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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요안나 캐스터의 죽음, '의자놀이' 부추기는 방송사가 만든 비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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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오요안나 캐스터의 죽음, '의자놀이' 부추기는 방송사가 만든 비극

[尹 퇴진 이후, 노동의 꿈] ⑥ 방송 비정규직 노동자

저는 방송을 만드는 사람들의 이름 '엔딩크레딧'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방송 미디어 현장의 프리랜서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노동 인권을 위해 활동하는 단체입니다. 엔딩크레딧이란 말은 방송 미디어 영화등에서 마지막에 그 콘텐츠를 만든 사람들의 역할과 이름을 적어놓은 것을 지칭하죠. 엔딩크레딧의 기원은 스타워즈로 유명한 조지루카스 감독의 <청춘 낙서>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충분한 제작비를 확보하지 못한 감독이 배우를 비롯한 모든 스태프들의 이름을 올려 고마움을 표시한데서 유래합니다. 방송 노동자들에게 일하면서 가장 보람을 느끼는 순간이 언제인지 물었을 때 '엔딩크레딧에 이름이 올라간 순간'이란 대답이 가장 많았습니다. 열악한 노동 환경으로 힘들어도 엔딩크레딧의 본인 이름을 보며 버틴다는 사람들과 항상 함께 하겠다는 마음으로 단체 이름을 '엔딩크레딧'으로 지었습니다.

2021년 5월 한 노동자가 MBC에 입사했습니다. 공채 합격 소식에 눈물 흘렸던 그녀는 친구들에게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 'MBC 기상캐스터가 되었을 때'라고 말했습니다. 바로 우리가 기억해야 할 오요안나 기상캐스터의 이야기입니다. 꿈을 이루어 행복했던 오요안나 씨는 MBC에서 3년 4개월을 일했고, 2024년 9월 15일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선배 기상캐스터의 인격 모독, 폭언, 공격적 언행, 비난 등으로 인해 수년 간 괴로워했고, '등 벌어질 듯 아픈 것도 명치 찢어질 것 같은 것도 지긋지긋해', '사는 게 너무 너무 피곤합니다'라는 말을 유서에 남겼습니다.

오요안나 씨의 죽음은 '비정규직 백화점'인 방송사가 수십년 간 비용 절감, 노동법 적용 회피 등을 위해 비정규직을 남용하고, 뿌리 깊은 신분상 위계와 서열, 차별과 불평등을 고착화하면서 벌어진 또 하나의 비극입니다. 방송사들은 공고한 신분제를 유지하기 위해 비정규직끼리 싸우게 하고, 권리를 주장하는 노동자들에게 '프리랜서이니 노동법의 보호를 받지 못한다', '고용의 책임이 없다'는 말로 사용자로서의 책임을 방기했습니다. 또한 고인의 유서와 유가족의 증언 등을 통해 고인의 1년 치 급여가 1600만 원에 불과했고 고인이 새벽방송을 위해 숙직실에서 3주를 지내야 했다는 사실은 방송 비정규직의 저임금, 열악한 노동 환경, 불안정한 고용의 문제가 여전히 전혀 해결되지 않았음을 재확인시켜줬습니다.

ubc울산방송 이산하 아나운서는 "오요안나씨 사건 이후 마음이 너무 힘들다"고 말했습니다. 2015년 일을 시작해 기상캐스터, 아나운서, 라디오 진행 등의 업무를 했고, 2021년 해고되었던 이산하 씨는 2022년 12월에 행정소송에서 승소한 후 복직했지만 계속되는 괴롭힘을 이기지 못하고 지금은 병가를 낸 상태입니다. "소송에서 이겨서 복직하니 편집 일을 시켰습니다. '위에서 이산하가 TV에 나오는 것을 싫어한다'고 했고요. 제가 진행하던 모든 프로그램을 없애버렸어요." 이산하 씨는 괴롭힘이 아주 심할 때 공황장애도 오고 숨도 안 쉬어졌다며 "사내에서 아무도 인사를 안 받아주고, 이산하와는 말을 절대 섞지 않겠다고 결심한 사람들 같았어요"라고 했습니다.

광주MBC 김동우 아나운서는 노동자성을 인정받기 위한 진정을 했다는 이유로 개인 책상을 없애고 공용 공간으로 쫓겨나야 했으며 업무가 많이 줄어 한 달에 100만 원도 안 되는 급여를 받고 일했습니다. 경남CBS는 최태경 아나운서가 프리랜서니 업무 지시를 직접 하지 않겠다며 전용 서류함을 만들어 문서를 전달하는 기이한 괴롭힘을 자행하기도 했습니다.

