
반면 미국은 "이것이 제재의 모든 것"이라고 거부하며 완전한 비핵화가 끝날 때까지 제재를 유지하겠다는 기본 입장도 밝혔다. 제재 해제를 비핵화의 궁극적 목적으로 보는 북한과 대북 제재가 비핵화를 추동하는 강력한 수단이라고 보는 미국의 시각차는 지금까지 달라진 게 없다.
김 위원장은 "최근에 진행된 조미수뇌회담의 기본 취지와 우리 당의 입장"에 대해서도 언급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북한 매체들이 그 내용을 구체적으로 전하지 않아 정확한 내용이 드러나기까지는 시간이 걸릴 전망이다.
다만 김 위원장이 미국과 한국 정부를 향한 직접적인 비난을 자제한 점, 핵‧미사일 개발 재개 의사를 밝히지 않은 점 등으로 미루어볼 때, 대화의 문을 완전히 걸어 잠그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이에 따라 김 위원장이 북미 협상에서 급격한 궤도 이탈을 감행하는 '중대 결단'이나 '새로운 길'이 최고인민회의에서 공식화되지는 않을 것이란 전망이 다수다.
핵‧미사일 동결 조치를 유지하며 '진지전' 태세를 갖추고 미국에 공을 넘긴 셈이지만, 미국 측이 당장 전향적 태도로 돌아설지는 불투명하다.
이날 상원 외교위 청문회에 참석한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은 어떠한 제재도 해제하면 안 된다는 데 동의하냐는 질문에 "약간의 여지를 남겨두고 싶다"며 변화 가능성을 내비친 대목은 긍정적 신호다. 폼페이오 장관은 "비핵화에 대한 검증이 완료될 때까지 핵심적인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결의는 유지될 필요가 있다"며 이같이 말했다.
미국이 그동안 경제 봉쇄와 관련된 유엔 제재를 핵심적 제재로 간주해 온 점에서, 인도적 대북 지원이나 미국의 독자제재 분야에서 일부 완화 가능성을 열어둔 것으로 해석된다. 폼페이오 장관은 제재와 관련된 '여지'의 사례로 "비자 문제"를 들기도 했다.
미국 측의 유화 메시지가 한미 정상회담을 하루 앞둔 시점에 나오면서 청와대가 중재안으로 마련한 '연속적 조기 수확(Early harvest)'에 한미가 일정한 공감대를 모은 게 아니냐는 관측도 나온다.
북한의 비핵화 초기 조치와 이에 대한 보상을 한두 번 연속적으로 교환함으로써 가시적인 성과를 얻어내고 협상의 동력을 이어가자는 게 문 대통령의 중재 구상이다. 작은 진척이나마 '포괄적 합의, 단계적 실행'의 성공 전망을 북미 양측이 체감토록 하는 것이 목표다.
그러나 문 대통령의 중재 구상에 트럼프 대통령이 일정하게 호응하더라도 개성공단과 금강산 관광 재개 등 굵직한 합의가 '조기 수확' 범위에 포함될 가능성은 크지 않아 보인다. 폼페이오 장관이 제재 완화의 여지를 비경제적 분야로 제한한 대목도 이런 관측을 뒷받침한다.
트럼프 대통령을 설득한 뒤에도 문 대통령 중재 구상이 결실을 보려면 북한을 끌어들여야 하는 과제가 남는다. 청와대는 한미 정상회담 이후 원포인트 남북 정상회담이나 대북 특사 파견을 검토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를 계기로 트럼프 대통령의 의중을 전하고 3차 북미 정상회담까지 타진하겠다는 계획이다.
경제 제재 해제를 비핵화 협상 재개의 최소 조건으로 설정한 북한과 "최대한 경제적 압박을 유지하는 것이 미국 정부의 입장"(폼페이오 장관)이라는 미국 사이에서 문 대통령이 극적인 반전의 모멘텀을 만들어낼 수 있을지 주목된다. 한미 정상회담 결과는 12일 새벽에 발표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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