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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과 독일을 오간 민주화운동가 김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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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과 독일을 오간 민주화운동가 김설이

[인터뷰] 김설이가 말하는 남편 이범영과 민주화 운동

김설이는 1955년 강원도 영월군 상동면에서 태어났다. 당시 그곳엔 중석광산이 호황을 누리던때라 중석광산부속병원이 있었고 그의 부친은 그 병원 치과의사였다. 하지만 부친은 1960년 대 말 갑자기 돌아가셔서 집안형편이 어려워졌다. 그래서 모친은 1970년 파독 간호사로 먼저 독일에 가게 되었고 그도 동생들을 데리고 '소녀가장' 노릇을 한동안 하다가 독일로 가게 되었다.

그가 독일에서 대학에 가려면 독일대학 입학자격시험을 통과해야했고 그러려면 독일고등학교 과정을 마쳐야했기에 독일에서 그는 고등학교 과정을 다시 밟았다. 그러니까 그는 한국과 독일에서 각각 고등학교를 두 번 다닌 셈이다. 그리고 대학에서 수학을 전공하려고 베를린자유대학과 베를린공대 두 곳에 지원했는데 둘 다 합격했다. 결국 그는 집에서 가까운 베를린공대를 택했다.

1980년 5월 18일 광주민주화 운동 당시 그는 베를린공대 학생이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당시 그가 독일에 있었기에 그는 광주민중항쟁을 독일TV를 통해 자세하고 생생하게 볼 수 있었다. 당시 독일 국영방송을 통해 광주의 참상을 보면서 그는 한동안 정신을 차릴 수 없었고, 눈으로 TV화면을 보면서도 도대체 믿기질 않았다. 그동안 그는 독일에서 간간히 뉴스를 통해 모국의 실상을 보고 들었으나 그때까지 보던 뉴스와는 완전히 다르다는걸 느낄 수 있었다.

공수부대가 투입되기 전 많은 광주시민들이 광장에 모여 있었다. 트럭에 젊은이들이 타고 있는데 그 자리에 있던 시민들은 박수를 치면서 젊은이들을 응원하는 장면이었다. 그 많은 시민 중에 초등학교 1-2학년쯤 되어 보이는 꼬마가 특별히 그의 눈에 들어왔고, 그는 지금도 그 모습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그 후 공수부대원들이 젊은이들을 곤봉으로 무차별 때리는 모습, 시민들을 굴비 엮듯 엮어서 어디론가 끌고 가는 모습, 한군데에 젊은이들을 모아놓고 위협하는 모습을 생생하게 보면서 그가 느꼈던 공포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컸다.

다음날 대학에 가서 오전 수업을 끝내고 그가 학생식당에 갔더니 식탁위에 한글로 쓰인 유인물이 있었다. 한국학생들은 학생기숙사 로비로 모이자는 내용이었다. 그래서 그 장소에 갔더니 베를린 자유대 학생들도 몇몇 보였다. 동백림사건 이후 베를린에서는 사적인 만남이외에 학생들의 모임이 전혀 없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가 다니던 베를린 공대 학생들, 베를린 자유대 학생들이 속속 모여들었다. 그리고 대학생들과 독일인권운동가들이 모여 광주의 참상을 정리하고 '우린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해 논의했다.

하지만 광주와 멀리 떨어진 독일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이 딱히 없었다. 그래서 그는 다른 학생들과 4일간 단식을 했다. 또 독일인들에게 광주의 참상을 알리는 캠페인을 벌였다. 그가 단식을 하는 동안 밤에는 윤이상 선생, 송두율 교수, 한국에 관심이 있는 독일 목사들을 모시고 그분들의 얘기를 듣고 토론을 했다.

단식 마지막 날 그는 다른 대학생들과 한국영사관까지 행진을 했고, 영사관 직원에게 학생들의 요구를 문서로 전달했다. 그리고 영사관 앞에서 구호와 함께 단식을 마무리 했다. 그날따라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데 전철로 두 정거장거리를 걸어가는 동안, 그의 머릿속엔 광주 젊은이들에게 박수를 쳐주던 꼬마와 젊은 아버지 영정을 들고 앉아있던 꼬마가 내내 같이 했다.

며칠 후 단식 마무리 정리를 위해 그는 다른 학생들과 다시 모였고 그 자리에서 베를린 한국학생회를 만들기로 했다. 그리고 한국 내에서 투쟁하는 사람들과 연대해서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서 작은 힘이나마 보태자고 결의했다.

1980년 여름방학, 그는 모국에 왔는데 당시 서울의 분위기는 완전히 잿빛 그 자체였다. 그의 지인들은 모두 자취를 감췄고, 광주에 대해선 오히려 독일에서 막 입국한 그에게 묻는 실정이었다. 당시 모든 한국 언론은 1980년 5월 광주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에 대해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 그리고 '북한의 사주를 받은 폭도들의 소행'이라는 소리만 모든 언론이 떠들고 있었다.

