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막농성은 5년 차다. 336일간 고공농성도 했다. 그러나 2021년 12월 21일 코로나19로 인한 경영위기를 명분으로 정리해고된 세종호텔 해고자 6명은 복직하지 못했다. 그 사이 호텔 경영은 흑자로 전환했다. 2024, 2025년 영업이익은 모두 40억 원을 넘었다.
보다 못한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이 아마도 자신의 마지막이 될 희망뚜벅이 행진을 결심했다. 1986년 노조 활동을 하다 한진중공업에서 해고된 뒤 37년 만인 2022년 명예복직한 그의 나이는 올해 66세다. 암 투병 과정에서 장기 다섯 개를 떼어내 몸도 성치 않다.
그런 김 지도위원이 해고자들의 복직을 염원하며 지난 9월 28일 부산 호포역에서 시작한 '세종호텔 희망뚜벅이'가 31일 청와대 앞에서 끝났다. '해고자들과 나만 걸어도 된다'는 마음으로 시작한 행진에 전날까지 연 인원 1200명 이상(주최측 추산)이 참여했다. 마지막 날 행진 거리는 약 14km, 총 참가자 수는 250여 명이었다.
남태령에서 시작한 행진…"웃으면서 끝까지 함께"
이날 행진은 오전 11시경 남태령역에서 시작됐다. 비상계엄 국면이던 2024년 12월 16일 트랙터를 끌고 서울로 간 농민들이 경찰의 저지를 뚫었던 그 장소였다. 이듬해 2월 13일 고진수 민주노총 서비스연맹 세종호텔지부장이 336일 간 이어진 고공농성을 시작했다. 9일 뒤 윤석열 전 대통령 탄핵 집회에 참여한 시민이 그를 찾아 "탄핵"과 함께 "세종호텔 해고자 복직"을 외쳤지만, 후자는 현재까지도 이뤄지지 않았다. 행진 중 세종호텔 해고자들이 요청한 이재명 대통령 면담도 불발했다.
출발을 함께하기 위해 모인 130여 명은 "힘내라 고진수, 힘내라 김란희, 힘내라 허지희, 힘내라 민병준, 힘내라 이치호, 힘내라 이주영"이라며 세종호텔 해고자를 응원한 뒤 행진을 시작했다. "웃으면서 끝까지 함께 투쟁"이라고 쓰인 붓글씨 현수막도 앞에 들었다. 이는 김 지도위원이 좋아하는 구호다.
행진이 시작되자 대열 맨 앞에 김 지도위원과 고진수 세종호텔지부장, 허지희 세종호텔지부 사무장, 김란희 세종호텔지부 조합원이 함께 섰다. 고 지부장은 세종호텔지부 깃발을 좌우로 힘차게 흔들며 걸었다. 김 지도위원은 "세종호텔 해고노동자 복직"이라고 쓴 부채를 들었다.
찬 바람이 부는 가운데 2시간 30분여 간 8.8킬로미터(km)를 걸어 신용산역에 도착한 뒤 30분 간 휴식하며 떡과 귤로 점심을 먹었다. 이들이 먹은 음식은 '비정규직 노동자의 집 꿀잠'에서 준비해 온 것이었다.
세종호텔 앞에 선 희망뚜벅이…"주명건 부자, 정리해고 철회하라"
다시 4.5km를 걸어 오후 3시경 행진 대열은 명동 세종호텔에 도착했다. 미리 도착해 '세종호텔 복직 촉구 기도회'를 하던 이들 70여 명이 반갑게 이를 맞았다. 기다리던 이 중에는 대구 구간 행진에 함께했던 쿠팡 물류 노동자 고(故) 장덕준 씨 어머니 박미숙 씨와 아버지 장광 씨도 있었다. 둘을 본 김 지도위원은 활짝 웃으며 인사하더니 박 씨를 꼭 끌어안았다.
세종호텔에서 참가자들은 호텔을 운영하는 세종투자개발을 소유한 대양학원의 주명건 명예이사장, 주대성 이사 부자(父子)에게 "세종호텔 정리해고 지금당장 해결하라"고 요구하는 내용이 담긴 스티커를 호텔 문 등에 붙였다.
이어 약식 집회가 진행됐다. 웹자보 등을 통한 희망뚜벅이 홍보 업무를 자원한 김민지 씨는 "희망뚜벅이는 이제 시작이다"라며 "앞으로 복직을 위해 뭘 할지 생각하자. 겨울이 와도 해고자들을 혼자 내버려두지 말자"고 말했다.
