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은행(BOJ)이 1백20년 일본중앙은행 역사상 처음으로 시중은행이 보유하고 있는 주식을 직접 사들이기로 결정했다. 몇몇 일본 시중은행이 파산위기에 직면했다는 '9월 금융위기설'을 잠재우기 위한 비상조치다.
그럼에도 국제금융계에서는 일본이 정공법적 구조조정 대신 '지극히 비상식적인 편법'으로 위기를 회피하려 한다는 점에서 일본에 대한 불신은 한층 깊어지는 정반대 효과를 낳고 있다.
일본열도를 드리운 암운이 나날이 두터워가고 있다.
***일본은행, 시중은행 보유주식 수조엔어치 매입키로**
일본은행은 이틀에 걸친 정책위원회 회의를 끝내고 18일 증시 마감 직전 “금융 시스템 안정을 위해 은행이 보유하고 있는 주식을 매입하겠다”고 밝혔다. 올해안에 일본의 시중은행들이 보유하고 있는 약 25조엔의 주식 중 일부를 수조엔을 투입해 시장을 거치지 않고 은행에서 직접 시가로 사들여 10년정도 장기보유한다는 계획이다.
일본은행은 증시하락으로 초래되는 시중은행들의 부담을 줄여줌으로써 공식적으로 43조엔으로 추산되는 부실채권을 정리하는 데 전념할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하고 있다고 밝혔다.
일본은행의 이같은 조치는 일단 일본금융시장에서는 호재로 작용하고 있다. 이 소식이 시장에 전해지자마자 18일 오후 도쿄증시에서는 은행주가 초강세를 보였고 니케이 주가도 상승세로 반전됐다. 19일 증시에서도 상승세는 계속됐다.
일본의 시중은행들이 보유하고 있는 주식은 도요다 등 자동차, 전기.전자메이커, 전력, 철도 등 역사가 깊고 발행주식수가 많은 대기업이 대부분이다. 반면에 채권시장은 돈이 채권에서 증시로 빠져나갈 것이라는 우려때문에 하락세로 반전됐다.
일본은행의 이번 조치는 주가하락으로 은행 경영이 악화될 경우 부실채권 처리가 늦어지면서 몇몇 시중은행이 쓰러질지도 모른다는 세간의 우려를 잠재우기 위한 것이다.
현재 일본 금융당국은 시중은행의 부실채권이 국내총생산(GDP)의 8%에 달한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일본 국내외 민간연구기관들은 실제로는 GDP의 20%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부실채권 못지않게 일본 은행들을 고민케 하고 있는 것은 과도한 주식 보유에 따른 유가증권 평가손이다.
일본의 시중은행들은 40조엔에 달하는 주식을 보유하고 있으나 이는 시가총액으로 일본의 거품경제 당시에 비해 4분의 1 수준에도 못미치는 수준이다. 더욱이 지난주 니케이지수가 9천선 아래로 떨어지는 등 증시침체가 심화되자, 몇몇 시중은행들은 3백억달러이상의 유가증권 평가손을 기록하면서 9월말에 도래하는 전반기 회계연도 자산재평가때 적정자본비율을 맞추지 못할 것이라는 우려가 증폭되고 있었다. 이른바 '9월 금융위기설'이다.
9월 금융위기설이 힘을 얻으면서 주가가 급락하는 등 악순환 고리가 작동하자 일본 중앙은행이 서둘러 은행의 보유주 직매입을 선언하고 나선 것이다.
***"이번 조치는 정부에 의한 주가조작"**
그러나 중앙은행이 발권력을 동원해 시중은행들이 보유하고 있는 주식을 직접 매입해준다는 정책은 국제적으로 전례가 없는 일이라는 점에서 일본의 금융위기의 심각성에 대한 우려는 도리어 증폭되고 있다.
하야미 마사루(速水優) 일본은행총재는 “이번 조치는 증시부양책도 아니고 시장유동성 제고를 위한 것도 아니다”라고 해명하면서 국제금융계의 9월 위기설을 불식시키려 애썼다. 그러나 HSBC 도쿄지사의 이코노미스트 피터 모건은 FT와의 인터뷰에서 “이번 조치는 사실상 (정부에 의한) 주가조작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고 반박했다.
실제로 이번 조치는 일본 대장성이 증시 부양과 금융권 안정을 도모하는 ‘디플레이션 종합대책’을 발표하기 하루 전에 나온 것이어서, 경제분석가들은 이를 대장성의 작품으로 보고 있다.
이같은 판단은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일본은행이 은행 보유주를 매입하라는 정치권 및 대장성의 요구를 계속 거부해왔었기 때문이다.
일본은행 정책위원회는 17일까지만 해도 “정치권이 요구하는 주식매입 등의 조치는 중앙은행의 독립성을 훼손하는 것”이라며 강력히 반대해 왔다. 하야미 총재도 “일본은행은 금리를 0%로 낮추는 등 할 수 있는 노력은 다했음에도 정작 국회는 은행을 지원하는데 나서지 않았다”고 의회를 비난해 왔다.
이처럼 일본은행이 계속 반발하자, 일본 국회는 최근 증시 침체로 은행의 부실이 심화되고 있다며 일본은행이 주식을 사들일 것을 공개리에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심지어 일부 의원들은 "이런 식으로 계속 나오면 일본은행법을 개정해 중앙은행의 독립성을 박탈하겠다"고까지 위협한 것으로 알려졌다.
***"일본 9월 금융위기 진짜 심각한 것 아니냐"**
따라서 국제금융계에서는 정치권의 강한 압력에 일본은행이 굴복한 것으로 보는 시각이 우세하다.
J.P 모건의 경제정책연구팀장 칸노 마사키는 18일(현지시간) 영국 파이낸셜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정말 충격적인 조치”라면서 “이번 결정은 일본은행이 아니라 일본 정부가 한 것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홍콩상하이은행(HSBC) 뉴욕지사의 수석외환전략가 마크 챈들러도 “일본의 시중은행들이 주식보다는 채권을 더 많이 보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번 조치는 채권가치를 떨어뜨려 은행에 타격을 줄 수 있다”면서 당혹해 했다.
지난 3월까지 일본은행 정책위원을 지낸 나카하라 노부유키는 “일본은행의 이번 조치는 금융체제가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다는 판단이 아니라면 좀처럼 나올 수 없는 정책”이라고 평가했다. 그는 또 “일본은행이 지금까지의 정책과 정반대로 나가는 속사정을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어쨌듯 루비콘 강을 건넌 셈”이라고 덧붙였다.
일본은행이 돈을 찍어 시중은행 보유주식을 사들이기로 함에 따라 졸지에 일본은행은 일본 주요대기업들의 주요주주가 되는 신세가 됐다.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민간기업의 공영화'이다.
아울러 국가채무로 분명히 회계에 잡히는 공적자금 방식 대신에, 국가채무로 잡히지 않는 발권력을 동원하는 편법을 사용하기로 함에 따라 일본중앙은행의 신인도 자체까지 위협받는 지경에 이르렀다. 또한 공적자금 투입시 기대되던 부실기업 및 부실금융기관 청소 및 부실책임자 문책도 물건너가 버렸다.
한마디로 일본은행의 이번 조치는 '아무도 책임지지 않고 아무도 고통을 분담하지 않으려는' 일본 정치권, 재계, 금융계, 관료, 그리고 마지막으로 중앙은행 관계자들까지 합류해 만든 세계금융사에 유례없는 경제범죄 행위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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