그는 서울에 있는 한빛교회에 가서야 광주 현장에 있었던 사람들의 증언을 유인물을 통해 알 수 있었다, 그 후 그는 그 유인물을 출국 할 때 몰래 숨겨서 베를린에 있는 지인들에게 전해줬다. 그리고 그는 더 이상 베를린에 있을 수 없었다. 그의 머릿속엔 온통 광주로 꽉 차 있었다. 무엇보다 두 꼬마의 모습이 생생하게 되살아나 그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대학에서 하던 공부를 중단 하기로 했고 무작정 1981년 모국으로 들어왔다.

그로부터 44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는 아직도 광주에 관한 영화나 소설을 보지 못한다. 왠지 모르겠으나 그의 의식은 무조건 거부반응을 나타내고 광주에 대한 얘기는 그냥 피하고 싶어진다. 그가 이럴 진데 1980년 5월 광주에서 그날의 참상을 직접 겪고, 가까운 사람들의 죽음과 피해를 두 눈으로 본 광주시민들은 어떠할까?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195511)

그가 독일에서 하던 공부를 때려 치고 무작정 귀국할 수 있었던 건 아마도 젊었기에 가능했으리라. 1981년 그가 발을 디딘 모국은 그야말로 살얼음판이었다. 그때 그가 느낀 서울은 어수선하고 스산했으며 암울한 잿빛이었다. 그는 한국사회가 낯설었고, 모국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은 그가 낯설고 세월이 하수상한지라 낯선 이는 누구나 꺼렸던 때 '동아투위'의 이부영 선생의 소개로 그는 최열 선배를 만났다.

그때 최열은 'YWCA 위장결혼'사건으로 함께 구속됐다 나온 백기완 선생의 요양생활을 돌보며 '공해문제연구소' 창립을 준비할 때였다. 백기완이 요양하던 덕소에서 최열 소개로 그는 ‘청년운동가’ 이범영(1955-1994)을 만나면서 '낯선이' 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3053525&CMPT_CD=P0010&utm_source=naver&utm_medium=newsearch&utm_campaign=naver_news )

김설이는 독일에 있을 때인 지난 1976년 이범영이 서울대에서 학내시위를 하면서 작성한 문건을 국내에 있는 사람들보다 먼저 읽었다. 그래서 이범영의 성명서를 스크랩 해놨었는데 최열 선배가 한 남자를 소개를 하는데 그 주인공이 바로 이범영 이었던 것이다.

아마 그러한 우연이 김설이가 결국 초면에 이범영에게 매력을 느꼈던 이유 중 하나였던 것 같다. 나중에 김설이는 그 문건을 이범영씨한테 보여줬더니 그때 1976년 이후로 처음 보는 문건이라며 이범영은 매우 좋아했다. 김설이는 지금도 그 기억이 생생하다.

김설이의 사회과학 소양이 매우 부족하다고 생각한 이범영은 그를 노동자들의 소모임 에 끌고 다니며 공부를 시켰는데 한 곳에서 문제가 일어났다.

영등포도시산업선교회에서 하는 노동법 소모임에 그가 몇 번 갔었는데 그곳 책임자가 그를 아는 또 다른 이를 통해서 그가 그곳에 안 왔으면 좋겠다고 했단다. 그 이유는 '김설이가 독일에서 간첩교육을 받고 침투한 간첩이라고.....'

너무나 어처구니가 없어 그는 헛웃음이 났다. 그러나 웃을 일이 아니었다. 당시 전두환 정권은 필요하면 언제든 누군가를 간첩으로 만들 수 있는 때였다.

그는 즉시 이범영한테 얘기했더니 자신보다 더 놀라서 매우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때 이범영은 민청련을 조직하기 위해 동분서주 다니던 때였으니 말이다. 여러 지인들과 얘기한 끝에 그는 이범영과 둘이 영등포산업선교회에 같이 가서 오해를 풀기로 했는데 그 책임자가 그들을 만나주지 않으니 답답한 노릇이었다.

한편 1980년 서울대 학내시위 이후에 이범영은 대학에서 제적되어 수배 중 이었다. 그럼에도 이범영은 1982년 5월 한국공해문제연구소 창립에 참여했다. 그런 와중인 1982년 10월 30일 홍제동성당에서 김설이는 김승훈 신부 주례로 이범영과 결혼했다. 김설이는 당시 민주화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무조건 ‘좋은 사람들, 훌륭한 사람들’이라는 ‘허상’과 ‘무지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김설이가 이범영과 결혼 할 생각을 굳힌 가장 큰 이유가 아닐까 생각한다.

결혼 후도 이범영은 '전업활동가'여서 생계를 책임지는 것은 전부 김설이의 몫이었다. 처음에 그는 생계를 위해 독일유학을 준비하는 학생들 과외를 했다. 하지만 남편이 수배되는 바람에 기관원들이 학생들 집에까지 난동을 부리는 바람에 그는 독일어 과외를 지속할 수 없었다. 그 후 몇 년간 작은 출판사에 다니기도 했고 독일에 사회과학서적을 보내는 책장사 등 닥치는 대로 아무 일이나 했다.

