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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의 무게로 벼린 말의 칼날을 언제 휘둘러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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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의 무게로 벼린 말의 칼날을 언제 휘둘러야 하나

[안치용의 노벨문학상의 문장] 헤르타 뮐러, <마음짐승>

침묵하면 불편해지고, 말을 하면 우스워져.

-<마음짐승>(헤르타 뮐러, 박경희 옮김, 문학동네)

침묵은 마음 깊은 곳에 쌓인 무언의 무게다. 마음 깊은 곳에 쌓이기에 그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어느 순간 그 무게에서 불편을 느끼기 시작한다. 그러다 점점 더 그 침묵의 무게에 짓눌린다.

반대로 참지 못하고 무게를 불쑥 덜어낸다고 가위눌림이 소멸되는 건 아니다. 꺼낸 말은 공허하게 울리며 멀지 퍼지지 못하는 우스꽝스러운 진동을 남긴다.

"침묵하면 불편해지고, 말을 하면 우스워져." 헤르타 뮐러의 소설 <마음짐승>의 첫 문장은, 그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익숙한 자리가 낯설어진 상황에서 직면하는 내면의 갈등을 드러낸다.

뮐러는 루마니아 내의 독일인 소수민족으로서 독일과 루마니아 어디에서도 온전히 자신을 속할 곳이 없다는 이중적 소외를 경험했다. 루마니아에서는 독재정권 하에서의 억압과 감시 속에서 공포를 느꼈고, 독일로 망명을 택했을 때도 온전히 환영받지 못한 채 또 다른 이방인으로 살아가야 했다. 독일과 루마니아 모두에서 이등국민이라는 무게를 짊어진 그의 정체성은 분열과 좌초를 앓는다.

이러한 상황에서 침묵은 유효한 선택일 수 있다. 독재정권에서 살아가며 감시의 눈을 피하기 위해, 많은 사람이 침묵에 머물렀다. 그러나 침묵은 해법이 아니었다. 고통을 숨기고 억눌렀을 뿐, 사람들은 자신이 누구인지, 어디로 가야 할지에 관한 답을 갈망했다. 뮐러 역시 니콜라에 차우셰스쿠 독재 정권의 철권통치하에서 자아를 상실하는 고통을 겪었다. 조국인 루마니아를 떠나기로 결심할 수밖에 없었겠지만, 더 큰 갈등에 직면했을 것이다. 자신을 환영하지 않은 독일로 망명하는 것이 진정한 해방이 될 수 없음을 알았다. 자신이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그에게 내재한 본원적 아픔이었다.

뮐러 문학창작론의 근간이라 할 ‘고안된 지각(erfundene Wahrnehmung)’은 이러한 상황의 돌파구였다. 그는 끊임없이 인식의 틀을 재구성하며, 현실을 다른 방식으로 느끼고 받아들이려 했다. 루마니아에서는 독일인으로서 소외를 겪었고, 독일에서는 이민자이자 동유럽 출신으로 또 다른 경계에 놓였다. 그의 문학적 인식은 단순히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반영하지 않고, 끊임없이 만들어지고 재해석하며 현실의 범주를 넘어서기도 한다.

그의 작품 속에서 현실은 자주 ‘고안된 지각’에 의해 표현된다. 독재 치하에서 삶은 사실과 허구가 뒤섞여, 진실은 감춰지고 사람들은 현실을 보지 못하게 된다. 그럴 때 말은 말 그대로 종종 우스워진다. 그 우스움은 체제의 감시와 억압이 만들어낸 아이러니이며, 그 안에서 우리는 진실과 거짓 사이에서 끊임없이 길을 잃는다.

그러나 말하지 않고 끝내 침묵한다면, 실로(失路)의 처지가 더 악화한다.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공포와 소외가 마음속에 더욱 깊이 뿌리내리기 때문이다. 뮐러에게 있어 침묵은 그 고통을 더 이상 견딜 수 없을 만큼 키우는 것이고, 말을 하는 것은 견딜 수 없게 된 그 고통을 외부에 내보내는 방법이다. 말의 부조리함, 그 우스꽝스러운 경계에서 인간이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기를 멈춘다면 원래의 길로 돌아갈 수 없다.

말과 침묵 사이, 뮐러는 자신이 속하지 않은 두 세계를 오가며 언제나 이방인이었다. 루마니아에서 독일로 망명은 단순한 이동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가 살며 축적한 모든 기억과 상처를 안고 새로운 곳에서 또 다른 소외를 감수하는 것이었다. 두 나라 모두에서 진정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경험은, 망명자로서 고통과 이중적인 배척을 담고 있다. 루마니아에서는 독재정권 하의 공포로 자유를 잃었고, 독일에서는 자신이 누구인지 증명해야 하는 또 다른 전투를 시작했다. <마음짐승>을 비롯해 그의 작품에 이러한 이중성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말하는 것이 과연 어떤 의미가 있는가? 말해봤자 그 말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고 왜곡되거나 웃음거리가 될 때, 말은 무력해진다. 그러나 그럼에도 말하는 것은, 그 웃음거리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고자 하는 노력이다. 존재를 증명한다는 의도보다 존재를 망실하지 않겠다는 절실함이 작동했을 터이다. 뮐러에게 있어 말은 비록 완전하게 보이지 않더라도, 자신을 표현하고 세계에 맞서는 유일한 도구였다. 유의할 것은 뮐러의 말이 외양상 완전하게 보이지 않더라도 그것은 의도한 것으로 정교한 조탁과 치밀한 문학적 음모의 결과물이라는 사실이다.

침묵과 말 사이에 한 가지 결정만이 가능할까. 불편한 침묵 속에 머무를 것인가, 아니면 그 침묵을 깨고 자신을 드러낼 것인가. 뮐러는 침묵의 무게에 눌려 살아가던 시절에도 끝내 자신의 목소리를 찾았고, 독재와 억압 속에서도 진실을 추구했다. 결코 쉬운 길이 아니었다. 말이 왜곡되고 우스꽝스러워질 때조차 그는 자신이 겪은 고통과 소외를 세상에 전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는 보호색처럼 ‘고안된 지각’에 근거하여 ‘머릿속 집게손가락 (ZeigefingerimKopf)’ 사용하여 말을 골랐다.

외양상 침묵은 우리를 지켜주지만, 침묵 속에서 머무는 것만으로 자신을 끝까지 지켜낼 수는 없다. 침묵의 무게로 벼린 말의 칼날은 소중한 무기이다. 침묵과 말의 경계에서, 무기력에 잦아들지 말고 칼날을 벼려야 한다. 그러면서 누구를, 무엇을 찌를 것인가를 내내 생각해야 한다. 생각 또한 말이다. 그러나 말만이 진정한 칼이 될 수 있다. 2009년 노벨문학상 수상

▲Le Christ du silence (1890-1907) Odilon Redon (French, 1840-1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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