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3학년 시절 단짝 친구의 집에서 우연히 한 기사를 읽었다. '부천서 권양 성고문 사건' 관련 내용이었다. 충격과 공포 그 자체였다. 영어 선생님께 들었던, '정의로운 사람들이 데모하면 성고문까지 당할 수 있는 곳이 우리나라'라는 무서운 자각에 휘청거리며 집으로 돌아왔다. 한편 학교에서는 어렴풋이 우리 교육의 모순을 자각하기 시작했다. 나는 중3 때 반 친구들의 투표로 학급 반장이 되었지만 담임교사는 전교 1등을 도맡아 하던 육성회장 딸과 비교하고 그 친구를 반장으로 대우했다. 담임교사의 차별이 부당하다는 걸 느꼈다. 사춘기가 되며 어떻게 살지, 왜 살아야 하는지 고민이 많아지기 시작하던 시기이기도 했다.
단짝 친구의 언니가 흥사단고등학생아카데미(이하 '흥고아')를 소개해 주었다. 흥사단은 1913년 도산 안창호 선생이 자주독립과 번영을 위해 창립한 민족운동 단체로, 1970~1980년대에는 흥사단학생아카데미를 중심으로 민주화운동의 중추적 역할을 했다. 흥사단학생아카테미는 군부독재 시절, 합법적인 공개단체로서 지역별, 대학별로 활발한 활동이 있었다.
흥고아는 흥사단학생아카데미의 고등학생 조직으로 불렸다. 1980년대 고등학생운동의 양대 산맥 중 하나가 흥고아였고 또다른 산맥은 KSCM(한국고등학생기독교운동총연맹)이었다. 이 두 조직이 '공개단체'로서 대중적 행사를 기획하고, 언론을 통해 고등학생들의 입장을 밝히는 등의 역할을 했다(당시 고등학생운동 진영의 조직을 흔히 공개단체와 비공개 단체로 분류했다. 비공개단체는 주로 사상학습을 통해 활동가를 양산하는 데 더 집중하는 흐름이 있었다).
흥사단은 교과서에서 등장하는 데다 일제강점기에도 활동했던 만큼 내 마음은 결연하고 비장했다. 비밀결사, 무장투쟁 조직에 가입하는 심정이었다. 그런데 흥사단이 있는 서울 대학로에는 활기찬 인파가 넘쳤고, 흥사단 지하 강당에도 깔깔깔 웃음이 흘러넘쳤다. '희락회'라는 이름으로 고등학생들이 둘러서서 악수하고, 노래하고, 율동을 했다. 흥사단에서는 회원을 '단우'라고 칭했고, 서로의 호칭을 '○○군'이라고 불렀다. 흥고아 25기였던 나는 여러 활동을 통해 빠르게 성장했다. 철학적 고민도 깊어지고, 실천의 폭도 넓어졌다. 흥사단 대전고등학생아카데미, 평택고등학생아카데미에서 활동하는 친구들과 직접 만나 흥고아 활동과 학내활동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전국적이고 체계적인 네트워크도 경험했다.
자연스럽게 근현대사를 통한 역사의식도 형성됐다. 고1이었을 때, 흥고아 24기 용산고 홍○○ 선배가 조심스럽게 "아카데미 사무실 안에 있는 서류 캐비닛 맨 위 칸에 인쇄물이 있으니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고 집에 가서 혼자 읽어보라"고 했다. 비밀스러운 지령을 내리는 분위기였다. 시꺼멓게 등사된 종이 뭉치를 가방에 넣고 집에 돌아와 방문을 잠그고 이불 속에서 손전등을 켜고 읽기 시작했다. 1980년 5월 광주의 실상을 알린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를 윤전식으로 등사한 인쇄물이었다. 당시 <넘어, 넘어>라는 약칭으로 불리던 금서였다. 책을 읽는 동안 전율이란 게 뭔지 온몸으로 실감했다.
