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 1월 22일, 한국 정치사에서 가장 기형적인 정계개편이 발생했다. 노태우의 민주정의당, 김영삼의 통일민주당, 김종필의 신민주공화당이 합당한 민주자유당의 출범이다.
목적은 제각각. 여소야대 극복이 간절한 노태우, 원내 3당으로 밀려 집권 전망이 어두워진 김영삼, 그 둘의 거래를 내각제로 파고든 김종필이 합작했다. 김대중의 평화민주당은 호남에 고립됐다.
개헌선을 훨씬 초과한 218석의 '공룡' 민자당의 탄생. 그러나 정치 DNA가 달랐다. 군부 독재에 맞서 싸우던 '민주투사' 김영삼, 신군부 세력, 박정희 후예들의 야합은 뒤탈이 끊이지 않았다.
'광주'는 균열의 큰 축이었다. 대통령 당선 뒤 YS는 광주를 통해 '변절자' 멍에를 벗으려 했다. 임기 첫 해인 1993년, 그는 5.13 특별담화를 통해 "문민정부는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의 연장선상에 있는 정부"라고 선언했다.
1995년 11월엔 당내 민정계의 반발 속에 '5‧18 민주화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을 제정하고 이를 공포해 5‧18을 국가 차원에서 '민주화운동'으로 공식화했다. 이를 바탕으로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을 법정에 세운 것도 YS였다. 1996년 광주 5‧18 묘역을 참배한 그는 "전두환, 노태우 정권은 5‧18의 진실을 땅에 묻으려고 애를 썼지만 진실은 밝혀졌다"고 했다.
'민자당' 당명을 버리고 신한국당으로 바꾼 것도 1995년의 일이다. 민중당 출신 이재오, 김문수, 이우재를 비롯해 이회창, 박찬종 등 각계 명망가들 영입으로 면모를 일신, 1996년 총선에서 제1당 지위를 유지했다. '모래시계 검사'로 유명세를 탄 홍준표 전 대표도 이때 YS가 영입한 인사다.
신한국당 창당을 계기로 민정계 다수 구도는 민주계-민정계의 안정적 동거 단계로 접어들었다. 김영삼의 뒤를 이은 '제왕적 총재' 이회창 시대에 두 번이나 집권에 실패했음에도 '보수 동맹'은 정치사회적으로 취약한 진보개혁 세력을 여전히 압도했다.
한나라당, 새누리당으로 또 다시 당명을 바꾼 이명박-박근혜 집권기에는 민정계, 민주계의 구분을 대체해 '반공보수'와 '시장보수' 개념이 떠올랐다. 하지만 자본과 이념적 우파를 아우르는 이 유일한 정치적 결사체는, 박정희의 생물학적 혈통을 물려받은 박근혜의 집권과 함께 이념적 극우화가 급격히 진행됐다.
민주화 세력의 계보를 보수정당에 이식했던 YS 후예들도 극우화 물결에 투항했다. 민주계의 산 증인인 서청원 의원, 'YS의 정치적 아들'을 자처한 김무성 의원조차 '반공보수의 아이콘' 박근혜와 손을 잡았다. 탄핵 뒤에 멀어졌으나 김 의원은 한 때 박근혜의 호위무사라는 평가를 받았고, 서 의원은 탈당에도 불구하고 여전한 '친박 좌장'으로 통한다.
김진태, 이종명, 김순례 의원의 '5‧18 망언'이 3당 합당 이후 30년을 지나며 멸종한 듯 보였던 이 'YS 혈통'에 뼈를 때렸다. 민주계 출신들은 누구보다 먼저 "5‧18은 숭고한 민주화 운동"(서청원), "역사 왜곡이자 금도를 넘어서는 것"(김무성)이라며 비판 발언을 쏟아냈다.
그러나 이들의 불호령은, 정신은 YS에 있으되 몸은 '태극기부대'에 포위된 자신들의 분열적 현실을 역설적으로 드러냈다. 군사 독재에 저항했던 YS의 후예들과 '5‧18은 폭동'이라며 전두환 세력에 면죄부를 준 이들, '박정희 신앙'에 사로잡힌 지지자들의 동거가 나경원 원내대표가 말하는 한국당의 "여러 스펙트럼"이다.
미적대던 한국당 지도부가 여론에 밀려 뒤늦게 '5‧18 망언 3인방'에 대한 징계에 착수했지만, 김진태 의원은 사과 한마디 없이 12일 광주를 방문해 성난 민심에 아랑곳하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이종명 의원은 "5‧18 유공자 명단 공개가 즉각 이뤄지면 국회의원직에서 물러나겠다"고 항명성 해명을 내놨다.
박지원 의원은 이를 "지금 한국당은 전두환 망령, 박근혜 굴레에 갇혀 있다"며 "김영삼 정부는 (자신들의 법통에서) 부인하는 꼴"이라고 촌평했다. 이런 한국당에 '김영삼 DNA'가 되살아날까?
홍준표 전 대표는 당 대표 시절 이승만, 박정희 전 대통령과 함께 YS 사진을 당사에 내거는 등 상징화 작업에 부단히 공을 들였다. 그러나 홍 전 대표 역시 그가 '바퀴벌레'에 비유한 친박 세력과의 내전에서 패한데 이어 스스로 우경화의 길을 선택함으로써 YS 정신 복원에 실패했다.
박근혜 탄핵 국면에서 자신이 창당한 바른정당을 끝내 지키지 못하고 한국당에 백기투항한 김무성 의원도 YS의 승부사 기질만큼은 물려받지 못했다. 약 30년 만에 찾아온 보수 혁신의 절호의 기회를 스스로 반납한 그이기에, 민정계와 그야말로 사투를 벌였던 YS의 결기와 여러모로 대비되는 것이다.
5‧18 망언 사태는 '3당 합당'에 뿌리를 둔 한국당에 박정희-전두환 유전자만 남아있음을 드러낸 사건이다. 이변이 없는 한, '태극기부대'를 등에 업은 박근혜 정부의 2인자 '황교안 체제'가 이달 안에 한국당에 들어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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