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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슈미트 자유주의에 사망 선고를 내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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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슈미트 자유주의에 사망 선고를 내리다

[인문견문록] <정치신학>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가 유죄판결을 받았다. 박근혜 탄핵에 이어 문재인·윤석열 정부의 등장은 한편의 영화를 보는 것 같이 어지럽다. 박근혜 탄핵에 앞장섰던 윤석열 검사가 이번에는 탄핵의 대상이 되었다. 다른 나라의 정치도 비슷하다는 게 유일한 위안이다. 자유민주주의를 채택한 많은 국가에서 그 제도가 제대로 기능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진지하게 생각해보자. 이제는 자유민주주의가 인간 공동체에게 적합한 제도인지에 대해서 질문을 던져야 할 시점인 것 같다. 우리와 비슷한 질문을 백년전에 던진 정치철학자가 있다. 나치의 정치철학자로 불린 칼 슈미트다. 그의 책 <정치신학>(칼 슈미트 지음, 김항 옮김, 그린비 펴냄)을 읽어본다.

슈미트는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를 살았다. 1차 대전에서 패배한 독일에서 황제를 대신해 사민당 정부가 들어섰지만 극심한 사회적 혼란은 잦아들지 않았다. 혼란의 종식과 사회의 안정화를 목표로 총력을 기울였어야 함에도 정부는 능력도 의지도 없었다. 특히 의지조차 없다고 적어도 슈미트에게는 보였다. 왜 의지가 없었을까? 당대의 정치 행위자들에게 '자유주의'가 금과옥조의 소신이었기 때문이다. 자유주의는 세상의 변화, 인민의 삶의 실질적 향상보다는 자신들의 정치행위의 절차적 합법성에만 주목했다. 합법적이면 정당했고 정당했으니 옳은 것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당대를 목격한 슈미트의 판단으로는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는 분리되어야 했다. 문제는 ‘자유주의’다.

문제는 자유주의의 무능함이었지만 무엇에 대한 무능함이었냐는 것이다. 1차대전의 패배 후 독일엔 낭만주의와 무정부주의가 넘쳤다. 낭만주의는 무엇보다 ‘영원한 대화’란 관념을 중시한다. 당대의 유명 학자이자 문필가였던 아담 뮐러는 이를 자기정신의 진정한 실현태라 칭송한다. 정신분석학자 오토 그로스는 다자간의 결합인 폴리아모리를 실천하고 주창했다. 오토 그로스는 한국에는 거의 알려져 있지않지만 당시의 지식사회에는 영향력이 컸던 인물이었다. 모든 문제를 성이 억압된 가부장적 구조에서 찾고 가부장제가 해체된 모계사회로 돌아갈 것을 주장했다. 그의 성해방은 이후 로버트 라이히와 프랑크푸르트학파의 마르쿠제로 이어졌다. 가족을 해체하려는 흐름과 함께 급진적 운동도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공산주의세력과 나치가 동시에 등장해 활동했다. 슈미트는 나중에 나치부역자가 되지만 이때는 공산당과 나치에 대한 위법화를 강력히 주문했다. 자유주의 정부는 미적댔다. 정부는 체제를 존속시켜야 한다는 절박감보다 자유주의 특유의 절차적 합리성에 더욱 주목했다. 슈미트는 정부가 '주권'의 행사를 주저했다고 판단했다.

책의 첫머리엔 이런 문장이 나온다. "주권이란 예외상태를 결정하는 자이다."(상기책 인용 미기재시 동일) 주권자란 통상적으로 유효한 법질서 바깥에 서 있으면서도 여전히 그 안에 속해있다. 따라서 헌법을 완전히 효력정지시킬 것인지 어떤지를 결정하는 자리에 있는 것이다. "헌법을 효력중지시킨다." 무시무시한 말이다. 그의 레토릭이 이처럼 단호한 데에는 이유가 있다. 바이마르공화국의 붕괴가 뻔히 보이는 상황에서조차 정치인들과 학자들에게는 이에 대한 문제의식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안일한 태도는 국가와 사회를 대하는 철학에서 나온다. 그들의 철학은 무엇이었을까? 그들 철학의 배경은 19세기 이래 서구를 휩쓸었던 실증주의였다. 특히 실증주의는 법학에서 한스 켈젠의 추상적 규범주의로 나타났다. 켈젠은 유대인이었다. 소수자는 국소적 땅의 논리를 따르기보다 추상적 보편주의를 주창하는 것이 본인에게 득이 된다. 켈젠은 국가는 법질서의 창출자도 원천도 아님을 강조했다. 이런 논리는 국가 자체의 존립을 결정지을수 있는 결정들은 회피하게 만든다. 또한 최상위 권능은 하나의 인격이나 사회학적이고 심리학적인 권력복합체(민족공동체-필자주)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규범체계의 통일체인 주권적 질서 그 자체에서만 비롯된다고 보았다. 구체적 인간은 사라지고 순수한 논리·이론적 정합성만 남는다.

슈미트는 이들을 조롱한다. "마치 세계의 자명한 삼라만상이라도 되는 양 일관된 통일성과 질서에 관한 논의가 여전히 되풀이되고 있다." "실제 사태로 눈을 돌리지 않은 채 법학이 형식적인 무언가에 기초한다는 데에 집착하면, 모든 고군분투에도 불구하고 법학의 낡은 틀 안에 머무르게 될 것이다." 큰 위기가 도래했음에도 법학자들은 정치를 불구로 만들었다. 실정법만이 중요한 규범주의는 공동체의 안정과 지속가능성이라는 정치의 궁극적인 목적을 간과하게 만든다.

