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출판노동자의 장시간 노동에 대해선 말하지 않는다
2018년 윤철호 대한출판문화협회 회장은 <뉴시스>와의 새해 인터뷰에서 "노동 시간이 너무 길면 책을 읽을 수 없어요. 독서할 수 있는 시간이 있어야 하고, 책을 읽을 필요성을 느껴야 해요"라고 했다. 출판노동자들은 말한다. "행복한 노동이 좋은 책을 만든다"고. 책을 위해 저임금 장시간 노동을 견디며 서른을 버티지만 마흔 이후의 삶은 기약할 수 없는 출판노동자들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책을 만든다. 출판노동자가 책을 만들지 않으면 이 땅에 더는 책이 존재하지 않을 거라서 그렇다. 일터 민주주의 없이 진정한 문화 민주주의의 실현은 가능하지 않다. 문화 민주주의를 위해 출판노동자들은 일터 민주주의를 위한 싸움을 포기할 수 없다.
장은수 편집문화실험실 대표와 이홍 한빛비즈 편집이사는 <프레시안> '표지 너머 책 세상 ⑲'에서 "편집 노동의 특성상 주 52시간제를 적용하기란 쉽지 않다, 탄력적 근로시간제가 대안일 수 있다"고 말했다. 주 52시간제 시행 이후 기업은 업종·업무의 특성을 들며 탄력적 근로시간제 단위기간 확대를 줄기차게 요구하고 있다. 1주 노동시간을 최대 64시간, 80시간까지 허용하는 탄력근로제는 여전히 장시간 노동 체제를 유지하고 싶어 하는 기업의 방책이다. 편집 노동의 특성과 편집자들의 장시간 노동은 별개의 문제이다. 편집 노동의 특성을 이유로 편집자들의 장시간 노동을 정당화해서는 안 된다.
'2015년 출판노동 실태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재직 출판노동자의 72.7%가 연장 근로를 한다고 했고, 37.3%는 휴일에도 나와 일한다고 했다. 그러나 74.7%가 연장 근로에 대한 보상을 받지 못한다고 했고, 44.3%가 휴일 근로에 대한 보상을 받지 못한다고 했다. '2013년 외주출판노동자 노동실태 연구보고서'에 따르면, 외주 출판노동자의 52.1%가 하루 8시간 이상 일한다고 했고, 12~14시간 일한다는 경우도 8.1%에 달했다. 한 달 중 20일 이상 일하는 경우는 49.1%였으며, 주목할 점은 25일 이상 일한다는 답변이 26.3%로 가장 많았다는 것이다.
이처럼 출판노동자들의 장시간 노동 문제는 심각한데, 더 큰 문제는 출판노동자들은 법과 제도를 통해 노동시간을 제한받을 수 없다는 데 있다. '2017 출판산업 실태조사'에서 출판사의 규모를 살펴보면, 100인 이상 사업장은 1.1%, 50~99인 사업장은 1.7%, 5~49인 사업장은 20.3%를 차지한다. 이는 곧 근로기준법을 모두 적용받을 수 있는 출판노동자는 재직 출판노동자의 23.1%밖에 안 된다는 걸 의미한다. 재직 출판노동자 10명 중 단 2~3명만이 주 52시간제를 적용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76.9%의 재직 출판노동자들은 5인 미만 사업장에서 일하고 있어 근로기준법상의 연장 근로 제한 적용을 받지 못한다. 출판사용자는 이들 노동자에게 1주 52시간 이상 일을 시켜도, 연장 근로 가산수당을 지급하지 않아도 처벌받지 않는다. 또한 100%의 외주 출판노동자들은 프리랜서라서 노동자성을 인정받지 못해 노동법의 적용을 아예 받지 못한다. 사실상 출판노동자들은 법과 제도를 통해 노동권을 보장받기란 거의 불가능하다고까지 할 수 있다. 이 같은 출판노동자의 현실을 제대로 짚지 않고서 내놓는 대안은 허술할 수밖에 없다. 법과 제도를 넘어선 방안을 마련해야 출판노동의 문제를 풀 길을 찾을 수 있다.
출판사용자는 왜 출판노동자의 시간을 왜곡하는가?
