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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앎에 관한 생물학적 대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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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앎에 관한 생물학적 대답

[프레시안 books] <자기생성과 인지 : 살아있음의 실현>

마뚜라나와 바렐라의 기념비적인 저작, <자기생성과 인지>가 한국어로 번역되어 출간됐다. 이 책은 1970년에 발행된 <인지생물학>과 1973년에 발행된 <자기생성과 인지>라는 2개의 논문을 수록하고 있다. 프리뷰로 초벌 번역부터 접했던 독자로서, 50년의 세월을 넘어 한국어로 출간된 이 책을 그저 고전으로 소개하기에는 아쉬움이 들어 서평을 작성할 결심을 했다.

<자기생성과 인지>는 삶과 앎이란 무엇인지에 대한 마뚜라나와 바렐라의 답이다. 언뜻 보기에 삶(살아있는 체계)과 앎(인지)은 완전히 동떨어진 주제로 보인다. 실제로 마뚜라나 이전에 두 질문은 완전히 다른 분과 학문에 속했다. 살아있는 체계에 대한 연구가 생물학의 주제라면, 인지는 철학, 인식론의 영역에서 다뤄지는 주제였다. 그러나 마뚜라나의 <인지생물학>은 '인지'라는 현상을 생물학의 주제로 끌어들였다.

마뚜라나는 기존 생물학이 의존하던 전제들을 떨쳐내기 위해, 전혀 다른 접근방식과 인식론을 도입해야 했다. 근대 과학의 관점에서 (인간의) '인지' 능력은 과학을 가능케 하는 토대이지 탐구의 대상이 아니었다. 따라서 마뚜라나 이전, 과학에서 '인지'라는 신비로운 생물학적 현상에 대한 탐구는 무의식적으로 회피되어 왔다.

인지를 생물학적 현상으로 이해하고자 하는 마뚜라나의 연구는 전인미답의 작업이었고, 이는 기술(記述)을 위한 언어의 부재라는 어려움을 수반했다. 때문에 마뚜라나는 기존 언어의 함정에 빠지지 않으면서도, 살아있는 체계와 인지를 분리하지 않고 기술할 수 있는 새로운 개념을 만들어야 했다. 결국 마뚜라나는 '자기생성'(Autopoiesis)을 창조한다. 자기생성은 생물학에 끈질기게 따라붙던 '목적론'과 '기능주의'를 배제하면서도, 살아있는 체계의 필요충분조건을 기술하는 개념이다.

마뚜라나와 바렐라의 저작은 삶과 앎이란 무엇인가라는 두 질문에 동시에 대답한다. 놀랍게도 그들이 도달한 결론은 살아있는 체계와 인지가 근본적으로 동일한 과정이라는 것이다. "살아있는 체계들은 인지적 체계들이며, 하나의 과정으로서의 살아있음은 인지의 과정이다." 즉, '살아있는 체계/인지의 과정' 자기생성적이고 자기준거적인 자율적이고 폐쇄적인 체계이자 과정이라는 것이다. 이들의 통찰은 그 자체로도 의미가 클 뿐 아니라, 다양한 분과에서 접목되어 현대적인 이론들의 경로를 추동했다. 따라서 서평자로서 강조하고 싶은 이 책의 현재적 의미는 정돈되고 간명한 결론으로서의 자기생성 개념만이 아니다.

이 저작은 마뚜라나와 바렐라가 연구를 수행하는 과정, (언어와 개념들을 정돈하고, 인식론을 뒤집고, 기존 연구를 재해석하며, 새로운 질문을 던지고, 그에 답하기 위해 추론을 전개하며, 결론을 도출하고, 연구의 확장 가능성과 윤리적 함의를 제시하는) 일련의 정교하고 모범적인 연구 과정, 그 자체를 담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마뚜라나와 바렐라가 도달한 결론은 살아있는 체계이자 인지적 체계인, 인간, 그리고 사회에 대한 통찰로 이어진다. 이 저작이 본격적인 생물학 저작임에도, 시스템이론, 사회학, 미디어연구, 과학학, 인식론, 심리학, 법학, 언어학 등 수많은 분과학문들을 횡단하며 연구자들을 매료시킨 것은 이 때문이다.

