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과 함께 했던 사람들, 선생을 기억하는 더 많은 사람들은 농어촌기본소득 시범사업이 실시되자마자 선생을 떠올렸습니다. 당연한 일이겠지요. 현대 산업 문명을 비판하고 '순환적 삶의 회복'으로 가는 하나의 길을 '소농 사회'에서 찾으려 했던 선생은, 이를 위해 당장 필요한 조치의 하나로 농민 기본소득을 말했습니다. 이는 2012년 녹색당의 총선 공약으로 제출되어 새로운 농민 정책의 하나가 되었습니다. 2019년에는 일부 기초자치단체가 이와 유사한 농민수당을 도입했고, 2021년에는 경기도가 농민기본소득을 시작했습니다. 이와 함께 농민 기본소득을 모든 농민에게 좀 더 충분히 지급해야 한다는 요구를 내건 농민기본소득전국운동본부 같은 단체도 생겨났습니다. 이렇게 자기 길을 가는 냇물이 선생에게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알기에 선생이 지금의 모습을 함께 볼 수 있었다면, 하는 마음이 드는 것은 인간의 정리인 것 같습니다.
사실 농민 기본소득을 둘러싸고 보편적 기본소득 지지자들 사이에서 작지 않은 논쟁이 있었습니다. 여기서는 논쟁으로 두 가지 결과가 나왔다는 점만 말해두겠습니다. 하나는 이론적으로 다른 소득 보장 정책과 비교해서 기본소득의 고유성이 무엇보다 무조건성에 있다는 점을 강조하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다른 하나는 기본소득이라는 아이디어가 현실에서 다양한 부문과 집단의 요구로 구체화될 수 있으며, 그 요구의 성격은 목표로 하는 것을 달성할 수 있는가에 따라 판단될 문제라는 것입니다.
어느 쪽이든 기본소득이 아이디어에 머무는 게 아니라 현실의 개혁 과제로, 정책으로 구체화될 수 있으며, 되어야 한다는 태도를 반영하고 있었습니다. 그건 우리 시대가 기본소득과 같은 담대한 정책을 요구하고 있으며, 그 정책은 위기에 대응하면서 새로운 삶을 꾸려나갈 수 있도록 사람들의 역량을 강화하는 방향을 가져야 한다는 점을 드러냅니다.
이런 위기의 심대함에 대해 선생은 이미 오래 전에 <녹색평론>을 창간하면서 "지금까지의 정치적 투쟁보다도 훨씬 더 근원적인 투쟁 - 생명과 인간성을 수호하기 위한 투쟁의 필요성"을 말한 바 있습니다. 그리고 그 뿌리를 "근원적 공포"라고 이야기합니다. 그것은 "인간이 '하늘'을 더럽히는 불경을 저지르고 있다는 느낌"으로서의 근원적 공포이고, 현재와 같은 유례없는 위기 속에서 우리가 사태를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는 우리의 무능력이 드러나는 공포입니다. 선생은 여기서 농민 기본소득이 '하늘'과 우리의 삶을 돌보는 우리의 힘을 키울 수 있는 방책으로 보았을 것입니다.
선생이 주장한 농민 기본소득이 작지만 하나의 흐름을 만들어가는 때, 안타깝게도 위기는 더 커지고 있었습니다. 이는 이른바 '지역 소멸 위기'라는 모습으로 나타났습니다. 존재 자체가 소멸한다는 것은 근원적 공포 속에서도 가장 밑바탕에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여기서 농민 기본소득이라는 냇물은 살짝 방향을 틀었고, 다른 데서 넘쳐 흐르는 물과 합쳐져 농어촌기본소득으로 분출합니다. 물론 '분출'이라고 말하는 것은 과장일 것입니다. 이제 시범 사업을 시작했을 뿐이며, 따라서 그 수준도 낮고 규모도 작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분출보다는 갯벌 몇 군데에서 숨구멍이 열렸다고 하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따라서 몇 개의 숫자와 장면으로 농어촌기본소득 시범 사업의 성과를 자랑하는 것은 선생의 '배짱'에 맞지 않을 것입니다. 도리어 두려운 마음으로 작은 숨구멍이 막히지 않을까 걱정하고, 이 물길이 어디로 흘러야 하는가를 머리가 아플 정도로 고민하는 게 세상과 삶에 대한 선생의 태도와 더 어울릴 것입니다. 불현듯 선생이 우리 곁을 떠난 때처럼 말입니다.
이 숨구멍을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당면한 과제를 풀고자 할 때 선생의 말과 글 그리고 선생의 손길이 남아 있는 <녹색평론>에서 제시했던 여러 주제가 떠오르는 것은 우연이 아닐 것입니다. 앞서 말한 새로운 생태 문명의 기본적인 형태로서의 소농 사회는 말할 것도 없고, 지역 순환 경제, 협동조합을 포함한 사회연대경제, 지역화폐 등등. 물론 이런 말을 하는 것은 그저 선생을 상찬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혹은 간단하게 선생과 우리가 이어져 있다고 말하기 위함도 아닙니다. 그건 말할 필요도 없는 일입니다. 우리가 묻고 답해야 하는 것은, 어느 작가의 "과거가 현재를 돕고 있다고, 죽은 자들이 산 자를 구하고 있다"는 깨달음의 출발점이었던 원래 질문 "산 자가 죽은 자를 구할 수 있는가?"입니다.
우리는 정의가 실현된다고 해서 죽은 자, 다르게 말하면 "역사의 패배자들"이 살아서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살려야 하는 것은 그 패배자들의 꿈, 세상과 사람과 자신을 돌보는, 말 그대로 소박한 삶을 누리고자 했던 그 열망일 것입니다. 그럴 때 그 패배자들은 더 이상 패배자들이 아닐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현재는 언제나 오래된 미래일 수 있으며, 선생이 제시한 주제와 과제도 언제나 지나간 미래입니다.
죽은 자를, 패배자들을 살린다는 것은, 그들의 희생 위에서 이룩된 이른바 문명과 진보 혹은 성장에 반대한다는 것이고, 이를 승리로 치장하는 말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한 사람 한 사람, 하나하나의 사물이 다 고유하고 존엄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기본소득이라는 게, 몇몇 난점과 허점에도 불구하고, 추구할 만한 의미가 있다면 바로 그런 점에 근거하고, 또 그것을 지향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선생이 우리를 여전히 돕고 있다면, 우리가 선생을 그리워하는 것은 선생의 고유함과 존엄함 때문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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