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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딩크가 2002년 한국사회에 던지는 메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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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딩크가 2002년 한국사회에 던지는 메시지

"한국사회도 이제 세계 16강에 진출하라"

거스 히딩크 감독은 이제 누가 뭐래도 '영웅'이다.

영웅 숭배는 본디 위험스런 현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는 내심 영웅을 갈구한다. 워낙 시답잖은 '가짜 영웅'들이 내로라 하고 설치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각계를 휩쓸고 있는 '히딩크 따라배우기'**

지금 각계에서는 '히딩크 따라배우기' 열풍이 거세다. 세칭 '빳다'를 앞세워 '돌진 앞으로'하는 식으로 투지만 앞세웠던 우리 축구를 히딩크가 단 1년반만에 투지, 전술, 체력으로 무장한 선진형으로 개조하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때문에 발빠른 출판계에서는 벌써 히딩크 관련서적이 봇물을 이루고, 기업들은 히딩크를 벤치마킹한다고 난리가 아니다. 선거를 앞둔 정치권 인사들도 입만 열면 경쟁적으로 "내가 정치권의 히딩크"라고 말한다. 진념 경기도지사후보 같은 경우는 "주위에서 내 이름 진념과 히딩크를 합성해 '진딩크'라고 부른다"고 말할 정도다.

이런 식으로 가다보면, 얼마 안지나 히딩크라는 단어만 들어도 신물이 나지 않을까 벌써부터 우려될 지경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에서 '히딩크 현상'이라는 신조어까지 만들어질 정도로 히딩크 바람이 거세게 불고 있는 데에는 나름대로 그럴만한 이유가 있어 보인다. 근원은 아마도 아직까지 우리 사회가 히딩크만한 지도자를 만나지 못했다는 갈증 때문일 것이다.

***히딩크의 '팔방미인형 선수론'**

지도자란 말 그대로 '길을 이끄는 사람'이다. 여기서 '길'이란 피지도자들이 군말없이 따라가야할 방향성을 가리킨다.

히딩크는 이와 관련, 지난해 1월 취임후 일관되게 한가지 지론을 펴왔다. '멀티 플레이어(Multi Player)'론이다. 우리말로 바꾸면 '팔방미인형 선수'론 정도가 될 것이다.

히딩크의 주문은 한마디로 말해 모든 포지션에서 군말없이 뛰면서 최대한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전천후 선수'가 되라는 것이다. 이는 말이 쉽지, 선수들 입장에서 보면 대단히 소화하기 힘든 주문이다. 공격수, 수비수 등으로 각자 전문분야가 있기 때문이다.

히딩크는 그러나 이같은 기존의 '전문성'을 철저히 묵살했다. FIFA 랭킹 40위에 간신히 턱걸이하고 있는 나라에서 "나는 공격수""너는 수비수"라는 식의 전문성이란 무의미하다는 판단에서였을 것이다.

히딩크는 자신에게 부과된 '꼴찌들의 반란'이라는 한국민의 염원을 달성하기 위해선 선수 한명한명이 축구선진국 선수의 3배, 4배의 몫을 해낼 수 있어야 한다고 판단했다. 이러기 위해선 우물안 개구리 격인 한국축구계에서 주어진 전문성과 기득권이란 애시당초 무의미하다는 게 그의 판단이었다.

히딩크가 국가대표팀 최종선발때 고종수, 이동국 등 국내스타들을 무더기 탈락시킨 것도 이런 기준에서였다. 이들은 한국에서나 콧대높은 스타였지, 국제무대에선 알아주는 이 없는 철부지 기득권세력이라는 게 그의 판단이었다.

히딩크는 이들 스타대신에 폴란드전에서 진가를 발휘한 유상철, 황선홍, 이천수 등을 일찌감치 점찍었다. 스트라이커와 공격형 미드필드, 심지어는 수비수 등 어떤 포지션을 맡겨도 소화해낼 수 있는 그들의 능력과 자세를 신뢰한 것이다. 이밖에 국내 축구감독들 사이에서 '버려진 선수'로 통하던 김남일을 비롯해 박지성,송종국,최태욱, 이영표,차두리 등을 발굴해 '팔방미인'으로 조련시켜 나갔다.