'정치신학'이란 신학의 개념을 사용하여 정치를 해석하는 학문을 의미한다. 근대 이전 정치의 핵심은 군주였다. 군주의 의지는 루소에 의해 일반의지로 대체되었다. 루소의 일반의지가 현대 민주주의사상의 근원이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한다. 슈미트는 이렇게 말한다. "인민이 언제나 올바른 의지를 가진다는 필연성은 인격적 주권자의 명령을 특징짓던 올바름과는 다르다." 즉 양자는 다른 성질의 것이란 말이다. 절대군주는 상충하는 다른 이해관심 속에서 결정하는 자이다. 다른 이의 이해관심과 절연된 단독적 결정을 통해 국가적 통일성을 유지하는 것이다. 반면에 인민 즉 국민이 연출하는 통일성에는 결단주의적 성격이 결여되어 있다. 고뇌하는 군주의 결단주의적 후광은 이미지와 말재주로 선거에 이긴 후보에게서는 찾을 수 없는 것이다. 스페인의 사상가 도노소 코르테스는 19세기 후반 국가론이 군주제적 정통성 관념으로부터 민주주의적 정통성 관념으로 이행했다고 말한다. 슈미트가 보기엔 그 이행이 온전하게 제대로 작동하지 못한 것으로 보였다.

슈미트는 책의 마지막 장을 반혁명 국가철학자들에게 할애한다. 차마 본인이 말하기 곤란한 것들을 그들의 주장을 통해 말하려는 것 같다. 여러 반혁명 국가철학자 중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 도노소 코르테스다. 카톨릭에 기반한 코르테스는 인간을 악한 존재로 생각했다. 그래서 역사에서 악의 승리는 필연이다. 이 필연을 막아서는 것이 신의 기적이자 개입이었다. 그에게 군주와 신은 유비적 관계였다. 사회적 혼돈은 신과 같은 군주의 결단으로 해결가능한 것이었다. 슈미트에게 군주는 예외상태를 선포할 수 있는 주권자를 의미했다. 코르테스가 보기에 부르주아적 자유주의의 본질은 본질적 문제를 앞에 두고 태도결정하는 대신 ‘논의’를 개시하려는 데 있었다. 이런 것이다. "매우 긴급한 문제가 생겼어요. 모두 모여 토론해 보아요." 율사 출신의 노무현의 평검사와의 토론이 생각난다.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토론과 논리적 정합성, 합법성에 치중했던 그의 결말과 이후에 등장한 괴물들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는 자유주의를 끝까지 밀고 나가면 민주주의적 결과물이 성취될 것이라 순진하게 믿은 착한 정치인이었다. 자유주의는 작은 권력들에 대한 장악력을 느슨하게 만든다. 민주주의는 작은 권력들에 대한 제압을 통해 인민의 삶을 보장하려는 철학이다. 둘은 층위가 다른 논리다.

부르주아계급이 주도하는 자유주의적 민주주의는 생각만큼 민중적이지 않다. 1830년 7월 민중에 의한 혁명이 프랑스에서 발생한다. 이일을 계기로 루이 필리프가 국왕에 오르게 된다. 선거권의 확대를 기대했지만 정권을 차지한 부르주아는 선거권을 유산계급으로 제한했다. 이에 대한 코르테스의 생각을 슈미트는 이렇게 적고 있다. "부르주아지는 혈통 및 가계에 기초한 귀족지배를 폐기하면서도 가장 파렴치하고 저급한 금권적 귀족지배를 용인한다. 부르주아지는 군주주권도 인민주권도 원하지 않는다. 도대체 부르주아지는 무엇을 원하는 것인가?" 자유주의를 원래는 좋은 것이었다고 오해해서는 안된다. 원래란 없다. 자본주의에서 자유주의는 본질적으로 자본의 자유를 의미한다. 가장 자유주의에 충실했던 노무현 정부 시기부터 부의 양극화가 완연한 흐름이 되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정치인 개인의 자질 문제가 아니다. 자유주의란 본질적으로 자본의 자유임을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슈미트는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란 이질적 요소의 결합으로 형성된 현대 자유민주주의의 문제점을 제대로 간파하고 지적한다. 아무도 하지 못한 일이다. 자유주의의 한계에 대한 그의 지적에 공감하지만 그의 정치적 행적이 주는 불안감은 어쩔 수 없다, 슈미트에 대해 철학자 나종석은 논문 <정치적인 것의 본질과 칼 슈미트의 자유주의비판>에서 이렇게 말한다. "현대 대중민주주의 내지 의회민주주의는 서로 양립불가능한 두 구성요소 사이의 긴장과 갈등으로 인해 위기에 빠질 수밖에 없으며 지속불가능한 기획이라는 슈미트의 주장은 민주주의와 자유주의 사이의 연관성에 대한 무시할 수 없는 중요한 통찰들을 보여줌에 틀림없다. 그렇지만 이로부터 슈미트가 선택한 결정, 즉 파시즘적인 독재가 자유주의와 민주주의 사이의 갈등을 해결하는 유일한 방식이라는 결론이 합리적이라는 것이 입증되는 것은 아니다." 필자도 나종석의 생각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슈미트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든다. 우리는 자유주의가 민주주의를 확실히 담보할 것이라 믿었던 지도자를 가졌었다. 역사는 순정 자유주의가 민주주의를 담보하기는커녕 때로는 잔인할 정도로 방해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한국의 낭만파 자유주의자들이 슈미트의 책을 읽어야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 <정치신학>(칼 슈미트 지음, 김항 옮김, 그린비 펴냄). ⓒ그린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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