출판노동자들은 왜 오래 일하는가? 재직 출판노동자들은 무리한 출간 일정 때문이라고 했다. 외주 출판노동자들은 촉박한 일정뿐 아니라, 낮은 작업 단가와 상습적인 작업비 체불 때문에 동시 작업을 하지 않고서는 사실상 생활하기 어렵기 때문이라고 했다. 출판노동자들이 이렇게 장시간 노동을 해야만 하는 데는 출판사의 유일한 생존 전략이 여전히 신간 '밀어내기'에 있어서다. 그러니 어쩌겠는가? 출판사가 망하지 않게 출판노동자들은 더 빨리 더 많이 책을 만들어내야 하고, 상승되는 제작비 중 절감 가능한 게 외주 작업비라서 외주 출판노동자들은 오르지 않는 작업 단가와 결제되지 않는 작업비에도 책을 만들어낼 수밖에 없다. 출판사는 이렇게 책 생산에 따른 위험비용과 손해비용을 출판노동자에게 전가하면서 성장해왔고 지금의 불황을 버티고 있다. 이는 새삼스럽게 지적되는 문제가 아니다. 그래서 더 암담하다.
출판노동자들의 장시간 노동과 함께 얘기되어야 할 것이 있는데, 바로 업무의 확장으로 인한 노동강도 강화이다. 출판산업의 불황이 계속되면서 마케팅 업무가 모든 출판노동자의 업무에 덕지덕지 끼어들고 있다. 모든 노동은 필요하고 각각의 노동은 연결되어 있다. 산업의 변화에 따라 업무의 성격과 범위는 달라질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이 노동자를 착취하는 이유가 될 수는 없다.
출판사는 노동비용을 줄이기 위해 여러 사람이 업무를 나눠 짧은 시간 일하게 하지 않고 한 사람이 여러 업무를 맡아 오래 일하게 한다. 출판사용자들은 부족한 인력을 충원하기보다 기존 인력에 업무를 더하는 방식으로 출판노동자들을 관리하고 있다. 노동비용을 줄이기 위해 노동강도를 높이는 것, 이를 위해 노동의 성격을 구실 삼는 것, 반드시 문제 제기되어야 한다.
이처럼 출판노동자의 고강도 장시간 노동이 유지되려면 출판사는 출판노동자의 시간을 엄격하게 감독하지 않으면 안 된다. 지각비를 물리는 건 순전히 근태 관리 차원이 아니다. 출판사가 출판노동자의 시간을 처음부터 끝까지 통제하겠다는 강한 의지의 표현이다. 이는 '9 to 6'을 넘어선다. 빠르게 반복되는 마감 일정과 출간 일정을 지켜내지 못하는 출판노동자는 책 만들 자격이 없다. 마감을 위해 출판노동자들은 야근과 주말 근무를 마다할 수 없다. 밤샘 노동은 자유이나 정시 출근은 의무이다. 강요된 선택이다. 포괄임금제에 묶여 임금으로 계산되지 않는 시간이다. 출판노동의 성격이 어떠하든 상관없이 출판노동자의 시간은 회사의 관리감독 아래 있다. 편집자의 업무 스타일보다 앞서는 건 편집자의 시간을 관리·감독하는 출판사이다. 저자와 낮술을 해도 밤에 들어와 원고를 봐야 하는 게 편집자이다. 이를 편집자의 숙명으로 더는 위장하지 말라.
출판사용자는 출판노동자의 장시간 노동이 화두가 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 출판 경영 전략이라는 게 출판노동자를 저임금 장시간으로 부리는 것 말고는 아무 것도 없다는 걸 드러내야 하고, 출판노동자의 노동력을 사용하는 데 대한 법적 사회적 책임도 져야 하기 때문이다. 이제 출판사용자는 편집자 뒤에 숨어 사용자 책임을 회피하지 말아야 한다. 언제까지 편집자 뒤에 숨어 있을 작정인가?