허지희 사무장은 "복직 투쟁을 시작한 지 5년이나 지났는지 몰랐다"며 웃어보인 뒤 "6명으로는 절대 할 수 없는 싸움이었다"고 함께해준 이들에게 감사를 표했다. 이어 "반드시 현장에 돌아가겠다"고 밝혔다.
이후 참가자들은 700여 미터 떨어진 서울고용노동청에 도착해 다시 걸음을 멈췄다. 이 자리에서는 직장내괴롭힘, 노조 탄압 등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랜드와 카라 노동자들이 노동부의 미온적 대응을 규탄하고 세종호텔 해고자의 복직을 바라는 마음을 말했다.
희망뚜벅이 함께한 이들이 무대 오른 청와대 앞 결의대회
행진 대열이 결의대회가 예정된 청와대에 도착한 때는 오후 4시 50분경이었다. 중간중간 합류한 이들이 더해져 참가자 수는 250여 명으로 늘어있었다.
결의대회에서 "길 위의 5년, 청와대는 응답하라!"고 적힌 연단 위에 지난 34일 사이 희망뚜벅이에 참가했던 이들이 올라 세종호텔 해고자들의 복직을 바라는 마음을 전했다. 행진 과정을 컴퓨터 롤플레잉 게임의 모험처럼 표현한 영상을 상영하기도, 청년 민중가수들이 공연을 하기도 했다. 사회는 김란희 세종호텔 조합원이 맡았다.
무대에 오른 이 중에는 커다란 아픔을 지닌 이들도 있었다. 이태원 참사 유가족인 고 신예진 씨 아버지 신정섭 씨는 "정말 국민주권 정부라면 이제 앞으로 나오라. 나와서 세종호텔 복직 문제를 해결하라"며 "정부가 지켜주지 않은 내 아이는 돌아올 수 없지만 세종호텔 해고자들이 일터로 돌아가는 모습은 꼭 반드시 봐야 되겠다"고 해 많은 이가 눈시울을 붉혔다.
쿠팡에서 아들을 잃은 장광 씨는 "희망뚜벅이 참가 제안이 왔을 때 제 나이(64세)를 감안했는지 차로 에스코트를 해달라고 했다. 열심히 해보려고 트럭에 현수막도 부착하고 부지런히 따라다녔는데, 아무래도 뚜벅이가 필요하더라. 그래서 대구에서는 뚜벅이로 참가했다"며 "뚜벅이의 마음과 기억을 가슴에 안고 복직하는 날까지 함께하겠다"고 다짐했다.
김진숙 "간절한 마음 모여 복직되길"…고진수 "함께 싸우고 함께 승리하자"
연단을 보며 세종호텔 해고자들과 김 지도위원은 때로 웃고 때로 울었다. 중간에는 김 지도위원이 직접 손으로 쓴 발언문을 볼펜을 꺼내 다듬는 모습도 보였다.
발언 차례가 돼 무대에 오른 김 지도위원은 "아마도 제 생애 마지막이 될 희망뚜벅이를 마쳤다"고 운을 뗐다. 이어 2011년 자신이 한진중공업 정리해고에 맞서 고공농성을 했을 때 "간절한 마음이 이어져 지역과 업종과 존재를 뛰어넘는 희망버스가 만들어졌고, 저는 살아서 내려왔다"며 "그토록 간절한 마음이 모이면 고진수, 김란희, 민병준, 이치호, 이주영, 그들이 간절히 원하는 자리에 돌아가게 할 거라고 저는 믿는다"고 했다.
김 지도위원은 세종호텔 희망뚜벅이는 "날마다 자랑스러운 길이었다"며 "수많은 사람들이 발바닥이 짓무른 채 어떤 마음으로 1200리 길을 한 발 한 발 걸어왔는지 기억해 주시라"고 호소했다. 이어 "세종호텔 해고 노동자들이 복직하는 그날까지 웃으면서 끝까지 함께 투쟁"이라고 외쳤다.
마지막 발언에 나선 고진수 지부장은 "서로가 서로의 희망이 된 한 달이었다"며 산재 유족과 함께 걷고 노조를 만든 현대중공업 이주노동자들에게 연대한 기억을 꺼냈다. 이어 "함께해 주셔서 너무 고맙고 앞으로 싸워 나갈 일이 너무 많다. 그 길에 우리도 함께하겠다. 함께 싸우고 함께 승리하자"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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