방송 현장의 괴롭힘 실태

많은 사람이 묻습니다. 수년 간 괴롭힘으로 심각한 고통에 시달렸는데 회사에 공식적으로 문제제기하기 어려운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왜 이토록 안타깝게 스러져가야 했는지를. 공채 정규직과 기간제, 파견, 도급, 프리랜서 고용 형태가 혼재되어 철저히 수직적인 위계가 형성된 조직 내에서 오요안나 씨의 '프리랜서 계약서'는 신고조차 할 수 없게 만드는 족쇄로 작용했을 것입니다.

2023년 8월 엔딩크레딧이 자체 조사한 방송 프리랜서 비정규직 괴롭힘 설문조사(456명 참여) 결과를 직장갑질 119의 직장인 1000명 조사와 비교해보았습니다. 방송 비정규직의 '폭행·폭언' 경험은 33.3%로 직장인 평균(17.2%)의 2배 가까이 되었습니다. '부당지시'도 43.3%로 직장인 평균(16.1%)의 2.7배, '따돌림·차별'도 39.8%로 직장인 평균(15.4%)에 비해 2.6배 높았습니다. 특히 '모욕·명예훼손'의 경우 54.9%로 응답자의 과반 이상이 겪었는데, 이는 계약 형식의 차이가 차별로 이어지는 방송사의 관행이 만연하고, 직장 내 괴롭힘 등 근로기준법을 곧바로 적용받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직장 내 괴롭힘을 하나라도 경험한 사람의 비율도 방송 프리랜서가 73.2%로 직장인 평균(33.3%)에 비해 월등히 높았습니다. 괴롭힘을 당했을 때 어떻게 대처했는지 묻는 질문에는 63.4%가 '참거나 모르는 척 했다', 56%가 '회사를 그만 두었다'로 직장 내 괴롭힘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못하는 경우가 다수인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또한 방송사와의 계약에서 '을은 본 계약과 관련해 어떠한 민형사상의 소송을 제기하지 않는다' 혹은 '을은 갑에 대해 고용관계를 주장할 수 없다'는 조항을 본 적이 있는지 물었을 때 60.9%가 본 적이 있다고 답했습니다.

▲ 2023년 방송 비정규직 괴롭힘 설문조사. ⓒ엔딩크레딧

방송 현장 프리랜서 대부분의 취업경로는 비공식적 네트워크입니다. 대부분 지인을 통해, 들리는 소문을 통해 알음알음 일자리를 찾아 일을 시작하다보니 평판이 중요하고, 그래서 부당한 일을 당해도 문제제기하기 어렵습니다. 공채로 뽑힌다 해도 평판을 무시할 수 없는 곳이 방송현장입니다. ubc울산방송, 광주MBC, 경남CBS 사례처럼 문제제기하는 사람들에게는 반드시 보복갑질과 괴롭힘이 따라오기 때문입니다.

또한 방송사가 사용자로서 채용 하지 않고 부서장이나 팀장에게 한시적으로 불안정하게 고용되어 있는 형태를 띠기도 합니다. 작가의 채용권은 PD에게 있고, 다른 직군들도 방송사가 아니라 팀장이나 부장이 계약서를 쓰는데, 그들이 자의적으로 채용하고 해고하는 관행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러니 방송사 본사 차원에서 계약서 체결 현황에 대한 파악을 하지도 못할 뿐 아니라 프리랜서와 관련된 괴롭힘이 발생해도 아무 권한과 책임이 없다는 듯이 행동할 수 있습니다. 오요안나 씨에게 족쇄가 되었던 프리랜서 계약서가 방송사들에게는 방패가 되고 있습니다.

최근 방송문화진흥회에 현안 보고를 하는 자리에서 MBC경영진은 '기상캐스터는 근로자가 아닌 프리랜서'라고 했습니다. 이번 진상조사위원회 조사는 근로기준법상 '직장 내 괴롭힘'에 대한 조사가 아니라 사실관계의 진상을 파악하는 조사'라고 선을 그은 것으로 드러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오요안나 씨가 누구의 지휘 감독을 받고 일했는지, 업무의 내용을 누가 정해주었는지를 따져 본다면 당연히 노동자입니다. 오요안나 씨는 일하는 시간과 장소가 정해져 있었고, MBC로부터 직무 교육을 받았으며, 국장이 방송 대본 검수를 했습니다. 대다수의 방송사에서 기상캐스터를 프리랜서로 쓰고 있지만 실제로는 노동자인 이유입니다.

불안정한 노동에서 비롯된 차별과 경쟁

"파견으로 2년을 일 하다가 프리랜서로 전환되었어요. 그 동안 하는 일은 바뀌지 않았고, 정규직 지시를 받으며 일을 했어요. 정규직, 파견직, 프리랜서들이 뒤엉켜서 구분없이 함께 일했어요."

