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도 과거로 돌려놓고 말겠다는 기세로 시간이 질주하고 있고 어느덧 12월이다. 다가올 총선의 소용돌이에 파묻힐 국회이기에 12월 회기를 놓치지 않으려는 사람들의 노력도 뜨겁다. 그중에서도 국토부는 12월 5일, 끝날때까지 끝난 것이 아니다라는 것을 보여주고야 말겠다는 듯이 철도산업법의 한 조항을 바꾸기 위해 힘을 쏟고 있다. 국토부 관료들의 집념 하나는 인정을 해줘야 할 듯하다.
철도산업법은 철도민영화를 추진하던 국토부가 2004년 민영화 추진이 막히자 대안으로 철도의 운영과 시설을 분리하는 상하분리 정책을 구현하는 과정 끝에 만들어진 법이다. 이후 시설은 국가철도공단(당시 철도시설공단)이, 운영은 한국철도공사가 맡게 되었다. 이 분리과정에서 애매한 분야가 등장했다.
시설을 담당하는 철도공단이 소유하거나 건설한 철도 노선을 철도 공사가 시설사용료를 내고 열차를 운영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열차가 달리는 시설은 수시로 점검을 하고 보수도 해야 한다. 그럼 이 영역은 누가 책임져야 하는가의 문제가 떠올랐다. 상하분리를 통해 언젠가 민영화의 새 세상을 열고자 했던 국토부나 몸집은 크면 클수록 좋다는 국가철도공단은 유지보수까지 철도공단이 책임져야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수많은 철도 전문가들의 의견을 들은 끝에 당시 노무현 정부가 내린 최종 판단은 유지보수는 철도공사가 맡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야 철도안전이 보장된다는 이유였다.
이렇게 해서 철도산업법 38조는 국토교통부장관은 이 법에 따른 권한의 일부를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바에 따라 특별시장·광역시장·도지사·특별자치도지사 또는 지방교통관서의 장에 위임하거나 관계 행정기관·국가철도공단·철도공사·정부출연연구기관에게 위탁할 수 있다. 다만, 철도시설유지보수 시행업무는 철도공사에 위탁한다. 라고 맨 뒤에 특별한 단서를 붙여 철도시설유지보수 업무를 철도공사에 위탁하게 된다.
국토부와 국가철도공단, 일부 민주당의원은 12월이 가기 전에 위 38조의 단서조항을 없애기 위해 혼신의 힘을 쏟고 있다. 20년 전 논쟁이 부활한 것이다. 일부 언론 매체에서는 자극적인 헤드라인을 단 기사로 국토부와 국가철도공단의 주장을 부각시키고 있다.
<철도공단 "철산법 개정안 상정돼 논의 계속돼야…안전 가치 중요">, <탈선사고만 벌써 3번인데…코레일 독점 시설 유지보수 설마 그대로?>, <노조 반대에 백기인가… 안전성 논란 '철도 관제 이관' 물거품 위기>
기사제목을 보면 국가철도공단은 철도안전에 진심이고 사고 뭉치 철도 공사는 유지보수를 독점하고 있는 독불장군인 것처럼 보인다. 노조의 반대에 정부가 무릎을 꿇는 것처럼 호도하기까지 한다. 역대 정부는 철도노조가 아무리 반대해도 관료들이 입안한 정책을 관철시켜 왔다. 국토부와 일부 언론들은 독점이란 말이 갖는 반사회적 어감 때문에 당의정처럼 독점의 굴레를 씌우는데 시장독점과 자연독점의 정치경제학적 이해부터 다시 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독점이 문제면 파트너에 대한 배타적 독점권을 행사하는 결혼제도부터 타파하자고 주장하던지. 참고로 세계 최초로 철도를 운행한 조지 스티븐슨은 열차와 선로의 관계는 남편과 아내와 같다고 했다.
잦은 사고가 문제라면 최근 몇 년간 독일, 미국 등 세계 주요 철도 운행국가의 사고 종류나 횟수 등과 비교해 봐야한다. 국토부와 일부 언론의 잣대를 들이대면 세계 곳곳에서 철도의 구조를 격변시켜야 하는 대 개혁이 일어나야 한다. 한국철도는 철도안전을 위해 더 노력해야 하지만 국토부와 그 영향 아래 놓인 언론이 주장하는 것 보다는 안정적인 철도 운행을 하고 있다.
국토부는 철도사고가 나면 원인에 대한 심층분석 보다는 철도공사 임직원의 기강해이로 몰아붙이거나 사고를 빌미로 자신들이 추진 하는 정책을 정당화하는 일을 반복해왔다. 탈선사고만 벌써 3번째이면 이 세 번의 탈선사고가 주는 교훈부터 찾아야 한다. 우리 뇌리에 깊이 박혀 있는 강릉 KTX탈선사고는 국가철도공단의 시공 잘못이 원인이었고 국가철도공단과 철도공사의 유기적 협력 부족 때문에 발생했다.
