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던 중 불현 듯 두 사람이 떠올랐다. 리튬이온전지 개발로 2019년 노벨 화학상을 받은 요시노 아키라. 그는 교토대 재학 시절 고고학 동아리에서 활동했던 것이 노벨상을 받게 된 계기가 되었다고 했다. 문자가 없던 시대에 연구의 실마리가 되는 것은 출토된 토기 등의 물적 증거뿐인데, 고고학 발굴에 힘쓰면서 이런 '증거'를 겸허하게 대하는 자세를 배웠다는 것.
"고고학과 화학 모두 실증과학이며 얼마나 새로운 데이터를 세상에 먼저 제시하는지가 중요하다는 것이 공통점이다."
다음은 백남준 선생. 백 선생은 자신의 예술적 뿌리를 탐색하는 과정을 '아방가르드의 고고학'이라고 불렀다.
이제 오늘의 책 이야기.
<상나라 정벌>은 무려 934페이지에 달하는 벽돌 책. 옮긴이 홍상훈의 요약을 옮겨오자면 "전상, 즉 상나라를 정벌하여 멸한 주나라의 역사 이면에 숨겨진 경악스럽고 전율한 만한 이 비사들은 최근까지 이루어진 고고학적 발굴과 갑골문에 관한 연구 성과를 반영한 옛 문헌의 다시 읽기를 통해 밝혀진 것들이다."
이번엔 지은이 리숴의 요약.
"주공 시대 변혁의 최대 결과는 신권의 퇴장이며, 이 때문에 중국의 문화는 지나치게 '조숙'해졌다. 전국시대 변혁의 최대 결과는 귀족의 퇴장이며 이 때문에 중국의 정치가 지나치게 '조숙'해졌다. 그러나 다른 인류 문명들에서는 신권과 귀족 정치의 퇴장이 모두 서기 1500년 이후의 이른바 근현대 시기에 일어났다. 주공과 공자의 노력은 2000~3000년 동안 유지되어서, 고고학자들의 삽이 하나라와 상나라의 유적지를 발굴하게 되었을 때에야 비로소 '육경' 등 옛 문헌에 가려지고 오독된 역사의 진실이 다시 해석되고 복원될 수 있었다. 고고학으로 인해 우리의 인식이 바뀌게 된 것은 비단 하나라와 상나라뿐만이 아니다."
논리적으로 이렇게 된다. 고고학 발굴이 있다. 새로운 증거가 나타난다. 새로운 해석이 가능하다. 기존 역사의 허구적 이미지를 깨뜨린다. 잘못 서술된 역사의 진실을 드러낸다. 역사와 세상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이 바뀌게 된다. 다만, 이 모든 것은 고고학적 증거에 기반한다. 책은 중국 고대사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통째로 뒤집어놓는 '인식의 혁명'을 요청한다.
저자에 대한 고마움은 당연하겠고 늘 중국 인문학 분야의 명저를 반듯하게 번역하여 우리에게 안겨주는 홍상훈 교수의 노고를 기억했으면 한다. 이분의 번역서라면 무조건 사서 무조건 읽으라고 권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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