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이 24일 국회에서 12조2000억 원 규모의 추가경정(추경)예산안 시정연설을 했다. 대통령 권한대행의 국회 시정연설은 1979년 최규하 전 대통령 이후 46년 만에 처음이다. 더불어민주당은 대통령선거 출마를 저울질하는 한 대행의 사전 정지 작업으로 간주하고 있다.
민주당 의원들의 팻말 시위 속에 국회 본회의장에 입장한 한 대행은 이날 연설에서 "전례 없는 미국발 관세정책에 따른 불확실성으로 글로벌 경제환경이 한 치 앞도 예상할 수 없을 정도로 급변하고 있다"면서 "미국의 철강, 알루미늄, 자동차 등에 대한 품목별 관세 조치와 기본관세 도입, 그리고 상호관세 예고 등으로 우리 산업과 기업에 상당한 부담이 초래될 것으로 예상된다"고 했다.
그러면서 "가능한 한 신속하게 협상에 돌입하고 충분한 협의 시간을 확보해 유예기간 내에 국익을 극대화해야 한다"고 했다. 또 "민간과 정부가 가진 역량을 총결집해 다양한 채널을 통해 미국측과 긴밀히 소통하며 협의에 대비해왔다"고 자평했다.
그는 특히 이날 밤 최상목 부총리 겸 기재부 장관과 안덕근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이 미국 측과 갖는 '한미 2+2 통상 협의'에 대해 "무역균형, 조선, LNG 3대 분야를 중심으로 양국이 상호 윈-윈 할 수 있는 합의점을 모색하기 위해 총력을 다할 것"이라고 했다.
이어 한 대행은 국회에 제출한 추경안을 재해・재난 대응, 통상 및 AI 지원, 민생 안정 분야로 구분해 "우리 경제의 회복과 도약에 소중한 마중물"이라고 설명하며 조속한 심의·의결을 요청했다.
3조 2000억 원을 반영한 산불과 여객기 참사 등 재해·재난 대응 분야에 대해 한 대행은 재해 대책비 보강, 이재민 일상회복 사업 추진, 지자체 재정 보강, 재난 대응 인프라 강화 등을 강조했다.
미국발 통상 위기 대응에도 4조 4000억 원을 편성했다. 한 대행은 "미국의 관세 조치 등으로 인한 수출 기업의 유동성 경색을 방지하기 위해 정책 금융기관에 1조 5000억 원의 재정을 추가로 투입해 대출, 보증, 보험 등 특별자금 25조 원이 필요한 곳에 공급되도록 하겠다"고 했다.
한 대행은 또 "AI와 반도체를 비롯한 첨단산업은 국가의 미래 성장과 경쟁력을 결정짓는 핵심 요소인 만큼, 우리나라도 글로벌 패권 경쟁에서 앞서나갈 수 있도록 국가 차원의 과감하고 신속한 대응이 필요하다"고 했다.
AI 분야 성장 동력 강화를 위해 석박사급 인재 양성, 유망 중소·벤처기업 등에 투자하는 AI 혁신펀드 확대 등을 강조하며 "AI 분야 추경 예산은 총 1조 8000억 원 규모로 기존 본예산까지 합치면 올해 정부 AI 예산은 총 3조 6000억 원"이라고 했다.
이어 민생안정 분야에 반영한 4조 3000억 원 규모의 추경안에 대해 한 대행은 "절박한 상황에 처한 소상공인과 자영업자의 경영 부담완화를 위해 정부의 과감한 지원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는 "연매출 3억 원 이하 소상공인이 공과금, 보험료에 활용할 수 있는 최대 50만 원 한도의 '부담경감 크레딧'을 만들어 새롭게 지원하겠다"고 했다.
아울러 "융자·보증 등 정책자금 2조 5000억 원을 확충하고, 중신용 소상공인을 대상으로 6개월 무이자 할부가 가능한 1000만 원 한도의 신용카드를 발급하겠다"고 했다.
이와 함께 "연매출 30억 원 이하 점포에서 사용한 카드 소비 증가분의 20%를 온누리 상품권으로 환급해 추가 소비가 전통시장, 영세 자영업자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도록 조치하겠다"고 했다.
한 대행은 추경 예산 재원을 "세계잉여금 및 기금 자체 자금 등 가용재원 4조 1000억 원과 8조 1000억 원 규모의 국채 발행을 통해 마련할 계획"이라고 했다.

우원식 "파면당한 대통령 보좌한 총리로서 책임 느껴야…할 일, 하지 말 일 구분하라" 일침
이날 한 대행의 시정연설 직후 우원식 국회의장이 한 대행 면전에서 그에 대한 비판성 당부를 쏟아내 국민의힘 의원들이 이에 항의하는 등 아수라장이 펼쳐지기도 했다.
우 의장은 연설을 마친 한 대행에게 "잠깐 자리에 앉아 계시라"고 불러 앉힌 뒤 "국회 예산정책처를 (통해) 살펴보니 정부가 공언한 것과는 달리 올해 본예산 조기집행 실적이 상당히 부진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날 한 대행이 연설 중 "민생경기 회복을 위해 정부가 소상공인과 취약계층을 위해 마련한 예산이 하루빨리 수혜자에게 닿을 수 있도록 역대 최고 수준의 상반기 신속집행 목표를 세워 추진했다. 그 결과 상반기 목표의 60% 수준인 약 233조 원을 1분기에 집행할 수 있었다"고 한 데 대한 반박인 셈이다.
특히 '1분기 예산 조기집행 실적'은 윤석열 전 대통령이 탄핵소추돼 직무정지된(작년 12월 14일) 이후 순수하게 한 대행과 최상목 경제부총리 등의 '대행 정부'에서만 이뤄진 실적이어서 연설의 이 부분은 눈길을 모았다.
우 의장은 더 나아가 "국회의장으로서 권한대행께 한 말씀 드리지 않을 수 없다"며 "헌법재판소 판결에서도 이미 확인되었듯, 대통령과 권한대행의 권한이 동일하다는 것은 헌법에 위배되는 발상이다. 권한대행께서는 대정부질문 국회 출석 답변과 상설특검 추천 의뢰 등 해야 할 일과 헌법재판관 지명 등 하지 말아야 할 일을 잘 구별하시기 바란다"고 했다.
우 의장은 "국가적으로 매우 엄중한 때이다. 12.3 비상계엄 여파가 여전하고, 직격을 맞은 민생을 비롯해 산적한 현안의 어려움과 혼란이 가중되고 있다"며 "파면당한 대통령을 보좌한 국무총리로서 책임을 크게 느껴도 부족한 때이다. 국민이 지켜보고 있다"고 뼈있는 말을 남겼다.
우 의장의 발언이 진행되는 동안 한 대행은 굳은 표정으로 이를 경청했고, 국민의힘 의원들은 고성에 이어 의장석 앞까지 몰려나와 우 의장에게 항의했다.
한편 이날 한 대행은 연설에서 대선 출마 등 자신의 거취 문제에 관해선 언급하지 않았다. 연설에 앞서 민주당 박찬대 원내대표는 당 정책조정회의에서 한 대행을 "내란수괴 대행"으로 규정하고 "대선 출마 망상을 버리고 시정연설에서 불출마를 선언하기를 바란다"고 촉구했다.
추경안에 대해서도 박 원내대표는 "내수 진작을 위한 대규모 추경이 필요하다고 연초부터 촉구했지만 뒤늦게 12조 원 '찔끔 추경'을 들고 와 생색을 내려 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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