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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세상이 밈이라면? <댓글부대>가 던지는 묵직한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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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세상이 밈이라면? <댓글부대>가 던지는 묵직한 질문

[이동윤의 무비언박싱] 거짓이 진실 같은 세상 속에서 정의를 추구하기란?

기자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다수의 영화는 주인공이 은폐된 진실을 파헤쳐 이를 폭로하고 정의를 수호하는 영웅적 모험담으로 서사를 직조한다. 이 영화 속 주인공은 제아무리 속물적 인간 유형이라 할지라도 불의 앞에 눈을 돌리지 못한다. 기어이 피해자의 억울함과 고통에 동감하여 결국 사건 속으로 뛰어든다. 특종을 잡기 위한 욕망으로 가득 찬 세속적 유형조차도 자신의 기사로 사회 정의를 실현하겠다는 정의에 대한 강박과 성공을 향한 욕망 사이에서 묘한 줄타기를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언론계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의 이러한 공통점은 언론계를 국가 또는 자본 권력과 대비시켜 언론계의 순수성과 사회적 역할을 강조함으로써 발생한다. 결국 언론이야말로 사회적 정의를 실천하기 위한 마지막 보루라는 입장이다.

오는 3월 27일 개봉하는 영화 <댓글부대>는 흥미롭게도 앞선 기자 주인공의 작품들과 전혀 다른 위치에서 기자의 역할과 언론의 현실을 언급한다. <댓글부대>의 주인공 임상진 기자(손석구)는 진실에 집착하되 정의 실현보다는 진실 폭로의 카타르시스에 더 중독되었다. 배경이 되는 언론사는 마지막 보루로서 사회적 정의를 실천하기 위해 모험을 무릅쓰기보다는 무모한 시도 앞에 무너지고 쉽게 자본과 타협한다. 2024년, 대한민국의 언론인이 '기레기'로 불리는 시대에서 <댓글부대>는 어쩌면 권력의 입장을 대변하는 언론들을 바라보는 대중의 비판적 시선을 담아낸 결과물이라고 평가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댓글부대>를 단순히 한국의 언론계 현실을 담아낸 시대비판적 작품으로 평가하기엔 이르다. 이 작품에서 관객에게 기이하게 다가오는 몇몇 순간이 눈에 띈다. 그것은 전적으로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를 만든 안국진 감독의 색채로부터 기인한다.

<댓글부대>에서 의미심장하게 두어 번 반복되는 대사들이 있다. 임상진 기자의 "나만 아는 진실을 소문낸 기분은 기자만이 안다"와 "거짓 섞인 진실이 더 진실 같다", "기사는 끝나지 않는 연재소설이다"라는 고백, 그리고 "현실을 보고 현실을 살아"라는 편집장의 조언이 그것이다. 한 작품에서 같은 내용의 대사가 두 번 이상 반복된다는 것은 감독이 이 대사를 통해 노골적으로 관객에게 전달하려는 자신의 시선이 있다는 뜻이다. <댓글부대>에서 이 대사들은 진실과 거짓, 현실과 가상, 기사와 소설을 대비해 사회적 담론의 세계를 이분법으로 구분한 후 그 두 세계가 사실은 중첩되어 있고 경계가 분명하지 않음을 설명한다. 진실을 진실하게 전달하기 위해선 거짓이 필요하고, 현실과 가상의 경계는 붕괴하였으며, 팩트를 대중에게 전달하기 위해서는 소설적 구조를 띠어야 한다는 모순.

대사를 통해 감독이 펼쳐 놓은 두 세계의 모순은 고스란히 인터넷의 각종 밈(meme)과 게시글 이미지로 더욱 구체화한다. 리처드 도킨스는 자기 복제를 거듭하며 진화해 온 인간의 유전자처럼 인간의 뇌와 뇌를 통해서 종교, 신념, 이념적 체계가 복제되는 것을 밈이라 정의했다. 그것이 사실이든, 진실이 아니든 상관없이 결국엔 인간의 생각과 믿음을 지배하고 세뇌하는 밈이야말로 <댓글부대>가 지적한 모순의 세계를 가장 잘 드러내는 상징적 기호다. 안국진 감독은 어쩌면 당신이 보고 믿고 있는 영화 속 상황 그 자체가 하나의 밈일지도 모른다고 주장한다. 임상진 기자가 쫓는 은폐된 진실이란 것도, 만전기업이 은폐하려는 진실이란 것도 포함해 어쩌면 애초에 모든 게 하나의 밈처럼 조작된 것은 아니었을까?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믿고 무엇이 진실이라 받아들여야 하는가?

