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해 프로축구 전북 현대의 홈구장인 전주월드컵경기장에 갔다. 당시 전북 현대는 성적 부진으로 1부리그에서 2부리그로 강등될 위기 상황이었다.
2017년부터 2021년까지 K리그 5연패를 기록했던 프로축구 명문 구단 전북 현대의 추락이었다. 전주월드컵경기장에 새겨져 있는 'We make history(우리는 역사를 만든다)'라는 문구는 이제 'We made history(우리는 역사를 만들었다)'라는 과거형이 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스쳤다.
하지만 '녹색 전사'라는 별칭을 갖고 있는 전북 현대 축구의 강렬한 이미지는 녹색의 경기장 좌석 컬러 속에서 여전히 살아 숨쉬고 있었다. 전북 현대가 최고 전성기를 누릴 때 잘 보지 못했던 팀 컬러의 힘이 느껴졌다. 어쩌면 전북 현대의 중요한 정체성은 '녹색'에서 만들어 졌구나 하는 생각이 새삼 들었다.
특정 도시나 지역에 기반을 두고 있는 프로 스포츠 구단의 정체성은 기본적으로 지역 정체성에서 출발한다. 그 지역 정체성을 시각적으로 가장 잘 보여줄 수 있는 건 팀 컬러다. 그래서 2025 시즌에는 녹색 그라운드뿐만 아니라 녹색의 좌석에서 전북 현대 팬들의 축구 축제가 펼쳐졌으면 하는 상상을 하면서 경기장을 빠져 나왔다.
파란색과 빨간색의 조합, 울산HD가 바르셀로나인가?
요즘 뉴스를 보다 보면 경악할 일이 워낙 많지만 우연히 스포츠 뉴스를 보다 또 한번 깜짝 놀랐다. 전북 현대의 뒤를 잇는 현재 한국 프로축구 최고의 구단인 울산HD와 관련된 뉴스였다.
울산HD를 상징하는 컬러는 파란색이다. 홈 경기에 나서는 울산 HD의 유니폼 컬러도 당연히 파란색이다. 하지만 울산시설공단이 울산HD의 홈구장 울산 문수구장의 3층 관중석 일부를 빨간색으로 교체하기로 해 울산 팬들의 원성을 사고 있다는 게 뉴스의 핵심이었다.
울산HD 팬들은 빨간색 컬러가 김두겸 울산시장이 소속된 정당 국민의힘을 떠올리게 한다며 좌석 교체작업 반대서명 운동을 했지만 울산시설공단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울산HD 팬들처럼 나도 왜 굳이 파란색이 팀 컬러인 구단의 홈구장 좌석 일부를 빨간색으로 바꿔야 하는지 납득이 잘 되지 않았다. 울산시는 부인했지만 빨간색 좌석 설치가 정말 '정치색과 관련된 게 아닐까'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울산시설공단이 추진하고 있는 좌석 교체 작업이 완료되면 경기장 1~2층 좌석 색깔은 파란색이지만 3층 좌석은 빨간색이 된다. 경기장 좌석 색깔만 놓고 보면 이는 마치 FC 바르셀로나가 홈구장으로 사용하고 있는 캄프 누 스타디움을 연상시킨다. FC 바르셀로나의 팀 컬러는 빨간색과 파란색의 조합이다. 그래서 경기장 좌석 색깔도 이 조합을 활용했다.
'비업무용 부동산' 경기장과 '건물주' 지자체의 위력
울산시는 팀의 정체성 확립에 컬러가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 깊은 이해가 없어 보인다. 이보다 더 중요한 건 이 사건이 모든 국내 프로 스포츠 팀의 경기장을 소유하고 있는 '건물주' 지방자치단체(지자체)의 문제점이자 한국 프로 스포츠의 슬픈 현실이라는 점이다.
한국 프로 스포츠 구단의 홈 경기장 소유권이 모두 지자체인 이유는 명확하다. 세법상 구단이 보유한 경기장이 비업무용 부동산으로 분류되기 때문이다. 민간 기업이 비업무용 부동산을 보유하거나 양도하려면 지방세법과 법인세법에 따라 높은 세율을 부담해야 한다. 그래서 한국에서는 민간 기업이 경기장을 소유하기가 사실상 불가능하다.
이런 이유로 지난 1990년 포스코가 105억 원을 들여서 지은 포항 스틸러스의 홈구장 포항스틸야드의 소유주도 포항시다. 높은 세금 때문에 포스코는 한국 최초의 축구 전용 경기장을 건설해 놓고도 이를 포항시에 기부채납 할 수밖에 없었다.
