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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땅에서 나는 건 ‘농산물’이 아니라 ‘지역의 경쟁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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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땅에서 나는 건 ‘농산물’이 아니라 ‘지역의 경쟁력’이다.

“열심히 해도 남는 게 없다”는 말, 이제는 바꿔야 한다

새벽에 트럭이 먼저 깨어나는 마을이 있다. 겨울이면 손이 얼어도 비닐하우스 문을 열고, 여름이면 땀에 젖은 채로 밭고랑을 넘는다. 농사는 말로 하는 일이 아니라 몸으로 하는 일이다. 그런데도 농촌에서 가장 자주 듣는 말은 이렇다. “열심히 해도 남는 게 없어.”

▲ 홍 성 구(전 경북도청 자치행정국장)

이 말이 제일 가슴 아프다. 성실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게으르거나 대충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누구보다 열심히 하는데도, 왜 통장에는 남는 게 없을까?

문제의 뿌리는 생각보다 분명하다. 농민이 가격을 정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농사만 잘 지으면 된다고 배워왔다. 품질을 높이고, 수확량을 늘리고, 병충해를 막으면 된다고 말이다. 하지만 현실은 다르다. 생산을 아무리 잘해도 값이 다른 곳에서 정해지면, 농업은 산업이 아니라 버티는 생활로 남는다. 농촌이 힘든 이유는 농민이 약해서가 아니라, 가격 결정권이 약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농업을 다시 봐야 한다. 농업은 정책 대상이 아니라 지역의 산업이다. 산업은 반드시 돈이 도는 구조가 있어야 한다. 농가가 제값을 받아야 아이 학비도, 집수리도, 다음 농사도 가능하다. 결국 목표는 하나다. 값이 오르는 농업이다. 이걸 만들려면 농가 혼자 힘으로는 어렵다. 행정과 지역이 함께 판을 바꿔야 한다.

우선 같이 팔아야 한다. 농민 한 분이 혼자 내놓는 농산물은 시장에서 힘이 약하다. 크기도, 포장도, 등급도 제각각이면 값은 더 내려간다. 그래서 공동 선별이 필요하다. 같은 기준으로 선별하고, 같은 이름으로 묶어 한 상자가 아니라 한 상품으로 만들어야 한다. 이름이 생기면 신뢰가 생기고, 신뢰가 생기면 가격이 올라간다. 농업의 첫 승부는 밭이 아니라 포장과 브랜드에서 난다.

두 번째는 그대로 팔지 말고, 한 번 더 손을 거쳐 팔아야 한다. 생물로만 팔면 그날그날 시장값에 흔들린다. 하지만 저온 저장시설이 있고, 작은 가공과 포장 시스템이 있으면 출하 시기를 조절할 수 있다. 사과도 사과로만 팔지 않고, 건조하거나 즙, 잼, 소포장으로 바꾸면 값이 달라진다. 농산물이 상품이 되는 순간, 소득이 바뀐다. 농업의 경쟁력은 생산량이 아니라 부가가치다.

세 번째는 안정적으로 납품할 길을 만들어야 한다. 시장은 늘 출렁인다. 그래서 학교 급식, 군부대, 공공기관 급식 같은 안정 판로가 중요하다. 아이들 식탁에 지역 농산물이 올라가면, 농가에는 숨통이 트이고 지역 돈이 지역 안에서 돈다. 이것은 복지가 아니라 지역경제다. ‘내가 키운 농산물이 우리 아이들 밥상으로 간다.’라는 자부심은, 돈 이상의 힘이 된다.

네 번째는 직접 파는 길을 열어야 한다. 온라인 판매, 꾸러미 정기배송, 도시 직거래는 이제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중간이 줄어들면 농가 소득이 늘고, 소비자는 누가 키웠는지 아는 신뢰를 산다. 문제는 농가가 혼자 다 하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촬영, 포장, 배송, 고객 응대까지 농사만으로도 벅찬데 또 해내라는 건 무리다. 그래서 지역이 함께 해야 한다. 공동 물류, 공동 온라인몰, 전문 인력 지원이 붙으면 농가는 농사에 집중하고 판매는 체계화된다.

이 네 가지는 따로가 아니다. 선별이 되면 브랜드가 서고, 브랜드가 서면 온라인이 되고, 저장과 가공이 붙으면 판로가 넓어진다. 이것이 값이 오르는 구조다. 농업을 그저 지원금으로만 바라보면 늘 그때뿐이다. 농업을 산업으로 보면, 길이 보인다. 행정은 그 길을 열어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 농업은 감으로 살릴 수 없다. 정책과 예산으로 구조를 바꿔야 한다.

농민이 바라는 건 거창하지 않다. “올해는 좀 남았다.”라는 말, “자식 학비 걱정이 덜했다.”라는 말, “농사지어도 사람답게 살겠다.”라는 말이다. 그 말을 다시 듣고 싶다. 수확 철이 빚 갚는 계절이 아니라, 희망을 쌓는 계절이 되는 지역. 그런 농업을 만들 수 있다. 내 고향 봉화도, 농업이 생계가 아니라 산업이 되는 길로 꼭 만들어 나가고 싶다. 값이 오르는 농업, 충분히 해낼 수 있다.

최홍식

대구경북취재본부 최홍식 기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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