마뚜라나의 통찰에 따르면, 인간 존재는 생물학적으로 신경계를 갖추었을 뿐 아니라, 언어적-사회적 인지영역(체계) 내에서 발생하며, 인간은 사회적인 유기체로 개별적인 살아있음의 방식을 선택, 즉 자기생성한다. 이때 개별적인 인간의 자기생성은 명시적으로 혹은 암묵적으로 살아있음의 동반자로 타자를 수용하고 정당화하며, 사회체계를 구성하는 윤리적 선택이다. 이러한 선택을 통해서 인간은 사회에 구조적으로 연동되고, 사회체계를 승인한다. 한 인간은 가족, 정당, 종교, 국가 등 복수의 사회체계에 동시에 참여할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인간은 다양한 사회체계에 참여하는 자신을 메타 영역에서 재귀적으로 관찰함으로써, 모순을 찾아낼 수 있다. 따라서 사회체계에 속한 인간들은 관찰자가 될 때, 다른 윤리적 선택을 하는 기예의 작업을 수행할 수 있다.

마뚜라나는 생물학적-사회적-언어적 존재이자, 자기생성체계인 인간 존재라는 조건 그 자체에서 혁명의 가능성을 도출해낸다. 인간은 자율적이고 자기준거적이며 자기구축적인 폐쇄적 체계이기 때문에 개별적인 인간은 '자신만의 특유의 차원'을 획득한다. 때문에 인간은 특정한 사회체계에 완전히 구조 연동될 수 없고, 잠재적으로 반사회적이다. 만약 사회체계의 자기생성이 개별적인 인간의 자기생성을 가로막는 경우 이를 벗어나 다른 사회체계를 구성하고 유효화할 가능성, 즉 혁명의 가능성이 존재한다. "모든 종류의 사회는 생물학적으로 정당하지만, 모든 사회가 관찰자인 인간이 살고 싶은 체계로서 바람직한 것은 아니다."

연구가 수행된 지 50년이 지난 현재에도 이 저작이 만들어낸 울림과 파동은 여전히 유효하다. 마뚜라나가 창안안 자기생성 개념은 생물학의 영역을 넘어 여러 학문분과로 퍼지고 접목되었는데, 지구 시스템에 대한 이론, 사회체계에 대한 이론, 사이버네틱스 등은 특히나 현재적인 의의를 지닌다. 지구시스템은 화석연료 체제와 자본주의로 정향된 인류의 자기생성 방식으로 인해 막대하게 변형되어, 지구시스템 자체의 복원력을 상실하게 되는 임계점 돌파를 앞두고 있다. 기후 위기가 코앞에 닥쳐오는 현시점에도, 글로벌 자본주의는 다소간의 변형을 겪으면서, 여전히 멈추지 않고 작동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우리가 살아가는 한국사회는 특히 극단적인 저출생이라는 사회체계 위기의 징후를 마주하고 있다.

한국사회는 관찰자인 인간이 살고 싶은 체계로서 바람직한가? 왜 이런 지경에서도 한국이란 사회체계는 요지부동일까? 기후위기와 저출생이라는 체계의 환경과 자기생성을 심각하게 위협하는 사태에도 불구하고 큰 변형 없이 작동하는 현재의 사회체계 속에서 개별적인 인간들의 자기생성은 위기에 처해있음이 분명해 보인다. 전지구적으로 영향력을 발휘하는 테크놀로지 기업들은 온갖 물질들을 사회체계에 통합하는 동시에 기후위기를 가속하면서, 유례없는 IT/미디어 환경을 구축하고 인공지능을 현실화하고 있다. 우리가 지금 마주하는 다종다양한 현재적인 현상들을 관찰하고자 하는 이에게, 마뚜라나와 바렐라의 저작은 여전히 빛을 잃지 않은 통찰을 제공할 것이다.

▲<자기생성과 인지 : 살아있음의 실현>(움베르또 R. 마뚜라나, 프란시스코 J. 바렐라 지음, 정현주 옮김)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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