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 시내의 대영박물관에 들어서면 입구 오른편에 거대한 탱화가 걸려 있다. 우리나라의 유명 사찰에 있던 네 점의 국보급 탱화 가운데 하나로 알려진 이 그림 외에 대영박물관에는 우리나라의 국보급 유물들이 적잖이 전시돼 있다.
이런 해외의 우리 유물들을 접할 때마다 '언제나 저것들을 되찾아올 수 있을까'라는 분노섞인 회한이 들기 마련이다. 그런데 앞으로 잘 하면 불가능해 보이던 '길'이 열릴 듯 싶다.
대영박물관이 제국주의 시절 그리스로부터 강탈하다시피 빼았아온 대리석 조각들을 '조건부'로 되돌려줄 용의가 있음을 사상최초로 드러냈기 때문이다. 적잖은 유물이 대영박물관에 있는 우리로서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는 중차대한 사태진전이다.
***"대리석 조각들을 돌려줄 테니 새 전시유물들을 보내달라"**
내년이면 개관 2백50주년을 맞는 대영박물관이 매년 5백만 파운드(약90억원)의 적자로 몸살을 앓고 있다. 영국의 인디펜던트지 보도에 따르면, 최근 대영박물관의 재정상태가 개선되지 않는다면 직원 10%를 정리해고하고 전시실 일부를 폐쇄해야 할 지경이다.
박물관 재단이사회는 지난해말 이같은 위기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해결사'를 불러들였다. 로버트 앤더슨 현 박물관장의 뒤를 이을 차기 관장으로 지난해 11월말 내정된 닐 맥그리거(8월 취임 예정)가 바로 그이다. 맥그리거는 미술사와 조각 분야의 권위있는 학자로서 지난 15년간 트라팔가 광장 미술관장, 영국 국립미술관장(현재)을 맡아 뛰어난 경영능력을 발휘해, 미술계에서는 그를 '살아있는 국보'라고 부를 정도다.
맥그리거가 최근 그리스 정부가 줄기차게 요구해온 '엘긴 마블' 반환 협상에 응할 용의가 있다고 밝혀 국제사회의 비상한 관심을 모으고 있다. 엘긴 마블은 그리스 파르테논 신전에서 발굴된 대리석 조각들을 일컫는 것으로 대영박물관의 대표적인 전시물.
영국의 선데이 텔레그라프지는 26일 "현재 맥그리거는 5백만 파운드에 달하는 적자를 메우기 위한 방편으로, 엘긴 마블을 반환하는 대신 그리스로부터 유료전시가 가능한 문화재를 기증받아 수익을 창출하기 위한 고육책을 검토중"이라고 보도했다.
완전한 반환은 아니지만, 지속적인 '교환' 방식을 통한 반환을 검토중인 셈이다. 지난 수십년간 계속돼온 반환 요구를 콧대 높게 묵살해온 대영박물관이 왜 이렇게 한 발 후퇴한 것일까. 새로운 유물을 구입할 수 없을 정도로 망가진 대영박물관의 재정악화가 그 핵심원인이다.
10년전만 하더라도 박물관의 한해 구매예산은 1백40만파운드였으나, 지금은 예년에 비해 80%가 삭감된 10만파운드로 오늘날 미술품 시장에서 가장 값싼 작품 한 개값에 불과하다.
***대영박물관의 '빈곤의 악순환'**
박물관은 새로이 전시 유물들을 구입할 수 있어야 손님이 끊이질 않는 법이다. 그러나 대영박물관은 요즘 새 유물을 거의 구입 못하고 있다. 심각한 재정난 때문이다.
전세계에서 한 해 5백50만명의 관람객이 찾아오던 세계적 박물관이 이처럼 어려운 상태가 된 것은 지난해 박물관 입장객 수가 격감했기 때문이다. 박물관 입장객 수는 최근 몇 년동안 5백50만명선을 유지했으나 지난해 4백60만명으로 급감했다. 해외여행자들에게 인기가 높은 런런탑 등 다른 관광명소도 사정이 비슷하다.
구제역 파동과 미국 9.11 테러 이후 여행에 대한 공포가 확산된 것이 해외방문객 급감의 주요 원인으로 분석되고 있다. 여기에다가 새로운 전시품이 없는 전시 내용도 손님이 끊긴 주요 요인으로 작용했다. 빈곤의 악순환인 셈이다.
이로 인해 박물관의 수입이 1백만 파운드나 줄어들었다. 박물관 입장료는 원래 무료다. 그러나 주된 수입원이던 박물관내 상점과 카페에서 얻은 수입이 격감한 것이다.
대영박물관의 한 해 예산은 4천백50만 파운드(약8백10억원)다. 이중 3천6백만 파운드는 정부 보조금으로 조달된다. 따라서 박물관 스스로 차액을 메워야 한다. 지난 10년간 실질금액기준으로 정부보조금이 30%나 삭감됐기 때문이다.
최근 박물관 자체 조사에 따르면 당초 3백만 파운드로 잡았던 지난해 적자가 3백40만 파운드로 증가했고 2004-05년경 예상적자는 5백만~6백50만 파운드에 달할 것이라고 예상되고 있다.
***주먹구구식 방만경영도 한 요인**
재정악화에는 대영박물관의 방만한 경영 책임도 적지않다. 인디펜던트지 보도에 따르면, 6년전 영국 언론들은 4천5백만 파운드의 예산을 움직이는 대영박물관이 단 한명의 회계담당자도 고용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폭로했다. 이때부터 박물관의 재정상태와 운영에 대해 심각한 문제가 제기되었다.
지난 1월 박물관측은 일부 전시관을 폐쇄하고 직원에 대해 감원을 실시하게 될지 모른다고 경고했다. 이미 76개 전시관중 3분의1이 잠정폐쇄되고, 소수의 학자들이나 유료단체관람객에게만 공개돼온 일부 전시관들은 영구폐쇄할 것을 고려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8천만 파운드가 소요되는 별관공사계획을 연기하고 전시회 횟수와 영구전시물에 대한 관람시간 단축 등도 고려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러나 인디펜던트지는 "대영박물관이 망하도록 내버려둘 수는 없지만 박물관 경영진들은 납세자들에게 흥청망청 예산을 쓰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면서 "대영박물관같은 기관들은 앞으로 스스로의 노력을 보이지 않으면 국민의 세금지원도 인색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원인이 어디에 있든 지금 대영박물관은 존립의 위기를 맞고 있고, 그 결과 그리스 등 해외문화재 반환 협상에 임할 태도를 보이기 시작했다. 대영박물관 내에 적잖은 유물이 전시돼 있는 우리도 이제 영국과의 협상에 적극 나서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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