안전은 철학의 문제이기도 하고 시스템의 구조적 문제이기 하며 그 사회와 문화의 문제이기도 하다. 안전 전문가들은 상시 운영시스템에서 관리와 책임의 일원화가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내가 사는 집의 어디에 문제가 있는지는 집을 지은 자보다 살고 있는 내가 더 잘알고 있듯이 시설에서 발생하는 문제는 그 시설을 운영하는 운영자가 가장 잘 알게 되어있다. 매일 선로 위를 운행하는 기관사는 선로의 이상을 가장 빨리 알 수 있고 역 시설을 점검하는 역무원도 마찬가지다. 문제의 발견 → 보고 → 조치의 단순한 단계는 일원화된 조직이 갖고 있는 장점이다.
2007년 경의선 가좌역 선로붕괴사고는 이원화된 조직이 갖는 한계를 잘 보여줬다. 붕괴 징후가 사전에 여러 번 보고되었으나 이원화된 조직체계는 조치까지 닫기 전에 사고가 먼저 왔다. 문제를 발견하고 보고한 뒤 다른 기관에 공식 접수를 하고 접수를 받은 기관이 실제 문제가 있는지 확인하는 동안, 또는 사고의 심각성을 무시하는 동안 사고의 싹은 줄기와 열매로 커져 간다.
그렇다고 일원적 구조가 완벽한 것은 아니다. 내부 문제나 부정, 비리에 대해 은폐나 왜곡이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이를 방지하기 위한 감시 시스템도 필요하다. 단 이 같은 문제를 빌미로 일원적 구조를 해체하는 것은 안전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더 큰 사회적 비용을 지불하게 된다.
그런데 왜 국토부와 철도공단은 20년 묵은 논쟁을 새로 단장해 그 무엇보다 중요한 가치인 것처럼 실현하고자 하는가? 그 동안 세상이 변했기 때문이다. 뭔가 이상하지만 수서 고속철도 회사도 출범당했다. 수도권 중심의 광역철도 노선은 더욱 확대되고 있다. GTX노선도 앞 다투어 건설되고 있다.
법 개정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런 수많은 신선 노선들에 대해서도 한국철도공사가 유지보수를 하는 게 맞냐는 것이었다. 일리 있는 주장이다. 독립된 폐구조 노선을 가진 철도시설은 그 운영자가 유지보수를 하면 된다. 두 회사가 공유하는 선로에 대해서는 양측이 협의하여 합리적 방향을 찾으면 된다. 운영과 유지보수가 일원적 구조 속에 안전을 확보하는 길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국토부나 국가철도공단의 철도산업법 38조 폐기 시도에는 다른 밑장 빼기 꼼수가 들어있다. 바로 철도공사의 유지보수권을 완전박탈하는 것이다. 한국철도공사가 운영하는 경부,호남,전라,장항선 등 모든 노선에 대해 유지보수권을 행사하겠다는 것이다. 국토부는 지난 수 십년간 철도공사의 역할과 기능을 축소하는 것에 심혈을 기울였다. 독점이니 공룡이니 수식어를 동원해 무능 적자 기업 철도공사 만들기에 여념이 없었다. 국가철도공단은 철도공사의 유지보수권 확보를 통해 덩치를 불리고 한국철도에서 철도공사를 뛰어넘는 철도 대표기관이 되고자 꿈꾸고 있다.
정작 중요한 것은 이제부터다. 독일 철도운수노조(EVG)에서 운수정책을 연구하고 있는 마티아스 피퍼트(Matthias Pippert)와 국제업무를 담당하고 있는 졸란타 스칼스카(Jolanta Skalska)는 운영사에서 유지보수업무를 분리하는 것은 결국 민영화를 위하 디딤돌을 놓은 것이라고 말했다.
설사 민영화는 아직 먼 이야기라고 하더라도 철도공사의 유지보수권 박탈은 철도 유지보수시장의 대규모 외주화를 이끌어내게 된다. 이제 철도 유지보수 공사 현장에서도 하청의 하청의 하청의 하청회사들이 벌이는 지옥의 사투를 보게 될지도 모른다. 누군가는 퇴직 후에도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 누군가는 돈더미에 앉겠지만 현장의 노동자들과 철도를 이용하는 시민들은 그만큼 위험에 노출될 수밖에 없다.
이원화된 시스템에서 문제가 발생해도 책임은 사라진다. 운영사는 유지보수 회사에게 유지보수 회사는 운영사나 하청회사에 책임을 넘기며 물고 늘어진다. 책임 공방 속에 이태원 참사처럼 책임자 없는 희생자만 양산될 수 있다. 민영화된 영국철도에서, 세계 곳곳의 철도 참사 현장에서, 대한민국 건설현장에서 보아온 모습들이다.
안전 때문에 만든 철도산업법 38조를 안전이란 이름으로 바꿔치기하려는 사람들의 당당함이 무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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