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고대학 미국 하버드대학에 거센 개혁바람이 불고 있다. 지난해 7월 총장으로 취임한 로렌스 H. 서머스가 "하버드대학이 급변하는 글로벌 경제에 필요한 교육을 제공하는데 실패하고 있다"며 대대적인 개조작업에 착수했기 때문이다.
이같은 하버드대학의 개혁 드라이브는 최근 서울대 정원미달 사태, 교육부와 재경부간 평균화교육 철폐 논란 등 '교육 개혁'을 둘러싸고 많은 진통을 겪고 있는 우리 교육계에도 많은 시사점을 던져주고 있다.
***하버드대학의 아킬레스건**
서머스 총장은 "하버드에는 수많은 아킬레스 건이 있다"면서 이를 교정하려면 대학문화를 혁명적으로 뜯어고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서머스가 '하버드대의 아킬레스 건'이라 부른 문제점들은 여러 가지다.
우선 평점제도를 들 수 있다. 그동안 하버드대는 평점의 절반이 A학점일 정도로 후한 점수를 주어 졸업생 90%가 우등상을 받을 정도였다.
두 번째는 교수의 노령화다. 현재 하버드대에서 임기를 보장받는 이른바 '종신직'교수의 평균 연령은 55세로 40세 이하는 10%도 채 안된다.
세 번째는 학생들이 우물안 개구리라는 것이다. "하버드의 수준을 따라올 외국의 대학은 없다"는 믿음아래 해외유학시 학점인정을 꺼려했다. 그 탓에 유학경험이 있는 하버드대 학생은 10%도 안된다. 다트머스대학이 해외유학을 장려한 결과 21개 학과 학생 중 47%가 참여한 것과 대조된다.
네 번째는 하버드대 교수들이 연구에만 치중하고 학생들과 대화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자신의 장래나 지적 문제에 대해 교수와 30분 정도 대화해 본 사람이 몇 명이나 되냐고 학생회 간부 50명에게 물었더니 절반도 손을 들지 않았다"고 서머스는 안타까워했다.
마틴 펠드스타인 같은 유명 경제학자가 강의하는 경제학 입문강좌에 5백명이 수강신청을 했지만 이 교수와 대화를 해본 사람은 거의 없다는 것이다.
***서머스의 '하버드 개조 플랜'**
서머스는 이러한 문제들을 시정하기 위해 앞으로 평점을 엄격히 하고 교수채용심사방식을 개선하고, 해외유학을 장려하고 교수들이 보다 많은 시간을 학생들을 위해 쓰게 하겠다며 벼르고 있다.
서머스의 원대한 야심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교육개혁 등 주요 국가정책을 이끌어온 하버드의 전통적인 위상을 다시 확립하겠다는 것이다.
의학과 생명과학 분야에서도 선두주자가 되기 위해 케임브리지-보스턴 지역에 '제2의 실리콘 밸리'를 건설하겠다는 구상도 갖고 있다.
서머스는 "21세기의 교양인이 과학을 몰라서는 안된다"는 소신을 갖고 있다. 시인에게 물리학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식의 하버드의 학문적 풍토를 깨고 비과학전공자들에게 과학 교육을 강화시키려 하는 것이다.
"셰익스피어의 희곡 5가지를 댈 수 없는 것은 용납 안하면서 유전자와 염색체의 차이를 알지 못해도 무방한 것이 하버드의 기존 풍토였다"고 서머스는 비판한다.
"하버드대는 역사적으로 기존 질서에 순응하거나 정체된 적이 없으며 늘 새로운 의문을 제기해 왔다 "고 서미스는 말한다.
생명공학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은 서머스의 이러한 도전정신을 잘 드러내는 대목이다.
첨단기술산업은 학문에 의해 어느 정도 영향을 받지만, 생명공학산업은 완전히 학문에 의해 이끌어진다고 할 정도로 생명공학은 산업적으로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학문이라는 것이다.
미국 생명공학 벤처업계 관계자는 "치료제의 경우 하버드나 MIT에서 개발되고 하버드 의대에서 임상실험을 거치고 기업에서 상품화하는 협력체제가 구축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한다.
이런 구도가 가능해지려면 하버드는 순수과학에 집착하는 전통을 깨고 MIT처럼 산학협동에 보다 적극적이 되어야 한다. 이것은 하버드로서 문화적 대변혁을 요구한다.
***서머스의 '젊은 피 수혈론'**
서머스는 이러한 변화를 가져오기 위해서는 교수단에 '젊은 피를 수혈하겠다는 강한 의지를 보이고 있다. 이 때문에 그는 "과거의 뛰어난 업적보다는 미래의 업적이 예상되느냐"를 정교수 임명의 중요한 기준으로 내세웠다.
종신 교수자격으로 하버드대로 이적하려던 두 명의 교수 임용을 거부한 것은 일대사건이었다. 이 두 명은 54세 동갑내기로 각각 영국 케임브리지대와 스탠퍼드대에서 음악역사학과 정치학의 최고 권위자로 꼽히던 인물들이었다.
하버드대는 그동안 세계 최고의 전문가라고 인정을 받는 학자만이 하버드대교수가 될 수 있다는 전통을 고수해 왔다.
미국에서 4년제 대학교수의 평균연령은 지난 1993년의 47.6세에서 1999년에는 49.2세로 높아지고 있는 추세다. 이러한 보수적 풍토를 파괴하는데 서머스가 나선 것이다.
서머스는 이러한 과업을 수행하기 위해 교수진을 확충하고 캠퍼스를 보다 넓은 곳으로 옮길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하버드대는 현재 학생 대 교수의 비율이 다른 경쟁대학보다 뒤져있다. 이에 따라 서머스는 6백42명인 인문 및 과학 담당 교수진을 7백명 이상으로 늘리는 작업을 진행 중이다.
