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가 직업병 발생에 대해 공식 사과했다. 그러나 삼성의 다른 계열사 및 협력업체에서 발생한 직업병 피해는 숙제로 남았다.
김기남 삼성전자 디바이스솔루션(DS) 사업부 대표이사는 23일 '중재 판정 이행 합의 협약식'에서 "반도체 및 LCD 사업장에서 건강유해인자에 의한 위험에 대해 충분하고 완전하게 관리하지 못했다"고 인정했다. 아울러 김 대표이사는 "병으로 고통받은 근로자와 그 가족분들께 진심으로 사과드린다"며 "이번 일을 계기로 더욱 건강하고 안전한 일터로 거듭나겠다"고 밝혔다.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이날 협약식에는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 반올림 관계자들도 참가했다. 황상기 반올림 대표는 "오늘의 사과를 삼성전자의 다짐"으로 받아들이겠다고 했다.
그는 지난 2007년 사망한 고(故) 황유미 씨의 아버지다. 고(故) 황유미 씨는 고등학교 3학년 2학기에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에서 일을 시작한 뒤, 백혈병에 걸려 숨졌다.
황 대표는 "직업병 피해는 삼성전자 반도체·LCD 부문에서만 있는 게 아니"라며, "다른 삼성 계열사에도 유해 물질을 사용하다 병든 노동자가 있다"고 밝혔다. 또 "해외 사업장에서도 비슷한 피해자들이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삼성은 이 모든 직업병 노동자들을 위한 폭넓은 보상을 마련"하도록 요구했다.
이날 협약식은 지난 1일 '반도체 사업장에서의 백혈병 등 질환 발병과 관련한 문제 해결을 위한 조정위원회'(위원장 김지형 전 대법관)가 삼성전자와 반올림에게 중재안을 전달한 데 따른 후속절차다. 당시 중재안에 삼성전자 대표이사의 공식 사과가 포함돼 있었다.
중재안에 따른 보상 대상은 삼성전자 기흥사업장의 제1라인이 준공된 1984년 5월 17일 이후 반도체·LCD 생산라인에서 1년 이상 근무한 현직자와 퇴직자 가운데 암을 포함한 희귀질환에 걸린 이들 전부다. 보상액수는 근무 장소, 근속 기간, 질병 중증도 등을 고려해 산정하되, 백혈병의 경우 최대 1억5000만 원으로 정해졌다. 아울러 삼성전자는 전자산업을 비롯한 산업재해 취약 노동자의 안전과 건강을 보호하고 중대 산업재해를 예방하기 위해 500억 원 규모의 '산업안전보건 발전기금'을 출연하고, 이를 한국산업안전보건공단에 기탁하기로 했다.
이정미 정의당 의원은 인사말에서 "피해자들이 통상적인 산재 보상액보다 낮은 보상액을 수용하면서까지 보상 범위를 넓히고자 했다"고 밝혔다. 피해자들이 자기 몫의 보상을 키우기보다, 다른 피해자들에게도 보상이 이뤄지게끔 하도록 애썼다는 뜻이다.
심상정 정의당 의원은 "한국은 OECD 국가 가운데 산업재해 발생률이 최고 수준"이라며, "산업재해 입증 책임을 전적으로 노동자에게 전가하는 제도"를 문제 삼았다. 산업재해가 발생하면, "기업이 살인을 한 것으로 간주"하는 선진국과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는 설명이다.
- 다음은 김기남 삼성전자 디바이스솔루션(DS) 사업부 대표이사의 발언 전문.
10여 년 동안 저희가 해결하지 못한 문제를 사회적 합의라는 방식으로 해결을 이끌어 주신 김지형 조정위원장님과 백도명, 정강자 위원님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또한, 어려움 속에서도 끝까지 문제를 풀어내기 위해 성심껏 논의에 참여해 주신 반올림 관계자분들께도 감사드립니다.
소중한 동료와 그 가족들이 오랫동안 고통 받으셨는데 삼성전자는 이를 일찍 부터 성심껏 보살펴드리지 못했습니다.
그 아픔을 충분히 배려하고 조속하게 해결하기 위한 노력이 부족했습니다.
또한, 삼성전자는 과거 반도체 및 LCD 사업장에서 건강유해인자에 의한 위 험에 대해, 충분하고 완벽하게 관리하지 못했습니다.
오늘 이 자리를 빌어 병으로 고통 받은 직원들과 그 가족분들께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이번 일을 계기로 삼성전자는 더욱 건강하고 안전한 일터로 거듭나겠습니다.
오랫동안 풀기 어려웠던 문제를 해결하는데 관심을 가지고 충고와 조언을 해 주신 우원식 의원님, 심상정 의원님, 한정애 의원님, 이정미 의원님, 안경 덕 노동정책실장님 및 노동부 관계자 여러분들께 감사드립니다.
다시 한번 고통을 겪으신 모든 분들께 깊은 사과의 말씀을 드립니다.
다음으로 조정위원회의 중재안에 따른 삼성전자의 이행계획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삼성전자는 2018년 11월 1일 발표된 중재안을 조건없이 수용하여 이행할 것을 약속드립니다.
이를 위해 다음과 같이 세부 이행계획을 수립하여 실행하고자 합니다.
보상 업무는 중재 판정에서 정한대로 반올림과의 합의에 따라 제3의 독립 기관인 '법무법인 지평'에 위탁하겠습니다.
또한, 지원보상위원회 위원장은 법무법인 지평의 김지형 대표 변호사님으로 반올림과 합의했습니다.