편집자는 책 만드는 노동자이지 사장이 아니다. 편집자의 역할과 책임이 제아무리 중요하다고 해도 근로기준법을 어겨 처벌받는 건 편집자가 아니라 사용자이다. 외주 작업비 체불에 대한 책임 역시 담당 편집자가 아니라 사용자에게 있다. 출판사 사장하기를 선택했다면 사용자 책임이란 걸 져야 한다. 사용자 책임을 지고 싶지 않다면 사장 하지 않으면 된다. 이 간단한 걸 이제 대놓고 말할 때가 되었다.
노동시간 단축을 위한 재직/외주 출판노동자들의 요구
이제 출판산업의 시계는 출판노동자의 시간에 맞추어야 한다. 더 빨리 더 많이 책을 만들어 살아남는 방식은 거부해야 한다. 출판사는 출판노동자를 착취해 생존하는 전략을 폐기해야 한다. 출판사용자가 방법을 찾지 않는다면, 출판노동자가 나서서 그 착취의 고리를 끊어내면 된다. 이럴 때 필요한 것이 바로 '출판산업 단체교섭'이다. 노동법이 아니더라도 제도적으로 노동권을 보장받을 수 있는 길, 출판산업의 한 주체로 출판사용자와 동등한 지위를 갖는 것, 출판산업 단체교섭으로 획득할 수 있다. 이것이 출판노동자의 노동권을 지키는 방식이고, 출판산업의 공멸을 막는 길이다.
2018년 언론노조 서울경기지역출판지부는 출판산업 단체교섭의 내용과 형식에 대해 논의하면서, 두 달간 격주로 조합원들의 요구를 들어보는 '화요카페'를 진행하였다. 화요카페에서 재직 출판노동자는 야근수당과 고용안정을 요구했고, 외주 출판노동자는 작업단가 현실화와 작업비 즉시결제를 요구했다. 재직 출판노동자와 외주 출판노동자 간에 요구의 차이가 있어 보이지만, 큰 틀에서 연결되는 핵심적인 문제는 '노동시간'에서 비롯된다.
먼저, 재직 출판노동자들은 이미 장시간 노동과 보장받지 못하는 연장 근로 수당에 대한 문제점을 드러내면서 구체적인 요구들을 해왔다. '2013년 언론노조 서울경기지역출판분회 실태조사'에서는 "공짜 노동은 없다! [재직 수당]", "법정 연차휴가를 달라! [재직 연차 유급휴가]", "그만 좀 압박하라! [재직 노동조건]"를 요구했고, '2015년 출판노동 실태조사/국회 출판노동 증언대회'에서는 "법정 연차 유급휴가 및 연장근로/휴일근로 수당 지급"을 요구했다. '2017 출판지부 노정교섭 요구안'은 "5인 미만 사업장에 대한 근로기준법 전면 적용"이었다.
정리하면, 재직 출판노동자들의 요구는 근로기준법 제50조(근로시간)와 제53조(연장 근로의 제한)에 따라 △ 1주 노동시간은 법정 근로시간인 40시간이어야 하고, △ 1주 최대 12시간까지의 연장 근로는 노동자가 합의했을 때에 가능하며, 마땅히 수당은 지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 그리고 공짜 야근을 유도하는 포괄임금제는 당연히 폐지되어야 하며, △ 이는 사업장의 규모와 상관없이 모든 재직 출판노동자에게 적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다음, 외주 출판노동자들의 요구는 언제나 분명했다. 일을 시켰으면 정당하게 대가를 지불하라는 것이다. 출판계의 악질적인 관행은 외주 작업비 지급을 책 출간 이후로 미룬다는 것이다. 이는 곧 책이 출간되지 않으면 작업비가 지급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한다. 외주 출판노동자들이 몇 개의 작업을 동시에 진행하면서 마감 노동과 야간 노동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건 낮은 작업 단가와 작업비 결제의 불확실성 때문이다. 그러니 △ 외주 작업 단가는 작업의 내용과 작업자의 숙련도 등을 고려해 현실적으로 책정되어야 하고, △ 외주 작업비는 작업물이 인도된 바로 그 즉시 외주출판노동자에게 지급되어야 한다.
