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에는 KTX가 스무살이 된다. KTX 개통 20주년은 한국 철도 발전의 상징적 의미를 갖지만, 한국 철도가 처한 현실을 돌이켜보면 만만치 않은 과제들이 산적해 있다. 2000년대 이후 한국 철도는 기술적, 정책적 발전을 이뤘다고 평가받지만, 그 이면엔 '민영화'의 그림자가 언제나 함께 따라 다녔던 것이 사실이다. 일례로 KTX 노선을 떼서 민영화하겠다는 구상을 떠올릴 수 있다. 박근혜 정부는 SRT를 새로 설립해 '같은 노선 위를 달리는 두 열차 운영 회사'라는 기형적 구조를 만들어 민영화의 우회적 물꼬를 텄다. 철도 시설과 운영을 분리한 데 이어 관제를 분리하려는 시도 역시 꾸준히 진행됐다. '돈이 안된다'는 이유로 기후 위기 시대 서민의 발이 되고 있는 전국의 철도 노선들도 하나 둘 사라지고 있다. KTX 20주년, 감격스런 축하도 의미 있지만, 그 이면에 가려진 현실도 짚어야 할 필요가 있다. <프레시안>과 전국철도노동조합이 KTX 20주년을 맞아 [철도 유감]을 기획해 글을 싣는 이유다.편집자
이재명 대선 후보 : 서울지역 지상 철도 지하화
윤석열 대선 후보 : 받고 레이스! 경부선 수도권 구간, 경인선, 경원선 지하화
민주당 : 받고, 철도, 도시철도, GTX지상구간 지하화
국민의 힘 한동훈 비상대책위원장 : 받고, 경부선 성균관-수원 구간 지하화
민주당 이재명 대표 : 받고, 전국 도심 철도 지하화
20년 이상 선거철이면 좀비처럼 되살아나는 철도 지하화 공약이 4월 총선을 앞두고 또 던져졌다. 철도 지하화 공약은 도박판의 레이스처럼 판을 점점 더 크게 벌이고 있다. 서로를 척결 대상이라고 주장하는 여당과 제1야당은 철도 지하화만큼은 의견 일치를 보이고 있다. 사회, 경제, 외교, 안보 등 모든 국가 정책에서 치열한 대치를 해왔던 국민의 힘과 민주당이 철도지하화는 서로 주도하겠다고 한다. 두 당에게는 철도지하화야 말로 이 시대의 가장 중요한 과제요 시대정신인 셈이다.
철도지하화는 이미 지난 1월 9일 두 당이 앞장서 "철도 지하화 및 철도 부지 통합 개발에 관한 특별법"을 제정하면서 법적 근거도 갖게 되었다. 철도 지하화는 무소의 뿔처럼 거침없이 한국 사회를 질주해 나갈 태세다. 그런데 철도 지하화는 누구를 위한 것일까?
남북이 극한 대립으로 치달아 전쟁위기설이 나돌고, 취업을 포기한 청년들이 넘쳐 나고, 자영업자들은 희망을 버리고 있다. 경쟁에 지친 학생들은 신음하고 있으며 고령사회로 달려가는 속도는 가속이 붙어 있고, 저출생으로 한국이 사라질 것이라는 경고는 진즉에 들어와 있다. 이런 와중에 지방 소멸의 그림자는 더욱 짙어지고 기후 변화는 재난을 일상화시키고 있다. 현재 한국 사회와 지구를 둘러싼 심각한 문제들에 대해 이번 총선에 나선 정당들이 어떤 해법을 제시하고 있는지 들어보지 못했다.
반면 철도지하화를 통한 대개발로 시민들의 숙원을 해결하겠다고 한다. 이 빈곤한 공약을 부끄럼은커녕 당당히 내놓는 정치집단의 무모함이 무서울 지경이다.
철도 지하화 명분 만큼은 시민을 위한 것처럼 포장되어 있다. 철도로 단절된 도시를 이어 낙후된 지역의 발전을 이끌고 소음, 분진 같은 생활 불편을 해소하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낙후 지역 개발과 소음, 분진 문제는 철도를 지하화하지 않고도 해결 할 수 있는 방법이 얼마든지 존재한다. 철도 지하화 공약 저변에 흐르는 것은 토건 개발을 통한 부동산 욕망이다. 개발된다면 금싸라기가 될 도심 일부 철도부지는 건설사들과 땅주인, 집주인 들에게 한 몫 잡을 기회를 주게 되겠지만 그 대가로 한국 사회는 새로운 재앙을 떠 안게 될 것이다.
철도로 단절된 도시라는 말은 철도에게는 억울하다. 한국 철도의 거의 모든 노선은 멀쩡한 도시나 마을을 가르며 놓아 진 게 아니다. 철도가 생기고 그 주변에 사람들이 모여 살게 되었다. 시간이 지나자 철도는 물리적으로 도시를 가르는 것처럼 보이고 이 분리가 도시 발전을 저해하는 것으로 간주 되었다. 철도로 인한 단절을 극복하는 문제는 지하화가 유일한 해법이 아니다. 그럼에도 정치인들이 나서는 이유는 재정 문제야 본인들이 신경 쓸 게 아니고 별다른 고민 없이 당이나 자신의 이름을 걸어 선명하게 유권자들에게 제시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게으르거나 공동체의 과제에 무관심한 정치집단이 선택하기에 너무 좋은 공약이다.