월드컵 개막 직전 5월말의 일이다. 우리 수비진의 중심축인 홍명보가 부상을 당했다. 당연히 언론 등에서 난리가 났다. 이 때 히딩크는 언론보도를 강 건너 불구경 하듯 심드렁하게 받아들였다. "홍명보가 못 나오면 유상철을 쓰면 되지 뭐"라는 게 히딩크의 반응이었다. 그는 취재진의 질문에 "유상철은 좌.우 풀백은 물론 중앙수비수까지 수비라인의 세 자리를 모두 소화할 수 있다. 그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수비형 미드필더와 공격형 미드필더도 소화할 수 있다"고 답했다.

***우리 경제는 간신히 본선에는 진출했으나 16강에는 끼지 못한 형국**

히딩크의 '팔방미인 만들기'는 분명 성공을 거두었다. 선수 하나하나의 움직임이 '전천후'라는 감동과 믿음을 국민들에게 불러일으키고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같은 변신의 최대 수혜자는 선수들 개개인이 될 것이다. 카메룬이 월드컵 대회에서 선전하면서 대회후 선수들 대부분이 유럽 프로팀으로 스카웃돼갔듯, 벌써부터 한국선수들을 탐내는 외국 에이전시들의 발길이 부산하다.

그러나 히딩크는 선수들뿐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도 값진 교훈을 선물했다.
우리 사회는 선진국의 문턱에서 번번이 진입에 실패하고 있다. 96년 선진국모임인 경제개발협력기구(OECD)에 억지가입하긴 했으나, 곧 IMF위기로 중진국 하위권으로 밀려나야 했다. 요즘 들어 상당부분 경제체질을 개선했다고는 하나 아직 선진국에 진입했다고 할 수 있는 정도는 결코 아니며, 언제 또다시 위기를 겪게될 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저변에 깔려있는 상황이다.
월드컵 축구에 비교한다면 간신히 본선에는 진출했으나 16강에는 한번도 끼지 못한 형국이다.

히딩크는 사상최초의 월드컵전 승리를 통해 우리국민에게 "할 수 있다"는 강한 자신감을 심어줬다. 그러나 히딩크를 통해 우리가 정작 얻어야 하는 것은 일시적인 감동이나 감흥이 아니다.
그보다는 히딩크의 조련술이며, 그가 제시한 인간형이다.

***히딩크는 연습중 김병지 골키퍼가 골대를 나를 때 같이 날랐다**

우리사회는 외형상 전문화를 지향한다. 그러나 세계적 수준의 전문가나 전문집단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서울대는 국내 1위이나 세계 1백대 대학안에 못낀다. 조중동으로 대표되는 메이저 언론도 마찬가지고, 대다수 대기업들도 마찬가지다. 우물안 개구리 신세다.

그럼에도 대부분은 자신이 전문가인양 착각한다. 좁은 우물안에 시선을 가두고 있기 때문이다. 더욱 볼썽 사나운 것은 전문화를 가장한 각부문의 '관료화'이다. '내 일만 하면 된다', '내 일은 내가 최고니 참견말라'는 식이다.

한때 이같은 관료화를 깨기 위한 시도가 없지 않았다. 이른바 벤처붐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한국의 벤처붐은 한탕주의식 머니게임으로 끝났다. '갇혀진 조직'에 대한 반란, '갇혀진 인간'에 대한 해방운동으로서의 벤처는 가뭄에 콩나듯 한 게 현실이다.

히딩크가 말하는 팔방미인은 벤처형 인간을 뜻한다. 한국이 선진사회에 진입하기 위해선 국민 모두가 히딩크사단의 선수로 개조돼야 한다. 설익은 전문화에 안주해선 안된다. 개인의 에너지를 120% 뽑아내기 위한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자기가 맡은 분야의 전과정을 꿰뚫는 팔방미인형 전문성을 가져야 하며, 이를 창의적으로 종합시켜낼 줄 알아야 한다.

히딩크는 연습중 김병지 골키퍼가 골대를 나를 때 같이 날랐다. 선수들은 파김치가 되도록 훈련을 받은 뒤 숙소에서 전술관련서적과 경기 녹화테이프를 봤다. 이처럼 경영자는 '발로 뛰는 경영'을 해야하고, 일선근무자들은 '머리를 쓰는 노동'을 해야 한다.

이것이 히딩크가 정작 우리사회에 건네준 값진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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