그때 부엌에서 엄마가 나를 불렀다. "경화야, 가게 가서 콩나물 좀 사와라." 깜짝 놀라 후다닥 손전등을 끄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엄마에게 돈을 받아 심부름을 하러 밤 골목으로 나섰다. 50미터 거리도 채 안 되는 구멍가게를 오가는 동안 식은땀을 줄줄 흘렸다. 집마다 대문 옆에 튀어나온, 시멘트로 만든 쓰레기통이 마치 공수부대원들이 총검을 들고 웅크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고 하늘의 달이 쫓아오는 것조차 두려웠다. 그날, 그 밤, 그 골목이 나에게는 1980년 광주였다. 5.18 광주를 알고부터 소위 '의식화' 과정이 더욱 활성화되었다. 성균관대학교에서 열린 시국집회에 참석해 교육민주화 요구가 적힌 손수건을 팔며 모금도 했다. 그때 집회 사회자가 자유발언대 순서라며 누구든 나와서 의견을 말하라고 했다. 나는 앞으로 나가 마이크를 잡았다.
"저는 고등학생입니다. 제가 세상에서 제일 존경하는 사람은 우리 아빠입니다. 아빠는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정직하고 성실한 분입니다. 아빠는 1년 365일 하루도 쉬지 못하고 일을 합니다. 그런데 왜 우리 집은 이렇게 항상 가난한 것일까요? 우리 아빠 같은 노동자들이 정당한 노동의 대가를 받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나라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 자리에 모인 대학생 언니, 오빠들에게 큰 박수를 받았고, 그 덕분에 손수건도 많이 팔 수 있었다. 내가 입학한 동명여고는 동아리 활동이 활발했다. 나는 도서반에 가입했는데 우리 학교의 도서관 서고는 고등학교치고는 수준이 있는 편이었다. 도서반원들은 책 관리, 대출카드 관리, 신규도서 구입, 정기적인 독서토론회, <가문비>라는 회보 발행을 했다. 이문열의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최인훈의 <광장> 등을 읽고 토론회를 진행했고, 학교 축제 기간에는 인근의 대성고등학교, 경복고등학교 도서반과 연합토론회도 개최했다. 2학년 때 나는 도서반 반장이 되었고, 교내 활동은 물론 다른 학교 독서동아리와의 연합 활동에 앞장섰다. 독서와 토론회, 학교 외부 활동으로 사고의 폭이 넓어졌다.
도서반, 교지편집반은 내가 선택한 공식적인 실천의 장이었다. 내가 흥고아에서 지도선배들과 학습하며 배운 민주적 의식을 실천하기 위해 목적의식적으로 비밀리에 만든 '동지단'이라는 학내 소모임의 활동이 그 밑바탕에 있었다. 학생회 직선제를 쟁취하는 사전 과정에서 학내 동아리연합회를 만들고, 동아리연합회장을 선출했다. 도서반과 교지편집반 구성원 가운데 뜻을 같이하는 후배들을 동지단에 가입시키기도 했다.
동명여고에서 '파라다이스'라고 불리던 교정의 잔디밭 안쪽 독채 건물에는 연극반 교실이 있었다. 1988년 5월 23일 햇빛이 거의 들지 않던 연극반 교실에서 나는 하얀 분필로 칠판 가득 '동지가'의 가사를 적었다.
"휘몰아치는 거센 바람에도 부딪쳐오는 거센 억압에도."
'동지'라는 이름으로 만난 친구들에게 흥고아에서 배운 '동지가'를 한 줄 한 줄 가르쳐주었다. 절도 있는 손동작과 함께. 그렇게 첫 모임을 가진 이유로 우리들의 소모임 이름은 '동지단'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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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교 후에 흥고아, KSCM, 터울림 등에서 활동하는 동지단원들도 생겼다. 다른 고등학교에도 소모임이 활발하게 만들어지던 때라 가까이 있는 명지고나 대신고 소모임과 긴밀한 교류도 가졌다. 뜻 맞는 친구들끼리 최루탄에 맞아 피 흘리는 이한열 열사 사진을 복사해서 학생들 책상 서랍에 넣고, 화장실에 "학생을 위한 학교인가, 학생부를 위한 학교인가!", "학생회 직선제 실시하라!" 등의 낙서를 하고, 대자보를 써 붙이고, 유인물을 만들어 배포했다. 심증은 가는데 물증이 없으니 우리들을 잡기 위해 일부 교사들은 '잠복근무'를 하기도 했다. 우리는 수위 아저씨 근무 시간 전에 학교에 가서 유인물을 뿌리고서는 화장실이나 도서실 등에 숨어 있곤 했는데, 한번은 학생들이 등교하기 전에 유인물이 발각되어 수위 아저씨와 일부 교사들이 학교 전체를 수색했다. 동지단 친구 하나가 화장실에 숨어 문을 잠갔는데 수위 아저씨가 밖에서 여러 번 문을 당기다가 그냥 돌아갔다. 심장이 쫄깃해진 순간이었다.