비업무용 부동산은 민간 기업의 부동산 투기를 억제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하지만 한 시즌 동안 스포츠 서비스로 영업을 하고 비시즌에 시설 대여 등 부대 수익을 창출하는 경기장이 비업무용 부동산으로 분류돼 있는 것은 이해하기 힘들다.
스포츠 경기 개최를 통해 경영을 하고 있는 프로 스포츠 구단이 비업무용 부동산으로 분류된 경기장을 사용한다는 건 한국 프로 스포츠가 냉정하게 말해 비즈니스가 아니라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경기장을 소유한 지자체는 오랫동안 프로 스포츠 구단에는 '갑 중의 갑'이었다. 최근에는 프로 스포츠 구단의 모기업이 경기장 건설 비용을 충당하며 경기장 관리와 운영권을 갖게 된 경우가 생겨났지만 대부분의 프로 스포츠 구단은 한 마디로 경기장을 지차제로부터 빌려 쓰는 세입자에 불과했다.
'세입자' 구단들은 수익 증대를 위해 경기장 좌석 배치를 바꾸려는 것도 지자체의 눈치를 많이 봐야했으며 경기장 광고 수익 분배에 있어서도 불리한 상황에 놓여 있었다.
2023년 9월 잠실에 돔 구장을 포함한 스포츠 마이스(MICE) 복합단지를 조성하겠다는 서울시의 발표도 건물주 지자체가 프로 스포츠 구단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여실히 보여줬다.
당시 잠실야구장을 돔 구장으로 개조하겠다는 서울시의 계획에는 기존에 잠실야구장을 사용하는 세입자 LG와 두산 구단에 대한 배려가 포함돼 있지 않았다. 공사 기간인 2026년부터 2031년까지 6시즌 동안 LG와 두산이 사용할 수 있는 임시 홈구장에 대한 대책이 전무했기 때문이다.
여러 차례 논의 끝에 돔 구장으로 잠실야구장이 변신하는 동안 두 구단이 잠실주경기장을 임시 홈구장으로 활용한다는 결론을 얻었다. 하지만 서울시가 계획을 발표하면서 가장 먼저 논의 했어야 할 프로야구단과의 대화가 빠져 있었다는 점은 아쉬움을 남겼다. 돔 구장의 세입자가 되어야 할 두 구단은 건물주인 서울시의 입장에서 사실상 대체 불가의 세입자라는 점을 고려하면 더욱 그렇다.
'대전'이 빠진 한화 새 야구장 명칭을 용납할 수 없다
경기장 소유주 지자체의 위력은 17일에도 유감없이 나타났다. 한화 이글스의 홈구장 명칭과 관련해서다. 지난 2023년 한화 그룹은 대전시에 486억 원을 지불하고 신축 구장 사용권, 경기장 명칭 사용권(네이밍라이츠)과 광고권을 보유하게 됐다. 그래서 생겨난 구장 명칭이 '한화생명 볼파크'였다.
하지만 대전시는 신축 구장 명칭에 불편한 기색을 드러냈다. 구장 명칭에 '대전'이 빠져 있다는 이유였다. 대전시는 '한화로부터 486억 원을 받고 내 준건 경기장 사용권이지 결정권을 준 건 아니다'라는 입장을 내놓았다.
여기에 신축 구장 건설을 위해 대전시가 1438억 원을 내놓았고 경기장 소유권도 대전시가 가지고 있다는 점도 부각시켰다.
결국 한화는 17일 구장 명칭을 '대전 한화생명 볼파크'로 바꿨다. 한화 이글스는 이미 경기장 명칭 사용권을 가지고 있지만 지역 팬들의 성원에 보답하기 위해 이 같은 결정을 내렸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이 같은 한화의 결정은 '대전'이 빠진 경기장 명칭에 대한 대전시의 반발에서 비롯됐다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앞서 살펴본 울산시나 대전시의 지역 프로 스포츠 구단에 대한 일방적이고 고압적인 태도는 더 이상 경기장 소유주인 지자체의 고유권한으로 인식되면 곤란하다.
인구 감소는 물론 산업 활력도가 저하되는 한국 지역 사회에서는 각 지역 만의 '소프트 파워'를 갖추기 위해 적지 않은 노력을 하고 있다. 그 중 하나가 프로 스포츠다. 더욱이 지역 프로 스포츠 구단은 쉽게 대체할 수 없는 '특수 세입자'라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지자체와 프로 스포츠 구단의 상생이 필요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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