삼성전자는 중재안에서 정한 지원보상안과 지원보상위원회 위원장이 정하시는 세부 사항에 따라, 지금부터 2028년에 이르기까지 보상이 차질없이 이뤄지도록 하겠습니다.
삼성전자는 중재 판정에 규정된 바와 같이 2018년 11월 30일까지 회사 홈페이지에 사과 내용과 지원보상 안내문을 게재하겠습니다.
또한, 삼성전자는 새롭게 구성되는 지원보상위원회를 통해 보상 결정을 받은 분들에게도 사과문을 보내 위로의 마음을 전하겠습니다.
삼성전자는 중재 판정에 명시된 산업안전보건 발전기금 500억원을 전문성과 공정성을 갖춘 한국산업안전보건공단에 기탁하기로 반올림과 합의했습니다.
삼성전자는 여러분들의 노력으로 만들어진 사회적 합의가 좋은 결실을 맺을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다음은 황상기 반올림 대표의 발언 전문.
안녕하십니까. 황상기입니다.
먼저 이렇게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애써주신 분들께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4년이 다 되도록 포기하지 않고 끈기 있게 조정해주신 김지형 조정위원장님과 백도명, 정강자 조정위원님 감사합니다. 이번에 지원보상안을 만들 수 있도록 조정위원회에 자문해주신 연구자들께도 감사합니다. 삼성이 문제 해결에 나서도록 타이르고 설득해 주셨던 여러 국회의원들께도 감사합니다. 자기 일처럼 팔 걷고 나서주신 노동시민사회 단체들과 활동가들께도 감사합니다. 1023일 농성하는 동안 농성장들 함께 지켜주신 수많은 지킴이들과 농성이 힘들지 않게 간식거리와 후원금을 보내주신 많은 분들께 감사합니다.
오늘 삼성전자 대표이사의 사과는 솔직히 직업병 피해가족들에게 충분하지는 않습니다. 지난 11년간 반올림 활동을 하면서 수없이 속고 모욕당했던 일이나 직업병의 고통,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아픔을 생각하면 사실 그 어떤 사과도 충분할 순 없을겁니다.
그러나 저는 오늘의 사과를 삼성전자의 다짐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이번에 마련된 안을 통해 보상 대상을 기존 삼성전자의 기준보다 대폭 넓히고 저희 반올림이 알고 있는 피해자들만이 아니라 미처 저희에게 알리지 못하셨던 분들도 포괄하게 되어 다행입니다. 다만 사외협력업체 소속이라서 혹은 보상대상 질환이 아니라서 여전히 보상에 포함되지 못하는 분들이 계시다는 점이 안타깝습니다.
이번에 삼성전자가 오백억원의 발전기금을 마련하고 산업안전보건공단에 기탁하기로 양쪽이 합의했습니다. 삼성전자가 쉽지 않은 결정을 내린 점도 칭찬받아야겠지만 실은 노동자들이 땀 흘려 일해서 만든 돈이라는 점을 꼭 기억해야합니다. 공단은 이 소중한 기금의 의미를 무겁게 받아 안고 전자산업 노동자 안전과 건강을 위해 제대로 사용해 주시길 바랍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몇 가지 숙제들이 남아있습니다. 직업병 피해는 삼성전자 반도체·LCD 부분에서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삼성전기, 삼성 SDS, 삼성 SDI 등 다른 계열사에서도 유해물질을 사용하다가 병든 노동자들이 있습니다. 국내뿐 아니라 해외 사업장에서도 비슷한 피해자들이 있습니다. 삼성은 이 모든 직업병 노동자들을 위한 폭넓은 보상을 마련하길 바랍니다.
애초 정부의 산업재해 보상을 받기가 그토록 어렵지 않았다면 우리 노동자들과 가족들이 이렇게까지 고생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지금까지 근로복지공단은 많은 산재노동자에게 절망을 안겨주었습니다. 이제는 산재보험제도와 근로복지공단을 개혁해서 산재노동자 권리를 보호하는 본연의 역할을 다해야 합니다. 산재가 발생한 사업장에서는 사업주의 잘못을 철저히 조사해서 형사처벌 하도록 해야합니다.
직업병 보상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예방입니다. 노동자가 무슨 화학물질을 쓰는지 알 수 있게 노동자와 사회구성원 모두에게 알 권리, 참여할 권리를 보장할 수 있도록 산업안전보건법을 강화해야 합니다. 노동자 혼자서 회사의 안전보건을 살펴보고 다른 의견을 내긴 어렵습니다. 노동조합이 탄압받는 회사에서는 어림도 없는 일입니다. 삼성은 국내와 해외에서 노동조합을 탄압해 왔습니다. 이제라도 사과하고 노동조합 할 권리를 존중하겠다고 약속해야 합니다. 삼성을 비롯해서 모든 대기업들이 위험하고 힘든 일을 개선하는 대신 국내 중소기업과 해외 공장의 노동자들에게 전가해왔습니다. 이런 일이 계속되지 않도록 정부와 국회는 원청 사업주의 책임을 엄격히 묻는 법제도를 만들고 대기업들은 솔선해서 안전보건에 대해 책임질 계획을 보여줘야 합니다.
제 딸 유미에게 했던 약속을 지키게 되어 기쁩니다. 하지만 유미와 제 가족이 겪었던 아픔은 잊을 수 없습니다. 너무 많은 분들이 이런 아픔을 갖고 있습니다. 앞으로 오늘의 약속을 이행하기 위해 만들어질 지원보상위원회와 발전기금을 통해 진행될 사업들에 임하는 모든 분들께서 이 점을 꼭 기억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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