1989년 전교조 출범 후 총 1500여 명의 교사들이 해직되었다. 우리 학교에는 2명의 해직교사가 생겼고, 이를 규탄하는 종이비행기 시위 역시 동지단이 기획하고 주도했다. 동지단원들은 종이비행기에 "민족, 민주, 인간화 교육 만세", "선생님 사랑해요", "선생님을 우리 품으로", "전교조 합법화 쟁취!" 등을 적어 학교측 몰래 학생들에게 나눠줬고, 점심시간에 교실 창문에서 운동장을 향해 일제히 날렸다. 교정 가득 날던 색색의 종이비행기는 학생들의 마음을 동요시키기에 충분했다. 그중 종이비행기 한 대가 2층의 교장실 창문 안쪽으로 날아 들어갔다. 놀란 교장선생님이 그 종이비행기를 얼른 주워 창문 밖으로 내던졌고, 우리는 "교장선생님도 종이비행기 시위에 동참했다!"라며 떠들며 웃었다. 수위 아저씨들은 교정에 떨어진 종이비행기를 빗자루로 쓸어 담기 바빴다.
해직교사 두 분은 동지단원들과 사전에 협의한 대로 시간 맞춰 교문에 도착했다. 해직된 선생님들이 와 계시다는 얘기를 들은 학생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교문으로 쏟아져 나왔다. 수위 아저씨들은 해직교사들의 출근을 저지하며 교문을 닫았고, 자연스럽게 학생들의 대열이 형성되었다. 이 투쟁 계획은 동지단의 독자적 계획이었다. 해직교사들과는 '연대'의 관점에서 사전에 논의했고, 점심시간 맞춰서 교문으로 와달라고 부탁을 드렸다. 동지단은 시위 날짜와 시간, 방식, 역할 분담을 사전에 논의하고 준비했다.
교문을 사이에 두고 선생님과 학생들이 '아침이슬'을 함께 불렀다. 동지단원의 진행하에 열린 교문 집회에서 앞에 나온 학생들은 해직교사들에 대한 절절한 마음과 해직의 부당함을 성토했다. 1992년 '장산곶매'가 제작한 영화 <닫힌 교문을 열며>의 모티브 같은 장면들이 연출되었다. 그날의 종이비행기 시위 경험은 우리들에게, 선생님들에게 오래도록 기억되었다. 종이비행기 시위 이후 전교조 미가입 교사 중 가입을 고민하고, 갈등하고, 동요하는 분위기도 조성되었다. 한편 시위를 진행했던 친구들은 가정과 학교에서의 감시가 더 심해졌다. 나는 이외에도 청소년 무크지 <푸른나무> 발행을 기획하고, 서울지역고등학생연합에서 주최한 자살학우 추모제 등 다양한 활동을 계속해 나갔다.
그리고 고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진로 고민을 했다. 나의 선택은 투쟁하는 생산직 노동자의 삶이었다. 진로를 선택한 후 내 얼굴에는 '나는 행복합니다'라는 말이 적혀 있는 듯했다. 내 삶을 내가 결정하고 선택했다는 사실이 뿌듯하고 가슴 벅찼다. 다른 친구들이 모두 한 방향으로 몰려가는 대학시험을 나 스스로 거부했고, <꽃들에게 희망을>에 나오는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나비가 된 애벌레의 기분을 알 것 같았다. 주체적인 인간이 되었다는 자부심 덕분이었다. 이후 나는 계속 노동운동을 하며 살아오고 있다.
돌이켜 보면 청소년 시절의 기억과 학습, 경험이 지금의 나를 만든 8할이다. 인간과 노동의 존엄성, 관계의 소중함을 체득한 그 푸른 시절 덕분에 지금까지의 삶도 겁 없이 주체적으로 살아올 수 있었다. 그 시절은 나에게 거대한 행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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