지금 생각하니 그는 그때 어찌 먹고살았는지 아득하게 느껴진다. 1992년 그는 서울에서의 생활을 정리하고 시골로 내려와서 공공근로도 하고 품도 팔고 했으나 생활고에 허덕였다, 보다 못한 친정어머니가 도움을 많이 주었다.

큰아이가 9개월 작은아이는 뱃속에서 있는지도 모르고 집을 나간 남편은 아이들이 다섯 살,세살 때 비로소 수배자의 몸에서 자유의 몸으로 되돌아 왔다. 당시 아이들은 아빠를 처음보고 '아저씨'라고 불렀다. 그래서 그런지 김설이는 남편은 자기가 아닌 민주화운동과 결혼했다고 말한다.

나는 그에게 아내가 본 이범영의 장단점은 무엇인지 물었다.

"남편의 장단점은 같지 않을까 싶다. 남편의 장점은 순진무구(철이 없다는 얘기)하고 자기가 관심을 갖고 있는 사안에 대해선 완전몰입하며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면 오로지 그 방향을 향해서 전력 질주하는 사람이다. 그가 대학에 입학했던 1973년, 20대 초반에는 박정희 유신정권을 몰아내고 제대로 된 민주화를 이루는 데에만 관심을 갖고, 공부를 하고 공부한 걸 실천하는데 몰두했다. 그 외 모든 일상적인 문제엔 남편은 관심조차 없었기에 일상생활은 이범영에게 늘 낯설고 엄두가 안 나고 자기가 관여할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 하지 않았을까 싶다. 사실 우리는 결혼생활 11년 동안 절반인 5~6년은 떨어져 살았기에, 남편이 수배 또는 수감됐기에, 우리는 서로에 대해서 잘 모르기도 했겠다는 생각을 요즘하고 있다. 활동가로서 남편의 장점은 생활인으로는 단점이기도 하겠다."

생계에 무대책인 ‘전업 민주화운동가’였던 남편은 지난 1994년 8월 12일 담도암으로 투병 중에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들의 간곡한 기원을 외면한 채 저세상 사람이 되었다

아내인 그가 보기에 남편도 분명 한계가 있는데 그 한계를 청년운동을 하면서 스스로 깨뜨리고 좀 더 유연하고 폭이 넓고 깊이가 있는 사람으로 변해가는 도중에 세상을 떠났기에 그로서는 너무 안타깝다. 남편이 암에 걸려서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느꼈을 어느 날 그에게 사과했다. "그동안 내가 잘못을 많이 했소. 미안하오." 그런 남편의 한마디에 그는 남편에 대한 미움이 순식간에 없어졌고 그런 남편이 너무 고마웠다. 미움을 없애주고 저세상으로 가서.....

따님들에게 미친 아빠의 영향을 물었다.

"아이들에겐 글쎄 모르겠다. 워낙 아이들 상처가 깊어서......아이들에겐 훌륭한 아버지보단 곁에 늘 있는 아버지가 더 필요했을 테니까. 흐르는 세월 굽이굽이 마다 아이들은 부재중인 아버지가 얼마나 필요했을까? 또한 얼마나 많은 눈물을 가슴깊이 채웠을까? 초등학교, 중학교,고등학교, 대학교, 대학원 졸업식 때 아이들 옆에 아버지가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부모들이야 자신들의 선택으로 고단한 삶을 살았으나 내 아이들은 웬 날벼락일까?"

만약 지금도 남편이 살아있다면 그는 이렇게 말해 주고 싶다.

"당신이 39년간 제대로 잘 살았기에,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아무하고나 손잡지 않고, 그 어떤 권력 앞에서도 무릎 꿇지 않았기에 그 덕을 우리 세 모녀가 지금 보고 있다. 고맙다."

남편이 바라고 꿈꾸며 이루고자 했던 세상은 어떤 세상이었다고 생각하는지 물었다.

"그가 바랐던 세상은 우리 모두가 지금도 간절히 바라는 세상이 아닐까."

성경에 이런 구절이 있다. “모든 위대한 남자 뒤에는 위대한 여자가 있다(behind every great man, there is a great woman)” 평생 나보다는 남을 위해, 자신과 가정의 단란한 행복보다는 나라와 민족을 위해 온 삶을 바친 이들의 정신은 영원히 남을 것이다.

▲민청련 탄압을 규탄하는 농성을 하면서 동료 아이들을 함께 돌보고 있는 김설이 ⓒ 민청련동지회

▲1982년 10월 김승훈 신부를 주례 사제로 모시고 이범영은 김설이와 혼배성사를 치뤘다. ⓒ필자 제공

▲이범영이 1986년 수배를 받아 쫓길 때 용문사에서 김설이와 두 딸(건혜, 승민)을 만나 찍었다. 네 식구가 찍은 유일한 가족사진. ⓒ필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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