▲영화 <댓글부대>. ⓒ ㈜에이스메이커무비웍스

안국진 감독은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부동산 공화국에서 살아가는 무산자들이 어떤 지옥도를 겪고 있는지를 그로테스크한 풍경으로 펼쳐 보인 바 있다.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의 세계는 집주인과 세입자, 공장주와 노동자, 재개발 결정권자와 지역 주민으로 구분되어 있지만 감독은 계급적 우위에 놓인 이들의 세상은 최소한으로 묘사한다. 분명 모든 관계가 갑과 을로 계급화된 자본주의 사회임에도 영화에서 진정한 '갑'이라 할 수 있는 자본의 권력자는 삭제된 채 을과 병, 병과 정의 관계 속에서 이뤄지는 폭력과 지옥도만 그려낼 뿐이다. 안국진 감독에게 어쩌면 자본주의 체제는 이제 전체를 파악할 수 있는, 또는 점거하거나 전복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닌지도 모른다. 이미 우리는 거대한 체제 내의 작은 부속물이 되어버린 지 오래고,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을, 병, 정들끼리 서로를 짓밟는 일 뿐이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겐 비판적으로 내비쳐질지도 모를 감독의 시선이 지독하리만치 사실적으로 다가온다. 감독의 입장에 동의하든 그렇지 않든, 이미 우리가 그 지옥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댓글부대>의 세계 또한 <성실한 나의 앨리스>와 같은 구도를 갖고 있다. 영화에서 거대 자본 권력으로서 만전기업은 극 뒤로 가려져 있다. 분명 임상진 기자가 쫓는 진실은 만전기업을 향하지만 그 어디에서도 만전기업을 만날 순 없다. 그가 전해 들은 만전의 횡포도, 그가 전달받은 여론전담팀 남기홍 팀장의 명함도, 전화 통화로 확인했던 고위급 간부의 존재도 과연 진실인지 확인할 수 없다. 관객이 보는 무엇이 진실인지 영화는 구체적으로 증거 하지 않는다. 분명 영화는 임상진 기자가 보고 듣고 경험한 것을 하나의 구체적 증거로 제시하고 관객에게 극적 체험을 선사하지만, 영화가 끝난 후 불이 켜진 극장에서 관객이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체험한 모든 것이 결국은 거대한 허구적 체계였음을 자각하는 것뿐이다. 이것은 <댓글부대>가 하나의 거대한 밈으로 작용했기에 가능한 일이다.

임상진 기자가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끌고 들어오는 인터넷 커뮤니티의 역사는 그 자체로 하나의 거대한 밈이다. PC통신이 대자본으로 인해 유료화되고 이로써 인터넷 공간이 사유화되는 과정을 폭로하고 저항하려 했던 인물이 힘없는 중학생이었다는 점, 바로 그가 2017년 촛불집회를 주도했던 시작점이었다는 영화적 사실은 철저히 허구이지만, 그 설정은 실제 상황을 바탕에 두고 직조되었다. 스크린을 넘어 전달되는 이미지의 향연 속에서 관객은 직접 겪은 현실의 사건에 더해진 허구적 상황을 마치 실재적 사건처럼, 하나의 거대한 진실의 체계로 받아들인다. 이에 따라 영화는 혁명은 자유로운 의지를 지닌 한 개인으로부터 시작될 수 있다는 마르크스의 신념을 관객의 마음속에 깊이 새겨 넣는다. 이미 진실과 거짓의 경계가 사라진 시대에서 감독은 <댓글부대>라는 대자본의 문화상품을 밈으로 격하함으로써 대중에게 선명한 메시지를 던진다.

▲영화 <댓글부대>. ⓒ ㈜에이스메이커무비웍스

어쩌면 안국진 감독에게 진실이 무엇인지는 애초에 중요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임상진 기자가 끝까지 추구하는 정황증거, 팩트체크, 증거 위주의 세계는 적어도 안국진 감독의 입장에선 이미 붕괴한 지 오래다. 제아무리 진실을 전달하려 해도 이를 손쉽게 허구로 만들어 버리는 밈의 세계에서 진실을 추구하기란 산에서 물고기 잡는 형국일 뿐이다. 대신 안국진 감독은 진실 추구가 아닌 정의가 실현되는 사회를 쫓는다. 결국 영화는 정의가 진실에 기반을 두고 이뤄질 수 있다는 기존의 언론적 사고 체계를 지워버린다. 대신 정의를 추구하고자 하는 대중적 열망을 개개인의 마음속에 깊이 새겨 넣는데 몰두한다. 물론 거짓 위에 정의를 세워 올리는 일은 지극히 위험하고 불가능에 가깝다. 진실이 아닌 거짓으로 정의가 구성될 때 우린 그것을 정의라 부를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더는 진실을 진실로 믿을 수 없는 밈의 세계 속에 살고 있다면, 그럼에도 그 세계 속에서 정의를 추구해야만 한다면, 결국 우린 진실을 추구하기보다 정의 추구에 초점을 맞출 수밖에 없다고 영화는 주장한다.