"정규직과 같은 일을 했지만 급여 차이가 컸고, 연차가 따로 없으니 휴가가 모두 무급이었어요. 휴가를 쓰면 급여에서 깎여 나오는데, 그것도 기준이 없다 보니 실제 급여를 받았을 때 잘못 계산 될 때가 있었어요. 또한 급여 인상 기준이 없이 들쭉날쭉이에요. 급여 테이블이 없으니 내가 제대로 받고 있는 건지, 이게 맞는 건지, 남들은 어떤지 확인할 길이 없어요."

"우리는 개편 따라서 파리목숨입니다. 개편 때마다 교체되고 잘려 나가고, 늘 불안한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어요. 일한 지 13년이 되었는데도 불안함이 사라지지 않아요."

2024년 엔딩크레딧으로 연락해 온 방송 노동자들의 목소리입니다. 방송 현장에는 개편, 프로그램 폐지라는 말이면 언제든 잘릴 수 있습니다. 실제로 개편을 하지 않으면서 개편이라는 말로 계약해지를 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렇게 불안정한 노동을 하는 노동자들은 동료 간 뺏고 뺏기는 의자놀이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해집니다. 방송사에서 만든 불안정한 룰 안에서 노동자들이 서로 경쟁하고 차별하게 되고 그것이 회사 내 분위기로 고착화됩니다. 오요안나 사건의 피해자 가해자는 모두 프리랜서입니다. 이번 사건은 불안정한 노동이 권리 행사의 어려움을 초래하고, 자신과 타인을 돌아보기보다는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다른 사람의 권리를 빼앗게 되는 구조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더 이상의 죽음을 막기 위해 법제도 및 구조 개선이 필요하다

오요안나 씨의 죽음은 우리 사회에 큰 파장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그동안 방송 비정규직 문제에 눈감았던 언론, 정치권을 포함한 각계 각층에서 방송 현장의 비정상적이고 불법적인 고용관계를 질타하고, 프리랜서라는 이유로 법제도의 사각지대에서 권리를 보장받지 못하는 문제에 대해 다양한 해법이 제시되고 있습니다. 국민의힘 최형두 의원은 근로기준법 76조 직장내 괴롭힘 관련한 조항에 특례 규정을 만들어 프리랜서도 직장내 괴롭힘 규정을 적용받도록 하자는 법 개정안을 내놓았습니다. 더불어민주당 박홍배 의원은 노무제공자에 대한 근로자 추정 원칙을 도입하고, 근로자성 판단에 대한 입증 책임을 사용자가 지도록 하는 근로기준법 개정안을 발의했습니다. 다양한 의견이 개진되고 있는 만큼 머리를 맞대어 부디 제2, 3의 오요안나 사건이 나오지 않기 위한 법제도적 대안을 찾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또한 법 제도가 제대로 작동되기 위해서는 구조 개선이 필요합니다. 무엇보다 방송사들이 위장 프리랜서 고용 관행을 끊어내고 상시적이고 필수적인 업무를 하는 노동자들을 프리랜서가 아닌 정규직으로 직접 고용해야 합니다. 최근 수년간 노동자성 인정 사례가 점점 더 많아지고 있는데, 그만큼 방송사의 고용형태가 불법‧편법적이고 비정상적인 구조에 기대어 있음을 말해줍니다.

윤석열이 장악한 방송통신위원회가 '지상파 재허가 심사시 비정규직 고용 실태를 파악하고 이를 심사 기준에 넣겠다'는 지침을 폐기했다는 점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방송사들이 불법 프리랜서 고용을 남발하면서 사용자로서 책임을 회피하고 있는데, 관리 감독해야 할 방통위가 면제부를 준 것이나 다름 없기 때문입니다. 지상파 재허가 심사에 비정규직 관련 내용을 심사 기준에 넣은 것은 CJB청주방송 이재학 PD 사망 이후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죽어나가도 꿈쩍 않던 방송사들을 현행 방송제도 속에서 최소한으로 규제하려던 움직임이었습니다. 방송통신위원회는 지금이라도 다시 재허가 심사조건에 비정규직 처우 개선 방안을 넣고 심사를 강화해야 합니다.

엔딩크레딧은 더 이상의 비극을 막기 위해, 모두가 안전하고 행복한 방송 현장을 만들기 위해 싸우고 있습니다. 광장의 민주주의가 열린 지금, 우리의 힘과 함성이 일터 민주주의로 연결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불법 프리랜서 고용으로 고통받는 방송 노동자들에게 민주주의의 봄이 오기를 간절히 바라며, 오요안나 기상캐스터의 죽음이 우리에게 남긴 뜻을 생각해봅니다. 윤석열이 퇴진한 자리에서 우리는 노동자가 일하다 다치지 않고, 아프지 않고, 죽지 않는 세상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것이 오요안나 씨에게 빚진 우리의 과제입니다.

▲ MBC 기상개스터 故 오요안나 씨의 생전 모습. 인스타그램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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