여야 할 것 없이 철도 지하화 공약이 경쟁적으로 떠오른 것을 보면 지상 철도가 한국 사회의 심각한 문제처럼 보인다. 하지만 한국 철도는 인구 당 철도 KM나 국토 면적당 철도 KM로 봐도 주요 철도 선진국이나 OECD 가입국과 비교하면 하위권에 속할 정도로 철도 연장이 사회경제적 여건에 비해 적은 편이다. 더욱이 기후위기에 따른 모달시프트(수단 변환)가 과제로 떠올라 자동차에서 철도로의 수송분담률 이전이 요구되는 상황에서 철도는 더 확대되어야 하는 실정이다. 이런 환경에서 앞으로 건설되는 철도는 <지하 건설>이 상수가 된다면 한국에서 철도 교통 확대는 불가능해진다.
소음이나 분진 문제 역시 전철화와 시설 현대화로 지속적으로 감소 하고 있다. 철도 지하화 공약의 심각한 문제는 한국 사회를 지독한 자동차 숭배 사회로 전환 시킨다는 것이다. 철도와는 비교할 수 없이 꼼꼼히 들어차 있는 도로 위 자동차가 만들어내는 소음과 분진, 대기오염에 대해 한국 사회는 너그럽기만 하다. 지상 철도가 사라지고 개발이 완료된 공간을 채울 자동차의 모습은 인간의 어리석음을 상징하는 장면이 될 것이다.
철도 지하화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재원에서 비롯된다. 60조를 이야기하기도 하고 80조를 이야기하기도 한다. 현재 정치권에서 내놓은 계획을 다 수행한다면 80조가 아니라 그 몇 배가 되는 비용이 추가로 소요될 수도 있다. 한국에서 진행됐던 수많은 인프라 사업은 초기 예측 사업비를 쉽게 초과했다. 사실 지하화 공약 수행을 위해 들어가는 비용이 얼마가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천문학적 비용이 묻지마 공약에 파묻혀 집행되는데 손실의 가능성은 그 어느 때보다 커지고 있다. 한국 사회는 이제 부동산 개발로 막대한 이익을 얻는 시대가 아니다. 막연하게 개발이익을 보고 투자에 나섰다가 실패한 사례는 차고 넘친다. 마천루가 즐비한 청사진을 내걸었던 용산개발 계획이 좌초되는 것을 보지 않았는가.
정치인들은 민간투자 유치로 국가의 부담을 최소화한다고 하지만 건설 자본은 천사들이 아니다. 재벌 건설사들은 사업성이 높은 곳에는 투자를 하겠다고 나설 것이다. 또 투자를 한곳에서는 당연하게 투자금 이상의 수익을 뽑아갈 것이다. 사업성이 없어 투자자가 나서지 않는 지역은 사업이 무한정 연기될 것이다. 결국 사업성에 따라 지역별 격차가 심하게 벌어질 수 있다. 사업 특성상 수 십 년에 걸쳐 진행될 철도지하화는 지역 계급지도를 선명하게 만드는 작업이 될 것이다.
진짜 심각한 문제는 지역 붕괴, 지방 소멸을 가속화 한다는 점이다. 철도지하화는 겉으로는 지방 대도시들을 포함하고 전국에 걸쳐 진행되는 것으로 되어 있다. 하지만 철도는 수도권을 중심으로 고밀도화 되어 있고 투자 성공 가능성도 서울을 중심으로 한 수도권에 있다. 철도지하화는 명실공히 대한민국을 서울민국이나 수도권민국으로 전환시키는 역사적 사건이 될 것이다. 광역급행전철 GTX가 고속으로 연결하고 지상 철도 지하화로 개발 드라이브가 걸리는 서울과 그 주변이 한국 사회의 모든 자원을 빨아들이는 블랙홀로 기능하게 된다.
지역균형발전이나 지속가능지방도시를 주장하며 철도지하화 공약을 내세우는 정치인들은 자신들이 대국민 사기극을 벌이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지방을 붕괴시키는 일에 나서고 있다. 더욱 코미디 같은 일은 온갖 사회적 재앙을 양산할 수 있는 철도지하화는 오늘도 고통속에 이어가는 출퇴근 길의 지옥철 문제는 조금도 해결할 수 없다는 점이다. "철도지하화"는 교통문제로 접근된 게 아니기 때문이다.
선거라는 공간에서 전 지구적 생존과 공동체의 가치 회복 같은 것은 바라지도 않는다. 욕망으로 이글거리는 용광로에서 무작위로 발산되는 공약들이 최소한 사회적 흉기가 되지 않기만을 바랄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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