영화의 도입부에 등장하는 중소기업 업체 대표의 억울한 사연은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에 등장하는 수남의 사연과 별반 다르지 않다. 아무리 성실히 일한다 해도 결국은 거대 자본에 포섭되어 모든 걸 손쉽게 빼앗길 수밖에 없는 사회, 그 속에서 제아무리 억울함을 호소한다 해도 그 누구도 귀담아듣지 않는 사회. 수남은 그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자신의 앞길을 방해하는 모든 이들을 살해한다. 이런 극단적 선택을 하지 않고 언론에 호소하려 했던 업체 대표는 결국 자살(물론 이 또한 자살인지 타살인지 영화는 명확히 다루지 않는다)한다. 타인을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어 나갈 수밖에 없는 지옥에서 진실은 이제 더는 제 기능을 하지 못한다. 이를 뼈아프게 인정할 수밖에 없다면, 안국진 감독이 <댓글부대>에서 계보화한 인터넷 커뮤니티의 역사가 주는 울림에 우린 모두 귀 기울여야 한다.

<댓글부대>가 원전으로 삼은 소설 <댓글부대>의 작가 장강명은 2012년 대선 당시 국가정보원의 댓글 조작을 통한 선거 개입에서 모티프를 얻어 소설을 집필했다. 소설은 소수의 인원이 어떻게 손쉽게 대중을 선도하고 세뇌하는지, 이를 주도하는 권력이 어떻게 국가와 자본의 체계를 휘어잡고 있는지 폭로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 반면 영화는 그러한 폭로에 관심이 없다. 대신 어떻게 대중이 선동되는지를 보여주는 구조와 과정에 관심을 둔다. 선동의 방향은 크게 두 가지 길로 묘사된다. 첫 번째, 인터넷에 나도는 밈들을 사실로 믿고 신념화하는 길. 두 번째, 누군가의 희생을 통해 각성하고 이로써 진실을 밝히기 위해 노력하는 길. 원작 소설이 첫 번째 길을 충분히 극화했다면 영화 <댓글부대>는 두 번째 길을 통해 선동이 곧 혁명으로 이어질 가능성을 탐구한다. 임상진 기자가 만전기업의 비리에 집착한 것도, 찡뻤킹(김성철)이 자신들의 만행을 인터넷 게시물로 폭로한 것도 모두 누군가의 희생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누군가의 희생이 없더라도 정의를 향한 대중의 열망이 왜곡되지 않기를 바라지만 우리는 모두 경험하지 않았던가? 거대한 희생 앞에 촛불을 들었던 경험 말이다.

안국진 감독이 영화에 뿌려놓은 선동의 장치들은 분명 위험천만하기 그지없다. 진실을 바탕에 두지 않은 채 정의에만 초점을 맞춘다면 <건국전쟁>이 100만 관객을 넘기는 현상조차도 우리는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전히 질문은 남는다. 진실이 더는 중요한 역할을 하지 않는 세상이라면 과연 우리는 어떻게 사회를 더 나은 방향으로 바꿔나갈 수 있을까? 감독이 과감하게 던진 질문에서 우리는 반드시 길을 찾아야만 하는 상황에 놓여 있다. <댓글부대>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이 부디 많은 관객의 마음에 작지 않은 고민과 담론을 만들어 주길 바랄 뿐이다.

▲영화 <댓글부대>. ⓒ ㈜에이스메이커무비웍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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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윤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에서 영화 연출, 시나리오, 영상문화이론을 전공했다. <포도나무를 베어라>(2007), <오이시맨>(2008)의 시나리오를 집필 했으며 CGV아트하우스 큐레이터, 춘천SF영화제 프로그래머를 역임 했다. 2019년부터 4년 간 서울국제프라이드영화제와 함께 ‘한국퀴어영화사’ 연작 시리즈를 책임 편집 했으며 『A Collection of Korean Queer Cinema』(2023)를 집필하여 영문으로 출간했다. 현재 영화 평론, 시나리오, 영화 연출 등 영화와 관련된 다양한 형식의 글쓰기와 창작을 수행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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