이처럼 출판노동자들이 뭔가 대단한 요구를 하고 있는 게 아니다. 근로기준법을 지켜달라는 것이고, 작업비를 체불하지 말라는 것이다. 책 만들며 살아가는 출판노동자들에게 기본은 지켜달라는 것이다. 지금까지 출판사용자는 출판노동자의 시간을 무제한으로 사용해왔다. 허락을 구하지도 않았으며 대가를 지불하지도 않았다. 이제 출판노동자의 시간을 출판노동자에게 온전히 돌려주어야 한다. 출판노동자의 자율성은 업무의 특성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권리의 주체가 되었을 때 가질 수 있는 것이다.
에둘러 말할 필요 없다. 출판사용자는 출판노동자와 함께 출판의 미래를 열어가고자 한다면, 확인되지도 않는 출판사의 사정을 들먹이며 출판노동자를 협박하지 말고, 출판노동자에게 출판사의 사정을 투명하게 공개한 뒤 양해를 구하면 된다. 출판사용자의 책임을 말하지 않고 출판노동 현장의 변화를 말할 수는 없다. 사용자 책임을 지는 것. 그거면 된다. 그래야 어디서 어떻게 논의해야 하는지가 명확해진다. 노사 간 신뢰는 그렇게 쌓이는 것이다. 기울어진 운동장은 그렇게 평평해지는 것이다.
출판노동자를 죽이고 출판의 미래를 말할 순 없다
언론노조 서울경기지역출판지부 소식지 2호의 제호는 '무엇이 출판을 죽이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러다 내가 죽소'였다. 이제 출판노동자들은 아픔을 넘어 죽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일하는 사람으로서 존중받으며 행복하게 책 만들며 살아가고자 하는 게 그렇게도 큰 욕심인가? 출판사용자는 언제까지 출판노동자들의 고통에 둔감할 작정인가? 분명한 사실은 출판노동자를 죽이고는 출판의 미래는 없다는 것이다. 책 만드는 노동자를 죽이고서 살아남는 책이 과연 우리가 바라는 가치는 아니지 않는가?
시작은 겨우 인터넷 카페였다. 2009년 2월 '출판노동자협의회'라는 네이버 카페에서 출판노동자들은 자신의 노동을 말하기 시작했다. 노동자라는 이름이 당장 입에 붙지 않았어도, 누구의 지원이 없었어도 출판노동자 스스로 모임을 꾸렸고, 2012년 노동조합을 결성했다. 출판노동자라면 누구라도 가입 가능한 노동조합이었다. 노동조합이 있는 출판사에 들어가지 않아도, 외주 출판노동자라도 노동조합 조합원이 될 수 있고, 해고와 성폭력 앞에 혼자서 싸우지 않아도 되었다. 그것이 바로 지금 출판노동자들 가까이에 있는 ‘언론노조 서울경기지역출판지부’이다.
우리가 노동조합에 가입해 노조 활동을 하는 가장 큰 이유는 일하는 사람으로서 존중받기 위해서다. 부당한 노동환경을 바꿔내고 지금보다 더 나은 환경에서 일하고 싶은 것, 이 소박한 바람이 실현 불가능한 일로 느껴지기도 하지만, 노동조합 안에서는 이 불가능한 꿈이 현실화되기도 한다. 근로기준법이 출판노동자들의 기본 권리를 보장해주지 않는다면 헌법상 권리인 단체교섭권으로 보장받으면 된다.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언론노조 서울경기지역출판지부가 출판노동자들을 대표해 단체교섭에 나서면 된다. 출판계를 대표한다고 자부하는 ‘대한출판문화협회’라는 출판사용자단체가 버젓이 있다. 출협이 출판사용자들을 대표해 출판지부와 단체교섭 테이블에서 만나면 된다.
출판노동자 노동권을 말한 지 10년이다. 이제 출판노동자들은 새로운 걸음을 시작해야 한다. 출판계의 부당하고 불합리한 관행을 출판노동자의 질서로 바꿔내야 한다. 행복하게 책 만들며 살아가고 싶지 않은가? 우리가 함께라면 절대 불가능하지 않다. 출판노동자의 힘으로 출판산업을 바꿔내자. 우리가 만들어온 책이, 다른 세상은 가능하다고 말해왔던 책이, 우리에게 힘이 되어줄 게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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