하버드대 캠퍼스 확장 건은 서머스가 오기 전에 이미 보스턴 인근 올스턴에 케임브리지 부지보다 더 큰 1백에이커의 부지를 구입해 두어 출발은 좋은 셈이다.
그러나 이곳으로 대학시설의 대부분을 옮기겠다는 계획에 대해 올스턴시 당국은 "하버드대가 들어서면 이 지역에 사는 블루 칼라 주민들의 거주가 불안정해진다"며 곤혹스러워 하고 있다. 하버드 법대 교수들도 "학문적인 유배지"라며 반발하고 있다.
***개혁의 걸림돌들**
이론과 실천이 다르듯 서머스의 구상은 실현에 있어 여러 가지 난관에 부딪치고 있는 것이다.
비즈니스 위크지도 서머스의 하버드대 개혁 추진과 관련한 18일자 기사에서 "하버드대는 전통적으로 각 단과대별로 광범위한 자치권을 부여하고 있어 총장은 새로운 커리큘럼 제정 등 어떤 일도 협의를 통해서 해결해야 하는 난제에 봉착해 있다"고 보도했다.
모든 것을 협의해야 한다는 점에서 서머스는 인간적인 약점이 있다고 지적된다. 전투적이고 완고한 성격을 지녔다는 것이다. 서머스가 성격 탓으로 곤경을 겪은 두 가지 사례가 유명하다.
서머스는 클린턴 행정부 재무차관 시절 멕시코에 대한 긴급융자 건으로 의회의 협조를 구하려는 상황에서도 태도가 거만하고 의원들에게 훈계하려 든다는 이유로 비난을 받았다. 결국 클런턴 행정부는 의회 대신 국제통화기금을 통해 멕시코를 지원해야 했다.
서머스는 1997년에도 재산세를 낮추려는 공화당원들에 대해 '이기적'이라고 공격해 곤경에 처했다. 당시 재무장관 로버트 루빈은 "나는 서머스의 말에 별로 화가 나지 않지만 우리 아이들은 화를 냈다"는 조크로 사태를 무마시켜야 했다.
그러나 루빈과 함께 일하면서 서머스는 루빈으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다는 평이다. 사람 다루는 솜씨가 좋기로 유명한 루빈 덕에 서머스는 외교적 수완과 업무처리 능력이 향상되었다는 것이다.
루빈도 "서머스는 지적 도전욕이 강하다. 하버드 같은 대학에서는 이러한 성향이 환영받아야 한다"고 격려하고 있다.
***'미국 3대 석학'중 하나인 서머스**
서머스에게는 그가 커다란 성과를 거두리라는 기대를 갖게 하는 장점도 많다. 클런턴 행정부 때 재무장관이었던 로렌스 서머스는 정치적 편향이 적은 경제석학으로 평판이 높다.
1636년 미국 최초의 대학으로 설립된 이래 하버드의 개혁을 주도한 총장은 이전에도 있었다. 그러나 서머스는 이전의 총장이 학계에 국한된 경력이었다는 점에서 남다르다.
하버드대 사상 서머스처럼 공공정책에 대해 뛰어난 업적과 경험을 가진 총장은 없었다. 서머스는 10년 넘게 워싱턴의 경제자문위원회에서 활동했으며, 세계은행 수석 이코노미스트, 재무장관을 지냈다.
올해 47세인 서머스는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폴 새뮤얼슨의 조카로 28세 때 하버드대 정교수가 되었다. 이는 하버드대 사상 몇 안되는 기록이다. 그는 제프리 삭스 하버드대 교수, 폴 크루그먼 프린스턴대 교수와 함께 차기 노벨경제학상을 예약해놓은 '미국의 3대 석학'중 하나로 불리우고 있다.
하버드대가 보유한 막대한 기부금도 그의 힘이 되어주고 있다. 하버드대의 재산은 5년 사이에 두 배로 늘어 1백83억달러에 이른다. 강력한 경쟁대상인 예일대보다 두 배나 부자다.
그러나 비즈니스 위크지는 "하버드의 기부금 대부분은 각 학교별로 배분된다. 하버드 단과대학과 대학원들은 80억 달러 정도를 배분받고 의대는 20억 달러 이상, 비즈니스 스쿨은 13억 달러를 받는다. 서머스는 전체의 20% 미만에 대해서만 직접적 권한을 행사할 뿐이다.이래 가지고서는 지시만으로 변화를 달성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고 지적했다.
***경쟁대학의 격려속에 진행중인 하버드 개혁**
하지만 서머스의 구상에는 하버드대의 성공 이상의 의미가 있다는 학계의 격려가 이어지고 있다. 컬럼비아대 사대 학장 아더 레빈은 "서머스는 결정적인 순간에 하버드에 왔다"며 "그의 진정한 과제는 달라진 사회가 요구하는 교육을 제공하는 대학을 만드는 것"이라고 말했다.
하버드의 경쟁대학들도 서머스가 성공하기를 바란다. 예일대 총장 리처드 레빈은 "하버드대가 학부생 교육에 더 많은 관심을 쏟는다면 미국 전체의 교육의 질이 높아지는 것"이라고 서머스를 격려했다.
MIT 공대 총장 찰스 베스트도 "서머스가 학부생의 과학교육 개선에 관심을 갖고 있다는 것에 희망을 갖게 된다"며 "과학분야에서 하버대드가 나선다면 이 나라의 과학수준이 높아질 것'이라고 말했다.
하버드 의대 학장 조셉 마틴 같은 몇몇 교수들은 "대학을 이끄는 입장에 서보면 50명이 반대의 목소리를 낸다면 1천명은 말없이 지지하고 있는 것"이라면서 서머스를 지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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