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정경제부 출신인 정건용 산업은행총재의 산하기관 인사 개입이 해당기관장의 거센 반발을 낳으면서, 금융계에 '낙하산 인사' 논란을 낳고 있다.
이번 파동은 금명간 각 금융기관 및 공기업에 대규모 인사시즌이 도래한다는 점에서 그 처리결과에 비상한 관심이 쏠리고 있다.
이와 함께 모처럼 금융기관의 대외신인도가 개선되고 있는 마당에 '신(新) 관치' 논란이 재연될 소지를 제공했다는 점에서 우려를 낳고 있기도 하다.
***한기평 사장, 산은 인사개입 공개 폭로**
낙하산 인사 비리가 불거진 곳은 국내 3대 신용평가기관중 하나인 한국기업평가(주)이다.
한기평의 윤창현(62) 사장은 22일 기자간담회를 자청해 "공동대주주인 산업은행이 경영진 교체를 위해 한기평 주주들인 거래기업과 비밀리에 임원 선임에 관한 약정을 체결, 경영진 선임을 산은의 의사대로 할 수 있도록 추진해왔다"고 폭로했다.
윤사장은 "또다른 공동대주주인 피치(PITCH)측은 현 경영진 취임이후 실적 등을 고려해 유임을 원하고 있지만 산은은 금융회사 경영진 단임 원칙을 이유로 불필요한 간섭에 나서고 있다"면서 "국책은행인 산은의 이같은 행위에 대해 유감스럽게 생각하며 약정서는 폐기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산업은행은 주총 소집도 되기 전인 지난해 6월부터 이같은 작업을 시작해 자신들의 지분(6.3%)을 포함해 이미 43%의 지분을 확보한 것으로 알고 있다"며 "약정서는 비밀유지, 산은이 추천하는 경영진에 대한 거래기업의 동의, 주식매매시 사전 통지 및 협의 등의 내용으로 이뤄져 있다"고 밝혔다.
윤사장은 "이같은 산은의 행동은 주주들의 공정하고 자율적인 의사를 침해하는 것"이라며 "동시에 신용정보법에도 정면위배되는 행위"라고 주장했다.
현행 신용정보법은 주주인 금융기관이나 기업 등이 '객관적인 신용평가 행위'에 부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행위를 막기 위해 이들이 신용평가회사의 지분을 10%이상 보유할 경우 초과지분에 대한 의결권 제한과 초과지분의 6개월내 해소를 규정하고 있다.
***정총재, 후임자로 자신의 고교.대학 같은과 선배 내정**
금융계는 윤사장의 이날 기자회견을 '충격적 반란'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금융계에서 전례를 찾아보기 힘든 광경이기 때문이다.
특히 이번에 항명의 대상이 된 정건용(55) 산은총재는 지난해말 개각당시 금융감독위원장 유력후보로 거명됐을 정도로 영향력이 만만치 않은 정통 재무부출신 관료인 탓이다.
정총재는 재경원 금융총괄심의관, 재경부 금융정책국장, 금융감독위원회 부위원장을 지낸 정통재무관료 출신으로, 지난해말 차기 금감위원장으로 거명되다가 윤태식에게 사람을 소개시켜준 혐의로 조사를 받으면서 낙마한 케이스다. 재경부에서는 그러나 "정총재가 언젠가는 금감위원장이나 재경부장관이 될 몇몇 안되는 거물관료"로 평가하고 있다.
이같은 거물에게 산은이 최대주주인 산하 계열사 금융기관장이 정면으로 항명하고 나섰으니, 금융계가 놀랄밖에.
금융계에 따르면, 이번 한기평 파동은 정건용 산은총재가 오래 전부터 한기평 차기사장으로 자신의 고등학교 및 대학교 같은과 선배인 오규원(57) 한솔그룹 고문을 내정해놓고, 이를 무리하게 관철하기 위해 밀어부치는 과정에 발생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오규원 고문은 정총재의 경기고등학교, 서울대 행정학과 2년 선배로, 산업은행에서 평생 재직하다가 이사를 마지막으로 그만둔 뒤 현재는 한솔그룹 고문을 맡고 있다.
***산은, 불과 6.3% 지분 갖고서 인사권 쥐락펴락**
문제는 한기평의 윤창현 사장이 물러설 의사가 전혀 없다는 데 있었다.
지난 3년여간의 재임기간중 한기평의 경영을 계속 개선시켜왔다는 이유에서였다. 실제로 한기평은 올 회계년도에 전년대비 19.4% 증가한 2백74억원의 매출과 64억원의 이익을 올렸다.
이같은 경영실적 개선은 산은과 동일한 지분을 갖고 있는 최대주주인 미.영 합작 신용평가기관 피치사의 긍정적 신임을 얻어 피치는 현재 윤사장의 재임을 지지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렇게 윤사장이 완강히 저항하자, 정건용 산은총재는 지난해 6월 체결한 '주주간 협약서'를 앞세워 윤사장 교체를 위한 주주들의 지지를 확보하는 작업에 본격착수했다.
주주간 협약서란 "회사의 이사 및 감사 선임은 상호협의를 통해 산은이 추천하기로 한다(2조)"는 산은의 경영권 확보 각서를 가리킨다. 이는 2002년 2월로 예정된 한기평의 코스닥 상장에 따라 산은의 지배력이 약화될 것을 우려해 작성한 각서였다.
현재 한기평의 주주분포는 1월26일 현재 산업은행과 피치사가 각각 6.3%를 보유하고 있고, 17개 금융기관이 41.13%, 기타 8개 법인이 11.9%를 차지하고 있다. 나머지는 우리사주 10.3%, 공모주 24.08% 등이다.
따라서 산은은 '주주간 협약서'를 통해 불과 6.3%의 지분밖에 안갖고 있으면서도 사실상의 최대주주로서 한기평의 인사경영권을 장악한 셈이다.
윤창현 사장 교체를 결심한 정건용 산은총재는 한기평 지분을 보유하고 있는 금융기관 및 법인에 대해 주주협약서에 기초해 사장 교체에 동의해줄 것을 요구했고, 그 결과 현재까지 전체 지분의 43%를 확보한 상태라고 한기평의 윤사장은 주장하고 있다.
이 정도 표라면 윤사장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그의 교체는 거의 기정사실화된 상태라 할 수 있다.
***신용평가기관의 객관적 업무평가에 치명적 독소**
과연 이번 파동을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대주주의 '당연한 경영권 행사'로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그러나 그러기에는 여러 가지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다.
가장 큰 문제점은, 과연 국책은행이 객관적 신용평가를 생명으로 하는 신용평가기관의 인사경영권에 개입하는 게 올바른 일인가이다.
산은은 역대 총재 자리를 재무부 관료들이 차지해온 사실상의 '금융권의 재경부'이다.
산은은 그동안 각종 대기업 대출 및 대기업 부실 정리를 책임맡아왔고, 그 결과 IMF사태이후에만 거의 10조원에 육박하는 손실을 냈고 이 손실은 국가예산으로 보전해야 했다.
이처럼 정부와 동전 앞뒷면 관계에 있는 국책은행이 신용평가기관의 경영인사권을 쥐락펴락한다는 사실은 아직 우리 금융이 '관치금융'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국제금융계의 비판을 받는 주요요인중 하나로 작용해왔다.
실제로 그동안 정부는 대우사태를 비롯해 대형부실기업의 신용등급을 조정하는 과정에 신용평가기관들의 소신있는 신용평가 업무를 적잖이 가로막아왔던 게 숨길 수 없는 현실이다.
또다른 문제점은 언제까지 '학연'에 연연한 인사관행을 계속하려 하는가이다.
산은 입장에서 볼 때 한기평이 한단계 더욱 도약하기 위해선 '새 경영진'이 필요하다고 판단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하필이면 그 많고 많은 사람들 가운데에서 새 경영진이 왜 산은총재의 고등학교.대학교 선배여야 하느냐는 사실이다.
이번 파동과정에 한기평의 또다른 최대주주인 피치는 경영진 교체 시도에 반대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는 윤사장의 경영능력에 대한 평가에 앞서 정부의 관치 가능성에 대한 우려 때문인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런 시대착오적 파동이 계속되는 한, "한국금융이 일본을 앞질렀다"고 말하기에는 아직 시기상조인듯 싶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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